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시아-5화 (6/77)

5장 결혼할까요 (3)

“고작 이거라는 건가?”

휴고는 얄따란 몇 장 보고서를 대충 넘기며 파비안을 추궁했다. 맹랑한 공주에 대한 조사를 파비안에게 명한지 한 달. 지금껏 누구에 대한 조사도 이렇게 시간이 걸린 적 없었다. 오밤중에 그를 집으로 오는 수고까지 하게 만들었으면서 내놓은 결과가 실망스러웠다.

“조사할 내용이 너무 없어 신중을 기하느라 그리했습니다. 기대에 미치지 못하여 송구합니다, 전하.”

파비안은 처음으로 자신의 능력에 한계를 실감했다. 사람 뒷조사를 한두 번 하는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캐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궁 안에 틀어박혀 있는 사람이라 접근이 쉬운 것도 아닌데다가 비비안이라는 공주를 아는 사람을 찾을 수 없어서 정보를 얻을 길이 없었다.

휴고는 더 이상 파비안을 나무라지 않았다. 파비안의 능력은 잘 알고 있다. 제대로 일을 하지 않고 변명을 늘어놓는 수하는 아니었다.

평민으로 자라다가 열두 살에 입궁한 공주. 표면적으로는 별궁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고 사교계 데뷔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주일에 한 번씩 공주가 아닌 척 출궁하고 있었다. 파비안이 한 달을 감시하며 알아낸 결과였다.

‘사교계 데뷔도 한 적 없으면서 사교 파티에서 그렇게 자연스러웠다고?’

그녀가 파티에서 눈에 띄게 활동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사교 파티는 그리 만만치 않았다. 그녀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았지만 그건 어설픈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제가 쓴 외출패를 들고 직접 외출을 한다? 궁 출입이 언제부터 그렇게 허술했지?”

“근위병들이 시녀로 알고 있었습니다. 궁에 워낙 왕족이 많아서 매일 드나드는 시녀나 시종들 수가 파악하기 힘들 정도라 합니다. 반입 반출하는 물건만 검사하고 그 외에는 철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매주 열심히 외출해서 뭘 하는가 했더니 가는 곳은 매번 같았다. 제법 이름난 여류 작가의 집이었다. 여류 작가 또한 만만치 않게 사람들과 교류가 적어서 두 사람이 만나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여류 작가 집에 고용된 중년 부인뿐이었다.

“녀석의 정보는 이 작가에게서 얻은 걸로 추측된다……?”

그의 아들 데미안에 대한 정보는 극비는 아니지만 아무 기반 없이 궁에 갇혀 사는 공주가 알아내기에는 고급 정보였다. 휴고는 어떻게 공주가 그걸 알고 있는지 의문을 가졌고 그걸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유명한 작가입니다. 사교계 이면을 대단히 사실적으로 쓰고 있다고 합니다. 아마 꽤 사교계 소문에 정통한 정보꾼과 끈이 닿아있는 것 같습니다만 한 달 동안 정보꾼으로 추측되는 자와 접촉한 적은 없었습니다. 누구인지 확실히 알아보기 원하시면 사람을 계속 붙여 두겠습니다.”

“됐다. 중요한 건 아니니까. 결론적으로, 정확한 정보는 공주라는 신분뿐이로군.”

대부분이 추측성 정보였다. 아무것도 아닌 공주인데 아무것도 정확하지가 않다. 그는 순식간에 다 읽은 얇은 보고서를 다시 훑어보았다.

“상주하는 시녀가 없다는 건 뭐지?”

“공주님 처소에서 일했다는 시녀는 대단히 많으나… 대부분 며칠 이상을 넘기지 못하고 명부에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어디에도 끈이 닿지 않은 건 확실하고?”

“틀림없습니다. 샅샅이 살폈지만 어떤 파벌과도 연결된 흔적은 없었습니다.”

더 확인할 정보가 없었다. 휴고는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보통의 업무를 처리할 때와 다름없는 속도였다.

“매주 같은 날에 출궁한다니 다음 외출 예정일은 내일이겠군. 데려와.”

“예……? 내일…….”

내일은 쉬는 날이다.

“문제 있나?”

