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장 수도 (2)
“타란 공!”
휴고는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그를 부른 목소리의 주인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시간이 괜찮으시면 함께 어울려 주시지 않겠습니까.”
서글서글한 미소를 짓고 있는 청년은 백작 데이빗 라미스. 라미스 공작의 장자로 성년이 되었을 때 부친의 영지 일부와 함께 백작 위를 받았다. 태자와 사사로이는 처남 매부지간이었다. 퀘이즈가 왕이 되면 장차 권력의 중추에 오를 것이 확실시되는 인물이었다.
나이는 휴고와 같았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격차가 존재했다. 휴고는 공작이며 일가의 주인이지만, 데이빗은 공작의 후계에 불과했다. 그러니 데이빗이 휴고를 타란 공이라 부르며 불러 세운 것은 몹시 무례한 짓이었다.
휴고를 그리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공작 이상은 되어야 했다. 굳이 따지고 들면 공작도 휴고에게 존칭을 써야 했다. 형식적이기는 해도 타란 공작의 위치는 준 왕족 대우였다.
겉으로는 붙임성 좋게 웃고 있으나 그 안에 감추어진 치기 가득한 경쟁심을 휴고는 읽어냈다. 애송이. 휴고는 비웃었으나 드러난 표정은 여전히 무심했다.
“내가 어울릴 자리가 아닐 것 같소.”
휴고는 데이빗을 비롯해 그 뒤에 꼬랑지처럼 달라붙어 있는 추종자들을 짧게 일별한 후 답했다. 그 나름으로는 라미스 공작의 체면을 생각해 적당히 예를 갖춰 대해주었다.
“하하, 무슨 말씀이십니까. 공께서 함께해 주신다면 자리가 더욱 빛이 날 텐데요.”
“나만 빛이 날까 봐 염려되어 하는 말이오.”
비꼬아 말하는 속뜻을 알아듣지 못하는 자는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데이빗의 눈에 당황이 어리고 귀가 붉어졌다. 면전에서 이렇게 까이는 건 처음이었다. 항상 데이빗의 주변인들은 차기 공작으로 떠받들며 충복이 되기를 자처했다.
“하하하, 정말 듣던 대로 거침없는 분이시군요. 부디 고견을 나누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런 건 부친께 들으시오. 부친께도 들을 것이 없으면 찾아오든지.”
휙 돌아서서 멀어져가는 타란 공작을 더는 붙들 수 없었다. 모멸감에 주먹을 꽉 움켜쥐는 데이빗의 눈치를 살피던 추종자들이 슬금슬금 거북한 속을 긁어주었다.
“기사라더니 정말 무례하군요.”
“우리 모임에 끼웠다가는 오히려 더 해가 될 겁니다.”
데이빗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기사 출신이라도 대단한 분이지요. 그러니 태자 전하께서도 그렇게 신뢰하시는 것이겠지요.”
“그래도 어르신께 비하겠습니까. 장차 이 나라 왕후가 되실 분의 아버님 아니십니까. 멀리 보면 경은 이 나라 왕위에 오를 분의 외숙이 되시겠지요.”
추종자의 아부에 데이빗은 기분 좋게 웃었다.
‘흥, 아무리 잘난 척해봐야 내 아버지를 넘을 수는 없을 거다. 태자 전하와 우리는 아주 단단하게 혈연으로 묶여있는 관계이니까.’
휴고는 아예 안중에도 없었지만, 데이빗은 홀로 타란 공작에 대한 경쟁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데이빗보다 높은 지위와 권세를 지닌 귀족은 많았다. 그러나 모두 나이 지긋한 어른들이었다. 그러니 데이빗의 또래에서는 경쟁자가 없었다. 타란 공작만 제외하면.
타란 공작은 데이빗과 같은 나이에 이미 공작이었다. 전쟁터를 휩쓸며 명성을 얻었고, 태자가 그를 얻으려고 그토록 정성을 쏟은 일은 워낙 유명했다.
부친조차도 입이 마르게 타란 공작을 칭찬했다. 부친은 타란 공작이 곰의 탈을 쓰고 있으나 실상은 여우라고 하면서 그 앞에서 말과 행동을 조심하라고 몇 번이고 경고했다. 데이빗은 ‘네.’ 하고 대답하면서 속으로는 코웃음 쳤다.
타란 공작이 등장하자마자 모두의 관심이 그쪽으로 쏠리는 것이 무척 못마땅했다. 전쟁터에서 칼질 몇 번 한 일이 뭐가 그리 대단해서.
데이빗이 한 번만이라도 전쟁터를 누비는 타란 공작을 봤다면 그런 생각을 못 했겠지만, 그는 지난 전쟁 내내 안전한 후방에만 있었다.
