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고나-4화 (5/18)

4

청화도 행 정기선은 하루 6번 운항됐다. 예전에는 목포까지 꼬박 2시간이 걸렸는데, 섬과 섬 사이에 다리를 놓으면서 소요시간도 절반가량 줄었다. 물에 볼일이 있는 주민들은 대개 첫 배를 타고 나왔다가 마지막 배 시간에 맞춰 발길을 재촉했다. 오늘도 목포로 향하는 첫 배엔 각각 다른 목적을 지닌 사람들이 잔뜩 몸을 실었다.

배가 정박되자 짐을 이고 지며 우르르 하선하기 시작한다. 그 부산한 행렬에 어쩐지 창수도 섞여 있었다. 큼직한 보따리를 머리 위로 들고 배에서 내린 그는 곧장 인근의 택시 스탠드로 갔다. 발 빠른 지들이 이미 긴 줄을 만들고 있었다.

그들을 죄 지나쳐 가장 앞으로 나아갔다.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가니 여기저기서 볼멘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수선한 술렁임을 무시하며, 이제 막 차에 타려던 여자를 붙잡는다.

“미안, 언니. 먼저 좀 탈게.”

“뭐야, 정말?”

여자가 잡힌 손목을 홱 떨쳐내며 눈을 치떴다. 상대의 공격적인 반응에도 창수는 속없이 벙글거렸다.

“예쁜 언니가 봐 줘. 내가 많이 급해서 그래.”

여자는 분한 마음에 씨근거릴 뿐, 적극적으로 따지고 들진 못했다. 따가운 눈총을 보내던 인사들도 누구하나 나서지 않고 구시렁거릴 따름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화려한 창수의 외양에 지레 겁을 집어먹은 탓이었다.

창수는 보조석에 큼직한 보따리를 내려놓았다. 그러곤 선착장을 향해 큼직하게 손짓했다.

“얼른 이리 오셔. 자리 잡아놨어요.”

그쪽에서 나이 지긋한 노부부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어왔다. 줄지어 선 사람들 옆을 지날 랜 미안해요, 미안합니다, 하며 끊임없이 사과한다. 행여 민폐를 끼칠까, 불편한 다리를 짐처럼 끌며 서두르는 모양새였다.

이따금 오며 가며 안부를 묻던 양반들이었는데, 배를 기다리다 만났다. 도시에 사는 아들 집에 간다고 했다. 오랜만에 자식 볼 생각에 두 양반 모두 얼굴이 잔뜩 상기돼 있었다. 그간 말로만 들었지, 얼굴 한 번 본 적 없 아들이었다. 그는 바빠서 못 오고, 멀어서 못 오는 그 길이 어째 두 노인에게만은 꽃길이나 진배없어 보였다.

창수는 허리를 굽혀 뒷좌석에 앉은 노부부를 들여다봤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서울 도착하면 후덕해 보이는 아줌마 하나 붙잡고 꼭 아드님한테 전화 걸어 달라 그러시고.”

“밥이라도 한 끼 같이 먹고 가.”

“안 돼. 나도 차 시간 늦었어요. 형님, 잘 부탁해요.”

운전기사에게도 살뜰히 당부한 뒤에야 문을 닫는다. 두 노인을 태운 택시는 서서히 항구를 벗어났다. 그 모습을 내도록 지켜보다가 버스터미널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표를 끊고 타는 곳을 찾는데 뒤에서 누가 창수 아니냐, 했다. 돌아보자 윗마을 어촌계장이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습관처럼 악수를 청하는 그의 손을 두 손으로 잡으며 꾸벅했다.

“아이고, 형님. 잘 지내시죠?”

“으응. 나야 늘 안녕하지. 근데 어디 가는 길이야?”

“어. 할머니 본 지가 오래 돼서.”

금세 계장의 눈빛이 애잔해진다.

“그래 요즘은 좀 어떠시냐?”

“한결같죠, 뭐.”

“좋은 분인데 말년에 고생이 많으시네.”

“암만 생각해도 내가 속 썩여서 그런가 봐요.”

농담 반 진담 반 대꾸에 등을 때린다. 그러다가 아, 하면서 급격히 화제를 전환했다.

“보건소 선생이랑 친구라며?”

뜻밖의 대상이 언급됨에 창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응? 누가 그래요?”

“전에 밭일하다가 손에 가시가 박혀서 갔었거든. 서울서 왔다는 양반이 이 근방에 빠삭하더라고. 그래서 내 어떻게 아시느냐고 물어봤지. 아, 그랬더니 예서 살았다더라고. 청화분교 마지막 졸업생이라면서, 창수 너랑 같이 다녔다지 않겠어? 그 양반이 네 칭찬 말도 못하게 많이 하더라.”

“칭찬, 했다고?”

“그렇다니까. 인정 많고 순박한 사람이라고, 예전에 신세 많이 졌었다고 그러더만. 가만 듣고 있을 수 있나. 나도 같이 보탰지. 하는 일이 그래 그렇지, 진국인 친구라고.”

