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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아-11화 (12/77)

11장 북부 (2)

거의 침대에서 쉬며 시간을 보냈더니 이틀이 더 지날 무렵 하혈은 완전히 멈추었고, 몸 상태도 확실히 좋아졌다. 움직이면 다리 안쪽이 조금 얼얼한 느낌은 있었지만 견딜 만했다.

출발을 앞두고 가장 느긋한 사람은 루시아였고, 그녀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분주했다. 특히 빠뜨린 것이 없나 두 번 세 번 점검하는 제롬이 가장 바빴다. 제롬이 가장 중요하게 체크하는 것은 이동하는 동안의 식량과 비상약, 마님의 편의를 위한 물품들이었다.

여정을 함께할 사람들은 총 14인이었다. 루시아와 하녀 둘, 제롬, 안나, 벙어리 삼 형제를 포함한 하인 다섯 명, 기사 네 명. 제롬은 떠나기 전 응접실에서 마지막 티타임을 즐기고 있는 루시아에게 기사들을 소개하고자 했다. 루시아가 허락하자 제롬은 기사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크로틴 경이 있을 줄 알았는데.’

기사 중에 낯익은 얼굴은 하나도 없었다. 며칠 전 아침나절에 잠깐 봤던, 크로틴 경이 맹렬하게 달려오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어디 있느냐고 찾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의문은 접어두었다.

기사 네 명 중 한 명만 스물 중반 남짓으로 어린 편이었고, 다른 셋은 그보다 너댓 살은 더 많아 보였다. 모두 문가 근처에 서서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다. 응접실 안쪽 소파에 앉아있는 루시아와 멀찍이 떨어진 상태였다.

“제롬, 혹시 기사들이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그건 아닙니다만. 마님께 혹시라도 위협적으로 보일까 봐 그렇습니다.”

기사들은 아무래도 보통 사람보다 키가 크고 덩치가 있는데다가 갑주까지 걸치면 더 커 보였다. 허리에 장검을 차고 있는 모습이 자못 위협적이라 기사를 처음 접하는 여자는 겁을 먹기 쉬웠다. 혹시나 마님께서 두려워할까 봐 취한 조치였다.

“괜찮아요. 좀 더 가까이 오라고 하세요. 그래도 얼굴 정도는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어야지요. 만약의 경우 날 지켜줄 사람들인데 그때도 이렇게 떨어져있을 수는 없죠.”

루시아는 기사의 큰 키와 덩치가 무섭지 않았다. 그런 것이 무서웠다면 처음부터 타란 공작에게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했을 것이다. 덩치와 키가 그 사람의 성품을 좌우하지 않는다고 꿈속에서 배웠다. 루시아는 꿈속에서 기사들의 무기나 갑옷을 수리하는 작은 공방을 운영한 적도 있었다.

“알겠습니다, 마님.”

기사들이 몇 걸음 떨어진 거리까지 다가왔다. 제롬이 그들의 이름을 소개할 때마다 해당하는 기사들이 고개를 숙였다. 그중 리더라고 소개한 가장 나이 많아 보이는 기사가 말했다.

“마님. 호위 때문에 마님께 불편을 드리지는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마님께서는 한 가지만 숙지해 주시면 됩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위험한 일이 발생한 경우, 헤바 경 옆에서 절대 떨어지시면 안 됩니다.”

리더 기사가 말한 헤바 경의 이름은 딘 헤바. 네 명 기사 중 가장 어려 보이는 남자였다.

“어째서요? 왜 리더인 경이 아닌, 헤바 경 곁에 있으라는 거지요?”

“그건 헤바 경이 저희 중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의 기사이기 때문입니다.”

“이해할 수 없네요. 기사들이 조를 짜서 움직일 때 리더는 나이가 아니라 실력 순으로 맡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는데요.”

기사들이 묘한 눈으로 서로의 시선을 교환했다. 그건 문서화된 법이 아닌 일종의 불문율이었다. 내규나 마찬가지여서 기사들 사정에 좀 밝아야 알 만한 규칙이었다.

