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장 진실 & 거짓 (4)
“어서 와요, 케이트.”
루시아는 그녀를 가볍게 안으며 반가움을 표했다.
두 사람의 우정은 여전했다. 공작부인과 봉신의 딸이라는 격차가 존재함에도 두 사람의 성품은 모든 장벽을 허물었다.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공작부인 루시아와 공작부인과의 우정을 이용하지 않는 케이트는 오직 사람 대 사람으로 서로를 대했다.
“몸은 이제 괜찮아요?”
“싹 나았어요. 그러니까 루시아를 만나러 왔지요.”
근 한 달간 케이트는 열감기에 걸리는 바람에 집에서 두문불출했다.
“병문안을 가고 싶었는데 미안해요.”
휴고가 절대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루시아는 가지 못했다. 잠시 병문안을 다녀오는 정도로는 열감기에 옮지 않는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요즘 열감기가 유행 중이라는 이유로 아예 외출을 금지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안 오시기를 잘했어요.”
괜히 옮기라도 했다가는 후환이 두려웠다. 공작의 분노는 사고 싶지 않았다. 케이트는 루시아에게 요즘 북부 사교계의 분위기가 어떤지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다. 한 달에 두세 번의 티파티 외에는 공식 활동이 없는 공작부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교계 거물이 되었다. 거물은 거물인데 실체는 없는 그림자였다. 마치 타란 공작이 북부를 지배하지만, 드러나지 않게 군림하는 것과 유사했다.
루시아는 한 번에 만나는 사람이 많아봤자 열다섯 명 정도였다. 소규모 티파티만으로는 대중의 심리 파악에 한계가 있었다. 그녀가 대충 짐작하는 것 이상으로 그녀의 존재는 북부 사교계의 중심이었다.
케이트는 요즘 북부 사교계가 공작부인 눈치를 보며 설설 기고 있다고 슬쩍 알려줄까요, 종조모님께 떠들었다가 괜히 경솔하게 굴지 말라고 야단을 들었다. 공작부인이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기 전에 남들에게 그런 말을 들으면 편견을 가져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고 마담 미셀은 엄하게 입단속을 시켰다.
“전하께서는 영지 시찰 중이시라지요.”
“네. 보통 4~5일 걸리시니까 오늘내일로 돌아오실 거예요. 마담 미셀은 좀 어떠신가요?”
“여전하세요. 잔소리는 더 늘어나셨죠. 저만 보면 공작부인을 반만 닮으라고 하시는 말씀이 귀에 못이 박이겠어요.”
“괜히 하시는 말씀이겠죠. 케이트가 얼마나 매력적이고 아름다운데요.”
“전 루시아가 훨씬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요.”
“고마워요.”
입에 발린 칭찬이 감사하다는 듯 웃는 루시아를 보며 케이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고 강조하지 않았다. 말해봤자 듣기 좋은 말이라고 웃어넘길 테니까. 케이트를 루시아를 볼 때마다 묘한 매력을 느꼈다. 루시아는 대단한 미인은 아니지만, 보면 볼수록 자꾸 시선이 갔다. 화려한 외모가 아니라 그녀 자체에서 향기가 나는 사람이었다. 밀폐된 공간에 가득 꽃을 채웠다가 꽃을 치운 후에도 잔향이 남아있는 것처럼 아련하게 계속 기억에 남았다.
“날이 풀려서 여우사냥을 가려고요. 함께 가시죠.”
“이제 막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벌써 그런 것을 해도 되겠어요?”
“그럼요, 문제없어요. 루시아는 여우가 없으니 구경만 하셔야겠지만요.”
“구경만으로도 충분해요.”
부웅……. 고동 피리 소리가 들렸다.
“전하께서 귀환하셨나 봐요.”
루시아는 따라 일어나는 케이트를 만류해 다시 앉혔다.
“손님이니까 그냥 있어도 괜찮아요. 잠시만 자리를 비울게요.”
루시아가 나가고 응접실에 혼자 남게 되자 케이트는 편하게 소파에 기댔다. 고동 피리를 들으며 루시아의 얼굴에 떠오른 설렘을 케이트는 목격했다. 귀여워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나 남편이 좋을까. 루시아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남편을 향한 소녀처럼 수줍어하는 마음이 종종 드러나곤 했다.
