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저희 지금 목포예요.]
휴대폰 저편에서 웃음을 겨우 참는 듯한, 얄궂은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오랜만에 안부 전화나 걸었으려니 생각했는데, 귀찮게 됐다.
통화를 마치고 의자 깊숙이 기댔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뒷정리에 여념 없던 김 간호사가 의아하게 돌아봤다.
“무슨 고민 있으세요?”
“아닙니다.”
“오늘따라 환자가 많았죠? 주말을 앞둬서 그런가 봐요.”
“벌써 주말인가요. 요새는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재윤은 고개를 저으며 픽 웃었다.
“김 선생님은 슬슬 퇴근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이것까지 마저 정리하고요.”
“제가 할 테니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빈말인 호의라도 계속 거절하면 민망해지게 마련이었다. 김 간호사는 재윤의 배려를 더 사양하지 않고 다음 주에 뵐게요, 했다. 밖으로 나가는 그녀를 지켜보다가 물품 정리를 시작했다.
이윽고 재차 휴대폰이 울렸다. 힐금 고개만 돌려 발신자부터 확인했다. 이내 휴대폰을 잡아드는 손길이 지체 없다.
“저번엔 잘 들어갔어?”
전화를 받는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고였다.
휴대폰 저편에선 힉, 들숨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화는 제가 걸어놓고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언뜻 낮게 앓는 기척도 느껴졌다. 재윤은 휴대폰을 잠시 귀에서 떼며 통화 연결 상태를 확인했다. 안 들리는 건가, 나지막이 중얼거리자 휴대폰에서 당혹감 가득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아니! 들려! 안 끊겼어.]
재윤의 미소가 한층 짙어진다. 덩달아 눈썹은 편안하게 늘어졌다. 전화가 아니라면 쩔쩔매는 얼굴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얄궂은 아쉬움이 든다.
그사이 찰나 간의 정적이 찾아왔다. 부러 창수를 곤란하게 하려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재윤의 의중을 알 길 없는 창수에겐 짧은 침묵조차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등이라도 떠밀린 듯, 그는 준비되지도 않은 말을 띄엄띄엄 뱉어냈다
[그, 음, 저기…… 저번에는 내가, 그러니까…….]
“저번에?”
[크홈. 그, 니가 진료해줄 때 저, 뭐, 그게 나도 모르게…….]
어렵사리 말을 이어간다. 금방이라도 웃음이 터질 것 같아, 고개를 숙였다. 재윤의 입술이 소리 없이 긴 곡선을 그린다. 조금 더 지켜보면 즐거울테지만, 짓궂게 굴었다간 전처럼 또 달아나버릴 거였다. 재윤은 그쯤에서 그만 창수의 초조함을 덜어주기로 했다.
“설마 그걸 신경 쓰고 있었어? 그래서 연락도 계속 안 받은 거야?”
[응? 아냐! 그, 그런 걸 왜 신경 쓰나! 남자끼리. 절대로 그건 아냐!]
“흔한 일인데, 괜히 민망해하는 건 아닌가 걱정했어. 감 같은 게 예민한 사람들은 검사할 때 애로사항이 많거든. 아무래도 다른 곳보다 민감한 부위니까. 조심해서 하곤 있지만, 사람마다 성감대랄까? 그런 게 조금씩 달라서 완벽하게 캐어하기는 어렵더라고. 행여나 조금이라도 찝찝했다면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털어버렸으면 좋겠어.”
[……아? 그래? 정말?]
개미의 그것만큼 작아졌던 목소리가 부쩍 힘을 얻는다. 시들어가던 풀잎에 물을 줘도 그리 극적으로 살아나진 않을 터였다. 언제든 신중한 어조로 설득하면 바로 납득하고 수긍해온다. 그게 어떤 거짓말이어도 진실일 거라 믿는다. 어렸을 때도, 지금도 창수는 변함이 없다.
재윤은 묘한 감회에 젖으며 창수를 마저 달랬다.
“그렇다니까. 근데 그 얘기 하려고 전화한 거야?”
[아니, 꼭 그런 건 아니고…… 슬슬 일 끝났지?]
“응. 뒷정리하던 중인데.”
[잘됐네. 금요일 밤이잖냐. 나 아니면 친구도 없는 우리 샌님이, 지금부터 뭐 하려나 싶어서. 딱히 할 거 없으면 이 형님이 출근하는 길에 들러서 놀아줄까 하는데.]
야트막한 웃음을 터트렸다. 글쎄, 하는 어조가 살짝 늘어졌다.
[뭐야. 기껏 생각해서 전화해줬더니 비싼 척이냐?]
“아니. 실은 서울에서 후배들이 왔어.”
[후배들? 대학 후배 뭐 그런 거? 이 먼 데까지 왔다고?]
“응. 지금 목포에서 배 기다린다고 하던데.”
[……아, 그래? 그럼 안 되겠네.]
이번에도 바로 체념하며 물러선다. 창수는 그간 재윤이 몸담아왔던 새로 운 세계를, 좀처럼 침범하려 들지 않았다. 다소 막연한 느낌이지만. 어머니의 안부와 새 가족에 대해, 그쪽 생활에 관해 묻다가도 딱 거기까지였다. 새로운 세계의 누군가로부터 전화가 걸려오면 은근히 자리를 피하고, 같이 뭘 하자다가도 본가나 선약 핑계를 대면 더 묻지도, 조르지도 않았다.
재윤은 의미 없이 창밖 먼 곳을 내다봤다.
