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재윤은 창수와 약속한 포구에 서 있었다. 조금 일찍 나온 터라, 한적한 선착장을 산책하듯 걸어 다녔다. 비리다 못해 구릿한 냄새가 콧속 점막을 자극했다.
어렸을 때, 처음 맡았던 그 냄새는 가히 충격이었다. 한 번도 닿아보지 않았던 낯선 세계에의 공포심을 극대화하기에 충분했다. 두 눈에 하나하나 들어와 박히던 생경한 풍경도 몸을 저절로 움츠리게 했다.
떠날 때조차 다시 돌아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여전히 좋아하게 됐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젠 이곳 생활에도 익숙해졌다. 평일이건 주말이 건 늘 같은 시간에 눈이 떠지고, 얼마쯤의 불편함은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 걸 보면.
얼마나 기다렸을까. 먼 곳에서 엔진소음이 나더니, 연이어 물살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자 작은 어선이 포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 위에서 팔을 방방 흔드는 이는 다름아닌 창수였다. 오늘따라 그의 알로하셔츠는 총천연색을 자랑했다. 활짝 만개한 웃음을 보니 덩달아 마음이 들썩였다.
“오래 기다렸어?”
“아나. 나도 지금 막 왔어.”
“얼른 타.”
들이치는 파도에 선체가 쉼 없이 울렁거렸다. 그렇다고 배에 오르기 어려올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재윤은, 창수가 잡으라며 내민 손을 마다치 않았다.
체중을 생각해 힘껏 끌어당겼건만, 재윤 역시 훌쩍 뛰어내리면서 가슴이 서로 격하게 맞닿았다. 그 참에 창수가 휘청거리자, 순간적으로 그의 등을 받치듯 감싼다. 결과적으론 와락 끌어안는 꼴이 됐다. 재윤에게서 풍기는 특유의 향취가 물씬 짙어진다. 창수는 저도 모르게 어, 하는 탄성을 터트렸다. 일순 귓가가 멍해졌다.
파이팅이 넘치네. 웃음 결에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릴 때에야 퍼뜩 정신을 차린다. 재윤은 뒤늦게 몸을 물리며 씩 웃었다. 멍하니 그를 보다가 의심 없이 따라 웃었다.
“너 몸 의외로 두껍다. 뭐, 운동해?”
“그냥 조깅 정도? 건강관리 차원이지.”
대수롭지 않게 말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 창수는 새삼 품에 가득 차던 실팍한 몸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작 조금 뛰는 것으로 그런 몸이 됐다면 상당히 억울할 것 같았다.
섬은 배로 20분 거리에 있었다. 듬성듬성 서 있는 나무 몇 그루 외에는 일체 초록을 찾아볼 수 없는 돌섬이었다. 규모도 작아 사람은커녕 어떤 생물도 서식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기껏해야 새들이나 잠시 쉬어갈까. 그쯤 되니 이 섬에 이름은 제대로 붙어 있을지 의문이었다. 조난이라도 당하면 쉽게 위치를 알릴 수 없을 듯했다.
섬에 도착하자마자 창수는 싸온 짐을 내렸다. 생수부터 시작해, 각종 먹을거리와 그릴, 텐트까지. 작은 어선에서 끊임없이 물건이 나온다. 재윤더러 특별히 준비할 것도 없다더니, 혼자 만반의 준비를 해왔다. 살림이라도 차릴 작정인가 싶었다.
인상 좋은 선장은 몇 시쯤 데리러 오겠다, 약속하고는 배를 돌렸다.
“좀 이따 봐요, 형님. 큰 놈으로 잡아놓을게!”
창수가 큼직하게 팔을 흔들었다. 멀어지는 어선에서 잡혀 들어가지나 말라는 대거리가 들려온다.
여전히 좁은 바닥이었다. 이웃의 사사로운 소식까지 죄 꿰고 있을 정도로. 창수가 몇 년 전까지 어디에서 지냈는지, 그 이유는 또 무엇이었는지 모르지도 않을 거였다. 더구나 지금 그가 하는 일 역시 환영받을 만한 게 아니다. 그럼에도 창수와 함께 다니며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그 사실을 깜빡깜빡 잊는다. 인망이 두텁다더니, 괜한 허세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지만.
잡념에 빠진 사이, 창수는 혼자 텐트를 치고 있었다. 탄력성이 좋은 긴 폴대를 들고 한참을 헤맨다. 한쪽을 고정해두지도 않고 프레스 하듯 구부리더니 그 상태로 땅에 박아보려 애쓰는 거다. 두 팔을 부들부들하면서 잡은 걸 놓지도 못하고 낑낑거리는데,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터졌다.
어떻게 생겨먹었다는 것만 알지, 스스로 쳐보는 건 처음인 듯했다.
같이 해, 하면서 칭수의 손에서 폴대를 앗아갔다. 내내 말썽이던 폴대는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박혔다. 순식간에 텐트의 뼈대가 완성된다. 그 위로 천을 덮으려는데, 내도록 지켜보던 창수가 고개를 저으며 나섰다.
“그렇게 대충 하면 틀림없이 무너진다고.”
보란 듯이 재윤이 고정해 놓은 폴대를 잡아당겼다. 그러나 힘주어 당겨도 그것은 꿈쩍하지 않았다. 보기엔 대강 쑤셔 넣는 것 같았는데, 영문을 모르겠다. 자갈 때문인가 싶다가도 그게 원인이면 애초에 폴대가 그리 묻힐 듯하지도 않았다. 지지대의 견고함을 몸소 확인한 창수는 무안함에 헛기침을 했다.
“뭐, 처음 치곤 썩 잘했네.”
등 뒤에서 나직한 웃음이 터지는 것 같았지만 애써 무시한다.
텐트를 친 후에는 바로 낚시부터 준비했다. 물때라는 게 있어, 실한 놈을 낚으려면 서둘러야 했다. 수심이 깊은 섬 뒤쪽 갯바위에 간이의자 두개가 놓인다. 낚싯바늘에 지렁이를 꿰는 손길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곧 다가올 환희 때문인지 얼굴은 연신 싱글벙글했다.
재윤도 미끼를 집으려는데, 창수가 굳이 만류했다. 손이 더러워진단 게 그 이유였다. 그래 봤자 지렁이인데, 재윤의 바늘에까지 손수 두툼한 놈을 달이준다. 재윤은 제 하얀 손을 의문스레 보다가 옅게 웃어넘겼다.
나란히 새파랗게 굽이치는 바다로 낚싯대를 드리운다. 발밑에서 파도가 하얗게 부서졌다. 정면에서 몰아치는 바람은 여전히 거친데도 싫은 느낌이 아니었다.
“심심한데 내기라도 할까?”
막연한 기다림 속에 창수가 슬쩍 운을 띄웠다.
“어떤?”
“쩐 내기는 좀 그러니까, 음…… 많이 잡는 사람 소원 들어주기?”
“어떤 거라도?”
조건을 확인하는 어조가 어쩐지 얄궂게 느껴졌다. 멍하니 보자 응, 하고 재우쳐 묻는다.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이 섬을 사 달라든가 하는 억지가 아니고서야.”
“그럼 최선을 다해야겠는데.”
재윤의 눈이 전에 없이 빛나는 것 같았다. 제안은 창수 자신이 먼저 했건만. 제대로 휩쓸린 기분이었다. 뭐, 상관없다. 내기 따위 이기면 그만이니까.
낚싯대를 쥔 손에 모든 감각을 집중했다. 톡, 톡 미끼를 치는 느낌이 들때 바로 낚아채야 한다. 머리를 쓰는 일은 쥐약이어도 몸으로 때우는 것만은 자신 있었다.
바람도 꽤 많이 불고 파도까지 높아서 집중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창수는 아예 눈까지 감고 바다의 움직임을 감지하려 애썼다. 들이치는 물살은 불규칙했지만, 그 속에도 일정한 흐름이 있게 마련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떤 미세한 움직임이 손으로 전달돼 온다. 파도의 거대한 일렁임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었다. 이때다, 싶어 낚싯대를 힘껏 튕겨 올렸다. 그러자 바늘이 반대쪽으로 부산하게 달아나다가 힘을 이기지 못하고 묵직하게 끌려왔다.
