소설리스트

달고나-2화 (3/18)

2

일어났을 때 방 안엔 싸구려 향수 냄새가 진동했다. 눈도 채 뜨지 못하고 기듯이 문가로 갔다. 닫힌 문을 열어 환기하고야 비로소 너끈히 숨 쉴 수 있었다.

급하게 나갔는지 길녀의 화장대가 엉망이었다. 망할 년, 나지막이 중얼거리곤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길게 하품하며 회장대 앞에 쪼그리고 앉는다. 아무렇게나 내버려진 분첩이며 로션, 크림 따위의 뚜껑을 익숙하게 돌려 닫았다.

그 김에 거울을 봤다. 라면을 먹는 게 아니었는데. 사방으로 뻗친 머리카락이며, 퉁퉁 부은 얼굴이 가관이다.

“누구래.”

이쪽저쪽 돌려보다가 그대로 발라당 누웠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 문밖을 내다봤다. 해가 뉘엿뉘엿한 게, 슬슬 채비하고 나가봐야 할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당장 몸을 일으키진 못했다. 어진지 계속 늘어져 있고만 싶었다.

하루만 농땡이 피울까. 저 자신과 타협을 시도해본다. 오늘 할 일이야 내일 몰아서 하면 되지. 받아야 할 돈도 두 배로 걷으면 그만.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이불로 굴러 들어간다.

그대로 엎드려 잠드는가 싶었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몸을 발딱 일으켰다. 세상만사가 그렇게 계산대로만 되면 애초에 일수란 걸 찍을 치들도 없을 거였다.

수돗가로 가서 세수부터 했다. 냉수찜질에 흐리멍덩하던 두 눈이 비로소 탁 트인다 머리를 감으면서는 목과 겨드랑이 밑까지 샅샅이 닦았다. 거의 자라지 않은 수염도 반질반질하게 깎아둔다.

옷장에는 현란한 무늬의 셔츠가 죽 걸려 있었다. 그중 회색 기하학무늬가 총총히 박한 검정 셔츠를 꺼내 몸에 대 본다. 재킷을 걸친다면 그럭저럭 무난할 의상이었다. 그럼에도 거울에 비친 창수의 얼굴은 못내 못마땅 하기만 했다.

“칙칙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셔츠를 제자리에 걸어둔다. 새로 연 가게에서 적극적인 추천을 받아 산 것이건만, 여태 한 번도 못 입었다. 아무래도 주인장 입담에 낚인 것 같다.

한참 옷장과 실랑이하다 겨우 하나 낙점했다. 팔을 집어넣으니 맨몸에 미끄러지듯 달라붙는다. 흰 바탕에 검은 용과 붉은 용이 서로 엉겨 똬리를 틀고 있었다. 앞발에 쥔 금색 여의주가 포인트였다. 이쪽저쪽 몸을 돌려가며 샅샅이 살펴본다.

“그래. 이 정도는 돼야지.”

거울 속 자신을 보는 창수의 얼굴이 더없이 흐뭇해졌다.

콧노래 부르며 젖은 머리를 말렸다 반복된 탈색에 머리카락이 부스스하게 부풀어 올랐다. 쯧, 혀를 차며 화장대에 놓인 포마드를 집는다. 뚜껑을 슬슬 돌려 열 땐 저절로 휘파람이 나왔다. 내용물을 한 움큼 집어내 푸석푸석한 머리에 펴 발랐다. 한 올 허투루 삐져나오지 않도록 거푸 쓸어 넘겨 고정한다. 완성된 헤어스타일이 못내 만족스러웠다 연신 거울에 비춰 보고 쓸어보고 하고야 방을 나선다.

구두는 언제든 신고 나갈 수 있도록 매끌매끌하게 닦여 있었다. 그새 내려앉은 먼지를 후후 불어 털곤 발을 끼워 넣는다. 수돗가에서 끈적거리는 손을 닦았다. 빨랫줄에 늘 걸려 있는 수건에다 물기를 제거한 뒤엔 마무리 하듯 금붙이를 꺼내 낀다. 알이 큰 반지를 손가락에 꾹 돌려 넣는 것으로 나갈 채비가 마무리됐다. 오빠 다녀온다, 들을 사람도 없건만 크게 외치면서 대문을 열었다.

일과는 단조로운 편이다. 해 질 녘에 나와서 집 근처 상가부터 시장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아무 국밥집에나 들어가 끼니를 해결하면 저녁 여덟 시 즈음이 된다. 시장 상인들의 하루 장사가 마무리될 시간이다. 부지런히 계산기를 두드리는 그들에게서 정해진 일수를 받고, 그날 분의 도장을 찍어준 뒤 내일을 기약하며 물러난다.

일이 마무리되면 항구 앞 유흥가로 향했다. 만용이 운영하는 물집과 주점을 돌보는 것도 창수의 일이다. 말이 좋아 관리지, 큰 소란이 없으면 딱히 할 것도 없었다. 새벽까지 가게들을 순찰하고 동이 들 무렵엔 인근 포구로 나선다. 그때부터 아침나절까지 어부들을 기다렸다가 남은 일수 장부를 완성하는 셈이다 받은 돈을 사무실로 가져가 정산하면 비로소 창수의 하루도 끝이 난다.

눈을 뜨고 감을 때까지 종일 섬 곳곳을 바지런히 돌아다녔다. 인접한 네 개의 섬이 다리로 연결돼 묶이면서 오가야 할 거리도 그만큼 늘어났다. 가을걷이 때나, 간자미 철에는 하루가 부족할 때도 있다. 그래도 그 덕에 사람 구실이나마 하고 사니 별다른 불평은 없다.

물이 맑아, 10년 전부터 해양공원이 조성된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거대규모의 관광복합단지가 될 거라고 했다. 그 직후 많은 사람이 오갔지만 진행은 여전히 지지부진하다.

본디 큰 공사가 시작되면 가장 먼저 생기는 것이 유흥업소였다. 만용의 용궁 나이트도 공원 개발계획과 역시를 함께했다. 간간이 뜨내기손님만 있을 뿐, 손꼽아 기대하는 '대박’이 실현되지 않는다는 점도 닮았다.

출근하는 창수를 보고 문지기가 고개를 꾸벅했다.

“형님 나오십니까.”

휘황찬란한 조명에 그의 은색 조끼가 유난히 번쩍거린다. 창수의 눈살이 지레 찌푸려졌다.

“아오, 내 눈알. 갈치가 형님 하자고 하겠다, 새끼야.”

“갈아입을까요?”

“사내놈이 줏대 없긴. 멀리서도 졸라 눈에 잘 띄고 좋네.”

“역시 그렇죠?”

새것임에 분명한 조끼를 쓸어보며 속없는 웃는다. 좋댄다, 이죽거리다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윤삼이는?”

“안에 계십니다.”

“이거나 먹어라.”

몇 개 집어먹다 만 풀빵 봉투를 떠안겨주곤 안으로 들어갔다.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부터가 쿵쿵 울렸다. 시끄러운 음향에 고막이 찢어질 듯했다.

현란한 조명은 비트에 맞춰 내부 곳곳을 훑는다. 무대에선 색색의 등산복을 입은 중년 남녀가 홍에 취해 몸을 흔들고 있었다. 그나마 단체관광객이라도 있어 안 망하고 버틴다.

천천히 가게를 둘러보고 있는데, 창수를 발견한 윤삼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허리를 반으로 접으며 인사한다.

“일찍 나오셨네요, 형님.”

“가게는 어때. 별문제 없지?”

“손님이 너무 없는 게 문제죠. 오늘도 관광버스 들어왔대서 눈곱도 못 떼고 명함부터 돌렸다니까요. 무슨 못 올 데 보듯이 안 간다고 얼마나 뻗대던지. 결국 처 올 거면서 겁나 얌전떨더라고요. 누가 서울 샌님들 아니랄까봐. 근데 또 체면치레하는 건 좋아하잖아요, 그 치들이.”

슬쩍 몸을 기울이더니 양주도 두 병이나 나갔다니까요. 한다. 뿌듯해 하는 유함의 엉덩이를 툭 걷어찼다.

“그럼 아가리 닥치고 존나 감사합니다, 해야지. 손님은 뭐라 그랬나?”

“왕이다.”

“그치. 양주 팔아주는 손님은?”

“신이죠, 예.”

“알아 모시라고, 새끼야.”

재차 윤삼의 엉덩이를 걷어차곤 출연자 대기실로 향했다.