“괜찮으면 너도 올래?”
[뭐?]
“어차피 나랑 놀아주려고 했다면서.”
[바보냐. 내가 거길 왜 가.]
“녀석들한테 소개해주고 싶은데.”
돌연 휴대폰 저편이 고요해졌다. 한참을 기다려도 마찬가지였다. 휴대폰을 재차 귀에서 떼고 확인해 봤으나, 통화는 아직 연결된 상태였다. 모르긴 몰라도 잔뜩 곤란해 하고 있을 거였다. 끙 앓는 소리가 당장에라도 새어 나올 듯했다. 그 불안정한 공기가 휴대폰 저편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느낌. 재윤은 픽 웃으며 창수의 부담을 얼마쯤 덜어주었다.
“역시 밤에 일 나가야 해서 어렵겠지?”
[……정말 넌 내가 거기 갔으면 좋겠어?]
“응. 녀석들도 내가 여기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 할 거고…… 우리, 못 본 지도 꽤 됐잖아?”
[그럼…… 이따 출근하기 전에 잠깐 들리든지.]
창수가 마지못해 승낙했다. 너무 기대하진 마, 황망히 덧붙이기도 했다.
“기다릴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살랑거렸다. 읏, 하는 소리를 내더니 창수가 도망치듯 통화를 끊었다. 아마 그는 틀림없이 찾아와줄 거였다. 어릴 적부터 재윤 자신의 부탁이라면 거절한 적이 없으니까.
재윤은 휴대폰을 물끄러미 보다가 그것으로 제 턱을 톡톡 두드렸다. 잠시 뭔가를 생각히는 듯했다. 돌연 그의 만면에 흥미 어린 미소가 번졌다.
“선배에에에에에──.”
접안을 시도하는 여객선 위에서 김이 팔을 붕붕 흔들었다. 덩달아 윤도 두 팔을 머리 위로 교차하며 저희 왔어요, 했다. 에너지가 넘친다고 해야할지, 주변 시선을 의식 안 한다고 할지. 덩달아 집중되는 이목에 재윤은 나직이 웃으며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떠들썩한 두 녀석 곁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1년 선배인 인아였다 직전의 통화에서도 같이 왔다는 얘긴 없었는데. 그 이유를, 어렴풋하게 짐작 할 수 있을 듯했다.
여객선이 정박되자 주민들이 먼저 밖으로 나왔다. 몇몇이 재윤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 왔다. 간단한 안부를 주고받는 동안, 선적돼 있던 차량이 차례차례 선착장으로 빠져나왔다.
이윽고 윤의 차가 재윤 앞에 멈춰 섰다. 연이어 사방의 차창이 내려가더니, 윤과 김이 약속한 듯 고개를 내밀었다.
“시골 공기가 좋긴 좋은가 봐요. 얼굴이 몰라보게 좋아지셨는데?”
“저흰 완전 쪼글쪼글해졌죠? 환자들보다 제가 먼저 죽겠다니까요.”
얼굴을 보자마자 죽는소리부터 해낸다. 윤과 김 모두 같은 대학 출신으로, 동 대학병원 전공의 생활을 함께한 인연이 있었다. 조금 더 정확하게는 그 이상, 이하도 아닌 관계였다. 작금의 깜짝 방문이 의아하게 느껴질정도로. 그저 숨 돌릴 틈 없는 현실에서 도피할 장소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재윤이야 훌륭한 명분이 되어줬을 테고.
잠시 후 보조석에서 인아가 내렸다. 그녀에게도 자연스럽게 인사했다.
“왔어?”
“응.”
잠자코 주목하던 윤과 김이 서로 마주 보며 키득거렸다. 그러다가 아차, 하면서 어색한 연기를 시작했다.
“놀 생각만 하고 중요한 술을 안 사 왔네. 저희는 잠깐 읍내 들러서 마실 거랑 고기 좀 사 갈 테니까, 두 분은 먼저 가 계세요.”
“어딘지나 알아? 괜히 고생하지 말고 같이 들렀다 가지.”
“에이, 요즘 내비게이션에 안 찍히는 데가 어디 있다고. 그럼 조금 이따 봅시다.”
다시 만류해볼 틈도 없이 부리나케 출발해 버린다. 차량 뒤꽁무니를 지켜보던 인아가 픽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재윤도 얕게 웃고는 가자, 했다. 인아는 스스럼없이 재윤의 차 보조석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는 모습도 어딘가 모르게 익숙해 보였다.
서서히 차량을 출발시켰다. 옆에서 인아가 빤히 보는 게 느껴졌다. 원래 그렇게 하고 싶은 일에는 거침없는 타입이다. 왜, 하고 물을 수도 있었지만 재윤은 그러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운전할 뿐이었다.
인아는 한참 만에야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일은 어때. 할 만해?”
“좋아. 복작거리지 않고, 충분히 내 시간도 쓸 수 있고.”
“다른 녀석들은 교도소에 갇힌 거 같다던데. 지루해 죽는다면서 하루에 도 몇 번이나 전활 해대는지.”
“상대해주기 피곤하겠네.”
“뭐, 불쌍해서 가끔 온정이나 베풀어 주는 거지. 공보의 가 있는 놈들 하나같이 군대 가는 게 더 나을 것 같다고 징징대길래 슬슬 공재윤도 백기 들지 않을까 했었는데. 여태 전화 한 번 안 한 걸 보면 그럭저럭 지낼 만 했나 봐?”
“지루할 새가 없지.”
