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고나-14화 (15/18)

14

또다시 긴 꿈을 꿨다. 재윤을 처음 만나던 순간, 진종일 붙어 지냈던 어린 시절, 많은 것이 변했던 중학교 때와 재윤이 떠났던 열여덟 그 해까지. 너무 사소해서 잊고 있었던 일들이 꿈속에서 하나하나 되살아났다.

재윤의 눈에 비친 창수 자신의 첫인상은 어땠는지, 언제 친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그 마음이 바뀌기 시작한 건 언제였고 갑자기 거리를 뒀던 까닭은 또 뭐였는지, 끝내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까지. 그간 미처 알지 못했던 재윤의 사정도 알 수 있었다. 모두 꿈이라서, 가능한 일이라 생각했다.

그랬구나. 그랬던 거구나. 고개를 끄덕이다 눈을 떴다. 눅진하던 피로감은 그새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시야가 먼저 트이고, 뒤늦게 청각이 깨어났다. 그제야 비로소 그런 꿈을 꾸게 된 원인을 알 수 있었다.

“……혼자 초조해져선, 괜히 심통도 부렸던 것 같아.”

언제부터 그렇게 말을 걸고 있었는지, 재윤의 나긋나긋한 이야기가 귓가에 닿았다. 눈이 마주치자 부드럽게 웃으며 깼어, 한다.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슬그머니 살핀 재윤의 두 눈에 여전한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 역시 꿈이 아니었다. 빤히 보던 창수가 헤실거리자 재윤이 왜, 하면서 그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이상하게도 그를 보자 여태 꿨던 꿈의 내용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좋았던 기억만, 모든 게 눈 녹듯 풀리던 감각만이 막연하게 남았을 뿐이었다. 상관없었다. 재윤이 창수 자신을 따뜻하게 바라뵈주고 있으니까.

이 순간이 꿈이어도 억울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일어나 봐. 밥 먹어야지.”

아닌 게 아니라 며칠 죽은 듯이 잤더니 머리가 다 어질어질했다. 고개를 끄덕이곤 몸을 일으켰다. 재윤이 등을 받쳐주며 편하게 앉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익숙한 손길로 침상 테이블도 세워준다. 이내 그 위에 미리 받아놨던 식사가 놓였다.

“웬 호사냐.”

창수는 장난스럽게 키득거리며. 숟가락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다 오른팔의 깁스를 발견하곤 아, 했다. 멀뚱히 보다가 왼손으로 고쳐 잡았다. 그 모습이 처음 연필을 쥔 아이처럼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음식 냄새를 맡으니 잊고 있던 허기가 몰려들었다. 전투적으로 국건더기를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제 딴에도 위태롭다 생각했는지 얼굴이 숟가락을 마중 나왔다. 그러나 공들인 게 무색하게도 대부분 그릇으로 다시 떨어지고, 국물만 감질나게 입안에 스몄다. 쩝, 아쉽게 입맛을 다셨다.

지켜보던 재윤이 기어이 도음을 자처했다.

“이리 내.”

“아냐. 내가 먹을게.”

사양하는데도 어렵지 않게 숟가락을 빼앗아갔다. 그러곤 밥을 적당량 떠서 국물에 자작하게 적셨다. 알맞게 촉촉해진 밥은 젓가락으로 편편히 눌러 다듬고, 그 위에 마늘종 반찬 하나를 얹었다. 군더더기 없이 단정한 손길이었다. 지켜보는데 왜 그리 긴장이 되던지. 다가오는 숟가락에 맞춰 입 벌릴 생각조차 못 했다.

재윤이 아, 하고 나직이 명령했다. 그를 멍하니 보면서 덩달아 입을 벌렸다. 그 틈으로 따뜻하게 데워진 숟가락이 파고들어왔다. 속이 대책 없이 근지러워졌다. 온몸의 솜털이 일제히 일어서는 느낌. 누군가 밥을 먹여준 건 할머니 이후로 처음이었다. 왜인지 모르게, 아주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걸 되찾은 기분이었다.

한동안 재윤이 건네는 밥을 얌전히 받아먹었다. 텅 비어 있던 속이 조금씩 차올랐다. 재윤 역시 그릇이 깨끗이 비워지도록 한 숟가락. 한 숟가락 정성 들여 펐다. 가끔은 열심히 씹어 삼키는 창수를 지그시 주시하기도 했다. 마지막 한 입을 먹인 후에는 볼록해진 볼을 괜히 한 번 쓸어봤다. 볼에 닿았던 손길은 귓불로 이어져, 보들보들한 살점을 계속 희롱해댔다.

