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시아-17화 (18/77)

17장 공작 부부 (5)

며칠 지나지 않아서 제롬은 루시아에게 매달렸다.

“마님. 회임이신지 아닌지만 확실히 해주십시오.”

결국 루시아는 안나의 진료를 받았다.

“마지막 월경은 언제 하셨습니까?”

제롬은 루시아와 약속했다. 회임인지 아닌지만 확인하기로. 월경하지 않는 몸 상태를 거론한다든가, 그런 상태에 대해 공작에게 알리는 일 등은 일단 루시아에게 맡겨두기로 했다. 루시아는 제롬을 흘끗 보고 대답했다.

“…지난달에요.”

안나는 몇 가지 임신을 의심할 만한 증상이 나타나는지 확인했다.

“회임은 아니신 듯합니다.”

안나가 고개를 내저을 때,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루시아와 대조적으로 제롬은 미세하지만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마님이 보기 전에 재빨리 그런 기색을 감추었다. 자신의 실망으로 혹시라도 마님께 상처를 드리고 싶지 않았다.

“지난달에 마지막 월경을 하셨다면 회임하셨다고 해도 지금 진단을 내리기에는 이릅니다. 회임을 의심할 만한 무슨 증상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아닙니다, 안나. 요즘 마님께서 피곤해하시는 것 같아서…….”

“보약을 지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간격을 두고 안나는 따지는 것처럼 말했다.

“의사의 사견으로 마님께서 피곤해하시는 건 다른 이유입니다. 여자 몸은 강철이 아니에요, 집사님. 공작 전하께 말씀 한번 올려 보시지요. 뭐든 적당해야 하는 겁니다. 기운이 펄펄 나야 하는 저 젊은 나이의 마님께서 벌써 보약을 드신다고요? 일할 때도 휴식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이것도 마찬가지예요.”

안나는 의사로서의 객관적인 의견을 말하는 것뿐이지만 그녀의 말이 길어질수록 분위기는 점점 묘해졌다. 제롬은 불편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루시아의 고개는 점점 아래로 떨어졌다.

“마님도 힘드시지요? 전하께 말씀을 드리세요.”

그렇게까지 힘든 건 아닌데. 루시아는 발간 얼굴로 차마 그 말을 하지는 못했다. 지금 이 분위기에서 ‘그분이 매일 내 침실에 드는 것이 좋아요.’라고는 도무지 말할 수 없었다.

“집사님이 힘드시면 제가 직접 말씀 올릴까요?”

“아… 아닙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를…….”

“닷새. 그리고 하루 쉬세요.”

“…예.”

민망해하는 분위기를 읽으면서도 안나는 뻔뻔했다. 원래 의사가 환자 몸 상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민망해하다가는 제대로 된 치료를 하지 못하는 법이다.

모두 물러가고 혼자가 되자 루시아는 침실로 들어와 큰 창을 열고 발코니로 나왔다. 부드러운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임신이 아니라는 진단을 듣고 잠깐이지만 제롬 목소리에서 기운이 빠졌다. 그래서일까. 루시아도 조금은 속이 상했다.

꿈속의 열다섯 살.

루시아는 초경을 시작했다. 그 증상이 여인이 되었음을 알려주는 신호라는 것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공주의 성교육은 대개 여관이 맡는데 별궁에는 여관이 없었고, 시녀들은 자기 일이 아니라 상관하지 않았다.

고아나 마찬가지인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공주는 시녀들에겐 모셔야 하는 주인이 아니라 뒤치다꺼리해야 하는 짐이었다. 월경혈이 묻은 침대보를 보았을 때 시녀들은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늘어난 빨랫감을 챙겼다.

궁에 들어온 이후 루시아는 어릴 때의 발랄함을 거의 잃은 상태였다. 갈수록 소심해지고 말수는 적어졌다. 당시의 어린 루시아는 아랫사람을 부리는 위엄조차도 전혀 배우지 못했다.

‘나는 곧 죽을지도 몰라.’

몸에서 피를 쏟는다는 사실 자체는 소녀에게 공포였다. 그녀는 극한의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피를 멈춰야 해. 그러면… 약을… 약을 먹어야…….’

피를 멈추는 약. 그때 루시아 머릿속에 정확히 떠오르는 약초가 하나 있었다. 삼엽쑥이라는 풀이었다.