제 이름으로 판 한 번 내본 적 없는 무명들이라도 에로사항은 있기 마련이다. 화려한 꽃엔 벌레가 꼬인다고, 시골 바닥이라 해서 속 시커먼 놈이 없는 것도 아니다 도리어 미지의 대상을 향한 끝 간 데 없는 환상이 훨씬 위험한 법이니까. 커피 한 잔에 설탕처럼 딸려가는 값싼 웃음을 허락으로 받아들이는 치들도 많다. 대개가 여자를 몰라서 그렇다. 그런 문제를 접수 하고 해결하는 것도 창수의 몫이었다.

윤삼은 계속 창수를 따르면서 물었다.

“그런데 형님. 오늘 어디서 무슨 잔치 한다고 하던데. 거기는 안 가보실 겁니까?”

“의사 온다던 거기? 남의 잔치에 내가 뭐하러.”

대기실 문을 벌컥 열었다. 안에서 옷을 갈아입던 출연자들이 노크 좀 하라며 온갖 욕지거리를 퍼붓는다. 그러면서도 벗은 몸을 가리거나 문 뒤로 도망 놓는 이는 좀처럼 없었다. 창수는 내부를 죽 한 번 훑어보며 안 나온 년 없지,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윤삼의 설득이 이어진다. 두 눈알은 필사 적으로 천장에 고정한 채였다.

“그래도 우리 용궁 나이트가 그동안 지역 발전에 이바지해온 바가 있잖습니까. 거국적으로다가 형님이 대표로 딱 참석해서 자리를 빛내주셔야 저희 업소 체면도 살고, 주민 화합도 되고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요새 똥파리가 손님입네 하고 드나드는데요. 이참에 고객 유치도 좀 하고. 이런 게 바로 소 먹고 장어 먹고. 뭐 그런 거죠, 네.”

그럴싸한 표현은 다 가져다 붙인다. 돌아서던 칭수의 걸음이 우뚝 멎었다.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에 실실 쪼개던 윤삼이 급격히 쪼그라진다. 창수가 홱 돌아봤을 땐 지레 움찔하며 두 팔로 머리부터 막았다.

그러나 예상했던 손찌검은 날아오지 않았다. 윤삼이 쭈글쭈글 구겨졌던 얼굴을 슬그머니 폈다. 그 앞에서 창수는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가?”

“그럼요, 형님. 지금쯤 다들 왜 안 오시나 궁금해하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저랑 같이 가서 한잔 딱.”

잔 젖히는 시늉을 하며 캬, 한다. 표정은 전에 없던 환희에 젖었다. 그 꼴을 멀뚱히 보던 창수가 기어이 윤삼의 이마를 졌다.

“넌 가게 봐야지, 새끼야.”

“왐마, 야박하게 혼자 가시게요?”

“대표로다가 혼자 다녀오련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라.”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성큼성큼 복도를 걸어갔다 윤삼은 그런 창수의 등에 대고 연신 먹을 거 싸오세요, 저 잊으시면 안 됩니다, 했다. 들었는지 어쨌는지, 창수는 귓구멍을 한 번 후비적거리더니 훌쩍 사라졌을 뿐이었다.

마을 어귀에서부터 달짝지근한 술 냄새가 났다. 공기도 유난히 들썩들썩했다. 사위가 어두컴컴해도 길 잃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술판이 벌어진 자리만은 밤을 잊고 훤한 까닭이었다.

잔치긴 잔치인가보다. 얼마간 코빼기도 안 보이던 치부터 바빠서 궁둥이 붙일 시간 없다던 치까지, 웬만한 인사들이 죄 모여 있었다. 벌써 얼큰하게 취한 박 씨는 시멘트 바닥을 이불 삼아 누웠다. 흥청거리며 노래를 부르다가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평소엔 숫기라곤 없는 양반인데, 술만 들어가면 사람이 영 달라진다. 그의 마누라가 전을 부치다 말고 달려와 등짝을 흠씬 휘갈겼다. 내가 못 살아, 한탄하며 박 씨를 일으키던 그녀가 이내 창수를 발견한다.

“창수 총각 왔어? 이리 앉아.”

박 씨가 비켜난 자리에 흔쾌히 궁둥이를 붙였다.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던 사내들이 일제히 그를 반겼다. 누가 쓰던 것인지 모를 사발을 손에 쥐여 주더니 막걸리를 콸콸 들이붓는다. 마셔, 마셔, 거듭된 성화에 목부터 축였다. 단밤 냄새를 풍기며 달콤한 막걸리가 꾸덕꾸덕하게 목으로 흘러든다. 같이 앉은 사내들은 그 모습을 약 먹는 자식 보듯 했다. 사발을 탁 내려놓자마자 두툼한 수육 한 점까지 마저 건넨다.

식긴 했지만 포슬포슬하게 잘 삶아졌다.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났다. 입에 남은 잔털을 일일이 골라내야 했지만. 혀에 붙은 털을 집어 빼내는데, 맞은편에 있던 김 씨가 안고 있던 화분을 턱짓했다.

“그런데 그건 웬 거야?”

“아, 이거? 그냥, 뭐. 새 사람 온다는데 빈손으로 올 수도 없고.”

공연한 민망함에 귓등을 긁적였다. 그러자 다른 사내들도 창수의 화분을 유심히 본다. 그러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박장대소했다.

“암만 그래도 그렇지, 이 무식한 놈아. 축 개업이 뭐나. 축 개업이.”

“이거 아니에요?”

의문스레 분홍색 리본을 봤다. 아무리 봐도 뭐가 잘못됐는지 모르겠다. 사내들은 에라, 하면서도 정작 누구 하나 시원하게 설명해주진 않았다 창수는 재차 고개를 갸웃갸웃하다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잔치 분위기는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었는데, 정작 주인공이 보이질 않는다. 암만 살펴봐도 다 아는 얼굴뿐이었다.

“그런데 서울에서 왔다는 양반은?”

“잠깐 화장실 가셨어”

확실히 맞은편에 빈자리 하나가 눈에 띄었다. 착각인지, 사발 옆에 수저가 가지런하게도 놓였다. 난잡해진 상 위에서 유독 그 자리만 떨어진 것 하나 없이 깨끗했다. 어떤 놈이야. 단순한 호기심이 싹텄을 무렵, 김 씨가 뜻밖에 암시를 던진다.

“근데 서울 사내들은 다 그런가?”

“그러게. “

이 씨 역시 의뭉스런 웃음을 지었다. 눈알만 굴리던 창수는 슬쩍 상 가까이 몸을 붙였다.

“왜요, 뭐가 어떤데?”

“이 동네 계집들 다 뒤집어지게 생겼어야. 농 아니고, 마누라 단속 단단히 해야겠던데?”

“피부도 계집같이 뽀얗고 반질반질한 게, 말투까지 사근사근하고. 계집 여럿 홀리게 생겼더라고, 아주.”

“봐봐라, 저저. 일 끝나면 도망가기 바쁘던 새침데기들도 여태 안 가고 있잖아.”

이 씨가 가리키는 쪽을 힐금 돌아봤다. 과연. 읍사무소의 젊은 여직원들이 한 자리 자지하고 있었다. 시종 얼굴에 분을 두드려가며 진득하게도 앉았다. 식사는 얼추 끝난 것 같고, 상 위의 술은 따지도 않은 상태였다.

하는 짓이라곤 이따금 뭔가를 찾아 주변을 힐금거리는 게 전부다. 그러다 그중 하나와 얼결에 눈이 마주쳤다. 창수가 찍 입술을 찢으며 웃자 고개를 획 돌려 버린다.

낄낄거리며 창수 역시 눈길을 거뒀다.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작자기에 저 도도한 것들까지 한 번 비벼보려는 걸까. 일단 의사라는 게 크게 작용 했겠지만.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바로 눈앞에 길게 뻗은 다리가 보였다. 실례했습니다, 하는 소리가 정수리 위로 떨어진다. 어째서인지 고개를 들어볼 생각도 못 했다.

“좀 오래 걸렸네요. 갑자기 전화가 와서.”

듣던 대로 사근사근한 어조다. 목소리도 거슬릴 것 하나 없이 깔끔했다.

“아이고, 선생님. 똥통에 빠진 거 아닌가 그랬네.”

“막상 와 보니까 아니다 싶어서 냅다 도망간 줄 알았어.”

그러셨어요, 하는 음성에 약간의 웃음기가 묻어났다 공기가 덩달아 살랑거리는 것 같았다

“어서 앉아요, 앉아.”

사내들이 서둘러 남자를 앉혔다. 비로소 줄곧 고정돼 있던 시야 안으로 남자의 얼굴이 들어왔다. 부드럽게 웃던 남자가 눈을 들어 맞은편의 창수를 응시한다. 멀뚱히 보던 창수의 두 눈이 돌연 커졌다.