재윤이 의미 있는 웃음을 지었다. 인아가 그런 그를 다소 낯설게 돌아봤다. 착각이 아니었다. 늘 표정이랄 게 없던 얼굴에 진득한 미소가 고여 있었다. 무엇을 떠올렸는지 두 눈도 잔뜩 푸근해졌다.
놀란 것도 잠시, 인아는 애써 평온함을 되찾았다. 그러고는 지극히 따분한 얼굴로 창밖을 내다봤다.
“여기 완전 시골이네. 이런 델 왜 그렇게 못 와서 안달이었던 거야?”
“누구 얘긴데.”
“누구 얘기긴. 여기 아니고도 얼마든지 다른 지역. 배정받을 수 있었잖아. 전남은, 그중에서도 신안은 운 없는 놈들만 떨어지는 데라며. 올해 배정 인원도 겨우 둘인가 셋이었다는데, 천하의 공재윤이 그렇게까지 운 없는 인간도 아니잖아? 애들한테 들으니까 전남은 아예 네가 지원한 거라며. 왜 그랬을까, 계속 궁금하더란 말이지.”
“올해 펠로우 자리, 티오 하나였다며. 그걸 차지했다길래 바쁜 줄 알았는데, 그런 쓸데없는 생각 할 틈은 있었나 보네.”
재윤이 가벼운 어조로 대꾸했다. 진한 웃음을 지었지만, 말 속에는 분명히 뼈가 있었다.
인아는 대꾸 없이 창밖만 노려봤다. 낯은 전보다 더 떨떠름해졌다.
창수는 양손 가득 먹을 것을 싸들고 보건지소로 향했다. 오늘따라 뒤로 넘긴 머리카락은 한 올 흘러내림이 없었고, 구입한 후 처음 꺼내 입은 셔츠는 작은 움직임에도 매끌매끌 빛났다. 목과 손가락에 자리한 금붙이들도 유난히 더 반짝거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신경 쓴 태가 났다. 그럼에도 한 걸음 뗄 때마다 팔을 들거나 옷깃을 끌어당겨 킁킁 냄새를 맡아봤다. 모처럼 목욕탕도 다녀왔고, 향수와 맞먹는 독한 스킨까지 발랐는데 안심이 안 됐다. 무엇 때문에 그리 긴장한 건지는 창수 자신도 알지 못했다.
보건지소로 이어지는 길을 걷는데, 전에 없던 소음이 들려왔다. 스피커를 통해 음악이 흘러나으고 있었다. 시답잖은 수다를 떨며 낄낄거리는 소리가 섞여 들렸다. 이따금 재윤의 목소리도 귓가에 닿았다. 몸에 부쩍 더 힘이 들어갔다.
흠흠, 헛기침하며 목을 가다듬고 마저 걸음을 뗐다. 다리가 굳은 것처럼 어색하게 움직였다.
보건지소 앞마당에서는 바비큐 준비가 한창이었다. 짙은 숯 냄새와 탁한연기가 어지럽게 뒤섞였다. 가로등 불빛이 창수의 등 뒤로 쏟아지면서 환하던 공간에 그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숯과 씨름하던 김이 먼저 그를 발견했다. 눈이 마주치자 창수가 샐쭉 웃으며 고개를 꾸벅했다. 얼결에 같이 묵례하다가도 김은 영문 모를 표정으로 재윤을 돌아봤다.
“……선배. 손님 오신 거 같은데.”
근처에 있던 윤이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곧장 창수와 눈길이 맞닿았다. 반사적으로 윤의 어깨가 움칠했다. 손님이란 소리에 나와 보던 인아 역시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창수는 그저 방긋거리며 안녕하세요, 했을 따름이었다. 얼굴만 보면 순한 인상의 청년인데, 차림새는 건달이 따로 없다.
네 사람이 묘하게 대치하는 사이, 재윤이 밖으로 나와 봤다. 곧 그의 시야에도 바보 같을 정도로 환하게 웃고 있는 창수가 들어왔다. 양손에 짐이 한가득했다. 재윤은 굳어 있는 세 사람을 지나쳐 창수에게 다가갔다. 서둘러 그의 짐부터 받아들었다.
“어서 와 안 그래도 전화해 보려고 했는데.”
“친구들 왔다는데 그냥 오기가 뭐해서.”
몇 마디 주고받는데, 뒤에 있던 인아가 다가왔다. 재윤의 어깨에 슬며시 손을 얹으며 창수를 올려다본다.
“이분은 누구?”
“아, 안녕하세요? 저는 백창수라고 합니다. 재윤이 이 새끼랑은 불알친구고요.”
그 직후 뒤에서 김과 윤이 친구, 하고 속닥이는 소리가 들렸다. 인아 역시 확인을 구하듯 재윤을 봤다.
“고등학교 때까지 여기에서 지냈거든. 그때나 지금이나 많은 도움 받고 있어. 모처럼 주말이라 내가 오라고 했는데, 다들 괜찮지?”
당사자를 세워놓고 그리 묻는데,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창수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눈길을 의심하지 않으며 재차 찍 웃어 보였다. 재윤이 이리 와, 하며 그의 팔을 잡아끝었다. 그 탓에 재윤에게 얹혀 있던 인아의 손이 미끄러졌다.