“…아닙니다. 전하.”

심술을 부린 대가는 결국 휴일의 반납으로 돌아왔다. 파비안은 역시 그 마녀의 저주가 틀림없다고 이를 갈았다.

* * *

“그 일 어떻게 됐어?”

놀만은 슬그머니 루시아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뭐가요?”

“지난번 나한테 물었던 두 가지 갈림길 말이야. 네 얘기였잖아.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나한테 털어놓기는 힘든 일이지?”

“…네, 미안해요.”

“아냐. 사람은 누구에게나 비밀이 있어.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이나 가족이라도 공유할 수 없지. 그냥 나는 네가 고민하는 것 같아서……. 잘되고 있는지 정도는 물어도 될까 해서 말이야.”

사람의 심리를 미묘하게 분석하는 글을 많이 썼기 때문일까. 놀만은 눈치가 빠르고 사람 마음을 꿰뚫어 보는 데 탁월했다. 놀만은 항상 뚱한 필 부인의 기분을 기가 막히게 파악하곤 했는데 루시아는 아무리 봐도 알 수가 없었다.

“지난번 놀만이 해준 이야기는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질렀어요. 그리고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에요.”

“그렇구나. 좋은 결과 나오면 말해 줘야 해.”

“네, 꼭 그럴게요. 근데요 놀만. 요즘 내 마음이 내 마음 같지 않을 때가 있어요. 나와 관련 있는 사람……. 이건 그냥 말할게요. 내 아버지란 사람.”

열두 살에 궁에 들어왔을 때, 꿈과 현실을 합쳐 총 두 번 얼굴만 봤던, 이제는 기억에도 가물가물한 그녀의 친부.

“내 아버지는 나를 방치했어요. 굶어 죽지는 않게 해주었으니 버렸다고 하긴 그렇지만. 열두 살에 딱 한 번 얼굴 본 것이 전부거든요. 그전까지는 아무렇지 않았어요. 생물학적 아버지 같은 건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다고 생각했거든요.”

1년. 이제 1년 남짓 남았다. 1년이면 왕이 죽는다.

“여전히 그 사람은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하지만. 요즘은 자꾸 불쑥 그 사람에 대한 증오……. 그런 비슷한 감정이 들곤 해요.”

내궁 깊은 곳에 들어앉아 있는 왕의 면전에 대고 당신은 이제 곧 죽어, 라고 뇌까려주고 싶었다. 흉하게 일그러질 그 면상을 보고 싶다는 잔혹한 충동이 들곤 했다.

많은 자식 중 하나라지만. 사랑해서 태어난 것도 아니었지만. 왕이 최소한의 관심만 보여줬어도 그렇게 팔려가는 결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사람이 죽으면 굉장히 통쾌할 것 같아요. 그래도 아버지인데… 그러면 안 되는 거죠?”

“무슨 소리야. 그런 게 무슨 아버지야.”

놀만은 담담한 표정의 루시아를 짠하게 바라보았다.

“미워해도 돼. 아예 물 한 잔 떠놓고 저주를 해. 그래서 네 마음이 풀린다면 얼마든지 그래도 돼. 그 미움이 네 마음을 잡아먹지 않는다면 마음껏 싫어하고 미워해.”

루시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전부 놀만 때문이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생판 남인데 챙겨주고 보듬어주는 사심 없는 애정이 철저한 무관심을 보인 아버지와 비교가 되었다. 놀만의 우정과 사랑이 루시아의 마음속에 아버지에 대한 미움을 싹 틔웠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놀만이 두 팔을 벌려 루시아를 끌어안았다.

“루시아. 넌 나이에 비해 너무 어른스러워. 인생은 짧단다.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아도 다 못 해. 다른 사람을 해치는 일만 아니면 무엇도 참지 마. 인생 선배의 조언이야.”

루시아는 아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어쩌면 오히려 루시아가 놀만의 인생 선배일 수 있었다. 루시아도 두 팔을 벌려 놀만을 마주 안았다. 마른 체형의 놀만의 품은 생각했던 것보다 포근했다. 이번 삶은 꿈속보다 더 행복한 것은 틀림없었다. 놀만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그녀의 재생(再生)은 성공했다.

