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장 공작 부부 (9)
정원에는 꽃향기가 가득했다. 그 사이를 거닐면 향에 취할 것 같아서 루시아는 잠깐 눈을 감고 서있고는 했다.
요즘 그녀의 가장 큰 일거리는 정원 가꾸기였지만, 그녀의 노동을 필요로 하지는 않았다. 모든 일은 정원사가 알아서 했다. 루시아는 그저 어떤 꽃을 심을지 결정하고 잘 자라고 있나 돌아다니며 구경할 뿐이었다.
수고는 딴 사람이 다해도 공치사는 그녀가 들었다. 때로는 그것이 우스웠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이미 중천을 넘긴 해가 길게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시선 끝이 그의 집무실 발코니에 닿았다.
‘아……. 없네.’
분명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기 서있던 그가 없었다. 그가 가끔 발코니로 나와서 정원을 내다보는 모습을 우연히 발견했다. 루시아는 그 모습이 보고 싶어서 자주 정원으로 나왔다. 꽃을 살핀다는 핑계는 훌륭했으니까.
아닌 줄 알면서도 그가 자신을 보는 것만 같아서 뒤통수가 간질간질했다. 그를 보고 싶은 마음을 애써 참는 일이 어찌나 힘든지. 견디다 못해서 안 보는 척 고개를 돌렸을 때 발코니가 텅 비어있으면 마음도 텅 빈 것처럼 공허했다.
그를 볼 수 있는 시간은 대부분 저녁 시간 이후로 한정되어 있었다. 한 공간에서 지내지만, 언제나 그는 늘 손닿을 수 없는 아득히 먼 곳에 있었다.
그는 정말 바빴다. 제롬 말로는 서류 더미에 파묻혀 일하신다고 했다. 사나흘에 한 번은 반나절씩 회의를 하고, 그 와중에 영지 시찰을 잊지 않는 그는 정말 부지런한 영주였다.
꿈속의 남편, 메튼 백작은 수도에서 온갖 파티에 얼굴 내밀 줄만 알았지 영지 사정에는 관심도 없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메튼 백작의 영지는 최악으로 꼽히는 몇 군데 중 하나였다. 과도한 세금에 못 이겨 영지민들이 도주하거나 도주하다 잡혀 죽는 일이 빈번한 곳이었다. 메튼 백작의 비참한 최후는 어쩌면 업보였을 것이다.
루시아는 갑자기 떠오른 메튼 백작의 끔찍한 얼굴을 털어 버리려고 고개를 흔들었다. 현실에서는 옷깃도 스치고 싶지 않은 악연이었다.
악몽을 재현하지 않기 위해서 그녀는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과연 현명한 선택이었는지, 그녀는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그는 남편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거의 매일 그들은 함께 저녁을 먹고, 대화를 나누었다. 매일 밤 그는 그녀의 침실을 찾았다. 이 정도면 기대 이상이었다. 더는 욕심이라는 걸 알지만, 가끔은 허전해서 견딜 수 없었다. 깊은 호수 한가운데의 살얼음 위에 서있는 것 같은 위태로움이 힘들어서 차라리 호수 바닥으로 가라앉고 싶을 때가 있었다.
“마님, 안으로 모셔오라고 하십니다.”
“…누가?”
그녀를 데려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로암에서 그녀의 남편뿐이었다. 그럼에도 하녀에게 되묻고 말았다.
“주인님께서 마님을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이 시간에 왜?’
불안한 마음을 안은 채 루시아는 안으로 들어갔다.
응접실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남편 혼자가 아니었다. 제롬 외에 주치의 안나가 있었다. 안나를 보자마자 루시아는 직감했다. 언젠가 제롬이 결국은 그에게 말할 줄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가 주치의까지 불러서 일부러 이 시간에 자리를 마련할 줄은 몰랐다.
당황스럽고 언짢았다.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면 실망했을 것이면서. 루시아는 제 마음이지만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마치 초대받지 못한 사람처럼 문치에 오도카니 서서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 그녀를 보며 휴고의 표정이 굳었다. 벌떡 소파에서 일어나서 그녀에게 다가갔다. 큰 키와 덩치의 그가 불쑥 눈앞에 나타나자 루시아가 흠칫 놀랐다.
“왜…….”
확연히 느껴지는 그녀와의 거리감이 그는 불쾌했다. 대체 왜 그러냐고 다짜고짜 다그칠 뻔했다. 그는 억눌린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강하게 잡아끌었다. 루시아는 그에게 끌려가 소파에 앉았다. 그는 마치 도망가지 못하게 지키는 것처럼 옆에 붙어 앉았다.