인아는 팔짱을 끼며 재윤을 돌아봤다. 그의 얼굴에는 종전과 다른 웃음이 걸려 있었다. 정말 즐거운 듯했다. 달라진 상황이라고는 창수가 왔다는 것밖에 없는데도. 그가 남자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눈동자를 굴려 옆에 있는 창수를 봤다. 묘하게 인상이 눈에 익었다. 전에 어디선가 한 번은 마주친 느낌. 하지만 그게 언제였는지, 정확하게 떠 오르진 않았다.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인아의 고개가 연신 가웃거려졌다.
그 골똘한 시선을 깨닫지 못한 창수가 고개를 돌려가며 할 일을 찾는다. 그러다 불쑥 인아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습관인 것처럼 헤실 웃었다. 외양과는 다르게 웃음이 헤프다. 살짝 쳐진 눈매도 짙은 쌍꺼풀이 져서 제법 순해 보였다. 겉모습은 재윤과 친구였고 지금도 그렇다는 게 영 안 믿기는데, 얼굴 자체만 보면 그런가 싶기도 했다.
여전히 낑낑거리던 김에게 창수가 다가갔다. 내가, 하면서 손을 내밀자 김이 얼떨떨하게 토치를 건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금까지 애먹이던 숯에 불이 붙었다. 그릴 위로 읍내에서 사 온 고기며, 창수가 가져온 가리비, 새우, 낙지 따위가 차례로 얹어졌다. 김과 운은 금세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곤 그릴 앞으로 다가갔다.
난생처음 보는 사이인데도 말 붙이는데 스스럼이 없다.
“재윤이 후배들이면 다들 의사 선생님?”
“뭐, 그렇죠.”
“보다시피 가운 벗겨놓으면 일반 오징어지만요. 창수 씨는 여기에서 사시는 거죠? 무슨 일 하세요?”
“가방끈이 별로 길지 못해서요. 읍내에 나가면 나이트 하나 있는데, 혹시 보셨나?”
“아, 그거! 이런 섬에도 그런 게 다 있다 싶었는데. 그치?”
“응. 거기서 일하세요? 웨이터?”
“웨이터는 아니고, 관리라고 해야 하나.”
창수는 먼 허공을 보며 볼을 긁적였다. 제 일을 딱 정의할 단어가 없어서 난처한 듯했다. 하지만 그뿐, 하는 일 자체를 감추려거나 부끄러워하지는 않았다.
서로 멍하니 마주 보던 김과 윤이 금세 어린애처럼 눈을 빛냈다.
“영화에 나오는 항구의 남자, 막 그런 거예요?”
“싸움 잘하시나 보다. 그죠?”
“전혀요. 맞는 거 전문이라고 할까.”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얘기를 하며 웃었다. 쉽사리 짐작은 가지 않았지만, 무리도 그쯤에서 그러려니 했다. 어차피 하룻밤 인연이면 일일이 연연할 필요도 없지 싶었다.
딱 알맞게 구워진 고기와 해산물을 배가 터질 만큼 먹었다. 맥주도 곁들여지니 공기가 달곰하게 들썩거렸다. 바다에서 불어온 바람이 들뜬 마음을 한층 부추겼다.
분위기에 취해 쉼 없는 대화가 오고 갔다. 처음 재윤을 만났던 날과 두 사람이 일으켰던 크고 작은 말썽들, 사방이 꽉 막힌 섬에서의 생활과 하루 한 끼만 제대로 챙겨 먹어도 다행이라 여겨지는 도시의 바쁜 삶. 고달픔은 언제고 가장 좋은 안줏거리다.
재윤의 대학생활과 병원에서의 일들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잘 귀담아들었다. 설사 잠자고, 먹는 흔한 이야기여도 그저 흥미롭기만 했다. 창수 자신이 교도소에 갇혀 있던 동안 재윤의 시간은 누구보다 열심히, 치열하게 흘렀던 것 같다.
어느새 얼큰하게 취한 김과 운은 창수를 마주 앉혀놓고 쉼 없이 주둥이를 나불거렸다.
“화나면 정말 무섭게 혼내는 선밴데요, 그래도 하는 일에 대해서는 철두철미하고 완벽해서 존경합니다. 어디든 따라가고 싶다고 할까.”
“새끼가, 벌써 아부냐? 그런다고 너 같은 돌팔이를 선배가 본가 병원에 데려가 줄 것 같아?”
“미래 이사장님인데 안 될 건 또 뭐냐. 전문의만 딱 제대로 따놓고 수절하면서 기다리는 거지.”
툭하면 들어보세요, 하면서 하소연을 쏟아내는데 대개 창수가 알아들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잔에 남은 맥주를 마저 털어 넣었다. 그 참에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자정이 훌쩍 넘어 있었다. 슬슬 가게에 가서 한 바퀴 돌아봐야 할 것 같았다.
그제야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재윤을 찾았다. 잠시 자리를 뜨기에 회장실에 가나 보다 했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인아의 모습 역시 보이지 않았다. 연신 사위를 살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과 윤의 시선이 길게 따라붙었다.
“응? 어디 가시게요?”
“이제 슬슬 가게에 나가봐야 할 것 같아서요. 재윤이 놈한테 인사 정도는 하고 가야…….”
“안 가시는 게 좋을 텐데.”
김이 얄궂게 중얼거리더니 피식 웃었다. 술기운 때문인지 두 눈은 이상하게 휘어졌다. 덩달아 윤도 낄낄거리며 저희가 말 전해드릴게요, 했다. 당연히 그렇게 해도 될 일이었다. 가는 길에라도 전화 한 통 걸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창수는 부득불 관사에 올라가 보기로 했다. 손님들이 오기로 했다기에 얼마쯤은 체념했지만, 재윤과 제대로 된 대화를 전혀 나누지 못했다. 요 며칠 그의 연락을 피하다시피 했던 이유를 제대로 설명해두고 싶었는데. 기껏해야 너무 바빴다느니, 정신이 없어서 그랬다느니 하는 변명 일색이겠지만.
