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시아-7화 (8/77)

7장 초야 (1)

버진로드도, 축하를 보내는 하객도, 축복을 빌어주는 사제도 없었다. 테이블을 두고 마주 앉아 휴고 타란과 비비안 헤세는 혼인 증서에 서명했다.

지난번에 그가 준 서류에 서명할 때는 ‘헤세’는 모두 정자로 쓰고 ‘비비안’은 머리글자만 썼다. 흔한 서명 방식이었다. 그러나 혼인 증서에는 이름과 성을 모두 또박또박 정자로 쓰고, 그 아래에 이름을 머리글자만 쓰는 방식까지 총 두 가지 서명을 해야 했다.

비비안. 그녀의 이름이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메튼 백작과 5년 남짓 결혼 생활이 파탄 난 이후부터 루시아로 살았다. 그러나 이제는 앞으로 죽을 때까지 비비안으로 살아야 했다.

그녀는 비비안이 자신의 이름이라 생각한 적 없었다. 그 이름으로 살 때는 괴롭고 고통스러웠다. 루시아와 비비안은 마치 다른 인물 같았다. 혼인 증서에 서명해 그의 아내가 된 사람이 정말 자신이 맞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비비안이라는 두꺼운 껍데기가 결혼증서로 단단히 붙잡힌 기분은 답답하지만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한편으로 언젠가 껍데기를 부수고 나갈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하면 숨이 트이지만 밑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불안했다. 루시아는 자신의 기분을 도저히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었다.

처음 보는 중년 남자 둘이 증인으로 입회하는 자리에서 간단한 절차만으로 루시아는 타란 공작부인이 되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루시아는 결혼식에 대한 미련은 없었지만 결혼식을 마무리하는 과정인 맹세의 입맞춤까지 생략된 것은 좀 아쉬웠다. 그는 딱 한 번 키스한 이후 가벼운 접촉도 하지 않았다. 안 보는 척 눈만 살짝 돌려 그의 입술에 시선을 고정했다.

일자로 다물어진 입술에서는 그의 고집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 적당한 두께의 저 입술이 루시아 입술에 닿았을 때 의외로 부드러웠다. 강한 흡입력으로 루시아 입술을 빨아들이며 입안으로 침입했던 그의 혀가…….

“내일 오전 중으로 북부로 출발할 예정이야.”

“네… 네!”

갑자기 그의 입술이 열리자 루시아는 화들짝 놀랐다. 그가 좀 의아하게 보는 것 같아서 루시아는 얼른 시선을 딴 데로 돌렸다. 혹시 얼굴이 붉어졌을까 봐 걱정이었다.

‘아우, 미쳤나 봐. 너 뭐 하니 진짜.’

“수도에 머물고 싶으면 그렇게 해.”

조금 뛰던 가슴에서 파시식 소리 내며 바람 같은 것이 빠져나갔다. 혼인 증서에 서명한 잉크가 마르지도 않았는데 그는 별거를 대수롭지 않게 거론했다.

자신을 바라보던 그의 눈빛에 여자에 대한 흥미는 단 한 점도 비치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애정이 넘치는 결혼 생활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조금은 씁쓸했다.

가슴 안쪽이 지끈 아팠다. 그는 마치 결혼이라는 울타리로 두 사람이 묶일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선언하는 것 같았다. 루시아는 아주 조금이라도 품었던 어리석은 아쉬움조차 모두 날려버렸다.

“…함께 가겠어요. 하지만 전하께서 제가 수도에 머물기를 바라면 그렇게 할게요.”

눈을 아래로 내리뜨고 감정이 섞이지 않은 것처럼 들리기를 바라며 조용히 답했다. 그의 말에 반발해서가 아니었다. 반드시 수도에 머물러야 하는 당위성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의 시선이 온몸으로 꽂히는 것을 느꼈다.

루시아는 가능한 순종적으로 몸을 사려 지낼 생각이었다. 그가 여자에게 폭력을 휘두를 남자로 보이지는 않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남자의 폭력에 여자가 얼마나 무력한지 그녀는 경험한 적이 있었다.

“수도와 달리 즐길 거리는 없어. 각오해야 할 거야.”

“괜찮아요.”

‘어차피 수도에서도 즐기며 살아본 적 없는걸.’

마차가 저택에 도착할 때까지 더는 대화가 없었다. 마차에서 내려서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그는 집무실로 휙 들어가 버렸다. 홀로 남겨진 루시아를 챙긴 사람은 집사 제롬이었다.