창수의 얼굴에 확신 어린 웃음이 번졌다. 서둘러 낚싯줄을 감아올렸다.
곧 바닷물을 하얗게 부수며, 손바닥만 한 도다리가 올라왔다. 실체를 확인한 창수가 으하하 큼직한 웃음을 터트렸다.
“봤나? 낚시는 이렇게 하는 거야.”
고요한 재윤의 낚싯대를 보며 한껏 이죽거려도 본다. 비늘에서 땐 도다리엔 거침없이 입을 맞췄다. 시작이 좋다.
이후로도 노래미와 볼락 따위가 계속 낚싯줄을 당겼다. 한번 물꼬를 트니 줄줄이 낚여 올라온다. 내기에 앞서 다소 긴장됐던 마음이 느긋해지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소식 없던 재윤의 낚싯대가 별안간 부러질 것처럼 휘었다. 그것을 붙들고 있던 재윤의 팔에도 발끈 힘이 들어갔다.
“야. 어디 걸렸나 보다. 살살 빼라. 낚싯대 부러질라.”
힘으로만 당기려는 재윤을 타일렀다. 그 말이 들리지 않는 건지, 재윤은 바위와의 사투를 계속했다. 기어이 낚싯줄이 팽팽하게 당겨진다. 낚싯대는 이제 당장 부러져도 이상할 것 같지 않았다.
무리하지 말라니까, 재차 만류하려던 찰나였다. 재윤이 허리 반동을 이용해 낚싯대를 휘감아 올렸다. 그와 함께 물속에서 시커먼 뭔가가 튀어나 오더니 갯바위에 내동댕이쳐졌다. 퍼덕퍼덕 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힌다.
창수는 믿기지 않는 눈으로 소리의 근원을 좇았다. 그곳에 큼직한 참돔 한 마리가 생존 의지를 십분 드러내고 있었다. 놈의 위용에 좀처럼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 애초에 크기나 값어치는 비교 대상이 아니야. 알지?”
참돔에서 눈을 떼지 못하면서도 내기의 조건을 보다 분명히 해둔다. 얍삽해도 어쩔 수 없다. 놈과 힘겨루기 하던 재윤을 보니 본능적으로 이기고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찰나였지만, 여유롭던 그에게서 필승에의 의지랄지, 투지 같은 것이 보였더랬다.
“그러게. 아깝게 됐네.”
재윤은 정말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적응이 안 된다. 욕심이라곤 없을 것 같이 생겨서 그런 승부욕을 어떻게 감추고 지내는 건지. 그러니 시작하기도, 끝내기도 어렵다는 의사 수업을 받은 거겠지만.
심기일전해 다시 낚싯대를 휘둘렀다. 줄이 빠르게 풀리면서 휠이 힘차게도 돌아갔다. 왜인지 느낌이 썩 괜찮다. 좋았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줄을 감았다 풀기 시작했다. 욕심껏 미끼도 두 마리나 꿰었다. 덩치가 크면 고작 실지렁이 한 마리는 성에 차지 않을 거였다. 몸집만큼 욕심 많은 대어가 걸리길 고대하며 신중하게 줄을 당긴다.
그래도 바다를 벗하며 서른 해를 넘게 살았는데, 낚시 초보에게 뒤질 순 없었다. 더 크고 값비싼 놈으로 낚아주마, 새삼 의지를 다진다. 내기의 주제가 마릿수라는 것을 잊은 건 재윤이 아니라 오히려 창수 쪽인 듯했다.
그러길 머지않아서였다. 쉽 없이 움직이던 줄 끝이 돌연 묵직해진다. 뭔가 큰 게 걸렸는지 비늘을 덜컥 채는 느낌이 났다. 잇따라 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면서 낚싯대가 여지없이 휘어진다.
“이건 백 퍼 대물이다!”
확신에 차 소리치며 황급히 줄을 당겼다. 하지만 얼마쯤 끌려오나 싶던 놈은 도중부터 버티기에 들어가선 꿈쩍하지 않았다. 힘으로 당겼다가는 여지없이 줄을 끊고 달아날 것 같았다. 상체를 뒤로 젖히며, 배에 힘을 주고 힘껏 끌었다. 재차 놈이 질질 딸려오기 시작한다. 잠시 호흡을 고른 뒤, 허리를 강하게 젖히며 그 반동으로 낚싯대를 추켜들었다. 내내 물속에서 모습을 감추고 있던 놈이 참방 소리를 내며 솟구쳤다.
“됐다…──!”
하지만 그 직후 무게를 이기지 못한 낚싯대가 부러져 버렸다. 덩달아 그것과 하나가 됐던 창수의 몸도 급격히 앞으로 고꾸라졌다. 재윤이 덜컥 잡아채지 않았다면 그대로 바닷물 속에 처박힐 뻔했다. 대물이 수면과 마찰 하면서 남긴 물보라가 여지없이 창수를 흡백 적셔놓는다. 기껏 만진 머리가 축 가라앉고, 셔츠도 잔뜩 젖어버렸다. 그 와중에도 창수는 얼떨떨하게 잠잠해진 바디를 바라봤다.
“방금, 봤냐?”
“응. 아마도.”
“네가 잡은 참돔보다 컸어. 그치?”
“그랬던 거 같은데.”
“같은 게 아니라 진짜 그랬다고. 시커멓고…… 무게도 장난 아니었는데. 와, 그 손에 감기는 감촉이…… 뭐지, 그게? 고래라도 낚았던 거 아냐?”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돼서도 찰나의 희열감에 도취돼 있다. 그의 단꿈을 깨고 싶지는 않았다. 바다 깊숙이 침잠했던 놈이 들이치는 파도에 수면 위로 솟구치지 않았다면, 그럴 수 있었을 거다.
창수는 불쑥 눈앞에 나타난 폐타이어를 바라봤다. 얼굴은 더없이 허망해졌다. 아니라고 부정해 보려다가도, 그곳에 어김없이 꿰어져 있는 낚싯바늘을 발견한다. 가느다란 줄과 연결된 낚싯대는 부러져 나간 모양새가 어쩐지 제 손에 들린 것과 똑같았다. 여전히 창수를 붙들고 있던 재윤이 눈썹 늘어뜨리며 웃었다.
“확실히 대물은 대물이네.”
“놀리지 마, 새끼야.”
잠시 잠깐의 행복이 깨지자 지레 발끈한다. 그때까지 제 허리에 감겨 있던 재윤의 팔도 대수롭지 않게 떨쳐냈다. 재윤도 스스럼없이 손을 물렸다 한 손으로 잡고 있던 낚싯대에서 다시금 입질이 온 탓이었다. 낚시가 처음이라던 그는 시종 느긋하게 필을 감았다. 잡힌 놈이 버티기에 들어갔을 때 는 순간적인 허릿심을 시용해 어렵지 않게 놈을 밖으로 내동댕이졌다. 또 팔뚝만 한 숭어가 올라왔다. 물고기 주제에 사람을 가리는 건가.
“쟤들 엄만가 보네.”
재윤이 양동이 속 자잘한 놈들을 보며 은근히 창수를 도발했다. 분리한 송어를 보란 듯이 양동이에 던져 넣기도 했다. 펄떡펄떡 꼬리 치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제 노래미와 볼락의 안위가 걱정될 지경이었다.
질 수 없었다. 오랜만에 승부욕이 활활 들끓는다. 창수는 여분으로 가져 온 낚싯대를 준비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각 잡고 정면승부다. 가장 실한 지렁이를 바늘에 꿴 후 몇 발자국 뒤에서 도움닫기 하듯 줄을 던졌다. 하지만 그 직후, 덜컥 몸이 뒤로 당겨지며 브레이크가 걸린다. 재윤이 뒷덜미를 낚아챈 까닭이었다. 기세 좋게 달려가던 창수가 획 뒤를 돌아보며 씩씩거렸다.
“너 이 자식, 방해하는 거나?”
“놔두면 인어공주라도 잡아 기세였어.”
“사람을 얼마나 바보로 보는 거야.”
