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고나-17화 (18/18)

17

용궁나이트의 폐업이 결정됐다.

만용은 곧 재판을 받게 될 거라고 했다. 퇴원하자마자 바로 구속되는 바람에 따로 얼굴을 보지는 못했다. 몇 번인가 검찰청에 불려갔다가, 어렴풋이 소식만 들을 수 있었다. 그 성미에, 분해서 못 견딜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잘 지내고 있단다. 차분하게 재판을 준비하고 있다고.

그 소유의 모든 사업이 중단되면서 창수를 포함한 종업원들도 졸지에 갈 곳을 잃었다. 살다보면 그렇게, 제 의지와 상관없이 삶의 방향을 바꾸어야 할 때가 있다. 모두 그런 역풍을 맞는데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잘 지내라는 한마디 인사뿐, 서로 가는 곳도 모르고 굳이 묻지도 않으며 헤어졌다. 길 위의 인생이란 게 다 그렇다.

윤삼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아버지의 농사일을 돕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차근차근 앞으로 할 일을 찾아보겠다고. 그처럼 의지할 데가 있는 경우는 그나마 나았다. 그렇지 못한 이들은 한번 떠나면 다시 만날 수 있을지조차 기약할 수 없다.

“어디로 가게?”

가방을 건네는 얼굴이 시무룩했다. 어이없이 보던 길녀가 픽 웃었다.

“더 못 생겨졌네. 인상 펴. 나 어디 죽으러 가는 거 아니니까. 이 땅덩어리에 어디 내 몸 하나 뉘일 데 없겠냐. 아직 이렇게나 젊고 예쁜데.”

“그래도 낯선 데 정 붙이고 사는 게 어디 쉽냐? 차라리 돌봐줄 사람 있는 데서 그릇이라도 닦고 사는 게 낫잖아.”

“나 돌봐줄 사람이 누군데.”

창수는 뻔뻔하게 새삼 뭘 묻느냔 얼굴을 했다. 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제 가방을 빼앗듯 낚아챘다. 그 참에 뒤에 서 있던 재윤과 눈이 마주쳤다. 구태여 그까지 나올 필욘 없었는데. 언젠가부터 당연한 것처럼 붙어 다닌다. 지들이 원 플러스 원도 아니고.

“뭐, 그쪽도 잘 지내요. 멍청한 똥개 괴롭히는 건 적당히 좀 하고.”

“그렇게 보이셨다니 유감입니다 보호하는 건데요.”

두 사람 사이에서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창수는 그 둘을 번갈아 보다가 눈치 없이 “너 개 키웠어?” 하고 물을 따름이었다. 재윤은 해사한 미소로 무마하며, 그의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그런 취급이나 받으면서 좋다고 실실거리는 게, 정말 없는 꼬리라도 솟아날 기세였다.

“괜찮으시면 일자리를 소개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어머, 그쪽이 왜요?”

“창수한테 소중한 분이니까요. 여태 보살펴주시기도 했고.”

“그런 이유라면 더 께름칙한데.”

길녀가 웃는 얼굴로 빈정대는 이유를, 창수로선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재윤이 미소로 받기에 끼어들지 않고 잠자코 있었을 뿐이었다. 재윤은 거절하는 길녀에게 명함 한 장을 건넸다.

“서울에서 재즈 바를 운영히는 분입니다. 마침 지금 가수를 구한다고 하던데, 괜찮다면 연락해 보시죠.”

길녀는 마뜩잖은 얼굴을 하면서도 그가 건네는 명함을 받았다. 손끝으로 재윤을 가리키는 게, 지켜보겠다고 단단히 벼르는 것 같았다. 재윤은 그녀를 향해 생긋 웃었을 뿐이었다. 곧이어 그 웃음이, 창수에게 전염됐다.

“야, 바보.”

부르는 소리에 창수가 발끈하며 돌아봤다. 길녀는 옅게 웃고 있었다.