“마님께 인사 올립니다. 집사로서 공작 전하를 모시고 있습니다. 제롬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나이는 대략 서른 남짓. 암청색 눈동자에 단정한 외모와 인상을 지닌 남자는 구면이었다. 공작이 보낸 마차를 타고 저(邸)를 방문했을 때 루시아에게 차를 대접했었다. 집사였구나. 공작가 저택의 집사라기엔 지나치게 젊었다.

“반가워요. 지난번 차는 정말 맛있었어요, 제롬.”

제롬은 묘한 눈으로 루시아를 보았으나 빠르게 그런 기색은 사라지고 여상한 표정으로 사근사근 답했다.

“감사합니다. 편히 말씀하셔도 됩니다, 마님.”

“이대로가 편해요. 아, 혹시 말투 같은 것이 공작가 규칙에 어울리지 않는다면 고칠게요.”

“아닙니다. 마님께서 곧 타란의 규칙입니다. 식사를 먼저 하시겠습니까, 휴식을 취하시겠습니까? 저택 안내를 도와드릴까요?”

뭔가 방금 굉장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조금 전부터 시작된 두통으로 깊이 생각할 수가 없었다. 루시아는 지금 가장 원하는 것을 말했다.

“우선 쉬고 싶군요.”

“침실로 모시겠습니다.”

제롬은 침실로 루시아를 안내한 후 중년 여자 둘을 소개했다.

“불편하신 것 없도록 마님 시중을 맡을 사람들입니다.”

제롬은 그들의 이름과 경력을 간단히 소개하고 물러갔다. 하녀들의 시중을 받아 옷을 벗고 얇은 속치마만 입은 채 루시아는 침대로 직행해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잠에 빠져들었다.

단잠에 푹 빠졌다가 깨우는 목소리에 부스스 눈을 떴다. 다행히 머리는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마님. 저녁 식사는 드시고 주무시는 것이 어떠하신지요.”

하녀가 곁에서 아주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루시아를 깨우고 있었다. 아직 주인의 성정을 모르니 잠을 깨워 혹시 불벼락 맞을까 지극히 긴장하는 표정이었다.

“음……. 내가 얼마나 오래 잠들었나?”

“족히 여섯 시간은 되었습니다.”

“…오래 잤네.”

“저녁 식사를 준비 중입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드시었나?”

“집무실에서 간단히 하실 것 같습니다. 공무가 많으시면 종종 그러십니다.”

결론은 루시아 혼자 먹으라는 소리였다. 루시아는 결혼한 당일 남편 없이 홀로 앉아 지금껏 맛본 적 없는 진미로 차려진 저녁 성찬을 마쳤다. 조금은 서운했다. 밥 정도 같이 먹어주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않은가. 한집에 있으면서.

잠시 시무룩해 있었지만 빨리 털어내려고 노력했다.

‘기대하지 마. 기대하지 말자.’

이런 사소한 일로 자꾸 실망하다 보면 결혼 생활은 지옥이 될 것이다.

‘나는 평생 걱정 없는 평온한 보금자리를 얻은 거야. 그놈에게서도 벗어났어.’

원래부터 원한 것은 그것이었다. 그런데 사람 욕심이란 참 끝이 없었다. 이제 막 결혼했으면서 벌써 결혼 생활에 대한 기대를 자기도 모르게 품고 있었다.

루시아는 시중을 들며 왔다 갔다 하는 하녀들을 눈으로 좇다가 의문이 생겼다.

“제롬, 내 시중을 맡은 하녀들 말이에요.”

“예. 혹여 무슨 실수라도 있었습니까?”

“그건 아니에요. 보니까 그네들이 하녀들 중에서 나이는 물론 경력도 높은 편인 것 같은데 직접 내 잔시중을 맡긴 이유가 있나요?”

루시아는 꿈속에서 한동안 귀족의 하녀로 일한 적 있었다. 그래서 하녀의 경력이나 나이 등에 따라서 하는 일을 잘 아는 편이었다.

“미리 설명해 드리지 않아 죄송합니다. 마님께서는 오늘만 이곳에서 주무시고 내일은 영지로 출발하실 겁니다. 마님의 시중을 드는 하녀들은 이동하시는 동안 마님을 모실 이들입니다. 영지에서 지내시는 동안에는 마님을 모시는 일은 다른 하녀가 맡게 될 겁니다.”

“아, 이곳의 다른 하녀들은 수도에 기반이 있어서 떠날 수가 없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그럼 나와 함께 간 하녀들은 영지에서 무슨 일을 하게 되지요?”

“그들 나이와 경력에 맞는 일을 맡게 될 것입니다.”