관사로 이어지는 층계를 거의 다 올랐을 즈음이었다. 위에서 사람의 기척이 감지됐다. 예상대로 재윤이 그곳에 있는 것 같았다. 특별히 목소리가 들렸던 것도 아닌데, 느낌이 그랬다.
반사적으로 얼굴에 웃음이 고인다. 하지만 층계를 두어 개 놔두고, 창수의 걸음은 우뚝 멎고 말았다. 만면에 드리워졌던 웃음도 의외의 광경에 돌연 허물어졌다. 두 눈이 저절로 크게 떠졌다.
재윤은 층계 쪽을 보며 얕은 담벼락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를 마주하고 있는 이는 틀림없이 인아였다. 두 사람은 그곳에서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반쯤 벌어져 있던 재윤의 눈꺼풀이 스르륵 닫혔다. 그대로 그는 인아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며 더 농밀하게 입술을 탐했다.
멍청하게 굳어 있다가 허둥지둥 돌아섰다. 왜인지 봐서는 안 될 걸 봐버린 것 같았다. 쿵쿵 소리가 제 놀란 발걸음에서 기인한 것인지, 가슴 깊은 곳에서 울리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바닥에 내려와서도 다리가 후들거려 얼른 걸음을 놓기가 어려웠다.
하얗게 질린 창수를, 김과 윤이 의아하게 돌아봤다. 왜 그러세요, 묻는 데도 대꾸할 여력이 없었다. 이만 가보겠다는 인사도 제대로 전하지 못했다. 창수는 고개만 꾸벅하더니 황망히 자리를 떴다.
“형님. 배 많이 고프셨어요?”
윤삼이 걱정하듯 보며 물을 건넸다. 자정을 넘겨서야 나타난 창수는 다짜고짜 주방으로 들어가더니 양푼 한기득 밥을 비벼 먹기 시작했다. 입안의 것을 제대로 씹지도 않고 계속 욱여넣기만 하니 두 볼이 금방이라도 미어터질 것 같았다.
입속 가득한 비빔밥 탓인지, 밖에서 뭔가 분한 일이 있었는지 씩씩 거친 숨소리를 냈다. 이따금씩 한 번 옆에 놓인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따로 기다리는 전화가 있는 모양이었다. 평소 같으면 참지 못하고 제가 먼저 연락 했을 텐데, 잠잠한 휴대폰을 계속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다시 푹푹 밥을 떠 입에 넣었다.
“일찍부터 때 빼고 광내고 지랄하더니. 기어이 차였냐?”
소식을 듣고 온 길녀가 쯧쯧 혀를 찼다. 분한 미음에 그녀를 노려봤다. 양 볼 가득 부푼 그런 꼴로는 조금의 위협도 되지 않는다. 길녀는 코웃음치며 창수에게서 양푼을 빼앗았다. 그러고는 먹지도 않을 비빔밥을 숟가락으로 뒤적이며 잔소리했다.
“내가 너 오버할 때부터 알아봤다. 뭐 마려운 개처럼 몇 날 며칠 끙끙거리더니 전화 한 통에 쪼르르 달려가고. 사내새끼가 배알이라곤 좆만도 못해서, 지 마음에 드는 여자 하나 어떻게 못 해보다니.”
“그런 거 아니거든?”
“아니긴. 딱 다 넘어왔다고 생각한 여자, 다른 놈이랑 뒹구는 거 목격한 낯짝이구만.”
독심술이라도 하지 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청수의 눈썹이 일자로 모아졌다. 두 볼에 남은 비빔밥은 씹어 삼킬 생각 도 못 한 채, 얼굴 역시 시무룩해진다.
아니라고, 그런 거.
웅얼거리는 소리는 잘 들리지도 않았다. 축 늘어진 창수의 머리 위에서 윤삼과 길녀의 시선이 오간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두 사람 중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창수로서도 작금의 우울함과 무력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재윤의 초대를 받고 기분 좋게 갔던 자리다. 그의 후배들과 어울리는 것도 우려했던 것만큼 어렵지는 않았다. 뭣보다 재윤이 상관없다고 말해주었기 때문에, 창수 자신이 하는 일에 관해 얘기할 때도, 최종 학력을 언급하는 것에도 스스럼이 없었다. 자신을 애써 포장할 필요가 없어 미음도 편했다.
아쉬운 점은 기껏 찾아갔는데, 재윤과는 제대로 대화하지 못 했다는 것뿐이었다. 그조차 먼 데서 손님이 찾아왔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손님을 챙기려면 온전히 창수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 없다는 것쯤은 이해하고도 남는다. 오히려 그를 도와 그의 후배들이 즐겁게 놀다 갈 수 있게 해줘야지, 생각했었다. 가끔은 창수 자신이 이해 못 할 말들을 해도 열심히 귀담아들었던 이유다.
“아니라고만 하지 말고 속 시원하게 말을 해 봐, 그럼. 대체 뭐 때문에 그렇게 골이 난 건지.”
길녀가 양푼을 내려놓으며 팔짱을 꼈다. 보통 때였으면 거치적거리지 말고 꺼지라고 된소리 했을 그녀였다. 그만큼 여태껏 창수의 고민이랄 건 시답잖은 것뿐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무게감이 좀 달라 보였다. 공연한 우려인지도 모르겠지만.
