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진료를 마치고 뒷정리에 여념 없을 때였다. 진료실 밖 복도에서 때아닌 인기척이 느껴졌다. 먼저 퇴근한 김 간호사가 돌아왔거니 여기며 여상하게 문가를 응시했다. 이내 달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두고 가신 거라도…….”
묻던 목소리가 도중에 옅어졌다. 두 눈은 의외라는 듯 크게 떠졌다. 예상과 다르게, 문 안으로 빠끔 고개를 드민 건 창수였다. 연락 없이 무턱대고 들이닥치는 일도, 노크란 걸 모르는 성미도 적응이 돼서 놀랍지 않았다. 다만 며칠 전 보았을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에 눈을 뗄 수가 없다.
“얼굴이…… 왜 그래?”
“만용이랑 또 한바탕 했지 뭐.”
창수는 제 뒷목을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보기에 좀 화려해서 그렇지 별거 아냐. 딱히 아픈 데도 없고.”
놀란 재윤을 진정시키려는데, 그가 벌떡 일어나 창수에게 다가갔다. 그대로 다짜고짜 얼굴을 붙들렸다. 재윤은 실수로 떨어뜨린 도자기 보듯, 창수의 낯 곳곳을 꼼꼼히 살폈다. 그 눈빛이 너무 열렬해서, 차마 떨쳐볼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부어오른 눈가를 살짝 건드려보자 창수가 숨을 삼키며 목부터 움츠렸다. 터졌다가 겨우 아문 입술을 만졌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어디가 별거 아니라는 건지. 재윤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었다. 창수는 헤실헤실 웃으며 뼈는 멀쩡하다니까, 할 따름이었다. 시종 태평한 그를 끌어당겼다.
“안 되겠어. 이리 와.”
“아니, 괜찮은데.”
사양하는데도 굳이 진료용 침대에 앉힌다. 그러고는 붙들고 있던 팔부터 가만가만 더듬어 올라가며 이상이 없는지 확인했다. 양쪽 손바닥을 가만히 제 앞으로 펼쳐 살피더니 반대로 돌려도 본다. 까진 손가락 마디마디가 적나라하게 그 앞에 놓였다.
공연한 민망함에 창수가 손을 웅크렸다. 그러나 재윤은 부드럽게 그 손을 붙잡아놓곤 팔을 길게 뻗었다. 창수의 머리맡에서 약품을 꺼내기 위해서였다. 얼결에 재윤의 품 안에 갇힌 꼴이 됐다. 다른 의도라곤 없는 행동일 텐데, 이상하게 몸이 경직됐다.
그 와중에도 두 눈은 코앞까지 밀려온 재윤의 얼굴에 고정돼 있었다. 의사로서의 본분을 다할 때면 항상 그런 표정을 짓는다. 일전에 식당 앞에서 연고를 발라줄 때도 그렇고. 뭔가에 열중하면 조금은 그렇게, 화난 얼굴이 되나 보다.
재윤은 핀셋으로 솜을 집어 작은 상처 하나까지 세심히 소독했다.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에서 따끔따끔한 통감이 올라왔다. 우선 눈에 보이는 곳부터 치료를 마치곤 다시 창수의 어깨와 흉부, 등, 다리를 가만히 쓸어내린다. 집요하다 싶도록 빈틈없는 손길에 창수의 몸이 배배 꼬였다.
“아, 간지러워. 새끼야.”
“항상 이렇게 맞아?”
장난스럽게 키득대던 창수가 애매하게 낯을 굳혔다. 들려온 음성에 고저가 없더라니, 다리를 훑어보는 재윤에게서 표정이랄 게 완전히 증발해 있었다. 본업에 열중해서가 아니라 정말 화가 난 거였나.
“아나. 그런 건 아니고…… 뭐라고 할까. 일이 좀 있었어.”
쓸데없는 걱정을 살세라 서둘러 변명했다. 하지만 재윤의 기세는 누그러지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어왔다.
“얼마나 대단한 일이면 사람을 이렇게 만들지?”
문초를 당하는 것 같았다. 계속 빙빙 돌려 말해봤자 순순히 수긍해주지 않을 듯했다. 난감함에 뒷덜미를 긁적였다.
“그게, 길녀한테 남자가 있었나 보더라고.”
착각처럼 재윤의 손이 멈칫한다. 그저 창수 자신이 하는 말에 집중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아무 말도 안 해서 그동안 나도 까맣게 몰랐거든. 손님 중에 따로 선물 보내주는 놈들, 전부터 꽤 있었으니까 그 새끼도 그런 건 줄 알았지. 길녀, 그게 남자한테 받은 상처가 많은 년인데…… 그렇게 당하고도 또 마음이 흔들렸던가 봐. 사람한테 받은 상처가 많다는 건 그만큼 정을 퍼줬다는 거잖냐. 걔가 또 안 어울리게 은근히 마음이 약해서. 여기 떠서 같이 살림 차리잔 소리에 동했던 거지. 만용이가 그걸 알게 돼선, 죽이려고 들더라고. 그러다 살인나겠다 싶어서 말리다 보니까…….”
“창수 넌 괜찮았어?”
“응? 보다시피 멀쩡하잖아. 맞는 데 이골이 나서 이 정도로는 끄떡없다니까. 모아놓은 돈도 변변찮아서 털릴 것도 딱히…….”
“아니, 길녀 씨한테 다른 남자가 있었다는데도.”
“아, 우린 그런 거 상관하고 그러는 관계 아니야. 역시 이상하게 들리려나. 뭐라고 설명할 방법이 없네. 의리로 맺어진 사이라고 할까. 연중행사로 떡 치는 중년 부부 같다고 할까.”
주절주절 생각나는 대로 떠들었다. 예상대로 재윤은 아리송한 눈빛을 보내왔다. 더 확실하게 설명할 방법이 없는데. 곤란함을 느끼다가 그래도, 하면서 덧붙였다.
“이번 일 겪으면서 생각을 꽤 많이 했어. 걜 업고 집에 가는데, 내가 아니면 이년 누가 이렇게 돌봐줄까 싶더라고. 강한 척해도 결국은 계집인데. 걔가 날 남자로 안 보면 어때. 그년 벗은 거 봐도 발딱발딱 안 서면 좀 어떠냐. 알콩달콩하진 못해도 아옹다옹 정 붙여서 살면 그만인걸. 운 좋으면 나 닮은 애새끼도 낳아서 울 할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품에다 안겨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더불어 재윤까지 평생 친구로 있어 준다면 더할 나위 없는 인생일 거다. 하지만 듣는 재윤에게 부담이 될까, 그건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재윤은 얼마간 대꾸가 없더니, 조용히 웃었다. 의미가 다소 모호하게 느껴지는 미소였다. 자리에서 일어나면서는 벗어 봐. 했다. 잘못 들었나 싶어 얼떨떨하게 그를 봤다. 그러나 그는 들은 대로라는 듯 부연했다.