“그건… 헤바 경이…….”

리더 기사가 말을 잇지 못하자 딘이 직접 나섰다.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전 귀족이 아니고, 기사 가문 출신도 아닌 평민 출신 기사입니다.”

“그래서요?”

그걸로 충분한 설명이 되었다고 생각한 딘은 오히려 루시아가 되묻자 당황했다.

“그러니까… 혹시 마님께서 불편해하실 수 있으니.”

“그러니까. 평민 출신인 기사가 날 호위하는 기사들 리더로 있는 상황을 내가 불쾌해할지도 몰라서 그랬다는 말이로군요.”

“…그렇습니다.”

“실력은 신분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죠. 난 기사들의 규칙을 깨고 싶지 않아요. 리더는 경이 맡아주세요.”

딘이 흔들리는 눈으로 루시아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숙였다.

“예, 마님.”

아까보다 훨씬 정중한 인사였다.

기사들을 내보내고 제롬이 놀라움을 표했다.

“마님께서 기사들 규칙을 알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사실은 마님께서 여정 동안 기사들을 불편해하실까 봐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습니다. 헤바 경은 나이에 비해 실력이 뛰어난 기사입니다. 견습 기사 기간 없이 바로 기사 서임을 받았습니다.”

“어머나. 그건 검술 시합이나 마상 시합에서 우승했을 때나 가능하잖아요. 정말 대단한 실력을 갖췄군요. 놀라워요. 겉으로 보기에는 참 순해 보이는 인상이었는데요.”

“마님께서 더 놀랍습니다. 참 잘 아시는군요.”

루시아는 살짝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공방을 운영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그 경험은 루시아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메튼 백작은 뚱뚱해서 덩치 있어 보여도 키가 크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녀에게는 거대한 벽처럼 느껴져서 늘 그자에게 주눅이 들어있었다.

그러나 공방을 운영하며 자주 접하는 기사들은 메튼 백작보다 훨씬 더 큰 덩치와 키, 때로는 험악한 인상을 지녔으나 메튼 백작과 비교할 수 없이 순수했다. 덕분에 루시아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사람에 대한 불신이 누그러질 수 있었다.

물론 개중에는 쓰레기 같은 놈들도 있었고, 수리비를 외상으로 달아놓고 떼어먹는 놈도 있었지만 때로는 다른 기사가 그런 놈을 잡아다 주기도 했다. 같은 무기를 다루는 사람이라도 용병과는 천지 차이로 달랐다. 기사는 용병과 달리 검을 다루는 자신의 운명에 자부심을 품고 있었다.

마무리까지 아름다웠으면 참 좋았겠지만.

공방은 남자한테 홀려 홀랑 날렸다. 처음에는 기사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제대로 된 기사도 아니었다. 불명예스러운 이유로 고용 파기된 자유 기사였다. 기사의 수치라며 다른 기사들이 분노에 차서 결국은 잡아다 주었지만 돈은 거의 되찾지 못했다.

사지 멀쩡하고 잘생긴 기사가 들이댈 때부터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어야 했던 건데. 몸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다정한 애정을 베푸는 남자의 사랑을 순수하므로 진짜라고 착각했다.

“크로틴 경은 함께 가지 않나요?”

제롬 표정이 일순간 좋지 않게 굳어졌다.

“크로틴 경은 어찌…….”

“며칠 전 아침에 저택에 들어오는 것을 얼핏 보았어요. 그래서 난 함께 가는 줄 알았지요.”

“아닙니다. 크로틴 경은 명을 받아 태자 전하를 호위 중입니다.”

“크로틴 경을 좋아하지 않는군요?”

“…그런 사감이라기보다는… 좀 골치가 아픕니다.”

‘크로틴 경이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지만…….’