가만히 당하고 있던 창수가 꿀껵 입안의 것을 삼켰다. 그러고는 저도 재윤의 귓불을 잡고 만지작만지작해 본다. 의외롭게 지켜보자, 그 손을 코로 옮겨 콧대를 덧그리듯 지그시 따라 내려왔다. 종국에는 그의 손끝이 부드럽게 맞물린 입술에 닿았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두 눈을 고정한 재 골똘히 보더니 꿀꺽 침을 삼킨다. 재윤에게서 나직한 웃음이 터졌다.

지레 발끈한 창수가 대뜸 그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입술 위로 창수의 입술이 꾹 눌렸다가 떨어져 나갔다. 마냥 어린아이 같은 몸짓이었다. 가까이에서 눈이 마주치자, 제 윗입술로 아랫입술을 한 번 짓이겨보더니 쩝 입맛을 다신다.

“잠이 덜 깼나 보다. 실감 안 나는 거 보니까.”

“그럼 한숨 더 자. 회복하는 데에는 숙면만큼 좋은 게 없어.”

“그만 자고 싶은데. 허리 끊어질 것 같아.”

“빨리 나아야지. 나도 슬슬 진료 보러 가봐야 하니까.”

별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윤은 침상을 원래대로 돌려놓은 후 이불을 잘 정리해주었다. 식기를 챙겨 병실을 나서기까지 몇 번이나 돌아봤는지 모른다. 어린아이를 혼자 떼어놔도 그렇게는 안 할 거 같았다.

그때는 죽다 살아나서 맛이 갔던 걸까. 다신 못 볼 거라고 생각했는데, 눈앞에 앉아 있는 재윤을 보자 속에서 뭔가가 울컥했다. 창수 자신이 고백 비슷한 걸 했다는 건 말을 뱉고서야 알았다.

공연히 볼을 꼬집어봤다. 아픔이 느껴지지 않자 가슴이 철렁했다. 황급히 주먹으로 제 머리를 갈겨본다. 얼마나 힘껏 쳤는지 끄악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그러다가도 금세 비실비실 웃음이 샜다. 뱃속이 참을 수 없이 간지러웠다. 혼자 끙끙댔던 게 바로 얼마 전인데. 재윤 역시 같은 마음이라니, 믿을 수가 없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웅크린 몸만큼 솟아난 이불 더미가 연신 가늘게 들썩였다.

“우리 졸지에 실업자 되게 생겼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길녀가 침대 옆 의자에 털썩 앉았다 이제 막 저녁밥을 먹으려던 창수가 반색하며 웃었다. 반찬으로 나온 묵과 씨름하느라 쟁반 위가 난장판이었다. 내내 물고만 있던 맨밥에선 이제 단물마저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내심 기대하며 본 길녀는 지레 미간을 찌푸리더니 뭐, 할뿐이었다.

“꼴이 이래서 그러는데 니가 먹…….”

“먹어달라고?”

“아니, 그게 아니라 좀 먹…….”

“먹여달라고 칭얼거리면 그 숟가락으로 처맞는다?”

“…….”

진심인 것 같았다. 창수의 얼굴이 금세 부루퉁해졌다.

“뭐, 새끼야. 양팔 없이도 사는 게 사람인데, 졸라 엄살은.”

들린 말도 아니어서 얌전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다만 불만 가득한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몇 번 더 묵을 공략해 보다가 아예 숟가락을 내려놨다. 그러곤 감질나던 것들을 덥석덥석 손으로 집어 먹었다. 그때쯤 알맞게 식은 국 역시 사발째 들이켰다.

전투적으로 식사를 마쳤다. 길녀는 거 보라며, 얄밉게 한마디 하더니 쟁반 정도는 대신 밖에다 내놓아주었다. 창수가 손에 남은 양념을 할짝거릴 땐 냅다 등을 휘갈기며 그를 화장실로 쫓아냈다. 매정한 년. 환자라고 봐주는 법이 없다. 있는 대로 구시렁거리며 손을 닦고야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근데 아까 한 말, 뭔 소리야?”

“가게 소유주가 당장 잡혀 들어가게 생겼으니까. 흉기 들고 설쳤는데 아무리 당사자가 맛 갔기로서니 그냥 넘어가겠냐? 정상참작 될 것도 아니지. 상대가 작정하고 돈 떼먹은 사기꾼이어도 때리면 처벌받는 게 법인데. 하물며 걔 마누라 불륜 현장을 습격한 것도 아니라며.”

“그야 그렇지.”