“옷 때문에 제대로 진찰할 수가 없으니까.”
그런가, 생각하며 잠자코 셔츠 단추를 풀었다. 재윤은 팔짱을 낀 재 잠시 기다렸다. 달리 할 일이 없어서인지, 그럴 이유가 따로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 정면에서 그의 눈길이 계속 닿고 있는 게 느껴졌다. 별것도 아닌데, 그렇게 빤히 보니 없던 민망함이 생길 지경이었다.
셔츠가 벌어지며 처참한 광경이 펼쳐졌다. 창수의 상체 구석구석이 멍들어 있었다. 오른쪽 옆구리는 아예 퍼렇게 죽었다. 색감의 대조가 완연해서, 오래전부터 자리 잡았을 흉터는 살필 여력도 없었다.
“그럼 뼈 부러졌는지 정도만 봐줘. 움직일 때마다 쑤시긴 하는데.”
“이 정도면 뼈가 문제인 게 아니야. 장기에 손상이 갔을지도 모른다고.”
“오버하지 마, 새끼야. 그냥 살짝 욱신거리는 정도니까. 만용이 그게 사람 패는데 도가 터서 병원 신세 안 질만큼만…… 아얏!”
대뜸 복부를 꾹 눌러오는 바람에 발끈하고 말았다. 연이어 “아파?” 하고 물을 땐 고개를 저었다. 근육통이지 내장기관에서 올라온 깊은 통증은 아니었다. 그 뒤로도 재윤은 일부러 그러는 건가 싶게 멍든 부위만 골라 가만히 눌러보았다. 딴에는 피부 아래 장기를 검사하는 거라지만, 당하는 입장에는 거푸 몸이 움찔움찔 튀었다. 기어이 오른쪽 옆구리를 건드릴 때는 오줌이라도 지릴 것 같았다
“숨쉬기는 어때?”
“겁나 멀쩡하니까 그만 좀 쑤셔라. 너 때문에 죽겠다, 새끼야.”
올상을 짓자 심각하던 재윤의 얼굴이 살짝 누그러진다. 픽 웃으며 그는 창수의 볼을 토닥였다. 잘 참았다, 어린아이라도 격려하듯이. 예전이었다면 머리를 쓰다듬었을 테지만. 창수는 공연히 포마드로 정돈된 제 머리를 한번 만져보았다.
“마저 벗어 봐 검진히는 김에 밑에도 봐줄 테니까.”
재윤이 책상으로 가며 주문했다. 다시 셔츠를 주워 입던 창수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뭘.”
“뭐긴 뭐야.”
재윤은 책상 서랍에서 뭔가를 꺼내며 어딘가를 주시했다. 그 시선을 쭉 쫓으니 창수 자신의 바지가 보였다. 그러고도 재윤의 의중을 이해하지 못했다. 영문 모를 얼굴이 다시 그를 향했다.
“여기는 안 걷어차였어.”
“걷어차였으면 네 발로 못 걸어왔겠지. 성병 검사해본 적 있어?”
재윤은 태평하게 물으며, 서랍에서 꺼낸 라텍스 장갑을 손에 꼈다. 텔레비전에서 수술하는 장면이 나을 때 종종 봤던 것이었다. 신기해서 빤히 보느라 재윤의 질문엔 답하지 못했다. 그가 가까이 다가왔을 슬쩍 한 번 만져도 봤다. 익숙한 재질이었다.
“엇, 이거 꼭 콘돔 같네?”
“…….”
“그 소재라고 해야 하나. 촉감도 완전 비슷하고. 이것 봐. 까득까득 소리 나는 것도 그렇잖아.”
해맑기 그지없는 웃음이 창수의 만면에 드리워졌다. 어린 시절 사슴벌레를 잡아 올릴 때도 그렇진 않았던 것 같은데. 잠시 멍해졌던 재윤의 낯에 설핏 미소가 스쳤다.
“그러니까 거부감도 별로 없을 것 같지?”
“응? 무슨 거부…….”
재윤은 손수 창수의 바지 버클을 풀었다. 대수롭지 않게 지퍼도 내려서 속옷과 함께 훌렁 벗겨낸다. 창수는 얼결에 엉덩이를 들어놓고도 어, 하며 당황했다. 순식간에 창수의 성기가 밖으로 드러난다.
재윤은 한동안 놈을 지그시 주시했다. 창수 역시 그랬다. 매일 보고 만지는 제 성기건만, 생각지 못한 곳에서 드러내 그런가. 영 다르게 보였다.
재는 스툴에 앉으며, 창수의 다리를 살짝 벌렸다. 허벅지에 재윤의 양쪽 무릎이 각각 닿으면서 다리가 그대로 고정됐다. 이내 숨을 곳 없이 드러난 성기를, 재윤이 다소 조심스럽게 붙들었다. 묘하게 배에 힘이 들어갔다. 골똘한 재윤의 시선 때문에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보통 얼마나 해?”
“응? 뭐, 뭐가.”
“섹스 말이야. 일주일에 몇 번이나 하느냐고.”
“세어 본 적 없는데.”
“그럼 가장 최근에 한 건 언제야?”
“그, 으, 으음, 그러니까…….”
한참 기억을 되짚어본다. 추웠던 날이었는데, 정확히 언제쯤인지는 모르겠다. 대답을 못 하자 재윤이 느리게 눈을 맞춰왔다. 그저 의사 대 환자로 마주앉아 있는 것뿐인데, 기분이 이상했다. 그런 느낌을 받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더 난처해졌다.
대답하지 않아도 크게 상관없었는지, 재윤은 곧 다음 질의로 넘어갔다.
“상대는 한 사람인 건가? 아니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이래 봬도 순정 빼면 시체라고, 내가.”
“그럼 다행이고. 잠자리 상대가 바뀌면 그만큼 성병에 걸릴 위험도 커지거든. 할 때 꼬박꼬박 콘돔도 쓰는 거지?”
“그야 안 하면 절대 못 하게 하니까.”