은근히 으스대던 어촌계장이 “어이구. 그렇게 좋아?” 하고 면박을 준다.

그도 그럴 게, 창수가 광대를 넘실거리며 비실비실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서 직접 들은 것도 아닌데, 왜 이리 낯부끄러운 건지 모르겠다.

역시 형님밖에 없다, 입바른 소리를 하다가 불현듯 시계를 봤다. 완전히 풀어졌던 얼굴이 금세 다급해진다.

“형님. 나 차 시간이 다 돼서.”

“어어, 그래. 얼른 가 봐.”

다음을 기약하며 서둘러 버스로 뛰어갔다. 마지막으로 그를 태운 차량이 서서히 터미널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빈자리에 쓰러지듯 앉았다. 그것 조금 뛰었다고 숨이 가빴다. 후우, 크게 날숨을 뱉으며 평정을 되찾는다.

그러다가 별안간 픽 웃음이 터졌다. 맞은편 사람이 눈총을 보내왔다. 슬쩍 창가로 고개를 돌리며 손등으로 입을 막았다. 그런데도 웃음은 계속 실실 새어 나왔다. 그마저도 겨우 삼켜본다. 얼굴에는 더할 나위 없는 뿌듯함이 걸렸다.

나주에 있는 병원까지는 고속버스로도 꼬박 한 시간이 걸렸다. 날이 많이 풀려서인지, 노인들은 휠체어에 앉아 햇볕을 쬐고 있었다. 창수는 비슷비슷한 모습들 속에서 할머니를 짖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내 익숙한 뒷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슬금슬금 다가가 어깨를 꼭 쥐었다. 회들짝 놀란 수간호사가 엄마야, 했다. 낄낄거리며 꾸벅하자, 벼르듯 쏘아보더니 기어이 등짝을 때린다.

“아휴, 애 떨어지겠네.”

“아직도 바깥양반이랑 회끈하신가 봐, 누님. 떨어질 애도 있고.”

“또, 또 트인 주둥이라고.”

“잘 지내셨죠? 어째 날로 더 고와지시는 거 같아.”

“고와지긴. 낼모레면 할머니 소리도 듣겠는데.”

그러면서 할머님은 저쪽에, 한다.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에 왜소한 체형의 노파가 보였다. 감기에 걸릴세라 털모자와 목도리로 중무장했다. 모두 일전에 창수가 사다 준 것들이었다.

성큼성큼 그녀에게 걸어갔다. 그러곤 휠체어를 붙잡아 당기며 그 앞에 쪼그리고 앉는다.

“할머니. 나 왔어. 어떻게, 잘 지내셨나?”

허공을 주시하던 눈동자가 천천히 굴러온다. 씩 웃는 창수를 빤히 보면 서도 눈빛은 공허하기 짝이 없었다.

“못 본 새에 더 쪼글쪼글해지셨네.”

조모를 만날 때마다 더한 수다쟁이가 된다. 중풍으로 쓰러진 후 잇따라 치매가 찾아왔다. 벌써 10년 가까이 된 일이었다. 그때 창수는 조모의 곁에 없었다. 그 죗값을 받는 거라고 생각한다. 조모가 끔찍이도 여기던 손자를 알아보지 못하게 된 건. 더는 그 흐리멍덩한 눈에서 창수를 향한 애틋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잘 지내요. 밥도 꼬박꼬박 챙겨 먹고, 어디 아픈 데도 없고.”

묻지도 않은 안부를 전하며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노파는 이따금 입을 오물거릴 뿐,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풍을 맞은 뒤로 말 한마디 하기도 버거워했더랬다. 제대로 대회를 나눠 본 게 언제였던지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했다.

주름진 손등을 엄지로 가만가만 쓸어보았다. 본디 깡말랐던 몸은 이제 한 번 안아보기 두려울 정도로 수척해졌다. 성가셨는지, 노파가 잡힌 손을 슬그머니 빼냈다. 감정 없이 창수를 담던 눈길도 다른 흥밋거리를 향한다. 계절이 무색할 정도로 쌀쌀하건만, 나비는 변함없이 제 일을 했다.

“오랜만에 단둘이 데이트나 할까?”

씁쓸한 마음을 추스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노파의 휠체어를 화단 옆으로 슬슬 밀었다. 기분 좋은 볕이 정수리를 데웠다. 잔뜩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이나마 나아지는 듯했다. 조모도 잠자코 휠체어에 앉아 간만의 여유를 만끽했다.

부모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창수를 지켜주던 울타리였다. 그것을 넘어 밖으로 나간 대가는 혹독했다. 이제 와 회한에 젖는들 없어지지도, 돌이켜지지도 않을 테지만. 가장 후회되는 건 창수 자신에 관한 조모의 마지막 기억이 그날, 그때 멈취져 있다는 것이었다.

“어디 불편한 덴 없어?”

“…….”

“행여나 아픈 데 있으면 참고 그러지 마요. 이제 나도 어른이니까, 투정부리고 싶으면 그러셔도 돼.

“…….”

