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고나-7화 (8/18)

7

“공 선생님, 마지막 환자예요.”

김 간호사가 고개를 빠끔 드밀고 귀띔했다. 재윤도 네, 하며 웃어 보인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같이 일한 것처럼 손발이 잘 맞았다.

경력이 오래된 만큼 김 간호사는 환지들의 특성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덕택에 보건지소 일에도 금방 적응했다. 나름의 업무체계도 잡혀 있어서, 함께 일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사람이다.

이 지역 토박이라는 그녀는, 젊었을 적엔 큰 병원에서 일하는 게 꿈이었다고 했다. 실제로 근처 도시의 대학병원에서 근무한 경력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엔 다시 돌아오게 되더라고, 그런 게 고향인 것 같단다.

어느 곳이든 새 사람이 들면 관심이 집중되게 마련이다. 대개 그 호기심은 낯선 이를 항반 경계를 담고 있어, 근거 없는 추문을 낳기도 한다. 재윤에게 여태 그런 일이 없었던 것은 평소 행동거지에 신경 쓴 탓도 있겠지만, 태반은 최측근인 김 간호사 덕분일 거였다. 본디 묵직한 사람이라, 지소 안의 문제를 밖으로 나르는 일이 없었다. 바깥의 사사로운 이야기 역시 함부로 전하지 않았다. 그녀 덕분에 이상적인 근무 환경이 조성된 셈이다.

일과 역시 규칙적으로 흘러갔다. 아침엔 늘 일정한 시간에 눈이 떠졌다. 가벼운 산책 겸 조깅을 하고, 샤워 후 간단하게 아침을 먹는다. 준비를 마치고 일찌감치 진료실에 내려오면 슬슬 환자들과 함께 김 간호사가 도착했다. 그보다 더 빨리 와서 건물 앞에 진을 치는 인사들도 있었다. 배차 간격이 한 시간에 한 대꼴인 버스 때문이었다. 조금 이르게 진료를 시작해서, 대개 오후 다섯 시 전후로 하루 일을 마무리한다. 종종 진료 마감 시간 직전에도 환자가 들어오곤 하지만. 그건 이주 특수한 경우였다. 그래서 여섯 시 정각에 나타난 환자의 정체가 새삼 궁금해졌다.

차트를 정리하고 있는데,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잇따라 문이 열리고 김 간호사와 환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재윤은 환자가 다가와 앉는 걸 느끼며 다소 습관적으로 물었다. 얼굴엔 평소와 같은 너그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디가 편찮으셔서…….”

무심코 고개를 들다가 멈칫했다. 맞은편에서 창수가 씩 웃고 있었다. 의외로운 상황에 당황한 것도 잠시, 재윤 역시 따라 웃는다.

“어떻게 된 거야.”

“보면 모르겠냐? 치료받으러 왔지.”

“아시는 분이세요?”

격 없이 오가는 대화에 김 간호사의 낯이 아리송해진다. 재윤은 아, 하면서 한층 누그러진 어조로 대꾸했다.

“네. 이 환자분은 제가 책임지고 캐어해드릴 테니까, 김 선생님은 먼저 퇴근하시죠.”

“흠…… 그럴까요, 그럼.”

얄궂어진 두 얼굴을 보곤 김 간호사 역시 묘한 웃음을 띠었다. 흡사 말썽꾸러미 형제를 보는 어머니 같았다. 뒷정리 잘 부탁해의 하는 말은 숫제 어지럽히지 말고 놀라는 것처럼 들렸다. 앉아 있던 창수가 나가는 그녀를 엉거주춤 따라나섰다.

“누님, 괜찮으시면 이거 가져갈래요? 오다가 때깔 좋아 보여서 샀는데.”

검은 봉지를 양쪽으로 벌려 보인다. 어디서 달콤한 냄새가 옴팡 풍긴다했더니, 빛 좋은 딸기가 가득 들어 있었다.

“어머, 그래도 되겠어요?”

“네. 이거 말고도 잔뜩 있으니까.”