불만스러운 얼굴로 성가신 손을 떨쳐낸다. 그러곤 얼마 나가지 못한 줄을 거뒀다가 다시 던졌다.
물 쫄딱 뒤집어쓴 탓일까. 날이 완연히 풀렸는데도 거센 바람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젖은 머리카락은 틈틈이 쓸어 넘겨도, 맥없이 흘내리기 일쑤였다. 앞머리가 눈가를 가릴 정도로 늘어지자 새삼 사람이 달라 보인다.
재윤은 입질이 오는 것도 모르고 그런 창수를 낯설게 바라봤다. 뭔에 중하면 그런 얼굴을 하는구나, 새삼 깨닫는다. 숨죽여 곤충을 잡던 어린 시절을 제외하곤 그렇게 열중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예전과 무엇 하나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아도 그에게서도 시간은 홀렸고, 그 역시 어엿한 사내가 됐다.
이윽고 재윤이 잠시 자리를 떴다. 그의 찌가 쉼 없이 잠겼다가 뜨는데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창수는 힐금 재윤을 돌아보다가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용변이 급한 모양이지 싶었다. 내내 눈길은 굽이치는 바다에 두고 있었다.
불시에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목을 움츠리며 부르르 떠는데, 불쑥 뭔가가 등 뒤에서 덮쳐왔다.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에 지레 놀랐다가도 곧 몸이 누그러졌다. 재윤이 담요를 가져와 어깨에 씌워준 것이었다.
“내기도 좋지만 감기 걸려.”
잔소리도 빼놓지 않는다.
창수는 물끄러미 제 젖은 옷을 바라봤다. 아닌 게 아니라 계속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이대로 바람에 말리는 건 어리석은 짓임을 안다. 잠시 고민하다가 훌러덩 입고 있던 셔츠를 벗었다. 그러곤 담요를 망토처럼 목에 두른다. 움직일 때마다 담요가 나풀거리며 속살이 훤히 드러났다. 재윤은 낮게 웃으며 좀 봐줘, 했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구태여 묻지도 않았다.
다시 낚시에 전념하는 동안 점점 파도가 얕고 넓게 퍼졌다. 세차게 풀리던 낚싯줄도 평온해진 바닷물 위에 둥실둥실 뜰 뿐이었다. 간조로 물이 빠진 까닭이었다. 창수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제 낚싯줄을 거둬들였다.
“더 잡고 싶어도 안 되겠다, 야. 슬슬 정산이나 하자고.”
양동이로 향하는 걸음걸이가 사뿐사뿐했다. 안에서 제가 잡아 올린 물고기를 하나하나 꺼내놓으면서 콧노래까지 흥얼거린다. 죽 늘어놓은 물고기는 하나같이 손바닥만 한 것들이었다. 엄지손톱만큼 작은 치어까지 빠짐없이 줄 세운다.
“어떡하면 좋으냐? 살살 봐주면서 했는데도 11대 3이네.”
턱을 한껏 치켜들며 으스대는 게 정말 뿌듯해 보였다. 조금은 협상을 시도해볼 만도 하련만, 재윤은 순순히 패배를 인정했다. 어쩔 수 없지, 하더니 만면에 너그러운 미소를 내건다.
“그래서, 소원은?”
그렇게 나오니 도리어 흥미가 식었다. 공연히 쩨쩨해진 것도 같고. 더구나 재미를 위해서였지, 달리 생각이 있어 내기를 제안한 건 아니었다. 창수는 잡은 물고기를 도로 양동이에 넣으며 대꾸했다.
“그런 걸 허투루 쓸 수 있나. 아껴뒀다 요긴하게 써먹어야지.”
찍 웃어 보이곤 텐트 앞으로 돌아왔다. 잡은 생선을 다는 동안, 재윤은 바비큐용 그릴에 불을 피웠다 갓 손질된 생선들이 나란히 그 위에 놓인다. 소금도 적당히 뿌려 간을 맞췄다.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하면서 타닥타닥 껍질이 튀기 시작했다. 눈알이 하얗게 익으면서, 금세 구수한 냄새가 퍼져나갔다. 잊고 있던 시장기가 극렬히 몰려들었다.
노릇노릇 잘 익은 노래미를 재윤에게 건넸다. 그리고 창수 자신은 그릴에 붙은 살점을 떼어 먹는다. 쫄깃한 살점이 달착지근한 맛을 냈다. 살짝 그은 껍질엔 고소함이 가득했다. 씹을수록 침샘이 자극된다.
재윤은 제 몫을 먹다가도 돌연 그중 얼마를 떼어 창수에게 내밀었다. 뼈까지 샅샅이 발라먹던 창수가 별 거리낌 없이 그것을 덥석 머금었다. 손끝에 단단한 이와 말캉한 혀의 감촉이 연이어 스친다. 묘한 감각이었다. 재윤의 입가에 알게 모르게 곡선이 번진다.
재윤은 그릴에서 알맞게 익은 전어를 집었다. 한창 산란기라 포획이 금지된 어종이지만, 비늘에 걸린 것까지 일부러 놓아줄 필요는 없지 싶었다. 예상대로 알이 통통하게 차 있었다.
창수의 눈알이 집요하게 전어를 좇는다. 어렸을 적부터 이 작은 물고기라면 사족을 못 썼더랬다. 배를 갈라 노랗게 익은 알을 보여주자 입까지 헤벌어졌다. 재윤은 소리 없이 웃으며 살점과 알을 조금 떼 내밀었다. 창수가 입을 헤벌린 채 다가오는 손을 보다가 번뜩 정신을 차린다.
“됐어, 내가 먹을게. 애도 아니고.”
“잔가시가 많아.”
그깟 것 정돈 씹어 먹으면 그만인 걸.
생각하면서도 막상 그 말을 뱉진 않았다. 재윤은 재촉하듯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창수는 뭔가 마뜩잖은 표정으로 버티다가도 결국 입을 벌려 잘 발라진 살을 받아먹었다. 손가락이 입술과 입안 점막에 부드럽게 감싸였다가 놓인다. 창수가 역시 전어가 왕이야. 해가며 찬사를 쏟아내는 동안 재윤은 제 손가락을 의외롭게 바라봤다
“……뭐 하고 놀아?”
한참 골똘히 보느라 돌연 불거진 목소리를 인식하지 못했다. 어느새 창수가 재윤을 빤히 주시하고 있었다. 망연히 보고 있던 손을 내리고, 멍한 표정도 친절한 웃음 뒤로 감춘다.
“미안. 못 들었어.”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여기선 기껏해야 술이나 마시고, 당구 좀 치고, 이런 거 잡는 게 고작이잖아. 서울은 뭐 다른가 싶어서.”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 아닌가? 단지 배 대신 탈 게 더 많고, 잡긴 잡는데 실아 있는 물고기가 아니라 게임 속 몬스터라는 것 정도? 혼자 할 건 많아도 둘 이상만 되면 뭘 해야 할지 난감해지는 곳이지. 선택지가 많으면 결정하기는 더 어렵거든.”
“역시 재미없는 곳이군.”
공연히 애꿎은 자갈을 저만치 집어 던진다. 조금 심통이 난 듯한 모습이었다. 그 이유는 곧 이어진 질문으로 짐작해 볼 수 있었다.
“그런데도 거기가 좋냐, 넌?”
창수는 재윤을 보고 있지 않았다. 부러 피하는 것 같았다 저만치 밀려가는 파도를 보며. 거푸 돌멩이만 던져댔다.
조금은 야속했던 걸까. 숱한 세월이 지나도록 소식 한 자락 전해주지 않아서? 제 발로 찾아오기는커녕 등 떠밀려 온 게 고작이라서? 어느 쪽이든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는 서운함이 손에 잡힐 듯했다.
창수가 만족스러워할 대답을 들려줄 수도 있었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재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편한 게 사실이니까.”
창수는 흐응, 하며 수긍하는 듯했지만 시무룩함까지 감추진 못했다. 괜히 속내를 들킬세라 두툼한 승어를 양손으로 잡곤 양껏 물어뜯는다. 금세 두 볼이 미어터질 것처럼 부풀었다. 입술도 기름에 번들번들해졌다.
