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고나-16화 (17/18)

16

이제 막 동이 트는 새벽, 인적 없는 거리를 성큼성큼 뛰어갔다. 밤을 꼬박 새우고도 지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띄엄띄엄 서 있던 가로등 불빛이 미약하게 깜빡이더니 하나씩 점멸됐다.

“……하아.”

찬 숨을 몰아쉬며 2층 건물을 올려다봤다. 한달음에 달려온 게 무의하게도 보건지소는 고요함에 묻혀 있었다. 저절로 헤벌쭉 웃음이 나왔다. 층계를 하나하나 디뎌 오르던 걸음이 금세 다시 뜀박질로 바뀐다.

가까운 곳에서 불어온 바닷바람이 옷깃 안으로 스몄다. 목을 움츠리면서 현관 앞 작은 화분을 들어 올렸다. 열쇠가 다소곳이 놓여 있었다. 문을 열 땐 소음이 날세라 조심에 조심을 기했다. 안쪽으로 발길을 들여놓는 모습이 도둑의 그것처럼 사뿐사뿐했다.

숨까지 억누르며 조용히 문을 닫곤 방안으로 들어섰다. 침대 위에선 재윤이 미동 없이 잠들어 있었다. 재차 창수의 얼굴에 방긋 웃음이 번졌다.

슬그머니 재윤에게 다가갔다. 잠든 얼굴을 빤히 보다가 침대 옆에 앉아 머리를 기댔다. 얕은 숨소리가 기분 좋게 귀에 감겼다. 계속 그렇게, 하염없이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몇 년간 쳇바퀴 돌듯 이어지던 일과가 완전히 바뀌었다. 퇴근을 서둘러 달려오는 곳은 늘 이곳 관사였다. 곤히 잠든 재윤을 보고 있다가 그의 침대로 파고 들어가 함께 수면을 취한다. 그러면 재윤은 창수를 그대로 재워 두고 진료실에 내려갔다가 점심시간이 되면 다시 올라왔다. 같이 식사하고 잠깐 모자란 잠을 보충하거나 대화를 나눈다. 재윤의 진료가 끝나기를 기다려 내려가면 김 간호사가 “요즘 자주 보네요?” 했다. 그럴 때마다 서로를 마주 보며 묘한 웃음을 짓곤 했다.

저녁은 보통 나가서 먹는다. 식사 후에는 얼마든 같이 걸으면서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눴다. 최종 목적지는 보통 창수의 직장이나 마찬가지인 나이트 앞이었다. 그렇게 종일 붙어 있어도 아쉽기만 했다. 그래서 주말이면 방에 틀어박혀 서로를 탐하는 데만 열중했다.

언제부터인가 길녀는 집에 들어오지 않는 창수를 신경 쓰지 않았다. 어디 있다 오느냐며 궁금해하지도. 실실 쪼개며 재윤과 연락할 때마다 철없는 어린 짐승 보듯 할 뿐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불현듯 머리에 손이 얹혔다. 슬쩍 재윤을 올려다보자 그가 눈을 감은 채 창수의 머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일찍 왔네?”

잠기운 여실한 목소리가 기분 좋게 나른했다. 씩 웃으면서 상체를 일으켜 입맞춤했다. 재윤의 입술을 내킬 만큼 꾹 짓눌렀다가 얼굴 이곳저곳도 부리로 쪼듯 뽀뽀했다.

재윤의 얼굴이 푸근하게 허물어진다. 그는 소리 없이 웃으며 창수를 침대 위로 끌어당겼다. 자연스럽게 그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으면서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바깥의 찬 기운을 잔뜩 묻혀 왔건만, 재윤은 거리낌 없이 창수를 꼭 끌어안았다 이불도 목까지 잘 덮어주었다.

일정한 심장 박동이 귓전에 울렸다. 그것을 자장가 삼으며 눈을 감았다. 속 깊은 곳이 조금씩 차오르면서 금세 몸이 나른해졌다. 곧 창수에게서 곤한 숨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

재윤의 눈꺼풀이 소리 없이 말려 올라갔다. 그는 제 품에서 잠든 창수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그를 좀 더 바짝 끌어안으며 이마에, 닫힌 눈꺼풀 위에 차례로 입을 맞췄다.

맞닿은 살갗으로 선명한 온기가 전해져왔다. 더는 만지면 흩어지는 허상이 아니었다. 눈썹을 늘어뜨리며 깊이 안도했다.

내처 자다가 목덜미를 긁적이며 일어났다. 어깨 위까지 말려 올라간 티셔츠는 대수롭지 않게 끌어내렸다. 얼마나 험하게 잤는지,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뻗쳐 있었다. 멍하니 앉아 있다가 길게 하품했다. 퇴근하자마자 와서 제대로 숙면한 것 같은데, 머리가 영 무거웠다. 자는 동안 두드려 맞기라도 한 것처럼 몸도 자꾸 까라졌다.

그러고 보니 꽤 야한 꿈을 꿨던 듯한데. 슬그머니 내려다본 사타구니는 다행히 잠잠했다. 꿈꾸는 와중에도 이러다 모닝 텐트를 치는 게 아닌지 걱정했더랬다. 아무리 한창때라지만, 사춘기도 아닌데 그런 꿈이나 꾸고. 자조하며 고개를 저었다. 창수 자신이 언제, 어떻게 바지를 벗었는지도 모르면서 의구심조차 갖지 않았다. 침대를 내려올 적에야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을 뿐이었다.

잘못 잤는지 허리가 유독 뻐근한 느낌이었다. 엉덩이 안쪽 깊은 곳도 묘하게 따끔거렸다. 기분 탓이려니 여겼다. 드문드문 붉어진 허벅지를 긁적이면서도 그 이유 역시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씻으러 가는데, 안쪽에서부터 욕실 문이 열렸다. 막 샤워를 마쳤는지 재윤이 해사한 얼굴로 인사를 건네 왔다.

“잘 잤어?”

“응. 근데 나 잠꼬대 심하게 하지 않았냐?”

“글쎄? 업어 가도 모르겠던데.”

“실은 그 짓 하는 꿈을 꿨거든. 엄청 생생하네, 그랬는데 너무 열중했나 봐. 삭신이 다 쑤시고. 엉덩이도 욱신거려. 상상임신 같은 건가. 그래도 쪽팔리게 텐트는 안 세웠더라.”

저속한 소리를 지껄이며 킥킥거린다. 재윤은 그 모습을 느긋이 관망하다가 은근한 염려를 드러냈다.

“많이 안 좋아?”

“좀 찌뿌듯하긴 하지만 괜찮아. 씻고 나면 개운해지겠지.”

걱정하지 말라며 재윤의 엉덩이를 토닥이곤 욕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거울에 비치는 모습은 생각보다 더 가관이었다. 종일 몸살을 않다 깨어난 사람이라면 믿을 것 같았다.

“아, 내가 또 꿈인 걸 모르고 너무 쏟아 부었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피식거리다가 훌렁 티셔츠를 벗었다. 샤워기 아래 서서는 괜스레 비누 냄새부터 한 번 맡아본다. 배시시 웃음이 났다. 제 몸에서 재윤과 같은 냄새가 난다는 게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거품을 잔뜩 내서 몸을 살살 닦아나갔다. 이상하게도 목덜미와 가슴 부위를 닦을 즈음 피부가 예민해진 게 느껴졌다. 가랑이를 닦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일전엔 못 봤던 붉은 반점 같은 걸 가만가만 만져봤지만, 벌레에 물렸다든가 피부 질환은 아닌 듯했다.

“흠. 어디 쓸렸나 보네.”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리곤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른다. 전에도 같은 일이 있었지만, 머지않아 사라졌었다. 이번에도 시간이 해결해줄 거였다. 낙관하며 머리 감는 것까지 속전속결로 끝냈다.

칫솔꽂이엔 두 개의 칫솔이 엇갈린 채 꽂혀 있었다. 팔짱을 낀 채 만족스럽게 보다가 양치질을 시작했다.

평소보다 조금 더 기분이 들떴다. 그도 그럴 게, 재윤과 함께 할머니를 뵈러 가기로 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요양원에 도착하자마자 짐부터 내렸다. 시야가 다 가려질 정도로 옷가지부터 먹을 것까지, 선물이 한가득했다. 재윤이 그런 창수에게서 양손의 종이가방만 남긴 체 모든 짐을 앗아갔다. 그러고는 그것들을 현관 앞에 얌전히 가져다 놓았다. 창수가 아리송한 얼굴로 따라왔다.

“무거우면 나한테 줘. 같이 들게.”

단순하게 힘들어서 쉬었다 가는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재윤은 웃으면서 그의 등을 가만히 떠받쳤다.

“먼저 들어가 있을래?”

“응? 왜. 화장실 가려고?”

“아니. 꽃이라도 사갈까 해서.”

“야, 뭘 또. 이 정도면 됐어. 넘치고도 남는다고.”

“오랜만에 뵙는 거니까. 오늘은 다른 의미로 잘 보이고 싶기도 하고.”

점수 따야지, 하면서 씩 웃는다. 창수도 덩달아 피식했다.

“쓸데없이 뭔 기합이 그렇게 잔뜩 들어갔대. 말했잖아 울 할머니 사람 못 알아본 지 오래됐다고. 오늘 애써서 잘 보여 봤자 금방 도루묵이야.”

“그럼 알아보실 때까지 하지 뭐.”

재윤은 가 있어, 하며 한사코 창수를 건물 안으로 떠밀었다. 상냥하지만 고집은 또 센 편이라 꺾을 수 없을 거였다. 창수는 빨리 외야 돼, 하고 당부할 따름이었다. 재윤이 안심하고 돌아섰을 그를 의아하게 보다가 슬금슬금 밖으로 나갔다. 그러곤 그가 조금 전 내려놓은 짐들을 낑낑대며 마저 챙겨 안으로 들어갔다.

그 사이 주차장으로 돌아온 재윤은 자 트렁크를 열었다. 안에서 미리 준비해뒀던 화분과 과일바구니를 마저 꺼낸다. 돌아오던 길에는 현관에 뒀던 짐이 보이지 않음에 분주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창수가 가져갔으리란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툭하면 사람을 아가씨 대하듯 한다.

픽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창수가 들렀다 갔는지, 간호사들이 떡을 꺼내 먹고 있었다. 꾸벅 인사하자 수간호사가 지레 놀라며 반색했다.

“어머. 이게 누구야?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죠?”

“그럼요. 잘 지내다마다요.”

스스럼없이 인사를 주고빋았다. 공중보건의 생활은 좀 어떠시냐며, 최근의 안부를 묻기도 했다. 간단히 대답하고는 들고 있던 과일바구니를 그녀에게 건넸다.

“급히 오느라 많이 준비 못 했습니다”

“아니에요. 오히려 저희가 매번 이렇게 받아서 어째요.”

“항상 수고해주시니까요.”

“아후 저희야 이러나저러나 직장인 걸요. 오늘도 봉순 할머님 뵈러 오신 거예요? 마침 그 댁 손자분도 와 계신데.”

“알고 있습니다. “

예상치 못했던 대꾸에 수간호사가 네, 하며 재우쳐 물었다. 그리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지금껏 드나들면서 한 번도 창수와의 관계를 언급하지 않았던 탓이었다. 어떤 접점도 찾지 못한 채, 아리송해하는 수간호사에게 재윤은 숨기지 않고 덧붙였다.

“실은 오늘 같이 온 거라서요. 그간 미처 말씀 못 드렸지만, 창수랑은 오래전부터 가깝게 지낸 사입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부탁 좀 드리려고. 오늘도, 앞으로도 창수가 제가 그동안 이곳에 다녀갔다는 걸 몰랐으면 합니다.”

“아니, 왜요? 부끄러운 일도 아닌데. 그동안 이것저것 지원도 많이 해주셨잖아요. 봉순 할머니 계속 돌봐주신 분이 선생님인 거 알면 창수 녀석도 정말 고마워할 텐데.”

“표현을 안 해서 그렇지 할머님을 제대로 돌봐드리지 못했다고, 자괴감이 상당하거든요. 그동안 제가 대신 보살펴드렸다는 걸 알면 자존심 상해할 겁니다. 고마워하기보단 미안해할 거고.”

그다지 근거 없는 얘기였다. 수간호사의 말마따나 창수는 그저 덮어놓고 고마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재윤이 제 할머니의 처지를 언제,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하는 의문으로 번져서는 곤란했다. 과거의 시간은 창수가 알 필요 없는 것이었다. 알리지 않을 거다.

자신만의 생각에 빠졌던 것도 잠시, 재윤은 재차 싱긋 웃어 보였다.

“게다가 제게도 친할머니 같은 분이라.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부탁드리겠습니다.”

“뭐,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수간호사가 못내 아쉬운 미소를 지었다.

그즈음 병실 쪽에서 떠들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님, 과일 깎아 먹게 과도 좀…… 어? 왔으면 들어오지. 거기서 뭐해? 아, 우리 수 누님이 또 잘 생긴 총각 왔다고 말 붙이고 계셨구나?”

“으이그. 창수 친구라며?”

흘기며 묻자 창수가 얼른 재윤에게 다가와 어깨를 감쌌다. 고개를 끄덕일 때는 가슴을 크게 펴고 으스댔다.

“멋진 친구 뒀네.”

수간호사는 재윤과 의미 있는 눈길을 주고받았다. 사정을 알 길 없는 창수가 “껍데기만 그럴싸한 게 아니라고, 얘가.” 하며 팔불출처럼 굴었다. 수간호사는 얼마쯤 그러는 걸 받아주다가 휴게실에서 과도를 꺼내왔다. 그것을 창수에게 건넬 땐 어김없이 그의 등짝을 후려쳤다. 어찌나 손바닥이 차지게 감기는지, 창수가 등을 젖히며 한참 끙끙거렸다.

“옷 좀 예쁘게 입고 다녀. 친구는 닮는다는데 어째 허구한 날 꼬락서니가 그 모양이야, 그래?”

“아, 이 꼴이어도 좋다는 사람 잘만 있는데 왜.”

“퍽도 그러겠다. 얼른 들어가 봐. 할머니 기다리시는데.”

입술을 삐죽이곤 병실로 향했다.

할머니는 침상 위에 표정 없이 앉아 있었다. 재윤과 함께 고른 스웨터를 걸친 채였다. 사람이 들어오는데도 눈을 맞춰오지 않는다.

“할머니 여기 봐봐. 누가 왔게?”

창수가 요란스럽게 이목을 끌었다. 그럼에도 할머니에게서 미동이 없자 얼른 그 앞에 쪼그리고 앉으며 톡톡 무릎을 쳤다. 할머니는 느릿하게 눈을 맞춰왔다. 눈동자가 여전히 공허한 게, 창수를 향한 약간의 애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저기 봐, 하면서 친히 재윤을 가리켜 보였다. 할머니의 고개가 천천히 들쳐졌다.

이내 문가에 선 재윤을 발견한 그녀는 거짓말처럼 배시시 웃었다. 두 팔을 가만히 뻗기도 했다. 재윤이 얼른 다가와 그녀의 품에 안겼다. 등을 가만가만 두드리며 잘 지내셨어요, 묻는 목소리는 다정하기 그지없다. 할머니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재윤을 토닥였다. 어눌한 발음으로나마 왜 이 제 와, 하고 투정도 부렸다.

“와, 우리 할머니도 사람 차별하네. 마음만 아니고 눈도 어려졌나. 젊고 잘생긴 오빠 보니까 좋아?”

“이거 먹자. 이거 먹어.”