안나는 조금씩 눈을 돌려 공작 부부를 살폈다. 소문의 타란 공작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처음 보았다. 공작부인은 조용한 성품의 가녀린 여인이었다. 무서운 소문을 몰고 다니는 기사 출신의 공작과 조합이 계속 의문이었다. 그런데 주인 부부를 나란히 함께 보니까 뜻밖에 어색함이 없었다.
‘저 덩치로 덤벼드니 마님이 그렇게 힘들어 하시지.’
마님의 주치의 입장에서 안나는 공작의 무식한 체력을 비난했다.
“마님, 계속 달손님이 없으시다고 들었습니다.”
“…맞아요.”
루시아는 이 상황이 불편했다. 스스로 불임을 택했고, 언제든 치료할 수 있다고 자신하기 때문인지 자신이 하자가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상황은 마치 그녀를 몹쓸 병에 걸린 환자로 몰아가는 것 같았다.
“초경도 없으셨습니까?”
“초경은 했어요.”
“그럼 언제부터 없으셨습니까? 다치거나 병을 앓으신 적 있습니까? 무언가 잘못 드신 것이라도 있습니까?”
“…….”
“주치의에게 제대로 설명하시오, 부인.”
평소보다 더 딱딱하게 들리는 그의 목소리 때문에 루시아는 흠칫 놀랐다. 고개를 돌려 그를 보자 그의 붉은 눈동자가 차갑게 그녀를 보고 있었다. 어쩐지 그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초경 때 약을 잘못 먹었어요.”
“무슨 약을 드셨는지요? 중독 현상이 있으셨던 겁니까?”
“어떤 약인지는 잘 몰라요. 중독은 아니었을 거예요. 아프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딱히 몸에 이상은 없어요.”
꿈속에서 그토록 의사를 찾아 헤맸어도 치료법은커녕 의사들은 제대로 증상 파악조차 하지 못했다. 안나에게 모든 것을 설명해도 알 것 같지 않았지만, 루시아는 자신의 증상을 숨길 수 있는 데까지 숨길 생각이었다.
여성 질환은 섬세한 병이었다. 환자가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는데 의사가 답을 찾아낼 수는 없었다. 더구나 들은 적도 없는 증상이라면 더욱 그랬다. 안나는 아무리 기억을 뒤져도 약을 먹고 월경이 영구적으로 멈추었다는 증상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마님, 좀 더 기억을 더듬어 주시지요. 당시 드셨던 약이 어떤 맛이었습니까? 무슨 이유로 약을 드셨지요? 얼마나 드셨습니까? 색깔은 어떠했고, 형태는 어떠했습니까?”
“모르겠어요. 어릴 때 일이고 약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기억에 남는 게 없어요.”
가만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휴고가 몸을 틀어 루시아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나하고 얘기 좀 하고.”
그는 서있는 자들에게 손짓했다.
“다 나가.”
공작의 눈치를 살피던 자들이 모두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응접실에는 휴고와 루시아만 남았다.
“왜 거짓말을 해?”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잠시 긴장했던 루시아는 안도했다.
“…거짓말 안 했어요.”
“주치의에게 사실을 숨기고 있잖아. 말을 하지 않는 것도 거짓말이지.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 거짓말을 왜 그리 열심이지?”
어떻게 알았을까. 마치 그가 마음을 읽는 것 같았다. 신기해서 빤히 바라보자 그가 한쪽 팔로 루시아의 허리를 감아 품으로 당기며 그런 속마저 읽힌다는 것처럼 말했다.
“어찌 알았느냐는 표정이군. 당신 거짓말 못 해. 다 드러나.”
루시아는 지금의 불편한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몸을 비틀어 두 팔로 그를 밀어내며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소파에서 일어났다.
“일하시느라 한창 바쁠 시간인데 방해가 되셨겠네요. 신경 쓰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그는 소파에 앉은 채 서있는 그녀를 잠시 말없이 바라보다가 나지막하지만 사나운 음색으로 말했다.
“지금 내가 그걸 탓했나?”
“안심하세요.”
“뭐가?”
“어차피 낫지 않아요.”
거센 힘에 손목이 확 잡혀서 루시아는 그대로 그의 품으로 넘어졌다. 버둥거리며 일어나려 했지만, 그의 한 손이 팔을 붙들어 단단히 고정하고 다른 손이 그녀의 턱을 잡아 눈을 마주쳤다. 루시아가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잠시 놓친 턱을 다시 잡아 시선을 마주쳤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야? 당신이 낫지 않는데 왜 내가 안심하는데?”