누구의 이야기인지는 덧붙이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재윤도 더 묻지 않았다. 그저 눈을 내리뜨며 손에 쥔 창수의 성기를 유심히 볼 뿐이었다. 창수도 덩달아 놈을 살폈다. 따로 절제술을 받지 않아서 꺼풀이 덮인 상태였다. 그래도 성생활엔 그다지 문제가 없다.
이제 됐지, 하면서 민망한 상황으로부터 그만 벗어나려 할 때였다. 별안간 재윤이 껍질을 벗겨본다. 묻혀 있던 귀두가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당혹감으로 창수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여기 안쪽은 잘 관리해주고 있는 거야? 너처럼 절제하지 않은 사람들은 꼼꼼하게 씻는 것도 그렇지만, 습기가 안 남게 말려주는 것도 못지않게 중요해. 자칫 피부 질환이 생겨서 고생할 수 있으니까.”
시종 침착한 재윤의 태도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는 철저하게 창수 자신을 환자로 대하고 있었다. 작금의 행위에는 어떤 사감도 섞이지 않았을 거였다. 도리어 이 건전한 의료 행위에 귀가 붉어지는 쪽이 문제다. 부끄럽다고 느끼는 것 자체가 죄악이었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자신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샅에서 올라온 불시의 자극에 몸이 살짝 튀었다.
“읏, 아…….”
주둥이가 멋대로 이상한 신음을 뱉는다. 멍청한 얼굴로 재윤을 봤다. 그 역시 늘라 굳어선 멍하니 창수를 응시했다. 삽시에 귓등부터 목덜미 전체에 확 열이 올랐다.
쿵쿵 심장 뛰는 소리가 고막을 흠씬 때린다.
“아, 미안. 내가 예민한 델 건드렸나 보네.”
재윤이 두 손을 물리며 사과했다. 조금 난감한 웃음도 지어 보인다. 덩달아 창수의 얼굴이 타오를 것처럼 붉어졌다.
“쾌,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아, 나 바쁜 일 있었는데 그만 깜박했네. 걱정할까 봐 잠깐 얼굴만 보고 가려던 거였는데. 그만 갈게.”
허둥지둥 일어나 옷을 입었다. 속웃이 뒤집힌 것조차 눈치채지 못한 채였다. 황망히 바지춤을 추켜올리며, 한시라도 빨리 진료실을 벗어나려 부산했다. 재윤은 요란하게 사라지는 창수를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도망가듯이 보건지소를 나선 그가 저만치 달려가며 으아악, 정체 모를 비명을 지른다.
그제야 재윤이 창가에 닿았던 시선을 제 손 쪽으로 옮겼다. 가만히 손가락을 문질러봤다. 손에 감긴 감촉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한참을 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해맑던 창수의 얼굴이 조금씩 허물어지던 게 선연히 그려졌다. 너무 짓궂게 굴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
인간관계에 끝이란 없다. 서로를 ─그 과거까지 포함해─ 완전히 망각하는 게 아니라면. 줄곧 이어져 오던 것이 어떤 이벤트를 기점으로 틀어지고 변화되면서 그 이름을 달리할 뿐이다.
비 오던 날의 느닷없는 입맞춤 또한 그런 계기가 되기에 충분했다. 적어도 창수는 그 행위의 의미를 계속 고민했으니까.
그러나 표면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재윤은 구태여 그 일을 언급하지 않았고, 창수 혼자만의 추론으론 그럴 수도 있겠다는 단순한 결론이 도출된 까닭이었다. 몇 년 전, 창수 자신이 우스꽝스러운 꿈을 꾸고 속옷을 적신 것과 하등 다를 게 없다 여겼다. 창수로선 그 외의 다른 이유를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일상에도 큰 변회는 없었다. 마치 수학여행 주간의 일들이 모두 꿈이었던 것처럼.
쉬는 시간이면 재윤의 반을 찾아갔고, 여전히 수요일 5교시 체육 시간을 기다렸다. 유일하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전처럼 등교를 함께 하게 됐다는 거였다. 수업이 끝나면 재윤은 창수의 반에 들렀다가 학원에 가곤 했다. 특별히 전할 말이 없어도 가만가만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인사를 전했다. 그렇게 졸업이 다가왔다.
고등학교에는 진학하지 않았다. 그 사이 할머니도 나이가 들었고, 일을 나가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 겨우 하루하루를 버티던 가정 형편이 갑자기 나아질 일도 없었다.
할머니는 못내 미안해했지만, 사실 진학을 체념하는 것 따위는 아무렇지 않았다. 어차피 공부에는 취미가 없었다. 남들 쫓아 고등학교에 간다고 해서 인생이 크게 달라질 것 같지도 않았다.
정확하게 그때부터였을 거다. 창수의 삶이 재윤과는 확연히 다른 궤적을 그려나가기 시작한 게.
재윤이 고등학교 배정을 확인하러 가던 날, 창수는 읍내에 나가 일을 구했다. 중학교 졸업장만으론 안정적인 직장을 찾기가 어려웠다. 사정을 아는 이웃들의 도움 덕에 바다로, 밭으로 짬짬이 일을 나갔지만 곤궁한 삶은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그간 할머니 홀로 짊어졌을 삶의 무게가 얼마나 막막한 것이었는가, 새삼 깨달았다.
만 16세가 되길 기다렸다가 원동기 면허를 땄다. 남들은 눈감고도 본다는 필기시험이 창수에겐 어찌나 큰 난관이었던지. 면허 취득 후에는 곧바로 목포에 있는 중국집에 취업했다. 당시에는 아직 섬을 잇는 다리가 놓이지 않았던 터라, 먼 뱃길을 오가는 수고는 감수해야 했다.
재윤을 만나기란 더 어려워졌다. 그가 목포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그 근처에 방을 구했기 때문이었다. 야간자습이 끝나면 밤 10시 무렵이었는데, 그때면 섬으로 들어가는 배가 끊겼다. 주말이라고 창수가 일을 쉬는 법도 없어서 시간을 맞추기가 몹시 난해했다.
그렇게 몇 달을 보냈을 무렵이었다. 배달 준비를 하는데, 가게 문에 달아둔 종이 울렸다. 무심코 고개를 들다가 어, 하며 탄성을 뱉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다름 아닌 재윤이었다. 긴가민가하며 찾아왔던지, 그는 안도 섞인 미소를 지었다.
- 어서 오세요.
