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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아-10화 (11/77)

10장 북부 (1)

휴고가 저택을 떠나고 얼마 후 루시아는 화장실이 가고 싶어서 잠에서 깼다. 무거운 몸을 간신히 일으켜 앉아 줄을 당겨 하녀를 불렀다. 어제 마신 와인 한 병의 후유증으로 위가 약간 쓰렸다. 마치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것처럼 하녀는 금방 달려왔다.

“일어나셨습니까, 마님.”

“화장실 가고 싶은데 좀 도와주게.”

루시아는 하녀의 부축을 받으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발을 바닥에 내딛자 다리 안쪽이 아려서 인상을 썼다.

“많이 편찮으십니까? 의사를 부를까요?”

루시아는 순간적으로 옆에서 부축해 주고 있는 하녀의 표정을 살폈다. 하녀의 말투는 사무적이었지만 그 안에 마치 ‘네가 어디가 아프고 왜 아픈지 알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격지심이었는지 하녀의 표정은 언제나처럼 덤덤했다. 하녀가 나이 지긋한 중년인이라는 사실이 다행이었다. 스물 초반의 어린 하녀였으면 지금 이 상황 자체가 몹시 불편할 것 같았다.

루시아는 하녀들의 생활과 습성을 잘 알고 있었다. 주인 앞에서는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것도, 다양한 감정을 표정에 드러내는 것도 금하도록 교육받지만 그건 주인 앞에서일 뿐, 뒤에서 저들끼리 있을 때는 웃고 떠드는 보통의 사람이었다.

하녀들은 숙식까지 고용주 집에서 해결하기 때문에 행동 반경이 한정되고 시야가 좁았다. 자연히 그들의 관심은 고용주의 가족에게 집중되었다. 주인의 말 한마디, 행동, 소소하게 일어나는 일들은 반복적인 하루를 보내는 하녀들에게 일종의 이벤트였다.

루시아는 하녀로 있을 때 묵묵히 일만 하는 편이었다. 입이 무겁고 성실한 루시아는 마님의 눈에 들어 오래 일한 하녀들을 제치고 파티까지 따라다니는 시중을 들게 되었다. 주인마님을 측근에서 모시게 되자 다른 하녀들이 세모눈을 하고 루시아를 따돌렸다.

루시아가 속살거리는 성격이었다면 마님에게 고자질해서 하녀들을 혼쭐내거나 하녀들을 휘어잡아 알량한 권력을 누릴 수 있었겠지만, 그녀는 그냥 맡은 일만 열심히 했다.

인간의 속성은 그러면 고마워하기는커녕 더 우습게 본다. 그래도 루시아는 그런 일로 상처받지 않았다. 쓸데없이 파르르하는 그들이 한심하기만 했다.

아무튼 루시아는 하녀들과 거의 친해지지 못해서 자기들끼리 깔깔거리는 대화에 끼어들지 못했다. 대충 분위기로 파악하면 별로 고상한 대화는 아니었다. 특히 주인 부부가 한 침실을 쓰고 난 다음 날, 그네들의 수다가 더 생기를 띄었다. 저들끼리 무슨 말을 하다가 까르르 웃는 것이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공작가 하녀들이라고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저들이 사석에서 무슨 얘기를 하든, 그것이 직접 그녀의 귀에 들어오거나, 밖으로 흘러나가지 않는다면 뭐라 할 수는 없었다.

다만 그런 뒷사정을 잘 아는 바람에 그런 점까지도 저절로 신경 쓰게 되는 것이 좀 피곤할 뿐.

“…아니. 조금 도와주기만 하면 돼. 그리고 어제 내가 유리잔을 떨어뜨려 깨뜨렸는데.”

“모두 치웠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꼭 슬리퍼를 신으십시오.”

하녀들이 왔다 갔다 하며 청소하는 기척도 모르고 잤다. 아마 반쯤은 기절했는지도 모르겠다. 느릿느릿 걸음을 떼며 화장실을 다녀와서 다시 침대로 향하는 길에 문득 창밖으로 시선을 준 루시아는 걸음을 멈추었다. 옆에서 도와주던 하녀도 얌전히 멈추어 섰다.