“처음부터 말씀드렸잖아요.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흔들리는 호박색 눈동자를 담은 그의 붉은 눈동자 또한 흔들렸다. 루시아는 강하게 턱을 틀어 그의 손을 뿌리쳤다. 공중에서 잠시 배회하던 그의 손이 멋쩍게 내려갔다. 그녀는 움직여서 잡힌 팔도 빼냈다. 강한 거부의 몸짓을 보이는 그녀를 보며 휴고는 당황했다.
“관심 없으셨어요. 왜냐고 묻지도 않으셨어요.”
“…….”
“왜 갑자기 궁금해지셨어요?”
그는 수도의 저택에서의 그날, 증명할 수 있느냐고 묻기만 했다. 그 후 한 번도 아이를 갖지 못한다는 말이 사실이냐, 어디가 잘못된 것이냐고 묻지 않았다. 루시아는 아예 그가 까맣게 잊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 정도였다. 그래서 비참했다. 심장은 날이 갈수록 그를 향해 뛰는데. 아예 숨도 못 쉬도록 딱딱하게 굳어 버리기를 바라는 자신의 마음을 이 남자는 절대 알아주지 않을 것이다.
“갑자기 궁금해지면 안 되는 건가?”
“황송해서요.”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죄송해요.”
그녀는 짤막하고 쌀쌀맞은 대답을 끝으로 더 말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입을 꼭 다물었다. 휴고의 붉은 눈이 확 타올랐다. 이 여자가 안 하던 짓을 하고 있었다. 그의 신경을 콕콕 찔러댄다. 그는 별일도 아닌데 언성을 높이고 싶지 않아서 오히려 더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비비안, 지나간 일을 따지고 싶은 거야?”
루시아는 실망으로 가슴이 내려앉았다.
‘지나간 일이라 하시면… 제가 무슨 말을 하겠어요.’
그에겐 그저 지나간 일이었다. 루시아는 말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마음이 건조하게 메말라서 쩍 갈라지는 것 같았다. 더는 아무 생각도,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발밑이 푹 꺼질 것 같은 피로감이 밀려왔다.
“난 지금 당장 당신 몸이 염려되어 하는 말이야. 의사에게 정확한 증상을 설명하고 치료를 받아.”
그의 말투는 평소보다 다정했다. 그의 친절함이나 다정함에 어떤 감정이 담겨있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루시아는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할 때마다 연가를 듣는 것처럼 황홀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깨어날 때의 기분은 뭐라 설명할 수 없었다. 그에게 고래고래 소리치고 싶었다.
차라리 내게 못되게 굴어요! 제발 당신을 미워할 수 있게 해달라고요!
“치료하고 싶지 않아요.”
“왜?”
“나으면 당신이 곤란하니까요.”
“내가 왜 곤란해?”
“제가 아이를 갖는 걸 원치 않으시잖아요!”
그녀의 목소리가 순간적으로 크게 울렸다.
“…….”
휴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아이라서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는 자신의 피를 이은 혈육 자체를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있든 없든 어차피 임신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이해하게 하려면 아주 많은 숨겨진 일을 그녀에게 설명해야 한다. 입 밖으로 꺼내 다시 기억으로 되새김질하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그것들은 단순한 과거의 일이 아니라 진저리치는 악몽이었다.
루시아는 긍정처럼 침묵하는 그를 보면서 점차 감정이 격앙되었다.
그냥 날 내버려둬요.
조금씩 원망이 싹텄다.
“제가 잘못 말했군요. 정확히는 아무 관심도 없으셨죠.”
여자의 감이었다. 그는 결코 그녀에게서 자식을 얻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모순적이지만, 피임을 신경 쓰지도 않았다. 루시아는 오히려 그 점이 더 야속했다. 그는 그만큼의 관심조차 없었다.
만에 하나 아이가 생겼으면 과연 그는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 아이만 빼앗아 갔을까, 아이가 태어나거나 말거나 관심도 없었을까, 그대로 뒤돌아 다시는 그녀를 찾지 않았을까. 어떤 가정이건 다 최악이었다.
“관심이 없는 건…….”
당신 쪽이겠지. 휴고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단 한 번도 데미안에 대해서 그에게 묻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그가 뻔뻔해도 그녀에게 그걸 따질 자격이 되지 못함은 알고 있었다. 그는 혼적이 필요해서 그녀와 결혼했지, 그의 아들을 보듬으라고 계약하지 않았다.
“당신이… 관심을 원하는 줄은 몰랐는데.”
루시아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어쩐지 그의 표정이 피로해 보였다.
‘안 돼!’
아까 자신의 거짓말을 그가 알아챘다고 말했을 때부터 그녀는 불안에 사로잡혀 있었다. 흔들리고 있는 제 마음도 읽힐까 봐 신경이 곤두섰다. 그가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승전 파티에서 소피아 로렌스에게 했던 것처럼 잔인하게 선을 긋는 말을 하면 아마.