공작부부가 금실이 좋다는 소문은 꽤 파다했다. 그래도 다들 실체를 본 적 없으니 반신반의였다. 그리고 공작부인을 직접 본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공작이 그렇게 빠질 만큼 미인은 아니라고 조심스럽게 돌려 말했다.
하지만 케이트는 한두 번 만나 차를 마시는 정도로는 루시아의 매력을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공작이 루시아의 어떤 매력에 빠져들었는지 충분히 이해했다.
찻잔의 차가 다 식어 미지근해질 무렵 덜컥 문이 열렸다. 고개를 돌린 케이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덩치 큰 흑발의 미남자가 성큼 안으로 들어오는데 그에게 손목이 잡혀 공작부인이 끌려 들어오고 있었다.
남자는 공작부인을 안으로 들이자마자 닫힌 문에 기대게 하며 키스하기 시작했다.
‘우와…….’
난데없는 상황에 고개를 돌릴 생각도 하지 못하고 케이트는 멍하니 두 남녀의 애정행각을 구경했다.
공작이 작위를 받기 전에는 케이트가 사교계에 데뷔하기 전이었고, 전쟁 중에는 얼굴을 볼 기회가 없었으며, 결혼하고 얼마 전에 북부로 돌아온 이후에 공작은 사교 파티에 참석한 적이 없어서 타란 공작을 직접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공작부인을 끌어안고 키스를 퍼부을 흑발 남자라면 공작밖에 없었다.
‘공작부부 사이가 꽤 좋다고?’
그 소문은 잘못되었다.
‘꽤 좋은 정도가 아닌 거 같은데.’
케이트의 얼굴이 점차 붉어졌다. 재회의 기쁨을 나누는 어여쁘고 상큼한 입맞춤이 아니었다. 뜨겁고 격정적이며 당장에라도 옷을 모두 벗어 던지고 몸을 뒤섞을 것 같은 노골적인 욕망이 담긴 키스였다.
케이트가 앉아있던 소파에서 출입구는 약간 비껴간 방향으로 마주 보였다. 그래서 문에 기댄 루시아의 얼굴이 보였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다가 루시아와 눈이 마주쳤다.
루시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하는 것을 보면서 케이트도 얼굴이 달아올랐다. 자기도 모르게 쿡, 하고 웃음이 나와 고개를 돌렸다.
잠깐 케이트의 존재를 잊었던 루시아는 케이트와 눈이 마주치자 죽을 것처럼 창피했다. 작게 쥔 두 주먹으로 있는 힘껏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얌전하던 그녀의 거센 반항을 느끼고 휴고는 그녀의 입안에 깊이 밀어 넣은 혀를 거두었다. 말캉한 입술을 한 번 빨아들인 뒤, 쪽 가볍게 입맞춤으로 마무리하며 입술을 뗐다.
“왜.”
“손님… 손님이…….”
새빨갛게 상기된 그녀의 호박색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젖은 속눈썹을 보자 휴고는 진심으로 이 자리에서 덮치고 싶었다. 여기서 해버릴까. 저녁까지 못 참겠다. 며칠을 못 했더니 몸이 달아 미치겠다.
깔끔한 걸 좋아하는 그녀는 씻고 준비를 마치지 않은 상태로 허락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침실을 벗어나는 장소도 기겁하며 싫어했다. 고용인들을 다 내보내고 복도나 정원에서 해보겠다는 시도는 제안했다가 그녀에게 퇴짜를 맞았다.
집무실에 앉아 일하다가도 문득 그녀를 끌고 와 책상에 엎어놓고 하고 싶은 충동을 몇 번이나 참았는지 모른다. 언젠가는 꼭 하고야 말겠다.
“손님?”
흘끔 고개를 돌려 고개를 숙이고 소파에 앉아있는 여자를 발견했다. 그러나 그의 안색은 변함이 없었다. 루시아의 허리를 감아 끌어안고 있는 한쪽 팔은 여전히 힘을 풀지 않았다.
“레이디 밀튼이…….”
“아하.”
그 유명한. 휴고는 그녀의 허리를 안은 채 소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케이트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깊이 허리를 숙였다.
“공작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밀튼 백작의 여식, 케이트입니다.”