여느 손님에게 하듯 인사부터 건넸다. 그러곤 어쩐 일이야, 사장 부부의 눈을 피해서 입술만 옴짝거렸다. 재윤은 대답 대신 슬쩍 웃고는 안쪽 자리에 앉았다. 주방과 가장 가깝지만, 실상 카운터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자리였다. 창수는 슬쩍 주방 상황을 보다가 얼른 재윤에게 다가갔다. 반가움이 앞섰는지, 재윤이 손부터 잡아왔다. 상황이 상황이었던지라, 창수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 못 본 지 오래된 거 같아서. 바쁘지?
- 점심시간이라.
대꾸 직후 주방에서 창수야, 부르는 소리가 났다. 반가움 가득하던 창수의 얼굴이 금세 난처해졌다.
- 지금 배달 갔다 와야 되는데.
- 다녀와. 난 뭐라도 시켜놓고 있을게.
- 자장면 말고 볶음밥 먹어. 그게 더 맛있어.
슬쩍 귀띔해주곤 주방으로 갔다. 붙들렸던 창수의 손이 아쉽게 놓였다.
- 사장님. 홀에 손님 한 명이요. 볶음밥 드신대요. 곱빼기 같은 안 곱빼기로 챙겨주세요.
- 뭔 소리나, 그게.
- 많이 먹어야 할 것처럼 생겼더라고요. 배달 다녀오겠습니다.
철가방을 들고 나서며 힐금 재윤을 봤다. 여지없이 눈이 마주쳤다. 조심 해서 다녀와. 움직이는 입 모양을 보곤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서둘러 배달을 마치고 왔을 때, 재윤 앞에는 산더미 같은 볶음밥이 놓여 있었다. 슬그머니 주방 쪽 기척을 확인하곤 그에게 다가갔다.
- 왜 안 먹어?
- 이거 주문 잘못된 거 같은데.
- 아니, 맞아. 이 형님이 힘 좀 썼거든. 좆 빠지게 공부하느라 힘들 거 아니냐. 내 강아지 많이 먹고 무럭무럭 커서 서울대 가야지.
할머니 말투를 띠라 하며 재윤이 늘 그랬듯, 그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당한 건 처음이라서인지 그가 다소 멍하게 쳐다보더니 곧 피식 웃었다. 먹어, 하며 볶음밥을 턱짓하곤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몇 번의 배달을 반복했다. 그사이 재윤이 자리를 뜰까 봐 돌아올 땐 더 서둘렀다. 가게로 들어서자마자 카운터 앞쪽 자리부터 확인했다. 기대로 부풀었던 얼굴이 삽시에 시무룩해졌다. 재윤이 앉아 있던 자리가 그새 빈 탓이었다. 그가 먹던 볶음밥만 애매하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가 버린 건가.
창수의 눈썹과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때 막 주방까서 나오던 시장이 망부석처럼 서 있던 그를 발견했다.
- 왜 그러고 있어?
- ……아뇨. 다녀왔습니다. 배달 또 있어요?
- 이제 없다.
기뻐해야 할 일인데 전혀 기쁘지 않았다. 텅 빈 철가방이건만, 이상하리만치 무거웠다. 그런 창수의 마음을 알 길 없는 사장이 빈자리를 턱짓하며 속삭였다.
- 저기 저 자리에 앉았던 학생 말이야. 안 그렇게 생겨서 대식가는 대식가인가 보더라.
- 왜요?
- 창수 네 말대로 곱빼기처럼 쌓아줬는데, 그거 다 먹고 또 시키더라고.
창수는 낯설게 빈 테이블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볶음밥의 잔량이 전보다 더 많은 것 같았다
하지만 재윤은 대식가와 거리가 멀었다. 허기가 달래지면 곧장 젓가락을 내려놓기 일쑤였다. 게다가 자장면보다 볶음밥이 더 맛있다는 것일 뿐, 그곳의 볶음밥 자체가 썩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의외로운 풍경에 의문이 들었을 무렵, 다시 종소리가 났다. 무심코 돌아보던 창수가 눈을 홉떴다. 이어서 얼굴이 제멋대로 풀어져 버렸다. 돌아갔으리라고 지레짐작했던 재윤이 버젓이 돌아온 까닭이었다. 다시 자리로 가서 앉는 모습이, 잠깐 화장실에 다녀온 모양이었다.
사장은 잠자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은근히 물었다.
- 아는 학생이야?
- 친구요. 사장님, 저 잠깐만 땡땡이쳐도 돼요?
- 30분이야. 아예 지금 점심 먹던지.
사장이 튀기고 남은 군만두와 짬뽕 국물을 챙겨주었다. 그릇 자체에 밥을 말아 재윤 앞에 앉았다. 테이블 아래에서 장난스럽게 다리가 엉겼다.
- 이제 쉬는 시간?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곤 재윤의 볶음밥을 끌어왔다. 그러곤 그가 먹던 숟가락으로 한술 떠먹어 봤다. 보통 때와 전혀 다를 게 없는 맛이었다.
이걸 곱빼기만 한 걸로 다 해치우고 또 절반만큼 먹었다니. 재윤의 입맛에 꼭 맞기라도 했을까,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문은 금세 털어냈다. 하고 싶은 말이 잔뜩 있었다. 듣고 싶은 이야기도 그만큼 많았다. 일분일초가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지던 순간이었다.
이후로 문득문득 재윤이 생각났다. 배달하러 나가다가도, 교복 입고 지나가는 무리를 보거나 종종 같이 사 마시던 음료를 혼자 뽑아 먹을 때도. 그런 날이면 종일 그를 떨칠 수가 없었다.
미치게 심심했던 건 아니었다. 맞은편 통닭집 배달원과도 친분을 쌓았고 어쩌다 보니 여자 친구도 생겼다. 한 길 건너 지하 다방에서 커피를 배달하는 여자였다. 당시에는 꽤 어른처럼 느껴졌지만, 이제 생각하면 그녀도 스물을 갓 넘겼을 거였다.
하루는 배달을 마치고 여객터미널까지 갔다가 가게로 돌아갔다. 그러곤 스쿠터를 끌고 나와 재윤의 학교로 향했다. 사위가 캄캄한 가운데, 촘촘한 창문마다 밝은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쥐 죽은 듯한 적막을 얼마쯤 견디고 있자니, 곧 인기척이 느껴졌다. 처음엔 하나였던 발걸음 소리가 삽시에 수십, 수백 개가 됐다.