“……어”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실상은 반응이랄 것도 없었다. 헤벌어진 입에서 헛소리가 샌 것뿐이니.

“인사해라. 이번에 보건지소로 오신 선생님이셔.”

김 씨가 멍청하게 앉은 창수를 부추겼다. 그럼에도 그는 꼼짝하지 않았다. 아니, 사고가 중단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멍하니 보는데, 그가 생글 눈을 휘며 웃었다. 그러곤 제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

“안녕하세요? 공재윤이라고 합니다.”

곧게 뻗어진 손이 깨끗했다. 알맞게 잘린 손톱의 모양도 일정하다. 그 세세한 것들이 눈에 들어오는데도 정작 귓가는 멍하기만 했다.

이게 대체.

“거참. 선생님 손 민망하시겠네.”

옆에 앉은 이 씨가 칭수의 손을 이끌어 악수하게 했다. 의외로 큰 손이 포근하게 창수의 것을 감싼다. 정녕 계집의 속살처럼 부드러웠다. 멀거니 잡힌 손을 보는데, 약간의 압박이 느껴졌다. 홱 재윤을 봤다. 눈이 마주침에 그가 다시 생긋거리며 반가워요, 한다.

돌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불에 댄 듯 손을 내빼며 자리에서 발딱 일어났다. 같은 상과 앉아 있던 사내들이 일제히 고개를 든다.

“왜. 벌써 가게?”

“아니…… 그냥 안 오려다가 잠깐 들른 거라. 가게도 돌아봐야 하고.”

“그럼 한 잔만 더 하고 가. 선생님이랑 건배는 해야지.”

“다음에요.”

경황없는 얼굴로 돌아선다. 그대로 나오려다가 그건 두고 가야지, 하는 소리에 안고 있던 회분이 생각났다. 그것을 냅다 상 위에 내려놓고 성큼성큼 마당을 나선다. 뒤에서 사내들이 실없다며 야유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다가도 저희끼리 술을 따르며 금세 왁자지껄해진다.

창수는 뭔가에 쫓기듯 계속해서 종종걸음을 놓았다. 잔칫집에서 상당히 멀어졌을 즈음에야 우뚝 멈춰 선다. 뭔가를 생각하다가 획 뒤돌아봤다. 이제 잔칫집은 밝은 불빛 정도만 보일 뿐이었다. 그쪽을 한참 주시하다가 별안간 뒤통수를 벅벅 긁어댔다.

“맞는데…… 진짜 맞는데.”

묘하게 차오르는 답답함이 짜증으로 변했다. 같은 자리를 몇 번이고 왔다 갔다 하며 떠나온 곳을 돌아봤다.

얼굴도, 말투도, 이름까지도. 다른 사람일 리가 없다.

그런데 왜.

- 안녕하세요? 공재윤이라고 합니다.

정말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럴 수 있나? 그럴 수도, 있는 건가.

이름 모를 초조함과 당혹감에 혼란스럽던 마음이 급격히 수그러든다. 멀어진 곳을 한 번 보다가 천천히 돌아섰다 얼굴은 잔뜩 시무룩해졌다. 걸음걸이가 전에 없이 질척거린다.

느릿느릿 떨어지던 걸음은 그러나, 얼마 못 가 다시 멎었다.

가서 확인해볼까? 답답한 것보다 백번 낫지.

홧김에 방향을 튼다. 그러나 척척 거침없이 떨어지던 두 발은 조금씩 추진력을 잃고 멈춰 섰다. 뭔가가 다리를 집아끄는 듯 더는 내디딜 수가 없었다.

휴대폰 벨 소리를 인식한 건 얼마가 더 지나서였다.

화장대 위로 검은 봉지가 툭 던져진다. 번진 눈 밑을 닦던 길녀가 거울로 창수의 움직임을 좇았다. 평소라면 네 기저귀는 직접 사 쓰라며 기어이 한마디 했을 텐데, 어쩐지 조용하다.

창수는 말없이 소파로 가더니 벌러덩 누워버릴 따름이었다. 아예 상체를 비틀어 그를 돌아봤다.

두 눈엔 의아함이 가득 고였다. 사람이 빤히 보는 데도 이렇다 할 반응이 없다. 못 느끼는 건지. 무시하는 건지.

“뭔데.”

“뭐가.”

“어디 아프냐?”

“아프긴.”

“그럼 밖에서 무슨 일 있었어? 잔치하는 데 갔다 왔다며.

“일은 무슨.”

연신 심드렁한 대꾸만 돌아온다. 대가리 돌아가는 소리가 다 들리는데도 아니란다. 없는 귀까지 축 처진 것 같다 그냥 돌아앉으려다가도 무시해 넘기기가 어려웠다. 평소엔 속이라곤 없는 것처럼 방방 떠다니는 주제에.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다.

“뭐야. 만용이가 또 시비 걸든?”

“아나. 그런 거.”

“그럼 대체 뭐냐고! 그것 좀 심부름시켰다고 새롭게 지랄해 보는 거야? 우울 터지는 거 보고 미안함이나 된통 느껴봐라, 그런 거냐고?”

이젠 아예 주둥이까지 싸 다문다.

“아, 말하기 싫음 꺼져. 등신아.”

눈에나 띄지 말던가. 예고 없이 터져서 기분도 뭣 같은데. 있는 대로 미간을 찌푸리며, 검은 봉지를 헤졌다. 일반형. 세 글자를 확인하자마자 순간적으로 체온이 증발하는 것 같았다. 눈을 감으며 고개를 젖힌다. 그러지 않으면 뒷목에서 기어이 뭔가가 끊어질 것 같았다. 숨을 삼키고 다시 봐도 없던 날개가 돋칠 리 없다.

“망할. 날개 붙은 거로 사오라니까 더럽게 못 알아듣네. 까막눈이야? 애꾸냐고, 지가.”

“……길녀야.”

부르는 소리에 다시금 창수를 돌아본다. 얼굴에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짜증이 팽배해 있었다 그 낯을 못 본 덕일 거다. 멀거니 천장을 보며 시종 느긋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건.

“내 친구 얘긴데 말이야. 그 새끼가 좆에 털도 안 날 만큼 어렸을 때 가깝게 지내던 불알친구가 있거든? 살던 데가 워낙 좁은 동네라 다른 또래가 더 있었던 것도 아니고. 뭣 모르는 사람들이 둘이 형제나 사촌 같은 거냐, 물어볼 만큼 친했었는데…….”

길녀는 팔짱을 낀 재 잠자코 하는 말을 들었다. 미간 주름은 여전했지만, 터질 것 같던 얼굴도 그새 좀 가라앉았다.

“그 친구가 뜬금없이 서울로 가게 된 거야. 그 뒤로 이래저래 하다 보니까 왕래도 못 하게 되고 연락도 끊기고. 그냥 어디서 제 밥그릇 잘 챙기고 살겠거니 여기고 지냈다나 봐.”

“애쓴다.”

“진짠데. ”

“그랬는데?”

“근데 되게 어이없게 만나버린 거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데서, 진짜 대박 뜬금없이.”

얘기하는 동안 서서히 상체를 일으키고 앉는다. 동그랗게 뜨인 두 눈에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목도한 당혹감과 얼마쯤의 환희가 뒤섞여 있다. 의식없이 들어 올린 양손도 어떻게 이런 대단한 일이 있을 수 있느냐, 말하는 것 같았다.

길녀는 지레 김빠진 표정이 됐다. 난 또 뭐라고. 중얼거리며 담배를 꺼내 입에 문다.

“그럼 불알친구 만나고 오는 길이었어?”

“아니. 나 말고 내 친구 얘기라니까?”

“지랄. 니가 친구가 어딨냐?”

길녀의 도발에 분연히 일어났다. 하지만 친구랍시고 들먹일 이름이 당최 생각나지 않았다. 끙끙거리자 길녀가 얘기나 마저 해, 했다. 그래, 친구가 있고 없고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

복기하니 힘이 빠진다. 금세 시무룩해지는 창수의 낯을 보니 대강 상황을 알 것 같았다. 길녀는 손가락을 튕겨 담뱃재를 떨어뜨리곤 은근히 짐작해 물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널 몰라봐?”

“와, 미친. 너 진짜 돗자리 깔아라. 빈말 아냐.”

“너무 뻔해서 모르는 게 등신일 것 같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혀를 찼다. 재차 담배를 한숨 깊이 빨아들인다.