창수의 볼멘소리에도 할머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재윤을 당신 옆에 끌어다 앉히고는 창수가 사온 떡이며 과일 따위를 마구 집어주었을 따름이었다. 창수도 은근히 옆에 가서 앉으려고 했지만, 좀처럼 틈을 내주지 않았다. 떡이라도 하나 집어 먹으려고 하면 못마땅한 눈길로 쳐다보기 일쑤였다.

“그래, 그래. 선남선녀께선 오붓한 시간 보내세요. 오징어도 못 되는 주꾸미는 알아서 빠져드리겠습니다.”

결국 창수는 두 손 두 발을 들며 침상에 벌러덩 누웠다. 이불에서 그리운 할머니의 냄새가 났다. 마음이 한없이 누그러졌다.

팔을 세워 고개를 괴곤 나란히 앉아 있는 할머니와 재윤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재윤의 음성에 공기가 금세 차분해졌다. 할머니에겐 낯선 사람이나 다름없을 거였다. 그럼에도 친절한 미소 때문인지, 할머니는 재윤을 전혀 경계하지 않았다 친손자였던 창수가 처음 찾아왔을 때와는 천지 차이의 반응이었다.

재윤의 태도 역시 놀라웠다. 창수 자신은 막상 할머니를 만나고 큰 충격을 받았었는데. 의사라서 그런 환자를 다루는 데도 익숙한 걸까. 그는 마치 할머니를 오래 봐온 것처럼, 스스럼이 없이 대했다. 그게 또 고마웠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창수의 눈꺼풀이 느리게 감긴다. 서둘러 고개를 저었지만, 은근히 들이치는 수마를 이기기가 어려웠다. 잠을 떨쳐보려 두 눈에 발끈 힘을 줬다. 그러나 끝내 팔이 스르르 무너졌다. 고개도 맥없이 베개 위로 떨어졌다.

뒤에서 고롱고롱 숨소리가 들려오자 재윤이 문득 돌아봤다. 어느 참인가 창수가 완전히 풀어져서 잠들어 있었다. 아무리 숙면 중이었다고 해도 몸은 내내 재윤에게 시달렸으니 피곤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웃으며 지켜보다가 이불을 끌어당겨 덮어주었다. 할머니가 덩달아 돌아보자 검지를 제 입술에 가져다 붙이며 쉿, 하기도 했다. 할머니는 재윤의 동작을 그대로 따라 했다.

“아기, 자?”

네, 하자 슬그머니 손을 뻗어 창수를 토닥토닥 해준다. 재윤에게도 하라며 그의 손을 끌어다 창수의 어깨 위에 올려주었다. 재윤은 얼마쯤 그녀를 따라 하다가 참, 하면서 나직이 속삭였다.

“드디어 찾았어요.”

“뭘?”

“잃어버렸다던 강아지.”

“으응? 찾았어?”

“네. 또 마음 급하게 굴다가 놓쳐버릴까 봐 신중하게 굴었거든요. 제 발로 집에 왔더라고요, 다행히.”

할머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재윤을 빤히 봤다. 개의치 않고 생글 웃으면서 잘 됐죠, 물었다. 더없이 살랑살랑한 어조였다. 잘 됐다. 할머니는 재윤의 귓가에 어린아이처럼 속삭이곤 해맑게 웃었다.

“그럼 봉순 여사. 잘 있어. 다음에 또 올게.”

할머니 앞에 쪼그리고 앉아선 아쉬움 가득한 작별 인사를 건넸다. 할머니는 당신의 손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볼 뿐이었다. 여전히 얼굴에는 이렇다할 표정이 없었다.

야윈 두 손을 꼭 잡으면서 응, 하고 대답을 재촉했다. 그러자 할머니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린다. 창수는 그쪽으로 제 얼굴을 들이밀면서 재차 응, 했다. 그러자 이번엔 반대편으로 얼굴을 홱 돌려 버렸다. 체념할 만도 하련만, 창수는 휠체어를 바짝 당기며 물고 늘어졌다.

“응? 빨리 대답해. 밥도 열심히 먹고 누님들 말씀 잘 듣고 있겠다고.”

집요하게 눈을 맞춰가며 응, 하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그제야 창수도 만족스럽게 씩 웃고는 할머니 볼에 쪽 뽀뽀했다. 할머니가 어린 소녀처럼 화들짝 놀라며 얼굴을 가렸다. 그 주름진 손에도 마구 뽀뽀하자, 지켜보던 재윤과 간호사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곁에 있던 수간호사도 법석 끌어안았다. 그녀는 느닷없는 포옹에 얘가 왜 이래, 하다가도 곧 창수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굶고 다니지 말고. 남자 몸이 이게 뭐야, 이게.”

“나 진짜 잘 지내는데. 밥도 잘 먹고, 사랑도 많이 받고. 그래서 더 우리 봉순 여사한테 미안하지. 나만 행복한 거 같아서.”

“어이구. 청승은. 노인들한텐 그저 새끼들이 자기 몫 잘하면서 재미지게 사는 거, 그게 낙이고 효도야. 어디 가서 맞고 오지나 마. 이렇게 좋은 얼굴로 오니까 얼마나 좋아?”

“명심할게. 염치없지만 우리 할머니 좀 잘 부탁해요, 누님.”

“그 걱정일랑 말고 자주자주 뵈러나 와.”

“응. 그럴게요.”

“그나저나 다음에 올 땐 색시 데려온다더니, 어떻게 된 거야? 언제쯤 보여줄 건데, 그래?”

“비슷한 거 데려왔는데.”

창수가 머리를 긁적이며 재윤을 돌아봤다. 눈이 마주치자 재윤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수간호사는 설마 하는 얕은 의심조차 하지 않고, 애꿎은 창수의 등만 후려쳤다.

“이 녀석이 끝까지 장난은”

“……뭔 말만 하면 장난이래.”

“싸게 가기나 해. 배 타고 들어가려면.”

쫓기듯 차에 올랐다. 재윤도 할머니를 꼭 한 번 안아주고는 수간호사에게 깍듯이 묵례했다. 그녀 역시 예의로 답했다. 재윤이 차에 오르고, 금세 시동이 걸렸다. 특유의 엔진소음에 할머니가 고개를 빤히 들고 바라봤다. 특별히 어떤 의미가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보조석 창을 끝까지 열고 팔을 흔들었다. 덩달아 손 인사를 해주던 이들이 점차 사이드미러 밖으로 밀려났다. 벌써 그리운 기분이 든다. 창수는 얌전히 돌아앉으며 열려 있던 창문을 닫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마간 입을 다문 채 조용했다. 두 눈은 줄곧 차 밑으로 말려드는 도로에 던져져 있었다. 힐금 그의 표정을 살피면서도 재윤은 섣불리 왜 그러느냐, 묻지 않았다. 아무리 그라도 여러 생각이 들겠지 싶었다.

창수는 한참을 더 그렇게 달리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고맙다.”

“대뜸?”

의아한 얼굴로 보자 눈썹을 늘어뜨리며 웃었다.

“어디 한두 가지라야지. 오늘 할머니 일도 그렇고.”

“괜히 서운해지려고 하네. 네 할머니는 나한테도 친할머니 같은 분이셨어. 알게 모르게 이것저것 챙겨주시기도 했고. 정 많은 분이셨지.”

“우리 할머니가?”

창수는 영 모르는 표정이었다. 물론 할머니가 재윤을 창수 자신과 같이 대했다는 것은 안다. 해가 질 때까지 놀고 있으면 두 사람을 모두 불러 밥을 먹였고, 옷이라도 버린 날에는 재윤이 이모에게 혼나지 않도록 그 옷을 손수 깨끗이 빨아주기도 했다. 어른들이 돌보지 못한 사이에 헐거워져 버린 단추를 새로 달아준 것도 여러 날이다. 창수 자신은 당연하게 받아왔던 그 보살핌이 재윤에겐 좀 더 특별했을까?

재윤은 창수가 짐작하는 것만큼 단순한 이유는 아니라는 듯 입을 뗐다. 두 눈은 그새 어떤 감회에 젖어 있었다.

“워낙 오래된 일이라 창수 네가 기억할지 모르겠는데, 처음 그 섬에 전학 가서 얼마 동안은 너랑 말도 잘 안 섞었어.”

“응. 기억나. 같이 놀 생각에 무지 들떠 있었는데, 수업만 끝나면 매일 쪼르르 먼저 가 버렸지. 새끼가, 전날 그렇게 가서 뭐 했느냐고 물어도 잘 대답도 안 하고.”

“어린 마음에, 거기 적응해 버리면 안 될 것 같았거든. 익숙해지면 다시는 원래 있던 곳에 못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어.”

“무슨 전염병이냐.”

“글쎄. 그땐 마음이 그랬어, 그냥. 수업이 끝나면 곧장 선착장으로 달려갔지. 거기 앉아서 배가 들어오길 기다렸어. 혹시 어머니가 그제라도 후회하면서 데리러 올까 봐.”

잠자코 듣던 창수가 입을 꾹 다물었다. 당시 재윤이 느꼈을 막막함과 외로움을 다 알지는 못한다. 창수 자신은 그가 아니니까.

다만 어린 눈에도 그는 어딘가 모르게 위태로워 보였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정말 불안했을 것 같다. 그에겐 창수 자신처럼 마음껏 투정부릴 대상도 없었으니까. 창수 자신은 나고 자라 더없이 친근했던 그 섬이, 그에겐 두려울 만큼 낯설었을 거였다.

“매일매일 기다려도 오지 않더라고. 전화를 걸면 받는 날보다 그렇지 않은 날이 더 많았지. 기약 없이 배를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막막하더라. 하루는 더없이 길고, 마음은 울고 싶을 만큼 초조해지고. 인적이 끊길 때까지 앉아 있다가 집에 가면, 이모는 내가 그때까지 없었다는 것도 몰랐어. 종일 굶었어도 밥 달라는 소리가 안 나왔지. 밤낚시 간다는 손님이라도 있으면 그거 준비해 주느라 바빴으니까. 며칠째 미련 맞을 정도로 같은 짓을 반복했어. 그때, 창수 네가 왔어.”

“……내가?”

“응. 아마 어딜 가던 길이었던 모양인데, 선착장을 지나다 우연히 날 발견했던가 봐. 말을 걸까, 말까 고민하는 것 같더니 눈치나 보면서 계속 주위를 맴돌더라고. 이목이라도 끌어보려던 거였는지, 쉼 없이 조잘대고 혼자 놀면서.”

“내, 내가?”

“그래. 네가.”

재윤이 얄궂게 웃으며 확인 사살했다. 지난날의 일이건만, 인제 와서 귓가가 홧홧해졌다. 그런 수가 빤히 보이는 짓을 했다니, 아니라 믿고 싶지만 실제로 그랬던 것도 같아서 더 부끄러웠다.

확실히, 당시의 창수 자신이었다면 재윤을 그냥 지나치지는 못했을 거였다. 당장 지금도 확신할 수 있을 만큼, 그땐 난생처음 가져보는 친구에게 모든 관심이 쏠려 있었으니까.

“계속 본체만체했더니, 위험하게 접안 경사로에서 알짱거리는 거야. 계속 사람을 힐금거리면서. 금방이라도 물속으로 떨어질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하던지. 마침 지나가던 마을 어른이 혼쭐내주신 덕택에 마지못해 위로 올라왔었어, 너.”

“……그만해, 이 자식아. 내 낯짝 홀랑 타서 안 남아나겠다.”

“그때까지 말 한마디 못 걸더니 은근슬쩍 다가와선 뭘 놓고 가더라. 아마 유리구슬이었을 거야. 그걸로 어쩌고 노는지 구태여 앞에서 시범 아닌 시범 보이면서 알짱거리기도 하고. 잠시 사라졌다 싶더라니, 집에서 찐 옥수수 가져와서는 냅다 쥐여 주고. 그렇게 해가 질 때까지 같이 있어줬어..”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듯도 했다. 아마 늦게까지 일하고 돌아오던 할머니를 마중 나갔지 싶다. 재윤이 오기 전까지 창수 자신의 일과는 홀로 시간을 죽이면서 할머니를 기다리는 게 전부였으니까.

흐릿한 기억을 더듬는 동안에도 재윤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그러다 배가 끊겼고, 밤도 깊어졌어. 주변이 제법 어둑어둑해져서 네가 아직 옆에 있다는 걸 소리로만 겨우 알 수 있었지. 얼마쯤 더 있으려니까, 너희 할머니가 오셨어. 내내 내 근처만 배회하던 네가 단박에 달려가서 안기더라. 우리 강아지, 추운데 왜 나와 있느냐. 학교에서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왔느냐, 밥은 챙겨 먹었냐. 묻고 대답하면서 집으로 기는데, 네가 자꾸만 날 돌아보는 거야. 할머니가 그걸 알아채곤 한참 보시더라. 곧 네가 다시 돌아왔고, 대뜸 내 팔을 잡아끌었어. 안 가려고 버텼던 거 같아. 오기였는지도 모르지. 동정 받는 거 같아서 싫기도 했고. 그러고 있으려니까 할머니가 한마디 하시더라고.”

아가, 춥다. 집에 가자.

재윤은 구태여 말하지 않았지만, 창수도 어쩐지 그것만은 또렷하게 떠올렸다. 그때 재윤은 돌연 맥이 풀린 것처럼, 스스럼없이 끌려 왔었다.

“딱딱하게 굳은 옥수수를 손에 쥐고 마냥 앉아 있었어. 옆에서 네가 계속 빤히 보는 게 느껴졌는데도, 그냥. 할머니가 금세 저녁상을 봐 오셨지. 이름 모를 작은 조개랑 호박 같은 걸 투박하게 썰어 넣고 면이 퍼질 만큼 푹 끓인 국수였는데…… 그게 너무 따뜻하더라고. 살면서 문득문득 생각날 정도로.”

재윤이 불현듯 시선을 맞춰왔다. 멍하니 마주하자 창수의 볼을 살짝 어루만진다. 물러나려는 그의 손을, 창수가 얼른 깍지 껴 잡이두었다. 재윤은 픽 웃으면서 덧붙였다.

“절대 못 버텼을 거야. 창수 너랑 할머니가 안 계셨으면.”

“그렇게 대단하게 여겨주니까 기쁘긴 한데, 양심이 찔린다. 그때 난 그저 친구 얻을 욕심이었던 거 같은데.”

깍지 낀 손가락을 꼬물거리면서 때아닌 양심선언을 한다. 재윤은 맞잡은 손을 끌어당겨 그 위에 제 입술을 묻었다.

“네 의도가 뭐였든지 상관없어. 나한텐 확실한 위로가 됐으니까.”

게다가, 하면서 한마디 더 첨언하기도 했다.

“너를 주셨는데, 내가 어떻게 할머님을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어.”

가만가만 엄지로 손등을 쓸며 가감 없는 애정을 드러낸다. 창수의 얼굴이 잠시 뻥해졌다. 뺨 위의 솜털들이 일제히 일어서는 것 같았다. 벌컥 터지려는 숨을 억누르며, 창수가 다급히 재윤의 어깨를 쳤다.

“……안 되겠다, 샌님아. 차 좀 세워 봐.”

요구대로 재윤의 차가 길 한쪽에 정차됐다. 그 직후, 창수가 와락 달려들었다. 운전석 아래 레버를 당겨 공간을 벌리더니, 순식간에 재윤의 무릎 위로 올라와 앉는다. 덩달아 입술이 거칠게 엉기면서 달을 대로 달아오른 창수의 혀가 떠밀려왔다. 느닷없는 상황에 찰나나마 굳었던 재윤이 창수의 허벅지를 감싸듯 붙들며 스스럼 없이 응했다. 슬쩍슬쩍 들뜨는 창수의 엉덩이로 인해 애꿎은 클랙슨만 거푸 울렸다.