살갑게 김 간호사에게 봉지를 들려준다. 그녀는 창수의 성의를 물리치지 않았다.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편하게 있다 가라는 인사말도 덧붙인다. 창수는 그녀에게 연방 손을 흔들어주다가 한참 뒤에야 의자로 돌아왔다. 그사이 꼼꼼히 살폈지만, 특별히 아픈 구석은 없어 보였다. 한 보따리 사들고 온 것만 봐도 진찰이 목적은 아닌 듯했다.

창수의 일거수일투족을 느긋이 관망하던 재윤이 뜬금없이 물었다

“나 먹으라고 사온 거 아냐?”

"응?”

“나 주려고 사은 거면 내 허락부터 받아야지.”

웃곤 있는데, 어딘지 말투가 비릿하게 느껴졌다. 내내 싱글벙글하던 창수의 얼굴이 일순 멍해진다. 그러나 얼마 못 가 아하하. 하고 호통하게 웃어 젖혔다.

“졸라 재미없어, 새끼야. 같잖게 장난은. 저녁 안 먹었지?”

책상 위에 큼직한 봉지 하나를 올려놓는다.

“여기 낙지볶음이 작살이야. 고춧가루 맛 제대로고, 이 근방에서 난 걸 써서 양파도 달달해. 직접 가서 먹어야 더 맛있는데, 좀 늦게 열어서. 이 형님이 너 먹이려고 자는 이모 깨워서 볶아온 거 아니냐.”

젓가락을 건네며 어서 먹어봐, 한다. 확실히 양도 푸짐하고 반지르르한 윤기가 도는 게, 제법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재윤은 차려진 음식을 물끄러미 보다가 옅은 의문을 드러냈다.

“너도 아직 출근할 시간 아니지 않아?”

“아, 뭐…… 그냥 일찍 나와야될 일이 있었어. 먹어, 더 식기 전에.”

입맛을 다시다가 대강 둘러댄다. 그러곤 비닐봉지를 좀 더 먹기 좋게 벌여 놓았다.

금방이라도 침이 떨어질 것 같은 얼굴로, 음식에서 눈길을 떼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재윤이 젓가락을 움직일 때까지 한사코 버텼다. 이럴 땐 마치 큰 개를 키우는 기분이다.

재윤은 잘 먹을게, 하고는 낙지볶음을 한 젓가락 집어 먹었다. 고춧가루 특유의 알싸함이 확 퍼지면서 깊은 맛을 냈다. 그제야 창수도 제 젓가락을 공격적으로 놀리며 낙지와 채소를 잡히는 대로 입 안에 넣었다. 금세 양 볼이 볼록해진다. 양념으로 붉어진 입술을 핥는 모습이 꽤 익숙해 보였다.

중간부터 재윤은 젓가락 놀리는 것도 잊은 채 그런 창수를 지켜봤다. 어릴 때부터 그는 딱히 가리는 음식이 없었다. 사내아이답게 먹성도 좋아서 밥 두 공기는 너끈히 먹어지웠다. 항상 그걸 흐뭇하게 지켜봤던 것 같다.

살찌우는 맛이 있다고 할까.

시선을 의식한 탓인지, 부지런히 먹던 창수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서 곧장 눈이 미주쳤다. 창수는 자신만 빤히 보는 재윤을 발견하곤 급격히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면서 잔뜩 부풀었던 기분이 돌연 가라앉는다.

“왜 안 먹어? 입맛에 안 맞아? 여기 진짜 알아주는 집인데.”

“아냐. 맛있네.”

“그럼 팍팍 좀 집어먹어라, 인마. 이게 정력 보충에는 끝판왕인데. 툭하면 벌떡벌떡 서서 밤에 잠을 못 잘 정도라니까.”

오줌발까지 거세져서 변기도 뚫는다며, 과장을 보탠다. 예전에는 아기가 고래 숨구멍에서 나온다는 헛소리도 반신반의할 만큼 순진했는데. 그 까맣고 순박하던 소년도 이젠 어른이 다 됐나 보다. 수치도 모르고 속된 농이나 던져대는 게.