삼엽쑥은 세 장 잎이 나는 대단히 흔한 잡초였다. 여기저기서 쉽게 볼 수 있고, 별궁 뜰에도 소복하게 돋아있었다. 효과가 대단히 미약했기 때문에 약초라기보다는 잡초에 가까웠다. 실제로 의사들은 이 풀을 약으로 쓰지 않았다.

삼엽쑥을 푹푹 찌고 바싹 말려 빻아서 가루를 상처에 뿌리면 그런대로 지혈 효과가 있었다. 들이는 수고보다 미미한 효과라서 의사를 찾지 못할 정도로 가난한 평민들이 응급조치를 위해 흔하게 집에 비치하는 비상약이었다.

루시아는 삼엽쑥이 피를 멈추게 하는 기능이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배웠다. 동네 아이들과 삼엽쑥을 캔답시고 여기저기 풀밭을 뒤지고 다녔다. 넘어져 무릎이 깨졌을 때 가루를 뿌리니까 잠시 후 피가 멈추는 것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루시아는 뜰에서 삼엽쑥을 캐서 복용했다. 먹는 방법을 몰라서 그냥 생으로 씹어 먹었다. 몸 안에서 피가 나니까 먹어야 한다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놀랍게도 효과는 나타났다. 월경혈이 멈추었다. 그래서 그다음 달 또다시 피가 나자 다시 복용했고, 그렇게 반년을 먹고 나자 그 이후부터 월경은 없었다.

그녀는 당시에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다. 불임이라는 단어 자체도 몰랐던 때였다. 그 후에 메튼 백작과 결혼생활을 하던 중에 그 사실을 알았다.

‘다행이다.’

제일 처음 든 생각이었다. 절대 백작의 아이를 낳을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알자 낭떠러지를 걷다가 평지를 내딛는 것처럼 마음이 편했다.

결혼생활이 끝나고 자유가 되었을 때 비로소 루시아는 자신의 몸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무월경의 상태 외에 딱히 몸에 어떤 이상은 없었다. 하지만 여자로서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었다.

루시아는 치료법을 찾기 시작했다. 찾아가는 의사마다 모두 고개를 내저었다. 그들은 삼엽쑥은 절대 먹어서는 안 되는 독초라고 입을 모았다.

“먹었다고요? 대체 왜 그런 짓을…….”

대부분의 의사는 루시아의 증상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오히려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는 듯 신기해했다.

루시아 경우와 비슷한 증상을 본 적 있다고 하는, 드물지만 유능한 의사도 있었다.

“삼엽쑥을 여인이 월경 중에 간혹 뭘 몰라서 먹었다가 월경혈이 멈추었다는 증상은 본 적 있지만 장기 복용해서 아예 불임 상태가 된 건 처음 보는 경우라……. 그런데 결혼은 하셨습니까? 월경이 불규칙해도 임신은 가능합니다. 불임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월경이 불규칙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지만. 그래도 아이를 갖기 위한 노력을 해본 적은 없어서 정말 임신이 될지 안 될지는 확신을 하고 대답할 수 없었다.

조금 더 잡지식이 많은 의사는 새로운 정보를 주기도 했다.

“아주 오래전 전쟁에 패하면 여자들이 무조건 잡혀갈 때, 원수의 자식을 배지 않으려 일부러 여자들이 삼엽쑥을 먹었다는 이야기는 있더군요.”

의사들의 대답은 늘 애매모호했다. 루시아는 포기하지 않고 틈틈이 용하다는 의사는 모두 수소문해서 만나러 다녔다. 그러는 사이 나이는 점점 들어갔다.

거의 포기할 즈음이었다. 나이는 제법 들었고, 딱히 사는 데 불편함은 없으니까 ‘이젠 모르겠다.’ 하는 심정이었다. 그녀가 살던 마을에 어느 날 우연히 떠돌이 의사가 들렀다.

처음엔 마을 사람들은 본인이 의사라고 주장하는 구질구질한 차림의 떠돌이 노인 말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동안 의사가 마을에 머물며 치료를 해주고, 효과를 보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자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루시아는 밑져야 본전으로 의사를 찾아갔다. 의사는 마을 사람 누군가 남는 방을 내준 곳에 머물며 처음 마을에 왔을 때처럼 허름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잠깐 대화를 나누자 겉보기와 다른 모습이 드러났다. 노인의 표정과 말투는 정갈했고, 어딘지 모르게 기품이 있었다.