배에서 내려 보건지소 쪽으로 차를 몰아갔다. 거칠게 포장된 길을 지나자 차체가 덜컹덜컹 흔들렸다. 덩달아 그새 곯아떨어진 창수의 고개도 쉼없이 까닥거려졌다. 재윤은 잠시 길가에 차를 세웠다. 그러곤 창수의 머리와 차창 사이에 작은 쿠션을 대주었다. 창수가 쩝쩝 입맛을 다시며 제 볼을 비비적거렸다. 아직 멀었어, 웅얼거리며 묻고도 대답을 듣기 전에 쌕쌕 고른 숨을 뱉어낸다. 재윤의 얼굴에 자연스럽게 미소가 번졌다.

다시 차를 몰아 익숙한 길로 접어들었다. 서서히 보건지소의 2층 관사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나 재윤의 얼굴엔 차츰 의문이 깃들었다. 그가 주로 주차하는 공간에 웬 승용차 한 대가 정차해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에서 본 것도 같은 차량이었다.

조금 더 주위를 살폈다. 곧 해당 차량의 운전자로 추정되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여자인 것 같은데, 등을 보이고 있어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닫힌 보건지소 건물을 연신 두리번거렸다. 얼마쯤 지켜보다가 클랙슨을 울렸다. 여자가 홱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재윤의 표정이 굳어졌다.

여자는 싱긋 웃으며 운전석 쪽으로 사뿐사뿐 걸어왔다. 그러곤 닫혀 있던 창문을 가볍게 노크했다. 그 작은 기척에 보조석에서 자고 있던 창수가 가물가물 눈꺼풀을 들었다.

재윤은 핸들을 붙든 채 꼼짝하지 않았다. 의아함을 느낀 여자가 재차 노크했다. 창수는 고개를 짤짤 흔들며 진득한 잠기운을 떨쳤다. 그러면서 큰 의식 없이, 노크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직후였다. 대뜸 재윤의 차가 튕기듯 출발한 것은. 황당한 표정이 된 여자가 빠르게 사이드미러 밖으로 밀려났다.

창수는 영문도 모른 채 느리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스쳐가는 창밖 풍광이 제법 눈에 익었다. 배가 섬에 막 접안할 때까지는 깨어 있었는데. 그 잠깐 사이 선잠이 든 듯했다. 여전한 잠기운을 떨치려 눈을 비볐다.

“근데 방금 밖에 누구 있지 않았어?”

“그냥. 길 물어보는 사람.”

“별일이네. 이런 데서 길 잃은 사람도 다 있고.”

“그러게.”

“근데 아직 멀었어?”

“다 와 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새 찌뿌듯해진 몸을 풀었다. 습관처럼 내다본 창밖으로 눈 감고도 걸을 수 있는 길이 펼쳐졌다.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보건지소와는 반대 방향이다. 의문이 들었을 무렵, 재윤의 차량이 그 근방과 멈춰 섰다. 예상했던 일정과 달라, 재윤을 의아하게 바라봤다.

“……어, 왜?”

“많이 피곤한 것 같아서. 할머니 뵈러 가서도 그렇고.”

“뭐야. 고작 그거 때문에? 쓸데없이 세심하기는. 나, 백창수. 기력 빼면 시체잖아. 알면서 그러냐. 계속 졸았던 거는 일종의 체력 비축이랄까? 슬슬 레슬링 할 때가 됐구나, 하는 거라고. 내 몸이.”

창수는 두 눈을 야살스럽게 뜨며 음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주말엔 한다. 두 사람 사이에 암묵적인 공식이었다. 주말이 아닐 때 한 적은 있어도 주말을 그냥 넘긴 적은 없다. 내심 휴일이 더 기다려지는 이유기도 했다. 이러나저러나 창수 자신도 혈기 왕성한 사내니까.

한사코 괜찮다는 창수를 보며, 재윤이 다소 난감하게 웃었다. 익살스럽던 창수의 표정이 서서히 풀어진다.

“혹시 어디 안 좋아? 운전하느라 피곤했어?”

“아니.”

“오늘은 할 마음이 없다던가.”

그 말을 입에 담을 땐 눈썹이 서운함을 품고 은근히 처졌다. 순간순간의 감정과 본능에 충실하다. 빼거나, 튕기거나, 재는 법 없이 제 욕구를 적나라하게 내보인다. 어쩌면 그를 빛나 보이게 하는 것 역시 꾸밈없는 그 진솔함인지도 모른다.

거짓은 그를 상처 입힐 뿐이었다. 당장 침울해 하는 낯만 봐도. 역시 솔직하게 털어놓는 게 좋을 것 같다.

재윤은 그럴 리가, 하면서 창수의 볼을 쓰다듬었다. 창수가 시무룩한 표정 그대로 제 볼을 재윤의 손에 문대온다.

“실은 본가에서 손님이 왔어. 연락도 없이.”

“아? 혹시 아줌마?”

“아니. 다른 사람. 서로 일면식도 없는데, 괜히 너 불편할까 봐.”

“그런 거면 진짜 상관없는데. 네 가족은 나도 만나보고 싶고.”

역시 덮어놓고 긍정적이라고 할까. 그런 점도 좋아하지만.

썩 내키지 않아도 창수를 더 설득해 볼 재간도 없었다. 재윤은 픽 웃으며 창수의 손을 잡았다. 붙들린 손을 멀뚱히 내려다보던 창수가 입술을 길게 찢으며 손가락을 하나하나 얽어놓는다.

“괜한 걱정 했네. 같이 가자, 그럼.”

“정말?”

“어차피 그쪽도 금방 돌아갈 테니까. 피차 모처럼의 주말인데 그냥 넘기기도 아쉽고.”

역시 주말엔 한다. 그 사실을 상기하자마자 창수의 얼굴이 더없이 만족스러워졌다. 그대로 재윤의 얼굴을 붙들곤 들입다 입을 맞췄다. 다소 놀란듯하던 재윤에게서 얕은 웃음이 터졌다. 창수가 그를 놓아주자, 바로 벨트를 풀며 상체를 길게 기울여왔다. 그러곤 부드럽게 입술을 겹치면서 키스했다. 말캉한 혀가 입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덩달아 티셔츠 안쪽으로 재윤의 손이 파고들었다. 복부를 가만가만 쓰다듬는 손길이 못내 간지러웠다. 창수는 그의 스웨터를 슬쩍슬쩍 말아 올리며 맨 등을 쓰다듬었다. 곧은 척추가 그렇게 섹시할 수가 없었다. 한 번만 핥아봤으면 좋겠는데. 살을 뒤섞을 땐 좀처럼 그럴 여유가 없다.

한참 서로를 탐하다가 아쉽게 입술을 뗐다. 남은 건 이따가. 재윤이 창수의 코끝을 가볍게 톡 쳤다. 창수는 제 입술을 할짝거리면서 넘치는 욕망을 애써 눌렀다.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도리어 생각하면 이러는 게 맞다. 뭐든 애가 닳아야 더 뜨거워지는 법이니까.

창수에게서 비실비실 웃음이 샜다. 하지만 그도 잠시, 머리를 번뜩 스치는 어떤 생각에 바보처럼 풀어져 있던 얼굴이 굳는다. 창수는 차를 돌리려던 재윤의 팔을 덥석 붙들었다.

“잠깐.”

“왜?”

“나 여기서 내릴게.”

다급히 안전벨트를 풀었다. 클립을 단번에 빼내지 못하고 낑낑거리는 모습이 경황이라곤 없어 보였다. 재윤은 서둘러 내리는 그를 아리송하게 지켜보다가 물었다.

“뭐 챙겨갈 거라도 있어?”

“그게 아니라…… 아무튼 저녁 먹기 전까진 갈 테니까, 손님 그냥 보내지 마. 일았지?”

단단히 당부해두고는 부리나케 달려간다. 한 번 말려볼 새도 없었다. 이제 보니 휴대폰까지 보조석에 놓고 갔다. 창수가 대뜸 그러는 이유를 추측해보려 했지만, 영 짐작 가는 구석이 없었다.

재윤은 가만히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별수 없이 차를 돌렸다. 온 길을 거슬러가면서는 차라리 잘됐다, 생각했다. 서둘러 가서 창수가 오기 전까지 얘길 끝내야 한다. 마음이 바빠졌다.

서두르느라 그만 대야를 걷어차고 말았다. 고요하던 집 안에 요란한 소음이 울려 퍼진다.

창수는 대야를 제자리에 돌려놓을 생각도 못 하고 얼른 방 안으로 들어갔다. 길녀가 배에만 이불을 덮은 채 쿨쿨 자고 있었다. 누군가 달려 들어오는 기척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조금 전 소음 때문인지 인상만 완연히 찌푸려졌다.

옷장으로 가서 문을 젖혀 열었다. 현란한 디자인의 셔츠가 색깔별로 죽 꽂혀 있었다. 그것을 양손에 하나씩 꺼내 들고 거울 앞에 섰다. 제 몸에 대가며 이리저리 살펴보지만, 하나같이 마음에 차질 않았다.

바닥에 내던지고 다시 새 셔츠 두 개를 손에 쥐었다. 그렇게 쌓인 셔츠가 수십 벌이 돼가던 참이었다. 팔랑거리며 떨어진 셔츠 한 장이 하필 길녀의 얼굴을 덮었다.

“아 진짜!”

길녀가 발칵 짜증을 내며 일어났다. 홧김에 집어 던진 셔츠는 맞은편 벽면에 거칠게 처박혔다. 지레 놀라 어깨를 좁히던 창수가 살금살금 거울 앞으로 갔다. 그러곤 마저 들고 있던 셔츠를 제 몸에 대보는 것이다.

거울에 귀신같은 길녀의 얼굴이 비쳤다. 그러나 창수는 마땅한 옷을 고르느라 미처 그녀를 발견하지 못했다. 아니, 서슬 퍼런 기운은 느껴졌지만, 애써 모르는 척했다.

“미친놈이, 딴집살이할 거면 짐 싹 챙겨서 나가던가. 왜 자꾸 들락날락 지랄이야, 거슬리게!”

“미안, 길녀야. 근데 일어난 김에 옷 좀 봐주라. 나 어떠냐?”

덜떨어진 망아지가 천지 분간을 못한다. 길녀는 셔츠를 몸에 댄 채 빙글 돌아보던 창수의 면상으로 베개를 집어 던졌다. 그걸 정통으로 맞고도 창수는 꿋꿋했다. 오십보백보인 셔츠를 번갈아 대보며 평가를 종용한다.

짜증이 폭발해, 손에 잡히는 대로 휴지며 옷가지 따위를 내던졌다. 날아오면 오는 대로 맞고, 피할 수 있으면 피해 보던 창수가 휴대폰만은 순간적으로 턱 잡아챘다.

“성질 좀 죽여, 이년아. 아직 할부도 안 끝난 걸.”

겨우 생명 보존한 휴대폰을 도로 주인 앞에 가져다 놓는다. 그 몸짓이, 사자 앞에 먹이를 놓듯 얌전하기 짝이 없었다.

길녀는 마뜩잖은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뭔데.”

“물은 대로야. 뭐가 제일 그럴싸해 보여?”

“하나같이 거지 같거든?”

“이씨, 그러지 말고.”

“뭘 그러지 마, 병신아 눈알은 달고 다녀? 어디서 사도 그런 걸.”

창수는 못마땅한 기색으로 들고 있던 셔츠마저 툭 내려놨다. 그러곤 제 텅 빈 웃장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어깨를 늘어뜨리며 한숨 쉬는 꼴이 제법 낯설었다. 여태 주변에서 뭐라고 잔소리해도 꿋꿋하게 저만의 취향을 고수 하더니만.

“네 불알친구 엄마라도 왔나?”

짐작해 묻자 회들짝 놀라며 돌아본다. 동그랗게 뜬 눈이며, 헤벌어진 입이 경악에 차 있었다.

“……귀신같은 년.”

“진짜?”

“아니. 아줌마는 아니고, 다른 사람. 새아버진 돌아가신 지 오래 됐다니까 친척이겠지.”

그래서 였군.

어울리지도 않는 짓을 한다 싶더니, 다 이유가 있었다. 그 알량한 머릿속이 뻔히 내보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본다고 없던 옷이 생길 것도 아닌데. 창수는 헐렁한 옷장만 막막하게 응시하면서 뒤통수를 긁적였다.

“너, 걔가 정말 좋아?”

길녀가 불쑥 물었다. 곧 창수가 얼떨떨하게 돌아봤다.

“뭐?”

“뭐는. 대답해. 그 의사 나부랭이가 그렇게 좋이죽겠느냐고.”

“좋지, 그럼. 어떻게 그 새낄 안 좋아할 수 있냐? 다른 사람들도 다 좋게 본다고. 기억 없는 우리 할머니까지 마냥 예뻐하더라. 길녀 네 취향이 유독 외계인 같은 거라니까?”

“그럼 후회하지 않을 자신도 있어?”

“대뜸 무슨 후회?”

“아, 새끼가 자꾸 한 번에 못 알아듣고 두 번 말하게 하네. 그 의사 새끼한테 몸뚱이고 마음이고 홀랑 다 줘 버린 거, 앞으로도 그럴 거 후회 안 하겠느냐고.”

부연하자 어, 하는 멍청한 소리를 내며 당황한다. 얼굴은 벙해지고, 목덜미까지 삽시에 타올랐다.

“……기, 길녀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훔쳐봤어?”

“─미친.”

기어이 휴대폰이 다시 던져졌다. 이번엔 제대로 막아보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얻어맞았다. 창수는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이 제 것이라도 되는 양 얼른 주웠다. 액정부터 확인하곤 제 옷에 마구 문질러 닦는다.

“니 새끼 촐랑거리고 돌아다니는 거 보면 안 봐도 비디오거든?”

길녀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큼성큼 다가가자 창수가 지레 긴장한다. 거치적거리는 그를 옆으로 밀쳐냈다.

농에 대여섯 개쯤 남아 있던 셔츠들을 두루 살펴보다가 그중 옅은 카키색을 집어 꺼냈다. 아무 무늬도 없는 면 셔츠였다. 일전에 단골가게 주인장이 서비스로 하나 끼워준 것이라 했다. 내도록 처박아둬서 태그도 아직 그대로 붙어 있었다.

“일단 이거 입어.”

“─뭐? 나 어디 장례식장 가냐?”

“입으라면 닥치고 좀 입어.”

창수에게 셔츠를 떠넘겨주곤 마저 바지도 찾았다. 이번에도 아무런 무늬없는 검정 바지를 꺼낸다.

얼결에 옷을 떠맡은 창수는 영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네.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길녀가 그를 머리에서부터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는다. 집요한 시선에, 창수가 영문도 모른 채 어깨를 옹송그렸다. 너무 대놓고 쳐다보니 괜히 맨몸으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안 되겠다. 가자.”

숙고 끝에, 길녀가 창수의 팔을 덥석 잡아끌었다.

“어? 갑자기 어딜? 나 시간 없어. 빨리 가봐야 돼.”

“오래 안 걸려. 그 꼴로 갔다간 절대 좋은 소리 못 듣는다, 너?”

“어어, 그럼 팔찌라도 좀 챙기고…….”

창수가 금붙이에 미련을 보이며 버텼다. 그런 그의 등을 냅다 후려쳤다. 손맛이 어찌나 매운지, 창수가 불에 올린 오징어처럼 몸을 꼬물거렸다. 무작정 그를 끌고 나가는 길녀에게선 어떤 투지마저 엿보였다.