재윤의 입기에 돌연 얄궂은 웃음이 번진다. 창수는 영문도 모른 채 왜, 했다.

“발기는 이런 음식으로 어쩔 수 있는 게 아니야. 어떤 자극에 의해서 몸 속 세포와 신경이 홍분되고, 그게 음경 속에 있는 모세혈관을 부풀리면서 성기가 딱딱해지는 거지. 건강한 남자라면 그런 반응들이 지체 없이 일어날 거고, 좋은 음식이나 약품에 기대지 않고도 언제든 발기할 수 있어. 그 급격한 생체 반응을 이끌어낼 대상만 있다면 말이야.”

어딘지 재윤의 눈동자가 느리게 구르며 몸을 훑는 것 같았다. 창수는 얼떨떨하게 그 시선을 좇았다. 이내 제 볼품없는 몸뚱이에 눈길이 닿자, 역시 착각이었던 모양이라고 이른 결론을 내린다. 그렇지 않고야 발기를 말하며 하필 저를 볼 까닭이 없잖은가.

애초에 얌전한 얼굴로 그런 이야기를 꺼낸 것 자체가 의외지만.

다시 고개를 들어 재윤을 봤다. 바로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재윤이 뭔가를 훔쳐보다 들킨 것처럼 움칠하는 게 느껴졌다. 워낙 찰나였고, 곧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웃어서 확신은 안 서지만.

스멀스멀 올라오는 의구심의 정체를 전혀 짐작도 못 한 채 재윤을 멍하니 봤다. 그러자 그가 대뜸 손을 뻗어왔다. 얼굴로 다가오는 그의 손을 보고, 창수는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다. 잠깐 멈칫하던 재윤의 손은 곧 다시 스스럼없이 가까워졌다.

그대로 창수의 입술을 가만히 훑어낸다. 맛있다고 입술까지 씹겠네, 하는 소리가 귓가에서 영 멀게 느껴졌다.

가슴이 제멋대로 쿵쿵거렸다. 어린애 가르치듯 하는 태도에 자존심이라도 상한 건가. 그렇다고 불쾌한 기분이 든 건 또 아니었다.

창수는 제 흉부에 손을 얹곤 연방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까지 놀란 이유는 전혀 이상한 방향에서 결론지어졌다.

“와, 나 놀랬네. 어떻게 그 흥미로운 얘기를 그런 따분한 얼굴로 지껄여. 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샌님아. 서울 것들은 떡칠 때도 졸라 무표정이지? 넣는 타이밍이랑 흔드는 횟수까지 딱딱 대가리 속에 박아놓고 싸는 거 아니냐?”

“그게 궁금해?”

빙긋 웃으며 대꾸하는 말은 숫제 가르쳐줄까, 하는 걸로 들렸다. 이젠 귀도 맛이 갔나 보다. 애꿎은 귓구멍을 후비적거렸다. 헛들은 소리에 놀란 가슴이 진정될 기미 없이 더 극렬하게 날뛰었다. 홈홈, 헛기침 하며 입을 놀렸다. 목이 꽉 막히는 듯했지만, 그렇다고 조용해지면 공연히 분위기만 어색해질 거였다.

“뭐, 뭘 가르쳐…… 아니. 아니, 아니. 궁금할 게 뭐 있나 그 말이지. 넣고 싸는 거야 어디나 다 똑같을 건데. 뭐, 서울 사는 계집애들이 콧대는 더 높을 거 같긴 하다만. 한 번 따먹으려면 엄청 굽실거리면서 공주님 떠 받들 듯 해줘야 하는 거 아냐? 넌 몇 명이나 자빠뜨려봤나? 아, 질문이 너무 앞서갔나? 우리 샌님이 아직 총각 딱지도 못 뗐을지 모르는데.”

낄낄거리며 분위기 전환을 시도해본다. 재윤은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짓더니, 창수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나쁜 물이 제대로 들었네. 예전엔 하얀 묵 같더니. 따먹느니, 자빠뜨렸다느니 하는 표현은 옳지 않아. 섹스도 엄연히 사람 간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니까. 서로에 대한 존중 없이 당장 쾌락만 앞세워서야 자위하는 거랑 다를 게 없지. 상대를 천천히 살피면서 어떻게 하면 더 기쁘게 해줄 수 있을까 고민해야 영혼까지 공유할 수 있다고 보는데.”