제롬이 말하는 골치의 의미가 괴팍하고 제멋대로인 면을 뜻하는 것이라면 이해가 갔다. ‘미친개’라는 별명도 아마 그런 의미일 것이다. 루시아는 머릿속으로 정신 사납게 이리저리 날뛰는 덩치 큰 순한 개를 그렸다.

게이트를 처음 이용한 감상은 좀 실망스러웠다. 잠깐 사방이 어두워지고 약간의 현기증이 나는 것 외에는 특별한 것을 느낄 수 없었다. 눈 깜짝할 새에 먼 거리를 이동했다는 사실은 놀랍지만, 이동하는 거리가 눈앞으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펼쳐진다는 말은 헛소문이었다.

황량한 벌판을 따라 세 대의 마차가 달려갔다. 루시아와 여자들을 태운 마차, 마부 노릇을 하는 하인들이 번갈아 타면서 쉬어가는 짐마차, 말을 타고 호위하며 달리는 기사들이 번갈아 타면서 쉬어가는 마차.

여정은 순조로웠다. 비 한 번 내리지 않는 날씨도 도와주는 것 같았다. 달려가다 쉬면서 식사하고, 다시 달리고, 날이 저물면 노숙을 했다. 두 배 정도 시간을 들이면 마을을 찾을 수 있겠지만 최단 거리로 가는 길에는 사람이 사는 곳이 없었다.

마지막 날이 저물어갔다. 이제 오늘 밤만 보내면 내일 안으로는 도착이 확실했다. 마차 주변을 호위해 달리던 기사들이 적당한 곳을 찾고 하인들에게 세울 곳을 가리키며 신호를 보냈다.

마차가 모두 멈추자 제롬은 말을 몰아 루시아가 타고 있는 마차 곁으로 다가가 창을 두드렸다. 제롬은 가는 내내 마차 안에 타지 않고 다른 기사들처럼 말을 몰았다. 먼지 때문에 닫아둔 창문이 안에서 열렸다.

“마님, 오늘은 이곳에서 쉬겠습니다.”

“지금 내려도 되나요?”

제롬이 기사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주변을 대충 살펴 위험이 없다고 판단한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나오셔도 됩니다.”

잠시 후 마차에서 루시아를 비롯한 여자들이 모두 내렸다. 그들 안색은 모두 파리하게 질려있었다.

흔들리는 마차를 장시간 타고 달리는 일은 대단히 고단했다. 길이 잘 닦여있는 수도도 아니고 황량한 벌판을 달려가는 것이라 끊임없이 덜컹거렸다.

루시아는 묵묵하게 견디었다. 루시아가 잘 따라가니 다른 사람들이 힘들다고 말할 수 없었다. 덕분에 그들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최고의 속도로 목적지를 향하고 있었다.

“마님, 멀미는 좀 어떠신지요?”

“괜찮아요.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

계속 흔들리는 마차에 있었더니 멀미로 속이 울렁울렁하고 머리는 지끈거렸다. 안나는 꼭 약을 먹지 않고도 손바닥 일정 부분을 자극해 멀미나 두통을 좀 가라앉히는 신묘한 수법을 알고 있었다. 덕분에 도움을 많이 받았다.

루시아는 안나와 주변을 멀리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산책했다. 얼마간 떨어진 곳에서 딘이 뒤따랐다. 오는 내내 딘은 마님의 근접 호위를 자처했다.

다른 사람들은 부지런히 야영할 준비에 돌입했다. 말에게 먹이를 주고 식사 준비를 위해 모닥불을 피웠다. 땅을 판판히 고르고 혹시 주변에 숨어있는 위험한 야생동물이 없는지 살폈다.

기사 하나가 저만치 보이는 루시아를 비롯한 사람들 인영을 한참을 보다가 툭 내뱉었다.

“저런 분만 같으면 백 번이라도 모시고 여행 다니겠어.”

다른 기사가 그에 답했다.

“타란 공작가에 좋은 분이 안주인으로 들어오셨군.”

다음 날 아침 어스름이 해가 뜰 이른 새벽에 다시 출발했다. 오전 내내 달리다가 이른 점심을 먹기 위해 멈추었다.