지나가는 녀석들을 하나하나 지켜봤다 대입을 목표로 하는 학교라서인지 안경쟁이가 수두룩했다. 하얀 눈 속에서 초록을 보듯, 하나같이 창수를 생경하게 돌아봤다. 그 경계 어린 시선에 일일이 응해주고 있을 때, 재윤이 나타났다. 새로 사귄 친구들과 함께였다. 어두웠고, 모두 같은 옷을 입었는데도 녀석만은 단숨에 찾아낼 수 있었다.
경적을 울리자 그와 그의 친구들이 동시에 돌아봤다. 그에 맞춰 창수가 헤벌쭉 웃으며 팔을 흔들었다. 재윤은 잠시 놀란 눈빛을 하더니 곧 특유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리를 먼저 보낸 그가 창수에게 다가왔다. 그의 친구들이 가다가도 몇번씩 뒤돌아봤지만.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 어떻게 왔어?
- 니 새끼 낯짝 보고 싶어서.
쓸래, 하며 헬멧을 내밀자 잠자코 그것을 받아들었다. 창수 뒤로 올라타면서는 습관처럼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막 출발하려는 때쯤, 재윤이 들고 있던 헬멧을 창수의 머리에 얹더니 주먹으로 통 두드렸다. 한사코 가져다 쓰래도 듣지 않고, 허리를 꽉 끌어안을 뿐이었다. 등이 재윤의 가슴에 폭 파묻혔다. 꽤 쌀쌀한 날씨였는데도 그걸 금방 잊었을 만큼.
실없는 얘기를 나누며 드라이빙 하고, 새카만 바다를 함께 구경했다. 재윤을 그의 자취방까지 데려다주었을 때, 시간은 이미 자정을 한참 지나 있었다. 그러고도 아쉬운 얼굴로 돌아가려던 창수를, 재윤이 붙잡았다
- 들어가서 자고 가지? 배도 이미 끊겼잖아.
- 걱정하지 마, 짜샤. 가게에도 방 하나 딸린 거 있어. 거기서 자면 돼.
거푸 붙잡는 그의 배려를 사양하고 돌아 나왔다. 재윤의 말대로 배는 끊긴 지 오래였다. 가게에 딸린 방이 있다는 것도 거짓말. 그렇지만 공부하느라 자취까지 불사하는 재윤을 더 방해할 순 없었다.
아침이 오려면 아직 먼 시간. 유일하게 남은 선택지는 여자 친구뿐이었다. 잠결에 문을 열고 나온 그녀가 놀란 눈으로 창수를 봤다. 화장기라곤 없는 모습이 또래처럼도 느껴졌다. 안녕,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자 그녀가 소리 없이 입을 맞춰왔다. 그러곤 창수의 손을 붙잡아 천천히 자신의 방으로 데려갔다. 그날 밤, 처음으로 사내가 됐다.
그 뒤로도 몇 번인가 비슷한 상황이 반복됐다. 불현듯 재윤이 생각날 때면 그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교문 앞에서 기다렸다. 그는 언제든지 창수를 기쁘게 반겨주었다.
스쿠터 하나만 있으면 원하는 곳은 어디든 갈 수 있었다. 포구에서, 편의점 앞 테이블에서, 어느 산동네의 전망대 같은 언덕길에서, 재윤의 자취방 앞에서. 몇 시간이고 시답잖은 얘기를 나누다가 아쉽게 헤어져 여자 친구의 집으로 갔다.
첫 몽정의 영향이었을까.
그렇게 잠든 날이면 항상 꿈에는 재윤이 나왔다.
편의점에 다녀온 사이, 재윤이 책을 꺼내 보고 있었다 뒤에서 힐금 넘겨다봤지만, 도통 뭐라고 적현 건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역시 고등학교엔 안 가길 잘했다, 엉뚱한 결론을 내리고 사온 아이스크림으로 재윤의 이마를 가법게 쳤다. 그제야 그가 씩 웃으며 책을 도로 집어넣었다.
- 그렇게 열심히 공부해서 뭐 되려고?
- 글쎄.
- 이왕이면 의사나 판사, 뭐 그런 거 해라. 우리 사장님 말씀이, 남자는 ‘사’자 들어가는 직업이 최고랬어.
쭈쭈바를 까서 입에 물곤 앞자리에 앉았다. 포장지를 뜯던 재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 왜. 돈을 많이 벌어서?
- 뭐, 그것도 있는데. 아무것도 안 해도 계집애들이 줄 선다더라.
다리 벌려주려고. 속삭이듯 덧붙이곤 찍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두 눈은 의뭉스럽게 휘어졌다. 지켜보던 재윤이 덜컥 볼을 꼬집었다.
- 못 하는 말이 없네. 네가 지금 뭔 소리 하는 줄이나 알아?
- 왜 몰라. 이 몸은 이미 어른인데.
뜻밖의 대꾸에 재윤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아무래도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창수는 보다 얄궂은 표정으로 속삭였다.
- 이 형님은 진작 딱지를 떼셨다, 그 말이야.
그런데도 재윤에게선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여전히 굳은 낯으로 앉아 있을 따름이었다. 공부밖에 모르는 순둥이에겐 너무 큰 충격이었을까.
꼼짝하지 않는 재윤에게 전에 그가 했듯 헬멧을 씌워주었다. 시동을 켤 때까지도 꼼짝하지 않는 재윤의 팔을 끌어다 친히 허리에 감아놓기도 했다.
- ……누구랑?
편의점 앞을 막 떠났을 때, 재윤이 물었다.
- 누구긴 누구냐. 여자 친구지.
언제 처음 했는지, 어쩌다 그런 상황이 됐는지, 어떤 기분이었는지. 창수 자신이라면 호기심이 충만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재윤은 그뿐, 더 묻질 않았다. 가는 동안 다른 어떤 질문도 없었다. 다만 창수의 허리를 감은 두 팔에 바짝 힘을 줬을 뿐이었다.
금세 재윤의 자취방에 도착했다. 평소처럼 잘 자, 인사를 건네는데 재윤이 덜컥 손을 잡았다. 의심 없이 잡힌 손을 보다가 짤짤 위아래로 흔들며 악수하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재윤이 나직한 실소를 터트렸다. 창수는 이유도 모른 채 실실 따라 웃었다.
- 들어가.
헬멧을 받아들며 재차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재윤은 그 헬멧을 도로 가져가더니, 창수의 팔꿈치를 붙들어 당겼다. 왜, 하며 영문 모를 얼굴로 그를 봤다.