물끄러미 보던 재윤이 슬며시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 손이 닿기도 전에 창수가 움찔 고개를 내뺀다. 순간이나마 두 눈도 질끈 감겼다. 의도한 건 아니었던지, 재윤보다 창수 자신이 더 놀란 듯했다. 동그랗게 떠진 눈알이 그저 황망했다. 이제 보니 움츠러든 어깨에도 긴장감이 가득했다.
재윤을 의식해서가 아니었다. 도리어 그라는 걸 인식 못해서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방어 행동이었다. 시야 한 귀퉁이에 타인의 손이 보이면, 온몸이 곧 가해질 폭력을 예감하며 잔뜩 경계태세에 돌입한다. 언제부터인가 그렇게, 습관이 들어버렸다.
깨닫고 나니 가슴이 불편하게 쿵쿵거렸다. 보이지 말이야 할 치부를 들킨 것 같아 귓가와 목덜미 역시 달아올랐다.
창수는 손에 든 생선을 어쩌지도 못한 채 입출을 꾹 다물었다. 다음 순간, 허공에서 굳어 있던 재윤의 손이 그대로 뻗어져 왔다. 그러곤 또다시 움츠러드는 창수에게 기어이 가서 닿는다.
“누가 애 아니래. 여기저기 묻히고 먹는 게 딱 어린앤데.”
어르듯 나긋한 어조가 귓구멍을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창수에게 닿은 손으론 재가 묻은 입가를 가만가만 닦아준다. 창수는 입안의 것을 씹을 생각도 못 하고 멀거니 재윤을 바라봤다. 메스껍게 뛰던 심장이 기어이 멈췄는지, 이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정말 편하고, 필요한 건 모두 다 있는데도 이상하게 허전하더라. 그때 마다 생각났어.”
입술 언저리를 훔치던 재윤의 손이 볼을 스쳐 목덜미로 내려간다. 하지만 그가 눈을 온전히 맞춰오는 턱에 알아차릴 틈이 없었다.
“여기가, 그리고 창수 너도.”
이상했다. 심심한 걸로 둘째가면 서러울 숭어가 심히 달달한 것이.
“아, 뭐래. 누가 너한테 알랑방귀 뀌랬나.”
은근히 재윤의 팔을 밀쳐내며 큰소리쳤다. 하마터면 분위기에 휩쓸릴 뻔했다. 별생각 없이 던진 질문이 어쩌다 그리로 흘렀는지 모르겠다. 다 먹었으면 치우자, 부산스레 몸을 일으키며 괜히 제 머리를 쥐어박는다. 재윤은 그런 창수를 말없이 응시할 뿐이었다.
먹은 것들을 정리하자 슬슬 나른해졌다. 그새 젖어 있던 몸도 마르고 배도 충분히 부른 탓이었다. 내기한답시고 아침부터 계속 몸을 놀렸더니 눈꺼풀까지 급격히 무거워졌다. 고개를 저어 잠을 쫓아가며, 쓰레기 치우기에 여념 없는 재윤을 봤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시야가 너울너울 흔들리기 시작했다. 고개도 의지와 상관없이 앞으로 뒤로 까딱까딱 뒤집혔다.
재윤이 음식물과 타는 쓰레기를 분리해 놓고 돌아섰을 때, 창수는 그새를 못 참고 벌러덩 나자빠져 있었다. 영문을 알 길 없는 재윤이 황망한 얼굴로 달려왔다.
허탈하게도 창수가 쌕쌕 고른 숨을 뱉으며 그를 맞이했다.
재윤에게서 픽 어이없는 웃음이 터진다. 잠시나마 긴장됐던 얼굴도 여지없이 풀어졌다.
두 팔을 만세 부르듯 들고 자는 버릇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한 것 같다.
“…….”
무슨 생각에선지 재윤은 몸을 돌려 창수 옆에 나란히 앉았다. 그러곤 상체를 서서히 무너뜨려 왼팔에 몸을 지탱했다. 달게 뱉는 창수의 숨결이 한층 가까워진다. 안면 근육을 여실히 풀고 잠든 그의 얼굴을 고요히 내려다봤다. 걱정이나 근심 따위를 엿볼 수 없을 만큼 편안한 모습이었다.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해진다.
젖은 머리카락은 그새 부스스하게 말라 있었다. 늘 포마드를 발라 넘겨 버리더니, 순박함을 감추기 위한 노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잦은 염색으로 갈라진 머리카락은 솜털처럼 폭신폭신한 느낌이었다. 그 생경한 감촉을 손바닥 전체로 훑으면서, 흘러내린 앞머리를 이마 뒤로 쓸어 넘겼다. 감춰져 있던 이마의 흉터가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주저하듯 손을 뻗어 그 흉터를 가만가만 쓸어본다. 오직 창수만 담긴 눈동자에 여러 감정이 교차됐다.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은 상처는 다름아닌, 재윤이 만든 것이었다.
◈ ◈ ◈
전화벨 소리만 들려도 깜짝깜짝 잠에서 깼다. 어머니가 오겠다고 약속한 날이면 더 그랬다. 이불 속에 숨죽이고 누워 있노라면 행여 전화가 끊길까 조바심이 났다. 늘 전화기 앞으로 쫓겨 오는 건 이모였다. 집안일을 하다가도, 마당을 쓸거나 텃밭에 물을 주다가도 그녀는 어김없이 달려 들어왔다. 혹시 객일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귀를 쫑긋 세우고 나긋이 울리는 발걸음을 따라갔다. 이모는 전화기 앞에 질게 앉으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 여보세요?
전화를 받을 때만큼은 목소리가 한껏 상냥해졌다. 하지만 곧 어조가 통화 상대방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딱딱해졌다. 한마디, 한마디 쏘아붙이는 말투에선 확신마저 들었다.
기다리라는 대꾸를 끝으로 재차 긴 한숨을 뱉는다. 내 팔자야, 한탄하는 소리가 잇따라 들려왔다 눈을 감았다. 그 직후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
- 전화 받아봐라. 네 엄마다.
꼭 오겠다고, 몇 달 전부터 약속했던 날이었다. 당일에야 급급하게 걸려오는 전화는 편하다. 크게 기대하지도 않았건만 기분이 걷잡을 수 없이 가라앉았다.
미적대고 있으려니 이모가 얼른. 하며 재촉했다. 느리게 일어나는 재윤의 등을 짜증스럽게 떠밀기도 했다.
수화기를 손으로 말아 쥐며. 어머니가 그럴싸한 핑계를 대주길 바랐다. 재윤 자신을 보러올 수 없을 만큼 너무 시급하고 중한 일이 생겼다고. 그녀가 꼭 그곳에 있어야만 누군가를 살릴 수 있다고.
[잘 잤어, 아들?]
하지만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자기야, 나는 크림이랑 설탕 빼고 부탁해. 커피는 한 숟가락 더 넣어주고. 까다로운 취향을 동료가 못 맞춰줄세라 중간, 중간 주문도 확인한다. 딴에는 신경 써서 수화기를 막았겠지만, 전화선을 타고 그런 일상적인 대화가 여지없이 넘어왔다.
[왜 대답이 없어. 엄마 말 듣고 있니?]
- 오늘은 또 뭔데.
[이 녀석이 왜 이렇게 부루퉁해?]
- 어차피 못 온다고 전화한 거잖아.
정곡을 찌르자 기세가 단번에 누그러진다. 본인도 민망함은 아는지 한참 뜸 들이며 말을 골랐다. 그런 와중에도 커피를 가져다준 동료에게 고마워, 하는 걸 잊지 않았다.
[엄마가 오늘은 꼭 가려고 했는데, 일이 많이 바빠.]
- 얼마나 바쁜데? 밥도 못 먹을 만큼 바빠?
[왜 또 그래, 어린애처럼. 다음에 갈게. 뭐 갖고 싶은 건 없어? 필요한 거라든가.]
- 거기 없으면 누가 죽어? 병원에 큰일이라고 나냐고.
분한 마음이 공격적으로 튀어나갔다 묵묵하던 수화기 저편에서 한숨 소리가 새어 나온다. 아마 관자놀이를 지압하며 대강 흘려듣고 있을 거였다.