“밥 좀 잘 잡숫지 그러셨어. 자꾸 마르니까 주름만 늘잖아.”

“…….”

“에구. 우리 할머니 더 늙으시기 전에 참한 색시 얻어서 떡두끼비 같은 증손자도 안겨드리고 그래야 되는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그저 그녀가 이렇게 버텨주고 있는 것만도 감사할 따름이었다.

한참을 걷다가 우뚝 멈춰 섰다. 마뜩잖았는지 조모가 흐응, 하며 어깨를 축 늘어뜨린다. 다시금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아 목도리를 새로 매만져주었다. 금세 발갛게 상기된 귀까지 잘 덮어주자, 서서히 눈을 맞춰온다. 그 눈을 빤히 보다가 고백하듯 중얼거렸다.

“있지. 할머니. 그 녀석이 왔어.

노파의 눈빛엔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 그럼에도 하던 말을 계속했다.

“재윤이. 할머니도 봤으면 좋아했을 텐데. 의사가 된 거 있지.”

“…….”

“할머니가 그 녀석 예뻐했었짆아. 그 자식도 제법 잘 따랐고 내친김에 오늘 같이 올까도 생각했는데, 그냥 생각만 했어.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그때 나란 놈은 어디에서 뭐 하고 있었는지 다 털어놔야 할 것 같아서.”

주절주절 늘어놓다 보니 얼굴이 서서히 침울해진다. 조모는 그런 손자를 의미 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창수는 제풀에 화들짝 놀랐다

“당연히 말해야지! 당연히 말할 거야. 조금 이따가.”

“…….”

“조금만 더 이따가 다 말할 거야.”

마지막 말은 거의 웅얼거림이나 다름없었다.

- 그 양반이 네 칭찬 말도 못하게 많이 하더라. 인정 많고 순박한 사람 이라고.

머리를 긁적이다가 재차 조모를 보며 헤실 웃었다. 씁쓸함이 가득 묻어나는 웃음이 었다.

“……역시 실망하겠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읏샤,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멈춰 있던 조모의 휠체어를 천천히 밀어나가기 시작했다. 다만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르지 않기만 바랄 뿐이다.

◈◈◈

- 결국 안 오셨어?

고개를 주억거리는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등교할 때부터 두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숨결 역시 계속해서 씩씩거렸다.

불과 하루 전만 해도 제 엄마가 온다며 기뻐하던 재윤이었다. 장난감도, 맛있는 것도 잔뜩 사 가지고 올 거라고 했다. 그 때문에 빨리 집에 가뵈야 한다며, 장수풍뎅이를 잡으러 가자는 창수의 제안도 물리쳤었다.

엄마가 있다는 것도, 그 엄마가 먼 데서 녀석을 보러 온다는 것도 창수로선 그저 부러운 일이었다. 간밤에는 할머니 품을 파고들어, 엄마에 대해 질문했다.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생김새였는지. 왜 한 번도 창수 자신을 보러 오지 않는지는 자마 묻지 못했다. 그것이 할머니를 속상하게 할 거란 걸 알았다.

그때까지 창수도 재윤의 어머니를 실제로 보진 못했다. 이야기로는 숱하게 들었지만. 서울에서 아픈 사람들을 돌보고 있다고 했다. 아버지와 이혼하면서 가족이 함께 살 수 없게 됐고, 어머니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만 친척에게 맡겨진 거란 얘기도 들었다. 고로 금세 어머니가 찾아와 다시 자신을 서울로 데려갈 거라며, 재윤은 늘 그녀를 기다리곤 했었다.

열 밤. 거기서 또다시 열 밤. 차일피일 미뤄지던 약속은 결국 그날도 지켜지지 않았다. 바쁜 일이 생겼다고 했다.

창수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만약 자신이라면 어떨까 생각했다. 아무리 숙제가 많아도, 참을 수 없이 졸음이 쏟아지거나 오줌보가 터질 거 같아도 할머니나 재윤이 자신을 보고 싶어 한다면 그런 것쯤은 얼마든 미뤄둘 수 있었다. 대체 어른들에게는 피붙이보다 중한 일이 왜 그리도 많은 건지. 속상해하는 재윤을 보니 본 적도 없는 그의 어머니가 원망스러웠다.

- 그럼 서울도 못 가?

- 아냐!

조심스럽게 건넨 질문에 새된 대꾸가 돌아왔다. 두 귀가 지르르 울렸다. 분한 얼굴을 하던 재윤이 홱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망울에서 눈물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보는데, 돌연 배탈이라도 난 건지 속 한구석이 저릿저릿했다.

- 반드시 데리러 온댔어. 그러니까 서울도 다시 갈 거야.

재윤은 제 팔에 얼굴을 파묻으며 중얼거렸다. 금세 창수의 얼굴이 새무룩해졌다. 애꿎은 돌멩이를 걷어찼다.

- ……거기가 그렇게 좋아?

- 당연하지.

- 여기랑 뭐가 다른데?

- 컴퓨터도 있고, 엄마도 있고, 친구들도 있고. 필요한 건 다 있으니까.