- 오늘은 자고 가.
- 괜찮다니까.
사양해도 막무가내로 사람을 잡아끌었다. 어어, 하다가 버텨보지도 못하고 끌려갔다. 좁은 현관에 서자마자 뒤에서 문이 닫혔다. 얼떨떨하게 돌아보니, 재윤은 잠금장치까지 살뜰히 잠그고 있었다. 그런 그가 어딘가 모르게 낯설었다. 눈이 마주침에 그가 들어가자, 하며 창수의 등을 가만히 떠받쳤다. 어조와 손길만큼은 평소처럼 다정해서 괜한 생각인가 싶어졌다.
조심스럽게 재윤의 공간에 발을 들여놨다. 그간 내심 한번 구경하고 싶었는데, 공부에 방해될까 번번이 거절했었다.
사람의 흔적이라곤 없는 작은 주방을 지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재윤이 뒤따라와 가방을 내려놓고 교복 재킷을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그동안 창수는 책상 위에 놓인 자잘한 물건들과 책장에 꽂힌 참고서, 책 따위를 눈으로 훑었다. 그 참에 어릴 적 자신이 만들어준 나무 비행기를 발견하고는 씩 웃었다. 반가움에 덥석 그것을 손에 들었다.
- 이걸 아직도…….
- 씻고 나올게.
웃으며 돌아보는 창수에게, 재윤이 굳이 보고했다. 타이밍이 엇갈리면서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재윤은 옅게 웃고는 욕실로 들어갔다. 문 닫히는 소리가 나고 잇따라 샤워기의 물소리도 들려왔다.
이유 없이 그쪽을 내다보다가 다시 손에 든 비행기 쪽으로 눈길을 옮겨왔다. 이제 와 가지고 놀 일도 없을 텐데, 이곳까지 챙겨 와서 소중히 여겨주다니. 기억 한편에 차곡차곡 쌓아올린 어린 날의 추억을, 재윤도 잊지 않고 있다는 게 못내 기뻤다.
좁은 방이라 구경할 것은 많지 않았다. 몇몇 책자를 제외하면 늘 재윤의 방에서 보던 물건이라 더 그랬다. 아직 욕실에선 물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창수는 마땅히 앉을 곳을 찾다가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대자로 크게 팔을 벌렸다가 팔다리를 한데 허우적거리며 장난을 쳤다. 단정하던 시트가 급격히 흐트러지고, 베개 하나는 기어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참에 뭔가가 손끝에 걸렸다.
- ……?
의아해하며 고개를 들었다. 손 옆에 놓인 물건은 탁상용 액자였다. 베개가 떨어지지 않았다면 그 밑에 깔려 있었을.
벌떡 상체를 일으키고 앉았다. 그러고는 거꾸로 뒤집혀 있던 액자를 바로 했다. 그곳에는 서로 어깨동무한 채 브이를 그리고 있는 재윤과 창수의 사진이 담겨 있었다.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 찍은 사진이었다.
- 이게 왜 여기 있어.
떨어졌나, 생각했지만 책상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달리 주변에 선반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의문을 뜸을 법도 하건만, 창수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액자는 구태여 책상으로 옮겨놓았다.
그즈음 문 열리는 기척과 함께 재윤이 욕실에서 나왔다.
- 네 팬티 하나 입는다?
서랍에서 아무 속옷이나 집어 들고 그의 곁을 지나쳤다. 재윤은 대꾸 없이 문가에 서 있을 뿐이었다. 의아하게 돌아보니, 제 책상 쪽을 빤히도 주시하고 있었다.
- 아, 그거 혹시 잃어버렸다고 착각한 거 아니냐? 침대에 있는 거 내가 찾았는데. 완전 고맙지?
찍 입술을 찢어 보였다. 재윤은 이번에도 말없이 돌아봤다. 고맙다, 웃으며 얘기할 줄 알았는데 얼굴에는 표정이랄 게 없었다. 뭔가 실수라도 한건가. 느리게 되짚어봤지만 도통 모르겠다. 고민하는 동안 재윤은 방 안으로 들어서며 씻어, 할 뿐이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그는 책상에 앉아 있었다. 조금 전의 그 사진 액자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픽 웃고는 침대로 가서 누웠다.
- 나 때문에 너 공부 못하는 거 아니냐?
- 괜찮아.
대답 직후 틱 소리와 함께 스탠드가 꺼졌다.
- 오늘은 공부 안 할 거니까.
이어 흘러나온 음성은 유난히 낮았다.
재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로 왔다. 매트리스가 가볍게 일렁였다. 가까이 앉아 징수 자신을 빤히 보기에 의심 없이 웃었다. 그러나 재윤은 아무 동요 없이, 한참을 그렇게 내려다보기만 했다. 창수의 얼굴에 차츰 아리송한 기운이 감돌 즈음엔 손을 들어 그의 무방비한 중심부를 덮었다.
- 잔뜩 쌓였어.
- 응?
- 스트레스로 죽겠다고.
- 뭐가. 설마 그거?
창수의 낯에 얄궂은 감정과 당혹감이 뒤섞였다. 재윤은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상체를 무너뜨렸다. 누워 있던 창수가 반쯤 그에게 짓눌렸다. 덩달아 사타구니에의 접촉도 짙어졌다.
- 나한텐 여자 친구도 뭣도 없으니까.
- 으핫, 그렇다고 왜 남의 걸 조물락거려? 네 똘똘이나 위로할 것이지.
간지러움에 창수가 크게 웃어댔다. 위기감이라곤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듯 했다. 관찰하듯 보던 재윤이 소리 없이 입술을 늘어뜨렸다.
- 친구끼리는 흔하다던데. 같이 딸치는 거.
가벼운 장난으로 유인해본다. 창수는 눈을 한 번 껌벅거리더니 “진짜?” 하고 되물었다.
그는 모르게, 재윤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 응. 서로 기분 좋게 빼고 돌아서는 즉시 잊어버리면 돼.
달콤하게 속삭이며, 창수의 목덜미에 가만히 입술을 묻었다. 체취를 맡으려 숨도 깊게 들이마셨다. 미간엔 어느새 깊은 주름이 잡혔다.
창수의 팬티를 늘어뜨려 그 안으로 성급한 손을 집어넣었다. 말캉한 성기가 손 안으로 굴러떨어졌다. 가만가만 더듬어가며 샅샅이 매만져보곤 슬슬 쓸어 올리기 시작했다. 간지럽다며 키득거리던 창수의 웃음소리가 조금씩 사그라졌다. 덩달아 복부와 무릎이 간헐적으로 움찔했다.