“행복하냐?”

“뭐?”

“좋이죽겠느냐고.”

간지러운 질문에 창수가 귓등을 긁적였다. 힐금 옆에 선 재윤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마음속에 얹혀 있던 뭔가가 조금은 가뿐해지는 것 같았다. 재윤의 본심이 무엇인지는 알 길 없지만, 적어도 그가 길녀 자신보다는 창수를 잘 지켜주리란 걸 안다. 꿈도, 장래희망도 없던 이에게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염원하게 만들었으니.

“잘 지내라. 바퀴벌레들.”

길녀는 픽 웃고는 버스에 올랐다. 창가에서 인사할 요량으로 쫄쫄 따라가 봤지만, 무심하게도 안쪽 자리에 앉아 버린다. 아무리 애타게 쳐다봐도 창수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윽고 버스에 시동이 걸렸다. 창수는 고개를 길게 내뺀 채 물러나는 차량을 따라갔다. 재윤이 말리지 않았다면 이제 막 들어오던 버스와 충돌하고 말았을 거였다.

무심히 터미널 밖으로 사라지는 버스를 향해 마구 팔을 흔들었다

“연희야! 잘 살아야 돼! 꼭 행복하게 살아!”

진심을 담아 소리쳤다. 괜스레 울컥해졌던 건, 그녀를 다신 볼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할머니되 재윤도 없던 시기에 유일하게 곁을 지켜주었던 사람이었다. 가족같이 편안하고 위로가 되는 존재였다.

상처 많은 그녀가, 그 상처만큼 뜨겁게 사랑할 줄 아는 그녀가 이제라도 안정된 삶을 찾길. 바라고 또 바랐다.

보건지소의 하루는 노인들의 이른 방문으로 시작됐다. 공식적인 운영 시간은 오전 아홉시부터지만, 새벽잠 없는 노인들은 빠르게는 한 시간씩 일찍 찾아오곤 했다. 문 닫힌 보건지소 앞에서 두런두런 사는 얘기를 나누며 속절없이 기다리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그 평화로운 소음을 알람 삼아 일어나게 됐다.

눈을 떴을 때 재윤은 이미 내려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샤워까지 마쳤는 지 산뜻한 비누 냄새가 물씬했다. 이불 바스락거리는 기척에 거울을 보던 그가 고개를 돌렸다. 금세 얼굴에 특유의 미소가 번진다.

“잘 잤어?”

“응.”

세운 팔에 고개를 괴고 빤히 지켜봤다. 그러면 어김없이 다가와 애정 표현을 잔뜩 퍼붓는다. 부리로 쪼듯 장난스러운 뽀뽀를 거듭하다가 슬그머니 재윤의 타이를 잡아당겼다.

“그만 나가봐야 해. 어르신들 기다리셔.”

재윤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순순히 끌려와 주었다. 그의 품으로 파고들며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었다. 좋은 냄새가 옴팡 풍겨왔다. 대놓고 킁킁거리자 재윤에게서 나직한 웃음이 터졌다.

“오늘도 시끌시끌하네.”

“응. 오일장 서는 날이니까.”

“벌써 그렇게 됐나?”

손가락으로 날짜를 어림해본다. 요새는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겠다. 매 순간순간이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현실감이라곤 없었다.

잠시 그러고 있는 동안 아래층에 웅성거림이 더해졌다. 새삼 서로의 안부 따위를 다시 묻는 게, 새로 버스가 한 대 도착한 모양이었다. 창수에게서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여간 노인네들. 저렇게 잠을 안 자니까 더 쪼글쪼글해지는 거잖아.”

불만스럽게 툴툴거리면서도 재윤을 순순히 놓아준다 그러곤 저도 벌떡 일어나서 옷을 걸쳐 입기 시작했다.