“반갑소, 레이디 밀튼. 내가 두 사람의 다과 시간을 방해한 모양이군.”
그는 루시아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즐거운 시간 보내시오.”
그토록 끈덕지게 붙들고 있던 허리를 미련 없이 놓으며 그는 응접실을 나갔다. 나타날 때만큼 사라질 때도 한바탕 폭풍이 몰아친 것 같았다. 마무리는 남은 자들의 몫이었다.
루시아는 휴고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뻔뻔해질 수 없었다. 민망함을 감추지 못하고 말없이 식어버린 차를 들이켰다. 두 사람은 꽤 오래 그렇게 침묵 속에 마주앉아있었다.
“사… 사냥 이야기를 하다가 말았지요. 언제라고요?”
“5일… 후요. 꼭 참석해 주세요.”
그들의 대화는 어딘지 모르게 계속 겉돌았다.
회의를 파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제롬은 즉시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의 원탁 상석에는 휴고가 앉아서 서류를 들추고 있었다. 드나드는 사람들로 어수선한 분위기였지만, 자기 일로 바삐 움직이는 자들은 공작을 신경 쓰지 않았다. 회의 후 30분가량 내용을 대충 훑어보는 공작의 습관을 다들 알고 있었다.
“전하.”
“음.”
휴고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손을 내저었다. 차는 필요 없다는 뜻이었다.
“파비안이 와있습니다.”
“여기로 오라고 해.”
잠시 후 들어온 파비안이 보고서를 올렸다. 휴고는 파비안의 얼굴만 확인하고 대충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았다. 보고서를 받아 넘겨보던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갑자기 팔콘 백작부인이 왜 나오고, 아내의 지인이라는 여류 소설가에게 접근이라니.
“…이게 무슨 개소리야.”
파비안은 공작의 과격한 반응에 긴장했다.
“드나든 지 한두 번이 아니라면서 보고서를 이제 가져와?”
파비안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라도 안 가져왔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죄송합니다. 판단이 부족했습니다.”
주군의 성정을 아는 파비안은 깔끔하게 잘못을 인정했다.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던 다른 놈들의 얼굴로 뭔가 날아와 이마가 터지는 꼴을 여러 번 보았다.
추가 보고서를 읽는 휴고의 표정이 점점 더 살벌해졌다. 추가 보고서에 담긴 내용은 팔콘 백작부인이 비비안 공주의 뒷조사를 했다는 정황이었다. 시간이 부족해서 백작부인이 비비안 공주와 여류 소설과의 관계를 어떻게 추적했는가는 아직 조사 중이었다.
“뒷조사를 해?”
살기가 묻어나는 음성으로 중얼거리는 공작 앞에서 파비안은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렸다.
“투자 업무 담당자 누구야. 들어오라고 해.”
잠시 후 아신이 들어왔다. 정확히 말하면 아신이 담당자는 아니지만, 투자와 회계 쪽의 흐름을 파악하는 위치라서 오늘 자리에 없는 책임자를 대신하게 되었다.
“팔콘 백작가에서 소유한 상단이나 벌인 사업에 투자한 것 있나?”
휴고는 팔콘 백작부인이 건네준 사업계획서를 검토해 보라고 담당자에게 준 일이 기억났다. 검토해서 수익이 날 것으로 판단하면 투자 여부의 결정은 담당자의 몫이었다. 휴고는 투자 관련해서는 전문 담당자에게 거의 일임하는 편이라 손해를 보고하지 않는 이상 관여하지 않았다.
아신이 재빨리 가지고 들어온 문서를 뒤져 금방 찾아내 보고했다.
“투자금 다 회수해. 당장.”
“당장… 말씀이십니까? 최소한 한 달 전에는 미리 고지를 해야 하는…….”
“당, 장.”
휴고가 관자놀이에 손을 짚으며 딱딱 끊어 강조하자 아신은 자세를 바로 했다.
“옙. 당장, 처리하겠습니다.”
아신이 각 잡힌 움직임으로 나가고 나서, 휴고는 긴장하고 있는 파비안에게 명했다.
“알아듣게 경고해. 허튼수작 한 번만 더 하면 다음에는 목이라고.”
투자금 회수와 경고를 가장한 협박까지. 파비안은 처음으로 팔콘 백작부인이 아주 조금 불쌍했다.