‘내 심장은 터져버릴 거야.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로 아프겠지.’
그는 여자가 적당하게 거리를 유지해 주면 한없이 다정해지는 남자였다. 그녀에게 해준 것처럼 그는 얼마나 많은 과거의 연인들에게 웃어주고 선물을 안겨 주었을까. 이별을 통보받은 여자들이 미련을 버리지 못해 매달리는 것은 그의 다정함을 잊지 못해서일 것이다.
‘그의 과거의 여자가 되고 싶지 않아.’
이대로. 평생 이대로 살아도 좋다. 물질적으로 풍족한 생활, 밤마다 뜨겁게 안아주고 부드럽게 웃어주는 남편. 그녀는 자신을 자책했다. 분수 넘치는 욕심을 부리려 했다. 꽉 쥐는 그녀의 주먹 안에 땀이 찼다.
“원하는 건 아니에요. 잊지 않고 있어요. 당신과의 계약.”
루시아는 자연스럽게 보이기를 바라면서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의 품에서도 조금 떨어져 앉았다. 그런 그녀를 휴고는 날 선 눈으로 보고 있었다.
“하, 그래. 계약.”
휴고는 헛웃음을 치며 짜증스럽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들의 불완전한 결혼의 시작점은 구석에 밀어두고 싶은 문제였다. 그러나 그의 생각일 뿐, 그녀에겐 여전히 단단히 묶여 생생하게 살아있는 질긴 끈이었다.
“나는 사생활을 즐겨도 되고, 당신은 내게 꽁꽁 마음을 닫고. 그게 우리 계약이었지?
그는 거리를 두려고 하는 그녀와의 간격을 단번에 좁혀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아 당겼다. 루시아의 노력은 아주 쉽게 무위로 돌아갔다. 다시 그의 품에 안긴 자세가 되었다.
“그런데 그거 알아? 계약 조건을 지키지 못했을 때 어찌할 것인지는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걸.”
“제가 계약을 지키지 못할까 봐 걱정되세요?”
“왜 이래 진짜? 말을 왜 그렇게 넘겨 뛰어?”
“…죄송해요. 제가 좀 꼬였나 봐요.”
낯선 아내의 모습을 휴고는 한참 바라보았다. 얌전하고 말 잘 듣던 평소의 순한 아내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는 계속 그의 눈을 피했다. 단절과 거부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한마디도 지지 않고 말하기는 했지.’
어쩌면 이 모습도 그녀였다. 그동안 그가 보지 못했을 뿐, 정확히는 그녀가 그에게 보여주지 않았던 그녀의 다른 일면. 그는 본디 말꼬리를 잡아 물고 늘어지는 걸 싫어하지만, 그녀의 새로운 모습은 오히려 반가웠다. 얌전히 웃고만 있던 그녀의 진짜를 잠깐 엿본 것 같았다. 그는 더 그녀를 알고 싶었다.
“내가 사생활의 자유를 포기하면 당신도 꽁꽁 닫은 빗장 풀어줄 건가?”
“…네?”
루시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보았다. 그가 대체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바람둥이 남자의 수법인가? 휴고는 ‘그러니까 내 말은…….’ 하고 말끝을 흐리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치료받아.”
그의 화제 전환에 루시아는 실망했다.
“싫어요.”
“비비안!”
“아이를 가질 수 없으니까 아이를 못 낳는 건 괜찮아요. 그런데 치료가 되면, 아이 낳아도 돼요? 허락하실 건가요?”
루시아는 자꾸 같은 자리만 맴도는 그와의 언쟁이 지겨웠다. 불임의 치료는 단순히 건강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
휴고는 한숨을 쉬며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그녀의 몸이 나아도 임신할 수 없다. 그를 피와 살을 구성하는 타란의 핏줄은 아무 여자나 잉태할 수가 없다.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어떤 여자의 태 안에서도 타란의 핏줄은 자라나지 못했다. 그가 수없이 많은 여자와 즐겼으나 임신의 위험을 단 한 번도 걱정한 적 없는 건 그래서였다.
같은 타란의 피가 흐르는 혈족이 아닌 보통 여자가 타란의 핏줄을 잉태하려면 조건이 필요했다. 무슨 조건인지는 늙은이만 알고 있었다.
