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오후 들어 환자가 줄기 시작하더니, 다섯 시 즈음엔 발길이 뚝 끊겼다. 농번기에 접어들면서 덩달아 찾아온 여유였다. 바쁠 땐 아픈 줄도 모른다더니, 종일 찾아오는 환자라곤 지병을 가진 노인들뿐이었다. 농사고, 조업이고 때를 놓치면 1년이 망치는지라, 읍내에도 나다니는 사람이 드물었다.
덕택에 미뤄두기만 했던 진료기록을 정리할 여력도 생겼다. 3년에 한 번씩 담당자가 갈아치워지다 보니 의료 관련 자료도 제각각이었다. 대개 전산화됐다지만, 이전 데이터들은 고스란히 방치된 상태라 한 번쯤은 정리해야지 싶었더랬다. 2년 반 남짓 눈 딱 감고 불편함을 감수할 법도 하련만, 그럴 성미도 되지 못했다.
케케묵은 자료들을 구분해 놓던 재윤이 문득 한 환자의 진료 기록에서 손을 멈춘다. 이름을 비롯한 신상 정보가 막연히 어떤 대상을 연상시켰다. 잠시 기억을 되짚고 있을 때쯤, 김 간호사가 진료실로 들어왔다.
“도와드릴까요?”
“아닙니다. 이런 건 원래 한 사람이 처리해야 더 금방 끝나니까요. 그보다 김 선생님. 혹시 이분에 대해서 아십니까.”
김 간호사가 얼른 다가와 진료 기록을 확인했다. 임병호 씨, 하면서 몇번이고 이름을 되뇌더니 곧 나지막한 탄성을 터트렸다.
“아, 이분 알아요. 그러고 보니 요샌 통 안 오시네.”
“그동안 진통제만 처방된 것 같던데.”
“네. 암 환자셨거든요. 큰 병원에서도 손 쓸 도리가 없대서 집에서 요양하신다고 들었어요. 기력이 쇠해진 뒤로는 배 타고 나갈 엄두가 안 나신다면서, 줄곧 여기서 진통제 처방받아 가셨고요. 잘 지내시나 모르겠네. 그런데 이분은 왜요, 선생님?”
재윤은 자신 없는 표정을 지었다.
“성함이나 연령대 같은 게 눈에 익어서요. 제 중학교 시절 은사님도 이정도 연배에, 성함까지 같았거든요.”
“맞다. 학창시절은 이 지역에서 보냈다고 하셨죠? 혹시 이 옆 영정도에서 중학교 다니셨어요?”
“네.”
“그럼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편찮으시기 전에 그곳에서 교편생활 하셨다고 들었거든요, 이 환자분.”
“아, 그렇습니까. 보통 어떻게 하나요?”
“네? 어떤…….”
“이 환자분처럼 지병이 있는데 발길이 뜸해지거나 운신하기 어려운 분들 말입니다. 보건지소 차원에서 도와드릴 방법은 없나 싶어서.”
뜻밖의 발언이었을까. 새삼 놀란 눈을 하던 김 간호사가 소리 없이 미소 짓는다. 재윤은 이따금 요즘 사람 같지 않을 때가 있다. 어른들에겐 싹싹하고 어린아이들에겐 다정하고, 일 처리엔 융통성까지 갖췄다. 지극히 도회적이던 첫인상과는 확연하게 다르다. 앞으로가 기대되는 인물이었다.
뿌듯하게 바라보는 것도 잠시, 김 간호사는 잠자코 이전에는 어떻게 했는지를 떠올렸다. 확실히 오늘만의 고충은 아니었다.
“남다른 열의를 가진 분들은 친히 왕진 다니고 그러셨죠. 요새 젊은 선생님들은 대개 모르는 척하시지만요. 덮어놓고 흉보기 뭐한 게, 사실 찾아오는 환자 돌보기만도 힘들잖아요. 딱히 의무인 것도 아니고.”
“오늘 퇴근 후에는 저도 왕진이란 걸 해봐야겠네요.”
“네? 이렇게 갑자기요? 아직 주소만 가지고 집 찾기 어려우실 텐데. 저도 같이 갈까요?”
“괜찮습니다. 잘 모르겠으면 이웃 분들께 여쭤보면 되죠. 김 선생님 자녀분들한테 업무시간 외에까지 엄마를 뺏는 건 너무 미안해서요. 괜찮으시면 퇴근하기 전에 같이 찾아뵐 분들 리스트 좀 뽑아주시겠어요?”
“그럴게요.”
대꾸하고 돌아서던 김 간호사의 만면에 뿌듯함이 넘실거렸다. 그녀가 돌아간 뒤 다시 진료기록을 살피는 재윤의 낯은 거짓말처럼 굳어 있었다.
◈◈◈
아침에 눈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 늘 붙어 지냈다. 재윤에게 독감이 찾아왔을 때도, 창수가 홍역으로 앓아누웠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분간은 같이 어울려 다니면 안 된다. 거듭된 당부에 고개를 끄덕이고도 어른들의 눈을 피해 서로의 방 창문을 노크했다. 수풀이 잔뜩 우거진 뒤뜰이나 야트막한 담장에 기대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이따금 벌레에게 물어 뜯겨 발로 다리를 슬슬 문질러가면서도, 해가 지도록 떠들다가 아쉽게 헤어지곤 했다.
어른이 될 때까지 그렇게 지낼 거라 생각했다. 재윤이 서울로 가버리지 않고 계속 남아 있어 준다면,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중학생이 되면서부터는 이웃의 큰 섬으로 여객선을 타고 등교했다. 외딴섬 출신이란 이유로 처음 1년은 재윤과 한 반이 될 수 있었다. 학교의 규모는 두 사람이 다니던 분교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한 학년에만 일곱 개의 학급이 있었고, 각 반의 총원은 마흔 명에 육박했다.
금세 재윤 외의 다른 친구들도 생겼다. 하지만 창수와 마음이 잘 맞는 녀석들은 좀처럼 재윤과 어울리지 못했다. 재윤 주변에 모여들던 녀석들 또한 창수에겐 영 재미가 없었다. 하나같이 계집애처럼 얌전하고, 두툼한 안경을 쓴 책벌레들이었기 때문이다.
쉬는 시간이면 친구들과 나가 공을 차고 놀았다. 재윤은 처음 두어 번은 어울려주더니, 차츰 거절하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 등하교할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체육 시간을 포함한 활동 시간에도 여전히 둘은 단짝이었지만 서로가 없어도 되는 시간이 조금씩 늘어났다.
쉬는 시간마다 나가서 놀다 보니 수업은 자장가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공부를 잘해야 할 이유가 없어서, 꾸벅꾸벅 조는 것에도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도리어 창수에게는 재윤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수 백 명이 모여 있어도 우물 안 개구리인 것은 매한가지였다. 그중에 재윤처럼 공부에 열의를 보이는 녀석은 거의 없었다. 한국 특유의 뜨겁다 못해 살인적이라던 학구열조차 그 섬마을까지는 닿지 못했다.
가끔은 재윤이 이제껏 알았던 녀석과 전혀 다른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한참을 졸다 깰 때면 그는 늘 꼿꼿하게 허리를 편 채 칠판을 응시하고 있었다. 곧은 목과 진중하기 짝이 없는 눈빛. 낯설 만큼 움직임이라곤 없는 옆모습. 새하얀 그의 손이 팔랑팔랑 교과서를 넘기고, 그곳에 깨알 같은 글씨들을 수놓았다. 모르는 게 있을 땐 손들고 질문하는 것에 스스럼이 없었다. 성적이야 당연지사 좋을 수밖에.