“정말 아가씨가 삼엽쑥을 먹었단 말이오? 그래서 월경이 멈추었다고?”

처음 증상을 상담하면 의사들은 열이면 열 모두 굉장히 희귀한 동물을 바라보는 눈을 했다. 그 후에는 당혹해했다. 그러나 이 의사는 달랐다. 몹시 놀라워하면서 동시에 재미있어했다.

“왜. 언제. 어느 정도나 먹었소?”

지금까지의 의사와 다른 반응을 보이자 루시아는 한 줄기 희망에 기대어 성심껏 모든 질문에 응했다.

“초경부터라…….”

의사의 눈이 기이하게 빛났다.

“혹시 아가씨, 처녀요?”

“아니요. 결혼도 했었는걸요. 그러니까 저 아가씨 아니에요.”

사실 거의 처녀나 다름이 없기는 했지만 의사에게 그런 것까지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의사는 어쩐지 조금 실망하다가 씁쓸하게 웃었다.

“내 눈에는 아주 어린 아가씨라오.”

“이 상태는 불임이 맞나요?”

“맞소.”

지금까지 의사 중 가장 정확한 답을 주었지만 절망적이었다.

“저는……. 치료할 수 있는 건가요?”

의사는 껄껄 웃으며 지금껏 누구도 하지 못했던 완치를 장담했다.

“아가씨는 운이 좋은 거요. 이건 우리 집안에만 내려오는 치료법이거든.”

그러면서 여러 가지 약초를 배합한 처방전을 주었다. 따로 적어준 것이 아니라 짐을 뒤져 노트를 꺼내더니 거기서 한 페이지를 북 찢어주었다.

“집안에만 내려오는 비법이라면서 이렇게 주셔도 되는 건가요?”

“어차피 더는 필요 없는 것이라.”

그렇게 말하는 의사 표정은 좀 서글퍼 보였다.

“정말… 나을 수 있을까요? 다들 삼엽쑥은 독초라고 했어요.”

의사의 처방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동안 고생과 비교하면 너무 간단히 치료된다고 하자 이 상황 자체가 믿기지 않았다.

“독초라……. 그렇게 알려져 있긴 하지만. 내 아가씨에게만 특별히 알려주지. 삼엽쑥에는 놀라운 효능이 있다오. 먹으면 사람 몸을 깨끗하게 정화하지. 월경혈이 멈추는 것도 그런 이유라오. 하지만 인간의 몸 자체는 원래 불순물 덩어리. 억지로 정화한다고 좋은 건 없지. 삼엽쑥 효과가 너무 강해 그런 부작용이 일어나는 것이지만 몸에 해를 주는 건 아니라오. 아가씨도 지금껏 딱히 월경이 없다고 어디 아프거나 하진 않았지?”

“네.”

“그리고 사실 삼엽쑥을 먹어 불임이 되려면 초경 때부터 장기간 먹어야만 하지. 바로 아가씨처럼. 그게 아니면 잠시 월경혈이 멈추기는 해도 그 외에 다른 증상은 없거든. 당연히 불임은 아니고. 하지만 사람들은 월경혈이 멈춘다는 증상 하나로만 독초 취급하더군. 아무튼, 독이 아니니까 삼엽쑥 효과를 약화시키면 몸은 원래대로 돌아간다오. 이대로 지켜서 먹으면 분명히 나을 것이오. 예쁜 아이 낳고 행복한 부모 되길 바라겠소.”

얼마 후 의사는 마을을 떠났다. 처음 의사가 왔을 때는 웬 놈이 굴러들어왔나 경계하던 마을 사람들은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루시아는 의사가 준 처방대로 약방에서 약초를 구매했다.

“왜 이것들을 같이 사는 거요? 설마 이걸 같이 배합할 건 아니겠지? 이대로 먹으면 큰일 나요.”

의사가 주고 간 처방은 아무래도 상식적인 배합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루시아는 더 나빠져봐야 뭐가 있겠나 싶어 그대로 약을 만들어 복용하기 시작했다.

월 1회 이상. 월경이 시작될 때까지 꾸준한 복용.