이러쿵저러쿵 해뵈야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마음이 울적해진 까닭이라곤 정말 재윤이 여자와 키스했기 때문에. 그것밖엔 없었다.
친구의 연애를 축하해주지 못할 만큼 그녀가 막돼먹은 사람도 아니었다. 서울에서 온 여자답게 말수도 많지 않고, 다소 쌀쌀맞게 느껴지긴 했어도. 제법 미인이었고, 분위기도 있었고, 직업이며 학력이며 뭐 하나 빠지질 않았다. 재윤이 그녀를 좋아하지 말아야 할 근거 따윈 아무래도 없었다.
이곳에 오기 전 정리하고 왔다는 사람이 그녀였을까. 돌아가면 다시 그녀를 만나는 거겠지? 지금처럼 창수 자신에게 내줄 시간 따윈 없어질 거였다. 아니, 여태 그랬던 것처럼 서울로 돌아가 본래의 궤도를 찾는 즉시 이곳은 잊어버릴지도.
역시 그건 싫다.
“나란 새끼 왜 이렇게 찌질하지.”
“그걸 이제 일았냐?”
다른 때였으면 그 같은 도발에 분연히 일어섰을 거였다. 하지만 오늘따라 창수는 어울리지도 않는 한숨이나 뱉을 따름이었다. 길녀는 성가시다는 듯 제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곤 다소 두루뭉술하게 충고했다.
“누구랑 비교하면서 깎아내리는 건지 모르겠지만 관둬, 그런 짓. 비교해봤자 자기 자신만 더 구려 보이니까. 태생이 다른 건 극복할 수 없어. 이미 이렇게 생겨먹은 걸, 당장 어떻게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창수가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길녀는 이번에도 잘못 짚었나, 하며 슬그머니 그의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그녀가 맞았다. 공연히 깊게 생각했지만 답은 결국 그거였다. 재윤의 그녀가 창수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서. 예쁜 여자인 데다, 직업도 의사고, 서울에서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거라서. 무엇보다 그런 그녀를 재윤이 좋아하기 때문에.
정리되지 않았을 뿐, 머릿속에서 이미 답은 나와 있었다. 돌연 허무해진다.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도 났다. 단짝이라는 위치를 남에게 빼앗길까 봐 여자를 질투했던가 싶어서. 이제 재윤도, 창수 자신도 엄연한 성인이고 언제까지 서로가 가장 가까운 사이일 순 없는 건데. 아니. 애초부터, 재윤이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을 그때부터 이미 그 자린 창수 자신의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조금 잘해주었기로서니 우쭐해져선. 제가 재윤의 뭐라도 된 줄 알고.
“길녀야.”
“왜”
“돌려줘, 내 밥. 잔뜩 먹고 배 터져서 죽어버릴래. 나란 새끼한테는 지금 마시는 공기도 아까워.”
창수는 다시 꾸물꾸물 몸을 움직이더니 양푼을 품에 안았다. 한 술 가득 든 비빔밥을 입에 마구 욱여넣었다. 턱의 움직임이 비정상적으로 느렸다. 시름 가득한 두 눈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길녀는 윤삼에게 따라 나오라는 눈짓을 했다. 윤삼이 연신 창수를 돌아보며 밖으로 나왔다.
“오늘 저거 누구 만나고 왔다던?”
“아까 형님 대신 일수 걷다가 임 씨 아저씨를 만났거든요. 형님이 보건지소 선생님 댁에 손님 왔다고, 거기 가져다주게 물 좋은 놈들 좀 구해달라고 하셨답니다.”
“보건지소?”
더 아리송해진다. 최근 창수의 이상행동을 보곤 여자가 생긴 거라고 확신했다. 멍청하게 여자한테 퍼주기나 할 줄 알지, 제대로 연애란 걸 해본 적 없는 그가 웬 계집에게 단단히 빠진 모양이라고.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감정의 급격한 변화는 항상 보건지소에 다녀온 후 일어난다. 길녀가 이는 한 그곳의 여자라곤 마흔을 넘긴 간호사뿐이었다. 설마, 하며 의심해 보다가도 금세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절대 임자있는 대상을 건드릴 만큼 대범한 성미가 못 된다.
하지만 그것도 아니라면 뭘까. 창수에 관해선 그 자신보다 더 잘 안다고 자부했는데, 이번만큼은 도무지 계산이 서질 않았다.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만 감으면 키스하던 재윤의 모습이 떠올라서. 얼핏 선잠이라도 들 땐 그의 상대가 창수 자신으로 바뀌어 있었다.
으아악,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다가 길녀에게 욕 얻어먹길 수차례였다. 사과하고 돌아누워서도 벌떡이는 심장이 가라앉지 않아 또 애를 먹었다.
그렇게 뜬눈으로 숱한 시간을 흘려보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쓰고 있다가 슬그머니 휴대폰으로 손을 뻗었다. 이내 그 손은 목적했던 휴대폰을 집어 이불 안으로 사라졌다. 그 후, 동그랗게 솟아오른 이불더미는 이상하리만치 고요해졌다.
벌써 몇 번씩 반복된 행동이었다. 그 모습을 아니꼽게 지켜보던 길녀가 짜증스럽게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진짜 꼴같잖아서 못 봐주겠네. 연락 오기 기다리지 말고 네가 하면 되잖아. 병신아. 멍청해서 이제 통화 버튼도 못 누르냐?”