읍내에 오일장이라도 서는 날이면 보건지소도 한층 북적거렸다. 김 간호사와 재윤, 두 사람만으로는 벅찬 하루가 되기 십상이었다. 그럴 때면 은근히 가서 손을 보탠다. 기껏해야 환자 응대 정도지만.

“엄마! 잠 좀 자자, 잠 좀.”

문을 벌컥 열고 층계를 내려갔다. 노인들이 일제히 다가오는 창수를 돌아봤다. 늘어진 티셔츠에 겨우 눈곱만 뗀 면상, 질질 끌고 다니는 슬리퍼까지. 제 집 앞마당을 나와도 그런 몰골은 아닐 거였다. 맹렬하게 혀 차는 소리가 창수의 움직임을 따라 이어진다. 그런 할머니들 옆에 비집고 들어 가 앉는 꼴이 일상인 것처럼 익숙해 보였다.

“엄마들 수다 떠는 소리에 잠을 못 자겠어, 그냥. 아홉 시부터 문 연다니까 왜 꼭두새벽부터 와서 이러셔.”

“차가 그 시간에 있는 걸 어쩌냐, 그럼.”

“다음 차 타고 나오시면 되지. 한 시간 간격으로 있는 거 뻔히 아는데.”

“그럼 장은 언제 보고, 인석아!”

“그려. 해가 중천에 떴는데 무슨 잠을 더 자냐. 이 쓸개 빠진 놈아.”

“싸게 가서 세수나 하고 와. 머리 꼴은 그게 뭐야, 그게. 벼락 맞았냐.”

늘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 할머니들은 얄미운 손자 대하듯 눈을 흘기며 창수의 등짝과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그러면 그런가 보다 여기며 그네들이 싸온 짐 꾸러미를 살폈다. 내다 팔 기름, 콩, 깨 등부터 살아 있는 닭까지. 작게 보는 오일장이 따로 없었다.

한 노파가 팔려고 싸 온 오이를 하나 내밀었다. 그것을 스스럼없이 와삭 물면서 마저 툴툴거렸다.

“엄마들 때문에 우리 샌님이가 힘들잖아. 꼭두새벽부터 밤까지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말이야.”

“우리가 밤에도 오냐! 다 늦게 못 주무시는 걸 왜 늙은이 탓을 해!”

“계집이라도 생기신 게야?”

“네 녀석이 놀잡시고 허구한 날 꾀어서 그런 건 아니고?”

젊었거나 나이가 들었거나. 여자들에겐 남다른 촉이 있는 것 같다. 지레 찔려하며 아무튼, 하고 억지를 부렸다.

“우리 샌님이 좀 적당히 귀찮게 해.”

당신들이 할 말이라며, 기어이 창수의 등짝을 휘갈긴다. 얇은 티셔츠 안쪽까지 찌릿찌릿한 통감이 전해져왔다. 감전된 듯 몸을 꼬물대며 한참 끙끙거렸다.

그즈음 재윤이 1층으로 내려왔다. 할머니들의 표정이 확연히 달라진다. 어조도 한없이 공손해졌다.

“아이고, 선생님. 안녕하시었소.”

“건강하시지요?”

“오늘도 반질반질한 게, 낯빛이 참 좋으시네.”

“오셨습니까.”

재윤은 생글생글 웃어가며 할머니들의 안부에 화답했다. 반가워 내미는 손들도 흔쾌히 두 손으로 맞잡아주었다. 지켜보던 창수의 낯이 더없이 흐뭇해진다. 옆에서 한 노인이 이 실없는 놈은 뭘 보고 그리 쪼개느냐고 면박을 주었다.

머지않아 김 간호사가 도착했다. 그녀의 동참으로 금세 도떼기시장 같던 진료실 앞이 정리된다. 창수는 노인들이 가지고 온 짐들을 한쪽으로 모아 놓고, 미리 준비해뒀던 사탕을 한 움큼씩 쥐여 주었다. 노인들의 무료함을 달래주는 데에는 그만한 게 없다. 그들이 선생님 드리라며 찔러주고 간 것은 따로 챙겨두었다. 그중에서 홍시와 밤 같은 걸 오며 가며 꺼내 먹기도했다.