“넌 알고 있었냐? 만용이 그 개새끼가 갓난쟁이 지 핏줄 아닐 수도 있다면서 출생신고도 안 했다는 거? 씹할, 지가 덮치다시피 해서 애 배게 했으면 책임은 져야 할 거 아냐. 그 핏덩이 아니었으면 그 여자가 미쳤다고 저랑 살겠어?”

특별히 들은 바가 없었다. 실상 창수가 그들 부부에 대해 아는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저 만용이 한 여자를 지겹도록 쫓아다녔고, 늘 피하기만 하던 그녀가 어느 날 갑자기 그의 집에 들어앉았다는 게 고작이었다.

의아했던 것은 오히려 다른 부분이었다. 그렇게나 좋아하던 여자였는데, 왜 더 다정하게 대해주지 않는지. 만용은 그녀가 낳은 아기에게도 애틋함이라곤 없어 보였다.

철공소에 딸린 방에서 여자를 마주섰던 게 새삼 떠올랐다. 제 남편이자 아이의 아버지를 앞에 두고, 그녀는 귀신이라도 본 듯한 낯을 했다.

“그럼 계수씨는 어쩌고 있어?”

“넌 잘도 계수씨 소리가 나온다.”

“……뭐라고 불러, 그러면.”

“똥이라고 부르는 한이 있어도 다신 그런 개소리하지 마. 그 여자한테는 최악의 모욕일 테니까. 이참에 철공소랑 확 튀어 버렸으면 좋겠다.”

창수는 의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타까움은 있을지언정 만용이 가엾지는 않았다. 늪 같은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주변인들까지 그 깊은 나락으로 끌고 들어가는.

그 역시 태어날 때는 그저 작은 아기였을 거다. 누군가, 혹은 어떤 고난이 자꾸 그를 해치고 사납게 만들었을 뿐. 하지만 비뚤어진 미음을 바로잡을 수 있는 건 결국 자기 자신이었다. 세상을 탓하고, 아프게 한 이를 원망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돌이켜보면 만용과는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언제 늪으로 빨려 들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거기에서 벗어나려고도 하지 않았다. 타성에 젖어 살며, 제 인생이 그냥 그렇게 끝나도 상관없다 여겼다. 그런 위태로운 삶이었다. 재윤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끝내 집어삼켜졌을 거였다.

단지 그가 돌아온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왜 조금 더 성실하게 살지 못했는지 후회했다. 창수 자신이 좋은 사람이 아님에 부끄러웠고,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아무튼 형사 앞이라고 연기하는 건지, 진짜 대가리가 단단히 잘못된 건지. 아직도 그날 일 기억 안 난다고 그러더라. 어디 그뿐이야? 그 지랄 맞은 놈이 글쎄, 온순한 소처럼 군다니까? 매스꺼워서, 진짜.”

“만용이가?”

“그래, 그 김만용이가. 니가 그 꼴을 직접 봐야 되는데. 무슨 이중인격인 줄.”

“의사는 뭐래?”

“계속 지켜보자고 그런다. 어디서 주워듣기론 사람이 대가릴 잘못 다치면 성격이 크게 바뀐다고는 하던데. 알게 뭐야.”

길녀는 탐탁잖은 얼굴로 입술을 삐죽이더니 대뜸 몸을 일으켰다. 창수의 눈길이 의아함을 품고 따라붙었다.

“어디 가?”

“가게가 망할 때 망하더라도 문 닫기 전까진 무대를 지켜야지. 이래 봬도 프로니까.”

확실히 창수까지 부재중인 이때, 가게를 관리할 사람이 없었다. 길녀의 말마따나 영업 중단은 불가피하겠지만. 모름지기 정리에도 과정이 있는 법이다.

길녀가 심심할 때 또 들르겠다며 돌아서던 때쯤이었다. 밖에서 웬 노크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닫힌 문으로 날아갔다. 그 문을 열고, 재윤이 들어왔다. 그를 보자마자 창수의 얼굴에 방실방실 웃음이 돋는다. 얼결에 그 모습을 목격한 길녀는 지레 미간을 찌푸렸다.

기어이 나사가 나간 건가 싶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울한 낯짝으로 죽느니 마느니 진상을 부려대더니. 죽다 살아나서 그런가. 아무리 그래도 그 잠깐 사이에 기분이 그리 확 나아졌을 것 같지 않았다. 바보라서 남들 보다 우울감이나 좌절을 극복하는 게 빠른 편이긴 해도.

