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시아-0화 (1/77)

1권

프롤로그

열두 살이 되던 해 여름 어느 날.

루시아의 세상이 뒤집어졌다. 기점은 그녀가 어머니를 여의고 왕궁에 들어온 첫날이었다.

‘꿈을 꾸었나. 아니면 지금이 꿈인가…….’

침대에 앉아 루시아는 넋을 놓고 중얼거렸다. 긴 꿈을 꾸었다. 과거로 되돌아온 것인지 예지몽을 꾼 것인지 알 수 없다. 루시아는 꿈속에서 삶을 경험했다. 평온한 인생은 아니었다. 대부분 고통과 눈물로 얼룩졌다. 그래도 가끔은 행복도 기쁨도 있었다. 그 자그마한 희망에 기대 근근이 살아갔다.

‘어머니…….’

몰랐다. 어머니는 귀족이었다. 어머니는 살아생전 그것을 알려주지 않았다. 꿈속에서 스물 중반 나이 무렵 우연히 어머니의 오라버니, 즉 외삼촌을 만나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어머니 아만다는 바덴 백작의 막내딸이었다. 바덴 가문은 한때 제법 세력을 떨친 변경백이었으나 지금은 가진 땅 한 뼘도 없이 간신히 이름만 유지하는 몰락 가문이었다. 나름 유서 깊은 가문이지만, 대부분 사람들 기억에서 지워지고 언제까지 작위를 유지할 수 있을지조차 장담하지 못하는 신세였다.

아무것도 없는 변방의 고리타분한 집구석과 가난이 지긋지긋했던 아만다는 그나마 유일하게 돈 될 만한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펜던트 목걸이 하나 챙겨서 수도로 야반도주했다.

아만다가 사라진 즉시 사람을 풀어 잡아왔어야 했다고, 외삼촌은 쓸쓸히 말했다. 그것이 누이를 보는 마지막이 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고 했다. 어리석은 혈기로 뛰쳐나갔지만, 금방 들어오겠지 생각한 것이 오산이었다. 한 달여가 지난 후 찾으려 했을 때는 이미 찾을 길이 막막했다고 말했다.

외삼촌이 어머니를 찾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살던 지역 근방만 뒤졌으니 수도로 올라온 아만다를 당연히 찾지 못할 수밖에. 수도로 올라온 아만다가 그 후 어찌 지냈는지 루시아로서는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다.

다만, 미혼의 몸으로 왕의 사생아인 루시아를 낳은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우여곡절이 있었을까 짐작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루시아를 낳았을 때 그 사실을 왕실에 알려야 했지만, 아만다는 누구도 하지 않는 선택을 했다. 귀족 신분을 감추고 평민들과 섞여 살며 홀로 루시아를 낳아 키웠다.

루시아는 어머니가 귀족이고 바덴 백작 가문이 외가라는 것, 자신이 왕가의 혈통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오직 아만다의 딸 루시아로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름다운 어머니, 인심 좋은 마을 사람들, 또래 친구들과 개울가며 숲이며 뛰놀던 나날들. 마치 어제와 같은, 또는 아득히 먼 옛날과 같은 기억을 떠올리며 루시아는 눈물을 흘렸다. 그녀 인생에 가장 행복한 순간들은 모두 그때 있었다.

불행은 느닷없이 찾아왔다. 수도를 휩쓸고 간 유행병이 루시아가 사는 마을을 덮쳤고, 아만다 또한 피해자가 되었다. 루시아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힘 좋은 마을 여자들과 다르게 체구가 작고 가늘었다. 몰락 귀족이라 한들 귀족 아가씨로 자라며 그리 험한 일은 해본 적 없었을 것이고, 루시아를 키우느라 억척스레 일하며 몸은 점점 망가졌을 것이다.

어머니는 자기 죽음을 예감했던 것 같다. 루시아는 어머니가 세상을 뜨기 며칠 전에 편지 심부름을 했다. 아마 왕실로 보내는 편지였을 것이다.

루시아는 어머니가 내린 결정을 이해했다. 어머니는 마지막까지 딸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고아가 된 어린 여자아이의 인생은 대개 나락으로 굴러떨어진다. 루시아가 왕궁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창기가 되어 몸을 팔았을지도 모른다.

아만다가 죽고 며칠 안 되어 왕실 근위대가 들이닥쳐 루시아를 왕궁으로 데려갔다. 왕가의 보물 중에는 직계 혈통 관계를 증명하는 특수한 감별 마도구가 있었다. 왕실 재산이지만, 귀족들 또한 상응하는 대가를 지급하며 종종 이용하곤 했다. 사생아가 넘쳐나도 별다른 혈통 분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감별 마도구 덕분이었다.

왕은 감별 마도구가 인정하는 자기 딸의 얼굴만 확인하고 이름을 내렸다. 그것이 태어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라는 사람과의 만남이었다.

‘비비안 헤세.’

그건 루시아의 새 이름이 되었다. 아무도 그녀에게 원래 이름이 무엇이었느냐 묻지 않았다. 모든 것이 일방적이었다. 엄마를 잃고 느닷없이 왕궁에 끌려온 어린 소녀에게 인심 쓰듯 낡은 별궁 하나를 처소로 던져주었다.