[엄마 지금 네 투정 들어줄 시간 없어. 아무튼, 다음에 선물 사서 갈게. 이모 바꿔.]
이모에게 수화기를 던져주듯 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밖에서는 어머니와 이모의 통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언제까지 이럴 거냐며, 낮게 책망하는 음성과 한숨이 끊이질 않는다.
혹이었다. 거추장스럽고 쓸모없는. 누구도 떠맡길 원치 않는 폭탄이 된 것 같았다. 사라져도 아무도 모를 거였다. 오히려 잘 됐다며 개운해 할지도 모른다. 막막한 고립감과 소외감에 덩그러니 방치됐다 속 깊은 곳에서부터 뭔가가 썩어나가는 듯했다.
그날은 아침도 먹지 않고 집을 나섰다. 단단히 골이 나, 재윤 자신을 학대하고 싶은 기분마저 들었다.
그때, 눈앞에 창수가 나타났다. 내내 대문 밖을 서성이고 있었는지 재윤의 느닷없는 등장에 어깨를 흠칫 떨었다. 녀석을 보자 잔뜩 굳어 있던 얼굴이 거짓말처럼 풀렸다.
어째서인지 당장의 분한 마음을 그대로 표출해선 안 될 것 같았다. 녀석에게만은 제 초라한 처지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힐금힐금 눈치를 살피던 창수가 넌지시 물었다.
- 아줌마, 왔어?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눈치 없이 바로 왜, 한다.
- 다음에 데리러 온대. 지금은 이사 때문에 준비할 게 많다고.
쌀쌀맞은 대꾸가 튀어 나갔다. 창수가 잘못한 게 아닌데, 갈 곳 없는 분노가 녀석을 향했다. 호기심 기득하던 창수의 얼굴이 조금 허물어졌다. 눈썹 역시 대놓고 살짝 내려왔다. 녀석은 재윤의 거짓말을 조금도 의심하지않는 듯했다.
- 아, 그럼 다음번엔 진짜 서울 가는 거야?
- 안 갈 이유가 없잖아.
한마디, 한마디에 가시가 돋친다. 그러면서도 두 눈은 줄곧 청수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마지못해 그러네, 하는 얼굴이 완전히 침울해졌다.
- 왜.
- 응? 아냐.
- 가지 말까?
여전히 칭수의 낯을 골똘히 관찰하며 물었다. 축 늘어져 있던 녀석의 고개가 반신반의하며 들린다. 동그란 두 눈알이 일말의 희망을 품고 반짝거렸다. 그게 뭐라고, 묘한 희열감이 목덜미를 감쌌다. 손끝이 저릿저릿해서, 창수 몰래 주먹까지 꼭 쥐었다.
- 그래도 돼?
- 그거야 내 마음이지.
- 진짜?
- 내가 안 갔으면 좋겠어?
- 응.
집요하게 파고들자 거리낌 없이 대답한다. 고개까지 쉼 없이 끄덕끄덕했다. 순수한 열망, 관심 어린 눈길, 얼마쯤의 동경과 올곧은 애정. 처음부터 그랬다. 너를 계속 기다렸다며 손을 잡았던 그때부터 줄곧. 녀석은 거절당할 수 있다는 것도, 그게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도, 그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이 겁을 집어먹고 진심을 감추려 든다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가끔은 그 순박함이 얄밉게도 느껴졌다.
- 생각 좀 해보고.
- 언제 결정한 건데?
여지를 두자 초조해 한다. 창수가 그런 식의, 솔직한 반응을 보일 때마다 확인하고 싶어졌다. 재윤 자신은 언제든 녀석을 버릴 수 있지만, 녀석만큼은 자신을 등질 수 없다고. 그 절대적 우위를 확실히 해두고 싶었다.
-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지.
- 내가 어떻게 하면 돼?
곧장 되묻는 창수를 보니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지난번 그가 재윤을 위로해준답시고 만들었던 나무 비행기였다. 뒷산에서 그것을 날렸는데, 얼마날지도 못하고 고목에 걸려 버렸다. 오래된 만큼 썩은 가지가 많아서 올라가 수거해 올 엄두도 내지 못했다.
- 전에 그 비행기 내려줄래?
- 그치만 그거. 너무 높은 데 걸려서 위험한데.
- 나 주려고 만든 거잖아.
- 내가 새로 만들어주면 안 돼?
- 안 돼. 지금 당장 갖고 싶어.
누구에게든 투정을 부리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더라도 녀석을 그렇게까지 내몰 필요는 없었는데.
창수는 오래 망설이지 않았다. 재윤에게 먼저 학교에 가라더니 그 길로 당장 뒷산에 올라갔다. 재윤은 부리나게 뛰어가는 녀석의 뒷모습을 얼마쯤 지켜보다가 유유히 학교로 향했다.
어른들이 선생님을 부르러 달려온 것은 수업이 막 시작됐을 즈음이었다. 창수가 나무에서 떨어져 머리를 다쳤다고 했다. 당시 섬 내 의료기관이라곤 보건진료소가 전부라서, 응급헬기부터 호출했다. 금세 작은 마을이 발칵 뒤집혔다.
재윤은 선생님을 따라 어촌계장의 집으로 달려갔다. 붉은 피에 젖은 수건이 마루 곳곳에 널려 있었다. 무거운 공기가 폐를 딱딱하게 굳혔다. 숨을 양껏 들이마셔도 가슴이 답답했다.
몰려 있던 어른들 틈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지독한 초조함이 몰려들었다. 창수가 크게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 생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속이 바짝바짝 탔다.
창수는 마루에 곱게 누워 있었다. 녀석의 얼굴이 온통 피범벅이었다. 이따금 잔기침하며 붉은 피를 토해내기도 했다. 숨을 뱉을 때마다 목에선 가르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두려웠다. 눈앞이 컴컴해져서 제대로 앞을 볼 수 조차 없었다.
피를 철철 홀리면서도 녀석은 울 않았다. 도리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 있던 재윤을 발견하고는 헤실 웃었다. 그러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나무 비행기를 내밀었다.
- 이제 서울 안 갈 거지?
난생처음으로, 엉엉 목 놓아 울었던 것 같다.
◈ ◈ ◈
숨을 뱉을 때마다 가지런한 속눈썹이 나풀거렸다. 그저 보고 있을 뿐인데도 간지러움이 느껴지는 듯했다. 이마 위 상처를 더듬던 재윤은 창수의 콧등을 따라 손가락을 미끄러뜨렸다. 이내 손끝이 그 아래 얕게 다물린 입술 위로 떨어진다.
창수를 보던 눈길도 한층 나른해졌다. 입술선을 가만히 덧그리다가 도통한 아랫입술을 살짝 늘러 벌렸다. 달게 뱉는 숨이 살며시 새어 나왔다.
휴대폰이 울린 것은 그 직후였다. 소리의 정체를 쫓아 주변을 살펴봤다. 곧 시야 한 귀퉁이에 창수의 주머니에서 비어져 나은 휴대폰이 걸렸다 요란한 디스코 멜로디가 한적한 분위기를 엉망으로 흔들어 놓는다. 재윤은 픽 마른 웃음을 터트리며 기울였던 몸을 물렀다. 뒤이어 세상모르고 자던 창수가 가물가물 눈을 떴다.
“잘 잤어?”
“…… 응? 나 언제부터 잤냐?”
창수가 눌린 머리를 긁적이며 사위를 두리번거린다. 먹고 바로 자서 그런가. 속이 영 부대끼는 것 감았다 재윤은 전화 왔는데, 하면서 그사이 바닥으로 떨어진 휴대폰을 턱짓했다. 그제야 창수의 눈길도 그쪽을 향한다.
발신자는 윤삼이었다. 미리 귀띔해뒀기 때문에. 창수가 오늘 일을 쉰다는 건 그도 알고 있었다. 낚시를 위해 배까지 빌렸다는 것 또한. 그런데도 전화했다는 건 어지간히 급한 일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아직 가게 문을 열 때가 아니라 짐작 가는 바는 전혀 없었지만.
잠시 뜸 들이는 동안 벨 소리가 멎었다. 하지만 금세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발신자는 윤삼이었다. 창수의 얼굴에 성가신 기색이 역력해진다.