왔어, 하며 반기는 목소리가 살랑거렸다. 재윤 역시 미소 지으며 다가와선 창수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흐트러뜨렸다. 그 김에 길녀와 눈이 마주치자 가렵게 묵례했다.

“인사해. 여긴 내가 전에 말했던 재윤이.”

“아? 그 불알친구.”

“반갑습니다. 공재윤이라고 합니다.”

지극히 건전한 웃음을 지으며 악수를 청한다. 길녀는 그를 조목조목 뜯어보면서 가볍게 손을 잡았다가 놓았다. 말투며 행동이며 표정 하나까지도 정중하고 침착한데, 어딘가 모르게 떨떠름한 느낌이었다. 그간 창수에게서 들은, 다분히 비인간적인 언행 때문인지 모르겠어도.

“저 부르기 편한 대로 부르세요. 따로 이름이 없거든요. 여기서는 대부 길녀라고 불러요.”

간단히 자신을 소개했다. 지켜보던 창수가 못마땅한 얼굴로 툴툴거렸다.

“얘가 죽어도 지 본명을 안 가르쳐준다니까? 어렸을 때 앨범도 냈다길래 한 번 찾아나 보려고 했더니.”

“연희 씨였죠, 아마.”

답은 의외로 재윤에게서 나왔다. 길녀가 놀란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창수 역시 두 사람을 아리송하게 번갈아 봤다.

“응?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예전에 본 것 같아서. 한 번 보면 안 잊어버리거든.”

“어, 그럼 길녀 너 가수 했다는 거 진짜였구나? 하도 안 가르쳐줘서 그냥 구라인 줄 일았는데. 무슨 노래 불렀어? 연희가 네 이름인 거 맞아? 검색해보면 나오려나.”

창수는 입맛을 다시면서 제 휴대폰을 꺼냈다. 그 사이 길녀가 재윤을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제법이네요, 그쪽.”

“과찬이십니다.”

재윤 역시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일 따름이었다.

창수는 오가는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채 열심히 검색에 임했다. 하지만 달랑 이름 두 자로는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내심 기대했던 얼굴이 실망으로 찌푸려졌다.

“아, 역시 이름 가지곤 안 되나 보다. 성은 뭐였어?”

“이제 가야겠다. 바보랑 놀아주다간 진짜 늦겠어.”

길녀가 말을 돌리며 재윤을 힐금 봤다.

“친구분이 요 앞까지 바래다주시려나?”

“그러죠.”

재윤은 흔쾌히 그녀의 청을 받아들였다. 간다, 간단한 인사말만 남기고 길녀가 먼저 병실을 나갔다. 재윤도 곧 그녀를 따라갔다. 두 사람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복도를 걸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길녀 쪽이었다.

“저 바보가 좋은 사람이라길래 나도 한번 만나보고 싶었어요. 사람 보는 눈이 더럽게 없어서, 저 인간이 좋다고 하면 다 나쁜 사람이거든.”

그러면서 얼른 한마디를 덧붙였다.

“기분 나쁘게 들을 거 없어요. 여태까지는 그랬다는 거니까.”

“부럽네요. 이렇게 신경 써주는 분도 계시고.”

“정말 그래요?”

“무슨 뜻일까요.”

질문의 뉘앙스가 이상하다는 걸 바로 인식하고 묻는다. 당혹감이라곤 엿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옅게 미소 짓는 게, 느긋해 보이기까지 했다. 재윤을 담아내는 길녀의 눈에 진한 흥미가 돋아난다.

“어떤 쪽인 거 같아요, 본인이? 착한 사람? 아니면 나쁜 사람?”

“글쎄요.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분 짓는 건 동화에서나 가능할 것 같은데. 선과 악이라는 게 자로 잰 것처럼 딱딱 나뉘는 건 아니잖습니까. 만약 창수에게 해가 될 사람, 그렇지 않을 사람을 묻는 거면 후자라고 자신합니다.”

구렁이 같다. 은근슬쩍 핵심을 피해 가는 게, 여간해선 잡힐 것 같지 않았다. 길녀는 공략 방법을 바꿔보기로 했다.

“일전에 앨범 냈다는 거, 실은 거짓말인데.”

“압니다.”

이번에도 차분하게 웃어 보인다. 그러면서도 한결같이 당당한 태도에 숫제 어이가 없었다.

“가수로 데뷔한 적도 없는데 내 본명은 어떻게 아셨을까. 저 멍청이한테도 가르쳐주지 않았거든. 우리 언제 만난 적 있던가요? 아니면 뒷조사 같은 거라도 한 거예요?”