타란 가문의 투자 사업은 규모가 큰 편이었다. 갑자기 거금이 빠지면 팔콘 백작가의 사업이 휘청할 것이다. 그래도 잠시나마 정을 통한 여자인데 참 가차 없다.
타란 공작은 손해가 없는 이상은 투자 사업의 변혁을 추구하는 편이 아니었다. 공작이 감정적인 이유로 투자금을 회수하는 것을 처음 봤다.
‘공작부인께 비비기 좀 해야 하나.’
파비안은 공작이 신혼의 재미에 제법 심취한 것 같다는 자기 생각을 수정했다. 심취 정도가 아니라 훨씬 더 주군은 아내에게 빠져있었다.
저녁을 먹고 루시아는 휴고에게 잠시 시간을 내어달라고 청했다. 두 사람은 응접실 소파에 마주앉았다.
“당신이 안 계신 동안에 공작가 주치의가 저를 만나고 싶다는 말을 전해왔어요.”
휴고의 표정이 순식간에 서늘하게 식었다. 분명히 그녀가 늙은이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제롬에게 내린 명령이 이행되지 않은 일은 처음이었다. 주인이 시선이 닿자 제롬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노여워 마세요. 당신 명을 어긴 사람은 제 주치의에요. 주치의는 제 치료를 위해 사방팔방 뛰어다니다가 공작가 주치의를 만나서 조언을 구했던 것 같아요. 당신이 일주일에 한 번씩 불러다가 치료에 관해 물어 보셨다면서요. 주치의 압박감이 상당했을 거예요.”
루시아는 그가 안나를 불러서 치료에 관해 묻는지 몰랐다. 그가 그 문제는 아예 잊어버린 줄 알았다. 그가 꾸준히 관심을 놓지 않았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그리고 안나가 얼마나 심리적으로 부담을 받았는지도 이해했다.
“주치의 안나는 사직하기로 했어요. 당신이 따로 벌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루시아는 안나의 노력을 높이 평가했다. 안나는 단순히 주치의로서 역할을 넘어서서 루시아를 치료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꿈속에서 루시아가 했던 수고를 대신하고 있었다.
루시아가 꿈속에서 기적처럼 만난 필립을 안나가 찾아냈다. 공작가 주치의를 만나 꾸준히 교류해 그의 인성과 의술을 파악하고 나서 조언을 구했고, 약을 받아서는 직접 먹어 시험했다. 치료법은 안나의 노력으로 얻은 결과였다.
그러나 안나는 경솔했다. 루시아가 무슨 약인지 알고 있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뭔지 모르는 약을 복용할 뻔했다. 그 약이 진짜 치료약인지 아닌지는 관계없었다.
안나는 자신이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만약 그 사실을 제롬이 알았다면 제롬은 반드시 공작에게 고했을 것이고, 남편이 알았다면 안나는 죽은 목숨이었다.
안나의 독단은 마음이 과해서 일어난 일이었다. 루시아는 안나에게 그 정도로 죄를 묻고 싶지 않아서 약에 관한 일은 둘만 알기로 했다.
“그러지.”
“공작가 주치의는 치료법을 안다고 자신하더군요.”
“…그렇군”
휴고는 그 늙은이의 뛰어난 의술만큼은 인정했다. 늙은이라면 그녀의 치료법을 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자가 당신 주치의를 이용해 만나자는 말을 전했다는 거지?”
휴고는 필립의 의술은 어쨌건 그놈 자체를 믿을 수 없었다.
“아니에요. 주치의 안나가 적극적으로 주선했다고 하더군요. 그 사람은 끝까지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으려고 했대요.”
안나는 가능하면 모든 죄를 자신이 쓰고 최대한 필립을 감싸 말했다. 가뜩이나 감시를 받고 있는 필립에게 불똥이 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안나에게 필립은 마음의 스승이고 진정한 신의였다.
“제롬.”
휴고가 나가라는 듯 눈짓하자 제롬이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피했다.
“당신을 공작가 주치의와 만나지 못하게 조치한 건 그럴 이유가 있었어.”