- 공부해서 뭐하려고?
그렇게 물으면 재윤은 어깨를 으쓱였다.
- 생각해둔 게 없으니까 하는 거야.
- 고생스럽잖아. 이다음에 하게 될 일이 지금 하는 공부랑 전혀 상관없을 수도 있는데? 기껏 공부했는데 어부가 돼 버리면 어쩔 거냔 말이야.
- 그냥 기본 같은 거랬어. 하고 싶은 일이 생겼을 때 후회하지 않으려면 이 정돈 해둬야 한다고.
- 누가? 아줌마가?
되묻는 말엔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면서 너도 하자, 했다. 그때까지 창수는 한 번도 재윤의 제안을 물리쳐본 적이 없었다.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가 싫증을 낼까 봐 두려웠었다. 그때라고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창수는 고개를 저으며 몸을 내뺐다.
- 난 별로 재미없어. 무슨 말인지 도통 못 알아듣겠단 말이야.
- 내가 가르쳐주면 되잖아. 지금부터 열심히 하면 나중에 나랑 같이 서울에도 갈 수 있어.
- 바보야. 내가 서울엘 왜 가냐? 울 할머니도 여기 있는데.
그때 재윤은 어쩐지 김빠진 얼굴을 했더랬다. 그것도 그러네, 하는 어조는 평소와 다름없었지만 분위기는 급격히 냉각되면서 가라앉았다. 눈길 역시 창수에게서 교과서 쪽으로 옮겨가 있었다.
그는 역시 서울에 갈 생각인 것 같았다. 어머니도 거기에 있고, 본디 그곳에 살았으니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무조건 옆에 있자고 떼 쓸 나이는 아니었다. 어쩔 수 없는 이별에도 조금씩 익숙해져 가던 시기였다. 언젠가 헤어지게 될 수도 있다. 그래도 이왕이면, 재윤이 곁에 남이주길 바랐다.
갈수록 재윤은 담임의 칭찬을 받는 날이 많았다. 2학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학급 반장도 떠맡았다. 제 일은 아니었지만, 창수도 무척이나 뿌듯해 했다.
그즈음부터 두 사람이 어울리던 무리가 완전히 갈렸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등하교 때도, 짝을 정할 때에도 재윤이 가장 먼저 찾는 건 창수 자신이었으니까.
방학이면 두 사람은 전과 다름없는 일상으로 돌아갔다. 내내 섬에 틀어박혀 눈을 뜰 때부터 감을 때까지 붙어 지냈다. 슬슬 시작된 신체 변화에 대해서도 기탄없이 떠들어댔다.
- 어제 아침에 일어났는데 젖어 있었어, 내 팬티.
여름방학 특집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불쑥 주절거렸다. 재윤은 과자를 집어 먹으며 “지도 그렸어?” 했다. 크게 무게 두지 않는, 심드렁한 어조였다.
- 아니. 하얗고 끈적끈적한 게 나왔는데.
- 아. 그럼 그거 몽정이라는 거야.
- 학교에서 성교육 할 때 배웠잖아.
- 그때도 자서 잘 몰라.
놀랍지도 않았다. 배웠던 것을 설명하는 건 문제가 아니었지만, 과연 창수가 얼마나 알아들을까 싶었다. 얼마쯤 고민해보던 재윤은 결국 간단하게 대꾸했다.
- 아무튼, 자연스러운 거랬어. 남자가 되어가는 증거.
- 그럼 나 안 죽어?
- 죽긴 왜 죽어, 바보야. 그냥 팬티나 잘 빨아. 다음에도 같은 일 생기면 그러려니 하고. 근데 그거 하기 전에 뭔 꿈 꾼다던데. 무슨 꿈 꿨어?
이어진 질문에 창수가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얄궂게 휘어진 눈알엔 장난기가 가득했다.
- 뭔데.
- 실은 재윤이 네가 계집애가 돼 있었어. 안 어울리게 치마 입고 나타나선 창수야 나 실은 여자애였어, 그러는 거 있지? 완전 웃겼는데.
아마 그때 창수는 몰랐을 거다. 본인이 무슨 말을 내뱉고 있는지. 그 우습다던 꿈의 어디가 문제인지도. 그러니 그리도 천진난만하게 웃을 수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재윤은 그럴 수 없었다.
2학년이 되고, 반이 갈리면서 진종일 붙어 지내기도 어려워졌다. 학교에 머무는 시간은 더 길어졌고, 재윤은 또다시 반장이 됐으며. 그를 찾는 곳은 전보다 많아졌다.
재윤과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기 위해서 창수가 할 수 있던 거라곤 마냥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하교 시간에 맞춰 재윤의 교실 앞 복도를 서성이고, 임원 회의라도 있는 날엔 운동장에서 공을 찼다.
그마저 창수가 주번이 된다든가 하면 소용없게 됐다. 학교에선 맡은 일 때문에, 집에 가선 공부 때문에 쫓기다시피 하는 재윤에게 차마 기다려달란 말은 할 수 없었다.
차츰 함께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다 저녁에야 겨우 만나 잠깐 수다를 떠는 게 전부인 날도 숱했다. 시험 주간이라도 되면 아예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 그때면 재윤은 집에 틀어박혔고, 창수는 그가 없는 시간을 갯벌에서, 할머니를 도우며 채워가곤 했다.
3학년이 되면서는 학교에서만 얼굴을 봤다. 반이 크게 나뉘면서 층수까지 갈리고 말았다. 쉬는 시간에 한 번 만나러 가려면 복도 끝에서부터 끝까지, 층계를 두 개나 지나야 했다. 그나마도 재윤이 선생님에게 불려가고 없으면 허탕을 치는 거였다. 방과 후에는 아예 만날 수가 없었는데,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재윤이 목포로 입시 학원에 다니게 됐기 때문이었다.
그즈음 창수는 서서히 직감하고 있었다. 그렇게 조금씩 가는 길이 갈릴거란 걸. 기실 재윤이 서울에 가든 아니든 그건 별반 중요하지 않았다.
그맘때쯤엔 재윤을 한 번씩 마주칠 때마다 깜짝깜짝 놀랐던 것 같다. 그는 키도, 뼈대도, 목소리까지도 하루하루가 다르게 변해갔다. 명찰이 없으면 못 알아보겠다며 우스갯소리를 했던 것도 같다. 홀로 교실로 돌아가는 길엔 조금 허망한 기분이 들었다. 그 묘한 박탈감의 이유를, 창수는 끝내 깨닫지 못했다.
재윤에게 찾아온 변화는 비단 외모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대개 성장 속도는 겉이 속을 크게 앞지른다지만, 그는 아니었던 듯하다. 어딘가 모르게 어른스러웠다고 할까. 전에 없던 배려가 그의 몸에 배어가기 시작했다.
- 지금 와?
지각을 면하려 빠르게 걷고 있는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덩달아 머리 위로 누군가의 손이 얹혔다. 힐금 돌아보니 재윤이 헤실 웃으며 서 있었다. 반가움에 창수의 얼굴도 주저 없이 훤해졌다.
그즈음 재윤은 창수를 흡사 강아지 대하듯 했다. 툭하면 어디에선가 나타나서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고, 대화하는 동안 턱이며 볼을 이유 없이 만지작거렸다. 재윤이 하는 일이라 싫진 않았지만, 어딘가 좀 근지럽단 생각은 들었다.
- 책은 샀어?