‘그래 봤자 본질은 무식한 기사일 뿐.’
그는 근거 없는 자신감에 차있었다.
* * *
며칠 후에 루시아는 훌훌 털고 일어났다. 고작 체한 것치고는 꽤 오래 침대 신세를 졌으나 후유증은 없었다.
며칠의 부실한 식사를 보상이라도 하듯이 점심은 물론이고 저녁까지 테이블에 더욱 정성 가득한 요리가 올라왔다. 소화에 무리가 없는 것으로만 고르는 배려도 잊지 않았다.
“제롬, 하녀들이 많이 줄었네요. 못 보던 얼굴도 있고.”
“예, 마님. 상당수가 고용 기간이 만료되었습니다.”
마님 시중을 드는 고용인들의 자세가 형편없다고 공작이 갈아치우라 명했다.
어차피 대부분 고용인이 임시 고용 상태였다. 나중에 자원자는 수도까지 데려가려 했지만, 일이 이렇게 되어서 그냥 모두 계약을 해지했다. 수도 저택에서 일할 하녀들은 수도에서 수소문해서 다시 구할 생각이었다.
이후 로암(성)을 관리할 최소 하녀만 남겼다.
1년 넘도록 수발을 들던 이들이 하루아침에 바뀌었는데도 마님은 그저 ‘그렇군요.’ 하고 한마디로 더는 말이 없었다.
처음에는 순진하고 여린 분이라고만 생각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제롬은 달리 생각했다. 대개 첫인상에서 크게 벗어나는 사람이 드문데 공작부인은 그런 점에서 참 신기한 분이었다.
‘참 강한 분이야.’
결혼하자마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시집으로 들어와 살게 되면 불안하고 외로워지기 마련이었다. 그러면 의지할 사람을 찾고, 대개 그 역할은 손발처럼 수발을 드는 하녀가 맡았다.
안주인이 총애하는 하녀가 생기면 이른바 하녀들 사이에 서열이 형성된다. 하녀들의 알력싸움은 흠뻑 젖을 때까지 알 수 없는 가랑비 같았다. 심해지면 집사의 권한을 침범하는 경우까지 발생해서 대부분 귀족 가문 집사들은 그런 성가신 고민을 안고 있었다.
공작부인은 아랫사람을 다루는 선이 확실했다. 필요한 일만 시키고 불필요한 감정을 내보이지 않았다. 나무랄 일이 있어도 간단히 지적만 할 뿐이며 언성을 높이는 일조차 드물었다.
그런 점에서는 공작과 거의 비슷하게 닮았다. 매질 한 번 한 적 없는데도 고용인들이 주인 부부 내외를 굉장히 어려워하는 이유는 엉길 여지를 아예 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부부의 금실이 좋기 때문일까?’
참 이상한 일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두 분의 사이가 소원해지면 타격이 큰 쪽은 마님이 아니라 주인이었다. 그것은 객관적인 이유를 댈 수 없는 제롬의 느낌이었다.
“전하께서 충분히 몸조리하시고 이달 말쯤에 수도로 올라오라고 전언을 보내셨습니다.”
“무슨 몸조리를 그렇게 오래 해요. 그냥 체한 거예요. 다들 너무 유난이에요.”
제롬은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마님께서 고열 때문에 당시 주인님을 제대로 못 보셔서 그럽니다.’
제롬은 휴고가 의사를 부르며 한바탕 난리를 칠 때 응접실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새벽에 다시 불려간 안나가 하얗게 질려서 나왔을 때는 마님이 그렇게 심각하게 편찮으신가, 가슴이 덜컹했다.
마님이 겨우 진정되어 주무시자 침실을 나온 주인이 제대로 된 치료를 하지 못하겠냐고 안나를 얼마나 닦달했는지 모른다.
제롬은 주인이 그렇게 극심한 감정을 표출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쩔쩔매는 안나가 참 안되어 보였다. 아마 흰머리가 한 줌은 늘었을 것이다.
‘마님께서 이대로 계속 주인님 곁에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부디 간절하게 바라고 있습니다.’
차를 마시는 루시아의 느긋한 만족감을 보며 제롬은 생각했다.
사람들은 타란 공작 가문에 대해 잘 모른다. 대단히 유명한 기사 가문이라는 사실 외에는 잘 몰랐다.
북부는 땅이 거칠고 거주하는 인구가 적으며 야만족과 국경을 맞대 허구한 날 전쟁이 벌어졌다. 그야말로 돈 될 구석이 없는 땅이었다. 대단히 넓은 타란의 영지를 누구도 탐내지 않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물론 공작가는 부유했다. 아무리 볼품없는 땅이라도 그렇게 넓은 땅의 주인이 가난할 리 없으니까. 무력과 재력을 지닌 타란 공작 가문을 모두 인정하면서도 그 너머를 보려는 사람은 없었다.