- 거기에도 있구나. 친구가.

그건 생각하지 못했다. 창수 자신에게 그렇듯 재윤에게도 친구는 자신뿐이라 자만했던 것 같다. 배가 재차 싸했다. 난생처음 맛본 쓰라림의 이름이 박탈감이라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공연히 배를 문지르며 좋겠다, 웅얼거릴 뿐이었다.

언제고 제 어머니가 오면 재윤은 그녀의 손을 잡고 돌아갈 거였다. 그러면 창수 자신은 다시 친구 없던 생활로 돌아가야 한다. 서운하지만 투정할 순 없는 일이었다. 엄마 대신 나를 더 좋아해 달라, 억지 부릴 수야. 단지 가능하다면 조금만 더 그 순간을 늦추고 싶었다.

재윤의 옆에 바투 붙어 앉았다. 눈물에 젖어 있던 그의 손을 물끄러미 보다가 제 손으로 슬며시 감싸 잡았다.

- 있지. 너희 엄마 오실 때까지 내가 더 재미있게 해줄게. 네가 하자는 대로 다 할게. 그러니까 그때까진 계속 친구하자.

달래는 말에 재윤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숨결은 계속 씩씩거렸고, 아랫입술은 윗니에 꾹 베어 물려 있었다.

그즈음부터 녀석의 표정을 살피는 게 습관이 됐다. 녀석이 이따금 드러내는 불편한 기색 하나하나에 안절부절못했다.

밤늦도록, 손까지 다쳐가며 녀석에게 줄 비행기를 만들고, 벌에 쏘여가면서도 곤충을 잡았다. 자칫 녀석이 창수 자신과 노는 것에 싫증이라도 느낄까, 변화라곤 없는 이 섬을 싫어하게 되는 건 아닐까, 그래서 예정보다도 빨리 떠나는 건 아닐까 불안했던 것 같다. 그를 즐겁게 해주려고, 대체 될 수 없는 친구가 되려고 필사적이었다.

섬으로 돌아왔을 땐 이미 어둠이 내린 후였다. 선착장에서부터 발길 가는 대로 걷다 보니 어느새 보건지소 앞이었다. 문득 올려다본 2층 관사에서 미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몇 개 되지도 않는 층계가 오늘따라 가팔라 보인다. 도무지 올라가서 문을 두드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한참 창문만 노려보다가 담배를 꺼냈다. 구깃구깃해진 것을 살살 펴 입에 물고는 라이터를 찾았다. 주머니를 뒤적거리다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창가에 웬 인영 하나가 어른거렸다.

멍하니 보는 동안 인영은 창문을 스쳐 문 쪽으로 사라졌다. 창수는 히익 숨을 삼키며 허둥지둥 몸 숨길 곳을 찾았다.

텅 빈 가로등 아래에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다가 근처에 세워진 재윤의 차 뒤로 숨었다. 그 직후 달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잇따라 층계 위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저절로 호흡이 멎었다. 몸은 더 바짝 차체에 들러붙었다. 가슴이 쿵쾅거리고 눈앞은 팽글팽글했다. 도둑질하다 들켜도 이처럼 진땀이 나진 않을 거였다.

인기척은 문가에서 잠시 멈췄다. 그러다 곧 타박타박 일정한 소리를 내며 층계를 내려온다. 그대로 있다가 금세 들키고 말 거였다. 숨을 집어삼키며 살금살금 차체 앞쪽으로 기어갔다.

그때였다.

“거기서 뭐 해?”

등 뒤에서 불쑥 재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다리로 엎드려 있던 창수가 움찔한다. 착각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선명한 음성이었다. 가로등 불빛이 만든 그림자가 코앞까지 번져 있다. 아아. 속에서 까마득한 탄식이 터졌다. 두 눈도 저절로 질끈 감겼다.

그대로 멈춰 있다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재윤을 돌아볼 때는 아하하 하면서 큼직한 웃음을 터트렸다. 밤이라 천만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발갛게 익은 낯짝을 들키고 말았을 거다.

“아, 뭐가 떨어져서.”

이거 말이야, 하고 얼른 구겨진 담배를 들어 보였다. 재윤의 눈길이 잠깐 그곳에 닿았다가 다시 참수에게로 옮겨진다. 싱긋 웃어 보이긴 했지만, 그 어줍은 변명을 믿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왔으면 들어오지 않고.”

“시간도 꽤 늦었고, 너도 쉬어야지. 종일 일했을 텐데.”

“언제든 상관없다고 했잖아. 창수 네가 오는 건.”

낯간지러운 말을 참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다. 괜히 듣는 사람만 몸이 빌빌 꼬였다. 대단한 의미가 내포된 것도 아닌데, 눈을 똑바로 보기가 어려웠다. 그 의중에 기분은 또 좋아서, 눈치 없는 웃음이 실실 샜다.

“그, 어디 가던 길 아니야?”

“아니. 잠깐 바람 쐬러 나왔다가.”

“나왔다가?”