늙은이가 그녀에게 할 수 있는 짓은 없었다. 해를 입힐 이유도 없고. 늙은이가 질기도록 원하는 것은 휴고의 여식, 즉 데미안의 신부였다. 그녀는 타란 혈족의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휴고는 다만 늙은이가 그녀에게 무슨 헛소리를 할까 봐 그것이 염려스러웠다.
“네, 당신이 이유 없이 그러지 않으시겠지요.”
“나와 함께라면 만나도 괜찮아.”
그가 함께 셋이 만난다면 늙은이는 괜한 소리를 하지 못할 것이다. 두 번 다시 꼴보고 싶지 않지만, 치료법을 알고 있다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녀가 아픈 건 싫다. 모두 입을 모아서 그녀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고 말했다. 안나는 치료법을 찾고 있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는데 늙은이의 의술이 과연 남다른 모양이다.
“아니에요. 굳이 만날 생각은 없어요. 저를 만나게 하기 싫을 뿐만이 아니라 당신도 만나고 싶지 않잖아요. 그렇지요?”
“…맞아.”
“혹시 공작가 주치의가 당신에게 해를 끼쳤나요? 당신이 그렇게 싫은 자를 굳이 내버려두는 이유라도 있어요?”
휴고가 필립을 살려둔 데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형제의 목숨 빚이었다.
“목숨 빚이 있어. 형제가 덕분에 몇 번 살았지.”
부차적인 이유가 더 있었다. 필립은 타란 가문의 치부를 모두 알고 있었다.
필립의 존재는 휴고가 품고 있는 어둠을 잊지 못하게 하는 각성제였다. 언젠가 필립이 죽을 때까지 휴고는 모래알이 발바닥에 밟히는 불편함을 끌어안고 살아야 할 것이다. 그걸 감수하는 것은 죽은 형제에 대한 속죄이며 자신에게 내리는 벌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이유가 있어도 필립이 위험하다고 판단했으면 휴고는 그를 주저 없이 제거했을 것이다.
그러나 늙은이는 일개 주치의에 불과했다. 입만 열면 혈통 타령이 거슬리긴 하지만, 죽은 공작과 뜻이 정확히 일치해 집안 대대로 해오던 짓을 충실히 했을 뿐이다.
혈통을 잇는 문제는 그가 협조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데미안과도 만나지 못하게 철저히 가로막았다. 늙은이는 그저 목숨만 부지하고 있었다.
“그랬군요.”
루시아는 의문이 풀렸다. 그리고 안도했다. 꿈속의 은인은 역시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당신의 치료법을 안다잖아.”
“당신은 그 주치의를 신뢰하지 못하잖아요. 제 치료를 믿고 맡길 수 있겠어요?”
“…….”
일개 주치의에 불과한 늙은이. 휴고는 필립을 하찮게 여기면서도 괜히 꺼림칙했다. 그자에게 아내의 치료를 맡기면 도무지 안심은 안 될 것 같았다. 그러나 필립의 의술은 진짜였다. 고치지 못할 병을 고친다고 나설 자는 아니었다.
“사실 제가 치료법을 알고 있어요.”
“뭐?”
“처음에 알릴 기회를 놓쳤어요. 그다음에는 무조건 치료하라는 당신께 화가 나서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공작가 주치의의 도움은 필요하지 않아요.”
“…….”
그는 어이없기도 하고, 안심되기도 하고. 기분이 복잡했다. 그녀는 알면 알수록 알쏭달쏭한 여자였다. 순하고 얌전한 그의 아내. 그런데 예상치 못하는 부분에서 그 틀을 벗어나 그를 종종 당황하게 했다.
“전 병이 아니에요. 일상생활에는 문제가 없고 건강도 괜찮아요. 언제든 치료할 수 있고요. 치료하지 않는 건 제 의지예요.”
“나 때문인가? 내가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당신을 이해해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아이 문제는 우리 차분히 생각해요. 당신이 원하지 않으면 저도 원하지 않아요. 당신께 말하지 않고 치료할 일은 없을 거예요.”
‘하지만……. 당신 몸이 문제가 아니야.’
당신은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휴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걸 알면 그녀는 날 떠날지도 몰라.’
깊이를 모를 새카만 진창에 두 발부터 서서히 빠져드는 것 같았다.
‘왜 나는 이런 몸으로 태어났을까.’