타란 가문은 대단히 오랫동안 이어진 가문이었다. 눈에 띄게 흥성하지 않았으나 기운 적도 없었다. 세월의 저력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타란의 영지인 북부는 굉장히 오랫동안 공작가의 지배를 받았고 북부에서 타란 가문은 왕과 같았다.
귀족들이 하찮게 보는 백성의 지지는 때로는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아마 타란 공작이 앞장서면 북부 사람들은 두말없이 모두 뒤를 따를 것이다.
타란이 지닌 무력은 가문에 속한 기사단이 아니라 북부의 백성 전부였다. 그걸 다른 귀족들은 알지 못했다.
북부는 평온하다. 늘 야만족과 전쟁을 치르는 북부가 평온하다는 말은 모순이지만 그 전쟁을 제외하면 평온했다.
북부에는 다른 영지에는 수시로 발생하는 봉기가 없었다. 야만족과 싸우기 위해 사람들이 단결해서 그렇다고 생각하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다 먹고살 만하기 때문이다.
타란 공작가는 공작이 누구건 그럭저럭 북부를 잘 관리했다. 지나치게 세금을 거두어 착취하거나 권력으로 찍어 누르는 일이 없었다.
상과 벌이 확실하고 아무리 귀족이라도 이유 없이 사람을 해할 수 없었다. 법만 지키면 불합리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
북부가 얼마나 살기 좋은지 북부 백성은 알고 있었다. 땅이 척박해서 농사를 열심히 지어도 부를 쌓을 수준에 이르지 못하지만 굶지는 않았다.
오히려 부유하지 않아서 타락이 없었다. 북부인들은 모두 건실했으며 정직했다. 그것이 북부의 엄청난 자산이었다.
그리고 타란 공작가가 지닌 재력은 사람들의 상상 이상이었다. 오랜 세월 후계 싸움 따위로 진을 빼지 않으면서 작위를 지키고 고스란히 유지한 가문의 재력은 새끼를 치며 엄청나게 불어나 쌓였다.
타란 공작가가 야만족을 토벌하며 야만족 땅에서 얻은 몇 개의 보석 광산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타국에서 활동하는 거대 상단 몇 개의 소유주라는 것도, 타국의 땅이나 섬을 엄청나게 사들여 가지고 있다는 것도 누구도 몰랐다.
제롬은 타란 공작이 마음만 먹으면 이 나라를 전복하는 것은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전복하고 나라를 세워 그걸 운영하는 건 또 다른 문제이지만, 어쨌든 공작가가 지닌 힘은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그 이상이다. 제롬이 집사로서 대충 알고 있는 수준으로만 봐도 그랬다.
그런데 공작은 가문에 애착이 없었다. 공작은 뭔가에 얽매인 것처럼 가문을 이끌었다. 그건 공작이라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의무라기보다는 뭔가 끈적거리며 엉켜있어서 끊어내 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거였다.
냉정한 공작은 아주 간혹 그의 내심을 드러낼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그런 모습을 보지 못했다.
제롬은 그 이유가 마님이라고 확신했다. 어떤 이유로든, 어떤 형태로든 주인이 마님을 잃는다면 과연 어찌 될까. 그 후의 일은 상상하기도 무서웠다.
로암을 떠난 마차는 거의 열흘 만에 수도에 도착했다. 결혼하고 로암으로 갔을 때보다 시간이 배가 걸렸다. 가장 빠른 경로가 가릴 것 하나 없는 황무지라서 태양이 내리쬐는 한낮에는 달릴 수 없었다. 저녁과 새벽 시간을 적극 활용하다 보니까 속도가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번 여정 역시 기사 딘이 호위했다. 지난 여정에서는 공작의 명이었다면 이번에는 자청했다. 딘은 순수한 마님에 대한 충심의 발로였으나 만약 딘이 아닌 다른 기사였으면 휴고의 심기가 불편했을 것이다.
휴고는 자신의 정예 기사들의 충심을 신뢰하는 편이고, 특히 로이와 더불어 딘을 아꼈다. 말썽꾸러기 로이의 단순한 성품을 너그럽게 봐주고 실력을 믿는 것처럼 딘의 성실함과 진중함을 믿었다.
루시아는 1년 수개월 만에 돌아와서 공작저를 보며 감개무량했다. 여기서부터 그녀의 인생은 변화를 시작했다. 증서만 나누는 결혼식을 마치고 오는 길에 그는 말했다.
“수도에 머물고 싶으면 그렇게 해.”
그때 그의 말을 받아들여 공작저에 홀로 떨어져 별거 생활을 택하지 않기를 정말 잘했다. 그랬다면 그와 영영 남처럼 지냈을 것이다.