별 의심 없이 되물었다. 재윤은 그런 창수를 빤히 보더니 싱긋 웃었다. 찰나지만 분명히 부러 한숨 참았다 말하는 것 같았다.

“차 뒤로 숨는 게 보이길래. 찾아달라는 건가 싶어서.”

하마터면 비명을 터트릴 뻔했다. 거칠게 숨을 삼키며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재윤의 입을 틀어막았다. 느닷없는 행동에 재윤의 두 눈이 살짝 커진다. 그 눈을 마주하자마자 더 크게 기함하며 황망히 손을 물렸다. 으악, 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그게 없다면 땅이라도 파서 들어가고만 싶다. 뜨겁게 달궈진 두 귀가 기어이 얼굴에서 떨어져 나갈 것 같다. 당혹감에 쩔쩔매는데, 재윤이 지극히 태평하게 물었다.

“낮에 배 타고 나갔었다며?”

“……응?”

“오늘 내원한 환자 중에 널 봤다는 분이 계시더라고.”

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달리 목적지나 이유를 설명하지는 않는다. 그럴 정신이 없었다는 게 맞다. 재윤은 뭐 마려운 개처럼 끙끙대고만 있는 창수를 의아하게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지금도 한창 일할 시간 아니야?”

“오늘은 휴가 비슷한 거라.

“어디 특별히 다녀올 데라도?”

창수에게선 이렇다 할 대답이 없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어느새 눈썹을 일자로 모으곤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난처하게 한 걸까. 멍하니 보던 재윤이 서둘러 사과했다.

“아, 미안. 곤란하게 너무 꼬치꼬치 캐물었네.”

“아냐.”

“아니, 진짜 미안. 괜히 마음이 앞섰어. 창수 너랑 관련된 거라면 다 궁금해져서. 난감한 얘긴 구태여 들려주지 않아도 돼.”

“아니, 그런 거 아니라니까!”

답답한 마음에 버럭 소리 지르고 밀았다. 억양에는 민망할 정도로 다급함이 잔뜩 묻어났다. 힐금 본 재윤은 이제 걱정 어린 표정마저 짓고 있었다. 이러려던 게 아닌데. 창수는 신경질적으로 제 귓등을 긁었다. 그새 어깨는 축 늘어졌다.

“진짜로 미안하다고 하지 마. 그냥 내가 쪽팔려서 그랬던 거니까. 실은 할머니한테 다녀왔어.”

“내 정신 좀 봐. 여태 그걸 못 물어봤네. 할머님 어디 계셔?”

“다른 데…… 노인네 혼자 살게 놔두기도 뭐하고 해서.”

“건강하시지?”

의심 없이 묻는데, 차마 그렇지 못하다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목소리는 더없이 쪼그라졌다.

언젠가 재윤도 알게 될 일이지만, 아직은 묻어두고 싶었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꺼내면 그와 관련된 다른 사정들도 줄지어 들려줘야 할 것 같아서.

아주 조금만 더, 재윤에게 좋은 친구로 있고 싶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들어갈래?”

잠자코 있던 재윤이 뜻밖의 제안을 한다. 멍청하게 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집에 가야지.”

“막 샤워했거든. 들어와서 라면이나 먹고 가.”

확실히 머리카락이 조금 젖어 있는 것 같았다. 살랑살랑 바람이 불 때마다 좋은 냄새도 나고. 샤워랑 라면이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이 금세 둥실거린다. 시무룩하던 얼굴에도 망울망울 기대감이 깃들었다.

“진짜 그래도 돼?”

일순 재윤의 얼굴이 얼떨떨해진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는 평소처럼 씩 미소 지었다. 겁도 없네, 웃음 결에 중얼거리는 소리는 미처 창수에게 온 전히 닿지 않았다. “응? 뭐라 그랬어?” 하고 물어오는 얼굴이 천진난만하기 짝이 없다. 일말의 위기감조차 감지하지 못하는 두 눈을 마주하자니 숫제 묘한 허탈감마저 들었다.

“아무것도 아냐. 들어가자”

재윤은 창수의 손목을 느긋이 잡아끌었다.

관사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창수의 고개가 바삐 돌아간다. 책상이며 침대 근처를 배회하면서 이것저것 골똘히도 살펴본다. 그동안 마실 것을 가져온 재윤이 거기에 앉아, 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마땅히 궁둥이 붙일 곳은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바닥에 앉으려는데, 재윤이 그런 창수의 팔을 붙들어 구태여 침대에 앉힌다.

“바닥은 아직 차가우니까.”

“괜찮은데.”

중얼거리며 재윤이 건네는 머그잔을 두 손에 쥐었다. 내용물을 생각 없이 들이켜다가 지레 인상을 찌푸렸다. 신맛에 양쪽 턱이 다 아렸다.

“뭐야, 이거.”

“산수유즙이라나. 환자 중에 한 분이 주고 가셨어.”

창수는 못마땅한 얼굴로 머그잔 가득 넘실거리는 액체를 바라봤다. 그러나 정력에 좋대, 지나가듯 한마디 덧붙이자 새삼 눈빛이 달라진다. 숨까지 참아가며 남은 걸 꿀꺽꿀꺽 시원하게 들이켠다. 남은 한 방울까지 살뜰하게 털어 넣었다.