발코니로 이어진 굳게 닫힌 창밖으로는 널찍한 저택의 뜰이 펼쳐져 있었다. 정말 넓긴 넓구나, 별생각 없이 그렇게 중얼거리는데 저 멀리서 저택을 향해 맹렬히 달려오는 뭔가를 발견했다.

‘로이 크로틴……?’

마치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씩씩대며 달려오는 꼴이 점점 선명해졌다. 아침부터 무슨 일일까. 딱 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데.

“전하께서는 어디 계시지?”

“새벽 일찍 북부로 떠나셨습니다.”

“…안 계시다고?”

“그 일에 관해 마님께서 기침하시면 말씀드릴 것이 있어서 집사가 마님을 뵈러 기다리고 있습니다.”

“들어오라고 하지 왜.”

“여기에 들어올 수 없어서…….”

“아…….”

남편과 함께 있는 중이 아니라면 귀부인의 침실은 금남 구역이었다. 불륜에 관대한 제논이지만 집안 침실로 사내를 끌어들이는 일만은 용납하지 않았다.

현장을 들켰다가는 위자료 한 푼 받지 못하고 이혼당해 쫓겨나도 항변하지 못했다. 정원은 되고 침실은 왜 안 되는데? 좀 우스운 관습이었다.

지난번 전쟁으로 적국이었던 나라 중에는 제논을 문란한 나라라고 손가락질하는 곳이 있었다. 국가와 왕실을 모욕했다고 제논은 공개적 서한으로 맹렬하게 항의하며 물고 늘어져 결국 사과를 받긴 했지만. 글쎄……. 루시아는 딱히 그게 틀린 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늘 떠나기로 한 건 어찌 되었나?”

“주인님의 명으로 일정은 내일로 미루었습니다.”

“그럼 당장 급한 건 아니겠네. 집사를 보는 건 나중에 하지. 조금 더 자고 나서.”

루시아는 하녀에게 꿀물 한 잔 가져오라고 해서 마신 후 다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조금 전에 봤던 로이의 잔상이 어른거렸다. 그는 이미 새벽에 떠났다는데 무슨 일일까. 깊이 생각하는 것도 귀찮았다. 루시아는 곧 다시 잠이 들었다.

* * *

“이럴 순 없어! 이럴 순 없다고!!”

아침부터 들이닥쳐 펄쩍펄쩍 뛰는 로이의 발광을 딘은 대단히 대수롭지 않은 낯빛으로 구경했다. 붉은 머리카락은 마치 불이 붙은 것처럼 들썩거렸다. 워낙 많이 봐서 이젠 구경거리도 아니었다.

“태자 전하는 어쩌고 왔어?”

“알 게 뭐야! 난 아직 그거 한다고 대답 안 했다고!”

휴고는 수도를 떠나는 대신 태자 곁에 믿을 만한 호위를 붙여주기로 약속했고, 로이를 간택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녀석이긴 했지만 실력만큼은 누구도 따를 자가 없었다. 아직 로이를 상대할 수 있는 무력을 갖춘 기사는 휴고만이 유일했다.

로이의 의사 따위는 상관없었다. 휴고는 늘 하던 대로 ‘해.’ 하고 명령했고, 재고해 달라는 로이의 대답을 무시했다. 못한다고 바닥에 드러누웠다가 휴고에게 늘씬하게 두들겨 맞고 입이 댓 발은 튀어나와 호위를 시작한 것이 이틀 전 밤. 그래도 여전히 로이는 어떻게 하면 이 일을 그만둘 수 있을까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아침에 공작이 보낸 사람 편으로 태자에게 서신이 도착했다. 태자를 측근 호위 중인 로이는 어깨너머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간략한 설명으로 북부에 일이 생겨 급히 떠난다고 쓰여있었다. 그걸 보자마자 로이는 기겁을 해서 달려왔지만 이미 공작은 떠난 뒤였다.

“주군께서 이미 하라고 명하신 일이야. 어서 돌아가는 게 좋을걸. 호위 대상 곁을 비우면 안 되지.”