‘그와 완벽한 부부라고 자신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그를 알고 이해했다. 최소한 남들이 그들을 보고 겉만 부부라고 말하는 단계는 지났다.
저(邸) 안으로 들어서며 루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두 손으로 양팔을 감쌌다. 무더운 바깥과 확연히 다른 시원한 내부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방열 기능을 완비한 뛰어난 설계 덕분이겠지만 루시아의 첫인상은 집에 온기가 없다는 느낌이었다.
이곳에서 결혼하고 며칠 묵었을 때는 몰랐다. 로암에서 지내다가 오니까 비교할 수 있었다. 차가운 돌벽의 로암에는 이보다 더 따스함이 스며있었다.
꾸준히 관리했을 텐데도 역시 집에는 사람이 살아야 한다는 말이 실감이 갔다. 그가 이 차가운 넓은 집에서 혼자 지냈다고 생각하자 안타까웠다.
“마님, 침실은 로암과 마찬가지로 주인님의 침실 맞은편입니다. 여기 머무실 때 지내셨던 방과 복도를 두고 마주하고 있습니다.”
“내가 알아서 찾을게요. 바쁠 테니 일 보도록 해요.”
“예, 마님. 그리고 괜한 노파심에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저택 밖으로 나가실 때는 뜰이라고 해도 반드시 하녀를 동반하십시오. 로암과 다르게 수도는 어디에 보는 눈이 있을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럴게요. 올라가서 한숨 자야겠어요. 그이는 언제 들어오시지요?”
“저녁까지 일정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늦으실 것 같습니다.”
오늘 볼 수 있으면 좋겠는데, 루시아는 생각하면서 2층의 침실로 올라갔다.
저녁 늦게 사람의 시선을 피해 모인 자리였다. 비밀스러운 모임의 구성원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거물이었다. 아마 이들이 또다시 비밀리에 한자리에 모이기는 절대 쉽지 않을 것이다.
태자 퀘이즈, 타란 공작, 라미스 공작, 필리프 후작, 데캉 후작. 태자를 제외한 네 명의 공, 후작은 각자 지배하는 영지를 모두 합하면 국토의 반을 차지할 정도의 고위귀족이자 실세들이었다.
“그래서 타란 공의 생각은 어떻지?”
퀘이즈의 물음에 휴고는 잠시 생각했다.
“전쟁은 일어납니다. 시기가 문제일 뿐입니다. 그러니 그 안에 반 세력은 확실히 정리할 필요가 있지요.”
“으음…….”
모두 침음성을 삼켰다. 종전이라 했으나 실제 휴전에 가깝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전쟁에 패해 많은 배상금을 물어야 했던 남서 연합군의 연합국들은 비싼 대가를 치르는 중이었다. 세금을 견디다 못해 곳곳에서 들고 일어나고 내전에 휘청대며 일부 국가는 전복되어 왕조가 바뀌었다.
위기를 벗어나는 방법은 전쟁일 수밖에 없었다.
“당분간 내버려두고 저들이 힘을 키우도록 놔두자는 라미스 공 말씀에 동의합니다.”
“처음부터 그냥 정리하고 시작하면 뭐가 문제인데?”
“괜히 가지만 치지 말고 뿌리째 뽑아야지요. 어설프게 청소했다가는 나중에 전쟁 중에 안에 적을 품고 있는 꼴 납니다.”
반 태자 세력, 이른바 태자의 배다른 형제들을 어찌 처리할지 논의하는 자리였다. 타란 공작과 라미스 공작은 지금은 놔뒀다가 나중에 치우자는 쪽이고, 두 후작은 깨끗이 정리하고 즉위하는 편이 깔끔하다는 쪽이었다. 둘 다 일리가 있어서 퀘이즈는 고민 중이었다.
“타란 공이 결정권자라면 지금은 놔둔다는 거지?”
“아니요. 제게 결정권이 있으면 지금 처리합니다.”
엥. 다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휴고에게 시선을 모았다.
“왜 말이 달라. 어설프게 청소하지 말고 나중에 뿌리를 뽑으라면서.”
“그게 정석이긴 합니다만. 전 태자 전하가 아닙니다. 눈앞에서 거슬리게 알짱거리는 꼴 못 봅니다. 다 죽여놓고 시작하는 게 성질에 맞죠.”
“…아. 그런가.”
퀘이즈는 문득 1년 수개월 전에 타란 공작이 배신한 북부의 영주들을 어찌 처리했는지 떠올렸다. 1천 명 가까이가 죽은 사건이었다. 북부 일에 어지간하면 관여하지 않는 부왕도 당시에 상당히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모르긴 몰라도 당시 부왕은 입막음으로 타란으로부터 거한 선물을 받았음이 틀림없었다. 마치 없던 일처럼 흐지부지 넘어가 버렸다.