늙은이의 거처를 내성 밖으로 내치면서 가지고 있던 자료를 달달 뒤졌지만, 관련된 내용은 없었다. 아마 제 기억에만 넣어놓든지 따로 문서가 있다면 누구도 모를 곳에 보관 중일 것이다. 그래서 그냥 늙은이를 잡아다 족쳤다. 가문의 비전을 누설할 수 없다고 버티던 늙은이는 지하 감옥에 처넣고 다신 햇빛 못 보게 해줄까 했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아이의 아버지가 될 타란 혈족 사내의 피를 내어 1년 이상 꾸준히 복용시킨 후 그 여자의 처녀를 취해야 합니다.”
정말 구역질 나는 조건이었다. 그 조건은 이미 처녀를 잃기 전에 완성되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아내는 이미 틀렸다.
임신할 수 있다고 해도 그는 절대 후사를 남길 생각이 없었다. 이 세상에 그의 피를 이어받은 존재가 있다고 상상만 해도 똥통에 빠진 것 같았다. 그가 임신 위험성이 없지만 언제나 체외 사정을 고집한 건 자신을 닮은 후손의 번식을 증오하며 형성된 일종의 습관이었다.
휴고는 새삼스럽게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처음부터 달랐다. 왜 그녀는 예외였을까. 자궁 안에 파정하고 끌어안아 후희를 즐긴 대상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그녀의 밭에 자신의 씨를 뿌린다는 만족감마저 느꼈다.
기이한 모순점을 잠시 고민하다가 쉽게 답이 떠오르지 않자 생각을 나중으로 미루었다. 당장 집중할 문제는 결혼 후 처음으로 드러난 아내의 속마음이었다.
왜 갑자기 궁금해졌느냐는 그녀의 말은 야속함을 담은 원망이었다. 자신의 무심함이 그녀에게 상처가 되었음을 인정했다.
보통의 상황이라면 그녀는 충분히 임신 가능성이 있었다. 아이를 갖지 못한다는 그녀의 사정을 잊고 있었으면서 임신 여부를 신경 써주지 않았다. 그녀의 상처가 읽히자 그의 심장 언저리가 따끔거렸다.
“치료되면 전 아이를 갖고 싶을 거예요. 그래도 괜찮아요?”
처음부터 아이를 갖지 못하는 몸이라 포기하는 것과 아이를 가질 수 있는 건강한 몸이지만 포기하는 것은 의미가 전혀 달랐다. 루시아에게 그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컸다.
“…난 자식은 필요 없어.”
휴고는 고민 끝에 대답했다. 어차피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얼마든지 낳아도 좋다.’라고 말한 후에 아이가 생기지 않아도 그녀는 그를 탓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그녀를 기만하고 싶지 않았다. 진실을 말해 줄 수 없다면 속이고 싶지도 않다.
“후계 문제 때문에 그러시면 각서라도 쓸게요. 계승권을 배제하는 약정서 작성도 상관없어요.”
“그런 문제 때문이 아니야. 나는 내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아.”
“이미 아들이 있잖아요.”
“그 녀석은!”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았다. 데미안이 그의 친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제 늙은이만 남았다. 물꼬를 트기 시작하면 줄줄이 나올 것이 끝이 없었다. 그는 타란의 비밀을 누구와도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데미안에게도 알릴 생각이 없었다. 오직 혼자 끌어안고 영원히 묻어버리겠다고, 오래전에 굳게 결심했다.
“그 녀석은 좀 달라. …당신이 그렇게 아이를 원하는 줄은 몰랐어.”
휴고는 묘한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그녀의 겉만 보고 있었다. 그녀의 내심을 전혀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죄송해요. 당신이 원하는 아내는 그런 여자가 아니었을 텐데.”
“비비안.”
그가 무겁게 한숨을 쉬었다.
“당신을 비난하려는 뜻이 아니었어. 단지 몰랐던 사실이 의외였을 뿐이야.”
“처음에 결혼 이야기를 나눌 때 당신은 아이를 낳아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말씀하셨어요.”
“그건…….”
상관없어서가 아니라 어차피 낳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니까. 당시에는 그걸 설명해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혼적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아내는 그저 덤이었다. 시작은 분명히 그랬다.
“이혼은 안 해주실 거잖아요.”
그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가 눈을 번뜩이며 으르렁댔다.
“이혼? 어림없어.”
이혼 소리를 입에 올려? 그의 배 속이 부글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처음부터 말했지. 이혼은 안 된다고. 죽어도 벗어날 수 없을 거라고.”
이혼을 불쑥 말해 놓고 루시아는 아차, 했다. 이혼은 오히려 그녀가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전통을 거론하자 속이 비틀렸다.
“알아요. 타란의 전통. 물론 기억하지요. 하지만 아이를 낳으면 안 된다는 전통은 없잖아요.”
“이혼 아니면 아이. 내게 선택을 하라는 거야?”