“아, 뭐야.”
“왜 안 받아? 곤란한 전회야?”
“아니…… 밑에 있는 놈 전환데, 받으면 귀찮아질 거 같아서.”
“그러지 말고 받아 봐. 급한 일일지도 모르잖아.”
그러면서 재윤은 몸을 일으켜 바닷가로 걸어갔다. 기껏 자리까지 피해줬는데, 안 받기도 그랬다. 별수 없이 통화 버튼을 터치하며 구시렁거렸다.
“새끼가 산통 깨는데 뭐 있다니까…… 내가 오늘 놀러 간다고 했냐, 안했냐? 뭔 일인데 전화질이야?”
그러나 형님, 하는 윤삼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다급했다. 불만 기득하던 창수의 표정이 차츰 얼어붙는다.
“……뭐? 길녀가?”
날카로운 음성에 재윤이 슬며시 돌아본다. 잠깐 사이 창수의 낯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일았어. 지금 당장 갈게. 서둘러 통화를 마치는 어조도 잔뜩 경직됐다.
이상을 감지한 재윤이 걱정 어린 표정으로 다가왔다 창수는 그에게 상황을 설명하기 전에 다시 어딘가로 전화부터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지나가고, 상대가 의아해하며 전화를 받았다.
“형님. 난데, 지금 데리러 와줄 수 있어요? 급하게 가볼 데가 생겼어.”
용건만 간단히 전하고 통화를 끊는다. 다음엔 뭘 해야 하지? 주위를 분주하게 돌아보는 모습이 경황이라곤 없어 보였다. 잠자코 지켜보던 재윤이 창수의 팔을 붙들어 당겼다. 그제야 비로소 눈을 맞춰온다.
“왜. 길녀 씨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어?”
“그게…… 나중에 얘기해줄게. 나도 가 봐야 상황을 알 것 같아서. 미안하다 기껏 시간 내서 나왔는데.”
“아냐. 길녀 씨 일이면 네가 가 봐야지.”
고맙다며 재윤의 등을 두드리곤 짐부터 쌌다. 재윤도 나서서 텐트를 거둬들였다. 순식간에 정리를 마치곤 아직 오지 않은 배를 기다렸다. 휴대폰을 꼭 쥐고 있던 창수의 손이 초조함에 떨리고 있었다.
그것을 가만히 응시하던 재윤의 뺨이 굳었다. 물론 창수는 그 변화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형님!”
사무실로 달려갔을 때, 윤삼은 문 밖에서 발만 동동거리고 있었다. 볼은 발갛게 부어 있고, 코에선 피가 줄줄 흘렸다. 말리다가 쥐어터진 모양이었다. 복도까지 만용의 고함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정확히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었다.
“어떻게 된 거야?”
“그게…… 아니, 어젯밤에 웬 아줌마가 가게로 찾아왔더라고요. 것도 하필 사장님 계실 때요. 다짜고짜 길녀 누님 찾으면서, 그 화냥년 어디 갔느냐고 길길이 날뛰잖아요. 무슨 일이냐, 그러니까 자기 남편이 누님이랑 눈 맞아서 야반도주했다는 겁니다. 사장님이 그 얘길 듣곤 길녀 누님 찾아보라고 하셨고요. 그런데 집에도 안 계시고, 전화도 안 받으시더라고요. 몸이 좀 안 좋다고. 그날은 일도 안 나오셨거든요.”
그럴 리가. 지난밤 길녀는 분명히 출근한다며 집을 나섰다. 낚시하러 갈 생각에 제대로 살피지 못했지만. 평소와 비교해 특별히 다른 점도 없었다.
짐도 따로 생기지 않았고, 겨우 손바닥만 한 가방 하나만 멨을 뿐이었다. 최근 들어 부쩍 귀가가 늦어지긴 했어도.
“그 아줌마가 둘이 영광에 살림 차리려고 한다고, 웬 주소 던져줘서 거기까지 갔다 왔다는 거 아닙니까. 진짜 그 아줌마 남편이란 작자랑 그 집에 계시더라고요. 누님도, 저도 그 개자식이 아내하고 사별하고 혼자됐다기에 그런 줄만 일았죠. 워낙 점잔 빼기도 했고…… 아, 빨리요. 형님. 이러다 길녀 누님 죽어요.”
윤삼이 자초지종을 설명하다 말고 창수에게 매달렸다. 아닌 게 아니라, 상황이 그렇다면 더 지체할 틈이 없었다. 덜컥 문손잡이를 돌려봤지만, 역시 잠겨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다가 복도에 놓인 소화기를 발견했다.
“나와.”
윤삼이 얼른 옆으로 비켜선다. 창수는 잠긴 문 쪽으로 달려들며 손잡이에 소화기를 내려졌다. 두어 번 만에 손잡이가 혈거워지더니 문이 맥없이 벌어졌다. 급격히 열린 문틈으로 잠시 숨 돌리는 만용과 쓰러진 길녀의 모습이 가감 없이 드러났다.
만용은 잔뜩 흐트러진 몰골로 천천히 뒤돌아봤다. 땀으로 홍건히 젖은, 귀신같은 얼굴이었다.
“뭐야. 내가 아무 새끼도 들어오지 말랬지?”
낮게 으르렁대자, 윤삼이 제 큰 몸을 창수 뒤로 숨긴다. 창수는 그에게 여기 있어, 하고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힐금 본 길녀에게선 움직임이 거의 없었다. 다만 구둣발에 밟힌 손가락이 가늘게 떨릴 뿐이었다.
“만용아, 왜 그러냐. 아무리 화가 나도 여자는 때리지 말아야지.”
평소의 속없는 웃음을 드리우며 만용에게 다가갔다. 비위 맞춰 살살 달래는 것이 기장 무난하게 상황을 종료시길 방법이었다. 마음 넓은 네가 참아. 하는데 다짜고짜 뒤통수를 후려갈긴다.
“지금 웃음이 나오나? 상황 파악 안 되지?”
“아니, 얼추 듣긴 했어. 했는데…… 그래도 말로 하자. 도망갔다는 증거도 없잖아. 왜 그랬는지는 물어봤어?”
“같이 있던 놈이 몇 달 전부터 가게 뻔질나게 드나들던 그 새끼란다. 그 새끼 마누라가 있는 데 불었으니까 찾았지, 안 그랬으면 이년 그대로 잠수 탔을 걸? 기껏 지 생각해서 2차 자리도 마련해주고 그랬는데, 그런 거 이제 안 한다고 비싼 척 지랄해대더니. 그 이유가 남자였어. 임자 있는 놈이랑 새살림 차리려고, 이 쌍년이.”
분이 치솟는지 재차 길녀를 걷어차려고 한다. 얼른 그 앞을 막아서며 만용을 다독였다.
“에이, 정말 그랬으려고? 잠깐 그 새끼 지내는 데 가서 데이트한 걸지도 모르잖아. 놔뒀으면 제 발로 돌아왔을 건데. 쟤 팬티 한 장 안 가져갔어.”
기어이 정강이를 걷어차였다. 격한 통증에 다리를 붙잡으며 주저앉았다. 만용은 멈추지 않고 창수의 어깨를 발로 밀듯이 걷어찼다. 벌러덩 나자빠지면서 길녀 옆에 쓰러졌다. 눈이 마주쳤다. 길녀는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가늘게 눈을 뜨고 있더니, 이내 그마저 감아버렸다.
“이 시발 게, 지 몸만 갔는지 알아? 니 새끼 열쇠 가져다 여기 있는 돈 싹 털어서 튀었다고! 내 돈을! 어? 이 쌍년이 감히 김만용이 돈에!”
“……윽, 그게 어떻게 네 돈이야. 팔 거 못 팔 거 다 내다팔아 번 내 돈이지. 빚 다 갚은 지가 언젠데. 네가 그러고도 사람 새끼나?”
길녀가 눌린 목소리를 짓이겼다. 그새 눈을 치뜨고 만용을 죽일 듯 노려보기도 했다. 제발. 눈빛으로 호소했지만, 그녀는 물러설 기미가 없었다.