“나중에 기어오르면 또 죽이면 되니까요. 지금 처리하신다고 해도 반대는 안 합니다. 뒷일 생각 안 하고 다 잡아 죽이는 건 자신 있습니다만. 태자 전하께서 곤란한 것 아닙니까?”
퀘이즈의 표정이 떨떠름했다. 사람 목숨을 벌레 잡듯 말하는 타란 공작을 완벽히 이해하는 일은 평생 불가능할 것 같다.
그런데 이런 과격함이 드러날 때마다 퀘이즈는 묘하게 안심했다. 타란 공작이 여우 같은 모사꾼 짓을 할 것 같지 않기 때문이었다.
세상일은 알 수 없다. 퀘이즈는 단지 기분으로 사람의 일면을 파악하는 어리석을 짓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어떤 사람을 파악할 때 그려지는 이미지를 본능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음. 우선 놔두고 상황을 지켜보도록 하지. 다른 분들의 생각은 어떠시오?”
라미스 공작은 물론이고 후작 둘도 동의했다. 라미스 공작은 깊은 눈으로 타란 공작을 살폈다. 나이를 헛먹지 않았는지 그는 타란 공작이 부러 그리 말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난 무식하게 그냥 지금 다 죽이고 싶은데 태자 네 생각은 어떤가, 하는 식으로 자연스럽게 태자의 생각을 반대쪽으로 몰아갔다.
‘으음…….’
그는 무심코 자꾸 아들과 타란 공작은 비교하곤 했다. 아무래도 나이가 같아서일 것이다. 그때마다 아들놈은 필패. 애초에 그릇 자체가 달랐다. 타란 공작이 정계 권력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집에 돌아가면 다시 한 번 아들 녀석에게 단단히 경고해 둘 셈이었다. 괜한 치기로 타란 공작과 경쟁하려고 들지 못하도록.
아들 데이빗은 머리는 그런대로 비상한데 안하무인이었다. 어려서부터 우러름을 받기만 해서 세상 무서운 줄을 몰랐다. 과감하게 일을 추진할 때는 장점이 될 수 있으나 주제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큰 문제가 될 것이다.
라미스 공작은 슬슬 사후를 걱정할 나이가 되었다. 그런데 이제 막 왕이 될 태자는 한창 나이고 타란 공작도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왕의 치세에서 가문을 지킬 사람은 공작의 자식들이었다. 그러니 그의 관심은 후계 문제에 쏠려있었다.
퀘이즈는 선왕을 닮지 않았다. 겉으로는 호인 같아도 대단히 성격이 강했다. 강한 왕권을 추구할 것이 분명한 왕에게서 가문을 지키려면 납작 엎드릴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 점에서 데이빗이 불안했다. 저 잘났다고 들이받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데이빗보다는 로빈이 나을지도.’
라미스 공작은 자신감과 자존심이 지나치게 강한 데이빗보다 온순한 차남 로빈을 후계로 고려 중이었다. 이런 라미스 공작의 내심을 데이빗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주도할 수 없는 회의에 참석하는 일은 진이 빠진다. 휴고는 그동안 그가 주도했던 회의에 참석했던 가신들이나 지역 영주들의 노고를 조금은 이해했다.
어둠에 잠겨있는 저택은 오늘따라 유난히 쓸쓸해 보였다. 수도로 올라오고 나서 그는 집에 들어갈 때마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원래 그에게 집은 잠자는 곳 외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북부에서는 출타했다가 로암에 돌아가면 그를 기다리고 맞이하는 사람이 있었다. 처음으로 집에 돌아간다는 기분이 뭔지를 느꼈다.
그녀가 수도를 향해 떠났다는 사실은 들었다. 절대 무리하지 말고 쉬엄쉬엄 오라고 했으니 시간은 좀 걸릴 것이다. 솔직히 그는 최대한 빨리 오라고 하고 싶었다.
마차에서 내리면서 휴고는 자신을 맞이하는 제롬을 보며 놀란 눈을 했다.
“강녕하셨습니까, 전하.”
“언제 왔지?”
“마님을 모시고 오늘 오전 도착했습니다.”
“별일은?”
“여정 내내 마님께서는 무탈하셨습니다. 도착하시어 낮에 한잠 주무시고 조금 전에 침실에 드셨습니다.”
듣는 둥 마는 둥 휴고는 제롬을 지나쳐 저택 안으로 들어가 빠르게 계단을 올라갔다.
습관적으로 자신의 침실 문을 덜컥 열었다가 텅 빈 싸늘함에 잠시 가슴이 덜컹했다. 여기가 아니었다. 복도 맞은편의 문을 열자 어두운 침실의 침대 위에 누워있던 그림자가 움직였다.
