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시아-12화 (13/77)

12장 북부 (3)

북부는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세월 동안 오직 타란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왕이라 해도 어지간하면 북부의 일에는 관여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그 정도 장악력이라면 독립을 주장할 만하건만 타란 공작가는 단 한 번도 왕가에 반기를 든 적이 없었다.

일부 사람들이 타란 공작가를 북부의 왕이라 불러도, 명목상으로 타란 공작은 왕의 신하였다. 내버려두면 알아서 세금 바치고, 전쟁 나면 앞장서서 싸워주고, 더불어 국경의 야만족도 처리해 주고. 괜히 건드렸다가 독립이니 어쩌니 하면 골치 아팠다. 모든 왕이 같은 판단을 하지는 않았지만, 어리석은 왕만 아니라면 내버려두는 편이 이득이라는 것을 알았다.

타란은 언제나 북부의 주인으로서 자리를 지켰다. 수도의 정계에 기웃거리지 않고 오직 북부 관리에만 관심을 쏟았다. 그러나 7년 전부터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전(前) 타란 공작이 급작스럽게 타계하고 고작 열여덟 살의 어린 후계가 작위를 이었다. 얼마 안 되어 새로운 타란 공작은 전쟁 선봉장이 되어 북부를 떠났다.

타란 공작의 활약은 거대한 폭풍처럼 전쟁터를 휩쓸었다. 그의 무용은 하늘을 울리고 땅을 진동시켰다. 함께 전쟁터에 뛰어든 기사들은 모시는 주군이 누군지를 불문하고 타란 공작을 마음속 주인으로 삼았다.

타란 공작이 엄청난 전공을 쌓는 동안 오히려 북부는 조용했다. 전쟁터와 북부는 대단히 거리가 멀었다. 타란 공작의 이름이 아무리 높아져도 북부와는 아무 상관없었다.

북부인들에게 휴고는 드넓은 북부를 제대로 관리할 수 있는지 검증받지 못한 주인이었다. 나이는 어리고 오랫동안 북부를 떠나 있었으며, 칼질에만 능한 기사라는 타란 공작이 지배자의 자질을 지니고 있는지 의심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타란 공작가가 북부를 관리하는 방식에 불만을 품던 자들이었다.

다른 지역의 대영주는 소영지에 일정 세금을 부과하고 정해진 세금만 내면 그 지역 영주에게 넓은 자율권을 보장했다.

그러나 북부는 타란 가문이 전역을 세밀하게 관리했다. 세금은 물론 영지민의 삶까지 간섭했다. 영주의 횡포를 용납하지 않았다. 백성은 살기 좋아도 귀족들은 누려야 할 권리를 빼앗겼다고 생각했다.

국경에서 멀리 떨어져 야만족이 침범할 위험이 덜해서 타란 공작가의 도움이 절실하지 않은 지역, 즉 수도 가까운 지역의 일부 영주들이 연계하여 모의했다. 왕에게 탄원해 타란 가문의 영지에서 분리되어 새 대영주를 임명해 달라 청할 작정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동안 타란 공작가 눈을 피해 세금을 빼돌리고 무력을 키웠다.

그러나 그들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새로운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으으으으…….”

목이 잠겨 신음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몸은 땅속으로 꺼질 것처럼 무거웠다. 쇠꼬챙이로 머리를 쑤시는 것 같은 통증으로 괴로워하며 브라운 백작은 게슴츠레 눈을 떴다.

눈을 몇 번 껌뻑였지만 잘 떠지지 않았다. 이마에서 뜨끈하고 끈적이는 뭔가가 흘러내려 눈으로 자꾸 들어갔다. 떨리는 손을 들어 대충 이마를 닦아 확인하자 끈적이는 액체의 정체는 반쯤 굳기 시작한 핏덩어리였다.

싸한 한기가 등을 타고 올라왔다. 그제야 백작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눈에 익었다. 그의 성 중앙 홀이었다.

숨죽여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확인한 브라운 백작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한구석에 수십의 사람이 몰려 꿇어앉아 있었다. 얼굴은 눈물 자국으로 엉망이고 북받치는 울음으로 거세게 어깨가 흔들렸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 새어 나오는 소리를 꺽꺽거리며 누르는 모습이 비참하고 가련했다.