“……너 나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어렵게 떠드는 거지?”

창수의 얼굴이 지레 심드렁해졌다. 존중이니, 영혼의 공유니. 순 추상적인 개소리일 뿐이었다. 적당히 물고 빨다 보면 샅이야 저절로 뻣뻣해지게 마련이고, 어디로든 뚫고 들어가려는 놈의 본능을 충실하게 따르는 것. 그게 창수가 아는 섹스의 전부였다.

막무가내로 굴면 짜증은 좀 내더라도 종국엔 좋다고 앙앙대는 게 계집이다. 하나하나 공들이자면 제가 안달 나 허리를 조이기 일쑤였다. 아무래도 재윤은 여자를 잘 모르는 게 분명하다, 제 나름의 결론을 내린다. 그러고는 재윤을 야유하듯 보며 얕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 여기 잘 왔다. 있는 동안 이 형님이 이것저것 많이 가르쳐줄게.

재윤은 잠시 의외라는 표정을 짓다가 씩 웃었다.

“기대하지.”

그 정도에서 식사를 마무리했다. 후식으로 사 온 딸기를 먹으려는데, 재윤이 그것을 봉지째 세면대로 가져갔다. 그러곤 하나하나 꼭지를 따며 깨끗하게 닦아낸다. 그냥 먹어도 되는데,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던 창수가 금세 조용해진다. 눈길은 어느새 빨간 딸기와 대조되는 재윤의 손끝에 머물러 있었다. 금방이라도 하얗고 정갈한 손끝이 붉게 물 들 것 같았다 그게 뭐라고, 그렇게까지 숨죽이며 지켜보게 되던지.

“정말 그냥 놀러 온 거야? 따로 할 말 있던 게 아니고?”

불시에 묻자 창수가 눈에 띄게 어깨를 움찔한다. 하마터면 악 소리가 튀어 나갈 뻔했다. 도둑질이라도 하다 들킨 것처럼, 벌렁거리는 심장을 애써 다독였다. 재윤은 의문스러운 얼굴로 그런 창수를 돌아봤다. 머쓱하게 시선을 돌리며, 뒷목을 긁적거렸다.

“별건 아니고, 이번 주말에 뭐 하나 물어보려고.”

“음…… 주말엔 본가에 잠깐 다녀올까 하는데.”

“그렇구나.”

예상외의 답변에 창수의 목소리가 힘을 잃는다. 표정에도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곤 애꿎은 젓가락만 괴롭혀낸다. 아무리 봐도 주인에게 놀아달라고 달려들었다가 거절당한 강아지 같았다 재윤의 입가가 소리 없이 늘어진다.

재윤은 깨끗이 씻은 딸기를 자리로 가져오며 여지를 남겼다.

“다음 주 주말이라면 아직 선약이 없어.”

여지없이 창수의 두 눈이 반짝였다. 또 보이지도 않는 귀가 쫑긋 서는 듯했다.

“그럼 낚시하러 가지 않을래?”

“저번에 말했던?”

“응. 내가 아는 형님한테 배 빌려달라고 슬쩍 운을 띄워놨거든.”

잠시 고민하는 척을 해봤다. 대꾸 없이 뜸만 들이자, 창수가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입술만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 맹목적인 눈길에 속이 미구 간지러워졌다. 금방이라도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럼 그럴까.”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주먹까지 불끈 쥔다. 그러곤 바로 배를 빌려둬야겠다면서 휴대폰부터 꺼내 들었다. 딸기부터 먹고 하래도 말을 듣지 않았다. “접니다, 형님.” 하며 일어나는 창수의 뒷모습이 전에 없이 신나 보였다. 지켜보던 재윤의 얼굴도 덩달아 누그러졌다.