궁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한 남자가 자연스럽게 앞을 가로막았다. 흑갈색 재킷을 입은 젊은 남자는 꾸벅 루시아에게 고개를 숙이고 하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루시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받아서 열었다.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봉투를 열어 바로 보이는 면에 포효하는 흑사자 문양이 있었다.

그라면 지금쯤 아마 그녀에 대한 모든 것을 조사했을 것이다. 루시아가 외출한 것을 알고 기다리고 있는 것 정도는 놀랍지 않았다.

“모시러 왔습니다.”

차가워 보이는 암청색 눈동자를 지닌 남자를 루시아는 꿈 덕분에 기억하고 있었다.

‘파비안.’

그는 타란 공작의 보좌관이었다. 타란 공작은 권력의 중심에 있던 것치고는 교류하는 귀족들이 많지 않았고, 측근들도 제한적이었으며 곁에 둔 자는 중간에 잘라내는 일이 없었다. 파비안은 타란 공작의 사람 중에서 로이 크로틴 다음으로 유명했다.

타란 공작의 모든 일정을 관리하는 최측근 비서이자 보좌관으로, 타란 공작이 어느 파티에 참석할지 초대장을 걸러내는 일은 모두 파비안의 손에 달렸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래서 귀족도 아닌 파비안 앞에서 콧대 높은 귀족들이 설설 기었다.

“지금… 말인가요?”

“주인께서 일전의 제안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하십니다. 거절하시면 그냥 돌아가겠습니다.”

루시아는 흘끔 시선을 돌려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마차를 확인했다. 마차는 창문조차 없었고, 공작가 소속을 나타내는 표시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 마차를 타고 루시아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려도 그 일이 타란 공작가와 관련되었다는 흔적은 전혀 남지 않을 것이다.

‘철저하구나. 어째 좀 무서운데.’

루시아는 두말없이 마차에 올라탔다. 루시아를 태운 마차가 출발해서 그리 오래 달리지 않고 멈추었다. 바깥에서 문이 열렸다. 밖으로 나온 루시아는 이곳이 타란 공작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난번 한 번 왔을 뿐이지만 부분부분 눈에 익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파비안과 똑 닮은 암청색 눈동자를 지닌 남자의 안내를 따라 루시아는 순순히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루시아가 응접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파비안은 주인의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모셔왔습니다.”

“혼자인가?”

“예.”

“순순히 와?”

“예.”

휴고는 픽 웃었다. 하여간 재미있다니까. 애초에 혼자 공작저를 찾아왔을 때부터도 범상치는 않았지만 오늘 그녀가 타란 공작저에 오는 사실을 누구도 모를 터였다. 무슨 일을 당할 줄 알고 겁도 없이.

턱을 괸 휴고의 손가락이 책상을 두드렸다. 그녀와의 결혼에 흥미가 가긴 했지만 그는 지금 결혼에 급하지 않았다. 그녀에 대한 철저한 조사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의문이 아직 남았다. 대단히 의심스럽지는 않아도 신뢰할 수는 없었다. 그 점이 큰 문제가 되는 건 아니었다. 어차피 그는 아무도 절대적으로 믿지 않는다.

언젠가 해야 할 결혼, 지금 하나 나중에 하나 누구와 하나 마찬가지이긴 했다. 그래서 휴고는 동전 던지기를 해보았다. 마차를 보내 그녀가 그걸 타고 오면 앞면이고, 오지 않으면 뒷면이다. 그는 동전의 앞면을 좋아했다. 자신의 인생 중대사를 그렇게 단순히 결정했다.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루시아는 그녀를 응접실까지 안내한 남자가 내어주는 차와 과자를 맛보고 있었다. 차는 더할 수 없이 향긋했고 과자는 대단히 맛있었다. 루시아는 이 두 가지만으로도 타란 공작가에서 평생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솜씨가 좋으시네요. 지금껏 먹어본 중에서 최고예요.”

남자는 루시아의 찬사에 잠시의 침묵 후에 답했다.

“입맛에 맞으신다니 다행입니다.”