“다 왔습니다, 마님. 저기 보이는 곳이 로암입니다.”

제롬이 가리키는 곳에 누런 흙길이 끝나면서 푸른 초원이 덮이기 시작했다. 안쪽으로 다양한 높이로 솟은 건축물들이 색색의 생기 있는 도시의 모습을 만들었다. 중심에는 우뚝 거대한 성탑이 솟아있었다. 그들의 최종 목적지였다.

로암이 실제로 가까워지자 루시아는 이제 마차 여행의 괴로움보다 설렘이 커졌다. 지금 가장 궁금하고 만나보고 싶은 사람은 그의 아들이었다.

타란 공작에게 장성한 후계가 있다더라고 소문을 들었을 때는 그의 나이가 마흔일 무렵이었다. 당시 장성한 아들이라면 성년(남자 열아홉 살, 여자 열일곱 살)은 지났을 것이니 한 스무 살 정도로 잡으면 지금 그의 나이를 따져봐서 아이는 한 너댓 살 정도 되지 않았을까.

그를 닮았을까, 아니면 제 어머니를 닮았을까. 성격은 어떨까. 친하게 지낼 수 있을까. 날 싫어하지는 않을까. 기대와 걱정이 교차했다. 루시아는 못된 계모 노릇은 하고 싶지 않았다. 진짜 어머니 같은 정은 줄 수 없을지 모르지만 사이좋게 잘 지내고 싶었다.

마차가 초원에 들어서자 먼지 걱정 없이 창을 열 수 있었다. 창 안으로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루시아는 지나가는 풍경을 감상했다. 달리는 마차에서 다소 떨어진 상태로 기사들을 태운 말들이 옆을 달렸다. 그 사이에는 제롬도 있었다.

‘제롬은 집사인데… 기사들과 친해 보여.’

제롬은 중간에 잠깐 마차를 타기는 했지만 대개 기사들과 함께 달리고 쉴 때에도 기사들과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집사와 기사. 어찌 보면 접점이 없는 관계인데 그들은 제법 친밀해 보였다.

예상보다 훨씬 이른 도착이었다. 원래 예상은 오늘 밤늦게 도착할 것이었지만 지금은 이른 오후였다. 마차는 북부의 수도라 불리는 도시 로암에 들어서서 공작가의 고성(古城) 로암을 향해 거침없이 달렸다.

지나던 사람들이 모두 지나가는 마차를 보면 멈추어 서서 수군거렸다. 루시아를 태운 마차에는 선명한 흑사자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마차가 도개교를 건널 무렵에 무거운 고동 피리 소리가 울렸다. 피리 소리가 채 끝나기 전에 마차는 성문 안으로 들어섰다.

곳곳에 감시탑이 세워진 외벽 안쪽으로 연병장 및 훈련소, 기사들이 머무는 휴식 공간 등이 있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기사들은 피리 소리가 들리자 모두 그 자리에 멈추고 지나가는 마차를 향해 팔에 각을 세우며 앞으로 든 채 고개를 숙였다.

마차는 그들을 지나 내성 안으로 들어가 거대하게 우뚝 솟은 중앙탑 앞에 멈추었다.

탑 앞에는 수십의 사람들이 나와 기다리고 서있었다. 제롬이 밖에서 마차 문을 열자 안에서 하녀들이 나와 얼른 마차 밑에서 계단 장치를 꺼내 길을 만들었다. 몇 개 계단을 디디면서 루시아가 내려오고 그 뒤를 안나가 따라 내렸다.

루시아는 고개를 들어 사방을 한 번 둘러보았다. 돌벽으로 막힌 안쪽으로 높은 성탑이 여기저기 하늘 높이 솟아있었다. 가장 거대한 규모의 중앙탑 옆으로는 부속된 건물들이 여럿 있었다. 100여 명은 족히 될 것 같은 사람들이 질서 있게 늘어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안으로 드시지요, 마님.”