두 눈으론 앞에 선 창수를 찬찬히 훑어봤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다시 얼굴 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문 모를 표정으로 길녀의 시선을 좇다 보니 곧 눈이 마주쳤다. 반드시 해야 하는 것도 아니건만, 창수는 고른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하찮게 보던 길녀가 견적 나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불알친구 놈, 신수가 훤했지?”

“응. 뭐…… 예전부터 예쁘긴 했었는데.”

“뭐야, 여자였어? 그 년 지금도 예쁘든?”

“아니, 그게…… 잠깐 봐서 제대로 못 보긴 했지만. 낯짝은 예전 그대로인 듯? 한눈에 알아봤으니까.”

“미친놈이, 실실 쪼개긴. 무시당하고도 좋댄다.”

“어어, 무시하진 않았어. 인사도 했다고. 악수 같은 거.”

“옆에 보는 눈 있었지?”

“있기야 했지.”

“그 년 여기 눌러앉겠다고 온 거 아닐 테고?”

아마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길녀가 짧게 혀를 찼다.

“간단하네. 니 새끼 꼬라지 좀 봐라 아는 척하고 싶겠나.”

“내가 뭐 어때서.”

미간을 좁히며 발끈했다.

“자기야 거울은 보고 다니지?”

길녀는 딱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창수를 화장대 앞에 세웠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 헤어스타일도 오늘따라 더 마음에 들고, 셔츠도 신중하게 골랐다. 어디 자랑할 정도는 아니지만, 얼굴도 이만하면 남자답게 잘생기지 않았나.

“멋지기만 하고만.”

어이없는 결론에 길녀가 이 화상아, 하며 등을 때렸다.

“누가 봐도 양아치라고 쓰여 있잖아.”

“그게 뭐. 아닌 것도 아닌데.

“그래, 그러니까.”

창수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뜬다. 길녀로선 더 설명해볼 여력이 없었다.

슬슬 무대에도 나가봐야 할 시간이다. 괜히 창수의 등짝을 한 번 더 갈기곤 대기실을 나섰다.

찌릿찌릿한 등을 슬슬 문지르며 닫히는 문을 지켜봤다. 그러다 거울 속에 비진 제 모습을 의문스레 응시한다.

백창수는 건달이다.

거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당장 창수 본인부터도. 평소 행동거지가 어떻고, 성격이 어떻고를 떠나서 하는 일이 그렇다. 그동안 그런 저 자신을 포장해 보려고 애쓴 적은 없다. 그저 할 일이 있다는 것에 만족하며 살아왔을 뿐이다.

많이 놀랐을까.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만남에. 창수 자신이 여전히 이곳에 머물고 있을 거라곤, 생각조차 안 한 건가.

그렇더라도.

“아닌데.”

창수는 마뜩잖은 얼굴로 뒷덜미를 긁적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예상외의 모습이라 당황할 수는 있다. 그 때문에 두 사람의 지난 인연을 남들에게 고백하기가 부끄러웠을 수도.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창수가 아는 한 재윤은 그럴 위인이 아니었다. 차라리 지극한 우연으로 이름과 생김새가 비슷한 사람이라면 모를까.

◈◈◈

간밤엔 잠을 설쳤다. 해가 떨어지면 곯아떨어지는 게 일과였는데, 밤새 속이 둥실거려 그럴 수가 없었다. 눈알이야 조금 뻐근했지만, 그런 것쯤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동이 트자마자 발딱 일어나 앉았다. 그러곤 머리맡에 놔둔 가방부터 둘러멨다. 본인의 생일도, 소풍날도 아니었는데 그랬다. 새벽같이 밭일을 마치고 돌아온 할머니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우리 잠 두꺼비가 벌써 일어나 있고.

- 할머니. 나 빨리 밥.

머릿수건을 풀기도 전에 성화였다.

종일 산으로. 바다로 가서 뛰노는 게 일이었다. 그러다보니 곤히 잠자리에 들면 아침 늦게까지 일어나지 못했다. 선생님이 친히 집까지 찾아와 눈도 못 뜬 제자를 깨워 기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랬던 녀석이 새벽같이 조급증을 내는 이유를, 할머니라고 모르진 않았다. 그녀는 소리 없이 웃으며 흙 묻은 바지를 탁탁 털었다.

- 세수부터 해야지, 인석아.

- 아이, 시간 없단 말이야.

- 학교 가려면 아직 멀었구만 시간이 없기는.

쯧쯧 혀를 차다가 어린 손자를 돌아본다.

- 어이구, 부뚜막 생쥐가 형님이라 부르겠네. 그래 꾀죄죄하게 하고 있으면 그 애가 친구 하자고 하겠어?

어린 손자는 곧장 거울 앞으로 달려갔다. 거울 가장자리를 따라 먼지가 눌어붙어 있었다. 당최 사용하지 않아 그렇다. 그곳에 난생 들이댄 적 없 는 낯을 비춰본다. 얼룩덜룩한 얼굴을 손등으로 마구 문질렀다. 그래서야 탄 피부가 뽀얘질 리는 없었다.

잔뜩 못마땅한 표정을 짓다가 수돗가로 나갔다. 찌그러진 대야에 찬물을 가득 퍼 담고는 연방 얼굴에 끼얹었다. 비누칠도 특별히 두 번이나 했다. 여전히 책가방을 등에 멘 채였다.

뚝딱 아침 밥상이 차려졌다. 주로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것들이 찬으로 올랐다. 어린 손자는 평소 달려들어 먹던 꼬막 무침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연신 엉덩이를 들썩였다. 체할까 김국에 밥을 말아주자 그것을 입안에 콸콸 붓듯 하곤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 녀석아 꼭꼭 씹어서 다 먹고 가.

- 다 먹었어. 할머니 나 갔다 올게.

허둥지둥 집을 나섰다. 한달음에 학교로 달려갔다. 등에서 연신 들썩이는 가방에는 서툰 글씨로 '백창수'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의식이 깨었을 때부터 그곳에 살았다. 외지 사람들은 이름조차 모르는, 작은 섬이었다. 가족이라곤 할머니와 간간이 찾아오는 아버지뿐이었는데, 젖을 뗄 때부터 그랬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친모에 대한 기억은 좀처럼 없었다.

도시에 우후죽순으로 공장이 들어서면서 젊은 사람은 모두 일자리를 찾아 떠났다. 아버지도 비슷했다. 남들처럼 도시가 아닌 먼 바다를 떠돌았지만. 마을에는 점차 노인들만 남게 돼, 아버지가 어릴 적엔 학생들로 복작였다던 학교도 분교로 전락했다. 그마저 재학생들이 모두 졸업하면서 남은 건 창수뿐이었다. 할머니 외엔 변변한 친인척도 없어 뭍이나 가까운 큰 섬에서 유학할 사정도 되지 못했다.

방학을 즐겁게 맞았던 기억이 없다. 방학이면 선생님도 집으로 돌아가버리고, 정말 외톨이가 된다. 새벽일을 마치고 들어온 할머니는 몇 시간이고 누워 있기만 했다. 이따금 조개와 해초를 캐오겠다며 진종일 나가 있기도 했다.

어린 창수에게는 막막한 시간이었다. 혼자서 대장도 됐다가 졸병도 됐다가, 이 놀이에 지치면 저 놀이로. 죽이고 또 죽여도 시간은 느리게만 흘러 갔다. 그럴 때마다 막막한 바다를 보며 그 너머를 상상했다. 친모가 있을 곳이었다. 창수 자신과 같은 아이들이 잔뜩 있을 세상이었다.

그곳에서 전학생이 온다. 나이도 창수와 같다고 했다. 선생님이 처음 그 얘기를 꺼냈을 때, 돌연 두 귀에서 파도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친구. 한번도 가져본 적 없는 존재였다. 어떻게 생겼을까. 무슨 놀이를 가장 좋아하려나. 생각만으로도 어린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그날 그때부터 하루하루 손꼽아가며 그를 기다렸다.

분교의 좁다란 운동장을 빠르게 가로질렀다. 오늘따라 신발이 잘 벗겨지질 않았다. 다리를 탈탈 털어 신발을 떨치곤 실내화마저 구겨 신었다. 발랑 뒤집힌 운동화는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어졌다.

나무로 된 바닥이 유난히 미끄러웠다. 전학생을 맞이한답시고 왁스 청소를 한 탓이었다.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것처럼 위태롭게 교실에 다다랐다.

닫힌 문 앞에 섰을 땐 어깨가 쉼 없이 들썩거렸다. 심호흡할 새도 없이 문을 발각 젖혀 연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시야가 탁 트였다. 가쁜 숨소리가 귓가에서 어지럽게 터졌다. 황망한 눈길로 교실 곳곳을 훑어봤다. 하지만 교실은 마지막 모습 그대로, 변한 것이 없었다.