“으음……. 지금 오시는 거예요?”
잠기운이 묻어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휴고는 심장이 뛰었다. 어떤 노래가 이보다 더 감미롭게 귀에 감길까.
성큼성큼 침대로 다가가 몸을 반쯤 일으키는 그녀를 와락 끌어안으며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품 안에 쏙 들어오는 부드러운 몸과 그녀의 체취가 몹시 그리웠다. 허전했던 그의 마음에 충만한 기쁨이 가득 차올랐다.
루시아는 그의 강한 힘으로 꽉 눌러 감싸자 여행의 피로가 다 날아가는 것 같았다. 그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고 그리웠던 그의 품을 만끽했다.
잠시 그렇게 서로의 온기에 취해있었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양손으로 잡아 품에서 떨어뜨리면서 그대로 입술을 겹쳐왔다.
뜨거운 살덩이가 입술을 가르고 입안을 파고들었다. 순식간에 타액과 호흡이 뒤섞였다. 그의 입술이 격렬하게 맞부딪쳐 왔다. 잠시 떨어졌다가 다시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몹시 달다는 듯, 애원하는 듯한 키스에 루시아는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그의 손이 얇은 잠옷 속으로 들어와서 맨가슴을 꽉 쥐었다. 그의 애무에 익숙한 몸이 짜릿한 자극으로 받아들여서 저절로 흠칫했다.
커다란 손이 가슴을 주무르고 손가락이 곤두선 유두 끝을 문질렀다. 그녀의 몸은 그리웠던 그의 손길을 받으며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날이 더워서 그녀가 입은 잠옷은 속이 반쯤 비치는 하늘하늘한 소재였다. 잠옷 위로 더듬는 손바닥에 그녀의 몸매가 고스란히 잡혔다. 그는 얇은 잠옷 위로 볼록 솟은 가슴 끝을 입술 사이에 넣고 살짝 힘을 주었다.
“흐읏…….”
자극을 받은 유두가 곤두서 있었다. 그는 잠옷 위로 도드라진 돌기를 혀로 핥으면서 이 끝으로 물었다. 그의 타액으로 축축하게 젖어드는 잠옷이 가슴에 찰싹 달라붙어 더 야하게 도드라졌다.
그는 얇은 막 너머로 느껴지는 그녀의 가슴을 마음껏 탐했다. 문득, 가로막은 천이 거추장스러웠다. 부드럽고 달콤한 그녀의 피부를 맛보고 싶었다.
그는 그녀의 잠옷 앞섶을 잡아 옆으로 당겼다. 위에만 달린 단추 몇 개가 튕겨 날아가면서 그의 손아귀 힘을 이기지 못한 얇은 잠옷이 부욱― 소리를 내며 찢어졌다. 눈앞에 드러나는 하얀 과실을 그는 쭉 빨아 삼켰다.
“하응!”
그녀의 손이 그의 머리카락 속을 파고들었다. 혀가 가슴을 굴리며 희롱하기 시작하자 허리부터 등을 타고 짜르르한 느낌이 올라왔다.
달아오르는 몸이 그를 받아들일 준비를 시작했다. 다리 안쪽이 뜨거워지고 아슬아슬한 감각이 몸 안에서 간질거렸다. 그녀는 허리를 들썩이면서 두 다리를 오므려 꼬았다.
허벅지를 더듬는 그의 손이 팬티를 잡아 끌어내렸다. 발목까지 내려온 팬티를 벗겨 그는 휙 내던졌다.
그는 옷을 다 벗을 정신도 여유도 없었다. 바지만 내리고 기립한 분신을 꺼냈다. 그녀의 다리를 잡아 벌려서 허리로 둘렀다. 단단한 중심이 바로 그녀의 은밀한 샘에 닿았다. 그가 조금 허리를 움직여 끝으로 그녀의 입구를 문질렀다.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가 귓가에 속삭였다.
“지금. 괜찮아?”
그녀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동시에 입구에 맞닿은 뭉툭한 끝이 살갗을 밀어내며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
다급한 그의 몸짓에 비해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강하게 치고 들어가고 싶은 욕망을 참기 위해 그가 이를 악물었다. 급하게 했다가 부서질 것처럼 작고 약한 아내가 다칠까 봐 걱정이었다.
그가 끝까지 다 들어오자 잠시 멈추었던 두 사람의 호흡이 일시에 터졌다. 그녀의 작은 몸이 품기에 거대한 그의 흉기가 원래 있어야 할 곳을 찾은 것처럼 그녀의 안을 점령했다.