콧노래를 부르며 벌컥 사무실 문을 열었다. 그 직후, 뭔가가 빠르게 눈가를 스쳐 지나갔다. 반사적으로 목을 움츠렸다. 잇따라 와장창 소리를 내며 유리 파편과 흙 알갱이가 사방으로 튄다. 창틀에 놓여 있던 난 회분 하나가 기어이 유명을 달리한 순간이었다. 뭐가 또 그리 비위에 거슬리는지, 만용이 제 화를 주체하지 못한 채 씩씩거리고 있었다.

“왜. 또 애기가 잠을 안 자?”

회분의 파편을 익숙하게 주워가며 물었다. 이제 더 부술 물건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던지고 치우는 게 끝이 없다. 나중엔 창틀에서 창문이라도 떼어 던질 판이었다. 갓난아기였을 적부터 신경이 예민했다더니. 핏덩이 성질머리가 여든까지 갈 기세다.

쓰레받기와 빗자루를 가져와 흙까지 샅샅이 쓰는데,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어서 열심히 놀리던 빗자루가 구둣발에 밟힌다. 왜 또 그래. 하면서 살갑게 웃어보지만 싸늘한 분위기는 풀릴 기미가 없었다.

“너 일수가 뭐하는 건지 모르냐?”

“왜 몰라. 하는 일이 만날 그건데.”

“그런 새끼가 몇 달씩 농땡이를 쳐?”

만용이 들고 있던 장부로 창수의 머리를 후려쳤다. 그러고는 그것을 창수 앞에 홱 던져놓았다. 여러 날째 일수를 갚지 못한 이들에게 별도 표시가 돼 있었다. 목돈을 빌려 하루하루 나눠 갚는 게 일수라지만. 한 번 밀리기 시작하면 답이 없다. 그러나 값비싼 이자까지 물어가며 돈을 꾸는 사정이란 뻔해서, 오히려 부채를 꼬박꼬박 상환하는 경우가 더 드물었다.

“니 새끼도 눈알이 있으면 좀 봐라. 겨울부터 석 달도 넘게 밀렸어. 요즘 이 아줌마, 전화도 잘 안 받고 두문불출한다며. 작정하고 남의 돈 떼먹겠다는 심산인데, 왜 보고 안 했냐?”

“그 집 김 양식 하는 데잖아. 돈 들어오면 한꺼번에 갚겠다고…….”

여지없이 고개가 앞으로 꺾였다. 만용이 뒤통수를 갈긴 까닭이었다. 얼얼한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는 손길은 되레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조차 그다지 위로가 되진 못했다. 오랜 경험으뢰 이것이 폭풍전야나 다름없다는 걸 안다.

“내가 대가리 좀 굴리면서 살라고 했지? 3월이면 김 양식도 죄다 끝나는데, 지금이 대체 몇 월일까? 응, 창수야.”

“안 그래도 슬슬 받아오려고 했어.”

“슬슬 언제. 벌어놓은 돈 다 까먹으면 그때? 그 집 막내, 대학 들어갔단 얘기가 들리던데, 등록금만 기백은 한다지? 어쩌면 사람들이 그렇게 염치가 없을까. 제 새끼 글자 가르칠 돈은 있고, 남의 돈 갚을 건 없다. 그지?”

창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럴 땐 한마디 보태봤자 득 될 게 없다. 고요히 창수의 뒤통수를 노려보던 만용은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쓰레받기를 걷어찼다. 기껏 쓸어 담았던 화분의 파편과 흙 알갱이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본래도 지랄 맞은 성미긴 하지만, 돈 문제가 얽히면 그땐 정말 아귀처럼 변한다. 창수가 일수 전담을 자청한 것도 돈 몇 푼에 살인이 나지 싶어서였다. 만용이 직접 관여했을 때에는 집집이 남아나는 살림살이가 없었더랬다. 고삐 풀린 망아지는 미쳐 날뛰게 풀어두느니 울타리에 가둬놓는 게 낫다. 비록 목동 하나가 피곤해지더라도.