“이해했어요. 설명 고마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제롬은 이 일로 루시아를 ‘야무지게 안살림을 맡아 하실 것 같다.’고 평가했다. 루시아가 만약 그 속내를 알았다면 그런 거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을 것이다.

저택 내부를 안내받아 눈에 익히며 시간을 보냈다. 워낙 넓어서 다 들여다보지도 못했다. 저택 자체도 컸지만 저택을 둘러싼 공간은 몇 배나 되도록 널찍했다. 수도 한가운데 있는 집이라 하기에는 놀리는 공간이 지나치게 많았다.

“여긴 원래 전통적으로 타란 공작가의 저택이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원래 타란 공작가는 수도에 거처가 없었습니다. 수년 전에 마련한 것입니다.”

“그래요? 대체 이전에 이곳의 주인은 누구였나요? 이렇게 넓은 저택이며 뜰이며. 엄청난 고위 귀족이자 부호였던 모양이군요.”

“주인은 여럿이었습니다. 한 10여 채 정도 구매했을 겁니다. 이 저택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허물었지요.”

“…아.”

루시아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는 꽤, 어쩌면 훨씬 더 부자였다.

욕조는 넓고 고급스러웠다. 사기로 빚은 흔한 욕조가 아니라 아예 바닥에 벽을 쌓아 고정해 만들었다. 하녀들이 일일이 물을 가져다 부을 필요도 없이 관을 연결해서 어디선가 불을 지피면 언제든 데운 물을 꼭지를 열어 쓸 수 있었다.

이런 시설이 있다더라 말은 들어봤지만 직접 본 건 처음이었다. 물을 긷는 일은 고용인 몫이었다. 그들이 아무리 힘들게 물을 데우고 날라도 그게 주인의 수고로 연결되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일부러 많은 돈을 들여 이런 시설을 설치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가 고용인들 수고를 생각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루시아의 생각대로 공작이 시킨 일은 아니었다. 집안 관리를 천직으로 삼고 있는 제롬은 효율성을 중시했다. 집 여기저기를 뜯어고치는 일은 집사 제롬의 거의 유일한 취미라고 할 수 있었다.

목욕을 마친 후 다시 침실로 돌아왔다. 젖은 머리를 말리고 피부를 매끄럽게 한다는 꽃 향유를 발라주는 하녀들의 손이 정성 가득했다. 결혼 첫날밤이라는 특별함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 오늘 밤 여기 오지 않을 텐데.’

루시아는 확신했다. 내일 바로 영지로 떠난다고 했으니 전날인 오늘은 푹 휴식을 취하는 쪽을 택할 것이다. 영지에 내려가고 나서도 그가 과연 침실을 찾을지 알 수 없다. 어차피 자신에게서 자식을 볼 생각이 없을 테니까. 어쩌면 영영 그는 루시아의 침실에 발을 들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미 아들이 있으니까.’

아들의 지위를 단단히 하려고 이런 결혼을 감행할 만큼 소중한 아들이었다. 만약 루시아가 아들을 낳으면 일이 아주 복잡해진다. 혼적에 입적해 적자로 인정받아도 진짜 적실 몸에서 태어난 적자와 지위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였다.

불안을 제거하는 최선은 아예 임신 가능성을 없애는 것이다. 그는 상관없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그냥 하는 말일 것이다.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라는 것도 어차피 증명할 수 없으니 그는 믿지도 않을 테고.

하녀들이 다 물러가고 루시아는 조용해진 침실에서 다시 침대 위에 누웠다. 그러나 그렇게 오래 낮잠을 잤으니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이리저리 뒤척이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차라리 잘됐지 뭐…….’

그를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했다. 그 약속은 그와 거리를 유지할수록 지킬 가능성이 컸다. 그와 짧은 키스를 한 번 했다고 이렇게 콩닥거리는데 그보다 더한 걸 하면 아마……. 루시아는 점점 얼굴이 달아오르자 얼른 두 팔로 마구 공중을 휘저었다. 마치 그녀의 머릿속을 엉크는 것처럼.

‘다른 생각을 하자. 다른 생각… 다른 생각……. 공작부인이 돼서 해야 할 일……. 뭐가 있지……?’

남편을 위해 해야 하는 내조 1순위는 사교 활동이었다. 메튼 백작도 루시아를 그렇게 온갖 파티에 내보내지 못해 난리였다. 그자의 기대만큼 해주지는 못했다. 몸은 몸대로 피곤하고 하는 일 없이 멀뚱히 서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하아……. 사교 활동. 나 그건 자신 없는데…….’

이걸 솔직히 말하지 않은 건 계약 위반일까?