몸 안을 가득 채운 기분 좋은 압박감과 충족감에 그녀는 탄식처럼 한숨을 쉬었다. 좁게 수축한 질 안쪽을 빠듯하게 넓히며 들어온 그의 상징이 그녀의 몸 안에서 심장 박동처럼 쿵쿵 울렸다. 내벽을 밀어내는 이물감이 생생해서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파?”
“하아……. 아…니요.”
“좀… 힘이 들어갈 것 같으니까. 아프면 말해.”
그녀의 몸 안으로 무작스럽게 치고 들어가 마구 밀어붙이고 싶은 욕망을 참느라 휴고의 디딘 팔에 힘이 들어가 힘줄이 불거졌다.
그가 천천히 빠져나가더니 묵직한 힘을 실어 들어왔다. 통증 같은 아릿함을 느낀 몸이 흠칫했다. 둔통은 아주 짧은 순간에 사라지고 등줄기를 따라 약한 절정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찌릿한 쾌감에 몸을 떨었다.
다시 천천히 쑥 물러난 단단한 끝이 좀 더 강하게 깊이 들어왔다.
루시아는 신음하며 그의 팔을 붙들어 셔츠 소매를 쥐었다. 그가 달려들어 키스할 때부터 예민하게 흥분한 그녀의 몸이 그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저항하는 것처럼 수축 운동을 하며 조여들었다.
“흐읏…….”
“윽……. 비비안. 너무… 좁아.”
죽겠네, 진짜. 그가 거친 호흡으로 중얼거리면서 여린 속살을 죽 밀어내며 진입했다. 좁고 쫀득한 그녀의 안쪽이 어찌나 조이는지 그는 순간순간 아득했다.
그는 마구 달리고 싶은 갈망에 고삐를 쥐었다. 아직은. 그녀의 몸은 조금 더 준비가 필요했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안다. 이보다 훨씬 더 매끄럽게 물을 내어 길을 만들어 주어야 했다.
그는 마치 굶주린 짐승처럼 갈급한 몸짓으로 부드럽고 천천히 그녀의 몸을 열었다.
소중히 사랑받는 느낌이었다. 그건 어떤 격한 자극보다 그녀를 더욱 흥분으로 몰아넣었다.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고 엉덩이를 들어 그를 더 깊이 받아들였다. 그를 완전히 끝까지 삼키자 숨이 찼다. 귓가에 들리는 그의 호흡이 거칠었다.
완전히 맞물린 두 몸이 율동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가 조금씩 속도를 더하며 그녀의 속살에 마찰을 일으켰다.
“응……. 좋아…….”
“…뭐?”
탁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중얼거린 그가 허리를 움직이며 그녀의 귓불을 깨물었다. 혀로 핥아 올리면서 크게 입을 벌려 한입에 목을 물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목에서 팔딱거리는 맥박이 그녀 몸에서 풍기는 향의 근원인 것처럼 그는 강하게 쭉 빨았다.
“다시 말해 봐.”
그의 척추를 따라 전율이 올랐다. 아무 기교도 섞이지 않은 한마디 말을 듣고 흥분한 하복부에 아플 정도로 피가 몰렸다.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온 그녀의 진심이라 생각하자 큰 자극이 되어 그의 허리를 내리쳤다.
“아! 응!”
그의 강한 추삽질로 그녀의 몸이 아래위로 흔들렸다. 루시아는 두 팔을 그의 목에 둘렀다. 고개를 그의 어깨에 묻자 상체가 살짝 떠올랐다. 그의 커다란 손 하나가 안정적으로 그녀의 등을 받쳐주었다.
빠른 움직임으로 그가 허리를 튕겼다. 그녀의 속살이 딸려 나올 것처럼 그의 성기에 착 달라붙었다.
“핫. 으읏……. 아……. 좋아……. 더 깊이…….”
“하, 당신 진짜.”
그가 사납게 목 안으로 그르렁거렸다.
“아! 아앗!”
정신없이 몸이 흔들린다. 다시 침대에 눕혀져 두 손을 그가 깍지를 껴 눌렀다. 그녀의 입술을 거칠게 쭉 빨아들인 그의 입술이 가슴 둔덕을 핥고 빨았다. 사납게 돌진하는 그의 남성이 속살을 마구 헤집어 민감한 안쪽을 찔렀다.
그녀의 질벽이 반응해서 파도를 타기 시작했다.
“아아아!”
절정에 오른 그녀가 교성을 지르며 발끝을 오므렸다. 그의 것을 감싼 그녀의 내부가 격렬하게 움직였다. 그는 잠시 허리짓을 멈추며 필사적으로 사정을 참았다. 내부의 경련이 조금 잦아들자 그는 다시 뜨겁고 좁은 길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아! 아응! 휴!”