“무슨 짓이야. 연락도 없이.”

재윤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얼굴을 굳혔다. 어조는 공격적이기 짝이 없었다. 자신의 차량에 기대어 있던 여자가 픽 웃었다.

“무슨 짓이라니. 누나가 동생 좀 보러오면 안 되는 거야?”

전혀 기죽지 않고 다가와선 얼굴 좀 풀어, 한다. 살갗에 닿으려던 그녀의 손을 도중에 잡아 천천히 내려놓았다. 여자는 알았다는 듯 두 손을 들어 보이더니 재차 피식했다.

“일 때문에 근처에 왔다가 하나뿐인 동생 놈 안부가 궁금해져서.”

남매라지만 닮은 구석이라곤 없었다. 재혼으로 법적 가족이 됐기 때문이었다. 동갑이지만, 생일이 더 빠르다는 이유로 꼬박꼬박 누나 노릇을 하려든다. 그녀가 바로 하영이었다.

깔끔한 숏 컷과 눈매를 강조한 화장이 이지적인 인상을 만들었다. 각 잡힌 의상과 깨끗한 손톱, 타이트하게 채워진 손목시계도 나름의 성격을 반영했다. 재윤을 똑바로 응시하는 두 눈에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실패를 모르고 살아온 사람들은 흔히 그렇다.

“네 어머니한텐 행여 여기 내려오면 다신 안 보겠다, 그랬다며? 네가 사춘기도 아니고 뜬금없이 무슨 반항이래.”

재윤은 하영을 못마땅하게 볼뿐, 일절 대꾸하지 않았다. 충분히 예상했던 바지만. 저기요, 사람이 얘기하고 있는데. 하영은 재윤 앞에서 손을 흔들어가며 주의를 끌더니 씩 짓궂게 웃었다.

“아까 그 사람이지?”

“신경 끄라고 했을 텐데.”

“어머. 정 없게 어떻게 그래? 사람 인연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끊어지는 건 줄 알아? 애초에 도와달라고 했던 건 너야.”

“그쪽한테 도와달라고 한 적 없어.”

“뭐, 그건 그렇지. 정확하게는 내가 아니라 강 변호사님한테 도와달라고 했으니까. 그렇지만 그 사람이 내 외가 쪽 친척이란 걸 모르지 않았잖아?”

재윤은 대꾸하지 않았다. 하영의 얼굴에 묘한 웃음이 짙어진다.

“누나가 여기까지 왔는데 차도 한 잔 안 줄 거야?”

“대답해. 왜 온 건지.”

“왜긴. 네가 걱정하는 누나 마음도 몰라주고 전화를 안 받으니까 왔지. 사람이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얘기를 시작했으면 결말까진 다 들려줘야지. 자꾸 비싸게 굴면 걔한테 직접 듣는 수가 있다?”

백창수였지, 아마.

놀리듯 덧붙이자 길게 한숨을 뱉는다. 예전부터 그 이름만 언급하면 재윤은 재미있는 반응을 보여주곤 했다. 일종의 프리패스라고 할까.

“들어와.”

이번에도 여지없다. 재윤은 내키지 않는 얼굴로 앞장섰다. 관사가 아닌 진료실의 문을 연다. 하영은 2층을 힐금 보다가 잠자코 그를 따라갔다.

따로 묻지도 않고 커피를 탔다. 하영이 원두가 아니면 마시질 않는다는 걸 알면서 버젓이 믹스커피를 뜯는다. 종이컵을 책상 위에 힘줘서 내려놓는 꼴이, 먹고 꺼지라는 마음의 소리를 대변하는 것 같았다.

하영은 개의치 않고 진료실 내부를 죽 둘러봤다. 진료용 침대에 털썩 앉으면서는 변변찮네, 하며 소감도 내놓았다.

“전에 그것도 경험이라고, 이번에 다시 와 보니까 새록새록 기억나더라? 여기도 그동안 꽤 많이 변했나 봐? 전에 왔을 땐 좀 더 오지 같은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배 타고 들어오는 차도 제법 많더라고. 읍내라고 해야 하나? 거기도 병원이랑 편의시설 같은 게 꽤 생긴 듯했고. 뭐, 촌스러운 건 여전하지만. 물색이 좋긴 하던데, 정말 관광단지인가 뭔가 조성되는 거야? 있으면서 들은 얘기 좀 없어? 투자나 해보게.”

관심도 없으면서 쉼 없이 떠들어댄다. 재윤은 팔짱을 낀 채 그런 하영을 탐탁잖게 봤다. 하영은 생글 웃는 낯으로 표정 좀 풀지, 했다. 그러면서 꺼낸 이야기는 제법 의미심장했다.

“아까 보니까 둘이 잘 지내는 거 같던데. 어떻게 궁지로 몬 거아?”

재윤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무슨 뜻이지?”

못 알아들었을 리 없다. 단지 의문을 느낀 것일 뿐.

하영은 씩 웃으며 하얗게 뜬 믹스커피를 들었다. 가만가만 컵을 흔들며 막이 된 크림 성분을 녹인다. 그런 사소한 움직임에도 재윤의 시선이 촘촘히 박혀들었다.

“아마 ‘궁지로 몰지 않으면 물려고 들지 않는다.’고 했었지?”

하영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듯, 보다 분명히 말했다. 확실히 그건 몇년 전, 재윤 자신의 입으로 했던 말이었다.

◈◈◈

아버지의 새 여자가 데려온 동갑의 사내아이. 재윤에 대한 인식은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한집에 살면서 함께 등교하고, 교습도 같이 받았지만 특별히 가깝게 지내지도 않았다. 그에게서 또래와 다른 점은 하나도 찾지 못했다.

제 어머니 등쌀에 못 이겨 쫓기듯 공부하는, 그저 그런 놈이라고 생각했다. 워낙 표정도 없고, 공부 외의 다른 것엔 흥미도 보이지 않아서. 지원한 모든 대학에 버젓이 합격하고도 흐뭇한 웃음 한 번 짓지를 않기에 정말 재미없는 인간이라 여겼다. 나란히 대학생이 된 첫해, 여름방학이 왔을 때까진 그랬다.

제 동기들은 일찌감치 도서관에 처박히거나 과외를 받느라 바쁜 그 시기에, 재윤은 돌연 여행을 준비했다. 사실 말만 거창할 뿐, 챙긴 짐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학창시절을 보냈던 곳에 다녀올 거라 했다. 남쪽 먼 바다라고 들었기에 하영도 그를 따라나섰다. 아니, 먼저 가서 기다렸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거였다. 그때도 그는 순순히 하영을 데려가려 하지 않았으니까. 목적지는 그의 어머니에게서 손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를 대신해 재윤을 돌봐주었다던 이모는 뭍에 나와 살고 있었다.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새로 지은 2층 건물은 깨끗하고 지내기에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의아했던 점은 그 이모라는 사람의 태도였다. 일종의 직업병인지는 모르겠어도, 그녀는 재윤을 조카가 아닌 손님처럼 극진히 대했다. 10년 가까이 엄마처럼 돌봐줬다고 들었는데, 영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다.

재윤은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가방만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그의 이모가 내주던 수박을 먹으며 잠시 앉아 있던 하영도 서둘러 그를 따라나섰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땐 뭔가 흥미로운 일이 펼쳐질 거라는, 대책 없는 기대감이 샘솟았다.

도착한 곳은 읍내의 한 중국집이었다. 재윤은 그곳 사장과 아는 사이인지, 몇 마디 얘길 나누다가 실망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하영은 그 맞은 편 의자를 얼른 차지하면서 재윤과 같은 메뉴를 주문했다.

머지않아 식탁 위에 수북하게 쌓인 볶음밥 2인분이 나왔다. 부러 찾아와서 먹을 만큼 맛있는 걸까. 내심 기대하며 한 숟가락 가득 퍼서 입에 넣었다. 하지만 입안의 것을 다 삼키도록, 그곳만의 특별함은 찾을 수 없었다.

- 에게. 겨우 이거 먹으러 온 거야?

어이없어 물었지만, 재윤은 대꾸하지 않았다. 얼굴에도 이렇다 할 표정이 없었다. 숫제 딴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기껏 시킨 볶음밥은 조금 깨작대는가 싶더니 고스란히 남기고 말았다.

정확하게 1인분 값만 내려놓고 일어서는 그를 치사하다, 비난하며 제 몫을 따로 계산했다. 그러는 사이 재윤은 하영을 기다려주지도 않고 성큼 걸어가 버렸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여객터미널 안에 있었다. 보따리를 한 짐씩 진 그곳 주민들과 상기된 표정의 낚시꾼들,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여행객들이 어지럽게 뒤섞여 배를 기다렸다.

그곳에서 목적지도 모르는 여객선을 타고, 어느 섬에 다다랐다. 배 위에서 훤히 마을 전체가 내다보일 만큼 작은 섬이었다. 재윤은 그곳 선착장에 내리자마자 어딘가로 쉼 없이 걸어갔다. 인가를 끼고 굽이굽이 이어진 콘크리트길에는 당연하게도 이정표가 없었다. 그런데도 재윤은 물 흐르듯 계속해서 걸음을 놓았다.

- 어디 가는데.

가파른 언덕길을 오를 때쯤, 하영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다. 기쁜 숨이 거푸 터져 나왔다. 그러나 재윤에게선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제 갈 길만 가는 그를 잔뜩 노려보다가 다시 꾸역꾸역 쫓아갔다. 그를 놓치면 미아 신세를 면치 못할 거였다.

겨우 마주한 언덕 위의 집은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았다. 대문의 페인트는 흉물스럽게 벗겨져 있었고, 우편함에서는 각종 고지서가 잔뜩 비어져 나왔다. 야트막한 담벼락 너머에는 세간이 굴러다니고, 장독에는 흙먼지가 수북이 쌓였다.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 같았다.

재윤은 그 집 앞에 붙박인 것처럼 서 있었다.

- 누구 집이야? 아는 사람?

참지 못하고 물었지만, 이번에도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힐금 본 그의 두 눈에 여러 감정이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하영으로서는 쉽사리 짐작해 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한참을 머물다가 해 질 녘에야 걸음을 돌렸다. 다시 선착장으로 내려오던 길에는 마을 주민을 한 명 만났다. 부녀회장이라던가. 재윤이 먼저 그녀를 알아보고 인사했다. 그녀는 곰곰이 기억을 되짚다가 겨우 재윤을 떠올려냈다.

두 사람은 지극히 통상적인 안부를 주고받았다. 더 할 말이 없어졌을 즈음, 재윤이 언덕 집 소식을 물었다. 부녀회장의 입만 빤히 보는 모습에서 전에 없던 초조함이 엿보였다.

그 집 할머니는 풍을 맞고 쓰러져 병원 신세를 지고 있고, 손자는 죄를 지어 감옥에 갔다고 했다. 어떻게 아는 집이기에 그리도 파란만장할까. 새삼 궁금해하며 별생각 없이 재윤을 봤다. 그러곤 자신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아마 그때가 처음이었을 거다. 표정이라곤 없던 얼굴이 여지없이 허물어졌던 건.

재윤은 부녀회장을 몰아붙이듯 하며 계속 그 집의 일을 캐물었다. 지켜보던 하영이 다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부녀회장이 더는 아는 게 없다고 백기를 들었을 때에야 재윤의 기세가 좀 수그러들었다. 충격받은 얼굴은 그때까지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는 섣불리 말을 붙일 수 없었다. 아니, 어떤 말을 해도 그에겐 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가까운 사이였을까? 소꿉친구라던가. 그렇다고 한들 자신의 일도 아닌데 그리도 격한 감정을 드러내진 않을 듯했다. 적어도 하영 자신은 그랬다. 재윤의 걸음이 멎은 건 포구가 보일 때쯤이었다. 그 앞에 허름한 건물이 하나 서 있었다. 낡은 측 간판에는 ‘민박’이라는 붉은 글씨가 투박하게 적혔다. 고정 나사가 헐거워졌는지, 간판은 바람이 불 때마다 특유의 쇳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버려둔 수조는 누렇게 말라 버렸다. 불현듯 포구 앞에서 민박집 겸 식당을 했다던 재윤의 이모가 떠올랐다.

그곳의 우편함 역시 오랫동안 방치된 상태였다. 우편물은 투입구를 꽉꽉 채우다 못해 그 아래 바닥에도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재윤이 제 발치에 떨어진 봉투 하니를 집어 들었다. 그대로 잠시 시간이 정지된 것 같았다. 순간이나마 그가 모든 행동을 멈추고 굳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윽고 재윤은 다급하게 봉투를 뜯어봤다. 한 장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어깨너머로 언뜻 보니 삐뚤빼뚤한 글씨가 가득했다. 내용은 좀처럼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편지를 빠르게 읽어 내린 재윤은 다급하게 우편함을 뒤졌다. 그 안에서 몇 개의 봉투가 더 걸러졌다. 한 데 모으니 수십 통이나 됐다. 내용과 발신자가 몹시 궁금했지만, 순순히 보여줄 턱이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알 수 있었던 건 모든 편지의 발신처가 어느 교도소였다는 점이었다.

제 이모의 집으로 돌아와서 내내 재윤은 방 안에 들어박혀 있었다.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는 것 같았다. 그대로 날이 밝았을 땐 귀가를 서둘렀다. 내려온 지 고작 하루만의 일이었다.

재윤이 회사 고문인 강 변호사를 찾은 것은 그곳에 다녀온 직후였다. 업무 문제로 본가에 다녀가던 그를 붙잡고 긴히 이야기를 나눴다. 뭔가를 부탁하는 낌새였다. 그러나 강 변호사는 자신은 회사 일을 하는 사람이라며 그의 부탁을 거절했다.

- 이런 곳에 신경 쓰는 거, 사모님이 달가워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가 자리를 뜨고도 재윤은 묵묵히 앉아 있었다. 턱에 발끈 힘이 들어간게 보였다. 하얗게 질린 주먹은 부들부들 떨리기까지 했다. 공연히 그 근처에 놓여 있던 화병만 애꿎게 박살이 났다. 날카로운 파열음을 듣고 나온 그의 어머니는 상황을 바로 인식하지 못했다. 재윤은 설명을 구하는 그녀를 지나쳐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2층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하영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곤 밖으로 나가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이윽고 대문 앞으로 강 변호사의 차량이 돌아왔다. 뜻밖의 호출이 의아했던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냐, 묻는 목소리가 살짝 긴장돼 있었다.

- 방금 재윤이 만났죠?

- 그래. 집에 있었던 거니?

- 네. 어쩌다 하는 얘길 좀 들었는데…… 이왕이면 걔 부탁, 들어줘요.

다짜고짜 하는 말을, 강 변호사는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 어른들 모르게 도와달라고요. 어려운 일 아니잖아요?

- 그 수감자, 너도 아는 사람이나?

- 아니. 몰라요, 전혀.

- 그런데 왜…….

- 갑자기 궁금해져서요.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사람일까.

강 변호사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그 요구를 거절할 수 없을 거였다. 아버지가 침실에서 업무 보고를 받기 시작한 이래, 누구도 하영을 섣불리 대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역시 그랬다.

이후로 강 변호사와 재윤의 만남은 종종 그의 방에서 이루어졌다. 대개 그의 어머니가 집을 비웠을 때였다. 은근히 합석하는 하영을, 그는 내키지않아 했지만 부러 쫓아내지도 않았다. 원하는 바를 얻으려면 체념해야 할 것도 생긴다는 걸 알 나이였다.