- 야, 진짜 기분 이상해지잖아.
- 못 참겠으면 눈 감아.
재윤이 낮게 중얼거리며 몸을 좀 더 붙여왔다. 창수의 이마가 재윤의 어깨에 닿았다. 숨을 들이켤 때마다 비누 냄새와 재윤의 체취가 진하게 뒤섞여 폐부로 들이쳤다. 성기는 그의 손에서 더욱 볼품없이 짜부라졌다. 절로 끙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재윤은 친구이기 전에 남자였고, 남자임과 동시에 친구였다. 그런 이의 손길에 몸이 제멋대로 흥분하고 있었다. 누가 건드리건 폭발할 만큼 불만에 시달렸던 것도 아니다. 혼란과 저릿저릿한 쾌감이 머리를 마구 뒤흔드는 듯했다. 발가락이 자꾸만 안으로 곱아 들었다. 사타구니 안쪽이 걷잡을 수 없이 뻐근해졌다.
그러는 동안에도 재윤은 창수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고 열심히 손만 움직였다. 허벅지에 짓이겨진 그의 남근 역시 터질 듯이 부풀어 있었는데도.
눈은 제대로 뜨려 해도 자꾸만 질끈 감겼다. 겨우 버티며, 재윤의 샅으로 손을 뻗었다. 곧 그의 드로즈에 창수의 손끝이 닿았다. 단지 그 얕은 접촉 만으로도 재윤의 몸이 거대하게 너울거렸다. 덩달아 도드라진 드로즈 한쪽 이 소리 없이 젖었다.
- ……씹할.
돌연 귓가에 빠득 이 갈리는 소리가 났다. 창수는 멍하니 재윤을 봤다. 그는 어깨를 크게 일렁이며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다. 표정 또한 전에 없이 상기됐는데, 어쩐지 때아닌 웃음이 나왔다.
- 뭐야. 니 새끼도 욕할 줄 아냐?
태평하기 짝이 없는 태도에 재윤이 뻥하게 보다가 픽 웃었다. 그 와중에도 숨결은 거칠기 짝이 없었다.
- 더한 말도 할 줄 아는데. 해 봐?
창수의 두 눈에 호기심이 가득 차올랐다. 그에게 있어 재윤은 늘 단정하고 금욕적인 이미지였다. 그런 그가 좁은 단칸방에서 음탕한 장난이나 치며 욕지거리를 뱉고 있다. 창수 자신이 아니면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재윤은 창수의 귓전에 대고 입술을 달싹였다. 실실 쪼개고 있던 창수의 얼굴이 순간 멍해진다. 가슴이 벌렁벌렁했다. 정체 모를 오싹함에 몸까지 부르르 떨려왔다.
- 와, 존나 꼴려.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며 재윤을 봤다. 그의 시선은 잠시만 머물다가 아래쪽을 향했다. 손끝으로 발기된 남근을 훑어 올리듯 하더니, 거추장스러운 팬티를 훌렁 벗겼다. 그러곤 그것을 창수의 얼굴에 가렵게 내던진다 창수에게서 여지없이 웃음이 터졌다.
잠시 시야가 차단된 상태에서, 재윤의 남근을 찾기 위해 그의 하복부를 만지작거렸다. 이내 그 손은 몸과 몸 사이에 짓눌리고 말았다 재윤이 두팔로 상체를 지탱하며 창수의 몸 위로 올라온 탓이었다. 그제야 얼굴에서 팬티를 치운 창수가 어, 했다. 정면으로 보이는 재윤의 낯이 어딘가 모르게 생경했다.
다음 순간, 태평하던 창수의 얼굴이 여지없이 무너졌다.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사타구니에서 뭉근한 쾌감이 솟구친 탓이었다. 어느새 재윤은 제 부푼 남근을 창수의 것에 대고 맞비비고 있었다. 그가 힘을 주며 아랫배를 붙여올 때마다 그 시이에서 짜부라진 남근들이 엉망으로 뒤엉겼다. 덩달아 상상도 해보지 못했던 저릿저릿함이 솟구쳐서 배를 간질이고, 머리카락까지 쭈뼛 서게 만들었다.
갈수록 재윤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마구잡이로 휩쓸린 남근이 다 쓰라릴정도였다. 그때마다 무릎이 움찔움찔 튀었다. 그러면 재윤은 목덜미와 볼에 마구 입을 맞춰주었다. 친구끼리 이런 것도 하나 싶었지만, 애초에 이성이 끼어들 구석은 없었다.
발끈 재윤의 몸이 긴장되는 게 느껴졌다. 덩달아 창수의 발가락도 한계치까지 웅크려졌다. 머지않아 복부 위로 무언가가 확 뿌려졌다. 그 감각은 곧이어 찾아온 사정으로 금세 잊혔다. 몸이 제 의지와 상관없이 부들부들 떨렸다. 재윤은 두 남근을 한 손에 잡고 다독이듯 쓰다듬으면서 남은 것까지 싹 토해내게 했다.
금세 기운을 잃은 남근처럼 온몸에서 힘이 죽 풀려나갔다. 정말이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그건 재윤도 마찬가지였는지, 철옹성처럼 버티던 그의 몸이 털썩 쓰러졌다. 그 사이 체취는 한층 짙어져 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쉴 때마다 서로의 흉부가 온전히 맞닿았다 누구의 것인지 심장이 쿵쿵 거칠게 뛰고 있었다. 한참 그렇게 마주 안고 있다가 창수가 먼저 비실비실 웃었다.
- 와, 미친. 좆 뽑히는 줄.
재윤에게서도 나직한 웃음이 터졌다. 하지만 그뿐, 짜릿한 장난을 끝낸 후의 소감이 없다. 그저 창수의 머리를 토닥토닥 하더니 그대로 발라당 몸을 뒤집고 잠을 청할 뿐이었다.
창수는 슬쩍 고개를 들고 재윤의 동태를 살폈다. 어떻게 알았는지 그가 미동도 없이 그만 자, 했다. 평소처럼 평온한 목소리였다. 그것만으로 안심 했던 것 같다.
- 잘 자라.
창수 역시 편하게 누워 눈을 감았다. 사정 후 찾아온 나른함에 금세 잠들 수 있었다.