모두 아는 사람들이었다. 아내와 자식들. 측근 수하와 일가친척들까지. 그야말로 백작과 조금이라도 관련 있는 자들은 모두 저기 있었다.

거기서 뭐 하고 있느냐 물으려 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백작과 눈이 마주친 가족은 더 엉망으로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들 눈에 가득한 절망과 원망을 보며 브라운 백작은 넋을 놓았다.

“쥐새끼를 놓쳤다고.”

“송구합니다, 전하.”

발걸음 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들렸다. 가죽신이 돌바닥을 밟으며 저벅저벅 내는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열린 문을 통해 중앙 홀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한 사람이 앞서고 다른 사람들이 옆과 뒤에서 따르는 식이었다.

브라운 백작의 눈이 커지며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검은 머리에 붉은 눈. 북부의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는 신체적 특징이었다. 타란 공작은 대대로 검은 머리에 붉은 눈이었다. 평생 공작의 얼굴을 본 적 없는 사람이라도 그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흘끔. 검은 머리의 장신의 사내와 눈을 마주치자 브라운 백작은 소스라치며 주춤 물러났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마치 뱀을 마주친 개구리처럼 벌벌 떨었다. 백작은 꼼짝하지 못하고 무거운 무게추가 달린 것처럼 고개를 떨어뜨렸다.

한 걸음 앞까지 다가와 발이 멈추었다. 차가운 금속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백작의 턱에 닿았다. 날카로운 검의 면이 턱밑을 받쳐 고개를 위로 올리게 했다.

백작은 왜 지금 기절하지 않는 걸까 한탄했다. 가슴만 가린 검은색 갑주에는 진득하게 뭔가 잔뜩 묻어있었다. 색이 제대로 보이지 않으나 그것이 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노출된 팔다리의 셔츠나 바지가 그야말로 완전히 피에 절어있었기 때문이었다.

백작의 턱을 받치고 있는 검날은 물론이고 검은 머리 사내의 얼굴에도 피가 튀어 번져있었다. 백작은 하의가 뜨듯하게 젖어드는 것을 느꼈다. 소변을 지린 것을 눈치챘는지 검은 머리 사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브라운 백작. 본인 맞나?”

“예… 예.”

“네 후계인 아들놈이 혼자 내뺐다. 어디라고 짐작할 만한 곳은?”

“예……?”

휴고는 쯧, 혀를 찼다. 완전히 넋이 나가 제대로 된 대답을 듣기는 틀렸다. 쥐새끼 몰이는 좀 시간이 걸리겠군. 옆으로 손을 내밀어 손짓하자 기사 하나가 얼른 서류 하나를 건넸다. 휴고는 그것을 백작 앞으로 내던졌다.

“거기 서명. 본인이 한 것 맞나?”

백작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집어 들어 확인했다. 왕에게 보내려 작성한 탄원서였다. 연계한 귀족들 이름이 쭉 서명되어 있고 그중에는 본인의 것도 있었다. 몸을 받치고 있는 바닥이 아득한 무저갱으로 꺼지는 것 같았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재… 재판. 폐하께 재판을…….”

백작의 턱이 덜덜 떨렸다. 자신은 타란 공작가의 봉신이지만, 동시에 왕의 봉신이기도 했다. 왕의 봉신으로서 왕께 중재를 청할 권리가 있었다. 아무리 공작이라도 자신을 이런 식으로 역모를 저지른 죄인처럼 취급할 수는 없었다.

“재판.”

고저 없는 목소리가 중얼거렸다.

“오늘 아침에 봤던 놈도 같은 소리를 지껄였지.”

백작의 전신에 와르르 소름이 돋았다. 그의 본능이 귓가에 죽음을 속삭였다. 즉시 바닥에 고개를 박았다.

“사… 살려 주십시오! 살려 주십시오! 전하!”

살아야 한다는 것만 머릿속 가득했다. 목숨 대신이라면 어떤 대가도 치를 준비가 되어있었다.

무엇을 가지고 있고 어느 정도 재물을 당신께 바칠 것인지 설명하고 싶었지만 입안에서만 맴돌고 나오지 않았다. 심장이 타들어갈 것 같고 위가 바짝 죄는 것같이 아팠다. 저절로 눈에서는 마구 눈물이 흘렀다.