“우이 씨! 북부에서 일이 생겼다잖아! 그 재밌는 일에 날 빼놓다니!!”

딘은 로이를 한심하게 보며 혀를 찼다.

“그게 재밌는 일이냐?”

“온종일 꼼짝없이 태자 곁에 붙어있는 것보다 100배는 재밌지! 이렇게 되면 혼자라도 쫓아갈 거야.”

“얼씨구. 어디 한번 해봐라. 넌 주군 눈에 띄는 순간 죽는 거야.”

딘의 살벌한 예언에도 로이는 의기양양하게 팔짱을 꼈다.

“흥. 주군은 죽을 때까지 날 패기는 해도 죽이진 않아.”

“…참 이상한 데서 자랑스러워하는군. 네 말대로 죽진 않아도 최소 팔 하나 다리 하나 두 군데는 부러질걸. 아니지. 어디 하나 부러지진 않지만 사흘 밤낮으로 두들기실지도 모르지.”

로이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로이는 주군을 참 좋아하지만 가끔 발동하는 지랄 맞은 성격만큼은 아니었다. 그러나 로이를 제외한 다른 기사들은 공작의 구타가 로이 한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공작에게 기어오르는 건 로이가 유일했다. 그렇게 혼나고도 대차게 덤벼드는 걸 보면 어떤 의미에서는 참 대단했다.

“그건 좀 아파. 근데 넌 왜 여기 있어? 주군 안 따라가고.”

“난 북부까지 마님 호위하게 됐어.”

“아……. 주군 결혼했지?”

로이는 덤덤하게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들이 공작의 결혼 소식을 듣자마자 입은 쩍 벌리는 추한 표정으로 놀라움을 표현했지만 로이는 어깨만 으쓱하고 말았다. 로이의 정신세계는 보통 사람과 어딘가 살짝 달랐다.

“음. 어떤 분이 마님이 되셨는지……. 듣기로는 공주님이시라는데.”

‘난 아는데.’

로이가 아무리 생각 없이 살아도 그날 공작저에서 만났던 공주님과의 일을 떠벌릴 정도로 멍청이는 아니었다. 그때 일만 생각하면 로이는 아직도 키득키득 웃음이 나오곤 했다.

공주님이 주군께 ‘청혼을 드리러 왔습니다.’라고 할 때 주군이 크게 당황하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다. 자그마한 아가씨가 주군께 한 방 거하게 먹이는 광경이 그렇게 통쾌할 수가 없었다.

“좀 걱정이다. 난 귀부인들 대하는 일이 그렇게… 편치가 않아서.”

“괜찮을걸.”

“음? 마님을 뵌 적 있어?”

로이가 머리를 긁적였다.

“뭐 그렇다기보다는… 괜찮을 거야. 내 감이야.”

딘이 쿡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네 녀석 짐승 같은 감을 믿어보도록 하마. 그보다 그만 포기하고 어서 돌아가. 집사 눈에 띄었다가는 잔소리 들어.”

“으음……. 제롬은 좀… 무서워.”

어떨 때는 주군보다 더.

“그건 고마운 일이군요.”

들려오는 목소리에 로이의 안색이 순식간에 탈색되었다. 어느새 나타난 제롬이 무척 엄한 얼굴로 로이를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저승사자라도 마주친 것처럼 로이는 히익 숨넘어가는 비명을 질렀다.

* * *

다시 잠에서 깨었을 때는 이미 한낮이었다. 눈은 떴지만 도무지 일어날 수가 없었다. 온몸이 바위가 되어 침대에 딱 붙어버린 것 같았다. 아침에 잠깐 일어났을 때보다 더 힘들었다.

‘아프다…….’

근육통이란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아프다. 최고 고통의 순간이 지나야 한풀 꺾이는데 오직 시간만이 해결책이었다. 그의 말대로 오늘 이 상태로 마차 여행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했다.

눈만 감았다가 떴다 운동하며 꼼짝없이 누워있는 루시아를 곧 하녀가 들어와서 발견했다. 하녀는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보이는 마님 곁에서 안절부절못했다.