꿈속에서 그의 아내였던 공작부인은 사교 활동을 즐기는 데에는 탁월한 재주가 있었다. 딱 봐도 값비싼 최신 드레스와 보석으로 온몸을 칭칭 감고 도도하게 사교계를 누비고 다녔다. 여자들은 그 곁에 모여들어 낯간지러운 찬사를 쏟아냈다.

‘그러면서 뒤에서는 욕을 했지.’

공작부인은 원래 집안이 별 볼 일 없었다. 사교계에 난데없이 굴러 온 돌덩이였다. 박힌 돌을 자꾸 건드려대니 좋아할 리가 있나. 타고나기를 고아한 귀부인들과 시골 촌뜨기 출신 공작부인에게는 애초부터 공통 화제가 없었다.

물론 대놓고는 누구도 공작부인의 앞에서 싫은 티는 못 냈다. 루시아는 적극적으로 사교 활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성실한 참여로는 독보적이었다. 그래서 대단히 많은 것들을 보고 들었다. 사람들 무리에서 한 걸음 떨어져 객관적인 눈으로 관찰할 기회가 많았다.

공작부인의 화려함은 전혀 부럽지 않았다. 가끔은 발악하는 것처럼 보였다. 초반에는 그러지 않았던 공작부인은 시간이 지날수록 제 위치에 스스로 취해버렸다. 갈수록 턱을 세우고 지위 낮은 자들을 공개적으로 공공연하게 깔아뭉개곤 했다.

메튼 백작부인으로 지내던 시간이 끝나고 한동안 사교계와 먼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귀족가 하녀로 일하기 시작하면서 다시 타란 공작부인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공작부인은 여전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며 더 악명을 쌓았다. 공작부인의 결혼 비화가 알려졌을 때 귀부인들이 그토록 소식을 퍼 나르며 깔깔거린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공작부인은 너무 많은 적을 만들었다.

‘그 후에는…….’

그 후에는 어찌 되었는지 모른다. 하녀 일을 하며 모은 돈으로 작은 집을 한 채 마련하고, 하녀 일을 그만둔 후 조용히 살았다. 시끄럽고 화려한 사교계 생활은 이후에 모르고 지냈다.

아주 가끔. 함께 일하다 친해진, 일하는 곳은 옮겼지만 여전히 하녀로 일하는 친구 비슷한 사람이 찾아와 수다를 늘어놓는 중에 몇 가지 소식을 전하기는 했다. 그중에 타란 공작과 관련된 소식이 있었던가. 그건 가물가물했다.

‘내가… 그와 결혼했어.’

루시아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럼… 원래 공작부인이었던 그 여자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걸 이제야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의 이기심에 놀라고 말았다.

‘어쩔 수 없잖아.’

양심의 가책은 짧았다.

‘남의 사정 같은 걸 봐 주었다가는 이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없어.’

루시아는 못되고 이기적인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또 한 번 놀랐다. 하지만 그걸 고치고 착해지고 싶지 않았다. 착한 사람이 더 다치는 곳이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이라는 걸 아프게 배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잠이 오기는커녕 정신이 더 맑아졌다. 한참을 뒤척이다가 결국 일어나 침실에 불을 밝혔다.

‘침실 구경이나 하자.’

침실 내부의 모든 것은 큼직큼직했다. 침대도 그렇고 소파도 그렇고 가구도 그랬다. 고풍스럽기는 하지만 뭔가 여인의 침실로 쓰기에는 딱딱하고 서늘했다. 오늘만 자고 떠날 예정이 아니라면 여기저기 손대고 싶은 곳이 많았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조화는 있었는데 딱 하나 그것을 망가뜨리는 것이 있었다.

‘대체… 이 그림은 뭘까…….’

침실 빈 벽 한가운데 떡 하니 자리 잡은 이상한 추상화는 뭘 말하는지도 모르겠고, 이 침실에 어울리지도 않았다.

태자 퀘이즈가 보내온 그림 중 하나였다. 휴고는 보자마자 인상을 썼지만 제롬이 우물거리며 어찌할까요, 물었을 때 음울하게 답했다.

‘걸어.’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루시아는 아마 이 그림이 대단히 유명한 작가의 값비싼 작품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루시아의 생각이 아주 틀리지는 않았다. 태자는 자신의 그악스런 취미에 꼭 맞는 귀한 그림을 손수 골라 보내주었다.

‘와인 장이 있네.’

침실 한 벽에 기댄 와인 장은 몇 개 층으로 이루어져 수십 병의 와인이 층별로 반쯤 눕혀 가득 차있었다. 루시아는 투명한 유리문 너머 진열된 와인들을 구경하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여자 침실에 와인 장이 있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노부인의 침실이라면 모를까.