눈썹이 슬그머니 아래로 내려온다. 멍한 얼굴이 되어 책상 앞으로 갔다. 고리에 가방을 걸고 가만히 앉았다. 옆에는 창고에서 발굴해 깨끗이 닦아 놨던 빈 책상이 가만히 놓여 있었다.

기다림이 이어졌다. 맞은편 벽에 걸린 시계를 보며 초침을 좇는다. 그렇게 노려본다고 더 빨리 달아날 리도 없건만 그랬다. 애꿎은 바닥을 걷어차는 발길에서 전에 없던 초조함이 느껴졌다. 얼굴은 더없이 시무룩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기다림을 견디지 못한 창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고민하다가 숨 가쁘게 달려왔던 길을 거슬러 간다.

낚시꾼들을 상대로 민박하는 집이라고 했다. 그런 곳이라면 포구 앞 한곳뿐이다. 기껏 올라왔던 길을 돌아가는데도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땀이 송골송골 맺혔을지언정 표정 역시 조금도 찌푸려지지 않았다. 되레 터질 듯한 기대감이 솟구쳐 올랐다.

한참을 내려가서 포구 앞에 도작했다. 아직 집 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발끝을 들고 야트막한 담벼락 너머를 들여다본다. 줄에 매어놓은 황구가 창수를 보곤 왈왈 짖어대기 시작했다. 쉬, 하면서 검지를 입술에 대 보지만 짖는 소리는 한층 커지기만 했다.

- 망할 개새끼. 아침부터 왜 이렇게 짖어대.

안에서 짜증 어린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더불어 문가에 언뜻 인영이 비치기 시작했다. 슬그머니 담벼락 뒤로 몸을 숨겼다. 그 직후 문 열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종전의 여자 목소리가 한층 선명해졌다.

- 얜 또 왜 말을 안 들어. 얼른 나와. 오늘부터 학교 가는 거라니까?

카랑카랑한 음성에 신경질이 가득했다. 잠자코 기다리다가 다시 담벼락 안쪽을 훔쳐봤다 살집 있는 여자의 손에 한 아이가 끌려 나왔다. 피부가 뽀얗고 몸집은 왜소했다. 한사코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언뜻 봐선 머리 짧은 계집앤가 싶었다.

뭔가에 골이 난 건지, 아이는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여자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학교 안 갈 거야, 빽 소리를 질렀다. 얌전히 서 있는 아이를 채근하듯 흔들기도 했다.

가방끈만 쥐고 있던 이이가 대문 앞으로 질질 끌려온다. 도망갈 곳을 찾아 주변을 홱홱 돌아봤다. 하지만 탁 트인 길가에 몸 숨길 자리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문밖으로 나온 여자가 허둥지둥하는 창수를 발견했다. 짜증 가득하던 얼굴에 약간의 여유가 생긴다.

- 거기 너. 장수라고 했나?

- 창순데요.

- 어쨌든 요 위에 청화분교 다니지?

껌벅거리며 고개만 끄덕했다.

- 그럼 얘 좀 데리고 가. 선생님한테 전학생이라고 말씀드리면 아실 거야. 오늘은 아줌마가 바빠서 학교까지 못 데려다주겠다.

얘랑 가, 하면서 아이의 등을 툭 밀쳐낸다. 아이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제 발끝만 내려다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 부탁 좀 하자?

여자는 톡 쏘듯 말하고는 대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담벼락 너머에서 그만 짖어, 하며 개를 혼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문 닫히는 소음과 함께 그녀의 기척이 사라졌다.

길 위엔 이제 아이와 창수, 단둘만 남았다. 가까이서 보니 키는 생각만큼 작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그렇지, 실상 창수 자신보다 더 큰 것도 같다. 곱상하게 생겼지만 사내아이라는 것도 알겠다. 같이 축구는 할 수 있을까. 깡마른 아이의 몸을 구석구석 살펴보며 앞선 고민을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아이는 등대처럼 멀거니 서 있기만 했다. 계집애들처럼 수줍음이라도 타는 건가.

머리를 긁적이다가 슬그머니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아이의 고개가 슬쩍 들렸다. 내민 손을 빤히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가방끈을 쥔 손은 여전히 꼼짝하질 않았다. 민망해진 손을 연신 꼬물거려봤지만 돌아오는 반응이라곤 없었다.

곤란한 마음이 들었다. 녀석도 분명히 오늘을 기대하고 있었을 거라 생각했다. 만나면 틀림없이 기뻐할 거라고, 당장 함께 놀 일만 떠올렸더랬다.

십 년 인생에 처음 쓰디쓴 좌절을 맛봤다.

끙 소리를 내면서 버텼다. 아이의 눈길은 아직 창수의 손에 고정돼 있었다. 그 틈을 타 별안간 상체를 기울였다. 그러곤 고개를 비틀어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창수의 느닷없는 행동에 아이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반걸음 정도 주춤거리며 물러나기도 했다.

창수의 얼굴도 덩달아 멍해졌다.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 정말, 달랐다.

서로 빤히 보다가 창수가 먼저 입술을 쭉 찢었다.

- 나는 창수야. 백창수. 청화분교 3학년이고 너랑 나이도 같아.

아이는 여전히 대꾸가 없었다. 창수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은 걸까. 쌔무룩해지려던 마음을 애써 추스른다.

- 기다렸어.

고백하듯 던진 말엔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다. 어렵게 닿은 눈길이 떨어져 나갈세라 서둘러 한마디 더 보탰다.

- 계속, 계속 기다렸어. 너 온다고 그래서.

가자, 하며 손을 뻗어 녀석의 팔을 잡았다. 주춤하던 녀석은 이내 창수가 이끄는 대로 따라왔다. 파란 보리 가득한 밭을 거쳐, 따닥따닥 따개비처럼 붙은 집들을 지나 분교로 향했다. 교문에 서면 짙푸른 바다가 눈앞으로 끝도 없이 펼쳐졌다.

계단을 오르던 길엔 잠시 손이 미끄러졌다. 아, 하며 돌아보는데 녀석이 스스로 놓인 손을 잡았다. 그러면서 재차 눈이 마주쳤다.

다시 봐도 예쁘장한 얼굴이었다. 여태 그렇게 생긴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이런 녀석과 친구가 되는 걸까. 그걸 이 애가 허락해주려나.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할 즈음이었다.

- 김재윤.

- 내 이름 그거라고.

- 우와, 이름도 멋지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 같아.

함박웃음을 지었다. 속에서 제멋대로 터진 웃음이었다. 재윤이, 김재윤, 하면서 녀석의 이름을 노래하듯 계속 중얼거렸다. 빤히 지켜보던 녀석이 슬쩍 고개를 숙였다. 웃음이 전염된 모양이었다. 녀석의 입술이 야트막한 곡선을 그렸다.

틈림없이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과는 예상보다 바쁘게 돌아갔다. 주민들의 걸음이 아침부터 이어진 까닭이다. 환자는 대개 지병을 가진 노인들이었다. 진료실에 들어서면 고된 삶에 관절이며, 뼈마디가 남아나질 않았다며 하소연부터 쏟고 봤다. 실상 아이 달래듯 그들의 얘기를 들어주고, 약을 처방해주는 것 외에 할 수 있 일은 없었다.

환자들의 행렬은 오후 늦게부터 차츰 뜸해졌다. 본래 업무 종료시간 즈음하면 그렇다고 했다. 시골 사람들이라 해가 떨어지면 부랴부랴 잠자리에 들고 본단다. 읍내라고 사정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저녁 여덟 시 무렵이면 거의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았다.

밤늦게까지 운영하는 기사 식당을 찾아 끼니를 때웠다. 가로등마저 띄엄띄엄해, 손전등을 상시 챙겨 다녀야 했다.

보건지소는 2충짜리 단색 건물이었다. 그중 1충은 진료소로, 2충은 관사로 사용된다. 화장실과 작은 부엌이 딸린 관사는 그리 넓진 않지만, 혼자 생활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 창문을 열면 멀리 포구가 보이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한적한 길을 걸어 불 꺼진 보건지소로 막 들어서던 참이었다. 언뜻 붉게 타는 작은 점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공기 중에 알싸한 냄새도 섞여 난다.

조금 더 다가가자 상대도 기척을 느끼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전등을 비춰봤다. 금붙이가 불빛에 반사되며 반짝거렸다. 좀 더 위로 더듬어 올라가자 누군가 손으로 눈가를 가리며 고개를 비튼다. 창수였다.