“뒀다 너나 먹지. 이 좋은 걸.”

“난 그다지 필요 없거든”

재윤은 성글성글 웃으며 창수에게서 빈 머그잔을 받아 내려놓았다. 그러곤 그 옆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앉는다. 그런 재윤을 빤히 보던 창수가 쯧쯧 혀를 찼다.

“불쌍한 놈. 보건소가 아니라 교도소 같다. 일주일만 지내도 욕구불만으로 죽을 거 같은데, 어떻게 버텨? 우리 샌님이, 이 형님이 여자라도 하나 소개해줄까?”

“글쎄. 그럴 필요 있을까.”

재윤은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창수의 손목을 붙들었다. 창수의 눈길이 의미 없이 그의 손을 좇는다. 손등부터 가만히 쓸어 올라가던 손가락은 셔츠 소매 안쪽으로 교묘하게 파고들어 왔다. 간지러운 감촉에 뭐하는 거야, 물으려던 찰나 재윤의 손이 먼저 떨어져 나갔다.

“너무 마른 거 아나? 살 좀 찌워야겠는데.”

“살찌면 옷맵시가 제대로 안 나잖냐.”

창수가 으스대며 제 셔츠를 손으로 툭 튕겨냈다. 그 바람에 옷깃이 나풀거리면서 마른 상체가 훤히 내다보였다. 재윤의 시선이 한참 한 곳에 머물다가 창수의 얼굴로 돌아온다. 창수는 미처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한 박자 늦게 제 상체를 열심히 훑어봤다. 특별히 묻은 건 없었다. 고개를 들었을 땐 어김없이 재윤과 시선이 얽혔다.

재윤의 눈동자가 천천히 구르며 창수의 얼굴을 뜯어본다. 그 앞에 놓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분위기가 됐다. 어쩐지 숨조차 너끈히 쉴 수가 없었다. 이내 재윤이 소리 없이 웃었다. 멀뚱히 보다가 창수 역시 찍 입술을 찢으며 웃는다.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옛날엔 통통하게 살찐 강아지 같았는데. 툭 건드리면 그대로 넘어져선 짧은 네 다리를 버둥거리거나, 철없이 벌렁벌렁 동그란 배나 내보이고. 아무리 괴롭혀도 주인이랍시고 꼬릴 흔들어대는.”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멍하니 보는데, 재윤이 어린 강아지에게나 하듯 창수의 코끝을 톡 때렸다. 부드럽던 웃음은 한층 더 깊어져 있었다. 불시 습격으로, 창수는 어처구니없는 얼굴이 됐다. 하지만 몸이 굳어서 어떻게 대응해볼 수가 없었다. 아니, 재윤의 표정 변화를 살피느라 대처할 생각을 못 했다는 게 맞다.

짙어졌던 재윤의 웃음이 조금씩 사그라진다. 장난기 기득하던 눈동자는 전에 없이 깊어졌다. 그곳에 창수 자신의 얼굴이 고스란히 비치고 있었다.

어딘가 모르게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급격히 뒤바뀐 기류를 감지했으면서도, 창수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행위의 의미를 알려면 끝까지 지켜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윤이 창수의 눈 밑을 가만히 쓸어본다. 반사적으로 눈이 슬쩍 감겼다.

그대로 미끄러진 손가락은 귓바퀴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가 동그란 귓불로 내려가 말캉한 살점을 주물럭거렸다. 등줄기에서부터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내내 주시하던 재윤의 얼굴은 그새 미묘하게 굳어 있었다.

어, 나직한 탄성이 터졌다. 목도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그 직후였다. 재윤이 대뜸 창수의 볼을 꼬집듯 당긴 것은. 표정 없던 얼굴에는 거짓말처럼 특유의 미소가 돌아와 있었다.

“……으응?”

“아무것도 모르던 똥강아지였는데. 이젠 욕구불만이 어떻다느니, 못하는 말이 없네.”

아 또 설레발. 아무래도 야동을 끊어야지 싶다. 분위기만 엇비슷해지면 그쪽으로 상상이나 하고.

“난 또 뭐라고.”

창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얄궂은 놀림을 받고도 픽 실없는 웃음이나 터트렸다. 얼굴엔 의구심 한 자락 걸쳐 있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는 재윤에게 태평하게 물을 뿐이었다.

“라면 어디 있어?”

“……응?”

“라면 먹자며. 그새 까먹었냐? 의사 머리도 어쩔 수 없네. 버너랑 냄비 가져와 봐. 이 형이 제대로 맛깔스럽게 끓여줄 테니까.”

재윤이 멀뚱히 보기만 할 뿐, 움직이려 하지 않자 친히 주방으로 들어간다. 잠시 안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잠시 후 창수는 라면과 냄비 따위를 챙겨 돌아왔다.