와인에 대해 잘 모르지만 달콤해서 루시아 입맛에 꼭 맞는 값비싼 와인 하나는 기억해 두는 것이 있었다. 꿈속의 기억이다. 그것을 발견하자 루시아는 기뻐하며 유리문 밖에서 폴짝 뛰었다. 꺼낼까 말까 망설이다가 결국 와인을 꺼냈다.

“축배를 드는 거야. 그 정도는 해도 되겠지.”

아무도 축하해 주는 이 없는 결혼이었지만 그녀에게는 그녀 자신을 축하할 자격이 있었다.

와인 장 옆에는 두 사람 정도가 겨우 앉을 수 있는 작은 테이블이 바로 붙어있었다. 또한 와인 장 안에는 와인 잔은 물론이고 마개를 따는 기구도 비치되어 있었다. 완벽하게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는 상태였다. 루시아는 마개를 따서 조금씩 따르며 허공을 향해 건배를 하고 홀짝홀짝 잔을 비웠다.

“맛있다……. 응? 벌써 없어?”

몇 잔 마시지 않은 것 같은데 어느새 빈 병이었다. 그래도 아쉬워서 입맛을 다시며 일어나다가 어질, 현기증이 돌아 다시 주저앉았다.

“어……. 왜 이러지.”

몇 번 심호흡하고 다시 일어났지만 배 속이 뜨겁고 여전히 주변이 빙빙 돌았다.

“아……. 나… 취했나 봐…….”

루시아는 비틀거리며 간신히 침대로 가서 누웠다. 색색 숨을 몰아쉬다가 곯아떨어졌다. 그러나 술기운을 빌린 잠은 숙면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얼마 못 가서 목이 탈 것 같은 갈증으로 깨어났다.

‘더워……. 목말라…….’

루시아의 현재 몸에 술이 들어간 것이 처음이었다. 마신 와인이 비록 도수가 낮지만 처음 치고는 과음을 했다. 침실 내부는 제법 서늘한데도 몸에 열이 나서 후끈거렸다.

루시아는 이리저리 뒤척거리다가 입고 있던 잠옷을 벗어 내던졌다. 어차피 혼자 있는 침실이었다. 이제 여기는 그녀의 침실이었다.

‘난 성공했어. 그자하고 결혼할 일은 없는 거야. 내 미래를 바꾼 거라고.’

술기운이 그녀의 해방감을 부추겼다. 더 과감하게 속옷까지 다 벗어 던졌다. 그녀의 새하얀 나신이 열이 올라 전체적으로 불그스름했다.

루시아는 침대 시트에 피부가 닿는 시원함이 좋아서 뒹굴뒹굴하다가 일어나 조금씩 비틀거리면서 침실 중앙쯤에 놓인 테이블로 걸어갔다. 물주전자와 유리잔이 은쟁반에 담겨 얌전히 놓여있었다. 유리잔에 물을 따라 벌컥벌컥 들이마시며 타는 갈증을 해소했다.

달칵.

조용한 침실에서 작은 소리는 천둥처럼 들렸다. 반 박자 느린 반응으로 소리 나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이미 침실과 응접실로 이어진 문이 열리고 있었다. 문이 열리며 들어서는 사람을 보자마자 루시아는 물 잔을 입에 가져다 댄 그 상태로 굳어버렸다.

막 목욕을 마치고 가운 차림에 침실로 들어서던 휴고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불청객을 보며 멈칫했다. 숨 막히는 고요함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주 여유롭게 나신의 여자를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훑었다.

몇 시간을 정신없이 일했더니 머리가 조금 멍했는데 단번에 상쾌해지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이 여자는 뭐지, 생각했다가 다음에는 그래, 결혼했었지, 깨닫고 마지막으로 이 여자가 내 아내인가, 결론을 내렸다.

가늘고 긴 목을 따라 동그란 어깨, 부드러워 보이는 젖가슴에 앙증맞게 자리 잡은 선홍빛 유두, 쏙 들어가는 늘씬한 허리에서 둥근 곡선을 만드는 골반. 불을 밝힌 침실이라 그녀의 몸이 구석구석 제대로 보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배꼽 아래 아랫배 아슬아슬한 부분은 테이블 밑으로 가려 보이지 않았다. 한 걸음 옆으로 나오라고 해볼까. 그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파삭.

날카로운 파열음이 고요함을 깨뜨렸다. 얼어붙어 버린 그녀의 손에서 미끄러진 유리잔이 대리석 바닥에서 산산조각 났다. 움찔한 루시아가 시선을 떨어뜨리며 움직이려는 순간 그가 단호하게 명령했다.