“어째 하나같이 새로운 놈이 없군.”

그의 목소리에 지루함이 담겼다.

“고개 들어.”

뒤에서 누가 머리채를 잡아 거칠게 당기는 것처럼 백작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공포에 질린 백작을 바라보는 핏빛 눈동자는 무심했다. 자그마한 분노나 흥분조차 없었다. 백작은 그것이 더 무서워 오싹 소름이 돋았다. 깊은 곳에 숨어있는 사나운 살기를 눈치챘다. 그건 사냥감을 바라보는 도약 직전 맹수의 눈이었다.

휴고가 쥔 검이 목에 아슬아슬 닿을 정도로 겨누다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와 가슴께에 닿았다. 왼쪽 심장이 위치한 바로 그곳. 거기서 멈춘 검 끝이 서서히 안으로 파고들었다.

“컥……. 사… 살려…….”

제 심장에 검이 파고드는 것을 보면서도 백작은 몸을 뒤로 뺄 생각은 감히 하지도 못하는 것처럼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점점 더 검이 파고들수록 몸의 경련은 커지고 눈이 뒤집히며 입에서 붉은 선혈이 흘러 컥컥거렸다.

공작의 살인 행각에 이미 만성이 된 기사들은 뒤에서 속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이야. 저거 어려운 건데. 별로 힘도 주지 않으면서 어떻게 검이 옷을 뚫고 살 안을 두부처럼 파고드는 걸까. 파비안이 공작의 정예 기사들을 미친놈들이라고 칭하는 이유가 있었다.

죽어가는 자의 눈에서 천차만별 변해가는 감정을 보면서도 휴고는 눈동자조차 흔들리지 않았다. 경련이 멈출 때까지 검은 계속 심장을 헤집었다. 고통보다 더한 공포로 몸부림치다가 백작의 숨이 끊어지는 순간, 심장에 박힌 검이 빠르게 빠져나와 그대로 목을 옆으로 내리쳤다.

퍽.

목뼈가 갈라지는 소리가 나면서 잘린 목이 날아가 저만치 굴러갔다.

“꺄아아악!”

“아아악!!”

구석에 숨죽이고 있던 백작의 혈족들이 소리 지르며 울기 시작했다.

“시끄럽군.”

나지막한 소리에 뒤에 서있던 기사들이 서로 눈짓하다가 백작의 혈족들에게 다가갔다. 사람들은 다가오는 기사들을 보며 더 발작적으로 울기 시작했다.

“전하!!”

파비안이 소리치며 달려왔다.

“다 죽이시면 안 됩니다! 여기 일할 사람이 없단 말입니다! 행정 마비란 말입니다!”

기사들이 걸음을 멈칫하고, 백작의 혈족들이 입을 꽉 다물어 있는 힘껏 울음을 참으며 마지막 구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파비안을 바라보았다. 혈귀처럼 온몸이 피범벅인 공작은 섬뜩함을 자아냈지만 파비안은 전혀 거리낌 없이 악악거리며 발을 동동거렸다.

“로암에서 사람 데려오라고 했을 텐데.”

“로암은 사람이 넘쳐나는 줄 아십니까? 일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예외는 없다.”

총 열세 명의 영주가 작당했고, 휴고는 현재 일곱 곳을 방문했다. 지나온 여섯 개의 영지가 그야말로 초토화되었다. 영주와 가신, 그 혈족까지 젖먹이 하나 남기지 않고 참살되었다. 그 수가 근 수백에 이르렀다.

“예외 좀 만드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미 지나온 곳 일 처리만 해도 등허리가 휩니다, 등허리가 휘어요!”

“후환은 남기지 않아. 뭐 하나. 내가 직접 해?”

기사들이 하, 대답하고 즉시 검을 빼어 들었다. 칼로 살이 베이는 소리와 울음, 비명이 섞여 아비규환이었다. 근 50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모두 고깃덩이로 변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금방이었다. 순식간에 피비린내가 홀을 가득 채워 진동했다.

“하아…….”