먹는 방법도, 횟수도 간단했다. 과연 이래서 효과가 있을까 고개를 갸웃했지만 일단 믿고 복용했다.

꽤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루시아는 월경을 시작했다.

꿈속이 아닌 지금의 루시아는 열다섯 살 똑같은 나이에 초경이 시작되었을 때, 꿈속처럼 당황하지 않았다. 병이 아니라는 것도, 죽지 않으리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열다섯 살의 루시아는 꿈속과는 다른 이유로 심리가 몹시 불안정했다. 미래를 알면 뭐든 바꿀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별궁에 갇혀 사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어린 공주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다가올 미래는 반드시 그리될 것이라는 예언처럼 느껴졌다. 스물한 살에 그자와 또 결혼할 생각을 하니 끔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 공포는 초경을 시작했을 때 극에 달했다.

‘그놈 애는 절대 낳기 싫어.’

임신이 그리 쉽게 되지 않는다는 점은 알고 있었다. 세상엔 금실 좋아도 아이가 없는 부부가 많다. 더구나 메튼 백작의 성기능을 고려하면 그다지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그래도 아주 미세한 가능성조차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자신을 스스로 불임으로 만드는 길을 택했다. 꿈속에서 만난 의사는 삼엽쑥을 독이 아니라고 했다. 그때 받았던 치료 처방전은 기억에 남아있었다. 언제든 약을 먹으면 치료할 수 있으니까 지금 당장 불임이 된다고 해도 걱정은 별로 없었다.

현재 루시아는 마음만 먹으면 불임을 치료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그렇게 큰소리쳐 놓고 인제 와서.

‘그때는… 이혼하게 될 줄 알았지…….’

그에게 결혼을 제안할 때만 해도 분명히 몇 년 살면 그가 이혼을 요구할 줄 알았다. 아니면 적당한 시간이 흐른 후에 자신이 요구해도 될 것으로 생각했고. 그런데.

‘이혼…해 줄 것 같지 않아.’

그가 가문의 전통을 들먹이지 않았더라도 그는 귀찮아서 이혼 과정을 진행할 사람이 아니었다. 다른 여자가 죽도록 좋아져서 꼭 결혼하고 싶어진다면 모를까 아무리 봐도 그럴 가능성도 없는 것 같고.

‘후회하지 않기로 했잖아……. 다 감수하리라 마음먹었잖아…….’

그녀의 인생에 아이는 없다. 결혼증서에 서명하면서 그건 이미 각오했다.

“예쁜 아이 낳고 행복한 부모 되길 바라겠소.”

그때 그 의사의 덕담은 꿈에서도 지금도 결국 이루어질 수 없는가 보다. 그 의사 이름이 아마. 루시아는 기억을 더듬었다.

“필립.”

그래. 그런 이름이었다.

* * *

오후, 늘 하는 것처럼 제롬은 공작의 집무실로 조용히 차를 가지고 들어갔다. 누가 들어오는지 뻔한 일이라 휴고는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하지만 책상 곁에 서있는 제롬이 물러가지 않자 고개를 들었다. 공작의 시선이 닿자 제롬이 입을 열었다.

“전하. 내일 마님께서 티파티를 열기로 계획 중이십니다.”

“그래. 들어 알고 있다.”

“마님께서 여시는 첫 자리인데 축하 선물을 보내심이 어떠신지요.”

“선물?”

그는 흐음, 중얼거리며 펜을 놓고 좀 더 편하게 의자에 등을 기댔다.

“선물이라…….”

“예. 마님께서 무척 기뻐하실 겁니다.”

그러고 보니 딱히 그녀에게 뭔가 선물을 해준 것이 없었다. 그는 여자에게 알아서 선물을 주는 편이 아니다. 이것저것 해달라면 해주는 스타일이라 아무것도 해달라는 것 없는 그녀에게 딱히 뭘 줘야 할지 몰라 줄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나마 내비예산을 아주 두둑하게 챙겨준 정도일까.

해달라는 것도 아닌데 불쑥 뭔가 주기는 그렇지만 처음으로 북부 사교계에 데뷔하는 자리이니까 명분은 충분했다. 생각지도 못하다가 선물을 받으면 좋아하겠지?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그에게 감사를 표할 그녀를 생각하자 왠지 흐뭇했다.