내어준 과자를 벌써 반이나 비우며 즐거워하는 루시아를 보며 집사 제롬은 특이한 아가씨라고 판단했다. 제법 많은 손님을 이곳에서 맞이해 봤지만 이렇게 긴장감 없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대부분 타란 공작을 만나기에 앞서서 찻잔에도 거의 손대지 못할 정도로 얼어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공주라는 것을 알았다면 더 크게 놀랐을 것이다.

응접실 문이 열리자 루시아는 과자를 입에 가득 문 채 굳어버렸다. 안으로 들어오는 타란 공작을 확인하며 벌떡 일어났다. 그는 여전히 무심한 표정으로 루시아를 짧게 살피고는 그녀 앞에 마주앉았다. 그가 손짓하자 제롬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 넓은 응접실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

“앉아요.”

루시아는 화들짝 놀라며 털썩 앉았다. 그녀 입안에는 볼이 부풀도록 과자가 가득했다. 뱉을 수는 없고 재빨리 부지런히 씹어 넘겼다. 목이 막혀서 차를 들이켰다. 그가 아무 말 없이 기다려주는 것이 더 창피해서 그녀 얼굴은 발갛게 물들었다.

과자를 다 삼킬 때쯤 그가 커다란 봉투를 테이블에 올려 그녀 쪽으로 밀었다. 열어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한다. 봉투를 열어 안에 든 문서를 꺼냈다. 부끄러워 안절부절못하던 그녀는 순식간에 표정을 가라앉히고 진지하게 읽기 시작했다.

‘열여덟 살이라 했던가.’

그녀는 나이에 맞게 어리게 보이다가도 때로는 놀랍도록 차분했다. 본디 왕족이나 귀족은 나이보다 조숙하지만 그녀는 그런 조숙함과는 뭔가 달랐다.

휴고는 처음으로 마주 앉은 여자를 살피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단지 사람을 구별하기 위한 특징을 잡기 위해 머리카락 색깔, 대강의 생김새와 분위기에 포인트를 잡았다면 이번에는 그야말로 여자로서 그녀의 모습을 찬찬히 분석했다.

못난 외모는 아니지만 그의 심미안에는 한참 못 미치는 외모의 여자. 그나마 눈동자 색이 상당히 독특했다. 얼핏 보면 금색으로 보이지만 그보다는 투명한 것이, 마치 호박(보석) 같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외모도 몸매도 그를 전혀 자극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래서 오히려 아내감으로는 적격인지도 모르겠다.

봉투 안에 든 것은 두 장의 서류였다. 친권 포기서, 입적 동의서. 여자 일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서류들이다. 여자들은 대개 법에 무지하지만 이것에 대해서는 자라면서 철저하게 교육받았다. 이혼 합의서까지 포함해서 절대로 함부로 서명하지 말아야 할 세 가지. 가장 강력하고, 거의 유일한 여자들의 힘이었다.

“공주님과 결혼하는 조건은 그 두 장의 서류에 서명하는 것입니다.”

“…그게 다인가요? 제가 지난번 말씀드린 건…….”

“그중 문서화할 수 있는 조건은 하나도 없습니다.”

“정말요? 사생활의 자유가 필요 없으세요? 제가 전하께 사랑한다고 매달려도 괜찮아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뭘 모르는 아이처럼 묻는 그녀를 보며 그는 몹시 피로함을 느꼈다. 그는 말장난이나 말꼬리 잡고 늘어지는 건 아주 질색이었다. 속을 떠보는 짓도 아주 싫어한다. 그는 얕은수에 넘어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럼 그 두 가지도 추가하지요. 문서화하지 않는 조건으로.”

그의 기대와 달리 그녀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에 서명하려고 펜을 들자 오히려 그가 당황했다.

“잠시만.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서명하라고 하시기에…….”

“그전에, 제 조건을 말씀드렸으니 공주님도 바라는 것이 있을 것 아닙니까?”

“저도 조건을 걸어도 되는 거예요?”

“당연합니다. 일방에만 유리한 계약은 애초에 성립할 수 없습니다.”

그는 계약을 하려는 것이지 사기를 치려는 것이 아니었다. 루시아는 고민에 빠졌다.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냥 루시아의 목적은 그와 결혼하는 것 자체다. 근데 준다고 하는데 필요 없다고 하기에는 뭔가 아까웠다.