“근데 이년이 아직 덜 맞았나. 뭘 잘했다고.”
이기지 못한 만용이 길녀의 복부를 걷어찼다. 그 충격으로 그녀의 몸이 격하게 들썩였다. 묵직한 신음이 터져 나온다. 창수는 황망히 만용의 다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그러나 만용은 그를 확 걷어차서 떨쳐내곤 재차 길녀를 밟고 걷어찼다.
다시 몸을 일으켜 만용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몇 번이고 밀쳐졌다. 급기야 창수는 쓰러진 길녀를 제 온몸으로 감싸 안았다. 그럼에도 만용의 발길질은 서슴없었다.
“나와, 새끼야! 오늘 이년 버릇 단단히 고쳐놓을 거니까!”
“제발, 만용아. 길녀가 진 빚이랑 이자 내가 다 갚겠다고 했잖아. 여기서 가지고 나간 것도 다 갚을게. 그러니까 마음 좋은 네가 한 번만 봐줘. 다른 새끼랑 도망갈 궁리 한 것도 결국 다 나 때문이야. 내가 제대로 관리 못 해서 그래. 그러니까 그만하자. 응? 내가 더 열심히 할게. 이러다 초상 치르겠어.”
길녀를 대신해 싹싹 빌었다. 그러나 만용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그는 덜컥 창수의 머리카락을 움켜쥐더니 그를 반쯤 일으켜세웠다. 머리카락이 뿌리째 뽑혀나갈 것만 같았다.
“나는 너 그 병신 같은 태도도 졸라 마음에 안 들어. 좆같은 게 계집년 가랑이나 빨면서 남자 망신 다 시키고. 그 비루한 몸뚱이, 백날 굴려봤자 십 원 값어치나 되는 줄 알아? 나나 되니까 무식한 니 새끼 의리로 데리고 있는 거지.”
“그럼 알지.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
“고맙게, 생각한다는, 새끼가, 되바라지게, 씹할, 나설 데를 못 가려?”
한 어절, 어절마다 후려친다. 금세 왼쪽 얼굴에 감각이 없어졌다.
삽시에 피부가 부으면서 덩달아 시야도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코피가 터져 제 손이 더러워지자 만용이 쯧, 혀를 차며 창수를 내던지듯이 밀쳐냈다. 창수는 그 와중에도 꾸역꾸역 길녀를 안으며 온몸으로 보호했다.
만용에게서 헛웃음이 터진다. 그는 끄덕끄덕 작위적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곤 천천히 돌아서서 제 셔츠를 풀어헤쳤다. 땀에 젖은 옷을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내던진 그가, 제 앞에 놓인 두 사람을 까마득하게 내려다 봤다.
“자고로 말 안 듣는 개새끼들은 그저 매가 답이야.”
무자비하던 폭력은 만용의 기력이 다할 때까지 계속됐다. 몇 번이고 헛발질을 거듭하고야 그는 제풀에 나가떨어졌다. 거지 같은 년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욕하더니 옷가지를 집어 들고 밖으로 나갔다. 복도에서 벌벌 떨던 윤삼에게 차 키를 넘겨주던 모습과 윤삼이 눈물범벅 된 얼굴로 돌아보던 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동이 터오고 있었다. 꿈질꿈질 자꾸만 까라지려는 몸을 일으켰다. 가장 먼저 한 것은 길녀의 호흡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미약하지만, 숨소리가 들렸다. 창수는 그렇게 앉아서 쓰러진 길녀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는 만용에게 빚이 있었다. 보다 정확하게는 만용의 아버지에게 사채를 빌린 거였다. 그의 부친이 죽으면서 만용과의 채무관계가 형성됐다.
그 과정에서 만용이 새로 개업한 나이트로 직장을 옮겼고, 창수와도 만났다. 벌써 5년여 전의 일이었다.
언제라도 한 번 제 사정을 속 시원하게 말하지 않는 계집이었다. 그 때문에 칭수조차도 그녀의 과거를 잘 알지 못한다. 그저 남자를 잘못 믿었다가 밤무대나 돌게 됐고, 빚 역시 남자 때문에 지게 됐다는 얘기를 언뜻 들었을 뿐이다. 이 바닥 사정이랄 게 그리 특별할 것도 없어서 짐작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때 지난 아픔이 상처가 될 세라 길녀에겐 더 자세히 묻지도 못했다.
어쩌다 살 부대끼며 살곤 있어도 서로에 대한 감정은 동정, 혹은 그보다 깊은 인정을 넘지 않았다. 친구라기에는 애매하고 연인이라고 하기에도 한참 못 미친다. 아픔이 아닌 위로가 될 수 있는 관계. 동거할 순 있어도 가족이 될 수는 없는 사이. 때때로 길녀와 꾸리는 가정을 상상해본 적은 있다. 하지만 길녀가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병신 새끼…… 네가 뭐라고 내 매를 대신 맞아?”
지난 생각에 잠겨 있는데. 길녀의 목소리가 귓전에 닿았다. 형편없이 갈라져서 하는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순 없었다. 돌아보니 일어나려고 몸을 부단히 옴짝거리고 있었다. 창수는 얼른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다. 길녀는 바닥에 피 섞인 침부터 뱉었다. 그러곤 창수에게 손을 내민다. 창수는 눈치껏 주머니를 뒤적여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주었다.
“니 새끼가 뭔데 내 빚을 대신 갚느냐고.”
“내가 서방이니까, 이년아.”
“지랄. 내가 그러라고 너 데리고 살이준 줄 일아? 병신 같은 게 좆 빠지게 일해선 돈도 제대로 못 받고. 돈 귀신 새끼 배만 불려주면서 굽실굽실.”
대놓고 비웃으며 푹 담배 연기를 뱉어낸다.
벽에 기대 담배를 태우는 모습이 어딘가 모르게 쓸쓸해 보였다. 시선을 허공에 내던진 채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도 많았다. 그러나 어떤 질문도 섣불리 꺼내지 못했다. 피식 자조적인 웃음을 터트리다가 황망히 고개를 돌리는 모습에, 어떤 말도 해선 안 될 것 같았다. 서둘러 홈치는 길녀의 볼이 젖어 있었다.
창수는 담배 연기가 잦아들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 그러다가 한참 만에야 제 등을 길녀에게 내보였다.
“집에 가자.”
“나와. 걸어갈 거야.”
“사람 그만 좀 등신 만들고.”
“…….”
길녀는 제 앞에 놓인 창수의 등을 빤히 봤다. 좋다고 놀러 갈 준비하던게 선명한데, 안 그래도 왜소했던 몸이 더 쪼그라진 듯하다. 마지못해 그 등에 업혔다.창수의 목을 자연스럽게 끌어안는 팔에 바짝 힘이 들어간다.
창수는 길녀의 넓적다리를 두 팔로 휘감고 천천히 일어났다. 온몸이 욱신거렸지만, 입을 굳게 다물고 참는다.
느릿느릿 층계를 내려와 아직 이른 아침을 걸었다. 사무실에서부터 집까지는 도보로 20여 분이 걸린다. 늘 오가느라 눈 감고도 찾아갈 그 길이 유독 곤하게 느껴졌다.
“뭐 하는 사람이었어?”
한참을 말없이 걷다가 어렵사리 입을 뗐다. 대꾸는 돌아오지 않았다. 목을 감은 팔 부쩍 힘이 들어간 걸 보면, 잠든 건 아닐 터였다.
“전에 꽃 보내준 그 새끼 맞지?”
이번에도 달리 대답은 없었다. 창수의 고개가 푹 숙여진다. 얼굴은 보다 더 시무룩해졌다.
“만용이 보자마자 너 버리고 도망갔다며, 그 새끼. 마누라랑 애새끼들까지 배신하고 갈 정도였으면 너 하나는 끝까지 지켜줬어야지. 졸라 개새끼다. 어떻게 여잘 놓고 저 혼자 튀어? 그런 건 잡아다가 좆을 잘라놔야 돼. 사내구실 못하게 돼야 정신 차리지.”
길녀를 대신해 옴팡지게 욕지거릴 쏟아낸다. 배신당한 건 길녀건만, 제가 더 분한 얼굴을 했다. 숨소리도 금세 씩씩 거칠어진다.