제롬이 이끄는 대로 루시아는 사람들을 지나 중앙탑으로 들어갔다. 재질은 나무 같으나 마치 철문처럼 묵직한 느낌이 드는 거대한 문이 열리고 널찍한 홀이 펼쳐졌다.

“긴 여행으로 고생 많으셨습니다, 마님.”

“나만 고생한 건 아니었죠. 모두 다 수고가 많았어요. 오늘 같이 온 모두가 푹 쉴 수 있도록 제롬이 신경 써주세요.”

“예, 마님. 염려하시지 않도록 조치하겠습니다. 마님께서는 어찌하시겠습니까? 쉬시겠다면 침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보다 인사를 하고 싶군요.”

“고용인들 인사는 천천히 받으셔도 됩니다.”

“고용인들 말고요. 공작가 어른들 말이에요. 아버님께서 안 계신다면 어머님이라든가, 혹은 다른 친척분들 말이에요.”

“그런 분은 계시지 않습니다.”

“아무도… 안 계시다고요?”

“예. 전 공작부부께서는 오래전 세상을 뜨셨습니다. 다른 친척은 물론 형제자매도 계시지 않습니다. 공작 전하께서는 유일한 타란 혈족이십니다.”

루시아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유일? 그럼 그의 아들은?’

당장 물어보려다 멈칫했다. 어쩌면 아직 아들의 존재가 공개된 상태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일전에 분명히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는, 비밀은 아닌 것처럼 말했다.

“…그렇게까지 피곤하지 않아요. 내부를 구경하고 싶은데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넓이에 비해 구조는 비교적 단순했다.

“1층은 여러 개의 응접실과 회의실, 식당이 있습니다. 식당 옆으로 나가는 뒷문을 통해 정원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정원이 있어요? 구경하고 싶어요.”

“…기대는 하시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정원에 나가자마자 루시아는 말을 잊었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정원은 어디를 둘러봐도 이 화사한 봄 날씨에도 불구하고 꽃 한 송이 없었다. 여기도 저기도 사철 내내 푸른 덤불 나무들이 정원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

제롬이 민망한지 헛기침을 했다.

“관리상의 이유로…….”

“…이럴 거면 대체 정원은 왜 만든 거예요?”

“전 공작부인께서 살아생전에 조성했던 정원입니다. 보시다시피 워낙 규모가 커서 안주인이 안 계시는 상황에 관리가 여의치 않았습니다. 버려 두기에는 흉물스러워서 취한 조치입니다.”

“그분이 지시하신 건가요?”

“주인님께서는 정원 같은 건 신경 안 쓰십니다.”

“…….”

그래. 그럴 것 같다.

다시 1층 홀로 돌아왔다.

“왼쪽 계단으로 올라 2층으로 올라가시면 온전히 두 분의 개인 공간입니다. 두 분 각각의 침실과 응접실, 욕실이 있습니다. 오른쪽 계단으로 올라 2층은 주인님의 집무실입니다. 같은 2층이지만 두 공간을 서로 이동할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계단을 내려와서 1층을 통해야 합니다.”

“제롬. 물을 것이 있는데요.”

루시아는 아무래도 내내 그의 아들이 신경 쓰였다. 만약 아들의 존재가 아직 비밀이라고 해도 제롬이 모를 것 같지는 않았다.

“아까 전하께서는 타란 가문의 유일한 혈족이라 했지요.”

“예, 마님.”

“하지만… 그분께는 아들이 있잖아요.”

제롬의 얼굴이 단번에 덜떨어진 바보처럼 변했다.

“…예?”

“전하께 아들이 있으니 유일한 타란 혈족은 아니지 않나요?”

“마님……. 알고… 계셨습니까?”

“그럼요. 알고 있었어요.”

“…모르시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나, 제롬. 설마 그분께서 제게 그걸 말씀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럴 분은 아니잖아요.”

제롬이 아는 타란 공작은 충분히 ‘그럴 분’이었다.