이번엔 대답 대신 특유의 웃음으로 무마한다. 시종 싱글싱글 쪼개는 모습에 영 위화감이 들었다.

“어머 싫어라. 속을 알 수가 없는 타입이네. 정체가 뭐예요?”

“알고 계신 대로 의삽니다. 창수랑은 오랜 친구 사이였고.”

“그건 또 묘하게 과거형이네요? 똑똑한 사람이니까 알 거 아니에요. 그런 걸 묻는게 아니라는 거. 왜 저 바보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거죠? 가봐도 이상한 풍경이나 만들면서. 미리 말하지만, 저 자식 빈털터리예요. 얻어갈 거라곤 하나도 없을 거라고.”

“내가 원하는 게뭔원지 알면 놀라실 겁니다.”

“내가 어떻게 굴러먹던 인생인지 알면 그쪽도 놀랄걸? 살면서 기함할 일이 어디 한두 가지였는지 알아요?”

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도망갈 생각 말라는 듯이 팔짱까지 끼며 버틴다. 재윤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픽 웃었다 이내 알겠습니다, 하는 얼굴에선 거짓말처럼 미소가 걷혀 있었다.

“궁금해하시니 말씀드리죠, 이 얘기를 들은 후에 길녀 씨가 제 반대편에 서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어쨌건 길녀 씨도 창수에겐 소중한 존재니까.”

여전히 어조는 정중했지만, 눈빛이 전과 달리 싸늘해졌다. 전에 없던 긴장감에 길녀의 미간에도 주름이 잡혔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힐금 돌아보던 창수가 빙긋 웃는다. 이젠 일종의 조건반사가 돼 버렸다.

“잘 바래다주고 왔어?”

재윤은 응, 하면서 침상으로 다가왔다. 리모컨을 들어 시끄럽게 떠드는 텔레비전을 끈다. 그러는 동안에도 창수의 시선은 줄곧 그에게 고정돼 있었다. 그 열렬한 눈길에 응하며, 창수의 볼을 쓰다듬는다. 창수는 못내 기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그에게서 보이지도 않는 꼬리가 마구 흔들리는 듯했다.

“몸은 좀 어때?”

“어, 이제 괜찮아졌어. 밥 먹을 때 불편한 거 빼면 혼자 걸어 다닐 수도 있고, 숨쉬기도 편하고. 간호사들 하는 말이, 예상보다 빠르게 퇴원하겠대. 에너지가 팔팔 넘치는 게 이미 환자 같지가 않다고.”

은근히 으스댄다. 그렇게, 칭찬으로 알아들어도 될 만한 뉘앙스였을지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다만 확실히 창수가 병실에만 붙어 있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오기 전 들렀던 스테이션에서도 비슷한 귀띔을 받았다 툭하면 링거 폴대를 질질 끌며 돌아다녀서 제때 캐어할 수가 없다고 했다. 끼리끼리 모여 노는 나일론 환자 무리에서 종종 목격되기도 했단다.

“그래도 무리하진 마. 깨끗이 나으려면 충분히 쉬어줘야지.”

“그야 그렇지만. 혼자 있으면 시간은 지겹도록 안 가고, 간호사들은 밖으로 못 나가게 하고. 또 교도소에 들어온 것 같단 말이다. 나도 다인실에 갔으면 좋았을 걸.”

다인실 타령을 하는 게, 이미 그곳까지 다녀왔던가 보다. 벌써 그곳 간호 보조인들과 이모, 누님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말인데, 아직도 다인실에 남는 자리 없대? 보니까 몇 자리 비어있는 것도 같던데.”

“응. 거긴 수술 예정된 사람들이 회복하고 들어갈 데래.”

둘러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상대가 절대적인 신뢰를 보이는 상황이라면 더욱. 실망감에 창수의 눈썹이 축 늘어졌다.

“그럼 퇴원할 때까지 혼자 있어야 되네. 심심해서 죽을 거야.”

툴툴거리는데, 불현듯 재윤의 얼굴이 다가왔다. 코끝에 그의 향기가 물씬 풍기던 순간, 입술이 가벼운 압력에 짓눌렸다가 놓였다.

“싫어? 방해받지 않고 이렇게 단둘이 있을 수 있는데.”

“……아, 것도 그러네.”