그는 지금껏 자신의 핏줄을 남기지 않을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저주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랑하는 여자와 가정을 꾸리고 살지 못하는 저주였다.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생겼다고 웃던 형제의 얼굴이 떠올랐다. 녀석이 제 아들이 태어난 사실을 알았다면 출생의 비밀을 알고서도 기뻐했을까. 기뻐했겠지. 녀석이라면 받아들이고 앞으로의 행복만 생각했을 것이다.
차라리 그 녀석이 부러웠다. 이복누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사랑만 하다가 끝까지 알지 못하고 죽었다.
휴고는 피를 먹이는 소름 끼치는 짓을 하면서까지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 그런 짓을 하는 순간, 정말 자신이 괴물로 느껴질 것이다. 이미 그녀에게 쓸 수 없는 방법이지만, 가능하다고 해도 싫었다.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녀의 치료는 완전히 그의 손을 떠난 문제였다. 치료하라고, 하지 말라고도 할 수 없었다. 치료하라고 해서 그녀에게 임신의 헛된 희망을 품게 할 수 없고, 치료하지 말라고 해서 그녀와의 사이에 아이를 거부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싫었다.
“이리 와.”
휴고는 두 팔을 벌렸다. 루시아는 새침하게 웃으며 소파에서 일어나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휴고는 그녀가 손닿을 거리가 되자마자 확 끌어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넘어지듯 그의 다리에 앉았다. 휴고는 그녀의 허리를 두 팔로 감아 안아서 폭신한 가슴에 고개를 묻었다.
“다른 별일은 없었지?”
“네. 아……. 데미안에게 편지가 왔어요.”
“…매일 오는 편지잖아.”
“매일이라니요. 한 달에 한두 번이라고요.”
데미안을 화제에 올리자 루시아는 금방 눈을 반짝거렸다. 휴는 여전히 녀석에 대한 그녀의 과도한 관심이 유쾌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모자 사이의 유대를 이해하고 너그러워지고 있었다.
“녀석이 뭐래?”
“잘 지낸대요.”
루시아는 편지에서 읽은 데미안의 학술원 생활을 종알종알 떠들기 시작했다. 휴고는 얼마 전 받았던 보고서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녀석이 그녀가 보낸 빨간 목도리를 날이 제법 풀릴 때까지 내내 목에 두르고 다녔다고 했다.
“데미안을 처음 봤을 때 나를 본 것 같았다고 했지.”
“네. 어린 당신을 보는 것 같았어요.”
휴고는 그녀의 말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를 똑 닮은 그녀의 아이. 그녀의 어린 시절을 그려내는 작은 아이를 보는 기분은 어떨까. 그의 저주받은 핏줄의 증거인 검은 머리카락도, 붉은 눈동자도 지니지 않은 그녀의 아이는 과연 어떻게 생겼을까.
가슴 안쪽이 아프게 조여들었다. 남부럽지 않은 부와 권력을 그녀에게 안겨줄 수 있지만, 아이는 줄 수 없었다.
나중에 그녀가 상처받으면 어쩌나. 아이가 갖고 싶다고 매달리면 어찌해야 할까. 그는 빠져나갈 수 없는 영원한 미로를 헤매는 기분이었다.
“안나. 주치의 고용 계약은 파기되었습니다. 당분간 임시 고용 계약을 체결하겠습니다.”
제롬의 말투에는 날이 서있었다. 안나는 힘없이 대답하며 테이블 위에 펼쳐진 서류들을 하나씩 살폈다. 그리고 주치의를 그만둔 후에 평생 지켜야 하는 비밀 엄수 약정서에 서명했다.
“안나는 신뢰를 깨뜨렸습니다. 이후 임시 고용이 마무리될 때까지 외출을 금하며 최소한의 사람과의 접촉만 허락하겠습니다. 공작가 주치의를 만나서도 안 됩니다.”
“…예.”
“고용 기간이 만료되어도 안나가 누구를 만나는지 지켜보는 눈이 있을 겁니다. 기한은 안나가 비밀 엄수 약정을 충실히 지킬 거라고 확신할 수 있을 때까지입니다. 의심이 갈 행동은 하지 않기를 권하겠습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감시를 받으며 살게 되었다. 안나는 자신이 얼마나 큰 잘못을 지었는지 깨달았다. 그녀는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귀족을 진료해 본 경험이 거의 없었다. 귀족 세계의 규칙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자들의 습성을 전혀 몰랐다.