노인들의 말벗을 자청하며 시답잖게 떠들고 있을 때였다. 이제 막 도착한 환자의 낯이 눈에 익었다. 일수를 걷으면서 매일같이 마주쳤던 임 씨였다. 그는 의외의 곳에서 창수를 맞닥뜨리자 제법 놀란 듯했다.

“여기서 뭐 하냐.”

“바쁜 거 같길래 일손 좀 보태고 있지. 형님이야말로 어쩐 일이셔?”

“감기가 된통 걸려서 죽겠어, 아주.”

말 끝내기가 무섭게 기침을 한다. 한 번 터진 기침은 잦아들 기미가 없었다. 청수는 주머니에 남은 사탕을 임 씨에게 건넸다. 그거 먹으면 좀 덜 해, 하자 사양하다가도 잠자코 받아 입에 넣는다. 짜증이 가득했던 얼굴도 조금은 누그러졌다.

“그건 그렇고 여기 선생이랑 친구라던데, 그게 사실이여?”

“아니면 여기에 왜 있겠어. 중학교까지 같이 다녔어. 고등학교 때 쟤가 서울 가면서 헤어졌고.”

이젠 습관이 된 얘기를 술술 꺼냈다.

“서로 바쁘게 살다 보니까 변변히 연락도 못 했는데, 쟤가 의사로 온 덕분에 다시 만났지.”

“질긴 인연인가 보네. 지역 배정받는 것도 순전히 운이라고 하더니만.”

“……하긴. 운이 없었다곤 했던 거 같아.”

대답하면서 잠잠히 지난 기억을 되짚었다. 재윤과 재회한 직후, 그에게 비슷한 질문을 한 적이 있다.

- 어쩌다 이 먼 데 귀양 온 거야? 거기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어?

- 운이 정말 나빴나 보지.

설마 너 만나러 왔다고 할까 봐.

양심도 없이 알량한 기대를 품었다가 실망했더랬다. 그땐 알지 못했다. 아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재윤과 창수 자신이 이런 사이가 되리라고는.

문득 뒤돌아봤다. 때마침 진료를 마친 재윤이 창밖을 응시하면서 눈길이 얽혔다. 재윤이 먼저 씩 웃어 보였다. 더불어 창수의 낯에도 진한 웃음이 번졌다.

이제까지 재윤과의 인연을 당연하게만 여겼던 것 같다. 그냥 그렇게 됐구나, 하면서 신기하게 여겨본 적도 없다. 어린 시절 처음 친구가 됐을 때도, 십여 년의 시간을 건너 우연히 다시 만났던 순간조차. 생각해보면 번번이 재윤은 꿈처럼 찾아왔었다.

“그것 참, 운명인 거 같네.”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며 픽 웃었다.

할머니는 종종 사람에겐 저마다의 명이 있다고 했다. 다 그것을 따라 흘러왔다가 흘러가는 거라고. 영 미신 같아서 믿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그런 게 존재한다면……. 재윤을 창수 자신의 삶으로 실어 와 준 것도 결국 놈일 터였다.

아마 그저 그런 인생이었을 거다. 꿈도 없고, 희망도 없는. 그저 흐르니까 흘러갈 뿐인. 그 회색빛 삶이, 재윤으로 하여금 색채를 입었다.

태어날 적에 손에 말아 쥐고 온 행운을 그를 얻는 데 모두 썼다고 해도 아깝지 않을 것 같다. 제멋대로 꼬이기 일쑤였던 삶은 어쩌면, 그라는 잭팟을 터트리기 위한 시행착오였을지도 모르겠다.

역시. 착하게 살아야겠다.

Fin.