파비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일거리가 눈에 보였다. 아 진짜! 이놈들은 왜 주제도 모르고 까불다가 이 꼴을 당해서 내 일을 보태는가! 수천 명의 목숨보다 파비안은 자신의 휴식 시간이 더 중요했다. 기사들이 보기엔 파비안이야말로 확실히 미친놈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완전히 벌레 잡아 누르듯 죽이시는군.’

참혹한 상황에 대한 파비안의 감상평은 짧았다. 워낙 이골이 났다. 그리고 모든 잘못을 스스로 야기한 놈들에게 전가했다.

‘나 같으면 차라리 자살을 하겠다. 멍청한 놈들.’

놈들은 북부 지배자의 성정을 너무 몰랐다. 휴고는 복잡한 걸 싫어했다. 꼬인 실을 풀기보다 잘라버리는 쪽을 취한다. 수틀리면 용서란 없었다. 파비안은 주군의 잔인함이 가끔 과하다고 보았지만 우유부단함보다는 백 번 낫다고 생각했다.

“내일 새벽에 떠나겠다.”

“예!”

기사들이 입을 모아 우렁차게 대답했다. 옆에서 파비안은 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 처리 하나는 정말 빠르기도 하시지. 이대로 가다가는 다 마무리하는 데 한 달도 걸리지 않겠다.

영주 열세 명이면 결코 적은 수가 아니었다. 규모는 작지만 영지전 수준이다. 그러나 타란 공작가의 기사들은 보통의 기사들과 수준이 달랐다. 꾸준히 야만족과 싸우며 기른 실력이었다. 실전 경험은 물론이고 살인 기술까지 탁월했다. 더구나 공작께서 친히 검을 휘두르는데 기사들이 조금이라도 몸을 사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공작을 비롯한 기사들은 독기가 바짝 오른 야만족들을 상대하고 전쟁터를 누비며 날뛰던 살인귀들이었다. 이런 작은 소영지의 병사들을 상대로 공작과 기사들은 양 떼 속에 뛰어든 범이었다.

기사 하나가 빠른 걸음으로 들어와 우두머리 기사에게 고했다. 단장 엘리엇이 공작에게 방금 들어온 소식을 전했다.

“놈을 잡았다 합니다.”

“데려와.”

고갯짓으로 대화를 나눈 기사들이 나가고 잠시 후에 기사 둘에게 양팔을 붙잡혀 한 남자가 거의 질질 끌려왔다. 지저분하긴 했지만 비교적 상태는 양호한 젊은 남자는 곧 안의 참상을 보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러다 기사에게 뒷목을 얻어맞고 바닥에 쓰러졌다.

“흐어어엉!”

남자는 바닥에 엎어져 발작적으로 통곡했다. 실컷 울도록 배려해 줄 휴고가 아니었다. 걷어찰 작정으로 다가갔던 휴고는 울던 녀석이 느닷없이 이제는 웃기 시작하자 멈추었다.

“푸하하하!!”

미친 건가, 싶었지만 눈은 제정신으로 보였다.

“닥쳐라. 목을 따버리기 전에.”

나지막하지만 살벌한 경고에 남자는 웃음을 멈추고 크게 숨을 몰아쉬며 격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제대로 자리를 잡아 무릎을 꿇고 바닥에 고개를 박았다.

“죽이십시오.”

처음이었다. 살려달라 매달리지 않는 놈은.

“뭐지, 이건?”

저한테 한 질문임을 알고 파비안이 얼른 나섰다.

“브라운 백작의 전처 자식입니다. 후계가 된 건 1년 남짓인데 아마 이번 모의가 발각될 경우를 대비한 희생양인 것 같습니다.”

“딴 놈들은 이런 거 없었는데?”

“브라운 백작은 좀 머리 굴리기를 좋아하는 자였습니다.”

“여기는 저놈에게 맡겨.”

“정말이십니까?”

파비안이 반색했다.

“죽여 주십시오! 전하!”

살려주고 영지까지 주겠다는데 남자는 오히려 죽여달라 매달렸다. 파비안이 이놈이 미쳤나 눈을 부라렸다. 겨우 일이 좀 줄어드는가 희희낙락했더니 초를 치고 있었다.

“왜?”

“제 몸에… 제 몸에 흐르는 이 피가 증오스럽습니다.”