공작가에서 지내는 동안 누구도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모두 호의적이었고 몇 안 되는 윗사람은 그녀를 존중했다. 그래서 그녀는 귀족의 주치의로서 조심히 처신하는 일에 안이했다.
그녀가 얼마나 인간적인 대우와 관대한 처분을 받았는지 아마 나중에 가서야 알게 될 것이다.
“가능하다면 필립 경을 한 번만 만날 수 있을까요? 제게 많은 가르침을 주신 분입니다. 마지막 인사 정도는 드리고 싶어요.”
“주인님께 여쭈어 보겠습니다.”
필립은 안나가 하루가 지나도록 연락이 없을 때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고, 타란 공작이 귀환할 때까지 찾아오지 않자 완전히 어긋났음을 알았다.
공작부인의 현재 처지를 보면 아이를 갖는 것보다 간절한 문제는 없었다. 치료된다고 하면 당연히 덥석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다. 도무지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공작이 귀환한 지 열흘쯤 지나 안나가 인사를 하러 왔다. 안나의 얼굴은 제법 상해있었다.
“마님께서 필립을 만나기를 거절하셨어요. 지금쯤이면 공작 전하께서도 아마 사정을 들어 모두 알고 계실 거예요. 걱정하지는 마세요. 제가 잘 말씀드렸어요.”
실패. 짐작했으나 확인하게 되자 필립은 속이 탔다. 어째서. 바로 고지가 눈앞에 있는데 여기서 멈추어야 하는가. 그러나 그는 초조함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안나, 나 때문에 고초가 컸군.”
“아니에요. 제가 경솔했어요. 필립과는 이제 더는 만날 수 없어요. 저는 곧 주치의를 그만두게 될 거예요.”
“허어. 모든 벌을 다 안나가 받게 된 것 아닌가. 나 때문인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군.”
‘최악이군.’
안나가 주치의마저 그만두게 되었다니. 그나마 접근할 끈이 완전히 사라졌다.
“제게 과분한 자리였어요. 원래로 돌아가는 거지요.”
“마님께 말씀드릴 때 내가 공작가 주치의라는 말은 하지 말지 그랬나. 공작 전하께서 만나지 말라고 하시는데 공작부인께서 선뜻 만나겠다고 하시겠는가.”
“어차피 필립을 감시하는 눈을 피해 만날 수는 없는걸요.”
“그건 그렇지.”
필립은 겉으로는 수긍하며 속으로는 혀를 찼다. 너무 고지식한 여자였다. 감시하는 눈이 있기 때문에 타란 공작이 자리를 비웠을 때가 기회였다.
공작부인이 단호히 필립을 만나겠다고 결정하면 그걸 막을 권한이 있는 사람은 공작 외에는 없었다. 물론 나중에 공작의 귀에 들어가겠지만, 공작부인과 대화를 나눌 수만 있었다면 어떻게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만두고 어찌하려는가? 자네가 그만두면 공작가에서도 손실이 클 텐데 인재를 이리 버리는군.”
“인재는요. 마님의 치료법은 제가 찾지 못했고, 겨우 한 달에 한두 번 두통약을 지어드리는 일밖에는 하는 일도 없었어요. 너무 과한 보수를 받았죠.”
“…두통?”
필립의 눈에 찰나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편두통은 여자들에게 흔한 증상이죠.”
“그렇지, 흔한 증상이지.”
필립의 눈에 광기가 어렸다가 사라졌다. 안나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내게 아주 잘 듣는 두통 처방전이 있는데 보상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선물로 주겠네. 효과가 정말 좋다네.”
편두통은 아주 흔한 증상이지만, 의사마다 처방약은 다르고 효과도 달랐다. 잘 듣는 처방전은 의사의 재산이었다. 특히 두통약은 아주 희귀한 질병보다 훨씬 대중적이라서 약이 입소문이 나면 순식간에 돈방석에 앉았다.
“그것도 가문의 비전이 아닌가요? 그런 귀한 걸…….”
“나야 약으로 돈 벌 생각은 없지만, 안나는 나처럼 살 수 없지 않은가. 좋은 약이 많은 사람에게 쓰인다면 좋은 일이지.”