외전

처지가 같은 이들은 서로를 쉽게 알아본다. 제한된 장소에서라면 더 그렇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는데, 맞은편에서 내리던 남자가 고개를 꾸벅했다. 다소 짧은 머리카락에 어수룩한 눈빛, 상기된 표정. 낯선 곳에서의 시작은 언제고 긴장되는 법이다.

그를 따라 도청 안으로 들어갔다. 담당 직원이 두 사람을 한눈에 알아보고 다가왔다.

"지역 배치 받으러 오셨죠?"

"네."

"그럼 저쪽으로 가서 대기해주세요. 대상자들 모두 모이면 우선 제비뽑기로 지명 순번부터 정하고,앞 순위부터 순차적으로 희망 지역 선택합니 다. 지역별 T.O는 벽보에 붙여뒀으니까 확인하시고요."

직원이 가리키는 곳을 돌아봤다. 먼저 온 네댓 명의 남자가 게시판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지난밤 내내 고민했을 희망 지역부터 찾아보고, 해당 지역의 정원을 확인한 후 최소 몇 번 안쪽으로 제비를 뽑아야 하는지 겨계산한 다. 끙끙거리는 소리가 서 있는 자리까지 들리는 듯했다.

그래 봤자 모든 일은 확률에 근거하고, 그 확률이라는 것도 쉽게 말하면 운이다. 치열하게 고심한다고 답이 나오는 게 아니었다.

멀뚱히 서 있자 예의 그 남자가 확인 안 하세요, 했다.

"아, 괜찮습니다."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가방에서 수첩을 꺼냈다. 나주, 영광, 화순, 장성. 최대한 서울과 가깝게, 교통도 편리한 곳으로. 메모한 것을 들고 벽보 앞으로 간 남자가 금세 얼굴을 굳혔다. 표정이 자못 심각해진다.

그러게,의미 없다니까.

남은 시간엔 느긋하게 도청 내부를 둘러봤다. 각 지역 홍보 포스터가 벽마다 빼곡하게 붙어 있었다. 그것들을 의미 없이 죽 훌다가 한 홍보 전단 앞에서 멈춰 섰다. 지면의 ‘해상공원 건립’이라는 문구가 눈길을 끈다.

"여기는 처음이신가?"

등 뒤에서 불쑥 낯선 음성이 불거졌다. 돌아보자 나이 지긋한 남자가 웃으며 종이컵을 건넸다. 명찰에 ‘보건정보부장’이라는 소속과 직위가 새겨져 있었다. 무심결에 건네받은 종이컵에선 짙은 대추 냄새가 났다.

"아닙니다."

"몇 번 관광하러 오셨나 보네."

"뭐."

대충 얼버무렸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으레 나올 법한 이야기를 꺼냈다.

"젊은 사람들 보기에 어떨지 몰라도 살기 좋은 곳이에요. 사람 좋고, 물 좋고. 이 주변은 서울하고 크게 차이도 없지. 요샌 평준화가 됐다고 할까. 어디를 가도 평균은 하잖아. KTX 개통되고부터는 서울도 금방이고."

힐금 남자의 어깨 너머를 봤다. 종전의 안내를 담당하던 직원이 한숨 쉬며 고개를 저었다. 또 시작이네. 딱 그런 표정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애매한 웃음을 짓더니 다른 곳으로 가 버린다. 모르긴 몰라도 오지람 넓은 이 남자에게 그간 단단히 시달렸던 모양이었다. 시선이 이탈된 동안에도 남자 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혀까지 차가며 일장연설을 늘어놓는다.

"사실 진짜 젊은 인재들이 필요한 건 신안 근처 섬들이에요. 최근에야 섬끼리 잇는 다리도 놓고, 교통편도 편해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배 아니면 닿을 방법이 없지. 태반이 노인들이라 한 번 나오는 것도 단단히 각오해야 하거든. 배도 안 다니는 시간엔 헬기 띄우는 수밖에. 그마저도 바람 불고 날 궂으면 영 손쓸 도리가 없어."