- 판결문을 아무리 봐도 이해가 안 됩니다. 피고 측 주장만 보면 기껏해야 과잉 방어, 더 나가도 과실 치사 아닙니까. 그런데 징역 8년형이라뇨. 어떻게 이런 형량이 나올 수 있죠?

그와 관련된 일을 논할 때면 재윤은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제 일인 것처럼 분노했고, 항변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면 괜스레 오싹오싹해졌다. 그 분노의 기저에 무엇이 있는 걸까, 짙은 호기심도 생겼다.

- 그러네요. 미성년자에, 초범이었는데 말이죠.

고개를 갸웃거리던 강 변호사가 뭔가를 발견하곤 이거네, 했다.

- 무슨 말씀입니까.

- 피해자의 사촌이 경찰 고위 공무원이었어요. 해당 지역 관할이었기도 하고 수사 과정에서 일종의 괘씸죄가 추가됐을지 모른다는 거죠.

강 변호사는 다시 서류를 좀 살피더니 이것 좀 보세요, 했다. 몸을 바짝 붙이며 충실히 설명하는 모습이, 그에게도 없던 흥미가 돋아난 듯했다.

- 재판 내내 피고 측에 유리한 증인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만약 피고의 주장대로 오랜 기간 피해자에 의한 지속적인 폭행이 있었고, 그날도 그랬다면 그 사실을 입증할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게 없었죠. 사건 현장에는 피고와 피해자 단 둘뿐이 있으니까요.

피고와 같은 처지였을지도 모를 외국인 노동자들은 신분 때문에라도 나설 수 없었을 테고요. 결국 피고 측 주장은 법정에서 일방적인 변명밖에 안 됐을 겁니다. 평소 피해자의 폭력 성향이나 당시 상황을 입증해줄 증거 같은 게 없는 한, 그쪽에서 먼저 무자비한 폭행을 가했다는 사건 정황까지 그저 피고의 주장으로 치부됐을 테니까요.

그에 반해 재판에 중인으로 참석했던 피해자 가족과 주변인들은 그를 쾌활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었다, 일관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밀린 월급 때문에 불만이 쌓인 피고가 사장실로 쳐들어가 피해자를 밀쳤고, 그 결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검사 측 주장이 사실로 인정돼도 할말 없는 겁니다. 적어도 그들은 피고가 잔뜩 흥분한 모습으로 사장실에 들어가는 걸 영상 증거로 제출했으니까요.

게다가 당시 재판에서는 피해자의 지병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부검 결과를 보면 급성 심근경색 소견이 있었는데도 말이죠. 물론 그것 자체가 사망의 직접 원인은 아니어서 그랬을 거라 생각됩니다만, 개인적으로는 그게 당시 상황을 얼마든지 재구성 해볼 수 있는 실마리인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백창수 씨가 피해자를 쓰러뜨렸을 때 피해자가 머리를 부딪친 게 아니라, 그 이후 급성 심근경색으로 의식을 잃는 과정에서 치명상을 입었다고도 가정해볼 수 있거든요. 그러면 피고는 무죄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변호사는 그 부분에 관해선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어요. 담당 검사는 하필 갓 임관한, 괴상한 정의감과 열정 가득한 새내기였고요. 이건 너무 꼬였다고 밖에…….

강 변호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혀를 찼다.

- 후배 중에 형사 전문 변호사가 있습니다. 이 건, 한 번 의뢰해 보죠.

원하던 결과임에도 재윤은 크게 기뻐하지 않았다.

- 창수를 설득하는 게 먼저일 겁니다.

- 설득이라뇨. 바보가 아니고서야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고 그냥 체념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지금쯤 절실하게 도움을 기다릴 겁니다. 수감자들 대개가 재심의 기회를 얼마나 바라는데요.

- 아뇨. 그 사람은 아닙니다. 정말 궁지의 궁지까지 몰지 않으면 물려고 들지 않거든요. 느닷없이 물려도 제 상처보다 물어뜯은 사람 이부터 걱정하는 맹꽁이라서.

타인을 그렇게 단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그런 사람이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재윤 역시 그의 겉을 보고 판단한 것일 뿐. 껍데기를 벗기면 사람은 다 이기적이고 음흉한 거라고.

그런 한편 하영은 백창수란 인물이 더 궁금해졌다. 어떤 사람이기에 오랜 친구에게서 맹추 취급이나 받을까 싶어서.

교도소에서 처음 마주한 그는 순한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실수로도 사람을 죽였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낯선 이들을 경계하듯 바라보며 어깨를 움츠리는 모습은 흡사 강아지 같기도 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재윤의 예상대로였다. 오판의 여지가 있다는 걸 충분히 피력하고 재심을 권해도, 창수는 좀처럼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그날 피해자를 넘어뜨린 것은 분명하고, 그 사람은 죽었으며, 당시 그곳에 있던 건 두 당사자뿐이니 결국 자기가 죽인 거라면서. 다시 재판을 받겠다는 생각 자체가 죄를 발뺌하는 것 같아 싫다고 했다. 그러니 그냥 죽은 사람과 그 가족에게 속죄하면서 남은 시간을 보내겠단다. 그러기로 제 할머니와 약속했다던가. 바보. 그보다 더한 멍청이. 만난 적도, 그래서 어떤 감정이 싹를 틈도 없던 사람인데 공연히 하영 자신이 분해지고 말았다.

몇 번을 찾아가도 마찬가지였다. 기껏 찾아온 이가 허탕 칠까 번번이 불려 나오면서도 그는, 괜히 미안하니까 그만 찾아와 달라며 사정했다. 내내 뒤에서 지켜보던 하영은 결국 발끈하고 말았다

- 멍청하긴.

창수는 물론 그의 담당이 된 변호사도 그녀를 낯설게 바라봤다. 오지랖인 걸 알면서도 도무지 답답해서 제어가 안 됐다

- 괜찮아? 괜찮다고? 뭐가 괜찮은데? 당신 바보야? 당신만 꾸역꾸역 참고 살면 세상이 좀 나아질 것 같아서 그래? 네가 성인군지야 뭐야, 대체. 뭐? 속죄하고 살아? 뭘 잘못했는데. 아무것도 기억 못 한다면서 잘못했다고 속죄를 해? 속죄란 건 자기 잘못을 기억하고 곱씹는 것부터 시작하는 거야. 알아? 누가 당신 죄 없애주려고 이래? 진실을 밝히자는 거잖아. 진짜 당신이 그 사람을 해쳤는지 어쨌는지 가려보자고. 네가 이러는 게 제2, 제3의 피해자를 낳는 거야. 판례가 돼 버린다고. 알기나 해?

창수는 슬쩍 눈썹을 늘어뜨렸다. 느리게 눈알을 굴리다가 어렵사리 시선을 맞춰온다. 자격지심에 불만을 터트릴 거라 생각했는데, 표정에는 별반 변화가 없었다.

- 재판 용어는 죄다 어려워서. 판례란 거 몰라, 뭔지.

무식하다고 해야 할지, 순진무구하다고 해야 할지.

도리어 하영의 말문이 막혔다. 그의 담당 변호사는 차분하게 판례와 그 영향에 관해 설명했다. 하영이 필요 이상의 의미를 부여했다는 걸 알면서도 잠자코 그 뜻에 편승해주기도 했다.

얌전히 듣던 창수는 자못 곤란한 얼굴이 됐다. 하지만 그뿐, 당장 입장을 바꾸지는 않았다.

궁지에 궁지까지 몰지 않으면 물지 않는다.

불현듯 재윤이 흘렸던 얘기가 떠올랐다.

- 할머니 치매라고 들었는데. 이미 당신 못 알아본다지?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요? 이대로 그쪽 할머니, 영영 못 보게 될 수도 있단 소리야. 형량 6년도 넘게 남았다면서. 막말로 지병 있는 노인이 그때까지 건강하게 버텨줄 거다, 장담할 수 있어요?

그렇게까지 말하는데도 먹히지 않으면 손을 뗄 생각이었다. 제 인생 스스로 꼬는 타입들은 구제불능이니까.

창수의 눈썹이 일자로 모아졌다. 두 눈엔 전에 없던 반감마저 차올랐다.

하영은 그런 그를 조금 더 몰아붙였다.

- 그쪽 할머니. 마지막 기억이 뭘것 같아요?

- …….

- 나는 자책감이라고 생각해. 그쪽이 저질렀는지, 아닌지도 모를 잘못을 수긍하고 여기에서 썩는 거? 그건 그쪽 할머니한테 당신이 살인자를 키웠다, 선고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여태 돌봐준 사람을 그렇게까지 엿 먹이고 싶어?

지켜보던 변호사가 하영을 진정시켰다. 창수는 완전히 얼빠진 얼굴이었다. 꽤 충격받은 것 같았다. 그럼에도 미안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쯤 되니 지레 분해져서, 될 대로 되라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면회 시간이 끝났을 무렵이었다. 접견실을 나서려던 창수가 주저하며 두사람을 돌아봤다. 얼굴에 시름이 가득했다. 초조하게 눈알을 굴리던 그는, 대뜸 고개를 꾸벅 숙였다. 좀 도와주세요, 청하는 목소리가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염치없다고 생각했는지, 두 손에도 바짝 힘이 들어갔다.

그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그를 돕고 싶어졌다.

캠퍼스를 지나다 재윤을 발견했다. 한가롭게 후배들과 농구나 하고 있기에 처음엔 그가 아닌 줄 알았다. 같은 과 여학생들까지 나와 응원하는 걸 보니 꽤 오래전부터 그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평소라면 별일이네, 생각하며 지나쳤을 테지만 그날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잠시 코트를 벗어나던 재윤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한 여학생이 기다렸다는 듯 생수를 뜯어 건넸다. 하영은 그것을 중간에서 낚아채서 대신 재윤에게 내밀었다.

- 오늘 네 친구 나오는 날이잖아. 설마 잊었어?

- 그게 뭐.

- 뭐야, 그 재미없는 반응은. 어떻게든 빼내려고 안달복달할 땐 언제고. 학교고 뭐고 내팽개치고 만나러 갔을 줄 알았는데?

재윤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생수를 낚아채듯 가져가선 목을 축일 뿐이었다. 여자 후배들이 건네려던 수건도 대신 받아 넘겨줬다. 뒤에서 따가운 시선과 대놓고 수군대는 소리가 감지됐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 아, 대답해! 인권위원회에서 구제 조치 들어가는 거다, 그럴듯한 뻥까지 쳐가면서 능력 있는 변호사 보내준 거, 영치금 꼬박꼬박 넣어준 거, 여태 걔네 할머니 돌봐준 거까지. 그거 다 내가 한 거다, 뒤를 봐주던 키다리 아저씨가 실은 나였다, 밝혀야 할 거 아냐. 내가 오늘을 얼마나 기대했는데!

- 난 그 녀석한테 은인이 될 생각, 없어.

- 뭔 소리야, 그게?

도무지 재윤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부러 없던 약속까지 만들면서 그날 하루를 빈틈없이 보내려는 이유도.

- 고마움이든 미안함이든. 그딴 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지면 결국엔 부담스러워질 테니까. 하나하나 차근차근할 거야. 두려워하거나 막막해 하지 않게. 이번에도 지레 겁먹고 도망가면 곤란하니까.

새삼 의지를 다지며 중얼거리던 혼잣말 역시.

◈◈◈

아마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만약 그 여름, 창수를 보고 싶었던 충동을 끝내 이겨냈다면. 추억을 쫓아왔다가 그의 소식을 듣지 않았다면. 폐허나 다름없던 옛집에서 그가 보내온 편지를 줍지 못했더라면.

면죄부나 다름없었다. 내내 억눌러 막아뒀던 미음의 둑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편지의 행간에서 절절하게 묻어나던 그리움을 접하던 순간, 그를 지켜줄 울타리가 재윤 자신뿐임을 알게 된 그때. 그때껏 앓아오던 모든 고통이 부질없어졌다 창수가 무심결에 만든 빈틈을 비집고 들어가지 않을 이유가, 더는 없었다.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눈앞에서 하영이 마뜩잖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라고 했는데.”

그렇게 물으면서도 두 눈엔 일말의 호기심조차 담겨 있지 않았다. 지금까지 떠든 이야기를 귓등으로도 안 들었단 걸 그렇게 확인시켜준다. 대단한 실례를 태연히도 범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여전했다.

“강 변호사님 말이야. 얼마 전에도 여기 다녀가셨다던데. 그것도 개 관

련된 일이었다지?”

“능력은 좋은데 가볍네, 사람이.”

“애초에 네가 내 사람한테 도움을 청한 게 문제지. 이번엔 우발적인 살인미수사건이었다면서? 한 사람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치고 참 레퍼토리가 다양하단 말이야. 들어보니까 그 사건도 꽤 재밌던데.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호해야 할 피의자가 당시 상황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데다 전두엽 손상까지 의심된다니. 더구나 일방적으로 폭행당하던 피해자가 순전히 자기 방어 목적으로 과도를 휘둘렀는데, 그게 기막히게 상대의 다리 신경을 두개나 손상시켰다?”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없어, 그런 건. 그냥 흥미로워서. 경찰은 추호도 의심 안 하는 거 같지만, 하필 거기에 걔가 연루돼 있다는 것도 그렇고. 네가 첫 신고자이자 유일한 목격자란 것도 그렇고. 기껏 바쁜 사람 불러다 사건 수습하게 하질않나, 피의자 담당할 변호사까지 친히 구해 붙이질 않나. 너무 누구 구미에 맞춰진 거 같다고 할까.”

“그래서. 새삼 정의감이라도 솟구쳤어?”

“설마. 뭐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랄까. 도리어 궁금해지더라고. 세상사 관심도 없고 욕심도 없는 목석을 이렇게까지 움직이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렇게까지 공들일 만한 사람인지. 예전에 잠깐 봤을 때는 잘 모르겠던데. 귀염상이긴 하지만 여자처럼 예쁘장한 것도 아니고.”

“이유가 필요한 게 아니니까.”

“뭐?”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하영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듣기야 제대로 들었는데 뭔가, 재윤이 뱉었다고 생각하기가 어려운 말이었다. 하지만 재윤은 더 부연하지 않았다. 잔뜩 귀찮은 기색으로 재촉할 뿐이었다.

“그보다 언제 돌아갈 거야? 곧 배 끊길 시간인데.”

“어머. 여기까지 왔는데 걔도 보고 가야지. 어디에 숨겨놓고 너만 온 거야? 얼른 불…….”

재윤을 부추기던 하영이 문득 뒤돌아봤다. 내내 심드렁하던 재윤의 얼굴이 돌연 탁 펴졌기 때문이다. 시선 역시 하영에게서 한참은 뒤로 비켜나 있었다. 이제 보니 바닥에 웬 인영이 어른거렸다. 전에 없던 인기척도 느껴졌다.

재윤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그쪽으로 걸어갔다. 대뜸 누군가가 다가오 기척에 바닥의 그림자가 우왕좌왕한다. 하영은 다분히 수상쩍은 움직임을 의아하게 눈으로 좇을 뿐이었다.

당연히 창수일 거라 생각했다. 실제로도 창수가 맞았다. 그럼에도 문밖으로 나간 재윤의 얼굴에서 순간적으로 표정이 증발한다. 두 눈도 살짝 커졌다. 무엇을 본 걸까. 궁금증에 하영이 고개를 쭉 뺐다.