뭐가 좋을까. 보석? 아니면 보석? 그것도 아니면 보석? 그가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의 한계였다. 여자가 보석을 좋아하는 건 분명히 확실한데 이상하게 그녀도 그걸 좋아할 것이라는 확신이 생기지 않았다.

그의 고민은 깊어져가고 제롬은 참을성 있게 주인의 답을 기다렸다. 제롬의 귀에 조용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롬은 생각하는 주인을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나갔다가 잠시 후 다시 들어왔다.

“전하. 밖에 필립 경이 와있습니다. 오랜만에 로암에 돌아와 전하께 인사를 드린다고 합니다.”

* * *

대대로 타란 가문에 속해 충성하는 주치의 필립은 휴고가 오랜 시간 영지를 떠나있는 동안에 로암에 없었다. 정확히 누구도 필립이 어디 갔는지 알지 못했다.

여행을 다녀온다고 훌쩍 떠나서 몇 년 동안 소식 한 장 없었다. 가족과 친구가 없는 필립의 공석은 거의 영향이 없어서 누구도 그가 없다고 관심을 두지 않았다.

공작은 질병 한 번 앓지 않을 정도로 아주 건강했고, 귀족이라면 누구나 받는 정기적인 의사의 검진도 받지 않았다. 휴고가 공작위에 오른 이후 주치의는 하는 일이 전혀 없었다.

제롬은 필립과 몇 번 인사를 나눈 것 외에는 그다지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돌아가신 공작의 주치의이기도 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래봤자 주치의.

주치의인데 남작이라는 점은 좀 특이했다. ‘대대로 공작가를 모셨다고 하니까 공이 좀 많았구나.’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 밖에는 주치의를 전혀 신경 쓸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필립의 이름을 꺼내자마자 다소 풀어져있던 주인의 표정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붉은 눈이 번뜩이는 것을 보며 제롬은 의아함을 느꼈다.

‘단순한 주치의가 아니었나?’

빠르게 기억을 마구 뒤졌지만 주인과 필립 사이에 뭔가 잡히는 것이 없었다. 생각해 보니까 필립이 공작을 만나겠다고 찾아온 것은 처음이었다.

“…들여. 이후 부를 때까지 2층에 아무도 얼씬하지 못하게 해.”

차가운 목소리에 은근히 살기가 감돌았다.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불안을 느끼며 제롬은 공작의 명을 아주 충실히 따라야겠다고 생각했다.

“…예. 전하.”

제롬이 나가고 잠시 후 머리가 반쯤은 희끗희끗한 회색 머리카락의 노인이 들어왔다. 남자는 조용한 발걸음으로 휴고가 앉아있는 책상 앞 중앙으로 걸어와 정중하게 깊이 허리를 숙였다. 잠시 말없이 남자를 노려보던 휴고는 메마른 음성으로 말했다.

“오랜만이군. 늙은이.”

전혀 존중이 담기지 않은 호칭에도 필립은 불쾌해하지 않고 그저 엷은 미소를 띠었다.

“예,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사이 장성한 사내가 다 되셨군요.”

일개 주치의라 하기엔 어딘지 모르게 당당했고, 그에게는 귀한 분을 앞에 둔 자의 황송함이 없었다. 그러나 잔잔한 목소리 속에는 휴고를 마주하고 있는 감격이 드러났다. 마치 잘 자란 손자를 보는 조부인 것처럼. 그러나 얼어붙은 휴고의 눈빛은 풀리지 않았다.

“듣기로는 여행을 갔다던데.”

“돌아왔습니다.”

“유감이군. 떠돌다 뒈졌으면 좋았을걸. 인사했으면 꺼져. 이후 다시는 인사 따위도 오지 마. 내 앞에 그 면상 드러내지 말라고.”

마치 책이라도 읽는 것처럼. 휴고의 목소리는 건조했으나 내용만큼은 독랄했다. 뇌까리는 독설에도 필립의 안색은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조금은 안심하는 것 같았다.

“여전하십니다.”

“본질은 변하지 않는 거야.”

“도련님의 본질은 훌륭하십니다. 이 늙은이 목숨을 거두지는 않았으니까요.”

휴고는 코웃음을 쳤다.

“착각하지 마. 내가 늙은이를 살려두는 건 목숨 빚이 있기 때문이야. 그 아둔한 녀석은 목숨의 은인은 지켜야 하는 거라고 했거든.”