서점에 들러야 해서 먼저 가겠다고 했던 재윤이었다. 그는 보란 듯이 들고 있던 봉투를 흔들어 보였다. 두툼한 문제집이 두 권이나 들어 있었다. 보기만 해도 따분해졌다.
- 가자. 늦겠다.
재윤이 창수의 팔을 가만히 잡이끌었다. 그제야 등교 시간이 촉박하다는 걸 상기했다. 전처럼 뛰려 하지는 않았다 거의 다 와서 만나긴 했지만, 재윤과의 등교가 너무 오랜만이라 아까웠기 때문이다.
- 수학여행은 어떻게 할 거야?
얼마 전 가정 통신문을 받았다. 말이 수학여행이지, 서울 관광이나 다름 없었다. 이따금 텔레비전에 나오던 놀이공원도 포함돼 있어 내심 가고 싶었다. 하지만 집안 사정을 헤아리지 못할 만큼 철없지도 않았다
- 그거 꼭 가야 되나?
- 서울이 어떤 덴지 궁금하지 않아?
- 그야 재윤이 네가 있던 데고, 날마다 노래 부르는 데니까.
웅얼웅얼 얼버무렸다. 할머니에겐 미처 말조차 꺼내보지 못했다. 학교도 겨우 다니는 형편이었다. 그런 데 쓸 돈이 없다는 것쯤은 너무도 잘 알았다. 여지가 없으면 체념도 쉬워진다.
- 역시 못 갈 거야. 우리 집 돈 없어서.
- 흐응. 그럼 나도 가지 말까.
- 넌 왜. 이모가 안 내준대?
- 아니. 일단 돈은 이미 내긴 했는데. 담임한테 물어보니까 못 가는 사람은 따로 모아서 수업한다나 봐.
- 같은 반 아니어도?
- 응
재윤은 재밌겠지, 하며 웃었다. 멍하니 보다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별것 아닌 말인데도 못내 기분이 좋아졌다. 재윤에게도 처음일 수학여행이었다. 더구나 서울로의. 그가 그것을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다고 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제멋대로 둥실거렸다.
실실 쪼개다가도 왜 웃어, 묻는 재윤에겐 고개를 저었다.
그러는 동안 슬슬 교문에 다다랐다. 그 앞엔 주임 선생이 나와 복장검사를 하고 있었다. 명찰에 배지에 넥타이, 셔츠 단추까지. 무엇 하나라도 걸리는 게 있으면 어김없이 걸러져 얼차려를 받았다. 습관처럼 손으로 하나하나 제 차림새를 점검하던 창수가 별안간 나직한 탄성을 터트렸다.
- 아, 망했다.
- 왜?
- 명찰 안 가져왔어 .
그 자리에 서서 가방을 마구 뒤져봤지만 소용없었다. 빨래를 내놓기 전에 따로 빼두고 다시 챙기지 않은 것이 떠올랐다. 지레 포기하며 재윤에게 먼저 갈 것을 권했다. 그러자 그가 대뜸 제 명찰을 빼냈다. 그러곤 그것을 창수에게 내밀었다.
- 이거 왜?
- 아침 운동이나 할까 하고.
손에 든 명찰을 흔든다. 창수가 가만히 보기만 하자, 아예 그의 셔츠를 잡아당겨 제 명찰을 달아주기까지 했다.
- 뭐? 야, 가져가.
- 저 선생 눈 나빠서 잘 못 알아볼 거야.
재윤은 또다시 창수의 머리를 쓰다듬곤 훌쩍 앞서가 버렸다. 얼른 가슴에 달린 명찰을 떼며 쫓아갔지만, 이미 재윤은 주임 선생 앞에 서 있었다.
재윤을 걸러 보낸 주임이 손목시계를 들여다봤다. 그러곤 어물쩍거리는 교문 앞 학생들을 향해 쩌렁쩌렁하게 소리쳤다.
- 지각이다, 새끼들아. 빨랑빨랑 안 튀어?
지레 움찔하다가 다른 녀석들에게 휩쓸려 들어갔다. 그러면서도 계속 뒤를 돌아봤다.
울 것 같은 낯을 한 창수에게, 재윤은 비밀이라는 듯 검지를 입술 중앙에 살짝 대 보였다.
교실에 들어갔을 즈음, 지각과 복장 불량으로 걸린 놈들이 운동장을 돌고 있었다. 갈수록 지친 녀석들이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고, 어느새 재윤이 맨 앞으로 치고 올라왔다. 다리가 길어진 탓이었을까. 정말 조깅하는 것처럼 가뿐해 보였다.
거추장스러운 타이를 풀고 소매도 걷어 올린 모습이 낮설게 눈에 박혔다. 어쩐지 그날, 창수는 성큼성큼 운동장을 도는 재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종례 후에는 잠시 담임에게 불려갔다. 수학여행 때문이었다. 반에서 참석하지 않는 건 창수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혹시 비용이 문제라면 선생님이 대신 내줄 테니, 집에 가서 보호자 확인만 받아오라고 했다. 재윤과 서울에 갈 수 있다. 당장은 그 생각에 미음이 대책 없이 부풀었다. 별다른 제약이 없다면 역시, 한 번쯤 가보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가방 속 깊숙한 곳에서 가정통신문을 꺼냈다. 내내 담겨만 있느라 구겨진 그것을 손바닥으로 밀어가며 곧게 폈다. 때마침 저녁밥을 차려오던 할머니에게서 얼른 밥상을 받았다. 그러곤 곧바로 확인서와 펜부터 들이밀었다.
- 할머니 여기에 사인 좀.
- 이게 뭐여.
- 수학여행 가는 거. 내일까지 가져다 내야 되니까, 얼른.
- 수학여행이면 돈 내야 하는 거 아니고?
- 그건 담임이 내준댔어.
재차 빨리, 하며 재촉했다. 할머니는 거기 두면 밥 먹고 해 주마, 하더니 돌아서자마자 그걸 잊어버렸다. 잠자리에 들기 전, 창수가 아침까진 꼭 해야 한다고 단단히 일렀지만 그 역시 기억하지 못했다.
자는데 등 뒤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할머니가 뭔가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안의 내용을 이해할 수는 없을 거였다. 할머니가 읽고 쓸 수 있는 거라곤 당신과 손자의 이름 석 자뿐이었으니까.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할머니는 일을 나가고 없었다. 할머니에게 줬던 신청서 역시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았다. 함께 있을 아주머니들에게 차례차례 전화를 돌리고야 겨우 할머니와 통화할 수 있었다. 그걸 어쨌냐며 짜증스레 징징거리는 손자를, 할머니는 당신이 직접 가져다주겠다며 달랬다.
불만을 가득 안고 학교에 갔다. 할머니 때문에 수학여행에 갈 수 없을지 모른다. 그 생각을 하니 단단히 불이 나서, 같이 놀자는 친구들의 제안도 모두 물리쳤다.
할머니가 찾아온 건 3교시를 마친 쉬는 시간 때였다. 급우 하나가 와서 엎드려 있던 창수의 등을 툭 졌다.
- 야. 백창수
- 왜?
- 나가 봐. 누가 너 불러.
- 누구?
- 웬 할머니던데.
그때껏 할머니가 학교에 온 적은 없었다. 분교에 다닐 때도 그랬다. 생계를 책임지느라 바쁘기도 했고, 당신 말로는 무식한 노인네가 드나들 데가 아니란 게 그 이유였다. 기실 중학교는 사사롭게 오갈 만큼 가까운 거리도 되지 못했다.