그녀가 애원처럼 교성을 질렀다. 촉촉하게 젖어드는 그녀의 눈가에 그가 키스했다. 그녀의 허벅지를 두 손으로 단단히 잡고 밀어붙였다. 그의 아래에서 흐드러진 그녀의 몸부림을 보며 그는 단 숨을 몰아쉬었다. 꿀을 입에 문 것처럼 달았다.
점차 고조되는 절정감이 마지막에 도달했을 때 그는 잇새로 신음하며 눈을 감았다. 경직된 그의 허리를 타고 정수리까지 쾌감이 치고 올라갔다. 그의 것이 울컥거리며 그녀의 내부에 정액을 쏟아냈다.
길게 이어진 그의 사정이 끝나자 두 사람이 몸이 그대로 무너졌다. 그의 호흡은 금세 진정이 되었지만 그녀는 꽤 오래 가슴팍이 오르내렸다.
그가 상체를 일으켰다. 몸 안 가득하던 그가 느릿하게 빠져나가자 허전함에 그녀는 흠칫 떨며 다리를 오므렸다. 온몸의 잔떨림이 계속 이어졌다. 그도 느껴지는지 그녀의 등 아래에 손을 넣어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의 품에 밀착된 상태로 그녀는 호흡을 골랐다. 몸이 나른하게 늘어졌다. 여름이지만 체온이 닿는 뜨거움이 싫지 않았다. 그가 눈가, 입술 가리지 않고 얼굴에 자잘한 키스를 퍼부었다.
“비비안.”
“네…….”
소르르 잠이 올 것 같아서 그녀는 눈을 깜빡였다.
“한 번만 더 하자.”
대답하기도 전에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서로의 혀가 맞닿고 깊은 체온을 나누는 농밀한 키스가 이어졌다. 그녀는 숨을 할딱거리며 그의 키스에 호응했다.
어지러워서 취할 것 같은 열기가 좋았다. 다정하건 뜨겁건 그녀는 언제나 그와 하는 키스가 황홀했다. 그의 손이 그녀의 허벅지 안쪽을 잡아 벌렸다. 여린 살에 금방 손자국이 남았다.
“흑!”
그새 다시 힘을 받아 일어난 단단한 기둥이 안쪽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그가 쏟은 정액과 애액이 섞인 습한 내벽이 아무런 저항 없이 그를 쭉 삼켰다.
이러다가는 끝이 없겠다. 루시아는 양손으로 그의 가슴을 짚어 밀어내려 힘을 주고 허리를 비틀었다. 그래 봤자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힘으로는 어차피 당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약이 올라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매번 그러시잖아요.”
“봐줘. 오랜만이잖아.”
“당신이 언제 그런 걸 따졌어요!”
매일 하나, 며칠 만에 하나 그녀를 가만두지 않는 건 똑같았다. 매일 하면 하는 대로 괴롭히고 오랜만이면 그런 이유로 더 집요했다.
그는 물에서 건진 인어처럼 팔딱거리는 그녀를 간단히 제압해서 두 손목을 한 손으로 잡아 위로 올려 눌렀다. 그리고 한 손으로 그녀 허벅지를 잡아 허릿심으로 밀어 올렸다. 단번에 깊은 곳을 건드렸다.
“흣…….”
“협조하면 정말 한 번만 더 할게.”
그를 잠시 흘겨보다가 허락처럼 다리로 그의 허리를 더듬었다. 어차피 그가 순순히 물러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이 정도로 제지해 두었으니 잠을 못 자도록 붙들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끝을 모르는 체력을 자랑하는 그를 감당하다 못해 나름대로 익힌 요령이었다.
그는 가능한 그녀를 격하게 밀어붙이지 않으려 애썼다. 그녀를 상대로 하고 싶은 온갖 체위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안 돼. 오늘은 참아야 했다.
정말 그녀를 배려한다면 오늘은 푹 자도록 두어야 했지만, 그런 모순을 그는 무시했다. 지금 그는 욕망과의 싸움에서 모든 힘을 다하고 있었다.
자신의 몸을 계속 흔들어대는 그를 흐릿해진 눈으로 보면서 그녀는 드문드문 신음을 흘렸다. 새삼 그가 옷을 입은 그대로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의만 내린 상태로 허리를 움직이는 그의 아래에서 루시아는 나신 상태였다. 그 대조에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옷이…….”
“옷?”
“옷이… 구겨지겠어요.”
그가 낮게 웃으며 확 쳐올렸다.
“아!”
“신경 쓰여? 당신은 벗고 난 입고 있는 것이?”
“…….”
“벗을까? 그런데 벗으면 당신 오늘 못 자.”
짓궂게 웃는 그에게 ‘벗지 마요.’ 하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가 웃으며 루시아의 입술을 쭉 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