“시간이 필요합니까? 참고로, 오늘이 아니면 계약은 없습니다.”

“왜요?”

“파생되는 결과가 불확실하고 변수가 많습니다.”

다시 날 잡아 공주를 데려오고, 그의 일정을 조정해야 하고. 한마디로 말해서 귀찮았다. 그녀와 결혼하기로 한 결정은 작은 변덕이었다. 내일은 마음이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다.

“하나 여쭈어도 될까요? 여자의 사랑이 왜 싫으세요?”

그가 빤히 쳐다보자 루시아는 혹시 그의 상처라도 건드린 건가 싶어서 그의 눈치를 살폈다.

“제가… 답변할 수 없는 질문을 드린 건가요?”

“그런 걸 묻는 여자는 처음이라 좀 신기했을 뿐입니다. 싫어하지 않습니다. 다만, 여자의 사랑은 반드시 보답받기를 원하더군요. 난 답해 줄 수 없으니 줄 생각도 하지 말라는 겁니다.”

상처는 무슨. 그냥 이 남자는 뼛속부터 이기적이었다. 즉 보답을 바라지 않는다면 일방적으로 사랑만 주는 건 사양하지 않겠다는 말 아닌가. 본인이 사랑으로 피눈물을 흘려봐야 할 텐데 말이지.

유감스럽게도 그럴 가능성은 그다지 없을 것 같다. 그의 사고방식이 바뀔 가능성도 없는 것 같고. 그는 지나치게 많은 것을 가져서 아쉬운 것이 없는 남자였다.

“생각났어요.”

“봉투 안에 즉시 작성이 가능한 계약서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

“아니에요. 전 문서는 필요 없어요. 전하께서 공작가의 명예를 걸고 구두로 약속해 주시는 걸로 충분해요.”

그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공작가 명예라. 문서보다 더 무섭군요. 뭡니까?”

“두 가지예요. 첫째, 신체적, 언어적으로 제게 폭력은 없을 거라고 약속해 주세요. 절대 전하를 모욕하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꿈속의 기억 때문인지 루시아는 아주 최소한의 안전 장치를 만들어두고 싶었다.

말없이 루시아를 바라보는 그의 기세가 자못 사나워졌다. 이 여자는 자신을 여자에 대한 욕이나 폭행을 할 수 있는 남자로 취급하고 있었다. 좀 언짢기는 하지만 모욕할 의도는 아니라는 그녀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계약 조건으로 치기에는 대단히 간단하기 때문이었다.

“둘째는?”

“둘째는……. 전 최선을 다할 거예요. 하지만 사람 마음은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전하께서는 될 거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제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 제게 장미꽃을 보내주세요.”

도무지… 이 여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휴고는 지난번에 그녀에게 말했듯이 정말 저 머리통을 열어보고 싶었다. 그녀가 다른 사람과 계약을 해본 사실이 없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겠다.

이건 엄연히 서로의 이득을 교환하는 계약이었다. 그는 이 자리에 앉기 전까지 자신에게 유리한 계약을 맺을 자신이 있었다. 지금까지 늘 그래왔듯. 그리고 이건 그에게 유리한 계약이었다. 그러나 그의 교섭 능력 덕분이 아니라 순전히 상대방의 어리석음 때문이었다.

계약 내용을 파악 못 해서 불리한 계약을 맺는 건 순전히 본인 탓이었다. 상대방은 조언해 줄 필요 없고, 하지 않아도 도의적 책임만 있을 뿐이었다. 도의적 책임 따위는 책임이 아니다. 그는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도 그에게 양심이라는 것이 밑바닥 어딘가 조금은 남아있었나 보다. 그는 이 어리석은 계약자를 위한 조언을 해주기로 했다.

“좀 더 현실적인 조건을 말씀하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공주님이 서명할 그 서류들의 가치를 잘 모르시는군요.”

남자가 아내에게 입적 동의서나 친권 포기서를 받으려면 어마어마한 재물을 대가로 지급해야 했다.

“알아요. 그건 엄청나게 비싸다는 말씀이시지요?”