“마님, 많이 편찮으십니까?”

“…뭔가 가볍게 먹을 수 있는 것으로 부탁해. 일어나지 않고 침대에서 먹을 수 있는.”

루시아는 말을 하면서 이맛살을 찡그렸다. 목이 잠겨있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조금 깔깔한 정도였는데.

“아, 예. 마님. 즉시 준비해 오겠습니다.”

잠시 후 하녀들이 쟁반 가득 이것저것 담아 가지고 들어왔다. 따뜻한 우유, 꿀에 버무린 과일과 견과류, 조그마한 크기로 구운 과자, 아직 따뜻한 빵 등등. 부축을 받으며 일어나 앉아서 조금씩 먹어 속을 채우자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치고, 목욕도 하고, 잠깐 한숨 더 자고 일어난 후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응접실에서 제롬을 만났다. 하루 사이에 얼굴이 반쪽이 된 마님을 보며 제롬이 우려를 표했다.

“주인님께서 마님 의향을 여쭈어 의사를 부르라 하셨습니다.”

“의사는 되었어요. 그분은 한발 앞서 영지로 출발하셨다지요.”

“예, 영지에서 온 급보를 받으시고 바로 출발하셨습니다.”

제롬은 혹시 마님이 이 일로 화를 내거나 서운해하지 않을까 해서 조마조마했다. 급한 일이라고는 하지만 결혼 다음 날 새신부만 남겨놓고 인사도 나누지 않은 채 언제 보게 될 것이라는 기약 없이 남편이 휙 가버린 것이다.

루시아는 애초에 이 결혼을 약식으로 한 것 자체가 그의 영지 일 때문이라고 알고 있었다. 새삼 서운할 건 없었다.

“우리는 언제 출발하나요?”

“아, 예. 예정은 내일이지만 주인님께서 서두를 것 없다고 하셨습니다. 마님께서 편하실 대로 하시면 됩니다.”

“예정이 내일이니까 내일 떠나는 걸로 해요.”

“예, 마님. 가는 길에 대한 간략한 브리핑을 드리려고 하는데 언제가 괜찮으십니까?”

“준비가 다 되었다면 지금 들을게요.”

“예, 마님. 출발지는 수도, 도착지는 북부의 로암입니다. 로암은 도시 이름이기도 하면서, 그 도시 중심에 위치한 타란 공작가의 성(城)을 칭하는 이름이기도 합니다. 본래대로라면 무척 먼 거리입니다만 게이트를 타고 갈 예정이라 약 나흘로 잡고 있습니다. 혹여 전에 이용해 본 적 있으신지요?”

“없어요.”

제논이 강대국일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게이트’라고 불리는 마도구 덕분이었다. 어느 변방의 소식이건 늦어도 일주일이면 왕은 수도 가장 깊은 내궁 안에서 소식을 받아볼 수 있었다. 반란이건, 적의 침략이건 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다. 게이트는 많은 나라에서 발견되었지만 제논에 압도적으로 많았다.

아주 먼 옛날 마법이 세상을 지배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한때 세상을 지배했던 마도 제국은 갑자기 멸망했다. 지금도 역사가들이 이유를 알아내고자 탐구하지만 아직 온갖 가설만 난무하고 확실한 이유는 아무도 몰랐다.

마도 제국 멸망을 기점으로 세상에서 마법사라는 존재와 마법적 지식까지 사라졌다. 그러나 일부 마도구는 고대 유물이 되어 아직 남아 전해졌다. 마도구는 대부분 국보로 관리되고 있다. 그중 땅에 박혀있어서 떼어낼 수 없고 사물을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시키는 마도구를 ‘게이트’라고 했다.

“저택에서 출발해서 수도 게이트까지 마차로 반나절 정도 소요됩니다. 거기서 북부 게이트까지 이동한 후, 로암까지 마차로 사나흘 남짓 걸립니다.”

“공작성에서 게이트까지 사흘이면 꽤 멀군요. 보통은 근처이지 않나요?”

“북부에는 게이트가 다섯 곳뿐입니다. 그나마 로암에서 가장 가까운 게이트 근처는 바위가 많은 거친 땅이라 사람이 거주하기 적당하지가 않습니다.”