냄비 안에 상당량의 물이 넘실거렸다. 가스버너에 불을 붙이자마자 분말수프를 모조리 투하했다. 라면 다섯 개 분량이었다. 물이 보글보글 끓었을 때에는 뜯어놓은 면 중 덜렁 한 개만 먼저 넣는다. 그러곤 그것을 젓가락으로 슬슬 저어가면서, 아직 침대에 앉아 있던 재윤을 손짓해 불렀다.

“이렇게 일차적으로 끓여서 한 번 건져 먹고, 또 하나 넣어서 건져 먹고 해야 끝까지 맛있게 먹을 수 있어. 면도 안 퍼지고, 국물 맛은 깊어지고. 대충 다 익은 거 같은데 한 번 먹어봐.”

그릇에 면을 건져내더니 후 불어서 건네준다. 재윤은 그것을 받고도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창수가 얼른, 하고 재촉할 때에야 젓가락을 움직인다.

꼬들꼬들한 면발에 적당한 간이 배어 있었다. 한 번도 라면을 맛있다 여긴 적이 없는데, 전혀 색다른 음식인 것 같다. 끓이는 방법 때문인지, 같이 먹는 사람 때문인지는 모르겠어도.

“맛있네.”

재윤의 얼굴이 완연하게 풀어졌다.

“그치?”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창수가 헤벌쭉 따라 웃었다. 그러곤 더 먹으라며 면발을 마저 덜어준다. 자, 하면서 건네는데 재윤이 그릇을 가만히 볼 뿐 얼른 받을 생각을 안 했다. 의아하게 보자 씩 웃으면서 “이번엔 안 불어 줘?” 한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지만 조금은 그가 얄미워지려 했다

“새끼, 애정 결핍이냐?”

“그런 것도 같아. 여기엔 딱히 아는 사람도 없고, 밤은 길고. 쓸쓸한 느낌이라고 할까 괜찮을 줄 일았는데, 3년이 꽤 길게 느껴질 듯해.”

“……뭐야. 진짜였어?”

금세 걱정 어린 눈을 한다. 재윤은 옅게 웃더니 창수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주물렀다.

“그러니까 창수, 네가 자주 와서 놀아줘.”

“그야 어려운 일도 아니지만.”

사그라질 듯 중얼거리던 창수가 재윤의 그릇을 본다. 줘 봐, 하고 낚아채듯 가져가서는 뜨끈뜨끈한 면발을 정성껏 불어줬다. 그 모습을 관망하던 재윤의 눈동자가 완연히 푸근해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는데 누군가 어깨에 팔을 얹어왔다. 덩달아 알코올 냄새가 물씬 풍겼다.

“어디 갔다가 지금 기어 와?”

어깨에 고개를 기대어온 이는 다름 아닌 길녀였다. 시간을 대략 어림해봐도 아직 퇴근할 때가 아니었다. 아예 출근하지 않았거나 도중에 땡땡이 친 거라면 또 모를까. 몸을 창수에게 의지하고 있는데도 길녀의 걸음걸이는 시종 비를거렸다.

“뭐야?”

“그냥 사는 게 거지 같아서 한잔했어.”

“니 년이 언제는 뭐 기분 좋았냐. 가게는 어쩐 건데. 나가긴 한 거야?

“왜 이래. 이래 봬도 프로라고. 오늘도 파리만 날리더라. 만용이 그 돈밖에 모르는 새끼가 손님 없을 때 부른 건 안 쳐준다길래 한 타임만 뛰고 나왔지, 뭐. 이러다가 가게 쫄딱 망해서 길거리 나앉는 거 아닌지 몰라. 에이, 내가 먼저 물었는데.”

못마땅한 얼굴로 창수의 가슴을 툭 진다.

“넌 어떻게 된 거야. 할머니 보고 온다며. 막 배 탔으면 진즉 도착했을거고, 첫 배는 아직 출발도 안 했을 시간인데?”

연신 술 냄새를 풍기며 탐정 놀이를 하고 앉았다. 창수는 그런 길녀를 밉살스레 노려보다가 마지못해 부축했다.

“라면 먹고 가라잖아.”

대수롭지 않은 대꾸에 길녀의 걸음이 우뚝 멎는다. 왜 또, 하며 돌아보자 눈썹을 살짝 구기고 있다.

“언년이?”

“왜 자꾸 년, 년 거려. 나한테 뭐 먹고 가랄 놈이 재윤이 밖에 더 있냐?”

“……아, 그 보건소 의사? 니 새끼 불알친구라던?”

“그래! 내가 니 년처럼 헤픈 줄 알아?”

“좀 헤퍼 봐라, 화상아. 너 데리고 사는 것도 힘들어.”

“미친. 누가 누굴 데리고 산대?”

“몰랐냐? 나 너 양육하고 있는 건데? 지가 물가에 내놓은 애도 아니고. 밖에 내보내면 어디 안심할 수가 있어야지. 언제 철들려고.”

뒷말은 혼잣말하듯 꿍얼거리며 앞서서 걸어간다. 하지만 대찬 걸음과는 달리 얕은 문턱도 넘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그대로 무릎이 꺾이면서 넘어지려는 걸 가까스로 붙들었다.