“난 여기 오자마자 그 아이를 만나게 될 줄 알았어요. 지금 어디 있어요?”

“도련님은… 현재 로암에 안 계십니다.”

“어디 갔는데요?”

“기숙 학교에 계십니다.”

“설마 나 때문에?”

“아닙니다. 주인님께서 오래전에 결정하신 일입니다.”

“오래전이라고요? 대체 몇 살인데요?”

“올해 여덟 살이십니다.”

그의 아들이 예상보다 나이가 많아서 놀랐다. 여덟 살? 대체 몇 살 때 낳은 아이지? 나이를 따져보니 그의 나이 열일곱 살? 열여덟 살?

‘…조숙하셨군요.’

열일곱 살에 아들을 얻었으면 대체 첫 경험을 몇 살에 한 걸까. 자유로운 남녀교제를 허용하는 사회 분위기를 감안해도 상당히 이른 편이었다.

“…그 아이는 언제 와요?”

“모르겠습니다. 기숙 학교 가신 이후 한 번도 오신 적 없습니다.”

“한 번도……? 그럼 전하께서 만나러 가셨어요?”

“제가 알기에는 그러신 적 없습니다.”

루시아는 혼란스러웠다. 몹시 귀애하는 아들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이런 결혼도 한 것 아니었나? 사생아지만 작위를 물려주고 싶을 정도로 사랑을 쏟는 그런 아들이 아니란 말인가?

“마님. 도련님에 관해 의문이 있으시면 주인님께 직접 여쭈어 보시지요. 저는 섣부르게 어떤 말씀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알았어요. 그 아이 이름은 뭔가요?”

“데미안 도련님이십니다.”

데미안. 루시아는 그 이름을 입안으로 되뇌었다.

* * *

로암은 수백 년은 족히 되었다는 고성(古城)이지만 부지런한 관리와 꾸준한 개보수로 겉으로는 고풍스러움을 간직한 채 내부는 편하고 깔끔했다. 루시아는 이곳이 썩 마음에 들었다. 생활도 만족스러웠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밥이 나오고 침구가 정리되고 목욕물이 대령되었다. 불만이 있을 리 없었다.

응접실 문이 조용히 열리고 집사 제롬이 들어왔다. 한 손에는 접시를 들고 있었다. 그는 루시아 앞의 테이블에 우아한 몸짓으로 접시를 내려놓았다. 루시아는 그가 찻잔을 내려놓을 때에도 단 한 번도 달그락 소리를 내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

영지의 성과 수도에 저택에는 대개 각각 따로 집사를 두기 마련이지만 수도 저택은 물론이고 여기에서도 집사는 제롬이었다. 제롬은 상당히 유능한 집사임이 틀림없었다. 젊은 나이에 참 대단했다.

“막 구운 파이입니다, 마님.”

먹음직스럽게 노릇노릇한 파이에서는 달콤한 사과 향이 풍겼다.

“어머나, 맛있겠다. 잘 먹을게요.”

“너무 많이 드시지는 마십시오. 저녁 식사를 못 드십니다.”

“이걸로 저녁을 대신하면 안 될까요? 매일 이렇게 먹다가는 살이 찌겠어요.”

아침과 점심은 간단하게 먹지만 저녁의 진수성찬은 지나치게 화려했다. 매일 이렇게 먹다가는 공작가 재산을 다 탕진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만큼. 거기다 중간에 간식까지.

제롬은 친절했다. 제롬뿐 아니라 모두 혼자 있는 루시아가 우울해할까 봐 전전긍긍이었다. 그래서 유난히 식사에 더 신경을 쓰는 것 같다.

갓 결혼한 새신부가 낯선 곳에서 남편 없이 혼자 지낸다니. 보통 여자들이라면 울고불고할 일이지만 루시아의 적응력은 사막의 선인장 수준으로 탁월했다.

“제롬. 뭐 하나 궁금한 것이 있는데요.”

“예, 마님. 말씀하십시오.”