눈을 떴을 때 재윤은 묵묵히 교복을 입고 있었다. 꽤 오래 자 버린 듯했다. 창수는 아랫도리를 그대로 내놓은 채, 준비하는 재윤을 멀뚱히 지켜봤다. 왜인지 간질간질한 엉덩이를 긁적거리면서. 가방을 들고 나서려던 재윤이 한참 만에야 그 시선에 응해주었다.
- 더 자. 열쇠는 우편함에 넣어주고.
- 그러다 잃어버리면 어쩌려고. 이따가 너 학교 끝날 때쯤 가져다줄게.
- 아니.
말을 자르듯 급한 대꾸가 돌아왔다. 착각인가 싶었지만, 곧 이어진 부연이 그 기대를 무너뜨렸다.
- 학교 앞에서 기다리는 거, 더는 하지 마.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심한 소리를 들은 것도 아닌데 그랬다. 화가 난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말투도 전과 다름없이 친절했다. 그럼에도 밤사이 없던 벽이라도 생긴 듯했다.
- ……뭐? 갑자기 왜?
- 갑자기가 아니야. 그냥, 내가 불편해.
재윤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았다. 더 물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정확히 무엇이 어떻게 불편하다는 건지 말하지 않아도 어렴풋하게는 알 것 같았다.
그라고 쏟아지는 친구들의 시선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던 건 아닐 거였다. 교문 안에선 창수 자신이 알 수 없는, 좋지 않은 얘기들이 오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 알았어. 네가 그러라면 그렇게 할게.
순순히 수긍하는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재윤은 끝내 돌아보지 않았지만 얼굴 역시 잔뜩 시무룩해졌다. 갈게, 짧은 인사를 남기고 재윤이 집을 나섰다. 문 가까이에서 들리던 그의 기척이 조금씩 멀어져갔다.
신분이 달라지면, 처지가 바뀌면 다 그렇게 멀어지는 걸까. 돌아오는 길엔 내내 그 생각만 했던 것 같다.
여자 친구와는 곧 헤어졌다. 두 사람 사이에 특별히 문제가 있던 건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소원해졌다고 생각한다. 아니, 변명이다. 창수 자신이 우울감에 빠져 그녀를 돌보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통닭집 녀석의 스쿠터를 타고 지나가는 걸 봤다. 생각만큼 가슴은 아프지 않았다.
◈◈◈
“아오, 씹할!”
짜증스럽게 휴지 조각을 집어 던졌다. 장롱에 비스듬히 기대어진 몸뚱이는 완벽한 반라 상태였다. 그 주변엔 구겨진 휴지 조각들이 이미 잔뜩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렇게 빼댔는데도 쌓인 게 시원스럽게 풀리질 않는다.
이렇게까지 욕구불만이었나. 확실히 마지막이 언제였던가 싶게 까마득하긴 했다. 그래도 자위 한 방이면 금세 개운해졌는데. 끊임없이 수난 당한 남근이 맥없이 고꾸라져 있었다 이젠 아무리 쥐고 짜내도 나오질 않는다. 그대로 다시 기력을 회복하지 못한대도 놀랍지 않을 듯했다. 그런데 대체 왜, 자꾸 초조하고 갑갑한 기분이 드는 건지.
혹시 욕구불만이 아닌 죄책감일까.
생각을 한번 전환해본다. 어제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피곤하다 보니 성욕도 쪼그라들어서, 속옷만 겨우 걸친 길녀를 봐도 아무렇지 않았더랬다.
그랬던 게 하룻밤 사이 분기탱천했다. 정확하게는 보건지소에 다녀온 직후부터였다. 그저 재윤은 상처를 치료해주고, 내친김에 몸의 건강을 돌봐 준 것뿐인데. 아무리 되짚어 봐도 그 행위에 성적인 뉘앙스는 없었다. 아니, 아니. 그런 게 있는 쪽이 이상한 거지.
고로 정상이 아닌 건, 그 건전한 의료 행위 도중에 반응해버린 창수 자신이었다. 재윤은 그저 성심성의껏 진찰해줬을 뿐인데. 진심으로 위해주는 마음을 쾌감으로 받아들인 제 몸뚱이가 죄다.
비명 같은 탄식을 내지르며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그때 돌연 문이 발칵 열렸다. 퇴근길에 또 한잔했는지, 길녀가 문밖에 위태롭게 서 있었다.
부끄러운 장면을 들키고도 창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주변에 널린 휴지들을 슬렁슬렁 주우면서 왔어, 할 뿐이었다. 길녀도 짜증스레 미간을 구기긴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졸라 건강하네. 아침 댓바람부터.”
“그뿐이면 다행이게.”
팬티를 입으며 한숨을 쉬었다. 옷을 벗던 길녀가 힐금 돌아봤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별문제 아니려니 생각했는지, 다시 제 할 일에 몰두할 따름이다. 창수는 나는 병신이야, 하며 장롱에 머리를 박았다. 양손 가득 자위의 산물을 든 채였다. 쪼그리고 앉은 꼴이 가관이다.
“뭔데, 또 이 화상아.”
길녀가 죽일 것 같은 얼굴로 돌아봤다. 그 미약한 관심에 힘입어 슬며시 물어보았다.
“길녀야. 혹시 여자들끼리도 우정의 힘으로 한 번쯤, 그런거 하냐?”
“우정의 힘으로 한 번쯤이라니. 그 구린내 날 것 같은 표현은 뭐야?”
“아 왜. 밤은 길고 옆구리는 시리고 그럴 때. 피차 잔뜩 쌓였을 때 말이야. 계집애들한테도 성욕이란 게 있다며. 무성하다면서. 그럴 때 같이 비비면서 달래본다든가.”
“──미친. 이 변태 새끼가 뭐라니?”
숨을 집어삼키며 질색한다. 사람을 갑자기 변태 보듯 하기도 했다. 역시 아니었나 보다. 말하기 부끄럽다고 감추거나 부정할 길녀가 아니었다. 도리어 그녀는 질문을 잠자코 복기해보더니 진절머리 난다는 투로 되물었다.
“설마 사내새끼들은 그런다는 거야?”
“계집애들은 몰라. 사나이들의 끈끈한 우정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쓰레기통 앞으로 갔다. 나가서 버려. 낮게 던져진 길녀의 경고엔 그대로 몸을 펴서 방을 나선다. 마당을 죽 가로질러 화장실로 갔다. 그곳 쓰레기통에 수북한 휴지 조각들을 털어버리자 절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앞으로 재윤을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다. 당장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마음이 묘하게 울적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