정말 제 할머니가 맞을까 아리송한 얼굴로 교실을 나기봤다. 층계와 인접한 복도에 한 노파가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바람을 막느라 보자기로 머리를 꽁꽁 싸매고 있었지만, 한눈에 알아봤다.
쉬는 시간을 맞아 돌아다니던 아이들이 한 번씩 할머니를 돌아봤다. 그녀에게서 풍기는 비린내에 지레 코를 막는 녀석도 있었다. 갑자기 귓가가 홧홧해졌다.
- 할머니?
부르는 소리에 할머니가 돌아봤다. 일터에서 막 온 건지 작업복 차림이었다. 고무장화엔 미처 다 닦아내지 못한 진흙이 묻어 있었다. 비린내라는 건 아무리 씻어내도 잘 지워지질 않는다. 서둘러 할머니를 데리고 층계참으로 내려갔다. 어딘지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날 것 같았다.
- 늦었다, 아가. 할미가 더 빨리 오려고 했는데…….
- 왜 왔어.
다소 공격적으로 튀어 나간 대꾸엔 창수 제가 더 놀랐다. 멍하니 할머니를 봤다.
그녀는 말없이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창수에게 꼭 쥐여 주었다. 동그랗게 말려 있는 그것은 다름 아닌 수학여행 참가 신청서와 지폐 몇 장이었다
- 뭐야, 이게?
- 너 수학여행 가는 거, 그거는 이 할미가 해주고 싶어서.
그 돈을 버느라 새벽부터 과했을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런 할머니를 잠시나마 부끄러워했다는 건 어떻게 해도 합리화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더 짜증을 냈다. 무엇이든 탓할 대상이 필요했다.
- 괜찮다고 했잖아! 이거 담임이 대신 내준다고 했는데, 왜!
- 교복도 남 입던 거 얻어 입히고, 매일같이 공짜 밥 먹이는데 어떻게 놀러 기는 것까지 남 덕을 바라나. 그러면 사람이 너무 염치없어져서 안 된다. 없이 산다고 그러는 거 아냐.
할머니는 한사코 돈을 쥐여 주곤 얼른 가라며 창수의 등을 떠밀었다. 안 들어가고 버티자 먼저 등을 보이며 돌아섰다. 창수는 내내 못마땅한 얼굴로 멀어지는 할머니를 지켜봤다. 그녀는 머리에 두른 보자기를 더욱 바짝여미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지저분한 몰골을 손자의 친구들에게 보일까 염려라도 하듯이.
물끄러미 손에 들린 지폐를 내려다봤다. 꼬질꼬질하게 때가 타 있었다.
보나 마나 어렵게 잠을 떨치고 일어나선 여태 등 한 번 펴지 못하고 일했을 거였다.
속상했다. 왜소한 할머니의 등이 가슴에 맺혀 떨쳐지지 않았다 터덜터덜 교실로 들어가려던 창수는, 도로 몸을 돌려 층계를 내려갔다. 괜히 짜증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싶었다.
하지만 층계를 채 내려가다 말고 멈춰 섰다. 밑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 탓이었다.
- 할머니, 여긴 어쩐 일이세요?
재윤인 것 같았다. 쪼그리고 앉아 층계 틈으로 내려다보니, 그가 할머니를 보며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곁에는 평소 그와 어울려 다니는 친구들도 있었다.
- 잠깐 창수한테 챙겨다 줄 게 있어서. 우리 재윤이. 요새도 공부 열심히 하고 있지?
- 그럼요. 이제 가시는 거예요?
- 으응. 볼일 끝났으니까 가 봐야지.
- 올 땐 뭐 타고 오셨어요?
- 김 씨가 배 태워줬어. 지금도 기다리고 있을 거야.
- 고마운 분이네요.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재윤은 할머니와 대화하며 친히 현관까지 그녀를 배웅했다. 고개까지 꾸벅하고 돌아온 그에게, 그의 친구들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 반장, 누구야? 너네 할머니?
- 응. 우리 할머니.
재윤의 대답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초라해졌다. 할머니에게 미안해서, 재윤에게 고마워서, 창수 본인이 너무 부끄러워서. 종이 칠 때까지, 창수는 내내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수요일 5교시 체육 과목은 창수가 일주일 중 가장 좋아하는 수업이었다. 재윤의 반도 같은 시간에 체육 수업이 있기 때문이었다. 체육 선생님끼리도 사이가 좋아, 매번 축구 시합을 하거나 공동 수업을 진행하곤 했다.
학급 대항전이 있을 때면 재윤은 대개 지켜보는 쪽이었다. 몸이 땀으로 젖는 게 싫단 이유였다. 뛰고 나면 다시 평정심을 되찾기가 어렵다고도 했다. 창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이었다.
창수는 흔한 그 나잇대 사내아이였다. 수많은 시선 속에 놓이는 걸 즐겼고, 이왕이면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공을 찰 때 가장 의식했던 건 계집애들이 아니라 재윤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재윤이 보이지 않았다. 담임 심부름을 하느라 늦는 모양이라고 생각했지만, 수업이 시작되도록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재윤과 어울려 다니던 무리에게 물으니 몸이 안 좋아 쉬겠다고 했단다. 불과 몇 시간 전, 할머니를 만날 때만도 멀쩡해 보였는데.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던지라 지레 그가 걱정됐다.
체육선생에게 배가 아프다며 핑계를 대곤 몰래 빠져나왔다. 재윤의 몸이 정말 안 좋은 거면 양호실에 가 있겠지 싶었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 재윤의 교실을 막 지나던 찰나였다. 느닷없이 불어든 바람에 커튼 자락이 안쪽으로 확 말려들어 가면서, 창가에 엎드린 이의 얼굴이 보였다.
재윤이었다. 팔에 고개를 괸 채 그는, 편안하게 잠들어 있었다. 실은 아파서가 아니라 수면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하교 후 학원까지 다니느라 잠도 거의 못 잔다고 했으니까.
그렇게 잠든 모습을 처음 봐서일까. 창수는 자신이 하려던 일도 잊고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 …….
깨끗한 피부와 날렵한 눈썹, 오뚝한 코, 얇게 말린 입술. 웬만한 계집애 보다 고왔다. 곧은 이마에는 사춘기의 상징이라던 그 흔한 여드름 하나도 나 있질 않았다.
창수는 뭔가에 이끌리듯 창가로 걸어갔다. 그러곤 최대한 소리 죽여 창틀에 제 팔을 기댔다. 상체를 수그려 그 팔에 고개를 묻는다. 눈길은 시종 잠든 재윤을 향해 있었다.
잔잔한 바람에 커튼 자락이 쉼 없이 나풀거렸다.
- 그러니까 여기 안 왔다는 거죠?
종례 후 담임이 창수를 밖으로 불러냈다. 그 곁엔 주임 선생이 평소보다 험악한 얼굴로 서 있었다. 이 얘냐, 확인한 그는 가타부타 설명 없이 따라 오라더니 앞장서 걸어갔다.
그를 쫓아 도착한 곳은 양호실이었다. 주임 선생은 영문도 모르는 창수를 아무렇게나 잡아당겨 양호 선생 앞에 세웠다. 그러곤 지난 5교시 체육시간에 그가 그곳에 왔었는지를 확인해 물었다. 양호 선생이 거짓을 말할 이유야 없었다.