제 두 손을 마치 구역질 나는 쓰레기처럼 일그러진 눈으로 바라보는 남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휴고의 입술 한쪽이 비뚜로 올라갔다.

“증오하지만 스스로 버리지 못하겠다면 안고 살아라.”

내가 내 몸에 흐르는 피를 버리지 못하는 것처럼.

남자는 충격 어린 눈으로 멍하게 휴고를 올려보았다. 휴고는 남자에게서 돌아섰다.

“내 이름은 히우다. 날 그렇게 부르던 새끼들 언어로는 마귀, 악마 뭐 그런 뜻이라더군.”

“휴? 우와. 우린 생긴 것만큼이나 이름도 똑같네! 난 휴고야.”

“휴가 아니라 히우라니까. 멍청아.”

“히우, 히우, 휴. 빨리 부르면 똑같잖아. 휴. 네 이름은 ‘휴’인 거야.”

“…….”

“난 지금껏 내가 혼자인 줄 알았어. 하지만 이제 우리는 혼자가 아니야. 그렇지? 휴.”

“병신. 머릿속이 아주 해맑다 못해 텅텅 비었구나. 저 영감탱이가 뭔 짓하려는지 몰라서 그래? 너나 나 둘 중 하나는 죽일 거라고.”

“내가 널 지켜줄게.”

“빌빌거리는 새끼가.”

“너도 날 지켜주면 되잖아.”

그의 차갑게 얼어붙은 심장은 여전히 그때를 떠올리면 날카로운 바늘로 쑤시는 것처럼 아팠다.

“너를 위해서야, 휴. 사랑해. 내 동생. 나의 형.”

휴고는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형제에게 언제나 말해 주고 싶었다.

너는 틀렸어.

정말 나를 위해서였다면, 그날 내 심장에 칼을 박았어야 했다. 너는 이 한심하고 너절한 세상에 나를 버렸다.

‘술이 당기는군.’

그래봤자 취하지는 않겠지만. 이 세상의 모든 술을 다 마셔도 아마 그는 취하지 않을 것이다. 술도, 계집도, 살인도. 아무리 즐겨도 취할 수 없다. 그 어떤 일을 겪어도 미치지 않고, 아무리 생목숨의 목을 잡아 뜯어도 악몽 한 번 꾸지 않았다. 타란 혈족에게 흐르는 피는 그렇게 지독했다. 그러니 괴물인 것이다.

그는 아무리 피에 젖은 혈귀가 되어도 순식간에 고귀한 귀족으로 바뀔 수 있었다. 두 가지 모습이 모두 그 자신이었으니까.

‘지겨워.’

그가 사는 세상은 너무 지루했다.

* * *

루시아는 틈틈이 로암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로암 어디에도 루시아가 가지 못할 곳은 없었다.

중앙탑을 비롯한 부속 건물들을 높은 내벽이 둘러싸고 있으며 내벽 위에는 동서남북 4방향으로 탑이 솟아있었다. 올라가면 로암의 모습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탑들이었다.

그러나 서쪽 탑에는 가지 못했다. 서쪽 탑으로 올라가는 문은 굳게 잠겨있었다. 몇 번을 와도 계속 잠겨있어 곁을 따르는 하녀에게 물었다.

“왜 여기는 잠겨있지? 열쇠를 가져오너라.”

“마님. 이곳에는… 들어가지 않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왜?”

하녀는 몹시 내키지 않는 안색으로 답했다.

“유령이 나온다는 곳입니다.”

하녀는 몹시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꺼낸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루시아는 잠시 후에 피식 웃었다.

“유령? 누가 봤다든?”

하녀는 누가 유령을 봤고, 유령을 본 사람이 어떤 끔찍한 일을 맞았는지 친구의 친구, 먼 친척 누구의 아는 사람까지 꺼내가며 열변을 토했다. 그러나 하녀가 직접 본 건 아니었고, 봤다는 사람 중에는 하녀의 가까운 사람도 없었다. 그야말로 어디서 주워 들은 소문이었다.

“그럼 유령이 왜 출몰한다는 것이지? 이유가 있을 것 아니냐.”