“너나 걸음마부터 다시 배워, 이년아.”

그 직후 길녀가 창수의 이마를 때렸다. 어찌나 살갖에 차지게 감기는지. 악, 소리치며 짜증스레 이마를 감싸 쥐었다. 분해서 노려보는 창수에게, 길녀가 한 대 더 치려는 시늉을 했다. 어김없이 창가 지레 몸을 움츠렸다.

“좆만 한 게 누나한테 툭하면 년, 년 거려.”

제대로 풀린 눈알을 부라리더니 비틀거리며 쪽마루로 가서 앉는다. 입을 삐죽거리며 따라온 창수에겐 제 다리를 버젓이 들어 보였다. 창수의 얼굴에 불만이 팽배해진다.

“뭐.”

“고개 숙이면 토 나올 거 같아.”

그렇게 싫으면 거절하면 될 텐데, 창수는 못마땅한 표정이 돼서도 자리에 쪼그리고 앉았다 부츠 지퍼를 내리면서 꿍얼꿍얼 들리지도 않는 불평을 토로한다.

“그래서 얼마 달래?”

“취했냐? 뭔 소리야, 대뜸”

“그 치가 라면 먹고 가랬다며. 그렇게 살살 꿰서 얼마나 필요하다고 하더냐고. 엄마 쓰러졌다던? 아니면 서울서 큰 빚이라도 졌대?”

“아, 그런 거 아니라니까!”

창수가 제 분을 못 이기고 벌떡 일어섰다. 하여간 순진해 빠져서는 저 혼자 좋게 본다고 다 좋은 사람인 게 아닌데. 도무지 학습 능력이란 게 없는 남자다.

길녀는 말을 말자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나 다리를 탈탈 털었다. 지퍼가 내려가 있던 탓에 부츠가 포물선을 그리며 수돗가까지 날아갔다. 창수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무언의 항의를 해온다.

주워. 설마 하는 그 지시를 내려놓고는 저 혼자 방 안으로 쏙 들어갔다. 닫힌 문밖에서 된소리가 쏟아졌다. 그래 봤자 창수는 또 신발을 주워 섬돌 위에 잘 놓아둘 거고, 그녀의 팬티까지도 조물조물 빨아줄 거였다. 그렇게나 바보다.

그 바보에게 때아닌 봄이 온 것 같다. 그 봄을 불러온 대상은 분내 나는 계집이 아니라 시커먼 사내였다. 불알친구라고 하니 못해도 서른은 넘겼을거다. 그 정도 살아온 남자가 창수의 주장처럼 그저 순수할 리 없었다. 멍청한 게, 제가 그러니 남들도 다 그러는 줄 아는가보다. 그가 서울 사람이라면 더 볼 것도 없다. 능구렁이처럼 속내를 감추는 게 특기일 테니까.

어떤 사내일까. 그는.

길녀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옷을 벗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뗄 때 마다 옷가지가 허물처럼 놓인다. 홀가분하게 속옷까지도 벗어젖혔다. 맨몸으로 화장대 앞에 앉아 짙은 화장을 지우는데, 문이 열리고 창수가 들어왔다. 제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미간을 있는 대로 구기며 입술을 힘주어 모은다. 그래 봤자 위협이라곤 되지도 않았다.

“창수야.”

“내 이름 부르지도 마, 이 팥쥐 같은 년아.”

“그럼 콩쥐야.

정말 한마디를 그냥 지지 않는다. 더 대거리했다기는 뒷골만 당기리란 걸 오랜 경험으로 안다. 창수는 대꾸 없이 떨어진 옷가지를 주웠다. 눈길만은 화장을 지우는 길녀를 따끔따끔하게 쏘아댄다. 길녀는 평온한 표정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누나가 술김에 진지 빨고 한소리 할 테니까 잘 새겨들어. 니 새끼 사람 보는 눈 좆도 없으니까, 살다가 소중하다 싶은 인간 나타나면 이 누나한테 데려와. 다른 건 몰라도 네 색시는 이 누나가 직접 골리줄 테니까.”

“전에 그 다방 새끼 마담하고 미용실 영자처럼 쫓아내려고 그러지. 미심쩍은 눈초리를 하자 곧장 화장지가 날아와 이마를 친다. 악, 짜증스럽게 소리치니 얼룩진 얼굴로 돌아본다 꿈에 나올까 무서웠다.”

“미친놈이. 인생의 은인한테 넙죽 절은 못할망정. 그때 안 그랬으면 너 지금 빤스 한 장밖에 안 남았어, 새끼야.”

나와, 하며 구태여 창수를 발로 밀치고 밖으로 나간다. 곧이어 수돗가에서 참방이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창수는 화장대 위에 고스란히 남겨진 화장지를 쓰레기통에 쓸어 넣었다. 아주 잠시 길녀가 언급한 대상에 재윤이 포함되는지 헷갈렸지만, 오래 생각하진 않았다.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길녀에게 보일 것 없이 그는 창수 자신이 덮어놓고 믿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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