그녀가 고개를 저은 직후, 옷깃이 더 우악스럽게 붙들렸다. 셔츠 맨 위쪽의 단추는 기어이 튕겨 나갔다. 그것을 집으려 몸을 숙이는데, 주임 선생이 다짜고짜 창수를 끌어당겼다. 결국 단추는 줍지도 못한 채 지도실로 끌려갔다. 무슨 상황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주임 선생은 덩그러니 놓인 책상에 창수를 반 억지로 앉혔다. 그러곤 몽둥이로 제 손바닥을 일정하게 두드렸다. 할머니가 쓰는 빨랫방망이와 흡사한 생김새였다. 묘한 위압감이 들었다. 주임 선생은 창수를 까마득하게 내려다보며 물었다.
- 아프다고 양호실 간다던 놈이 어디로 샌 거야?
- 그냥 있었는데요.
- 그냥 있어? 이 새끼가, 똑바로 말 안 해!
대뜸 버럭 소리치는 바람에 귀청이 떨어질 것 같았다. 불길함을 감지한 가슴이 쿵쿵 무겁게 뛰었다.
체육 시간 내내 화단에 서 있었다. 특별히 그러려던 게 아닌데, 종이 친 뒤에야 계속 그러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종소리를 듣고 재윤이 몸을 뒤척였다. 평소처럼 인사를 건네면 됐을 텐데, 창수는 부리나케 도망부터 놓았다. 왜 그랬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것이 전부였다. 다만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대중이 서지 않았다. 왜 그랬냐는 물음이 이어질 것 같았다 역시 대답할 순 없을 거였다. 증명해 줄 사람도 없었다. 재윤은 그때 계속 잠들어 있었으니까.
창수가 묵묵부답으로 버티자, 주임 선생의 얼굴이 더 굳어졌다. 그는 셔츠 소매를 슬슬 걷어붙이며 하나하나 캐묻기 시작했다. 목소리는 종전보다 더 가라앉아 있었다.
- 담임선생님한테는 돈 없어서 수학여행 못 간다고 했다며.
- 네.
- 근데 조금 전에 신청서도, 돈도 다 가져다 냈다던데?
무슨 문제가 되는 걸까.
한참 동안 풀리지 않던 의문은 2반에서 돈이 없어졌다는 주임 선생의 귀띔으로 실마리를 찾았다. 조금 전 종례에서도 담임이 같은 이야기를 꺼낸 바 있었다. 만약 그 돈을 가져간 사람이 있다면 조용히 손을 들라고도 했다. 눈을 감았고, 오랜 적막이 이어졌다. 그사이 담임이 내쉰 한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걱정하지 않았던 것은 사라졌다는 돈의 행방과 창수 자신은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이었다.
거짓말로 수업에서 이탈했다. 아프다면서 양호실에는 들리지도 않았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창수 자신이 한 일은 아니다. 어떻게든 누명을 벗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가 힘들게 벌어다 준 돈이었다. 그게 한순간에 도둑질 한 것으로 변질되는 것만은 참을 수 없었다.
- 그 돈, 저희 할머니가 거예요.
주임 선생이 같잖다는 듯 웃었다.
- 할머니가 챙겨주셨으면 아침에 가져다 낼 것이지. 조례시간엔 신청서도 빼놓고 왔다고 그랬다면서.
- 점심시간 직전에 와서 주고 가셨으니까…….
쾅 소리와 함께 질끈 눈이 감겼다. 주임 선생의 몽둥이가 책상 위에 수직으로 서 있었다.
- 한 번만 더 묻는다. 그 돈 어디서 났어?
- 말씀드렸잖아요, 할머니가 주셨다고.
- 급식비도 지원받는다면서, 수학여행 갈 돈은 있냐?
속에서 울컥, 시뻘건 것이 치솟았다. 발끈하며 보자 주임 선생의 숱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 말해. 아까 수업 빠지고 어디에서 뭐 했는지.
- 밖에 그냥 있었어요. 저 정말 아니에요.
- 뭐가 아닌데.
- 돈 홈친 거 아니라고요.
주임 선생은 고요히 숨을 삼켰다. 금방이라도 뭔가가 그 안에서 펑 터질 것만 같았다.
그는 미간을 있는 대로 구긴 채 창수 앞에 그의 실내화 주머니를 던져놓았다. 꺼내 봐,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멀뚱히 보자 기어이 버럭 소리를 지른다.
- 운동화 꺼내보라고!
움찔 놀라 어깨를 떨었다. 몸이 굳어서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주임선생은 짜증 가득한 손길로 실내화 주머니를 찢듯이 벌렸다.
이내 그 안에서 흙 묻은 운동화가 떨어졌다. 그는 이것 보라는 듯 창수의 눈앞에다 그 운동화를 짤짤 흔들었다. 그러더니 대뜸 그것으로 창수의 머리를 후려쳤다.
- 1층 화단 앞에 신발 자국이 득시글하더라. 이런데도 네가 아니야?
- 거기 있었던 건 맞는데 제가 그런 거 아니에요.
- 이 새끼, 이거. 반성하는 기미라곤 없고. 엎드려.
주임 선생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신발을 내던졌다. 그러곤 창수가 앉아 있던 책상도 걷어차 버렸다. 억울한 마음에 꼼짝 않고 버티자, 들고 있던 몽둥이로 허벅지며 엉덩이를 아무렇게나 때렸다.
- 돈이 없으면 양심이라도 있어야지. 애새끼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거짓말을 해? 가난한 건 부끄러운 게 아냐. 가난 때문에 양심까지 팔아먹는 게 부끄러운 거지.
엉덩이에 가해지는 폭력보다 설교를 가장해 쏟아지는 폭언이 더 아팠다. 엎드려뻗친 창수의 두 주먹이 하얗게 질렸다. 엉덩이가 찢겨나가는 것 같았지만, 이를 악물었다. 아프다고 소리를 내면 억울함도 같이 희석될 것 같아서였다.
주임 선생은 있는 힘을 쥐어짜 가며 창수를 때렸다. 손 안에 고인 땀 때문에 끝내 뜸이가 저만치 미끄러져 나갔다. 땀범벅이 된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칠판에 기댔다. 엎드려 있던 창수에게 주워 와, 하고 개 부리듯 지시하기도 했다.
두 팔과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기듯이 가서 간신히 몽둥이를 주웠다. 그것을 주임 선생에게 건네고 다시 엎드렸을 때였다.
밖에서부터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담임이 찾아왔다. 배 시간 어쩌고 하는 얘기가 오가는 것 같았다. 주임 선생은 분한 얼굴로 창수를 노려봤다. 그러다가 말도 없이 지도실을 홱 빠져나가 버렸다.
담임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창수에게 그만 일어나, 했다. 무릎이 맥없이 풀썩 꺾였다. 맞은 부위는 차마 손으로 만져볼 엄두가 안 났다.
담임이 교실에서 챙겨온 가방을 건네주었다. 그것을 조용히 받아 멜 때에는 정말 네가 그랬느냐, 물었다. 염려하는 기색이었지만, 못내 서운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고개만 꾸벅하고 그녀를 지나쳐 밖으로 나왔다.
복도에서 재윤이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는지 모르겠다. 학원에 갔어야 할 시간은 이미 훌쩍 지났다.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잘못한 게 없는데도 그랬다. 그대로 녀석을 지나쳐 학교를 빠져나왔다. 녀석이 얼른 다가와 창수에게서 그의 가방을 빼앗아갔다. 비척거리며 걷는 그의 팔을 부축하듯 붙들기도 했다. 그러다가 영 안 되겠는지, 손을 잡아 세웠다.
- 업혀.
고개를 저었다.
재윤은 그런 창수를 빤히 보더니 몇 걸음 앞서가 그 앞에 무릎 꿇고 앉았다. 됐어, 하고 사양했다. 황망히 입을 닫았던 것은 꾹꾹 참아왔던 서러움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아서였다. 할머니가 생각났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코끝이 시려졌다.