샐쭉 쪼개자 재윤이 다시 입을 맞춰왔다. 떨어져 나가려는 그의 얼굴을 도로 끌어당겼다. 재윤은 자연스럽게 이끌려오며, 상체를 느긋이 무너뜨렸다. 그에게 매달리다시피 키스하고, 그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재윤은 시종 여유롭게 웃으면서 창수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러다가 대뜸 무방비하던 배를 간질였다. 창수가 자지러지게 웃으며 몸을 빌빌 꽜다. 재윤은 달아나는 그의 얼굴을 쫓아가 곳곳에 쪽쪽 입을 맞췄다. 말캉한 귓불을 잘근거리다가 뒷덜미도 가볍게 한 번 물어본다. 창수는 재차 키득거리며 재윤을 제 두 팔 안에 가뒀다.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야. 남들한테 들킬까 봐 조마조마하면서 야시시한 짓 벌이는 게 얼마나 짜릿하겠냐. 기회가 또 있는 것도 아닌데.”

“참을 수나 있고?”

“뭐 참으면 참는 대로 묘미. 못 참으면 그건 또 그거대로 꼴리는 거지. 요 며칠 병원에 있으려니까 마누라가 애 낳는 동안 거시기가 썩어나간다던 그 마음 충분히 알겠더라. 암. 이해하고도 남지. 먹고 싶은 떡이 코앞에 있는데 먹지를 못 해. 감질나게 핥아나 보고.”

거리낌 없이 종알거리더니 재윤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그의 도드라진 목울대를 어린아이 젖 빨듯이 쪽쪽거렸다. 재윤에게서 낮은 신음이 터졌다. 단지 그 정도로도 샅이 불끈불끈해진다.

창수는 재윤의 허벅지에 대고 가랑이를 비비적거렸다. 금세 얼굴에도 미열이 돌았다. 재윤을 올려다보는 두 눈은 솔직한 열망에 젖었다.

“해줄까?”

나직이 묻자, 터질 것 같은 기대감이 눈에 보일 듯 넘실거렸다. 웃으면서 창수의 환자복 사이로 손을 미끄러뜨렸다. 금세 그의 뜨끈해진 남근이 손에 붙들렸다. 고작 살짝 닿은 것만으로도 창수의 몸이 긴장되는 게 느껴졌다.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창수가 재윤을 위태롭게 올려다봤다.

“오늘은 네 꺼 만지면서 가도 돼?”

늘 솔직하게 그때그때의 감정을 표현하고 요구한다. 그런 서툴고 투박한 모습조차도 그저 사랑스러웠다.

“그래 줄래?”

귓가에 가만히 입 맞추며 속삭이자, 창수가 얼른 고개를 끄덕거렸다. 재윤은 그의 손을 서서히 제 중심부로 끌어당기면서, 그의 콧등에 나직이 키스했다. 창수는 고개까지 들고 제 손의 목적지를 주시하다가, 옷 안쪽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는 놈을 고스란히 손에 쥐어봤다.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우와, 이거 진짜 사기다. 생긴 건 새침 떼기 아가씨같이 얌전해 가지고, 막 이런 거 달고 다녀도 돼? 위로 뻗은 거 봐. 꼭 장수풍뎅이 뿔 같아. 딱딱한 것도 그렇고. 요놈에 비하면 딴 건 그냥 애벌레네, 애벌레.”

“못 하는 소리가 없네.”

재윤은 재차 입 맞추며 열띤 창수의 남근을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창수의 허벅지 안쪽이 강하게 긴장됐다. 창수는 밑에서 올라오는 자극에 숨을 짓누르면서도 재윤의 바지 지퍼를 내리는 데 한껏 공들였다. 이내 벌어진 틈으로 제 손을 슬그머니 밀어 넣어본다. 브리프를 젖히고 마주한 살덩이가 뜨끈뜨끈하게 들끓고 있었다. 착각인지 그 직후, 재윤의 남근이 손바닥에 짙게 비벼졌다.

창수는 자신도 모르게 작은 탄성을 터트렸다. 남의 걸 작정하고 만져보는 건 처음이었다. 호기심 탓인지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혀로 입술을 축이면서 슬며시 문질러봤다. 그 부위만 따로 살아 있는 것처럼, 손 안에서 놈이 연신 몸뚱이를 꿈틀거렸다. 힐금 본 재윤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제대로 느끼고 있는 건가.

신선하게 바라보며, 놈을 조이듯 붙들곤 위아래로 쓸어댔다. 엄지로 매끈한 귀두를 지그시 뭉개보기도 한다. 다음 순간, 재차 손 인에서 재윤의 남근이 거칠게 쓸려왔다. 요도에서 흘러나온 말간 액체가 금세 창수의 손을 적신다. 묘한 흥분감에 히죽 웃음이 새어 나왔다.

“여기 주물러 주는 거 좋아?”

“응. 더 세게 쥐어 봐.”