밤새 울다가 새벽에 깨어난 그녀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녀 자신도, 그녀를 둘러싼 환경도. 그녀는 무릎을 모아 턱을 괴고 앉아서 앞으로 펼쳐질 자신의 미래를 차분하게 그려보았다.

공주로 인정받았다고 루시아의 인생이 하루아침에 뒤바뀌지는 않았다. 방탕한 왕은 이곳저곳 가릴 것 없이 자신의 씨를 뿌렸다. 어느 날 불쑥 왕의 자식이라며 새로운 왕자, 혹은 공주가 등장하는 일은 호사가들 뒷담화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루시아는 무려 열여섯 번째 공주였다. 루시아는 자신이 열여섯 번째라는 사실도 먼 훗날 알게 된다. 왕의 사후, 자식들의 수를 집계하면서 계산해 보니까 열여섯 번째였다. 신분이 불분명한 모친과 왕 사이의 하루 야합으로 태어나 어려서 평민들과 어울려 자란 무늬만 왕족이었다.

‘미래를 안다고 해봤자…….’

루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루시아가 아는 건 오직 자신의 인생이 앞으로 어찌 흘러가는가, 뿐이었다. 가장자리에서 시작한 루시아의 인생은 마지막까지 가장자리만 맴돌다 끝났다. 귀족들의 주류 사회에 편입하지 못했기에 미래를 알아봤자 중요한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궁에 들어온 이후 루시아의 인생은 전혀 특별하지 않았다. 그냥 이 별궁에서 굶어 죽을 걱정은 없이 그럭저럭 조용히 살아간다.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지만, 그랬기에 아무도 괴롭히지 않았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았던 삶은 루시아가 열아홉 살 때 변화기를 맞이했다.

열아홉 살에 루시아의 친부이자 이 나라 국왕 헤세 8세가 죽는다. 딱 한 번만 얼굴을 보았던 부친의 죽음을 알았을 때 아무 감흥이 없었다. 친부의 죽음은 그녀의 인생에 아무런 영향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뒤를 이어 왕이 된 헤세 9세는 왕궁 예산을 잡아먹는, 부왕의 방탕한 결과물들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헤세 9세는 이복형제를 모두 궁 밖으로 내보내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루시아가 스무 살이 되었을 무렵 여전히 왕궁에 남아있는 선왕의 자식들은 공주만 여섯 명이었다. 루시아는 외가가 없었다. 별궁에 틀어박혀 지내서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그녀를 거두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왕의 딸도 아닌 수많은 왕의 누이 중 하나에 불과한 루시아는 정략결혼으로 이용할 가치가 있는 미인도 아니었다.

헤세 9세는 짐스러운 루시아를 결혼 시장에 내놓았다. 스물한 살의 나이에 루시아는 가장 많은 지참금을 낸 남자에게 팔려가듯 결혼해서 왕궁을 떠나게 되었다.

루시아의 남편이 된 메튼 백작은 그녀보다 무려 스무 살이나 나이가 많고 두 번의 이혼 경력이 있었다. 아들만 셋이었는데 큰아들이 루시아와 동갑이었다. 백작과의 결혼 생활 5년이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기간이었다. 별궁에서 지낼 때보다 물질적으로는 조금 더 여유로웠을지 모르나 정신은 피폐해졌다. 백작은 나이 많고 뚱뚱한 데다가 변태에 성 불구자였다. 자신이 해소하지 못하는 성적 욕망을 루시아를 학대하면서 풀었다.

‘싫어!!’

루시아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한 번 겪었던, 혹은 겪게 될 일에 몸서리를 쳤다. 죽어도 그놈하고 다시 결혼하기는 싫었다.

‘내 미래를 바꿔야 해. 반드시 바꾸고 말 거야!!’

이미 꿈에서 본 미래는 달라졌다. 원래 루시아는 왕궁에 들어와 근 몇 개월 자폐증 증상을 보였다. 어머니의 죽음, 갑자기 알게 된 신분, 누구 하나 애정 한 톨 보이지 않는 낯선 환경은 어린 소녀가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폭력이었다.

외부 세상과 단절하고 정신을 놓은 루시아를 보듬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형식적으로 의사가 몇 번 다녀가고 굶어 죽지는 않게 챙겨주는 의무적인 시녀들의 보살핌만으로 방치되었다.

오히려 그런 지독한 무관심이 방어기제를 작동시켰다. 스스로 자폐증 증상에서 깨어나 조금씩 달라진 환경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니었다. 루시아는 자폐증 증상을 겪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그녀에게는 수십 년 삶을 살며 쌓은 경험과 지혜가 있었다. 거창하게 세상을 바꾸려는 짓 따위는 엄두도 내지 않는다. 그녀가 원하는 건 오직 그녀 자신의 인생이었다.

‘할 수 있어. 바꿀 수 있어.’

방법은 모르겠다. 아무것도 갖지 못한 열두 살 공주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절망하지 않았다.

‘시간은 아직 많으니까.’

그러나 시간은 무정하게 흘러갔다. 어느새 루시아는 열여덟 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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