그러나 재윤은 막무가내였다. 가방 두 개를 앞으로 둘러메더니, 창수의 다리를 두 팔로 감아 제 등 쪽으로 당겼다. 힘없던 무릎이 꺾이며 몸이 그의 등 뒤로 쏟아졌다.
조금 쓸렸기로서니 어김없는 통감이 몰려들었다. 통증에 두 팔에 발끈 힘을 주자, 재윤이 그 팔을 제 손으로 붙들며 그렇게 있어, 했다. 그러곤 어렵지 않게 자리에서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재윤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걸었을 따름이었다. 처량한 기분이 들었다. 당장 의지할 데가 완전히 여물지도 않은 그의 등 하나밖에 없다는 것에.
재윤의 등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한 것은 학교를 크게 벗어났을 때쯤이었다. 어두컴컴해진 길을 걸으며, 그는 한사코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창수의 다리를 감싸고 있던 그의 두 팔에 발끈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호흡도 전과 달리 씩씩 거칠어졌다. 창수는 어리둥절하며 재윤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 너…… 울어?
재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입술만 꾹 힘주어 물 뿐이었다. 그의 턱을 따라 물방울 같은 것이 아롱졌다가 떨어졌다. 그 아래 얽혀 있던 창수의 손등이 망울망울 젖는다. 간지러운 느낌이었다.
왜 우는 걸까. 설마 창수 자신 때문인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의아해졌다가도 일단은 재윤을 달래야겠다 싶었다.
- 맞은 건 난데, 니 새끼가 왜 울어.
가벼운 어조로 애써 분위기를 풀어보려 했다. 하지만 재윤은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그저 등을 가늘게 일렁이며, 자꾸 안으로 말려드는 숨을 길게 내쉬려 애쓸 뿐이었다.
- 오늘 일은 다 잊어. 창수 넌 아무것도 기억하지 마.
얼마쯤 후에야 재윤이 겨우 뱉어낸 말이었다. 밑도 끝도 없이 그것뿐이었다. 그러다가는 내가 다 기억할 거야, 하고 어렵사리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 의미는 알 수가 없었다.
- 재윤아, 그거 내가 안 그랬어.
- 알아.
- 어떻게 알아? 너 그때 자고 있었잖아.
생각 없이 주절거리고 밀았다. 뱉고 나서야 깨닫곤 입술을 꼭 다물었다. 그 때문인지 재윤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너야말로 어떻게 알아. 그런 식으로 물으면 대꾸할 말이 없었다. 곤란함을 느낄 때쯤, 재윤은 멎었던 다리를 다시 움직였다.
- 창수 네가 그런 짓 했을 리 없으니까.
재윤의 목소리에 확신이 어려 있었다. 녀석의 뒤통수에 이마를 콩 부딪쳤다. 그 서툰 위로 덕분인지, 불과 얼마 전까지의 고난이 아주 오랜 옛일 처럼 느껴졌다.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지할 게 아직 단단하지 못한 그 등 하나라고 해도. 어떤 일이든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뒤로 며칠간, 재윤은 학교에 갈 때면 창수를 데리러 왔다. 쉬는 시간 틈틈이 얼굴을 보러 교실로도 찾아왔다. 그 열심히 다니던 학원조차 나가지 않고 창수가 끝나길 기다렸다가 함께 섬으로 돌아오는 거였다. 그러는 이유에 대해선 특별히 설명해주지 않았다.
오해도 곧 풀렸다. 잃어버렸다던 돈은 당사자의 집 쓰레기통에서 발견됐다. 그의 어머니가 쓰레기통을 비우다가 발견했다고 했다. 물론 사실이 밝혀졌다고 변하는 것은 없었다. 주임 선생의 사과를 받는 일 또한.
아마 그즈음이었을 거다. 주임 선생의 새 차에 벽돌이 떨어졌던 건. 앞 유리는 물론이거니와 차체 여기저기가 찌그러지고 긁혀서, 어떻게 봐도 신차로는 보이지 않았다. 담임의 교과 수업이 한창일 때 벌어진 일이었다.
주임 선생은 반드시 범인을 잡아 요절낼 거라고 큰소리를 쳤지만, 끝내 그 소망은 이뤄지지 않았다.
◈◈◈
비탈길 위에 위태롭게 자리한 집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칠 벗겨진 대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그 흔한 문패 하나 걸려 있지 않았다. 관리가 전혀 되지 않은 마당엔 온갖 잡초가 우거졌고, 어디에서 날아온 것인지 모를 깨진 바가지와 나뭇잎, 비닐 조각과 넝마 따위가 어지럽게 뒹굴어 다녔다. 폐가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듯했다.
“계십니까.”
점잖게 집주인을 불러본다. 닫힌 문은 꼼짝하지 않았다. 별다른 기척 또한 느껴지지 않는다.
재차 계십니까, 하며 대답을 기다릴 때였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슬쩍 벌어졌다.
“……누구요?”
쇳소리 같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고개를 돌리자 핼쑥한 사내가 보였다. 눈꺼풀은 푹 패여 들어갔고, 눈 밑도 어둡다 못해 시퍼렇다. 낯빛이 좋지 않은 것은 비단 방 안이 어두컴컴한 탓은 아닐 거였다. 진료기록상의 나이는 이제 겨우 예순이건만, 병색 때문인지 일흔은 족히 넘어 보였다.
“아, 실례합니다. 청화 보건지소에서 나왔습니다.”
“보건지소? 거기에선 무슨 일로.”
“많이 편찮으시다고 들어서요. 좀 어떠신지 확인 차.”
“왜, 그냥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하러 왔다고 하지.”
사내는 괴팍한 성미를 드러내며 시비조로 중얼거렸다. 그럼에도 재윤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괜찮다면 좀 들어가도 될까요?”
“그러시던가.”
사내가 영 탐탁잖은 얼굴로 먼저 돌아섰다. 그를 따라 들어가며 문을 닫았다.
방 안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났다. 케케묵은 사람의 체취와 시큼한 뭔가가 뒤섞인 듯한. 낯설게 주변을 돌아보니 크고 작은 유리병이 죽 놓여 있었다. 약초나 산나물, 과실 따위를 재워놓은 것 같았다. 자연치유를 선택한 암 환자들의 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 외엔 마땅한 세간 하나 눈에 띄지 않았다. 언제 먹은 것인지 모를 음식이 냄비에 눌어붙은 채 방치돼 있고, 기껏 틀어놓은 텔레비전은 화면 조정 상태였다. 벽 모서리마다 거미줄이 길게 늘어졌다.
“근데 어디서 봤던가? 선생 인상이 제법 눈에 익는데.”
사내가 벽에 기대앉은 채 물었다. 그제야 재윤은 천천히 그를 돌아봤다. 얼굴엔 특유의 웃음이 걸려 있었다.
“15년 전쯤, 영정 중학교에서 교편 잡으셨을 때 그 학교에 다녔습니다.”
“아? 그랬구나. 요즘 기억이 깜빡깜빡해서 이름까진 잘 모르겠고, 확실히 본 것 같아. 이야, 그 밥통들 속에서 의사가 나오다니. 제자가 찾아왔는 데 내 꼴이 참, 말이 아니네.”
“파면되셨다는 얘긴 들었습니다
반가움에 풀어지던 사내의 얼굴이 애매하게 굳는다. 그 와중에도 재윤의 미소에는 일체 흔들림이 없었다.