“…그렇습니다.”

“어차피 공작부인으로 있는 동안 의식주 걱정은 없잖아요. 그 외에 따로 재물은 필요하지 않아요.”

의식주라는 단어가 공주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처음 조건은… 그렇다 칩시다. 두 번째 조건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저한테는 의미가 있어요. 살다보면요. 눈에 보이는 것보다 그렇지 않은 것이 훨씬 중요할 때가 많아요. 그렇다고 제가 물질적인, 그러니까 돈을 우습게 보는 건 아니에요. 돈, 중요해요. 필요하죠. 없으면 아주 비참하거든요. 근데 어느 정도만 있으면 조금 더 많은 것과 별 차이 없어요.”

그가 헛웃음을 흘렸다.

“인생 다 살아본 사람 같은 말이로군요. 공주님 나이와 경험으로 추측건대 그럴 리는 없으니 어디서 개똥철학을 주워들으신 겁니까?”

루시아는 ‘인생 다 살아본 사람’이라는 말에 순간적으로 뜨끔했다.

“개똥철학이라 하셔도 좋아요. 아무튼, 제 조건은 말씀드렸어요. 무리한 것을 요구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무리한 조건은커녕 너무 터무니없이 간단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압도적으로 그에게 유리한 계약이었다.

“…좋습니다. 공주님의 조건 이해했고, 받아들이겠습니다.”

긴장하며 숨죽이고 있던 루시아가 후우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눈앞의 서류 두 장에 즉시 서명하고 그에게 되돌려 주었다. 그는 서류를 간단히 확인하고 챙겼다.

“이걸로 약혼은 된 겁니다. 공증이 필요하면…….”

“아니요. 필요 없어요. 음, 네. 약혼된 것으로 알겠습니다.”

‘약혼’이라고 말하니 뭔가 굉장히 거창했다. 루시아는 좀 기분이 이상했다.

‘그러니까… 난 이제… 휴고 타란 공작의 약혼녀가 된 거구나.’

아직 결혼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이 약혼을 깨뜨릴 것 같지 않았다. 굉장히 희박한 확률을 뚫고 그녀의 도박은 성공했다. 그녀의 감격은 표정으로 드러났다. 그걸 보며 휴고는 ‘명예에 집착하는 타입인가.’라고 생각했다.

“해가 지기 전에 돌아가야겠군. 외박 허가를 받아 외출한 건 아니었지?”

기분 탓인가? 왜 그의 말투가…….

“외출패를 들고 시녀인 척 외출이라. 그런 깜찍한 짓은 오늘 이후론 다시는 하지 마.”

…기분 탓이 아니었다.

“왜 갑자기…….”

‘반말이세요?’ 너무 직설적인가. 그럼 ‘무례하시죠?’ 할 말을 고르고 있는데 그는 그녀의 불만이 뭔지 빤히 안다는 듯 소파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난 내 여자한테 이렇습니다, 저렇습니다. 안 해.”

루시아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제가 언제부터 전하의 여…자가 되었나요?”

“약혼이 성사된 순간부터.”

“결혼한 건 아니잖아요! 결혼할지 안 할지도 아직 모르는 거고!”

“약혼의 뜻이 뭔지 모르나? 타란의 전통에 이혼은 없고, 약혼 파기도 없어.”

가신들이 들었다면 타란 공작가에 언제부터 그런 전통이 있었느냐 오히려 되물을 것이다. 그가 말을 한 지금부터 이제 타란의 전통이었다.

“그…그렇다 쳐도. 약혼녀한테 이렇습니다, 저렇습니다, 왜 못 하는데요? 그것도 타란의 전통인가요?”

“나는 안 해.”

“…….”

정말 도무지 이 남자를 모르겠다. 처음에는 무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사람 마음을 갖고 노는 한량인 줄 알았다. 그다음에 만났을 때는 상대에 대한 기본적 예의는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의 편견과 달리 뜻밖에 건실할지 모른다고도 생각했다. 오늘은 계약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굉장히 합리적이고 감정보다는 이성으로 작동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모르겠다.

“외출패 들고 외출 금지. 대답 안 하나?”

“…그래도 나가겠다면. 어쩌실 건데요?”