“차라리 잘 됐어. 그런 인간 덜된 쌍놈 새끼랑은 엮여봤자 살기만 퍽퍽해지지. 그냥 똥 한 번 제대로 밟았다 생각해.”
“시끄러.”
“몸은 어때? 많이 아프면 병원 들렀다 갈까?”
“닥치라고.”
“못된 년. 걱정해줘도 지랄이야.”
꿍얼거리면서도 길녀의 몸을 한 차례 추켜올린다. 그 뒤론 한마디 말도없이 걸음만 재촉했다.
집에 도착해선 이불부터 깔았다. 길녀가 옷도 벗지 않고 그 안으로 파고들어 갔다.
창수는 뜨거운 물을 데워 마른 수건과 함께 쟁겨왔다. 물에 적신 수건으로 길녀의 얼굴과 손을 닦아준다.
“꺼져.”
길녀는 거푸 창수의 손길을 떨쳐냈다. 그럼에도 꿋꿋이 손을 도로 붙들고 잠자코 닦아주었다. 피부가 어느 정도 말끔해진 후에는 연고를 가져다가 상처 부위에 살살 펴 발랐다. 뼈나 장기의 손상도 염려됐지만, 일단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잠자리를 봐주는 동안 얌전해졌다 싶더라니, 어느새 길녀가 깊은 날숨을 뱉어내고 있었다. 어렵사리 잠든 눈가가 여전히 젖어 있다.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창수의 얼굴도 덩달아 우울해진다.
길녀를 재운 뒤 수돗가에 쪼그리고 앉았다.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옆구리며, 넓적다리며 안 쑤신 구석이 없었다. 낑낑대며 찬물을 퍼다 세수부터했다. 찢어진 상처에 물이 닿자 형언 못 할 따끔거림이 올라왔다. 몸을 꼼질꼼질 움찔거리며 겨우 세면을 마친다.
먼지 범벅이 된 옷가지를 세탁기에 던져놓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화장대에 놓아둔 연고를 집다가 무심코 거울을 봤다. 꼴이 말도 아니었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여기저기에 멍이 들 것 같다.
한숨 쉬다가 불현듯 제 앞머리를 들춰본다. 머리카락에 가려졌던 홍터가 여지없이 드러났다. 어릴 적에 나무를 탔다가 떨어져 생긴 상처였다. 정확히 어쩌다 그 지경이 됐었는지는 사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할머니가 조상님들의 은덕으로 겨우 죽다 살아났다기에 그랬구나, 할 뿐이었다. 사내아이에게 까불다 다치는 건 밥 먹는 것만큼 흔한 일이니까.
흉이라면 그것 말고도 몸 이곳저곳에 많았다. 얼굴에 남은 것이라지만, 그간 머리를 다 넘기고 다닐 만큼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제 와 눈여겨보는 건 그렇게 흉한가 싶어서였다. 몇 번이고 쓸어보고 만져보고 할 만큼?
다급한 상황이 종료되니 낮의 일이 떠올랐다 섬에서 어떻게 잠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식곤증 때문에 꾸벅꾸벅 졸았던 것은 생각이 나는데, 도중부터 의식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누군가 다가와 앉는 기적에 청각이 반응했다. 코끝을 스치는 향기로, 재윤임을 알았다.
일어나야지, 생각했을 때 불현듯 이마 위 흉터에 그의 손이 와 닿았다. 눈을 뜨려다가도 그대로 굳고 밀았다 왜인지 그대로 눈꺼풀을 들면 안 될듯했다.
아직 몸이 잠들어 있었던 까닭에 간지러운 접촉은 참을 수 있었다. 이내 재윤의 손끝은 유려하게 콧대를 따라 움직였다. 그에게서 늘 풍기던 향취가 물씬 짙어졌다. 연이어 입술로 내려온 손가락에 살며시 힘이 들어갔다. 초조해졌던 것 같다. 놀란 마음에 제멋대로 쿵쾅대는 심장 소리가 재윤에게까지 들릴까봐.
“…….”
물끄러미 거울을 봤다. 답답한 표정을 한 창수 자신이 거기에 비친다. 얄궂은 장난을 치는 거라고 생각했다. 잠든 사람 얼굴에 낙서하거나, 괜히 꼬집거나, 간질이는. 그래서 그다음에 무슨 짓을 하려나 지켜보려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상황을 봐서 반격해 줘야지, 장난스러운 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한참 기다려도 뭐가 더 없었다. 손이 떨어져 나간다 싶더니, 다른 뭔가가 얼굴 가까이 다가왔던 것 같다. 다만 눈을 감고 있어서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재윤에게서 풍기던 특유의 향취는 좀 더 짙어졌고, 옅은 숨결 같은 것이 거푸 얼굴에 끼쳐졌다는 것밖에는.
문득 제 입술을 만지작거린다. 별 의미 없는 스킨십 같은 거였을까. 그게 아니고서야 달리 그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 이후엔 윤삼의 전화를 받느라 제대로 확인해볼 틈도 없었다. 대놓고 물어봐도 이상했겠지만.
애꿎은 머리카락을 긁적였다. 그 직후였다. 휴대폰 벨 소리가 현란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한 것은.
도둑질하다 들킨 것처럼 으악, 소리치며 어깨를 떨었다. 벗어둔 바지 주머니 안쪽에서 휴대폰이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그것을 귀신 보듯 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말이지 심장이 벌렁벌렁했다.
겨우 놀란 가슴을 다독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대폰을 슬며시 꺼내보니 ‘재윤’이라는 발신자 이름이 뜬다. 늘씬하게 얻어맞느라 몰랐을 뿐이지, 부재중 통화도 벌써 몇 십 통이나 들어와 있었다. 선착장에서부터 뒤도 안 돌아보고 뒤어갔으니 걱정히는 것도 당연했다. 행여 걸려온 전화가 끊길세라 얼른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여보세요?”
[이제야 받네.]
안도하는 한숨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자다가 깬 탓인지 목소리는 평소보다 가라앉아 있었다. 공연한 죄책감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아, 미안. 그러고 가서 걱정했지?”
[안 그랬다면 거짓말이고. 괜찮아?]
“응. 아무 일 없어.”
[길녀 씨는?]
“지금 자고 있어.”
힐금 돌아보며 대꾸했다. 다행이네, 하는 소리가 귀에 달게 감겼다. 예의상 뱉고 보는 말이 아닌 듯했다. 별것도 아닌데 위로받는 기분.
그래서일까. 문득 재윤이 보고 싶었다. 낮 동안 같이 있었는데도. 지금의 갑갑한 심정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고, 그리고…….
별안간 섬에서의 일이 떠오른다. 삽시에 얼굴이 홧홧해졌다.
그때, 무슨 장난을 치려고 했던 거야? 실은 나 살짝 깨어 있었다고.
놀리듯 물어볼 수도 있었다. 차라리 그편이 속 시원하고 간단할 거였다.
공연한 망상에 혼자 끙끙댈 필요도 없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역시 대놓고 물어볼 엄두가 안 났다. 재윤을 보고싶다는 것 또한 취소다. 지금 만나면 아마 우스꽝스러운 얼굴이 될 거였다. 귀엽지도 않은 사내놈 주제에, 징징거리는 건 꼴사나을 뿐이다.
[혹시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돼?]
오랜 침묵에 재윤이 조심스레 운을 뗀다. 물론 대답할 수 없었다. 오늘의 일은 오롯이 칭수 자신만의 문제도 아니거니와 지금은 재윤과 통화하는 것 자체가 고역이니까.
제멋대로 망상을 폭발시키는 머릿속 때문에라도.
“그, 다음에…… 다음에 가서 말해줄게.”
급급하게 곤란한 상황부터 모면하고 본다.
[일았어 그럼. 오후에 일 나가야 할 텐데 그만 자.]
재윤 역시 창수를 더 난처하게 하진 않았다.
“너, 너도 잘 자.”
서둘러 인사하곤 통화를 마쳤다. 다소 가빠진 숨소리가 민망하게 두 귀를 파고들었다.
얼떨떨하게 돌아본 거울에서, 창수 자신이 단단히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