“학교에서 가한 폭력 때문에 학생이 크게 다쳤다던데, 맞습니까.”
“그런 건 폭력이 아니라 훈육이라고 하는 거지. 올바른 길로 교정하려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순전히 운이 좀 나빴던 것뿐이야. 그 망할 녀석이 가만히 있질 않고 피하려는 바람에! 내가 그 일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 얼마나 울화가 치밀었으면 병까지 얻고 말이야. 앞뒤 다 잘라먹고 폭력배니 살인자니, 사람을 몰아가선 학교에서 잘리고, 징역까지 살고. 연금 못 받는다니까 마누라며 자식새끼들까지 다 떠났다고. 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는 거야?”
발전 없는 건 여전하시네.
사내가 멍한 얼굴로 재윤을 올려다봤다. 헛소리를 들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현실감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재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듯 웃어 보였다.
그러다가 사내를 마주 보고 앉았다. 특별히 위협을 가한 것도 아니건만, 사내가 지레 몸을 물렸다.
“저보다야 선생님께서 세상을 더 오래 사셨으니까 잘 아실 텐데요.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억울한 오해를 받는다는 것 정도는. 그럴 땐 난 누군가를 억울하게 만든 적이 없는지 생각해보는 것도 좋은 약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 업보구나, 체념하면 마음이라도 조금 편안해지니까.”
상냥한 어조로 이상한 소리를 쏟아낸다. 그러곤 그마저 사내의 피해의식이라는 듯 몸은 좀 어떠세요, 여상히도 물었다. 사내를 주시하는 눈길도 친절하기 짝이 없었다.
“그, 요새 자꾸 숨이 차서 움직이기가 어려워. 눕는 건 생각도 못 하겠고. 일주일 전부터는 변비가 와서 계속 더부룩해지고, 먹은 것도 변변찮은 데 게워낸다든가…….”
“폐로 전이된 암세포가 제법 커졌나 보네요. 흉수가 차면 그럴 수 있습니다. 그걸 빼내면 호흡하기가 조금 편해질 수도 있겠지만, 지금처럼 장기가 모두 망가져 있는 상태에서야 기흉 발생의 확률만 높죠. 아마 어떤 의사도 수술해 주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어차피 놔두면 죽을 환자한테 애쓸 필요는 없으니까요. 어떻게, 손써 볼 도리가 없네요. 변비가 온 것도, 구토가 빈번한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타계할 날이 머지않았을 때 나타나는. 그나마 다행입니다. 지금 겪는 그 고통에서 조만간 벗어나실 수 있을 테니까.”
“너 이 새끼, 뭐야…… 아까부터 이상한 말이나 지껄이고.”
“살면서 문득문득 생각나더군요. 어떻게 지내고 계시는지, 마지막 모습은 어떨지 보고 싶었습니다. 이왕이면 제 두 눈으로.”
“이 새끼가!”
사내가 홧김에 주먹을 날렸다. 재윤은 어렵지 않게 옆으로 비켜섰다. 둔해진 사내의 몸이 허공을 가르면서 벌러덩 자빠졌다. 사내는 끙끙 앓으며. 다시 일어서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제가 도와드릴 방법도 딱히 없는 것 같고…… 이만 가보겠습니다. 운신하기 어려우실 덴데 멀리 나오실 필요 없습니다.”
깍듯하게 인사한 뒤 방을 빠져나왔다. 사내가 엉금엉금 기듯이 따라와선 버럭 소리쳤다.
“지, 진통제! 진통제라도 주고 가! 아파서 잠을 못 자겠어.”
뒷말은 숫제 애원에 가까웠다. 재윤은 구두를 신으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아시잖습니까. 이제 어떤 진통제도 들을 때가 아니라는 거.”
허리를 곧게 편 그가 사내를 돌아본다. 표정 없던 얼굴에 거짓말처럼 이전과 같은 미소가 번졌다. 넋이 나간 듯 자신을 보는 사내에게, 그는 지극히 평온한 어조로 작별인사를 고했다.
“모쪼록 편하게 영면하시길 빌겠습니다.”
◈◈◈
- 나 하루만 네 방에서 재워주면 안 돼? 너희 이모 모르게 창문으로 들어갈 테니까.
재윤에게 업혀 돌아오며, 창수가 느닷없이 부탁했다. 할머니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낮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손자가 절뚝이며 돌아오면 할머니야 당연지사 걱정할 테니까.
손자의 다리를 보며 긴 밤을 자책으로 지새울지도 몰랐다.
- 그래도 집에 한 번은 다녀와야 하지 않아?
- 전화하면 되지. 네가 전화해주면 울 할머니 그러라고 할 거야.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하기는 어려웠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창수가 앗싸, 하면서 재윤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간질간질한 녀석의 숨결이 자꾸 예민한 귓가에 닿았다. 의미 모를 한숨이 거푸 새어 나왔다.
창수를 대문 안에서 내려주었다. 내가 신호하면 들어와야 돼, 단단히 주의를 주곤 먼저 현관으로 들어섰다. 이모는 식탁에 앉아 반주를 하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하는 재윤을 보곤 바로 시계부터 확인했다.
- 왜 벌써 와? 학원에 있을 시간이잖아.
- 머리 아파서. 들어가서 좀 쉴게요.
- 밥은?
- 신경 쓰지 말고 주무세요. 배고프면 라면이라도 끓여 먹을 테니까.
그 정도로 말하면 이모도 더는 간섭하지 않았다.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닌가, 걱정하며 들여다보는 애틋함도 없었다. 덕분에 창수를 방으로 들이는 일도 한결 수월했다. 만약 대놓고 하루 재우겠다고 했다면 눈에 띄게 싫은 기색을 드러냈을 거였다.
재윤은 제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문단속부터 했다. 가방을 내려놓곤 곧장 창가로 가서 커튼을 젖혔다. 그때 이미 장문에 창수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좀 기다리라니까, 말을 안 듣는다.
서둘러 창문을 열었다. 맞은편 담벼락에 창수가 고양이처럼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질책하듯 보자 입술을 쭉 찢으며 웃는다.
- 위험하게 뭐하는 거야. 그러다 뒤로 넘어지면 어떡하려고.
- 에이, 내가 너희 집 담 넘은 게 몇 년째…… 으악!
자신만만한 얼굴로 뻐기더니, 기어이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지켜보던 재윤의 눈이 홉떠졌다. 창수는 넘어지지 않으려 두 팔을 부단히 버둥거렸다. 그러나 완전히 풀려 버린 다리가 버텨주질 못했다.
- 으악, 할머니! 나 죽어!
기어이 넘어갈 듯한 창수에게 홱 손을 뻗었다. 거의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바르작대던 창수의 팔이 기적적으로 재윤에게 붙들린다. 그대로 녀석을 힘껏 끌어당겼다. 창수의 상체가 쏟아지듯 창문 안으로 들이쳤다. 재윤이 침대 위로 쓰러지면서, 창수의 몸이 고스란히 그 위로 겹쳐졌다. 순간 하얗게 변했던 시야가 겨우 트였다.
안도하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작 창수는 재밌는 장난이라도 벌인 것처럼 웃음이나 터트렸다.
- 죽을 뻔했네.
- 웃을 일이야?
- 안 죽었으니까 됐잖아. 나 좀 끌어당겨주라. 다리 완전 풀린 거 같아.
절레절레 고개를 젓곤 창수를 마저 끌어당겼다. 그가 두 다리를 바르작거리며 창문 안으로 완전히 들어온다. 운동화는 이미 벗어 손에 든 상태였다. 녀석은 뭐가 그리 웃긴지 연신 실실 쪼개댔다. 직전까지 험한 일을 당한 주제에, 그렇게 천진할 수가 없었다.