“궁금하면 해보든지.”

“…….”

그래. 최소한 첫인상만큼은 틀리지 않았다. 협박이 생활이다. 이 남자 뭘 믿고 결혼 같은 걸 생각했지? 조금 전의 감격은 이제 불안으로 바뀌었다. 대박을 친 건지, 쪽박을 찬 건지 아직 도박 결과가 감이 안 잡혔다.

“…그렇게 갑자기는… 한 사람만 한 번만 만나면 안 될까요?”

그의 경고를 무시하는 것보다는 허락을 구하는 편이 현명하다고 루시아는 판단했다.

“만나면. 뭐라고 할 생각이지? 그 여류 작가는 당신이 공주라는 사실을 알지도 못하는 것 같은데.”

루시아는 두 번 놀랐다. 이미 그가 놀만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사실과 그의 입에서 너무 자연스럽게 나온 ‘당신’이라는 호칭 때문에.

“그래도… 마지막 인사는 하고 싶어요.”

“평생 보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야. 약혼은 비공개 사항이고, 나는 혹시 모를 구설수를 우려하고 싶지 않아.”

“그럼 나중에 결혼하고 나서는 괜찮다는 말씀이세요?”

루시아가 눈을 반짝이며 반색하자 그가 움찔했다.

“…그래. 나중에는. 하지만 그때도 오늘 계약에 대해 말을 흘리는 건 안 돼.”

“저도 당연히 그럴 생각은 없어요. 전하께서는 생각보다 이해심이 많으시군요.”

“…지난번에는 난잡한 놈을 만들더니 이번에는 이해심인가? 도대체 당신 머릿속 나는 얼마나 형편없지?”

“…죄송해요.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휴고는 우물쭈물하는 루시아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를 보며 줄곧 느껴온 위화감이 뭔지 알 것 같다. 대부분 사람들은 그를 무서워하거나 움츠러든다. 여자들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교제했던 여자들도 겉으로는 교태를 부리며 웃어도 이면에 항상 그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를 상당히 편하게 대했다.

아직은 모르는 일이었다. 아직 그를 모르기 때문일 수 있으니까. 아마 그녀는 그에 대한 소문을 제대로 들어보지 못한 것 같다. 떠도는 소문의 일부만 알아도 당장 그를 보는 시선이 바뀔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괴물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그 소문을 부정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 * *

궁으로 돌아와 닷새 정도 지났을 때 루시아는 엄청난 사실을 깨달았다.

‘결혼이 반년 후에 있을지 1년 후에 있을지 모르잖아. 그럼 그동안 놀만과 연락이 완전히 끊기면… 걱정 많이 할 텐데.’

그러다 생각난 해결책이 편지였다.

‘그에게 말해서 편지를 보낼 수 있도록 해야겠어. 내용을 다 확인해도 좋다고 하면 그도 허락해 줄지 몰라.’

―놀만. 이렇게 서신으로 작별 인사를 하게 되어 미안해요. 부디 날 걱정하지 마요. 나는 아주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답니다. 중요한 일로 잠시 연락할 수 없겠지만 날 찾지 말고 기다려줘요.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그리 오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해요. 우리는 평생을 함께할 우정을 나누었고, 그건 앞으로도 영원할 거예요.

밤낮이 바뀐 생활로 글을 쓰는 놀만의 건강이 걱정되는군요. 조금은 건강에 조심하기를 바라요.

영원한 우정을 담아.

만에 하나 편지를 놀만이 아닌 다른 사람이 읽게 되더라도 어떤 정보도 얻을 수 없게 중요한 내용은 하나도 넣지 않았다. 놀만은 루시아의 필체를 알고 있으니까 이 편지를 받으면 서로 오래 연락이 되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안심할 것이다.

편지 작성을 마치고 문득 창밖으로 하늘을 보자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빨래나 해야겠다.”

루시아는 오전 내내 땀에 젖을 정도로 열심히 몸을 움직였다. 침대 시트를 싹 걷어내고 커튼도 모두 빼냈다. 별궁 앞뜰에 커다란 나무통 몇 개를 가져다 물을 채우고 비눗물을 넣어 빨랫감을 넣고 밟아댔다. 한참 노동에 빠졌더니 아무 생각이 안 들고 마음이 후련해졌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루시아는 열심히 빨래를 밟았다.