재윤이 창수의 볼에 키스하며 조용히 주문했다. 자위할 때 특히 잘 느껴지던 부위를 집중적으로 공략해봤다. 거짓말처럼 재윤의 숨이 조금씩 탁해졌다. 은근한 정복감에 열이 올랐다. 보다 잘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창수는 재윤의 귓불을 잘근거리며, 더 열심히 손을 움직였다. 펄떡펄떡 뛰는 맥이 얇은 살갗 너머로 전달됐다. 거푸 문질러지던 살덩이에 점점 열이 오른다. 덩달아 늘 미소가 그렁그렁하던 재윤의 얼굴이 눈에 띄게 상기 됐다. 눈살마저 짙게 찌푸려졌다. 그걸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소름 돋게 짜릿해서, 점점 더 도취됐다.

하지만 그 희열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곧 제 샅에서부터 촉발된 지긋한 감각 때문이었다. 재윤은 환자복 위로 창수의 유두를 잘근거리면서, 재차 그의 남근을 뭉근하게 쓸어댔다. 약한 부위만 귀신같이 골라 괴롭힌다.

“잠깐, 잠, 히읏…… 읏, 너무 그러면 나 혼자 싸 버린다고.”

“신경 쓰지 마. 지금 충분히 갈 것 같으니까.”

“으응, 핫, 그래도 같이, 같이…….”

끙끙거리며 소신을 전하자, 재윤이 일순 모든 동작을 멈췄다. 그래? 그렇게 묻는 듯했지만, 입술은 거의 떨어지지 않았다.

다음 순간, 재윤이 덜컥 창수의 손을 떼서 침상 위로 눌러 버렸다. 그러더니 두 남근을 서로 맞댄 채 허리를 깊숙이 짓누르기 시작했다. 펄펄 들끓던 두 살덩이가 서로 엉기고 치대질 때마다 지극한 감각이 거푸 솟구쳐 올랐다. 질끈질끈 저절로 눈이 감겼다. 입을 닫고 참아보려 해도 신음이 자꾸 짓뭉개져 나왔다.

단지 중심부를 맞비비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구도 탓인지, 특유의 움직임 때문인지 꼭 살을 뒤섞는 기분이었다. 덩달아 가빠진 재윤의 숨소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지독한 사실감에 온음으로 끼치는 자극의 감도가 더해졌다.

“하아, 하, 응, 읏, 아…….”

달뜬 숨을 내뱉다가 재윤의 얼굴을 감싸듯 안았다. 새빨간 정욕에 떠밀려 그의 얼굴과 목, 턱, 귀, 머리에까지 마구 입을 맞췄다. 혀를 내어 귓등을 길게 핥아 올리기도 했다. 예민한 곳이 자극되자 재윤의 움직임이 더 가빠졌다. 뻣뻣해질 대로 뻣뻣해진 두 남근이 서로를 할퀴듯 치대졌다. 창수는 달뜬 혀로 재윤의 귓바퀴를 농밀하게 덧그리다가 구멍 안까지 파고들어 갔다. 이성은 끊겨 나간 지 오래였다.

재윤이 창수의 턱에 키스하며 낮게 속삭였다.

“무릎, 힘 줘서 붙여 봐.”

영문도 모른 채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이윽고 그의 남근이 서로 맞붙은 허벅지 사이로 푹 쑤시고 들어왔다. 묘한 감각에 가슴이 철렁했다. 멍하니 보자 놈이 연이어 처박혔다 빠져나가길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두 음낭이 거칠게 부대끼며 찰박칠박 음란한 마찰음을 자아냈다. 얼마나 거침없이 박아대는지, 허벅지 안쪽이 다 쓰라릴 지경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머릿속이 엉망으로 뒤섞인다.

머지않아 창수의 팔을 결박하고 있던 재윤의 손에 발끈 힘이 들어갔다. 쉼 없이 몰아붙이던 재윤은 다급하게 창수를 끌어안았다. 절박함이 느껴질 만큼 강한 조임이었다.

“으읏─.”

돌연 허벅지 안쪽에 뭔가가 확 끼얹어졌다. 덩달아 창수의 남근도 발끈 정액을 지렸다. 재윤의 짙은 신음을 듣자마자 그대로 싸 버리고 말았다.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얼떨떨함과 동시에 뭔가 해냈다는, 알 수 없는 뿌듯함마저 밀려들었다. 눌려 있던 팔로 거친 숨을 몰이쉬던 재윤을 꼭 끌어안았다. 재윤 역시 창수의 눈꺼풀 위에 가만히 입술을 묻었다.