“가만히 있어!”

루시아 몸은 그대로 다시 얼어버렸다. 꼼짝하지 못하고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약간 주춤했지만 줄곧 시선을 마주치며 다가오던 그가 인상을 쓰는 것을 보자 또다시 굳었다. 그는 가까이 오자마자 몸을 숙여 루시아의 등과 다리 아래를 받치고 번쩍 안아 들었다.

버적버적.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슬리퍼에 유리 조각이 밟히며 소리를 냈다. 침대까지 고작 몇 걸음의 거리가 영원처럼 길었다.

“다친 곳은?”

낮은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비로소 자신의 등이 보드라운 침대 시트에 닿았음을 깨달았다.

“없…어요.”

루시아는 고개를 내저으면서 재빠르게 그의 손에서 빠져나왔다. 이불을 끌어올려 몸을 가리고 고개를 베개에 푹 박았다. 그의 손이 닿았던 부분이 화끈거리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었다.

이불을 몸에 감고 꾸물거리는 애벌레처럼 그에게서 가능한 한 멀리 침대 끝으로 도망치는 그녀를 그는 흥미롭게 관찰했다.

“알몸 환영을 해놓고 이번엔 순진한 처녀 흉내인가?”

부끄러움과 놀람으로 저 깊이 어디론가 파고들어 가던 그녀의 정신은 그의 목소리에 깔린 조소를 느끼면서 반짝 돌아왔다. 못됐다. 놀라지 않았느냐 묻기는커녕 저런 말투라니. 루시아는 고개를 쏙 빼고 그에게 쏘아붙였다.

“갑자기 들어오셨잖아요!”

“대단히 실례했군. 차후에는 문밖에서 고함을 치도록 하지.”

루시아는 그가 농담을 하는 것인지 조롱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자신의 반응이 과민했다는 것을 깨닫고 머쓱했다. 어쨌든 그는 깨진 유리잔에 다칠까 봐 걱정은 해주었다. 그가 아니었으면 발바닥에 셀 수 없이 많은 유리 조각이 박혔을 것이다.

“…오실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당신을 유혹하려 일부러 옷을 벗고 기다리던 것이 아니다. 루시아는 그 말을 돌려 표현했다.

“내 침실이야. 당연히 주인이 들어오지.”

“…집사가 이곳에서 자라고 했어요. 전하 침실이라고 말해 주지도 않았어요. 부부가 침실을 공유하는 것도 공작가의 전통인가요?”

휴고는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제롬이 마님 침실 준비가 미진해서 어쩌고저쩌고하는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였던 것 같다. 워낙 갑작스러운 결혼이었고, 저택에서는 하루만 묵고 갈 것이라 집사는 마님을 주인의 침실로 안내한 것이다.

제롬은 완벽주의자였다. 준비가 부족한 침실은 그냥 준비가 안 되어있는 것으로 쳤다. 어차피 결혼하셨으니 하루 정도 한 침실 써도 무슨 문제인가 생각한 것이다.

“그런 전통은 없어. 중간에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군.”

그는 자신의 건망증을 아주 쉽게 아랫사람의 실수로 넘겨버렸다.

“그럼… 오해하시지 않는 거죠?”

루시아는 그가 자신을 그렇고 그런 조신하지 못한 여자로 볼까 걱정했지만 그는 애초에 그런 건 신경도 안 쓰고 있었다. 그는 여자를 그런 기준으로 분류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그에게 여자는 두 부류였다. 같이 자고 싶은가, 그렇지 않은가. 헤프건 조신하건 그런 건 그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알몸으로 자는 것이 취미인가?”

그는 단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 그녀의 새로운 모습이 재미있을 뿐이었다. 루시아는 빨갛게 물든 얼굴로 그를 새침하게 노려보았다.

“아니에요. 좀 더워서…….”

도무지 덥다고는 할 수 없는 서늘한 침실 내부의 기온을 고려하면 납득할 수 없는 대답이지만 그의 시선 끝이 무심코 와인 장 쪽에 닿자 그의 입술 끝이 올라갔다.

“술 마셨어?”

“…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곳이 그의 침실이라면 루시아는 주인 허락 없이 와인 장을 뒤져 와인을 꺼내 마신 셈이었다. 아아. 왜 그랬을까. 루시아는 꿈을 꾸고 난 이후 처음으로, 지금이 꿈이면 얼마나 좋을까 간절히 바랐다.

“술에 취해 알몸으로 침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여자라……. 우연이라 하기에는 참 교묘한걸.”