손전등을 땅 쪽으로 돌렸다. 눈부심이 가시자 창수도 팔을 내리며 시선을 맞춰온다. 애매한 눈빛에 얼마쯤의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어딘가 모르게 심통이 난 듯도 한. 의아하게 보던 재윤이 먼저 씩 웃었다.

“오랜만이다”

부드러운 어조였다. 무엇이 그리 뜻밖이었는지, 창수의 얼굴이 놀라 굳는다. 그러다가도 헛기침하며 쓱 눈길을 돌렸다.

힐금 본 재윤은 여전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마지못해서, 혹은 예의상 짓는 웃음이 아니었다. 늘 사람 보는 눈은 더럽게 없다고, 길녀에게 잔소리를 듣지만 재윤에 관해서는 창수 자신이 더 잘 안다. 자신을 발견하고 풀어지는 얼굴을 보니 마음이 대책 없이 흐물흐물해졌다. 창수는 당혹감에 애꿎은 볼만 거푸 긁어댔다.

“지나가다가 잠깐 들러봤어. 그냥 인사나 할까 해서.”

재윤의 눈동자가 소리 없이 아래로 구른다. 신빙성이라곤 없게도 바닥엔 무수한 담배꽁초가 굴러다녔다. 다시 창수의 얼굴로 올라오는 눈길이 어딘가 모르게 나른했다.

“안 그래도 궁금했었는데.”

흡사 떫은 감이라도 삼킨 듯했다. 혀가 이유도 없이 안으로 말려서 말이 더디게 흘러나왔다. 병신, 뭘 또 이렇게 긴장하고 난리야. 속으로 저 자신에게 새된 욕지거리를 뱉는다.

담배를 초조하게 빨아들였다. 짧아진 꽁초를 생각 없이 쥐다가 움찔 놀라 손을 턴다 불에 닿은 손가락이 홧홧했다. 젠장, 중얼거리며 손을 살피는데 언뜻 낯선 냄새가 스쳤다. 얼굴에 그림자가 진다 싶더니 어느새 재윤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이것저것.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또 지금은 뭐하면서 사는지.”

그는 창수의 손을 자연스럽게 이끌어갔다. 그러곤 데인 부위를 빤히 들여다봤다. 기분 좋은 향기가 한층 짙어졌다. 시원하면서도 어딘가 절제적인. 흔히 맡던 씨구려 스킨 냄새가 아니었다. 골똘하게 살피는 모습을 멍하니 보는데, 덜컥 재윤이 눈을 맞춰왔다. 창수는 저도 모르게 힉, 숨을 삼키며 어깨를 굳혔다.

“일단 들어갈까?”

시종 평온한 태도를 유지한다.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다정하게 권하는데, 사양해 볼 엄두는 내지도 못했다.

잠긴 문을 열던 재윤이 잠시만, 하더니 상체를 숙였다. 그의 얼굴이 가까워짐에 공연히 두 다리가 긴장됐다. 하지만 그는 그저 바닥의 꽁초를 주울 뿐이었다. 그의 손을 가득 채운 꽁초를 보니 자못 민망해졌다.

그냥 따라가려다 바닥을 샅샅이 둘러본다. 재윤이 미처 다 줍지 못한 꽁초가 보였다. 지부 가리듯 황망히 그것을 주머니에 넣었다.

내부는 여느 보건소 풍경과 다를 게 없었다. 그럼에도 어색하게 주위를 둘러봤다. 먼저 들어갔던 재윤은 등 돌린 채 약품 정리대를 뒤적이고 있었다. 못 본 사이 어깨가 더 벌어졌다. 유난히 곧은 등도 널찍했다. 그간 창수 자신도 부지런히 컸다고 생각했는데, 그를 따라잡기엔 역부족이었나 보다. 내내 고만고만했던 키는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역전당하기 시작했다.

책상 위는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다. 책장 속 책의 배열에도 일정한 규칙이 있는 듯했다. 무엇 하나 도드라져 거슬리질 않는다. 옷걸이에 걸린 흰 가운에선 한참 눈을 뗄 수 없었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틀림없이 잘 어울릴 거란 확신이 들었다.

“줘 봐”

머리맡에서 재윤의 음성이 울린다. 화들짝 놀라서 보자, 그가 또 코앞에 서 있었다. 맥락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입을 헤벌렸다.

“어, 뭐를?”

“손 말이야.”

“아니, 괜찮은데. 살짝 닿은 거뿐이라. ”

슬쩍 손을 감추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재윤이 거리를 도로 좁혀오며 손목을 붙들었다. 버티는 팔을 앞으로 끌어당기는 악력이 상상 이상이다.

대체 그 곱상한 얼굴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 건지.

데인 곳을 빤히 보던 재윤이 낮게 혀를 찼다. 다시 봐도 별것 아닌 상천데, 전문가가 보기엔 아닌가 보다. 하도 심각하게 들여다보니까 난처한 기분 마저 들었다. 진짜 괜찮은데. 창수가 중얼거리는 소리는 들리지도 않는 듯했다. 적당한 크기의 습윤 밴드를 붙여주며, 당부를 잊지 않는다.

“아무리 작은 상처라도 얕보면 안 돼. 그러다 큰코다쳐.”

불시에 보는 바람에 그만 눈 돌릴 타이밍을 놓쳤다. 너무 가깝다, 생각 했을 때 재윤이 눈을 휘며 웃었다. 알겠지? 어린아이를 어를 때에도 그런 어투를 시용하진 않을 것 같았다. 너무 오랜만이라서인지 면역이 안 됐다.

흠흠, 괜스레 목을 가다듬으며 잡힌 손을 빼냈다.

“커피?”

“됐어.”

“나는 한 잔 마실게.”

필요 없는 양해를 구하며 커피를 한 잔 탄다. 티스푼으로 컵을 젓는 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역시 하얗고 길다. 뼈대 자체는 전보다 굵어진 것 같았다. 당연한가. 10년도 더 지났으니.

“여긴 달라진 게 하나도 없더라. 사람들도 그렇고.”

불현듯 불거진 음성에 저만의 생각에서 빠져나온다. 그새 재윤은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유리에 반사돼 비치는 얼굴이 지나간 것들에 대한 감회에 젖었다. 물끄러미 응시하던 창수가 실없이 픽 웃었다.

“뭐, 바뀔 일이 있어야지. 벌어먹는 꼬락서니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는데. 니미. 개발을 하니, 마니 뜬소문만 무성해선 순진한 사람들한테 땅 뺏고 마음 뺏고. 나라에서 한다는 일이 하나같이 지랄 맞아.”

자신도 모르게 발끈하고 말았다. 낮은 웃음소리에 재윤을 봤다. 그의 눈가가 보다 부드럽게 풀어져 있었다.

“너도 여전하네.”

“나? 내가 뭐?”

“예나 지금이나 여길 참 좋아하잖아. 다들 못 떠나서 안달인 데를.”

“당연하지. 고향이니까.”

당연하다, 라.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착각일 수도 있었다. 기실 재윤의 입술에는 거의 움직임이 없었다. 의문스레 주시하자 도리어 왜 그러느냐는 눈을 한다.

“아니.”

재윤은 픽 웃더니 커피를 한 모금 머금었다. 재차 그의 흰 손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렇게 보고 있노라니 며칠 전, 그와 악수했던 게 떠올랐다. 왜 이곳까지 찾아왔는지도 덩달아 상기됐다.

창수는 뒷덜미를 긁적이다가 그런데 말이야, 하며 운을 뗐다.

“혹시 싫거나 귀찮은 거면 그냥 지금 말해주라.”

재윤이 멈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든다. 의아한 표정이 걸려 있었다. 그를 뚫어지게 마주하다가 슬쩍 눈길을 피했다.

“그, 앞으로 쌩까고 싶다거나.”

“미안.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그러니까 나랑 대면하는 게 불편하다든가, 찝찝하다든가…….”

한참을 기다려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역시 그랬던 건가. 옛 친구를 만난다는 게 마냥 반가운 일은 아닐 거다. 비단 당장 사회적 격차를 고려 하지 않더라도, 껄끄러우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

재윤은 여전히 가타부타 대꾸가 없었다. 길어지는 침묵에 힐금 그의 눈치를 살폈다. 어김없이 시선이 얽힌다. 가만히 탐색하는 눈빛에 괜히 주눅이 들었다. 왜, 하는데도 대답 없이 보기만 한다.

얼마나 지났을까. 내도록 굳어 있던 재윤의 얼굴이 어떤 깨달음에 허물어진다.

“혹시 전에 그 일 때문인가? 처음 보는 것처럼 굴어서?”

정곡을 찔렸다. 지레 뜨끔했지만 티 내지 않으려 애썼다.