대꾸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휴대폰을 뱉어내듯 도로 이불 밖으로 내놓을 뿐이었다.
불과 며칠 전에도 이런 청승을 떨더니. 어젠 또 기분 나쁠 정도로 실실 쪼개고 나가기에 괜찮아진 줄 알았다. 조울증이라도 걸린 건지, 어쩐 건지 꼴 보기 싫어 못 참겠다.
“그쯤하고 일어나지? 요즘 만용이 그 개새끼 또 지랄병 도졌다던데, 괜히 거슬려서 처맞지 말고.”
이번에도 반응이랄 게 없다. 내내 잠잠하던 그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리기 전까진 그랬다. 느려터진 굼벵이가 따로 없더니, 이불 속에서 홱 손이 나와 휴대폰을 낚아챈다.
“지랄한다, 지랄을 해.”
길녀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면서 방을 나갔다. 그 직후, 시끄럽던 벨소리가 멎었다.
“왜.”
대꾸하는 목소리는 생각보다 힘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재윤이 아닌, 윤삼의 전화였기 때문이다. 재윤이라면 아직 후배들과 있을 거였다. 창수 자신의 안부 따위 궁금할 이유가 없는 거다.
[형님, 지금 어디십니까. 빨리 나와 보셔야 될 것 같은데요.]
윤삼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길녀라면 지금 막 나갔으니 그녀의 일은 아닐 테고. 짐작 가는 구석이 많지 않았다.
“무슨 일인데.”
심드렁하게 묻다가 발딱 몸을 일으켰다. 실연이라도 당한 듯하던 얼굴은 그새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알았어. 지금 갈게.”
서둘러 통화를 끊고 집을 나섰다. 어제 입은 그대로 잠자리에 들었기에 옷을 따로 갈아입지도 않았다. 피차 그럴 정신도 없었다. 두 발에는 구두와 슬리퍼가 각각 신겨져 있었다. 그마저도 얇디얇은 슬리퍼 한 짝은 달려 가는 동안 홀라당 벗겨져 버렸다.
창수가 쉼 없이 뛰어 도착한 곳은 시장 입구였다. 안으로 막 달려 들어가려는데, 차 한 대가 불쑥 튀어나왔다. 반사적으로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면 그대로 충돌할 뻔했다. 거친 숨을 삼키며 보니, 차량이 눈에 익었다. 아니나 다를까, 뒷좌석 창문이 열리면서 만용이 얼굴을 드러냈다.
“그렇게 꽁지 빼고 어디 가실까?”
그를 보자마자 창수가 발끈하며 달려들었다.
“일수 걷는 건 내 일이랬잖아!”
“그래. 네 일이지. 니 새끼가 궁둥이 흔들며 놀러 다니느라 홀랑 내팽개쳤던, 네 일. 너야 딸린 군식구가 없어서 여유만만인지 모르겠지만, 이 몸은 처자식이 있어서 그럴 수가 없단 말이야. 남의 돈 받아 쓸 때는 입안의 혀처럼 굴어놓고, 갚을 때 되니까 입 싹 닦고 버티는 연놈들까지 마냥 기다려줄 수가 없다고.”
창수의 얼굴에 반감이 팽배해졌다. 만용은 짧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젖혔다. 공격의 신호였다. 운전석에서 지켜보던 윤삼이 지레 쩔쩔맸다. 핸들을 붙든 그의 손에 초조함이 고였다.
다음 순간, 만용이 창수의 목을 휘감아 창문 안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 어깨는 창틀에 걸린 채 목만 당겨져, 균형이 완전히 흐트러졌다. 벗어나려는 창수의 귀에 만용이 나직이 속삭였다.
“창수야, 사람이란 게 말이야. 다 네 그 대가리 속 알량한 생각처럼 착하지가 않아. 호구처럼 잘해주면 정말 호구인 줄 안단 말이야. 우리가 자선사업가야? 아니잖아. 남의 돈을 빌렸으면 갚아야지. 남의 걸 떼먹는 건 도둑질이나 다름없는 거야. 집에 들어온 도둑을 몽둥이로 때리는 건 그저 정당방위짆아? 뭐? 갚을 돈이 없어? 정말 그렇다면 하루에 한 끼도 먹지 못하고 사는 거겠지? 물도 전기도 싹 다 끊긴 동굴 같은 데서 겨우겨우 숨만 붙어 있는 거겠지? 그러니까 남의 돈도 못 갚고 허송세월하는 거지, 그치? 그런데 그 치가 통닭을 사 가더라고. 임신한 딸이 왔다나 뭐라나.”
작은 웃음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홱 고개를 내뺐다. 이번만큼은 만용도 순순히 창수를 놔줬다. 그러고는 잔뜩 못마땅한 표정이 된 그에게. 얼굴을 굳히며 경고했다.
“학교도 같이 다녀온 정으로 이번까지만 봐주는 거야. 다음에도 설렁설렁하면 그땐 네가 죽어.”
망할. 낮게 읊조리며 차체를 돌아 다시 뛰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목적지가 시야에 들어왔다. 시장 초입에 자리한 미용실이었다. 싼값에 노파들의 파마를 말아주는.
몇 년 전 남편의 수술비 때문에 큰돈을 빌려갔다가 갚지 못했다. 일수가 밀린 지는 1년 가까이나 됐다. 여주인마저 병을 얻으면서 오래 일할 수 없게 된 탓이다. 길녀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 했지만, 몇 번은 창수 자신의 사비로 그 집의 일수를 충당하기도 했다. 그러지 않으면 만용이 이렇게 나오리란 걸. 막연하게 짐작했는지도 모른다.