“…저도 정확한 이유는 모릅니다. 하지만 다들 여기서 유령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하녀에게 좀 더 물어 확인해 보자 이곳에서 유령이 나온다는 것은 로암을 드나드는 모든 사람에게 퍼져있는 말이었다. 이 정도라면 그냥 뜬소문 정도가 아니라 뭔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루시아는 이 호기심을 해결해 줄 아주 훌륭한 해결사를 한 명 알고 있었다.

“제롬, 물어볼 것이 있는데요.”

제롬은 마님 입에서 나오는 ‘물어볼 것’이라는 말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웠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고 코 밑에 식은땀이 맺혔다.

“예, 마님. 말씀하시지요.”

“서쪽 탑. 들어가지 못하게 해 놓았더군요. 모두 유령이 나온다고 입을 모아 말하네요. 정말 유령이 나오나요?”

제롬은 침을 꿀꺽 삼켰다. 역시 마님의 질문 중에 범상한 것은 없었다.

“…그런 소문이 있습니다만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올라가 봤군요?”

“예. 다만, 올라간 사람이 횡액을 당했다는 등의 근거 없는 소문이 자꾸 만들어져서 출입을 통제했습니다.”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왜 자꾸 그런 소문이 돌지요?”

“…그 안에서 사람이 죽은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던 거군요?”

“예. 살인 사건이었습니다.”

“어머나.”

입으로는 안타까운 것처럼 탄식했으나 그녀의 눈은 반짝거렸다.

“누가, 왜, 어쩌다가요? 내성 안에서 살인이라니. 보통 사건이 아니었겠군요.”

하아. 제롬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을 마님께 알려드려야 하는 것인지 그는 고민했다. 하지만 일개 집사인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안주인께서 몰라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제롬에게 루시아는 이미 완벽한 타란의 안주인이었다.

“제가 주인님을 모시기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 저도 건너 들었을 뿐입니다. 서쪽 탑에서 돌아가신 분은 전 공작부부 내외분이십니다.”

추리 소설을 읽는 것처럼 가벼운 마음이었던 루시아의 안색이 단번에 굳었다.

“…세상에. 아니……. 왜.”

“이 일은 타란 공작가의 비사입니다. 오래전 일이고, 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님께서는 마땅히 아셔도 될 것 같아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설이 길었다. 루시아는 긴장했다.

“일전에 주인님께 쌍둥이 형제분이 있었다고 말씀드렸지요.”

“기억해요.”

“돌아가신 전 공작께서는 장차 후계 다툼이 일어날 것을 저어하셨습니다. 그래서 끔찍한 선택을 하셨지요. 아들 하나는 후계로 남기고 하나는 버리셨습니다. 죽이려 하셨는지까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버려진 분이 장성해서 나타나 공작부부 내외분의 목숨을 앗았습니다.”

맙소사. 루시아는 이 엄청난 비사에 심장이 섬뜩 내려앉고 손이 저절로 떨렸다.

“당시 주인님께서는 로암에 계시지 않아 화를 피했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저는 이곳에 없었기에 정확한 사정까지는 모릅니다. 그 일로 전 공작부부 내외가 돌아가시고 주인님께서 작위를 승계하셨습니다.”

그가 과거에 그런 고통을 겪었다니. 그는 단 한 번도 아픔 따위는 느껴본 적 없는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럼 그 쌍둥이 형제가… 친부모를 모두 해쳤다는 건가요?”

“전 공작께서 친부는 맞지만 공작부인은 아닙니다. 주인님의 생모께서는 출산 후 얼마 안 되어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친부를 자식이 살해한 건 분명히 끔찍한 일이지만 친모는 아니었다는 사실에 왠지 모르게 루시아는 안심했다. 아마 그녀의 개인적 경험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루시아에게 친부는 증오할 가치조차 없는 존재였지만 어머니는 이 세상 유일하고 소중한 사랑이었다.

“그분은 정말… 강하군요. 그런 끔찍한 일을 겪은 분이라고는 도저히…….”

“예, 강한 분입니다.”

그의 강함이 루시아는 어쩐지 매우 안타까웠다. 지금 당장 그를 꼭 안아주고 싶었다. 어쩌면 그는 그런 엄청난 과거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이런 그녀의 마음이 오히려 그에게 성가실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를 위로해 주고 싶었다. 그가 조금 제멋대로 굴고 속상하게 해도 지금 마음 같아서는 모두 용서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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