필립의 얼굴에 잠시 그리움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휴고 도련님은 선량한 분이셨지요. 그래서 타란의 주인이 되시기에 적합하지 않으셨습니다.”

‘휴고 도련님’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휴고의 눈빛이 아주 잠깐이지만 누그러졌다.

“그래. 나는 악마 새끼라 이 더러운 자리 지키고 있지.”

“휴 도련님.”

“그 이름으로 한 번만 더 불러봐. 입을 찢어놓을 테니까.”

휴고의 기색이 사납게 변하며 필립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먹이를 노리고 도약하기 직전의 맹수처럼 그는 지금 당장에라도 일어나 눈앞 노인의 멱을 물어뜯어 버리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휴고의 사나운 분노에도 필립은 조금 안타까운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분은 도련님을 위해 스스로 희생하셨습니다.”

“그딴 것 바란 적도 없어.”

휴고는 음산하게 이를 갈았다. 짐승이고 괴물이었던 히우는 휴고를 만나 휴가 되었다. 히우가 휴가 되는 순간 악마는 사람이 되었다.

사방 모든 것이 적이었던, 제 목숨을 지키려 그리 악을 부렸으나 실제 왜 살아야 하는지 의미조차 찾지 못했던 휴는 형제를 만나서 살아갈 이유를 찾았고, 목숨보다 귀한 것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나뿐인 형제는 살아서 이 자리에 올랐어야 했다. 더러움으로 얼룩진 타란은 그 녀석만이 정화할 수 있었다. 마귀로 불리던 히우가 아니라.

“도련님이 그 자리에 계시길 바란 것은 누구보다도 휴고 도련님이셨습니다. 어차피 두 분 모두 타란의 핏줄이십니다. 마땅히 도련님 역시 타란의 주인이 되실 자격이 있습니다.”

“마귀는 그날 서쪽 탑에서 죽었어. 나는, 지금 여기 있는 나는 휴고다.”

“도련님의 것입니다. 언제쯤 당신께서 주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실 겁니까?”

“영원히 그럴 일 없어. 난 그 녀석의 나이만 차면 넘겨버릴 거니까.”

필립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데미안 도련님은 아직 어리십니다.”

“그러니까 기다리고 있잖아.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참고 기다리고 있다고.”

휴고는 이를 악물며 대꾸했다.

“휴고 도련님께서 피로 적신 자리입니다. 그래서 더 고귀한 자리입니다.”

잠시 필립을 노려보던 휴고가 서늘하게 일갈했다.

“늙은이 머리 굴리기 잘하는 건 진즉 알았지. 그날, 지금 같은 되지도 않는 소리 지껄였으면 모가지를 뽑아버렸을 텐데. 당시엔 벙어리처럼 닥치고 발치에 엎드리더니. 내가 그날 일을 아는 놈들을 늙은이 빼고는 다 죽인 건 알아?”

처음으로 필립의 안색이 굳었다.

“…흔적도 남기지 않으셨더군요.”

“그래. 구역질이 나서 참을 수가 없었거든. 그러니까 늙은이. 네놈이 마지막이야. 어서 뒈지라고. 늙은이만 사라지면 더 이상 악취는 나지 않겠지.”

“돌아가신 공작 전하께서는 오직 가문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선택?”

휴고는 두 손으로 거세게 책상을 내리치면서 벌떡 일어났다. 몸을 앞으로 내밀며 불타는 것처럼 이글거리는 붉은 눈동자로 필립, 아니, 필립 너머에 보이는 누군가를 무시무시한 분노를 담아 노려보았다. 그의 노기는 금방이라도 끓어 넘칠 것 같은 용광로 같았다.

“그 영감탱이는 아들 하나를 용병에게 노예로 팔아먹었으면서, 선택한 나머지 아들을 품에 안기는커녕 다시 둘을 바꿔치려 했지.”

선택된 휴고. 버려진 히우. 그러나 공작은 세월이 흘러 다시 휴고를 버리고 히우를 택했다. 휴고의 성정이 지나치게 순하다는 이유 때문에.

처음으로 매달렸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타인의 목숨을 위해.

“네가 순순히 내 후계가 되면 녀석을 건드리지 않도록 하지.”