“딱히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만.

목소리가 형편없이 쪼그라든다.

“아니면 그동안 연락을 안 해서 그렇다던가?”

재윤은 커피를 마저 한 모금 머금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꼭 우회적으로 놀림 받는 것 같았다. 그저 기분 탓일 수도 있다. 눈만 마주쳤다 하면 은근히 흘리는 그의 미소 때문에.

창수는 슬그머니 눈길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그건 나도 안 했으니까…….”

곧장 그치, 하는 대꾸가 돌아왔다. 잘못 들었나 싶어 재윤을 보자 그가 씩 웃으며 보다 분명하게 말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어.”

재윤은 대뜸 제 안경을 톡톡 두드려 보였다.

“이게 없으면 피사체가 또렷하게 맺히질 않거든. 오래 쓰고 있자면 머리가 아프고. 좌우 시력 차이가 심해서 그렇다나 봐. 그래서 주로 일할 때만 써. 집중해야 하니까. 이걸 안 썼더니 그날도 확신이 없더라고. 막연히 닮았다고만 생각했지. 와, 이렇게 비슷할 수도 있는 건가, 그랬어. 창수 네가 먼저 아는 척이라도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통성명하기도 전에 사라져 버리고.”

그가 부르는 제 이름이 왜 이렇게 어색한지 모르겠다. 스스로 제 이름을 말해도 그렇지는 않을 거였다.

확실히 그날 재윤은 안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 단순히 그래서였던 건가. 마땅히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목구멍까지 차고 넘치는데 혀가 꼬여서 뱉을 수 없는 느낌이었다. 속에서 몇 번씩 되새김질 된 말이 두서없이 터져 나왔다.

“그, 그야 나는 좀 당황했었고, 그런 데서 그렇게 뜬금없이 만나게 될거라곤 전혀 생각 못 했으니까!”

“이해해. 나도 그랬으니까. 뒤늦게 주변 분들한테 네 이름을 전해 듣고, 진짜 너였다는 걸 알고도 믿기지 않더라고.”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 출처도, 정체도 가늠할 수 없었다. 창수의 얼굴에 다시금 경계심이 어린다. 눈썹이 일자가 되면서 눈매에도 힘이 들어갔다. 그 모습을 의문스레 보던 재윤이 나직이 웃었다.

“왜. 아닐 거라고 생각해?”

“못 본 새에 의심이 많아졌구나.”

“아나. 네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겠지.”

슬며시 시선을 피하며 뒷목을 긁적였다. 얼굴 옆면에 재윤의 시선이 올곧게 닿아왔다. 딱히 거리낄 이유가 없는데도 그를 똑바로 마주 보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하는 소리가 들려온 건 얼마가 더 지나서였다.

“하나도 안 반가운 얼굴이네?”

그 직후 창수의 고개가 홱 들린다. 얼굴엔 당장에라도 터질 것 같은 당혹감이 서렸다. 그새 재윤은 곧은 눈썹을 살짝 늘어뜨리고 있었다. 실망감. 명백하게 떠오른 감정을 확인하자마자 머릿속에서 경광등이 울렸다. 그 여파로 어깨까지 움찔 떨렸다.

“그럴 리가. 절대로 그런 건 아니야. 반가워. 당연히 반갑지! 엄청 반갑다고! 이게 몇 년 만인데.”

“그래?”

고개를 쉼 없이 끄덕였다. 그럼에도 재윤은 의구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진짜! 진짜야. 아, 젠장. 이걸 어떻게 말해야 되지.”

곤란한 얼굴로 쩔쩔맨다. 머릿속이 삽시에 하얗게 변해버렸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끙끙거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때 얼굴 위로 불쑥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어, 하며 반사적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코앞까지 다가온 하얀 손이 뒷목을 감싸듯 붙드는 게 먼저였다. 달아나려던 몸이 부드럽게 끌어당겨진다. 그대로 재윤의 품에 와락 안겼다. 행위를 채 인식하기도 전에 콧속으 로 특유의 향기가 듬뿍 풍겨 들었다.

“……어, 어어?”

“다행이다.”

재윤은 숫제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정말 기쁜 소식을 접한 것처럼, 차분했던 음성이 더없이 살랑거렸다. 귓구멍이 다 근질근질한 느낌.

멍청한 얼굴로 안겨 있던 창수가 아하하, 하며 어줍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곤 의심 없이 재윤의 등을 토닥인다.

“응. 그렇다니까.”

금세 제 진심을 알아준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으로 시간이 만든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 거라고. 그쯤 되니 뭐가 그리 찝찝했는지도 잊어버렸다. 몸을 옥죄는 재윤의 팔에 부쩍 힘이 들어가는 것 같았지만, 그조차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저처럼 그 역시 재회에의 감격을 주체하지 못하는 거라 여기면서.

재윤이 돌아왔다. 당장은 그것이면 충분했다.

“발령받고도 설마 만날 수 있을 거라곤 기대 안 했는데.”

귓가에 나직이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몸을 끌어안은 두 팔의 조임도 한결 단단해졌다. 뜻밖의 자극에 심장이 미쳐 날뛰는 것 같았다. 쉼 없이 쿵쾅대는 통에 머리가 다 어지러웠다. 그 떨림이 재윤에게까지 전해질세라 슬며시 엉덩이를 내뺐다.

은근히 밀어내자 재윤도 미련 없이 떨어져 나간다. 얼굴에 만연한 미소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퇴근하던 길이야?”

“아니. 일하다가, 요 근처 지나가게 돼서.”

무심코 대꾸하다가도 슬쩍 눈치를 살폈다. 화려한 차림새로 보나 옆구리에 분신처럼 낀 가방으로 보나, 밤늦은 시간에 움직이는 것까지 하는 일이리는 건 더없이 명백해 보였다. 그럼에도 재윤의 낯은 변함없었다. 도리어 그렇게 보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싱긋 웃어 보이기도 했다.

“왜?”

“아나. 아무것도.”

“밥은?”

“안 먹었으면 차려주게?”

“그럴까?”

“됐어, 새끼야. 시간이 몇 신데. 진즉 먹었지.

키득거리며 담배 하나를 꺼냈다. 무심코 입에 물다가 아차, 했다. 그러고 보니 진료실에선 그 흔한 담배 냄새도 나질 않는다. 조금 전 얼싸안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예 안 피우는 건가.

생각하는 동안 재윤이 말없이 창가로 가서 창문을 살짝 열었다. 은근한 배려가 몸에 밴 것 같았다.

창수는 불을 붙이며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다 책장에 놓인 액자를 발견했다. 대학 졸업식 때 찍은 것 같았다. 학사 가운을 입은 재윤과 그의 친모가 서 있었다. 거의 이십여 년 전에 마지막으로 봤었는데, 어째 그때 보다도 젊어진 듯하다.

“네 어머니, 좋은 물주 물었나 보다?”

생각 없이 주절거리고 말았다. 깨달았을 땐 이미 뱉고 난 후였다. 습관이란 게 이렇다. 짜증스레 귓등을 긁적이며 재윤을 봤다. 그의 얼굴엔 이렇다 할 표정이 없었다 실수했다, 사과하려는데 그가 별안간 픽 웃었다.

“벌써 10년도 넘은 거 같은데. 서울에 도착하니까 난생처음 가보는 동네로 데려가더라고. 오늘내일하는 늙은이 주치의로 들어갔다더니, 그대로 들어앉은 모양이더라. 덕택에 좋은 백 생겼지.”

격 없는 언어구사에도 개의치 않는다. 도리어 얼마쯤은 동조하며 얄궂은 표정마저 지었다. 내내 조마조마하던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래서 졸지에 ‘공’가가 된 거야?”

재윤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어색해?” 하고 물었다. 고개를 저으며 담배를 한 모금 깊숙이 빨아들였다. 눈썹 끝이 슬며시 내려왔다가 내뱉는 숨에 제자리를 찾는다.

“공재윤이면 어떻고 김재윤이면 어떠나. 알맹이가 변하는 것도 아닌데. 근데 그렇게 좋은 백이 생겼는데, 어쩌다 이 먼 데까지 귀양 온 거야? 거기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어?”

“운이 정말 나빴나 보지. 아직 돈으로도 안 되는 게 있더라고.”

창수의 표정이 약간 허물어졌다. 짙은 담배 연기를 뿜어 그 체념 섞인 웃음을 가려본다.

“엔간히 나빴나 보네.”

여운 섞인 중얼거림에 재윤이 창수를 본다. 그 가만한 시선을, 담뱃불이 꺼질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급히 꽁초를 비벼 끈 창수는 씩 웃으며 재윤의 어깨를 쳤다.