이내 재윤의 낯에 거짓말처럼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어떤 배우를 데려다 놔도 그리 쉽게 안면근육을 사용하진 못할 것 같았다. 하영은 못마땅한 눈길로 고개를 저었다. 저런 인간이 동복에서 태어났다면 더 징그러웠겠지 싶었다.

“왔으면 들어오지 않고.”

“으하하, 내가 좀 늦었지? 바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뭔가 중요한 얘기 중인 거 같아서. 그렇다고 엿들었다는 건 아냐. 잘 안 들렸거든.”

어렴풋이 들려오는 목소리는 전과 같았다 하영의 입가에도 얼마쯤의 미소가 번진다. 그를 맞이하기 위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윽고 창수가 재윤에게 이끌려 안으로 들어왔다. 입술을 꾹 다문 모습에서 상당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재윤의 급격한 태도 변화를 보곤 그임을 짐작했던 하영으로서도 조금 놀라고 말았다. 아까 봤을 때까지만 해도 분명히 노란 머리였는데.

창수의 머리카락은 그새 흑발이 돼 있었다. 단정하게 다듬은 듯한 모양 새에, 옅은 물기마저 배였다. 차림새 역시 종전과는 달랐다. 캐주얼한 느낌의 셔츠와 주름 없이 미끄러진 바지는 그의 마른 몸에 딱 맞게 미끄러졌다. 확실히 보통 때와는 차이가 있는 듯했다. 재윤이 그를 거리낌 없이 대하면서도 좀처럼 눈을 못 떼는 게.

하영은 싱긋 웃으면서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조심스럽게 시선을 맞추던 창수가 돌연 눈을 홉떴다. 그러곤 대뜸 손가락으로 하영을 가리켰다.

“─어! 우리 어디서 본 적 있는 거 같은데? 혹시 그때 그 변호사 양반 꼬붕…… 아니, 부하…… 아닌데. 아무튼 그랬던 사람 맞죠?”

“오. 안 잊으셨네요? 그동안 잘 지냈어요?”

하영은 달갑게 악수를 청했다. 창수 역시 헤벌쭉 웃으며 그 손을 양손으로 붙잡고 열심히 흔들었다. 식사는 하셨어요, 살갑게 묻다가 문득 재윤의 존재를 상기한다.

“아, 인사해. 이분이 전에 나 재심받을 수 있게 도와줬던…….”

의심 없이 하영을 소개하려던 창수가 돌연 멈칫했다. 천천히 하영과 재윤을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린다. 머리 굴리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한참 후에야 그는 뇌리에 깃든 의문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근데 둘이 어떤 사이?”

“전에 내가 말했던 동갑…….”

“누나예요, 재윤이.”

단박에 이해를 못 한다. 설명을 구하는 눈빛에 이번에도 재윤보다 하영이 먼저 나섰다.

“경험 좀 쌓을까 해서, 대학생 때 변호사 사무실에서 아르바이트했었거든. 그때 우연히 창수 씨를 만났어. 그죠?”

“아…… 그때 아르바이트 중이셨구나.”

“네. 덕분에 지금은 이런 일 해요.”

하영은 가방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로펌'이란 명칭은 생소했지만, '변호사라고 적힌 걸 보고 그렇구나, 했다.

“오, 출세하셨네.”

“그런가? 그나저나 두 사람이 소꿉친구였다니. 이제 막 알았는데, 정말 깜짝 놀랐지 뭐예요. 어떻게 이런 인연이 다 있대요?”

일부러 그러는 건지, 하영이 재윤 쪽을 보며 과장된 몸짓을 했다. 누가봐도 과해서 도무지 신뢰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곤란해 하고 있을 때였다.

“아하하하하. 그러게요. 세상 참 좁네.”

창수가 일말의 의구심도 갖지 않고 해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재윤을 골려줄 심산이었는데, 창수의 천진함이 방패가 돼 버렸다. 하영은 눈썹을 늘어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 막 만났는데, 이만 가봐야겠어요 실은 이 근방에 볼일 있어서 왔다가 잠깐 들른 거라.”

“어, 그래도 기왕 왔는데 저녁 먹고 가시지. 제가 이 동네 맛있는 집은 확 잡고 있는데.”

“뭐, 정 아쉽다고 그러시면 내일 일정을 조금 미뤄도 되긴 하는데.”

하영이 말꼬리를 늘어뜨리며 재윤을 봤다.

“내일 첫 배로 나가도 스케줄엔 딱히 지장 없을 것 같고.”

한마디를 더 보탠다. 창수는 계속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세요, 했다.

“어머. 귀신같은 얼굴.”

영문 모를 소리에 창수가 의아하게 뒤돌아봤다. 재윤은 그와 눈을 맞춰주며 싱긋 웃을 따름이었다. 이유도 모르고 방싯 따라 웃는다. 그러곤 다시 의심 없이 하영을 보는 거다.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자니 마음이 착잡해졌다. 몇 년 전 재윤을 도운 게 과연 잘한 짓인가 싶어서.

“역시 불청객은 돌아가 보는 게 좋겠어요. 다음에도 기회는 있으니까.”

“진짜 그냥 가시게?”

창수가 눈썹을 늘어뜨리며 진심으로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조만간 시간 내서 다시 오든가 할게요. 모처럼 주말인데, 두 사람도 편히 쉬어야지.”

하영은 창수를 달래며 그 뒤에 버티고 선 재윤에게 눈짓했다.

“배웅 안 해 줄 거야?”

“어서 가 봐.”

창수가 돌아보며 덩달아 부추겼다. 재윤은 마지못해 나서면서 다녀올게, 했다 얼굴에 어렸던 미소는 창수에게 등을 보이자마자 자취를 감췄다.

운전석에 오르기 무섭게, 재윤이 차 문을 닫아버린다. 하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창문을 내렸다. 그녀를 까마득하게 내려다보는 재윤의 눈빛이 쌀쌀맞기 그지없었다.

“다신 이렇게 불쑥불쑥 찾아오지 마.”

“쟤 보니까 괜한 죄책감 들어서라도 그래야겠다. 몹쓸 놈한테 뭣 모르는 어린애 넘겨준 기분이야.”

“걱정 마. 범죄가 될 만한 짓은 하지 않으니까.”

“퍽이나. 대체 김만용인가 하는 그 작자는 어쩌려고 그런 거야? 운이 좋았으니 망정이지, 재수 없었으면 쇠고랑 찼어, 너.”

“뒤는 생각 안 했어. 죽여야겠단 일념밖에 없었으니까.”

“죽이진 않았으니 알량한 네 이성을 칭찬해줘야 되는 거나? 갑자기 쟤가 너무 가엾어지려고 그런다. 어디 너 무서워서 바람이나 피우겠어?”

“그럴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공들이지도 않았지.”

“어련하실까.”

쯧 혀를 차며 시동을 걸었다. 그대로 창문을 닫으려던 하영이 잠시 멈칫한다. 할 말 있는 눈빛으로 올려다보자 재윤이 여지없이 귀찮은 표정을 지었다.

“한 가지만 더.”

“안 돼.”

“에이, 여기까지 왔는데 야박하게 좀 굴지 말고.”

재윤은 대꾸 없이 팔짱을 꼈다. 뭐가 됐든 빨리 꺼져버리라는 무언의 요구가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그 와중에도 하영은 꿋꿋이 채 해소되지 않았던 의문을 제기했다.

“전부터 궁금했었거든. 아무리 네 어머니 성화 때문이라고 해도 고등학교까지야 여기서 졸업해도 상관없었을 텐데. 도중에 전학 와서 적응하랴, 공부하랴 정신없었잖아. 아버지가 유언장 작성하기 전에 자주 눈 맞추면서 정 붙여놓으라는 네 어머니 의도야 십분 알겠다만.”

“그런 게 왜 궁금해?”

“궁금한데 이유가 뭐 있어. 얼른 대답해. 그래야 갈 거야.”

고집스럽게 버티자 재윤에게서 나직한 한숨이 새어 나온다. 대단한 비밀은 아니었다. 굳이 다른 누군가에게 밝힐 필요도, 그럴 이유도 없어서 그래 왔던 것일 뿐. 당장 하영을 눈앞에서 치울 수만 있다면 그런대로 값싼 대가였다.

“여기 계속 있다간 내 손으로 망가뜨릴 것 같았으니까. 어떤 고얀 짓을 저질러도 우정으로 미화하면 그대로 받아들였거든, 저 바보가. 차츰 어디까지 요구하게 될지, 나 자신이 무서워지더군.”

“……역시 괜히 들었나 보다.”

“아직도 더 궁금한 게 남았나?”

“아니. 간다.”

하영은 고개를 저으며 창문을 닫았다. 출발하기 직전엔 불쑥 “응원한다, 불알 커플.” 하기도 했다. 달려가는 그녀의 차량을 얼마쯤 지켜보다가 돌아섰다. 그새 얼굴에는 평소와 같은 미소가 자리 잡았다.

창수는 세면대 거울에 제 모습을 골똘히 비줘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머리카락이 영 어색한지 계속 만지작거린다. 재윤은 문가에 몸을 기댄 채 그 모습을 관망했다. 창수가 뒤늦게 그의 시선을 인식하며 돌아봤다.

“역시 좀 별로냐?”

재윤은 대답을 유보하곤 그에게 다가갔다. 새카매진 그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흐트러뜨려 본다.

“왜 이랬어?”

“어른들이라도 오셨을 줄 알았지. 니 새끼가 이 먼 데까지 와서 발랑 까진 놈이랑 어울린다고 걱정하실 거 아니냐. 이왕이면 잘 보이고 싶기도 하고. 아니, 그렇다고 뭐 또 엄청 거창한 의미인 건 아니지만…….”

가감 없이 제 의도를 드러낸다. 재윤은 싱긋 웃으면서 창수를 안아 진료용 침대에 앉혔다. 연이어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볍게 짓눌렀다 떼어냈다. 금방 창수가 골똘한 눈길을 보내왔다. 그의 볼을 간질이듯 쓰다듬다가 재차 쪽 입을 맞췄다.

“애써줘서 고마워. 하지만 날 위해서 널 희생할 필요 없어. 난 창수, 네 본래 모습 그대로도 좋아하니까.”

“그렇게 구려?”

“아니, 이건 이거대로 사랑스러워. 예전 모습이 떠오른다고 할까. 그땐 아무것도 모르는 강아지였는데. 생각하니까 새삼 심술궂게 굴고 싶어지네.”

“어어? 이렇게 불 싸지르면 책임 못 져. 정말 개가 돼버릴 거라고.”

“안 될 건 뭔데.”

은근한 도발에 창수가 와락 달려들었다. 무릎을 세우고 앉으면서 재윤의 목을 양팔로 조여 안는다. 그대로 입술을 겹쳐오며 재윤의 말캉한 살점을 마음껏 질겅거렸다. 굶주린 짐승이 젖을 빨듯 쪽쪽 소리까지 내가면서 정신없이 탐했다.

숨이 달려 잠시 두 입술이 떨어졌다. 창수는 여전히 재윤을 팔 안에 가둬두곤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아쉽게 핥았다. 평소보다 훨씬 순진해진 인상 때문인지, 그 모습이 낯설게 눈에 박힌다.

느긋이 웃으며 그를 안았다. 창수가 자연스럽게 목덜미에 고개를 묻어온다. 약한 구석마다 입을 맞추면서는 당돌한 요구까지 했다.

“이왕이면 오늘은 가운 입고서 하면 안 돼?”

재윤에게서 나긋한 실소가 터졌다.

“악취미네.”

“일하는 거 볼 때마다 자빠뜨리고 싶어서 혼났거든.”

“그럼 얼마든지.”

맞닿았던 몸을 떼어내며 창수의 볼에 쪽 뽀뽀했다. 그러곤 옷걸이에 단정하게 걸려 있던 가운을 몸에 걸쳤다. 창수는 그 모습을 숨죽이고 지켜보다가 얼른 안경집까지 찾아 건넸다. 픽 웃으며 그것도 마저 착용했다. 그러자 비로소 평상시의 점잖고 금욕적인 모습이 된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몸이 달아, 엉덩이가 다 들썩들썩했다. 그러나 재윤 얼른 와서 목마름을 해결해주지 않고 느긋하게 굴었다.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죠?”

“……응?”

보통의 환자를 대하는 듯한 태도에 창수가 일순 멍해진다. 재윤은 여전한 표정으로 거리를 유지하고 서 있었다. 그의 미소가 어딘가 모르게 짓궂어 보였다. 그제야 그의 의중을 알아차린 창수가 헤벌쭉 웃었다.

“잠을 잘못 자서 그런가, 여기저기 안 쑤신 구석이 없는데.”

“잠시 보겠습니다.”

재윤이 다가와 슬며시 뒷목에 손을 얹었다. 그 얕은 접촉만으로도 가슴이 콩콩거리고 괜스레 긴장됐다. 편하게 계세요, 귓가에 닿는 목소리가 어째 평소보다 나긋한 것 같았다.

채윤의 손끝이 창수의 목선을 따라 움직였다. 그곳에 온몸의 모든 감각이 내쏠렸다. 다소 뭉쳐 있던 뒷목을 주무르며 뭉근하게 풀어줄 때는 전신이 다 나른해졌다. 살갖 위로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여긴 좀 어떠시죠?”

“……아, 좋아. 무지 시원해.”

창수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입꼬리도 움찔움찔 위로 올라갔다. 재윤은 씨 웃으며 그의 머리카락을 역으로 쓸어 올렸다. 긴 손가락이 가닥가닥 파고들며 두피 전체를 개운하게 자극한다. 재차 척추가 부르르 전율했다.

“……으응.”

“귀가 많이 차네요.”

양손으로 창수의 귀를 지압하듯 주물럭거렸다. 금세 열이 돌면서 귓가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대로 목선을 훑고 내려와 어깻죽지를 지그시 움켜쥐었다. 뻐근하면서도 후련한 감각에 창수에게서 저절로 끙 소리가 새어 나왔다. 같은 부위를 강하게 주무르자 몸이 움찔움찔하며 쪼그라든다. 단지 마사지 받는 수준인데도 벌써 샅에서 반응이 왔다. 그만두었으면 싶으면서도 더 해줬으면 하는, 이율배반적인 마음이 들었다. 재윤의 손길이 떨어져 나갔을 때는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재윤은 곧 돌아서서 뭔가를 준비했다. 그 가만가만한 움직임을 지켜보며 꿀꺽 침을 삼켰다. 이윽고 창수를 보는 재윤의 손에는 일회용 압설자가 들려 있었다. 아, 하고 나직이 명령하는 소리에 거부감 없이 입을 벌렸다.

얇은 압설자가 입속 점막을 은근히 긁으며 자극하기 시작했다. 볼 가장 깊숙한, 평소에는 닿을 수 없던 곳까지 샅샅이 훑는다. 창수의 새빨간 혀가 따라오며 침입자를 방해했다. 그마저 잡아서 꾹 짓누르자, 토막의 날숨이 터져 나왔다. 때아닌 속박감에 뭉개진 혀가 계속 발끈했지만,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맹렬하게 타액이 고여 들었다. 덩달아 호흡까지 압박되면서 창수의 목울대가 연신 꼴깍거린다. 덥석 재윤의 팔목을 붙드는 손길이 초조해 보였다. 손등에는 거푸 그의 가쁜 숨이 터졌다.

재윤은 씩 웃으며 조금 더 버티다가 압설자를 빼냈다. 창수가 급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 탓에 사레가 들리면서 끊임없는 기침을 토해낸다. 그의 입술과 압설자 사이에 긴 타액이 늘어졌다. 재윤은 그것을 휘휘 돌려 익숙하게 끊어냈다. 그러곤 타액으로 절여지다시피 한 그것을 천천히 핥는다.