시키는 대로 다 했다. 순순히 교육을 받았고, 대외적으로 휴고의 모습으로 다녔다. 거친 말투를 버리고 귀한 공작가 자제로 변화했다. 사육된 짐승이 되어 공작 발치에 얌전히 엎드렸다.

그런데 몰랐다. 똑같은 이유로 휴고 역시 자신의 형제를 위해 어제까지 귀한 공자님으로서의 모든 것을 기꺼이 버렸다는 사실을.

두 형제에 끈을 달아 양손에 쥐고 흔들고 있었다는 것을 휴고가 먼저 알아차린 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자신의 존재가 있는 한, 그리고 그것을 끝까지 이용할 공작이 있는 한 휴가 절대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휴가 로암을 비운 날, 휴고는 공작 내외를 잔인하게 살해하고 그 곁에서 제 목을 긋고 죽었다.

“벌레 한 마리 잡아 죽이지 못하던 녀석이 그런 짓을 하도록 몰아간 건 그 영감탱이야. 그렇게 뒈져도 할 말 없는 거라고. 선택? 그건 선택이 아니라 추악한 탐욕이었어.”

“도련님.”

“도련님 소리 그만해. 타란의 주인이고 공작이다. 아직도 10년 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나?”

높고 굳건한 벽은 도무지 조금의 틈조차 보이지 않았다. 필립은 한숨을 쉬었다. 오랜 시간은 감정의 골을 조금도 좁혀주지 못했다. 이제는 어른이 되셨으니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건만. 헛된 기대였다.

타란 혈족이 이대로 끊기는가. 고귀한 혈통이 이대로 최후를 맞는 건가. 부친이 유언처럼 남긴 말대로 업보일까. 원래 타란 혈통에 쌍둥이가 태어난 선례는 없었다. 이변의 발생은 어쩌면 경고였는지도 모른다.

“결혼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으로부터는 아이를 얻지 못하실 겁니다.”

“그 이상 더 좋을 순 없지.”

“안주인께서도 알고 계십니까?”

“경고하는데 내 아내 곁에 접근하기만 해봐.”

휴고는 사납게 이를 드러냈다. 찰나에 필립의 눈동자로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다.

“데미안 도련님께 신부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타란의 혈통은…….”

“닥쳐! 잘도 더러운 소리 지껄이는군.”

사람들은 모른다. 타란 가문이 언제부터 시작된 가문이고 왜 황량한 북부에 자리를 잡았는지. 왜 그 많은 힘을 가지고 왕의 신하를 자처하며 조용히 사는지.

타란 가문의 진정하고 유일한 목적. 오직 대대로 타란 가문을 이어받는 가주와 아주 소수 사람만 알고 있는 진실. 그것은 타란 혈통의 보존이었다.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욕심내기에는 매력이 없는 땅, 아무나 감당할 수 없는 곳. 북부는 타란을 위해 준비된 땅이었다.

이제 그걸 아는 사람은 휴고, 그리고 눈앞의 늙은이밖에 남지 않았다. 휴고는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잡아 죽였다. 늙은이가 공작의 눈을 피해 형제의 목숨을 구해준 적만 없었어도 옛날에 쳐 죽였을 것이다.

“그거 알아? 네놈들이 야만족이라 손가락질하는 저 북쪽의 그놈들도 제 누이하고 붙어먹는 짓은 안 해.”

“일반인의 도덕 잣대로 판단하시면 안 됩니다. 타란 혈통은…….”

“닥치라고 했다. 그따위 말도 안 되는 고귀한 핏줄 얘기는 듣고 싶지도 않으니까. 평범하게는 여자들이 애를 배지도 못해! 괴물이지 그게 무슨 고귀한 핏줄이야!”

필립이 무거운 표정으로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아직도 그런 말씀 하시는군요. 그럼… 휴고 도련님도 괴물입니까? 데미안 도련님은요.”

“…….”

“돌아가신 공작 전하께서 비록 과한 방법을 택하기는 하셨지만.”

휴고는 하, 헛웃음으로 차갑게 조소했다.

“내 친부라는 새끼는……. 그만두지. 내 입이 더러워질 것 같으니까.”

“타란의 혈통은 이어져야 합니다.”