그의 빙글거리는 말투는 루시아의 속을 뒤집었다. 자꾸 툭툭 건드리는 그 때문에 기분이 상했다. 세상 모든 여자가 당신이면 눈이 뒤집혀 달려드는 줄 알아? 루시아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고 이성적으로 발끈했다.

“분명히 말씀드렸어요. 전하 침실이라는 걸 몰랐고 오실 줄도 몰랐다고. 얼마나 많은 미인들이 옷을 벗고 전하 침대로 뛰어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만약 제가 그랬다 해도 아마 그럴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유일한 여자일 텐데요. 오늘 오전 그 서류에 서명한 이후부터 말이죠.”

말을 끝내자마자 루시아는 아차 싶었다. 너무 되바라진 말투로 쏘아붙인 것 같았다. 그가 만약 여자가 자신에게 도전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남성 우월 주의자라면 그가 내보일 반응이 걱정되었다.

메튼 백작 그자와 살 때는 ‘네, 아니요.’ 하는 대답 외의 대화라고는 없었는데. 이 남자하고는 자꾸 말을 섞고 있는 자신이 낯설었다.

그는 반항적인 그녀의 눈을 잠시 바라보다가 낮게 웃었다.

“내가 넘겨짚은 말이 당신을 언짢게 했다면 사과하지. 미안하오.”

“…….”

“무릎이라도 꿇어야 하나?”

“아, 아니에요. 조금 놀라서……. 미안하다는 말은… 해본 적도 없는 분인 줄 알았어요.”

또 시작이었다. 당신이 그려놓은 나는 어떤 자인지 조목조목 항목을 달아 제출하라고 하고 싶었다. 하나씩 손가락으로 짚어 따져가면서, 이건 아니니까 지워,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도대체 당신 머릿속의 나는 어떤 놈이지? 내 소문을 듣고 그러는 건가?”

“소문으로 전하를 재단하지 않았어요. 전 제가 보고 느낀 것으로 전하를 판단했을 뿐이에요. 사과보다는 명령을 내릴 분이라고 생각했어요.”

“면전에서 그런 독설을 듣기는 또 처음이군.”

“독설이라니요! 의견이라고요. 그렇게 매도하지 말아 주세요.”

정색하는 표정이 진지했다.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그녀의 눈이 곧고 진지했기 때문에 터무니없는 제안을 참고 들어주었다. 솔직하게 온 힘을 다해 부딪치는 그녀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우습게도 그 터무니없는 제안을 받아들여 이 상황이 만들어졌지만.

휴고는 별 의미 없이 살짝 몸을 틀었다. 그러자 이불이 들썩할 정도로 크게 그녀가 흠칫했다. 흐음. 그의 눈썹이 스윽 올라가더니 다시 몸을 움직이자 이번에도 이불이 들썩했다.

내가 덮칠까 봐? 맹수 앞에 작은 생물이 달달 떨고 있었다. 배부른 맹수라면 모른 척하겠지만 허기가 들었는지 평소라면 사냥할 가치조차 없는 작은 생물을 보며 그는 입맛을 다셨다. 왠지 유쾌해서 방패처럼 그녀를 둘둘 말고 있는 이부자리를 잡아 확 잡아당겼다.

“꺄악!”

루시아가 짧은 비명을 지르며 널찍한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정신을 차렸을 때 이불은 간데없이 루시아는 알몸이었고, 그가 두 팔로 가두어 내려다보고 있었다. 루시아는 흐읍 호흡을 멈추었다. 빠져나갈 틈 없이 가로막은 그의 팔에 조금이라도 닿을까 봐 손끝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당신이 알몸으로 내 침대에 뛰어들 자격 있는 유일한 여자라면서 왜 내가 올 것이라 생각지 않았다는 거지? 오늘은 신혼 초야인데.”

아마 그는 오늘 밤, 침실이 달랐다면 그녀의 침실을 찾지 않았을 것이고 침실에 들어왔을 때 루시아가 곤히 잠든 상태였으면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그 옆에 누워 그냥 잤을 것이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냥 그럴 마음이 안 드니까. 그녀는 그의 취향과 거리가 멀었다. 그는 육감적인 미인을 좋아했다. 한마디로 동하지가 않았다. 그런데 그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것과 별개로 그녀의 생각이 궁금했다. 그는 그전부터 계속 대체 이 여자가 무슨 생각을 하나, 알고 싶었다.

루시아는 단순한 걸 복잡하게 생각하는 여자답게 생각한 이유가 훨씬 많았다. 애정이 동반된 결혼이 아니고, 자신이 꼭 품어보고 싶을 만큼 대단한 미녀나 글래머도 아니고,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아들 때문이었다.