“다섯 개뿐이라고요? 그 넓은 북부에?”

“예, 다섯 개뿐입니다.”

그래서 수도에서 활동하는 귀족들 중에 북부 출신은 거의 없었다. 왔다 갔다 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근데요, 제롬. 게이트는… 내가 알기로 아무나 이용할 수 없을 텐데요. 공무가 아니면 안 된다고 들었어요. 우리는 일종의 여행 아닌가요?”

“엄밀히 따지면 그렇기는 합니다만. 사실 대부분 그런 이유로만 사용하는 건 아닙니다. 수도 게이트의 경우는 비용을 지급하면 사용합니다. 그리고 공작 전하께서 이용하겠다고 하시는데 이유를 누가 묻겠습니까.”

“…그렇군요.”

그녀의 남편은 거물이었다. 그런데 그 사실이 아직도 확 실감이 나지 않았다. 사교계에서 활동하는 여자들의 위치는 대개 남편, 혹은 아버지의 지위에 따라 결정되었다. 왕비라고 반드시 사교계 여왕이 되는 건 아니지만 누구도 모르는 남작의 여식이 사교계의 정점에 오르는 일은 절대 없었다.

여자들은 남편, 혹은 아버지의 지위를 자신의 것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했다. 공작부인이 위세를 부리면 남작부인은 나이에 상관없이 당연히 비위를 맞추어야 했다. 법은 아니었다. 그런데 누구나 당연히 그렇게 했다.

꿈속에서 그녀는 백작부인이었다. 메튼 백작 가문은 영지도 있고 나름의 이름 있는 가문이었으며 수도 정계에 발을 들인지 꽤 되었다. 당연히 루시아보다 지위가 낮은 여자들은 사교계에 널렸다.

그래도 루시아는 딱히 그들 대상으로 자존심을 내세워 몰아세울 필요를 느낀 적이 없었다. 처음부터 루시아는 메튼 백작이 가진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루시아는 확신할 수 없었다. 과연 다른 여자들처럼 자신도 남편의 지위를 내 것처럼 적극적으로 이용하며 즐기게 될까. 그녀는 자신이 공작이라는 남편의 직위에 기생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호위를 포함해 떠날 일행은 내일 떠나기 전에 인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다른 의문은 없으신지요?”

“없어요. 혹시 내가 조심해야 할 일은 없나요?”

“말씀드릴 일이 있다면 이후에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날 저녁은 편안한 휴식으로 시간을 다 보내고 일찍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전날에 비하면 온몸에 기운이 돌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른 문제가 생겼다. 그와 밤을 보낸 이후 시작된 하혈이 멈추지 않았다. 심각한 출혈은 아닌데 자꾸 속옷에 묻어나자 시중을 드는 하녀들이 가장 먼저 눈치챘다.

“마님, 아무래도 의사를 불러 진찰을 받아 보시지요.”

그래서 출발 예정 시간에 출발하는 대신 의사가 불려왔다. 여의사가.

인상과 풍채, 모두가 넉넉한 나이 지긋한 여의사는 잔뜩 긴장해 있었다. 여의사의 수는 많지 않았다. 여자가 의학을 배우는 경우가 드물고, 의사가 되었다 해도 실력은 늘 남자와 비교하면 부족하다고 평가받았다.

세간에 여자이기 때문에 여의사에게 진찰을 받는다는 의식은 없었다. 귀부인 침실은 금남의 지역이지만 의사는 제외였다. 굳이 여의사를 찾을 필요가 없으니 수요가 많지 않고 남자에 밀려난 여자 의사들은 그런대로 생계를 이을 수 있을 정도의 수준으로만 의료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여의사는 대개 의사인 남편을 따라다니며 돕다가 배워서 본격적으로 의학 공부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부부가 모두 의사면 쓸모가 많았다. 오늘 불려온 여의사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녀는 사별하여 현재는 혼자였다.