그 모습이 묘하게 자극적이어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재윤은 기침하느라 눈물까지 그렁그렁해진 창수의 눈가에 나직이 입을 맞췄다.

“숨소리 듣게 옷, 벗어 봐요.”

고개를 끄덕이며 셔츠 단추를 풀었다. 조금 전 사레의 영향인지, 움직임이 굼뜨기 짝이 없었다. 재윤은 그런 창수를 재촉하지 않고 청진기를 귀에 꽂으며 잠자코 기다렸다.

모든 단추가 풀리면서 셔츠가 벌어졌다. 내내 기침한 탓에 얼굴부터 흉부까지 달아올라 있었다. 그 몸을 물끄러미 주시하며, 살에 직접 닿을 다이아프램에 입김을 불어넣었다. 창수는 그 모습을 초조하게 지켜보다가 재차 침을 삼켰다.

“좀 차가울 겁니다.”

친절한 경고 직후 다이아프램이 유두 아래 꾹 닿는다. 예상했던 접촉이건만 창수의 몸이 움찔 떨렸다. 긴장된 시선은 시종 재윤의 손끝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숨 쉬어볼래요? 천천히.”

자장가처럼 살랑살랑한 요구가 이어졌다. 가만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자 흉부와 복부가 덩달아 부풀었다가 가라앉는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광경은 외설스럽기 짝이 없었다. 어디까지나 건전한 의료 행위 같지만, 실제 목적은 그게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얕게 솟아오른 유두가 다이아프램이나 재윤의 손에 닿을까, 계속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재윤은 그것을 곧 떼어 허리 뒤쪽으로 가져다 댔다. 뜻밖의 곳에 차가운 것이 닿자 몸이 바짝 굳었다. 가만히 소리를 듣던 재윤이 청진기를 목으로 미끄러뜨렸다.

“다행히 이젠 숨 쉬는 데 무리가 없는 것 같습니다.”

“와, 샌님아. 너 그러니까 진짜 같아서 더 오싹오싹해.”

“선생님이라고 해야지.”

재윤이 픽 웃으면서 입을 맞췄다. 창수도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입술을 쪽쪽 달게 빨아댔다. 자연스럽게 창수의 다리를 붙들어 당기며, 그를 침대 위에 눕혔다. 헝클어진 머리카락도 가만히 쓸어 넘기곤 키스를 이어갔다.

내내 괴롭힘 당하던 혀가 성급하게 입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함께 밀려든 달뜬 숨이 입천장을 간질이며 목젖에까지 스셨다. 복수하듯 밀어붙이는 통에 야트막한 웃음이 터졌다. 그런 와중에도 창수는 재윤의 혀를 입술로 잘근거리면서 다급한 카스를 이어갔다.

한참 후에야 가쁜 숨과 함께 입술이 떨어졌다. 모처럼 얌전해진 겉모습이 애석하게도, 창수의 얼굴이 기분 좋게 상기돼 있었다. 두 눈도 거칠게 떠밀려온 흥분과 기대감으로 잔뜩 반짝거렸다.

“오늘은 내가 공 선생 홀랑 벗겨 먹을 거야.”

“기대되네요.”

목덜미를 따라 내려오며 점점이 입을 맞췄다. 그러다 대뜸 다이아프램으로 창수의 유두를 짓이긴다.

“……흐앗!”

예민한 살점에 난데없이 찬 게 와 닿자 창수의 복부가 발끈 튀었다. 여유롭던 표정도 한순간에 무너졌다. 재윤은 제 오른손이 하는 일을 모르는 것처럼 굴며, 연신 다이아프램으로 유두를 지분거렸다. 창수의 몸이 움칠움칠 튀면서 조금씩 달아나기 시작했다. 자꾸 접히려는 어깨를 붙들어놓으며, 반대편 유두마저 짙게 핥아 올렸다.

“읏─ 읏…… 앗, 아…… 흐응…….”

황망히 고개를 저었지만, 몸에 끼치는 저릿저릿함은 떨쳐지지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선명해지면서 사정을 부추길 뿐이었다. 금방이라도 싸 버릴 것 같아서 필사적으로 허벅지를 오므렸다. 재윤이 그런 창수의 복부를 지그시 쓸어내리며, 훼방을 놓았다.

“앗, 하지 마아─ 벌써 나올 것 같단 말이야. 으응, 앗─.”

재윤은 들리지 않는다는 듯, 스스럼없이 바지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렸다. 창수의 남근이 당장 팬티를 뚫고 나올 기세로 발기돼 있었다. 이로 단단해진 유두를 갉작이며, 팬티 자락을 옆으로 벗겨냈다. 그러자 발갛게 익은 남근이 급격하게 튕겨져 나오며 복부에 몸을 부딪쳤다. 창수에게서 여지없이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옆구리에 거푸 입 맞추며 하복부로 내려갔다. 창수의 남근이 기다렸다는 듯 대가리를 비벼왔다. 녀석을 가만히 보다가 가볍게 쪽 뽀뽀했다. 더 해달라고 조르듯 불끈끈한 몸뚱이를 한껏 꺼덕거린다. 재윤은 불시에 놈의 귀두 끝만 물고서 힘껏 흡입해 들였다. 덩달아 창수의 복부에 급격히 힘이 들어갔다.

“흐응, 아, 아아아앗…─.”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밑은 제 본능에 충실하며 슬쩍슬쩍 재윤의 입속을 더 쑤시고 들어왔다. 재윤은 부들부들 떨리는 창수의 허벅지를 어루만져가며 사정을 이끌었다. 죽는소리만 연방 찧어대던 창수가 두 손으로 확 눈가를 가렸다.

“나, 나와……!”

그 순간 달뜬 남근을 촘촘하게 에워싸던 것이 사라졌다. 대신 종전의 그 다이아프램이 터질 듯한 살덩이에 꾹 맞닿았다. 느닷없는 서늘함에 창수에게서 한껏 억눌린 신음이 터진다. 덩달아 그의 남근이 하얗게 폭발했다.

“흐으응─ 하앗, 아…….”

주먹까지 꽉 쥐고, 복부를 튕겨 올리며 욕망의 잔재를 뿜어낸다. 재윤은 부들부들 경련하는 살덩이에 청진기를 낸 채 잠자코 그 소리를 들었다. 흐트러짐이리곤 없는 모습 때문인지, 구도 때문인지 전에 없던 수치심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으으, 낮게 앓는 창수를 보자 재윤의 입가에 깊은 곡선이 번졌다.

이내 기운을 잃고 늘어지는 창수의 남근에 쪽 입을 맞췄다. 상체를 길게 숙여서 뜨끈뜨끈해진 볼에도 뽀뽀했다. 그제야 창수가 눈가에서 손을 떼며 시선을 맞춰왔다.

곧이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이 맞물렸다. 재윤의 얼굴을 끌어당기며 매달리다시피 하던 창수가 자연스럽게 몸의 위치를 바꿨다. 제 몸에 닿아 있던 재윤의 두 팔도 침대 위로 가볍게 잡아 누른다. 재윤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창수를 봤다.

“이젠 내 차례야. 홍콩 가게 해 줄 테니까, 이 오빠만 믿어.”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할짝거리며 당찬 의지를 밝힌다. 재윤의 눈가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혀를 내어 그의 안경알을 짙게 핥았다. 직접적인 접촉이 아님에도 복부가 뻐근해졌다. 이내 얇은 다리를 덧그리듯 따라가선 귀에 걸쳐진 팁 부위를 집중적으로 깔짝거렸다. 예민한 귓가에 달뜬 숨과 부드럽게 휘어진 팁, 뜨거운 혀가 거푸 엉기면서 생경한 감각을 만든다. 마음이 대책 없이 분주해졌다.

재윤은 나직이 숨을 삼키며 은근한 기대를 드러냈다. 제 귀를 농락하는 창수의 목덜미에 쪽쪽 입을 맞추다가 그가 고개를 돌려오자 입술을 맞물리면서 서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 반동으로 넘어가려는 창수의 몸을 부드럽게 떠받친다. 창수는 그의 단단한 허벅지에 제 가랑이를 문질러대며 농밀한 키스에 흠뻑 취했다. 장난기 다분하던 두 눈은 새빨간 열망에 완연하게 젖어 있었다.

입술 닿는 곳이면 어디에든 뽀뽀하던 창수가, 재윤의 머리카락을 지그시 쓸어 넘기더니 그대로 잡아당겼다. 그 탓에 고개가 살짝 젖혀지면서 재윤의 입술이 얕게 트인다. 날렵한 턱선도 가감 없이 드러났다.

창수는 그 덕을 따라 제 입술을 안착시켰다. 재윤에게서 나직한 웃음이 터졌다. 개의치 않고 한껏 도드라진 그의 목울대를 머금었다. 흠씬 빨아들였다가 이를 세워 갉작거리자 재윤의 몸 전체가 너울거렸다.

목덜미에 고개를 묻으며, 그의 어깨에서부터 허벅지까지 죽 쓸어내렸다. 얇은 셔츠 안쪽의 굴곡진 몸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당하는 쪽은 재윤이건만, 창수 본인이 더 초조한 기색을 드러냈다. 꿀꺽 침을 삼키며 셔츠 단추 하나하나 비틀어 빼냈다. 가운 안쪽에서 셔츠가 벌어지며 실팍한 몸이 실체를 드러낸다.

창수의 눈동자가 느리게 미끄러졌다. 빈틈없이 얽힌 근육이 헝클어진 가운 안에서 고요히 숨을 고르는 듯했다. 창수의 목울대가 작게 너울거렸다. 그저 지켜보는 것뿐인데도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손가락으로 곧게 뻗은 쇄골을 길게 훑었다. 가슴을 지나 복부로 내려가자, 몸이 만든 굴곡에 손끝이 가볍게 튕겼다. 재윤의 시선이 소리 없이 따라 붙었다. 창수의 눈길 또한 내내 제 손끝만 겨냥하고 있었다. 손바닥 밑으로 밀도 높은 근육의 질감이 고스란히 남는다. 목덜미에 화끈하게 열이 올랐다. 사타구니도 다시 뻐근해지기 시작했다.

고개 숙여 손으로 덧그렸던 쇄골과 가슴골을 따라 점점이 입 맞췄다. 재윤은 창수의 귀를 주물럭거리며 그 모습을 관망했다. 창수는 조금씩 침대 아래로 내려가선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면서 얼굴이 자연스럽게 재윤의 사타구니에 놓인다. 재윤의 입꼬리가 소리 없이 들쳐졌다. 다정하기 짝이 없는 손길로 창수의 머리카락을 파고들어 가 연약한 두피를 매만진다. 장하다, 칭찬이라도 받는 듯했다.

눈을 가만히 치켜뜨며 재윤을 봤다 그는 얼마쯤의 미소를 내건 채 창수의 볼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의 눈빛에서 어떤 기대감이 엿보였다. 샐쭉 웃으며 입을 벌려 지퍼를 물었다. 서서히 당기자 지익, 소리와 함께 앞섶이 벌어졌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재윤의 복근이 크게 한 번 남실거렸다.

이미 터질 듯한 브리프 위에 쪽, 입을 맞췄다. 귀를 주무르던 재윤의 손길이 한층 뭉근해진다. 그 기대에 응하며, 브리프 자락을 젖혀 남근을 꺼냈다. 이미 터질 듯이 부풀어 있었다.

빤히 재윤을 보던 창수가 돌연 손을 뻗었다. 그러곤 기운 주머니에서 청진기를 빼간다. 의아하게 보자 그것을 제 귀에 꽂더니 재윤이 했듯, 다이아프램을 그의 남근에 댄다. 차가운 감촉에 재윤의 몸이 가볍게 일렁였다.

그 모습을 빠짐없이 눈에 담으며, 음경에 닿아 있던 것을 음낭에 밀착시켰다. 지켜보던 재윤의 입가에 짙은 웃음이 걸렸다.

“뭐라도 들려?”

“응. 얘가 엄청 두근두근해 하는 거 같은데? 이 오빠가 빠는 데 일가견 있는 건 또 어떻게 알고. 무지 쫑알거린다, 야. 애 좀 그만 태우고 얼른 빨아 달래.”

“솔직하네.”

픽 웃으며 장단을 맞춘다. 창수는 청진기를 다시 재윤에게 걸어주었다. 그러곤 흰 가운을 입고 잔뜩 흐트러진 모습을 한참 바라봤다. 조금 더 망가뜨려 놓고 싶었다.

재윤의 두 눈을 직시하며, 그의 남근을 입에 물었다. 열기를 품은 살덩이가 입안을 꽉 채우며 들어왔다. 부드러운 점막이 놈을 촘촘하게 에워싼다. 재윤에게서 토막의 날숨이 터져 나왔다 두 눈엔 감출 수 없는 희열감이 진하게 번졌다.

가만히 머금고만 있는데도 불쑥불축 몸뚱이를 꿈를거린다. 매끈하던 창수의 볼이 위태로울 정도로 솟아올랐다. 흐르는 타액은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재윤의 복부가 크게 일렁이며, 창수의 이마에 닿는다. 어서 해 달라고 조르는 것 같았다.

창수는 뿌리를 손 안에 꽉 움켜쥐고 서서히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재윤의 남근이 타액으로 젖어들며 번들거리기 시작한다. 몇 번 상하 운동만 반복하며 남근 전체를 머금다가 귀두만 입에 문 채 쭙 힘주어 빨아들였다. 도드라진 포피소대도 엄지로 가만가만 어루만진다.

“하아…….”

재윤에게서 탁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힐금 올려다보니 어느새 미간까지 찌푸린 채 달뜬 숨을 뱉어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재윤이 창수의 볼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응원에 힘입어 더 정성껏 그의 남근을 빨아댔다.

재윤은 살짝살짝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창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단정한 외양 때문에 열심히 제 남근을 오물거리는 모습이 더 관능적이게 느껴졌다. 열여덟 살 때의 그가 언뜻 겹쳐지기도 했다.

그 시절, 얼마나 앓았는지 모른다. 헐렁이는 티셔츠를 단숨에 벗겨 성에 찰 때까지 그의 몸 곳곳을 만져대고 싶었다. 조잘조잘 무신경하게 달싹이던 입술에 입 맞추고, 타액을 뒤섞고, 구멍이 헐거워지도록 제 성난 남근을 처박고만 싶었다. 의심 없이 웃던 얼굴이 눈물로 범벅될 때까지 엉망으로 들쑤시는 상상을 했다. 이제 더는 부질없이 흩어질 망상이 아니다. 뒤이어 찾아오던 끔찍한 죄책감에 시달릴 필요도 없다.

정복욕으로 전신에 열이 올랐다. 조금씩 잠식해오는 쾌감을 기다리지 못 하고 슬쩍 허리를 튕겨 올렸다. 재윤의 남근이 불시에 목젖을 훅 치고 들어오자 창수가 된 기침을 터트렸다. 목을 부여잡으며 얼마간 계속 기침을 토해낸다. 삽시에 그의 얼굴 전체가 달아올랐다. 뻐근한 양쪽 턱으로 타액이 빠르게 고여 들었다.

“힘들면 그만해도 돼.”

“아냐, 아냐. 내 몸에 들어올 녀석이니까 제대로 달래놓을 거야.”

창수는 완강히 재윤의 만류를 물리쳤다. 그러곤 뻣뻣하게 서 있는 그의 남근을 다독이듯 쓸어내렸다. 슬그머니 혀를 내선 가장 민감하다는 부위를 할짝할짝 짓이기기도 했다.