서랍에서 편한 옷을 꺼내 던져주었다. 먼저 갈아입고 돌아보니, 아직 창수가 바지를 벗고 있었다. 낑낑거리며 한 다리, 한 다리 어렵게 밖으로 꺼낸다. 엉덩이까지 내려온 셔츠 아래부터 살갖이 퍼렇게 죽어 있었다. 눈에 띄게 부어오른 살갖은 손만 대도 욱신거릴 것 같았다.
떨떠름하게 보다가 창수의 팔꿈치를 붙들었다. 침대 쪽으로 끌어당기자 왜, 하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엎드려 봐.
- 응?
- 약 발라야 될 거 아냐.
- 됐어. 그거 바르면 못 눕는단 말이야.
- 엎드려서 자면 되지.
재윤은 끝내 제 의지를 관철시켰다. 창수가 잔뜩 성가신 얼굴로 침대에 엎드렸다. 그동안 서랍에서 연고를 꺼내 와 그 옆쪽에 걸터앉았다. 곧 찾아올 아픔 예감해서인지, 창수의 허벅지가 바짝 긴장돼 있었다.
손끝에 일정량의 연고를 덜어 가만가만 펴 발랐다. 아릿한 살갖 위를 스치는 간질간질함에 창수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참기 어려운지 간혹 두 다리를 배배 꼬며 발가락도 꼼지락거렸다.
- 으히히힛. 대충해. 간지러워.
- 네가 움직이니까 더 오래 걸리는 거잖아.
잔소리하며 한 곳 남김없이 연고를 발라주었다. 최대한 상처에만 집중하려고 애썼던 것 같다.
손에 묻은 연고를 티슈로 닦곤 창수 옆에 벌러덩 누웠다. 작달 만한 싱글 침대가 가득 찼다. 창수가 재윤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이러고 노는 거 오랜만이다, 했다. 두 눈에는 어떤 기대감 같은 것이 넘실거렸다.
재윤은 눈동자만 굴려 그를 보면서 의중을 확인했다.
- 라면 먹을래?
- 아니, 괜찮아. 아직 너희 이모 안 주무시잖아.
- 그럼 잠부터 자.
창수의 머리를 가볍게 헝클어뜨리곤 등을 보이며 돌아누웠다. 기대를 철저히 배반당하자, 창수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 뭐야. 모처럼 왔는데 이러기냐?
- 잘 자라.
그가 토로하는 불만도 무시한 채 눈을 감았다. 여지없이 구시렁대는 소리가 쏟아졌다. 재윤이 일절 응하지 않자, 그마저도 이내 잦아든다. 느닷없는 상황에 긴장했을 테고, 내내 시달리느라 고단했을 거였다.
등 뒤에서 고른 숨소리가 들려올 즈음, 재윤이 눈꺼풀을 떠 올렸다. 얼마간은 미동 없이 가만히 있었다. 창수의 호흡에 맞춰 작은 침대가 미약하게 진동한다.
그가 깨지 않도록 서서히 몸을 돌렸다. 여실히 풀어진 창수의 얼굴이 서서히 시야에 담겼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볼을 쓰다듬어봤다. 그러나 곧 그 손마저 꼭 주먹 쥐어 집았다. 오랜 친구를 보는데, 재윤의 두 눈 가득 정체 모를 안타까움이 고여 들었다.
결국, 첫 수학여행은 가지 못했다. 재윤이 가지 않겠다고 한 탓이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생겼던 건 아니었다. 그저 그는 시시해졌다고만 했다. 그가 없으면 창수에게도 굳이 가야 할 이유가 없었다.
모두가 학교를 비운 며칠간, 두 사람은 음악실에서 별도의 수업을 받았다. 그 둘 말고도 서너 명이 더 있었다. 말이 수업이지, 자습과 게임으로 점철된 시간이었다.
즐거웠다. 종일 재윤과 붙어 지낼 수 있다는 것. 그거 하나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자습조차도 재밌게 느껴지기만 했다.
마지막 날엔 비가 내렸다. 아쉬운 마음에 계속 비로 얼룩지는 창문을 바라봤던 것 같다. 결국 그날로 예정됐던 체육 활동은 영화 감상으로 대체됐다. 비디오가 재생되는 동안. 재윤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진한 화장에 화려한 의상을 걸친 배우들이 나오는 중화권 영화였다. 아무리 자막을 열심히 읽어도 창수로선 도무지 그 내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중간부터는 아예 꾸벅꾸벅 졸고 말았다.
- 내일부터 모두 각자 반으로 돌아가면 된다. 지각하지 말고. 이상.
담당 선생의 당부를 끝으로 나흘간의 특별 수업이 마무리됐다. 음악실을 나설 때까지도 빗줄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 우산 가져왔냐?
혹시나 하며 묻자, 재윤이 제 장우산을 펼쳤다. 청해볼 것도 없이 얼른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던 때였다. 예전엔 드는 것조차 버거웠던 우산이, 이젠 나란히 쓰기에 턱없이 작았다 서로 어깨가 맞붙다 못해 재윤의 바깥쪽 팔이 슬금슬금 젖어들고 있었다 그게 못내 신경 쓰여서 더 붙어, 하는데 재윤이 불쑥 입을 열었다.
- 오늘 아침에 팬티 빨았어
- 팬티? 그걸 왜.
- 자는 동안 젖었으니까.
그 말을 이해하는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천천히 눈알을 굴리던 창수가 활짝 반색하며 확인했다.
- 어? 너? 그거 한 거야?
재윤은 먼 앞쪽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재밌는 얘기를 하면서도 어째 얼굴엔 표정이랄 게 없었다. 창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얼굴은 물론 목소리에도 장난기가 가득했다.
- 무슨 야한 꿈을 꿨길래?
말해 봐, 하며 재윤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그러자 돌연 그의 걸음이 멎었다. 무심코 몇 걸음 더 나아가던 창수가 왜, 하며 덩달아 섰다. 빤히 보던 재윤은 별안간 성큼성큼 다가왔다. 도중에 멈추겠지, 생각하며 태평하게 그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워낙 찰나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재윤의 얼굴이 그대로 떠밀려왔다. 연이어 입술이 어떤 압력에 가볍게 눌렸다가 놓였다. 코끝에서 낯선 살 냄새가 났다. 뒤늦게 어, 하는 멍청한 소리가 새어 나갔다. 정신을 차렸을 땐 재윤의 얼굴이 시야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순간 머리가 하얗게 비었다.
- 이런 거.
얼떨떨하게 되물었다. 그러면서도 창수 자신이 뭘 묻고 있는지,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바로 인식하지 못했다. 재윤은 대꾸 없이 창수의 머리에 제 손을 얹었다. 고개가 맥없이 기울어졌다. 그대로 머리카락을 가만가만 헝클어뜨리더니, 대뜸 들고 있던 우산을 건넸다. 얼른 받아들 생각을 않자, 창수의 손에 멋대로 손잡이를 쥐여 준다.
쓰고 가. 머리맡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말려볼 새도 없이 우산을 떠넘긴 그는, 빗줄기 속으로 달려가 버렸다 황망히 야, 하고 불렀지만 뒤 한 번 돌아보질 않았다.
얼빠진 얼굴로 멀어지는 재윤을 지켜봤다. 들고 있던 우산이 비뚤어졌다는 것도 그 탓에 비를 쫄딱 맞고 있다는 것도 한참 후에야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