이어진 말에는 그저 열게 웃고 말았다.

"3년 보내려니 영 깜깜하고 그렇죠?"

"괜찮습니다. 어차피 하게 될 일인데."

"긍정적이어서 마음에 드네. 한 3년 요양하고, 봉사하고 간다 생각해요. 처음에는 울상이다가도 떠날 땐 많이 배워간다는 사람들 많아. 가끔은 지 내던 곳에서 훌쩍 떠나 있고 그래야 내가 가진 게 중한 줄 알지. 세상 보는 눈도 더 넓어지고. 요즘 젊은 사람들이 뭘 잘 모르는데, 아무리 사람은 태어나면 서울로 보내라지만 그 좁은 땅이 세상 전부인 게 아니라고."

반쯤 홀려들으며 다시 눈길을 벽으로 옮겼다. 졸지에 대화 상대를 잃은 남자가 그제야 좀 수그러든다. 그러면서도 자리로 돌아가진 않고 어깨 너 머를 연신 힐금거렸다. 유심히 보던 홍보 전단을 발견하곤 아, 한다.

"들어본 적 없죠? 청화도. 여기 자연경관이 그렇게 기가 막힌데."

화도도, 청도도 아니었다.

청화도.

봄이면 푸른 보리가 사방을 뒤덮던 섬.?

"5월쯤 가면 보리 꽃이 피거든. 보릿 은 꽃이 대조되면서 절경을 이루는데, 이건 직접 보지 않으면 몰라요. 지금이야 그 일대도 뭐를 개발하니 마니 시끌시끌하지만, 여전히 물도 가장 투명하고 관광 삼아 머물기에 좋은 곳이죠."

"예쁘죠. 보리꽃."

"오, 보신 적 있으신가 보네?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닌데."

"어렸을 때 몇 번."

대꾸하는 목소리에선 웃음기가 느껴졌지만, 실상 두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무엇을 복기했는지 묘하게 눈매가 굳은 것도 같았다. 추측해볼 길 없는 사연에 남자는 고개를 가웃거릴 따름이었다.

그즈음 지역 배지를 받기 위해 온 사람들로 내부가 복작복작해졌다. 담당자의 목소리가 한충 높아진다.

"지금부터 지명 순번 뽑겠습니다. 예비 공보의 분들은 이쪽으로 와서 봉투 하나씩 가져가 주세요. 번호는 봉투 안 종이에 적혀 있습니다. 1번 뽑으신 분부터 순차적으로 발령 원하시는 지역 호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대기하던 이들이 앞다퉈 담당자에게 다가갔다. 먼저 뽑는다고 좋은 것이 나올 리 없는데도. 느긋하게 합류하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남은 봉투를 집어 들고 뒤로 물러났다. 앞서 선택한 이들은 바로 결과를 확인하지도 못 하고, 봉투를 손바닥 사이에 낀 채 거듭 기도했다. 내용물을 펼쳐볼 때는 실눈까지 떠가며 안절부절못했다. 머지않아 야트막한 탄식과 소리 없는 환호가 교차했다.

"자, 그럼 지역 선택하겠습니다. 1번 뽑으신 분."

손을 들었다. 단번에 모든 이목이 쏠렸다. 하지만 정작 부러움의 당사자 는 덤덤한 얼굴이었다. 담당 직원은 순번부터 확인하겠습니다, 하며 손을 내밀었다. '1'이 적힌 종이를 건네자,그곳 위에 이름을 적고는 지극히 사무적인 어조로 묻는다.

"공재윤 씨. 어디 지망하시죠?"

"신안이요."

"네?"

곧장 되물어온다. 표정 없던 얼굴도 지레 놀라 멍해졌다. 담당 직원만이 아니라 차례를 기다리던 모두가 그랬다. 일순 주변이 조용해지더니 공기가 기묘하게 술렁이기 시작한다.