그는 오히려 그녀에게 둘 중 하나 선택하라고 말하는 듯했다. 눈이 시큰거려서 혹시 눈물이라도 나올까 봐 루시아는 더욱 그에게 보이지 않게 고개를 돌렸다.
“그런 뜻… 아니에요.”
“비비안. 이대로 지내면 왜 안 되는 거지?”
“제 욕심이겠지요. 혼자가 되었을 때 함께할 사람이 있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왜 혼자인데?”
“설마, 제 곁에 당신이 영원히 함께 있어줄 거라는 말씀은 아니겠지요?”
“…뭐?”
낯선 외국어를 듣는 것 같은 그의 표정을 보자 루시아의 가슴 깊은 곳에서 불쑥 뭔가가 치솟았다. 달래는 것처럼 도닥이는 그의 말투도 거슬렸다.
내 마음 같은 건 관심도 없으면서! 곁에 두기에 적당하고 편한 아내라고 생각하면서!
그를 상처 주고 그가 아프게 하고 싶었다. 무슨 짓을 해도 그의 가슴에 생채기조차 남길 수 없다면 적어도 난처하고 곤란하게라도 하고 싶었다. 그런 못된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났다.
“당신은 절 사랑하지 않아요. 전 절대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거예요. 우리 사이에 뭐가 있나요? 이런 관계가 언제까지 갈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래서 뭐. 루시아는 그가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다. 어쩌라고. 처음부터 그러기로 한 것 아니었나? 냉랭한 표정을 지으며 그가 차갑게 받아칠 줄 알았다. 그런 대답을 어떻게 하면 더 싸늘하게 되돌려줄 수 있을까. 그에게 버럭 쏟아낸 직후부터 고민했다.
그에게 상처 주고 싶었던 마음은 얄팍한 심술이었다. 진짜 그가 아파하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자신의 진심을 깨달았다.
순간적으로 그의 얼굴에 떠오른,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참담함을 보았을 때 루시아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이 강철 같은 남자는 몹시 그다운 방식으로 고통을 표현했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맹수가 힘겹게 숨을 쉬는 것처럼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마음은 그를 향해 손을 뻗어 그를 위로하고 있으나 루시아의 몸은 그를 보며 얼어붙어 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이 꼭 쥔 손이 바르르 떨렸다. 움직일 수도, 아무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그건 아주 짧았다. 그가 씁쓸한 웃음이 끝나자마자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는 평소처럼 얼마간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다가오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지나가 허상처럼 사라지는 그의 감정 변화를 엿본 일은 그녀에게 혼란과 좌절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이제 막 완성되려던 부드러운 케이크를 발로 짓이긴 기분이었다.
“…그래. 당신에겐 이미 끝이 보이는군.”
차갑기보다는 무덤덤한 목소리였다.
‘이 사람은…….’
루시아는 아주 잠깐이지만 진짜 그를 본 것 같았다. 차가운 그의 표정과 말투는 그의 갑옷이었다. 그가 냉담한 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해서가 아니다. 삼키고 드러내지 않을 뿐이었다. 안타깝다. 조금만 더 보여달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방금…….”
“뭐가?”
잠깐 사이에 꿈을 꾼 걸까. 보았어도 믿기지 않았다. 지금 그의 표정을 보면 조금 전 봤던 모습은 정말 착각인 것 같았다. 그녀가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자 그가 말을 이었다.
“그렇군. 처음부터 끝은 있었어. 장미꽃을 달라고 했던 당신의 말은 그런 의미였겠지?”
그가 장미꽃을 언급하자 루시아는 차가운 한기를 느끼며 냉정한 현실로 돌아왔다. 잠시 넋을 놓았던 자신을 꾸짖었다. 지금 그와 중대한 갈림길에 서있었다. 투정처럼 시작했으나 어느새 되돌리기엔 너무 멀리 왔다.
“…네, 맞아요.”
혹시라도 보이지 않는 끝에 매달려 어리석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장미꽃으로 깨우쳐 달라고 청한 이유였다. 그가 장미꽃을 보내 끝을 선언하면 혹시 언젠가 정신이 나가 있더라도 놀라 되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신은 내게 장미꽃을 받으면 어쩔 생각이었지?”
그가 자신의 마음을 떠보는 거라고 생각하자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녀는 조금 갈팡질팡하던 마음을 재빨리 바로 쥐었다.
“그건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당신 말씀대로 그건 끝이니까요. 끝 이후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다.”
그는 건조한 음성으로 되뇌었다.
“당신의 조건은 견고한가?”
“네, 제가 먼저 약속드렸어요. 그걸 깨뜨리는 일은 없을 거예요.”