창수는 저만치 굴러간 쓰레받기를 집어 다시 흐트러진 것들을 쓸어 담았다. 만용은 팔짱을 끼고 지켜보며 그의 의사를 확인했다.

“내가 가, 네가 갈래?”

“내가 해.”

덤덤하게 대꾸하곤 쓰레기통에 모은 것들을 쏟아 버렸다. 사용한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정리하고 돌아서는데, 만용이 검지를 까닥였다. 잠자코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뭔가 못마땅한 낯으로 창수의 얼굴 구석구석을 뜯어봤다. 보통 때와 다른 점이라곤 없는데, 영 눈에 거슬린다. 어딘가 단단히 바람이 든 것 같다고 할까. 최근 연일 콧노래를 불러대는 것도 그렇고.

“너 이 새끼, 연애 하냐?”

기분이 급변할 일이라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밖에 없다. 복권이나 경품에 당첨 될 운 따윈 없는 종자고.

그러나 창수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연애는 무슨.”

“아닌데 궁둥이는 왜 그렇게 살랑거려?”

“내가 언제.”

모르쇠로 일관한다. 무엇을 감추려고 그러는 건 아닐 거였다. 만용이 아는 한 창수는 그렇게 약은 인사가 되질 못 한다.

그러나 그쪽도 아니라면 짐작 가는 구석이 전혀 없다. 역시 기분 탓이었나. 만용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돌아서다가 아, 하며 창수를 봤다. 그는 여전히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길녀 그년, 남자 꼬인 거 같던데.

“아…… 그 꽃바구니?”

“뭐야. 그 새끼가 꽃도 보냈던?”

“같은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윤삼이한테 들어보니까 단골이라던데?”

“……라던데?”

만용의 눈썹이 꿈를거린다. 위험하다. 생각한 순간 그의 손이 홱 허공으로 들춰졌다. 두 눈이 저절로 질끈 감겼다. 그러나 만용은 내려치려던 손으로 창수의 머리를 꾹, 꾹 밀어냈다.

“너 이 새끼, 빠져가지고. 제대로 단속 안 하지? 대체 이 대가리에 뇌는 장착하고 다니냐?”

“미안. 앞으로 신경 쓸게.”

“제대로 알아봐. 일았냐?”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만용은 쯧, 혀를 자며 재차 당부했다.

“딴 데 한눈팔지 말고 열일 해라.”

찰싹찰싹 창수의 볼을 때리듯 두드리기도 한다. 창수는 그런 만용을 멀뚱히 보다가 잠자코 고개를 주억거렸을 따름이다.

“길녀야, 오빠 왔다.”

대문을 지나며 크게 소리쳤다. 일찌감치 잠에서 깬 옆집 개가 컹컹 담벼락 위로 울음을 놓는다. 안에선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원래 살가운 구석 이라곤 없는 계집이다.

빨랫줄에는 창수가 어제 널고 간 옷가지가 그대로 널려 있었다. 개어놓진 못하더라도 좀 거둬두라니까. 역시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 때를 놓친 빨래는 빠짝 마르다 못해 줄에 걸린 모양, 고스란히 굳어 버렸다. 그것들을 걷는 내내 창수의 주둥이에서 쉼 없이 불만이 터져 나온다.

바삭바삭해진 빨래를 한가득 안고 방으로 향했다. 다소 짜증 섞인 손길로 방문을 젖혀 연다.

“……뭐야.”

단단히 한 소리 해주려고 했는데. 안은 텅 빈 상태였다. 얼떨떨하게 들어가 화장대부터 살폈다. 사용한 화장품들이 그대로 널브러져 있었다. 바닥엔 입었던 속옷과 잠옷 따위가 허물처럼 널렸다.

길녀의 퇴근은 통상 창수보다 빠른 편이다. 이따금 마음 맞는 손님과 가게 밖에서 만날 때도, 술을 마시고 들어올 때도 있지만 대개 창수가 귀가하기 전에 돌아왔다.

- 길녀 그년, 남자 꼬인 거 같던데.

창수는 공연히 제 이마를 긁적였다. 아닌 게 아니라, 길녀의 귀가가 부쩍 늦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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