“아아, 필립. 정말 감사해요. 마지막까지 이렇게 마음을 써주시고.”
“처방전은 수일 내에 사람 편으로 보내주겠네. 이번에는 약초 이름이 모두 나와있는 처방전이니까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말게.”
안나가 돌아가고 필립은 조금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럼, 두통약을 만들어볼까.”
아주 작은 기회도 놓치지 않는다. 지금껏 필립이 살아온 방식이었다.
필립은 남들 눈에 수상해 보이는 짓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가 조금이라도 위험해 보였다면 타란 공작은 그를 살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타란 공작이 아는 필립은 단지 고집 세고 미련 많은 늙은 의사일 뿐이었다.
필립의 집안과 타란 가문의 동반자적 관계는 아슬아슬한 칼날 위의 동맹이었다. 지나치게 위험한 비밀을 쥐고 있으나 상대방보다 보잘것없이 약했다. 그래서 택한 생존의 방식은 바짝 엎드리는 법이었다.
필립의 가문 없이는 타란 혈족을 이어갈 수 없지만, 절대 그걸 이용하려 들지 않았다. 둘의 이해관계가 일치했기에 동맹은 깨지지 않고 이어졌다.
타란 가문의 가주는 대대로 미치광이가 많았다. 남들이 보기엔 멀쩡해도 속은 곪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죽은 공작도 만만치 않았다.
그런 비위를 맞추며 필립은 살아남았다. 죽은 공작에 비하면 현재 타란 공작의 성정은 오히려 더 깔끔했다.
삼엽쑥의 효능을 중화하는 약은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험을 거듭해 만들어진 최종완결판이었다. 그 과정에 이르기까지 조금씩 부족한 치료약은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노트에 모두 적혀있었다.
‘바닐라 향을 안다면… 그걸 빼야겠군.’
그러면 효능은 떨어질 것이다. 1~3년이면 중화될 효과가 두 배는 더 걸리고, 임신의 가능성도 확연히 떨어진다. 나머지는 하늘에 달렸다. 그러나 하늘은 언제나 필립을 배신하지 않았다.
잘 듣는 두통약이라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가문 비전에는 그런 약이 분명히 있었다.
필립이 두통약 처방전과 중화약 재료를 배합해서 새로운 약을 만드는 일만 남았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그의 약초 배합 실력은 칭찬에 인색한 죽은 부친도 인정하는 재능이었다.
얼마 후 안나의 손에 두통약 처방전이 들어왔다. 필립은 곧 로암을 떠났다. 필립을 감시하던 눈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필립이 로암(도시)을 완전히 벗어나자 감시의 눈을 거뒀다.
안나는 처방전을 보며 감탄했다.
“이런 식으로 약초를 배합하다니. 정말 획기적이야.”
그녀는 두통이 왔을 때 약을 지어 먹어보았다. 효과는 정말 굉장했다. 두통약을 먹어도 머리가 무거운 기분은 얼마간 지속되는데 이 약을 먹었더니 푹 자고 일어난 아침처럼 머리가 가볍고 상쾌했다.
안나는 내성에 거주하는 사람 중에 두통을 호소하는 환자에게 약을 처방해 주었다. 그들의 반응도 안나와 다르지 않았다. 가끔 편두통을 앓는 여자들이 안나에게 수개월 동안 먹을 수 있을 만큼의 약을 지어갔다.
루시아가 두통 때문에 안나를 불렀을 때 안나는 새로운 약을 가지고 들어갔다.
“안나, 이번 약은 정말 효과가 좋군요.”
정기적인 편두통이 오면 은근히 짜증이 났던 루시아는 약을 먹은 후 금방 가라앉는 효과에 감탄했다.
“약이 마음에 드신다면 그만두기 전에 넉넉히 지어두겠습니다.”
“그래주면 고맙지요.”
봄이 지나고 여름에 접어들었다. 루시아가 로암에서 맞이하는 두 번째 여름이었다. 평온한 나날이었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은 내일 같은 날이 이어졌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여름, 저녁을 먹으면서 그는 평화로운 나날의 종말을 고했다.
“폐하께서 승하하셨다는군. 수도로 올라갈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