보답받지 못해도 상관없으니 일방적으로 쏟기만 하는 사랑. 루시아는 절대 그런 사랑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일방적인 사랑은 부모 자식 사이에서도 어그러진다. 하물며 남녀 사이에서는 불가능한 사랑이었다. 처음엔 자기만족에서 시작했어도 언젠가는 응답을 바랄 것이고, 대답해 주지 않는 상대를 향한 애타는 마음이 미움으로 변할 것이다.
루시아는 그런 식으로 그를 증오하다가 그 증오에 잡아먹히고 싶지 않았다.
“…….”
휴고는 다짐하듯 야무지게 답하는 그녀를 보며 낙담했다. 자신이 과욕을 부리고 있음은 알고 있었다. 그녀의 말은 정답이었다. 되돌려줄 수 없으면서 몰염치하게도 그녀의 마음을 욕심내고 있었다. 자신의 비겁함을 느끼자 입맛이 썼다.
결혼하고 수개월을 지내는 동안 몰랐던 그녀의 다른 모습을 이 잠깐의 대화만으로 발견했다. 그 정도로 아내에게 무관심했다. 그녀가 보여주지 않았다고 그는 분노할 자격이 없었다. 아니, 이미 그녀는 오래전에 그를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능력 있는 조사관 파비안이 무려 한 달이나 걸려 작성한 보고서 속에는 그녀의 몸 상태에 관한 것은 없었다.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사실은 누구도 모를 그녀만의 비밀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용기 있게 털어놓은 비밀을 그는 웃어넘겼다. 그녀의 진심을 짓밟은 자신이 한 짓을 깨닫자 심장이 덜컹했다.
“이혼은 없어.”
“…네.”
“당신은 내 아내야.”
“네.”
“당신이 어떤 끝을 내든 그게 우리 관계를 변화시키지는 못해.
“네.”
깔끔하고 순종적인 그녀의 대답은 오히려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밀어 넘어뜨렸다. 그녀의 몸이 소파 위에 뉘이고 휴고는 그 위에서 팔로 디뎌 저항 없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뜻인지 알고 대답하는 건가?”
그의 손이 그녀의 턱을 잡아 손가락으로 보드라운 입술을 느릿하게 쓸었다. 성적 욕망이 담긴 진득한 손길에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감정과 관계없이 그가 원하면 몸을 열어야 한다고. 그는 말하고 있었다. 루시아는 그의 시선을 비켜서 처연하게 허공을 응시하더니 답했다.
“네.”
휴고는 깊어진 붉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가슴이 눅눅하게 가라앉았다.
‘훌륭해. 너는 완벽한 아내를 얻었군.’
그는 조소했다. 그가 바라 마지않던 대로 그는 아주 근사한 인형 아내를 얻었다. 이 여자는 그의 것이다. 그의 아내였다. 하지만 그가 가진 건 그녀의 껍데기였다.
그는 앞으로도 계속 인형 아내를 끌어안고 살아야 한다. 그녀는 껍데기만 이곳에 남겨두고 알맹이는 그의 눈과 손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멀리 치워두었다.
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그녀의 껍데기가 중요했다. 마음 따위가 아니다. 그 까짓것을 가져서 뭘 하겠다고. 그는 얼마든지 그녀를 쥐고 언제까지나 곁에 둘 수 있었다. 마음이 없다고 그녀가 어디로 가는 건 아니었다.
갑자기 휴고는 눈앞이 아득해졌다. 그는 자신을 사로잡은 불안과 절망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가 가진 무엇도 욕심내지 않고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을 것처럼 그의 터전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 그녀에 대한 불안. 굳게 닫힌 그녀의 마음을 열 수 없어서 느끼는 절망.
그가 느낀 진짜 불안과 절망은 그것들이 아니었다. 흔들리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불안과 절망이었다.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그녀의 손에 심장이 잡혔다. 절대 바라지 않던 최악이 바싹 다가와 있었다.
공작위에 오른 이후 그는 철저하게 하나의 원칙을 관철해 왔다. 받는 만큼 되돌려준다. 그가 여자가 주는 사랑을 거부하는 이유는 되돌려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사랑과 증오. 그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이 감정을 모두 겪었다. 그것들이 얼마나 사람을 좀먹는지 배웠다. 죽은 공작에 대한 증오, 피를 나눈 형제에 대한 사랑. 전혀 접점이 없을 것 같은 사랑과 증오는 마치 한 몸처럼 그를 꼼짝할 수 없게 마구 휘둘렀다. 그의 의지는 없었고, 무력함에 절망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단지 히우로 살았을 때의 그는 야생짐승이었다. 생존을 위해 적을 죽이고 오직 살아남는 것만 걱정하면 되었다. 아침에 눈 뜨면 잠드는 저녁까지 생존만이 삶 전부였다. 형제를 만나 그는 사람이 되었지만, 감정을 배우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형제를 사랑한 대신 형제의 목숨을 쥔 죽은 공작에게 휘둘렸다.