“읏─.”

재윤에게서 짙은 신음이 터진다. 힐금 올려다보니 어느새 눈을 감고 올라오는 자극을 충실히 느끼고 있었다. 잔뜩 찌푸려진 미간은 일견 고통스러워 보였지만, 입매는 묘하게 올라간 상태였다. 그의 표정을 살피며 귀두만 입에 머금고 쪽쪽 달게 빨았다. 재윤의 허리가 발끈 튄다.

다시 눈을 치켜뜨다가 시선이 마주셨다. 재윤은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칭수의 뒷덜미를 부드럽게 감싸 잡았다. 주무르듯 매만져주는 손길은 여전히 푸근했다. 그러나 아래쪽 분신만큼은 흉포하기 짝이 없었다. 연신 저 들어갈 곳을 살피며 창수의 입속 점막을 푹푹 있는 대로 들쑤신다. 양 볼까지 다 얼얼할 지경이었다.

재윤은 다시 눈을 감고 거푸 솟구치는 쾌감에 집중했다. 연방 짓쳐드는 저릿함에 입꼬리가 움찔움찔 솟아오른다. 창수가 다시 남근 끝만을 머금고 힘껏 빨아들였다. 쭙쭙 흡입해 들이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울려 퍼졌다. 덩달아 재윤의 허벅지가 점차 돌처럼 단단해졌다. 창수의 살갖을 지긋이 쓸어 올리는 손길도 한층 농후해진다.

“으음…….”

재윤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달든 숨만 간간이 뱉어냈다. 꽤 기분 좋은지 슬쩍 고개가 젖혀졌다. 묘한 감질에 제 아랫입술을 핥기도 했다.

턱이 뻐근해지면서 창수의 움직임이 급격히 느려졌다. 남근 전체를 머금고 있던 고개가 깨작깨작 움직이자, 재윤이 조용히 눈을 떠 아래쪽 상황을 살폈다. 가만히 주시하는 눈빛에 전에 없던 위태로움이 엿보였다. 창수는 그를 달래듯, 꿈틀거리는 허벅지를 가만가만 쓰다듬으며 재차 포피소대를 쭉 빨아들였다.

그 직후, 재윤의 하반신이 튕겼다. 남근은 갓 잡아 올린 생선처럼 입안에서 거칠게 펄떡거렸다.

그새 여유롭던 모습은 간데없었다. 미간은 있는 대로 구겨졌고, 벌어진 입술 새로 달뜬 숨과 짙은 신음이 계속해서 터져 나왔다. 그 모습을 눈에 담으며, 안의 것을 모두 빨아낼 것처럼 힘껏 흡입했다.

“읏─ 하아…….”

순간, 펄펄 끓던 남근이 확 터졌다. 단숨에 목구멍 안쪽 깊은 곳까지 질척한 정액이 확 끼얹어진다.

“콜록콜록,”

재차 사레가 들리면서 격한 기침을 토해냈다. 너무 거하게 해댔더니 목이 다 뜯겨나가는 것 같았다.

“이리 와.”

재윤이 창수의 팔꿈치를 가만히 잡아당겼다. 그는 잔기침을 하면서도 순순히 끌려왔다. 그를 무릎 위에 걸터앉게 하며, 그의 얼굴 옆면을 길게 핥았다. 애매하게 걸쳐져 있던 바지와 속옷을 끌어 내리는 손길은 소리 없이 분주했다.

“콜록, 내가 해. 내가.”

창수는 한사코 재윤을 만류하며 슬쩍 하체를 들었다. 몸이 기울면서 저절로 어깨가 맞붙었다. 제 손가락에 타액을 잔뜩 묻힌 창수가 난생처음으로 구멍 입구를 만지작거려봤다. 생각보다 얇은 살갖이 만져졌다. 자잘한 주름을 벌리며 손가락을 꾹 넣어본다. 잘 되지 않았다 허리도 밑으로 짓눌러 봤지만 소용없었다. 이게 왜 안 돼, 초조하게 중얼거리며 한참을 그렇게 끙끙거린다.

재윤은 그의 뜨끈한 귓가에 입 맞추면서, 바로 위 찬장에서 의료용 바셀린을 꺼내주었다. 낯설게 보는 창수를 대신해 적당량 손에 덜어 그의 엉덩이 사이에다 펴 발랐다. 달아오른 체온에 금세 바셀린이 형체 없이 녹아들었다. 연한 주름을 어루만져주다가 꾹 힘을 줘 파고들었다. 관통감에 창수의 척추가 바싹 긴장된다. 그를 어르듯 귓가와 목덜미에 연거푸 입을 맞췄다. 그 잠깐 사이에도 금세 기운을 차린 남근이 맨 살갖이라도 뚫고 들어 갈 기세로 꺼덕거렸다.

“읏, 거기보다 요 놈 좀 달래줘 봐.”

창수가 재윤의 손을 집아 앞으로 끌어온다. 그러곤 홀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던 제 남근을 쥐여 주었다. 이미 귀두가 발갛게 익은 채 벌름거리고 있었다. 바셀린 범벅인 손으로 놈을 가만히 감싸 쥐었다. 살살 손을 움직이자 창수의 몸이 저절로 움찔움찔 튀었다. 재윤의 어깨 위로 탁한 숨결이 계속해서 터져 나왔다.

하도 주물럭거린 탓에 동그란 음낭이 기름칠한 것처럼 반질반질해졌다. 그것을 호두알 굴리듯 만지작거리자 창수가 끙 소리를 내며 더 깊숙이 제 고개를 파묻었다. 스스로 뒤를 풀던 손길도 덩달아 분주해진다.

“이제 된 거 같아.”

창수는 황급히 재윤의 남근을 곧추세워 잡았다. 구멍에 잘 조준해서 가져다 대자, 재윤의 남근이 펄떡거리며 대가릴 맞비비는 게 느껴졌다. 스리슬쩍 살을 문대며 저속하게 속삭였다.

“얼른 주사 놔 줘, 선생님.”

재윤에게서 얕은 웃음이 터졌다. 그는 창수를 독려하듯 그의 등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후, 깊은 날숨을 뱉어낸 창수가 서서히 재윤에게 내려앉는다. 잠자코 지켜보던 재윤의 조금씩 일그러졌다. 꾸역꾸역 쑤시고 들어간 귀두에서부터 너무 빡빡한 조임이 느껴졌다. 살덩이가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았다. 달린 숨을 들이쉬느라 복근의 골만 거푸 깊어졌다.

창수가 숨까지 억누른 채 몰아붙여 봤지만, 역부족이었다. 절반도 다 들어가기 전에 참았던 숨결이 마구 터져 나왔다.

“윽…… 앗, 아…… 배가 너무 가득, 으읏.”

“힘 조금만 빼 봐.”

재윤은 응. 하면서 칭수의 귓가에 입을 맞췄다. 창수는 고개를 끄덕끄덕 하면서 잠시 숨을 골랐다. 그러곤 굳어 있던 몸을 조금씩 내려 앉혔다. 한계까지 벌어진 구멍에서 얼얼한 통감이 밀려들었다. 당장 찢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듯한 팽만감이었다. 다시 무릎을 세우며 멈추려는데, 재윤이 불쑥 제 허리를 튕겨 올렸다.

“아윽─.”

불시 습격으로 균형이 와르르 무너졌다. 작열감에 허벅지가 부들부들 떨렸다. 앓는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창수를 재윤이 착하지, 하며 달랬다. 고개를 뻗어 창수의 목울대를 머금기도 했다.

좀 더 넣어줘.

살갖에 입술을 대고 조르자, 창수가 끙끙거리며 하반신을 꾹 짓눌렀다. 틈 없이 맞물려 있던 살점이 부득부득 안으로 밀려들어 간다. 홧홧하게 부어오른 입구가 핏대로 울퉁불퉁한 남근에 휩쓸리며 자꾸 자극됐다.

“읏으…… 아, 찢어지겠다아아…….”

신음을 짓이기며 겨우겨우 재윤의 허벅지에 안착했다. 가볍게 튕겨지는 돌기와의 마찰이 한껏 날 선 욕망을 충동질했다. 아무래도 더는 얌전히 기다릴 수가 없을 듯하다.

채윤은 덜컥 창수의 허벅지를 붙들어 잡았다. 그러곤 곧장 제 허리를 튕겨 올리기 시작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창수의 몸이 완벽히 꿰어져 들썩거렸다. 뻑뻑하게 엉겨 있던 살점이 끝까지 밀려 나왔다가 단번에 푹 쑤시고 들어온다. 체중이 실리면서 삽입의 정도가 한층 깊어졌다.

거듭 단전 부위까지 꿰뚫리는 듯한 관통감에 신음이 엉망으로 홀러나왔다.

“하으윽, 앗, 응읏, 아…… 응, 앗─.”

한 번씩 꿰뚫어 올릴 때마다 창수의 구멍이 움찔거리며 좁혀졌다. 복부에 저절로 힘이 들어갈 만큼 조임도 한결 단단해졌다.

눈살을 찌푸리던 재윤은 침대 위에 등을 대고 누웠다. 창수의 몸이 그대로 겹쳐 쓰러진다. 그의 허벅지를 두 손으로 잡아 고정한 채 허리를 들춰 올렸다. 달아날 곳 없는 창수의 몸이 대책 없이 열렸다. 계속해서 밀려드는 지끈거림과 저릿한 쾌감에 그의 목덜미가 붉게 상기됐다.

“하아, 좋아?”

“하응, 응, 아, 앗, 하으으, 조, 좋아. 으응아, 미칠 거 같아.”

힘이 들어간 창수의 턱에 연신 입을 맞췄다. 혀를 내어 땀에 젖은 그의 얼굴을 핥아 올리기도 했다.

“하아…… 하, 환자면 환자답게 좀 더 앓아 봐.”

“안, 으응, 하악, 윽…… 응, 으아앗…… 혀, 혀 빨게 해줘.”

창수가 울상이 되어 부추겼다.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되직이 핥다가 뒤늦게 입술을 겹쳤다. 기다렸다는 듯이 재윤의 혀를 쪽쪽 달게도 빨아댄다.

탁한 신음과 거칠어진 호흡이 입안에 갇혔다. 진료실에는 얼마간 찰박찰박 떡메 치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바셀린 범벅의 두 살점이 서로 맞물리며 찌걱찌걱 젖은 마찰음마저 자아냈다. 재윤은 창수를 애정 가득한 눈길로 바라보면서, 자꾸 미끄러지는 그의 허벅지를 더욱 단단히 붙잡았다.

“하으으응─!”

다음 순간 맞물린 입속으로 창수의 까마득한 신음이 터졌다. 재윤이 가장 예민한 부위를 푹 찍어 올린 탓이었다. 그 지점을 기억하듯 재차 한 번 더 쑤셔보자 몸을 까뒤집으며 경련한다. 재윤의 등을 감싸고 있던 손끝이 날카롭게 일어섰다. 흔들리는 눈동자에도 다급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재윤은 달아나려는 창수를 와락 끌어안으면서 같은 지점을 가차 없이 들쑤셨다.

“흐아아앗─!”

거푸 지끈하게 솟구친 쾌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제 창수는 두 다리마저 바르작거리며 쩔쩔맸다. 그러나 벗어나려 할수록 재윤의 속박은 더 강해질 뿐이었다. 좀처럼 잦아들지 않는 저릿저릿함에 창수가 도리질을 치며 버티기 시작했다.

“아, 천천히…… 죽을 거 같아, 너무 그렇게 막 쑤시지 마앗─.”

버둥거리는 그를 따라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금세 눕혀진 창수의 몸 위로 재윤이 올라온다. 그 와중에도 그의 남근은 창수의 몸 안에 얌전히 자리 잡고 있었다. 반항하려는 팔목을 꼭 붙들어 누르며 창수의 목덜미에 이를 박았다. 창수는 목을 움츠리며 거푸 항복을 선언했다.

“잠깐만. 잠─.”

“괜찮아. 몸에 좋은 주사는 원래 아픈 법이니까.”

창수를 달래는 음성이 여전히 사근사근했다. 하지만 그뿐. 밑을 자비 없이 들쑤시는 움직임엔 더 박차가 가해졌다. 뱃속 특정 부위가 너무 치대져서 그대로 뭉그러질 것 같았다.

"응아앗…… 큰일, 나…… 하응, 으으응, 하아앗─.”

“여기야? 응? 여기가 아파? 제대로 알 수 있게 더 울어 봐.”

“힉, 하으응, 이, 이러다, 학, 망가져, 망가져 버릴 거야, 으응, 아─!”

“그만둘까, 그럼?”

창수는 이지러진 얼굴로 끙끙거리면서도 고개를 완강히 저었다. 재윤의 허리를 감은 그의 두 다리에는 보다 힘이 들어갔다. 재윤의 움직임이 느긋해짐에 스스로 허리를 흔들기도 했다.

“그럼 어디를 더 진찰해줬으면 좋겠는지 말해 봐. 응?”

재윤이 창수의 볼에 연거푸 입 맞추며 속삭였다. 여전히 상냥한데도 어딘가 모르게 인격 자체가 달라진 것 같았다. 순간적인 느낌뿐일지도 모른다. 무엇이든 해줄 것처럼 달래면서 정작 아무것도 들어주지 않는 그가 야속한 마음에.

남근 위로 울퉁불퉁하게 도드라진 핏대가 자꾸 구멍을 할퀴어댔다. 이대로 밑이 다 헐어버린대도 이상하지 않을 듯했다. 아릿함을 삭여보려는 듯, 재윤의 얼굴을 붙들어 당기며 적극적으로 키스했다. 재윤은 히죽 웃으면서 움직임에 더 박차를 가했다. 염증이라도 난 것처럼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거푸 끼쳐지는 자극은 사타구니로 극명하게 몰려들었다.

“읏…─.”

머지않아 재윤의 엉덩이가 쭈뼛 긴장됐다. 잇따라 그와 연결돼 있던 창수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폭발한 남근은 그의 몸 깊숙한 곳에 진득한 욕망이 잔재를 미구 뿜어댔다. 화끈거리던 뱃속이 삽시에 질척하게 젖어들었다. 힘겹게 남근을 물고 있던 구멍이 덩달아 움찔댄다.

“으으응…… 으으…….”

바짝 긴장된 채 부르르 떨리던 창수의 몸이 이내 완전히 누그러졌다. 그를 토닥거리는 재윤의 낯이 그 어느 때보다 만족스러워 보였다. 창수는 어깨까지 들썩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가빠진 호흡이 조금 진정됐을 무렵에는 슬그머니 돌아누워 재윤을 마주봤다. 아직 여운에 젖어 있는 그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만히 쓸어내리다가 구겨져 있던 미간에 입술을 묻는다. 그러곤 다시 벌러덩 누워서 긴 날숨을 뱉어냈다. 씩씩거리던 온몸이 서서히 안정됐다.

얼굴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쌓여 있던 피로감이 씻기는 것 같았다. 머리카락이 쭈뼛 설 때 자극됐던 두피가 근질근질해졌다. 거푸 머리를 쓸어 넘기다가 재윤을 힐금 봤다.

“갔어, 홍콩?”

“응. 덕분에.”

“재방문할래?”

재윤이 씩 웃으면서 볼에 쪽 입을 맞췄다. 창수 역시 배시시 쪼개며 떨어져 나가던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물렸다. 자연스럽게 그의 몸을 타고 올라가 키스를 나눴다.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의미 모를 웃음이 터졌다.

재윤은 창수의 뒷목을 감싸 잡고 그대로 그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방으로 가자,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한없이 달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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