“상상 이상으로 황홀했어.”

낮은 중얼거림에 호흡이 더해져 살갖을 간질인다. 창수는 씩 웃으며 우쭐했다.

“몸만 멀쩡하면 더 제대로 해줄 수도 있는데. 이래 봬도 나, 꽤 한다고.”

“기대되네.”

재윤이 평소처럼 싱긋 웃으며 입을 맞춰준다. 그러곤 쉬고 있어, 하더니 욕실로 들어갔다. 이윽고 다시 나온 그의 손에는 물이 넘실대는 대야와 마른 수건이 들려 있었다.

수건을 온수로 충분히 적셔 물을 꼭 짜냈다. 수면 위로 물 떨어지는 소리가 간지럽게 들렸다. 재윤은 적당하게 따뜻해진 수건으로 땀에 젖은 창수의 몸을 닦아주었다. 완전히 늘어져 잠자코 그에게 몸을 맡겼다. 손가락 가닥가닥, 도드라진 뼈 하나하나를 어루만지는 손길이 한없이 다정했다.

나른한 얼굴로 지켜보다가 여상히 물었다.

“어때? 길녀 직접 만나보니까.”

“좋은 분이던데. 얘기도 잘 통하는 것 같고.”

“무슨 얘기 했는데?”

재윤은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었다.

“비밀이야.”

“내 흉봤구나!”

발끈하자 싱긋 웃는다. 빈말로도 아니라고 대꾸하지 않았다. 창수의 얼굴이 못내 못마땅해졌다 길녀라면 자신의 부끄러운 민낯을 수없이 지켜봐 온 사람이었다. 살면서 추태를 부린 게 손에 다 꼽을 수 없을 만큼 많다.

설마 그걸 다 재윤에게 말해버린 걸까.

쓸데없이 불안해하고 있는데, 재윤이 상의 단추를 풀었다. 그 조용조용한 손길을 말없이 지켜봤다. 옷이 벌어지면서 창수의 맨몸이 가감 없이 드러났다. 재윤은 거의 아물어가는 상처들을 눈으로 죽 살피더니, 목덜미부터 조심스럽게 닦아 내려갔다.

“창수, 너랑 하고 싶은 일이 참 많아.”

“나도 이것저것 잔뜩 있어! 역할 플레이라든가, 고난도 체위라든가.”

창수가 눈을 빛내며 반색했다. 당황할 만도 하련만 재윤은 소리 없이 웃었다. 애정 어린 손길로 창수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기도 했다.

“그래. 그것도 그렇고. 그 외에도 우리가 계속 같이 있었으면 당연하게 누렸을 것들. 가장 먼저 함께하게 됐을 일들…… 처음부터 하나씩 다시 해 보고싶어.”

창수에게는 다소 막연한 이야기였지만, 고개를 쉼 없이 끄덕였다. 재윤이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해줄 생각이다.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기쁘게 해 주고 싶다.

“같이 할머니도 뵈러 가고, 맛있는 것도 잔뜩 먹고, 좋은 것도 보러 다니고…….”

“좋아. 예전에 우리 같이 보던 만화책. 그거 얼마 전에 끝났다던데. 종일 그런 거 보면서 뒹굴고도 싶어.”

“응. 가끔은 그렇게 집 안에서만 머물기도 하고.”

“예전에 내 스쿠터 타고 같이 갔던 데. 그런 데도 가보자.”

“그러자. 그러려면 얼른 건강해져야지.”

재차 고개를 주억거렸다. 재윤이 가만히 볼을 어루만져준다. 그런 애정 가득한 눈빛은 할머니 외의 대상에게선 받아본 적이 없다. 자신이 건네는 애정이 그대로, 아니 그 곱절이 되어 돌아온다. 속이 한없이 충만해졌다.

재윤은 누구보다 다정하고, 어른스럽고, 상냥하다. 이런 남자가 창수 자신의 것이 됐다. 잠에서 깰 때마다 다리를 꼬집어보지만, 꿈이 아니었다.

재윤을 잃게 될 거라 체념하고,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여겼던 삶이었다. 앞으로는 그 삶을, 재윤과 함께 채워갈 거였다. 감히 상상해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그저 곁에 있게 해주기를 바랐다. 전처럼 친구로만 대해줘도 행복할 거라 여겼는데.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고, 복이라곤 없던 삶에 신이 대뜸 보너스를 안겨준 듯하다.

그에 보답하려면 착하게 살아야겠다. 하루하루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겠다. 새삼 다짐하고 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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