“여기서 일하는 아이냐?”

낯선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 루시아는 고개를 돌렸다. 복식을 보니 여관이었다. 노동 시녀와 달리 여관은 급수에 따라 색깔의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인 복색 형태가 통일되어 있었다.

‘여관이 여긴 무슨 일이지.’

루시아가 말똥말똥 바라보기만 하자 여관이 엄한 목소리로 추궁했다.

“어찌 대답이 없느냐. 보아하니 여기서 일하는 아이 같은데 처음 보는구나. 공주님께서는 안에 들어 계시느냐?”

‘날 찾아……? 왜? 그보다 이 상황에서 뭐라고 해.’

공주 비비안 얼굴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 지금 이 꼴로는 공주라고 해도 믿어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어허. 어서 답하지 못할까. 혹여 말을 하지 못하느냐? 공주님을 뵙고자 하는 귀빈을 모시고 왔다.”

‘귀빈? 날 찾아온 손님이라고?’

별궁에 손님이 찾아온 건 처음이었다.

“요즘 레이디 교양에 세탁일도 포함되는 줄은 몰랐습니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서늘한 저음. 들려올 리 없는 남자의 목소리에 루시아는 그대로 굳었다. 끼기기긱 소리가 날 것처럼 뻣뻣하게 고개를 돌리자 도무지 여기 있을 수 없는 사람이 서있었다. 흑발에 붉은 눈. 그의 머리 색깔과 어울리는 푸른색 끝단을 덧댄 검은 코트를 걸친 그가 특유의 표정 없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루시아는 멍하게 넋을 놓았다.

“시녀가 공주 얼굴도 모르다니 형편없군. 그런 괴상한 취미 활동을 하니까 그런 겁니다. 공주님.”

상황을 파악한, 조금 전까지 호통을 치던 여관과 아마 함께 온 것으로 보이는 다른 여관들의 얼굴이 흑색으로 썩어 들어갔다. 그리고 그 얼굴이 바로 자신의 얼굴색일 거라고, 루시아는 생각했다.

“아… 안녕하……. 어쩐… 일이신지……?”

“우선 거기서 나오고 이야기합시다.”

루시아는 화들짝 놀라 나무통 안에서 서둘러 나오려다가 발이 미끄러져 그대로 철퍼덕 주저앉고 말았다. 그렇게 볼썽사납게 넘어진 건 아니고 아프지도 않았지만 무지막지하게 창피했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조심스레 시선을 들자 그는 팔짱을 끼고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표정이 없었지만 루시아는 어쩐지 그가 무척 한심하게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그가 갑자기 성큼 다가오자 루시아는 그의 존재감에 압도되어 바싹 얼어버렸다. 나무통 옆으로 다가온 그가 손을 내밀었다. 그걸 멍하게 바라보다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목이 꺾이도록 고개를 들어야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장신인 그가 더 거인처럼 느껴졌다. 큰 키에 체격을 가진 그가 전혀 둔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신기했다.

얼른 안 잡고 뭐 하느냐고 호통 치는 것처럼 그가 눈썹을 찌푸리자 루시아는 얼결에 냉큼 손을 내밀었다. 커다란 손이었다. 그의 손에 잡힌 제 손을 보자 마치 어른 손에 잡힌 아이 손 같았다. 그가 손을 잡아 힘을 주자 루시아는 단번에 휙 끌려 올라갔다.

나무통을 나오는 루시아는 맨발이었다. 그걸 가만히 보고 있는 그의 시선에 루시아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정말 창피해서 귀가 화끈거렸다.

“으앗!”

휙 몸이 들리자 루시아는 깜짝 놀랐다.

“비눗물이 묻어요!”

그의 값비싼 코트를 더럽히는 것이 두려워 소리쳤으나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루시아를 안은 채 별궁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루시아는 버둥거리지 않고 얌전히 그에게 몸을 맡겼다. 하지만 울상을 지으며 시선은 못 드는 그녀를 보면서 휴고의 입술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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