어쨌든 여의사는 이런 어마어마한 귀족가의 저택에 치료를 목적으로 방문한 건 처음이었다. 하녀를 따라 침실로 들어와 침대 위에 앉아있는 자그마한 여자를 봤을 때 조금은 긴장이 풀렸다. 대단히 고압적인 귀부인을 상상했는데 여주인은 마치 소녀 같았다.

“어디가 편찮으십니까?”

침대 위의 귀부인은 조금 발간 얼굴로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우물쭈물하다가 도움을 바라는 것처럼 하녀를 쳐다보았다. 하녀가 눈치껏 귀부인에게 ‘소인이 대신 설명할까요?’ 여쭈어 허락을 받고 목소리를 낮추어 증상을 설명했다.

심각한 표정으로 하녀의 말을 듣던 여의사의 표정이 점차 기묘하게 풀어졌다. 그리고 흘끔 침대를 보며 웃음을 삼켰다. 이제 막 결혼한 새신부가 무척 귀여워 보였다.

“마님, 혹시 통증이 있으십니까?”

“…움직이면 조금…….”

“혹시 달손님 기간하고 겹치는 것은 아닌지요?”

“그렇지는 않네.”

“처녀혈은 사람에 따라 달라서 약간 묻어나는 경우에 불과한 사람도 있고, 며칠 계속 흐르는 예도 있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통증이 있다거나, 생리혈처럼 많이 흐르는 경우가 아니라면 가만두면 멈출 겁니다. 심각한 증상은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무리하지 않고 휴식만 취하시면 길어봤자 사흘이면 괜찮으실 겁니다.”

의사를 말을 들으면서 루시아는 얼굴이 점점 더 붉어졌다. 놔두면 괜찮을 것을 괜히 의사를 불렀다.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어요, 다 말하는 것 같아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아, 하지만 출혈이 멈추고 최소한 움직여도 아프지 않을 때까지는 교합은 자제하는 것이 좋습니다. 여성의 생식기는 무척 연약해서 자칫 잘못하면 크게 탈이 나지요.”

“어차피…….”

어차피 뭐? 그가 없으니 할 일 없다고? 그럼 그가 있으면 어쩐다는 건데? 루시아는 저 혼자 묻고 대답하며 점점 더 낯이 뜨거워졌다.

“아… 아무튼, 알았네. 되었으니 가보시게. 수고했네.”

“딱히 약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조금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몸을 보하는 약을 지어 드리겠습니다.”

처방을 마치고 루시아 침실을 나오는 여의사를 제롬이 따로 불렀다.

“제안은 생각해 보셨습니까?”

제롬은 공작이 여의사를 언급하자마자 재빠르게 실력 좋은 여의사를 수소문했다. 그나마 수도에는 여의사가 꽤 있는 편이지만 영지로 내려가면 쓸 만한 실력을 갖춘 여의사는 찾기 어려웠다.

그는 절대 주인의 한마디를 그냥 들어 넘기는 법이 없었다. 반드시 무슨 뜻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행동했다. 몇 배는 더 수고롭고 일이 늘어나지만 집사가 천직인 제롬은 전혀 힘들다 생각한 적 없었다.

그는 공작이 굳이 여의사에게 마님을 보이라고 말한 것을 대수롭게 넘기지 않았다. 대를 이어 공작가를 섬기는 주치의 필립은 남자였다. 필립이 마님을 진찰하는 상황을 어쩐지 공작이 그리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의 촉은 잘 들어맞는 편이었다.

제롬은 안나에게 마님의 주치의를 제안했다. 안나는 어제 잠깐 저택을 방문해서 제롬의 제안을 받았고, 오늘은 환자를 봐달라기에 다시 방문했다.

“수도를 영영 떠나게 되는 건 아니라고 하셨지요.”

“예, 몇 년 안으로는 다시 수도로 오게 될 겁니다.”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안나는 갑자기 정든 곳을 떠나는 건 내키지 않았지만 어차피 혼자 몸이고 이런 고위 귀족에게 안정된 일자리를 제안받는 기회는 놓치기 아까웠다. 제롬은 예의 바른 미소로 활짝 웃었다.

“타란 공작가의 식구가 된 것을 환영합니다, 안나.”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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