미용실 앞 길이 엉망이었다. 유리문은 흉물스럽게 깨져 있었고, 플라스틱 스툴과 각종 미용기기가 어지럽게 나뒹굴었다. 만용이 고용했을 덩치들은 흥분한 짐승처럼 날뛰며 눈에 보이는 것은 있는 대로 쳐부쉈다.
단골 노인들이 만류해도 소용없었다. 창수는 더듬더듬 눈길을 옮기며 여주인을 찾았다. 그러나 때아닌 소란에 모여든 사람들 틈에도, 가게 밖에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에 먼지와 파편이 뒤섞인 가게 안으로 들어가 봤다. 곧 소파에 반듯이 누워 있는 여주인이 보였다. 임신한 그의 딸이 곁에서 엉엉 소리 내며 울고 있었다.
딸과 뱃속 손주에게 먹이려 샀을 치킨이 바닥에 흩어진 재 짜부라져 있었다. 그것을 보는데, 속에서 뭔가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견고하지 않아도, 완벽하지 못해도, 아름답다고 할 수 없어도 창수 자신이 애써 구축해왔던 세계가 무참히 붕괴되고 있었다.
“그만해, 그만하라고, 이 나쁜 새끼들아!”
여주인의 딸이 벌떡 일어나 한 덩치의 등을 후려쳤다. 덩치는 성가신 표정으로 여자를 홱 밀쳐냈다. 소파에 부딪힌 여자는 다시 덩치에게 달려들어 그 팔에 매달리다시피 했다. 덩치가 치솟는 짜증을 참지 못하고 확 손을 들며 위협했다.
창수는 튕기듯 달려가 여자를 떼어냈다. 여자는 악다구니를 쓰며 버둥거렸다. 다치지 않도록 그녀의 손목을 꽉 붙들어 잡았다.
“가만히 있어요. 저 새끼들 자극해서 좋을 거 하나 없으니까. 괜히 덤비면 다친다고. 언니도, 뱃속 아기도.”
“내 놓으라고!”
거칠게 반항하던 여자가 차츰 주저앉았다. 창수가 할 수 있던 거라곤 그녀를 꼭 붙드는 것뿐이었다. 그는 정의로운 영웅이 아니다. 기백 좋은 용사조차 아니었다. 한낱 건달일 뿐이다.
지독한 무력감 속에 한바탕 소요가 지나갔다. 덩치들은 퉤, 된 침을 뱉고 슬렁슬렁 가게를 빠져나갔다.
그제야 내내 붙들고 있던 여자의 손을 놓아주었다. 맥없이 주저앉은 여자는 한참을 소리 내서 울었다. 엉금엉금 제 모친에게 기어가선 정신 좀 차려 보라며 또 울었다.
임신한 몸으로 찬 바닥에 앉아 있는 게 못내 신경 쓰였다. 다가가서 일으키려는데, 그녀가 대뜸 창수의 볼을 후려갈겼다. 짝 소리와 함께 알싸한 통증이 밀려왔다. 그럼에도 꿋꿋이 그녀를 붙들어 일으켰다.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한 여자가 재차 얼굴과 귀, 목 마구 때렸다. 그조차 얼마든지 맞았다. 해줄 수 있는 게 정말이지 그것밖에 없었다.
겨우 분을 삭인 여자는 창수의 손을 홱 뿌리쳤다. 순순히 손을 물렸다. 고개를 들자 눈물 그렁그렁한 눈이 비난하듯 쏘아보고 있었다.
“꺼져. 너도 똑같은 깡패 새끼잖아!”
“…….”
“못 알아들어? 나가라고! 눈앞에서 사라지란 말이야!”
여자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연거푸 달려들었다. 어떤 모진 말이 쏟아져도 꿋꿋이 버텼다. 눈길은 시종 소파 위 여주인에게 닿아 있었다.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의식을 차렸을 때에야 꾸벅 고개를 숙였다. 코가 무릎과 맞닿을 듯했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돌아섰다. 가게를 나서는 걸음이 무겁기 짝이 없었다. 이미 구경꾼들은 거의 흩어진 상태였다. 가까운 이웃과 단골들이 나뒹구는 집기를 말없이 모을 뿐이다.
질척이며 떨어지던 창수의 걸음이 우뚝 멎었다. 시야에 믿고 싶지 않은 형상이 맺힌 탓이었다.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던 건지, 왜 거기에 있는지, 가게 맞은편에 재윤이 서 있었다. 크게 떠진 창수의 눈이 한 시도 깜빡이지 않았다. 이따금 눈꺼풀만 부들부들 경련할 뿐이었다.
시선이 오가던 그 찰나가 영원처럼 느껴졌다. 실상은 정말 잠시 잠깐이었을 뿐인데도. 재윤의 올곧은 눈빛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릴 수도 없어 버거움이 더했다.
재윤의 시선은 경멸을 넘어, 자신과 하등 관계없는 사람을 볼 때처럼 무감하기 짝이 없었다. 이내 그가 그마저 수습해 돌아선다. 한 번 붙잡아볼 틈도 없었다.
재윤의 막막한 등이 보이고, 같이 왔을 후배들이 잇따라 보였다. 그들은 호기심 기득한 눈빛으로, 창수를 응시하다가 얼른 재윤을 쫓아갔다.
딛고 있던 바닥이 까맣게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