눈치 보듯 눈알만 굴리던 담당자가 다시 한 번 확인해 물었다.

"신안이라고 하신 거죠?"

"네. 들으신 대롭니다."

담당자는 재차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일단은 컴퓨터에 해당 사항을 입력 했다. 쏟아지던 시선에 종전과는 다른 감정들이 섞였다. 낯선 대상을 향한 호기심과 의외로움, 은근한 시기와 냉소까지. 상관없었다.

다음 순위 사람들의 지명이 이어졌지만, 크게 귀담아듣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예의 그 홍보 전단을 볼 뿐이다. 새파란 보리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둘도 없는 도피처였다. 납작 엎드려 숨으면 머리카락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쫓아온 발걸음소리가 멀어지도록 그러고 있노라면 먼 곳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결에 보리도 함께 누웠다가 일어났다.

이삭이 살갗을 간질일 때마다 천진한 웃음이 터졌다. 그곳에, 두 사람이 있었다. 눈을 감았다. 손을 뻗으면 까끌까끌한 보리 이삭이 만져질 것처럼,  그리웠던 곳의 풍경이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잘 선택하셨네. 훌륭한 일 하시는 겁니다."

불시에 들려온 음성에 급격히 현실로 돌아왔다. 보건정보부장이라던 남 자가 어느새 다가와 씩 웃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자신의 설득이 통했다 고 착각하는 듯했다. 그 넘치는 자부심을 부러 허물어뜨릴 필요야 없을 터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열게 웃으며 답하는 어조엔 정체 모를 확신이 담겨 있었다.

Fin.

-후기-

안녕하세요,보이 시즌입 니다.

오랜만에 신작을 통해서 인사드리게 됐습니다. 부족함 많은 이 책올 선 택해 주시과 이 페이지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든 분께 충만한 이야기가 될 수는 없겠지만,읽어 오시는 동안 너무 허무한 시간은 아니었기를 바라봅니다.

개골목부터 틈, Eat me all, 세컨드 대디, 넝마 된 가슴으로, 진저리, 임폐라토르, 코드네임 아나스타샤, 필로우 토크, 그리고 이번 신작 달고나 까지. 그간 여러분께 벌써 열 가지의 이야기를 선보였습니다. 그중에는 오랜 기간 구상하고, 조사해서 쓴 글이 있는가 하면 어느 날 문득 충동적으 로 시작하게 된 글도 있습니다.〈달고나〉와〈진저리〉는 그중 후자에 해당 합니다.

그렇게 계획에는 없었지만, 불현듯 떠오른 이야기들을 써 내려가다 보면 어떤 리듬감이 생깁니다. 저 자신이 홍겨워하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고 할까요? 〈달고나〉역시 개인적으로는 마지막 마침표를 찍는 순간까지 즐거웠고, 모처럼 편한 마음이었던 듯합니다. 그 때문에 이런 소소한 이야기를 여러분께 보여드려도 괜찮을까, 고민이 되기도 했어요. 후기를 적고 있는 지금도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순진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정확하게는 그런 사람들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순한 이야기를 즐기는 편입니다. 찬바람 부는 계절이 면 유독 더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비록 이번 작품이 그에 완벽하게 부합하지는 않겠지만, 읽으시는 분들께 작은 손난로만큼의 온기가 되었으면 좋 겠습니다.

아직 겨울의 길목인 것이 실감 나지는 않으나, 곧 매서운 칼바람이 불겠 죠. 이따금 그 덕에 따뜻한 국물이나 털실로 짠 목도리,누군가의 체온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건 아닐까 생각합니다. 몇몇 분들께서 꾸준히 보내 주신 격려와 응원이 제게는 그랬습니다. 뒤늦게 감사 인사 전합니다. 고맙습니다.

모조록 볕 좋은 날에, 조금 더 나은 이야기로 찾아뵐 수 있었으면 좋겠 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다가오는 겨울도 푸근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 보이시즌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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