그에게 사랑과 증오를 가르친 두 사람은 죽어서도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형제의 비극적인 죽음은 그가 살아가는 의미를 빼앗았다. 공작이 죽은 후 알게 된 타란 혈족의 비밀은 자신의 몸을 타고 흐르는 피에 대한 증오로 바뀌어 그를 까마득한 어둠에 처박았다.
누구도, 무엇도 더는 그를 휘두르게 할 수 없었다. 자신의 의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건 진저리나게 끔찍했다. 잃을까 봐 가슴 졸이며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경험은 형제 녀석만으로 충분했다. 그의 마음은 견고해야 하고 그의 의지는 확고해야 한다. 특별한 존재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단순한 흥미와 욕망이라고 치부했으나 그의 심장이 그를 조롱하고 있었다.
넌 사랑에 빠졌어.
‘아니야, 그럴 리 없어.’
그녀에게 휘둘린다. 그녀를 잃을까 봐 두려움을 갖기 시작했다. 여자 하나에 이런 한심한 꼴이 되어버렸다. 납득할 수 없다. 그는 도무지 이 가정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큰 동작으로 소파에서 일어나 근방을 서성거렸다. 어딘지 모르게 초조해 보이는 그를 보며 루시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오늘 그는 전에 모르던 일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그의 혼란은 길지 않았다. 금방 멈추어 서서 그녀를 보며 말했다.
“치료받아.”
다시 원점이었다. 루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밀실에 갇힌 것처럼 숨이 막혔다.
“의사에게 정확하게 증상을 말하고, 처방을 받아. 무슨 증상인지, 당신 몸이 왜 그런지는 알아야 하잖아.”
“임신할 수도 있어요. 아이는 필요 없다는 생각. 바꾸신 건가요?”
그가 침묵하자 루시아는 소리치고 싶었다.
그냥 날 내버려둬요! 차라리 지금까지처럼 내 몸 상태에 관심 두지 말라고요!
왜 그가 임신 문제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걸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이가 생길 일은 없어.”
“그 말씀은 별거하자는 말씀인가요?”
똑바로 마주쳐오는 그의 시선을 루시아는 도전적으로 응시했다. 그는 시답지 않은 소리를 한다는 것처럼 입꼬리를 올렸다.
“왜 애를 만들기 위해서만 한다고 생각해? 당신도 함께 즐겼잖아.”
“논점을 흐리지 마세요. 저는 치료를 받고, 당신은 계속 제 침실에 들어오고. 그러다 아이가 생기면 어쩌시려고요? 제가 알고 싶은 건 그거예요.”
“그럼 내 애가 아니겠지.”
휴고는 무심히 뱉어놓고 뒤늦게 실수를 깨달았다. 그는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은 임신을 생각하며 한 말이었지만, 진실을 감추어 사정을 모르는 이상, 누가 듣더라도 그의 말은 심각한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
아차, 그녀의 표정을 살피자 이미 그녀의 안색은 안쓰러울 정도로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아이를 인정할 일 없다는… 말씀인가요, 아니면… 제가 부정을 저지를 거라고 단정하는 말씀인가요?”
잔인했다. 그는 몇 마디 말로 그녀의 가슴을 난도질했다. 루시아는 전승 파티에서 엿들은 그와 소피아 로렌스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때 소피아 로렌스를 향했던 그의 무자비한 칼날은 루시아를 베고 지나갔다.
휴고는 자신의 실수가 그녀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는 걸 알았다. 사과하고 그녀를 달래야 했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그의 마음은 혼란과 초조로 제멋대로 날뛰고 있었다. 그는 제 마음을 가누는 일조차 버거웠다.
이 상황 자체에 신물이 났다. 자꾸 고집을 부리는 그녀도, 사실을 설명할 수 없는 자신도. 복잡한 걸 싫어하며 모든 일을 쉽게 처리해 버리던 그에게, 뒤얽힌 지금의 상황과 자신의 감정이 지독히 피곤했다.
“내 말은…….”
운을 떼고 잠시 말이 없던 그는 무뚝뚝하게 중얼거렸다.
“치료는… 당신 좋을 대로 해.”
그는 몸을 돌려 응접실을 나가버렸다. 이 상황에서 도망치는 길을 택했다. 금방 조용해진 응접실에 홀로 남아 루시아는 쓰러지듯 풀썩 소파에 누웠다. 소리 없는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날 밤 그는 그녀의 침실에 들어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