그는 아내의 임신을 원치 않을 것이다. 아이를 갖지 못한다고 했지만 그가 믿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임신이나 아이 얘기는 꺼내고 싶지 않았다. 어쩐지 그 말을 하면 이대로 그가 미련 없이 일어나 나가버릴 것 같았다. 그가 나가기를 바라지 않았다. 아무리 계약 결혼이지만 결혼해서 초야조차 없다면 너무 비참했다.

“내일… 오전에 바로 영지로 내려간다고 하셔서…….”

거짓말을 한 건 아니지만 중요한 사실을 그에게 상기시키지 않은 사실이 그를 속인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이 마치 그걸 추궁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무방비한 상태로 알몸으로 있다는 사실이 시간이 지날수록 뇌리에 박혀 점점 크기를 더해갔다. 몸에서 후끈후끈 열이 나는 것 같았다. 루시아는 조금씩 움직이며 두 팔을 교차해 가슴을 가렸다. 무의미하지만 수치를 느끼는 여자의 가장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신선한 반응이군.’

덤벼드는 여자들만 상대하다 보니 순진한 대응이 신기하기만 했다. 이 여자는 처녀가 분명했다. 그것도 아주 순진한 처녀. 알몸으로 그의 침실에 고의로 숨어들었다는 의심은 싹 사라졌다. 하지만 다른 의미로 재미가 없어졌다.

처녀는 성가시다. 제대로 즐길 줄 몰라서 재미가 없었다. 그에게 여자와의 정사는 불필요한 욕망의 찌꺼기를 버리는 배출구이자 쾌락을 즐기는 수단이었다. 가능한 경험 많고 능숙한 여자와의 잠자리가 더 즐거운 법이다. 그는 익을 대로 익어 떨어진 과일의 달콤함을 좋아했다.

어쩐다……. 아무래도 그녀는 겁먹은 것 같고. 굳이 싫다는 여자 안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거부하면 안 해.”

“…초야는… 거부할 수 없잖아요.”

초야는 권리이자 의무다. 무려 법의 명문화되어 있다. 하지만 거의 사문화된 법이었다. 아주 오래전 서로 생사를 걸고 싸우는 귀족 가문 간 화합을 강제하기 위한 수단이 두 가문의 결혼이었고, 그때는 그 법이 필요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국가 간 국경선이 고착화되고 영주들 간 영지전은 보기 드문 이벤트가 되었다. 그 법이 폐지되지 않은 건 가끔 적용될 때가 있기 때문이었다. 초야가 없었음을 입증하면 결혼을 무효로 할 수 있는데 결혼하자마자 양쪽 중 누군가 급사했을 때 적용했다. 수년에 한 번 정도 적용될 때가 있다고 들었다.

‘법을 거론하다니. 정말 뭘 모르는 공주님이군.’

“초야가 아니면 거부할 건가?”

“…오늘 하는 거 봐서요.”

심드렁하게 툭 내뱉었던 그는 여자의 반격에 푹, 웃음을 터뜨렸다. 새파란 얼굴로 긴장해서 덜덜 떨고 있는 주제에 제법 맹랑한 소리를 한다. 정말 뭘 몰라서 이러나, 알면서 일부러 이러나.

“이봐, 공주님. 일단 시작하면 중간에 그만두지 않아. 각오는 하고 하는 말이야?”

루시아 눈에 꿈속에서 경험한 초야의 기억이 아른거렸다. 비곗살이 늘어진 메튼 백작은 루시아의 몸을 올라타고 몇 번이고 삽입을 시도했지만 결국 발기가 안 되어 실패했다. 그러자 제 분을 못 이겨 씩씩거리다가 술을 진탕 마시고 뻗어버렸다.

그르렁 그르렁 요란하게 코를 골며 자는 남편이 된 낯선 남자 곁에서 쪼그려 밤새 벌벌 떨었다. 그보다 더 최악일 수는 없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무서울 것도 없었다.

“각오로 하는 게 아니잖아요. 저는 전하와 전쟁을 하려는 게 아니에요.”

잠시 침묵한 그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갑자기 그의 분위기가 급변하고 주변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소름이 오도도 돋고 꼼짝할 수가 없었다. 이 사람 남자구나,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힘으로 당할 수 없는 남자 아래 누워있는 나신의 여자. 도무지 항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상체를 일으킨 그가 목욕 가운을 벗는 것을 보며 루시아는 질끈 눈을 감았다. 허리에 낯선 손이 닿자 후읍 숨을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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