공작가의 유능한 집사 제롬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아주 우아한 몸짓으로 찻잔을 채웠다.

“이별의 장미는 제롬이 보내는 건가요?”

제롬의 손에서 떨어진 찻주전자가 테이블 위에서 엎어졌다. 찻물이 흥건하게 테이블 위를 적시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제롬은 멍하게 보고 있었다. 그의 인생에서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실수였다. 제롬은 몇 초의 시간이 더 지난 후에 겨우 엎어진 찻주전자를 바로 세우고, 하녀들에게 물걸레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죄송합니다, 마님.”

“아니에요. 나한테는 찻물이 묻지 않았어요. 그보다 장미꽃을 보내는 건 누구 생각이었어요?”

“…….”

제롬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자신도 모르게 눈동자를 돌리며 누군가 도와줄 사람을 찾았으나 있을 리가 없었다. 늘 여유가 있었던 제롬의 얼굴은 바늘 끝도 들어가지 않을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그가 지금 처한 위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까 전하께서 그렇게 세심한 분이 아닌 것 같아서요. 이별의 뜻으로 장미꽃을 보내라고 직접 명하지는 않으셨을 것 같거든요.”

“…마님, 그게…….”

“괜찮아요, 다 알아요. 제롬 생각이었어요?”

“…예. 시작은 제가 임의로…….”

“이별의 뜻으로 붉은 장미를 보낸다고요? 좀 잔인한 거 아니에요?”

“…노랑…입니다. 노란 장미입니다.”

“아, 노란 장미였구나. 왜 하필 노란 장미였어요?”

“…노란 장미 꽃말 중에… 이별이 있습니다.”

“우와, 정말요? 어떻게 그런 걸 다 알아요? 제롬은 대단히 로맨티시스트(Romanticist)인가 봐요.”

루시아의 목소리가 밝아서 그런지 제롬은 서서히 긴장을 풀었다. 하녀들이 엉망이 된 테이블 위를 정리하자 그의 마음도 정리되었다.

“…제 동생의 아내가 꽃집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간혹 꽃말을 말해 주고는 하는데 얼핏 들은 기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장미꽃 구매는 제수씨 꽃집을 애용했다. 파비안은 이것이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 도랑 치고 가재 잡는 격이라며 낄낄거렸다. 노란 장미를 주문하면 제수씨는 온 힘을 기울여 화려한 꽃다발을 만들어 보냈다.

“동생이 있었군요.”

“아, 말씀드리지 않았나 봅니다. 주인님 보좌관으로 있는 파비안이 제 동생입니다. 혹시 파비안을 본 적 있으신지요.”

“물론이에요. 두 사람, 진짜…….”

“예, 닮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래봬도 쌍둥이입니다.”

“세상에, 놀라워요. 그러고 보니 공작가에는 쌍둥이가 좀 많네요. 제롬도 그렇고, 주방장도 쌍둥이 형제라고 들었고. 하녀 중에도 쌍둥이 자매가 있고요. 전하 시중드는 아이 중에……. 아, 그들 세 명은 형제는 맞지만 쌍둥이는 아니었죠.”

“마님 말씀을 듣고 보니 그렇습니다. 주인님께서도 쌍둥이셨으니.”

“그분께 형제가 있었어요?”

제롬이 딱 입을 다물었다. 실수했다. 그는 지금껏 한 적 없는 실수를 짧은 사이에 두 번이나 저질렀다. 더구나 말실수라니. 그건 그가 가장 한심하게 여기는 실수였다. 얼굴에 낭패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런 기색을 루시아는 빠르게 알아차렸다.

“혹시 내가 알면 안 되는 일인가요?”

“…그런 건 아닙니다만 쌍둥이 형제분께서는 오래전 이미 이 세상분이 아닙니다. 마님께서도 언젠가는 알게 되실 일이겠지만 누구도 화제에 올리지는 않는 일이라……. 주인님 앞에서는 언급하시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루시아는 사실 장미꽃보다도 그의 형제에 관한 일이 더 궁금했지만 무척 곤란해서 쩔쩔매는 제롬이 안되어 보여서 화제를 돌렸다.