“지긋지긋한 집착이군. 그런 더러운 짓은 내 대에서 끝이야! 미친 늙은이. 그 목이 붙어있는 걸 신에게 감사해야 할 거다. 신 따위 있는 줄도 모르겠지만. 한 번만 더 날 꼭지 돌게 하면 빚이고 뭐고 없어. 살던 대로 로암이든 어디든 지금까지처럼 내 눈에 띄지만 말고 처박혀있어. 더 이상 경고는 없다. 당장 나가. 내 아내 곁에 얼씬했다가는 그 자리에서 심장을 뽑아 버리겠어.”

필립은 말없이 한참 휴고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려 집무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 휴고는 일어나 책상을 짚고 있는 자세 그대로 씩씩 올라오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꽉 쥐고 있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죽여! 저놈을 당장 죽여! 심장을 터뜨리고 목을 꺾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게 찢어 죽여서 짐승 먹이로 던져 버리라고! 그의 안에 있는 휴가 마구 날뛰며 소리쳤다. 온몸의 피가 끓는 것 같고 붉은 눈동자는 마치 핏물처럼 선명하게 짙어졌다.

한참 만에 숨소리가 편안해졌다. 그의 안에 있는 괴물이 튀어나와서는 곤란했다. 그는 휴고다. 휴고는 절대 이 자리에서 공작의 위신을 버리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늙은이를 죽이는 건 쉬웠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 차라리 자신의 목숨 빚이었으면 그따위 알 바 아닐 것을.

휴고는 완전히 진정이 되자 제롬을 불렀다.

“수도에서 여의사를 데려왔다고 했지? 안사람 주치의로.”

“예, 전하. 불러올까요?”

“그럴 건 없고. 저 늙……. 주치의 필립이 마님 곁에 접근하지 못하게 해라.”

필립이 그녀에게 당장 어찌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근처에서 얼쩡거리는 것 자체가 싫었다. 괜한 말을 해서 그녀 기분을 상하게 하는 건. 그래, 그런 것이 싫다. 늙은이는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하느니 어쩌니 하며 그녀에게 첩을 들일 것을 종용하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아무리 짖어도 그런 개소리에 귀 기울일 일은 없지만 그녀가 괜히 듣지 않아도 될 말을 들어 마음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호박색 눈동자가 슬퍼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예. 모르게 감시를 붙여둘까요?”

“로암 내성 안으로 들어오지만 않으면 내버려둬.”

“마님께도 일러드리는 것이 좋겠습니까?”

하지 말라고 하면 묘하게 호기심이 드는 것이 사람의 심리. 휴고는 그녀가 아예 필립을 의식하는 일 자체를 원치 않았다.

“…아니. 자연스럽게 마주치지 않게 해. 그녀가 의문을 갖지 않도록.”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제롬의 머릿속에 서쪽 탑에서 일어났던 사건이 스쳐 지나갔다. 당시 그때 일을 직접 보았을 만큼 성에 오래 거주한 사람은 현재 아무도 남지 않았다. 단 한 사람만 제외하면. 그 사람이 주치의 필립이었다. 왜 갑자기 그 일이 떠올랐는지 모르겠지만 왠지 주인께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전하. 일전에 마님께서… 서쪽 탑이 왜 잠겨있느냐 물으신 적 있습니다.”

휴고의 눈이 날카롭게 올라갔다.

“그래서?”

“알고 있던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전 공작부부께서 돌아가셨고, 전하의 쌍둥이 형제분이 그분들을……. 송구합니다. 마님께서 아셔도 될 일이라 판단했습니다. 경솔했습니다.”

“…아니다. 어차피 알게 될 일일 테니까. 듣고 뭐라고 하던가?”

“조금 놀라기는 하셨지만 충격보다는… 전하를 걱정하셨습니다.”

“…….”

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 타고 한 바퀴 돌고 올 테니까 저녁 식사는 준비하지 마. 좀 늦을지도 몰라.”

지나쳐가는 공작 뒤에 대답과 함께 고개를 숙였던 제롬은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마님 선물은 어쩐다…….”

그걸 물어볼 분위기가 아니었다. 겉보기에 공작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지만 필립이 들어왔다 나가고 난 이후에 주변을 감싸고 있는 가시가 더 삐죽해진 느낌이었다. 그는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주인이 말해 주지 않는 일을 파고드는 것은 올바른 집사의 자세가 아니다.

“마님 선물은… 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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