“이럴 게 아니라 오랜만에 만났는데. 진하게 회포라도 풀어야지?”

“일하다 왔다며?”

“하루쯤 째도 돼. 내일 두 배로 하면 그만인걸. 어쩔까. 가게로 갈래?”

어린아이처럼, 잔뜩 신 난 표정이다. 생각만으로도 홍이 나는지 몸이 들썩들썩했다. 하지만 재윤은 난처한 웃음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왜. 바빠?”

“처음이라 신경 쓸 게 많네. 좀 피곤하기도 하고.”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눈썹이 축 처진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며 뒷덜미를 긁적이던 창수는 곧 제 가방을 뒤적였다. 그곳에서 여태 쓸 일 없던 명함을 발굴해낸다.

“그럼 언제 시내 나올 일 있으면 연락 줘. 내가 화끈하게 쏠 테니까.”

“그럴게.”

“간다.”

재윤은 팔짱을 낀 채 고개만 끄덕끄덕했다.

문으로 향하는 창수의 걸음이 어딘가 모르게 질척거린다. 재윤이라면 이제 한동안 이곳에 있을 덴데 왜 벌써 아쉬운 마음이 드는지 모르겠다. 애꿎은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두 다리를 재촉해본다.

막 문손잡이를 잡아챘을 때였다

“창수야.”

“응?”

부르는 소리에 고개가 획 돌아간다. 격한 반응에 놀라던 재윤이 곧 눈매를 풀며 웃었다.

“다시 만나서 기쁘다, 진짜.”

얼마간 멍하던 창수의 얼굴이 활짝 만개했다. 그는 큼직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어 보였다. 그러곤 더할 나위 없이 흡족한 낯으로 돌아섰다.

문이 닫힐 때까지, 내도록 문기를 주시하던 재윤은 곧이어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어둠 속으로 묻혀가는 창수의 뒷모습이 살랑살랑 기분 좋게 흔들린다. 흡사 콧노래라도 부르는 듯했다. 재윤은 그가 시야 밖으로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잠자코 자리를 지켰다. 그동안 얕게 머물던 미소는 한층 더 짙어졌다.

난데없는 흥얼거림이 들렸다. 술기운에 바람 소리를 착각했으려니 했다. 하지만 좀체 그 노랫소리는 잦아들지 않았다. 잇따라 누군가 하수구에 물을 쏟아 붓곤 쪽마루에 걸터앉는 기척까지 느껴졌다. 부스스 눈을 뜨자 불투명 유리 너머로 미끄러지는 그림자가 보였다. 종전의 콧노래는 좀 더 선명해졌다.

어떤 미친놈이 집을 잘못 찾아왔어.

신경질적으로 뇌까리곤 돌아눕는다. 하지만 이내 등 뒤에서 문이 드르륵 열렸다. 찬바람이 여지없이 스며들어왔다.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당겼다. 그 바람에 두 다리가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최대한 몸을 옹송그리며 잠을 청해본다 그새 미간엔 주름이 늘었다.

잠결에도 누군가 방 안을 돌아다니는 게 느껴졌다. 익숙한 움직임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흥얼거리는 콧노래는 영 적응이 안 된다. 꿈을 꾸는 건가 싶었을 즈음 벽걸이에 외투를 걸던 이가 돌아보는 것 같았다.

“옷 입고 자, 이년아. 이따 된통 고생 말고.”

역시 창수였다. 본능이 내내 쥐고 있던 일말의 긴장감마저 놓아버린다.

창수의 목소리를 인식하고도 길녀는 꼼짝하지 않았다. 피차 눈꺼풀 하나 들어 올릴 여력이 없었다. 문 앞에서부터 헝클어진 옷가지가 그녀의 동선을 짐작게 한다. 스타킹 한쪽은 채 벗다가 말았다. 창수는 쯧, 혀를 자면서 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오늘은 또 얼마나 처마신 거야. 미친년이, 죽는 날이라도 받아놨나.”

꿍얼꿍얼 불만을 토로하며 스타킹을 돌돌 말아 내렸다. 성가신지 길녀는 잠결에도 연신 발길질을 해댔다. 복부며, 가슴이며 할 것 없이 채이면서도 창수는 하던 일을 끝까지 마무리했다. 길녀가 목도리처럼 말고 있던 이불도 힘으로 빼앗아 발끝까지 잘 덮어주었다.

“이왕 서비스할 거면 화장까지 지워줘야지, 새끼야.”

한숨 돌리고 물러나려는데, 잠긴 목소리가 불거진다. 힐금 본 길녀는 여전히 두 눈을 감고 있었다.

“뭐야. 안 잤어?”

“잘 거야.”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슬며시 얼굴만 쳐든다. 여기저기 쓸린 화장은 오늘도 잔뜩 번져 있었다. 이쯤 되면 상습이지 싶다.

“망할 년.”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곤 클렌징크림을 가져온다. 길녀는 익숙하게 창수의 허벅지를 벴다. 어디에 눈알이 더 달린 건지 보지도 않고 능숙했다.

못마땅한 얼굴로 입맛을 다시다가 크림을 양껏 덜어냈다. 그것을 치덕치덕 펴 바르면서는 의미 없는 항의도 해본다.

“너 일부러 이러는 거지?”

“오늘은 진짜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어서 그래, 오빠.”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졌다. 술이라도 좀 덜 마시면 좋을 텐데. 하루를 그냥 넘기지 않는다. 잔소리는 번번이 짜증으로 돌려주는 인사라, 괜한 핀잔만 늘어놓았다.

“지 아쉬울 때만 오빠래.”

“그럼 저보다 네 살 어린 새끼한테 평소에도 오빠, 오빠 하리? 정신 나간 년이지, 그게.”

평소 성격이 나오는 걸 보니 잠은 다 깬 것 같았다. 그런데도 얼굴을 맡겨놓곤 꼼짝을 안 한다. 어디 하루 이틀 일인가. 평소라면 창수도 지지 않고 한마디 했을 테지만, 오늘만은 조용히 넘어간다. 길녀의 두 볼을 살살 문질러가며 화장 지우는 데 집중할 뿐이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술렁술렁 넘어가는 느낌마저 들었다.

이윽고 고요한 방 안에 창수의 허밍의 울려 퍼진다. 낯선 것은 멜로디가 아니었다. 잠자코 누워 있던 길녀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진다. 끝내는 닫고 있던 눈꺼풀마저 들어 올렸다.

역시. 아직 멀었는데, 하는 창수의 얼굴이 대책 없이 풀려 있었다. 술을 마신 것 같지는 않았다.

“뭐야, 기분 나쁘게?”

“뭐가, 또.”

“아까부터 왜 그렇게 실실 쪼개느냐고.”

“내가 언제.”

“그랬거든, 병신아?”

영 못 미더워하던 창수가 뭔가를 떠올리곤 비죽 웃는다. 실없이 실실거리는 꼴을 보니 심사가 뒤틀렸다.

“아, 뭔데.”

“별거 아니야.”

“별거 아니고 뭐. 복권이라도 당첨됐어?”

“아니, 친구 만났어.

제가 뱉고도 어색한 단어라 웃음이 났다. 내심 기대하던 길녀가 지레 김빠진 표정을 짓는다.

“어떤 년이야?”

“귓구멍 막혔나? 친구라니까? 나한테도 있다고, 친구쯤은.”

“어련하실까.”

“와, 얘가 사람 말을 못 믿네.”

길녀는 고개를 저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누가 안 믿는데? 어떤 년이기에 그렇게 좋아 죽느냐, 그 말이잖아.”

“여자 아니고 남잔데. ”

“지랄. 니 새끼 폐에 바람 잔뜩 찬 거 다 보이거든?”

창수가 애꿎은 제 옆구리를 쓸어내린다. 당최 길녀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창수 자신은 어제나 오늘이나 다를 게 없는데. 조금 들뜬 것처 럼 보였을까.

의아해하는 것도 잠시, 찍 입술을 찢으며 얄궂게 웃었다.

“뭐야. 우리 길녀 질투해?”

“뭐래. 신기해서 그런다.”

“에이, 질투 맞는 거 같은데? 우리 길녀 놔두고 죽긴 왜 죽어. 이리 와봐. 오빠가 좋아죽는 게 뭔지 제대로 알려줄게.”

“아, 꺼져. ”

장난스럽게 끌어안으려는 창수를 질색하며 밀어냈다. 팔꿈치에 마구 밀쳐지고, 발로 까이면서도 창수는 계속 실실거렸다. 길녀의 말마따나 뱃속 가득 간질간질한 바람이 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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