“알았어요. 장미꽃 얘기나 더 해요. 마지막으로 누구에게 보냈어요?”

제롬이 굳은 표정으로 다시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제롬은 차라리 공작의 쌍둥이 형제 이야기를 더 하고 싶었다. 누군가 이 자리에서 그를 벗어나게 해준다면 기꺼이 끌어안고 감사의 키스를 날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괜찮다니까요. 혹시 레이디 로렌스?”

“…예, 그걸 어찌…….”

“알게 될 기회가 있었죠. 아, 근데. 마지막이 레이디 로렌스면……. 팔콘 백작부인은요?”

제롬은 정말 미칠 것 같았다. 마님 입에서 쉴 새 없이 자꾸 폭탄이 떨어졌다. 그의 얼굴에서 이제 아예 여유라는 것이 사라졌다. 지금껏 이토록 누군가 그를 몰아세운 기억이 없었다.

“전하께서 레이디 로렌스와 헤어지고 나서 만난 사람이 팔콘 백작부인이잖아요. 그럼 마지막으로 장미를 보냈어야 하는 사람도 백작부인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니에요?”

“…….”

“괜찮아요. 그러니까 말해 봐요.”

가여운 제롬은 괜찮으니까 다 말해 봐라, 라는 여자의 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모르고 있었다. 파비안이 옆에서 봤다면 그래서 네가 여자를 못 사귀는 것이라고 혀를 찼을 것이다.

“…그건 주인님께서 지시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흐응…….”

루시아는 살짝 입술을 삐죽였다.

“그럼 전하께서 백작부인을 아직 만나신다는 말이로군요.”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결혼하신 이후 만나신 적 없습니다. 하늘을 두고 거짓이 아니라 맹세할 수 있습니다.”

루시아는 풋 웃음을 터뜨렸다.

“뭘 그렇게 정색을 하고 그래요. 만날 수도 있지.”

“예?”

“아니에요. 아무튼, 고마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제롬은 어쩐지 마님이 무서워졌다.

“아, 그리고.”

“예?”

제롬은 기겁했다. ‘마님 제발!’ 소리가 턱밑까지 올라왔다.

“왜 그리 놀라요. 내 시중드는 하녀들 말인데요.”

낭떠러지 밑으로 떠밀렸다가 누가 뒤에서 잡아주는 안도감을 느꼈다. 안정을 찾자 제롬은 정중한 집사로 되돌아왔다.

“예, 마님. 마음에 차지 않으십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 정해진 하녀가 시중들게 하지 말고 순번을 정해 며칠씩 돌아가며 하도록 조치해 줘요.”

“지금 마님을 모시는 하녀가 무슨 실수라도 했습니까?”

“특정한 하녀만 내 시중을 맡으면 하녀들 간 알력이 생기니까요. 그런 문제로 시끄러워지고 싶지 않네요. 하녀들끼리 패가 갈리면 별거 아닌 것 같아도 나중에는 다른 문제로 번질 수 있어요.”

하녀들의 생태는 잘 아는 루시아가 생각해 낸 조치였다. 루시아는 하녀로 일하는 동안 이런 방식을 택하면 하녀들 알력 문제로 골치 썩을 일은 없을 거라고 항상 생각했다.

루시아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주인이 눈에 띄게 하녀들을 차별하는 행위였다. 고용인을 대상으로 왜 불합리한 행동을 해서 분란을 자초하는지 알 수 없었다.

제롬은 눈을 껌뻑이며 얼마간 루시아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말씀하신 대로 조치하겠습니다.”

아아. 마님은 정말 놀라운 분이었다. 제롬의 몸 안에 흐르는 노예근성 가득한 피가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평생 단 한 분뿐인 주인. 그 주인이 둘로 바뀔 날이 머지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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