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시아-37화 (38/77)

37장 수도 (4)

공작저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팔짱을 끼고 기대앉아 휴고는 생각 중이었다. 표정만으로는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가 없다. 맞은편에 앉은 파비안이 조심스럽게 주인의 기분을 살폈다.

“크로틴 경의 행방을 알아볼까요?”

태자에게서 로이가 말도 없이 사라져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다. 무단이탈에 항명, 태만. 죄를 묻는다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녀석치고는 오래 참았지.”

파비안은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사실 1년 넘도록 아무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이제야 이런 돌출 행동을 했다는 사실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내버려둬. 어디서 자다가 기어들어 오겠지.”

녀석이 실컷 놀다가 들어오면 간만에 충고 좀 해야겠다. 약발이 떨어질 때가 되긴 했다.

“호위 일은 이젠 그만해도 될 것 같고.”

아직 태자이긴 해도 왕이 죽기 전과 왕권 대행을 하는 현재와의 격차는 하늘과 땅이었다.

퀘이즈는 거의 왕처럼 빈틈없는 호위를 받고 있었다. 지금 퀘이즈를 섣부르게 건드리면 반역으로 엮여서 가문이 멸족될 위험을 감수해야 할 테니 함부로 나대는 자는 없을 것이다.

“예, 전하.”

‘예상대로군. 전하께서는 로이에게 관대하시니까.’

로이가 들었다면 인정사정없이 두들겨 패는 게 무슨 관대냐고 버럭하겠지만, 공작의 너그러움은 로이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인정했다. 누구도 주군에게서 로이와 같은 처우를 받지 못했다.

파비안은 어쩐지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타란 공작에게 겁먹지 않고 까불어대는 인사는 로이가 유일했다. 로이와 함께 있을 때의 타란 공작은 가끔 보통 사람처럼 보였다.

‘미친개라……. 아주 딱 맞는 별명이지.’

요즘 수도에서는 기사 크로틴을 칭할 때 광견 크로틴이라고 했다. 공작에게 까부는 로이를 보면 저러다 일 나지 싶어 파비안이 오히려 섬뜩할 때가 있었다. 그 녀석은 확실히 미친개가 맞았다. 미친개는 겁을 모르니까.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디자이너가 누구지?”

“몇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파비안은 창밖을 내다보며 대충 현재 위치를 가늠했다.

“가장 가까운 곳이라면 무슈 제프리의 의상실 혹은 마담 앙뜨의 의상실입니다.”

남자 디자이너는 휴고의 선택지에서 제외였다.

“마차 돌려. 앙뜨 의상실로.”

즉시 마차는 마담 앙뜨의 의상실로 방향을 틀었다. 앙뜨는 분명히 수도에서 유명한 디자이너 중 하나였다. 그러나 가장 유명하다고는 말하기 곤란했다. 어떤 스타일의 드레스를 선호하는가에 따라 첫손에 꼽는 디자이너는 사람 취향에 따라 제각각이었다.

앙뜨가 오늘 큰손님을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앙뜨가 여자이고, 의상실의 위치가 공작의 마차에서 가장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타란 공작은 사전에 약속을 잡지 않았고, 폐점 시간에 느닷없이 방문했음에도 VVIP 대접을 받으며 특실로 안내받았다.

고급 의상실은 권력 행방의 정보에 굉장히 민감했다. 그들의 주 고객은 부자고, 부자는 대부분 고위귀족이며, 고위귀족은 대부분 권력자였다.

거대한 규모로 권력이 재편되는 지금은 민감한 시기였다. 불안 요소가 있기는 해도 대부분 사람은 태자가 무난히 왕이 될 것이라고 점쳤다.

새로운 왕의 최측근이 타란 공작이라는 사실은 돌아가는 분위기를 조금만 파악해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장차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권력의 실세로 부상하리라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그 권력에 공작가의 부유함은 덤이었지만 앙뜨에게는 그 덤이 가장 매력적이었다.

콧대 높은 디자이너이자 의상실의 주인 앙뜨는 어지간한 귀족들 앞에서 세우는 자존심을 타란 공작 앞에서 세울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매우 사근사근하고 다소곳하게 직접 손님맞이를 했다.

“고명하신 분을 이리 뵈어 영광입니다. 전하.”

“길게 말하는 취미 없으니 간단히 하겠네.”

“하문하시지요.”

“내 아내의 드레스가 필요하오.”

화제의 공작부인! 앙뜨는 흥미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기 위해 표정 관리에 힘썼다.

“혹시 동반하셨는지요? 마차에서 기다리고 계십니까?”

“의뢰하면 디자이너가 직접 방문하기도 한다고 들었소만.”

“예, 물론입니다. 전하. 언제 찾아뵈면 될는지요?”

“내일…….”

내일은 아무래도 안 되겠다. 오늘은 닷새의 하루 중 닷새째였다. 그녀가 수도 올라온 이후에 그녀가 여행으로 누적된 피로 때문인지 힘들어해서 마음껏 못 했다. 더구나 어제는 그의 귀가가 조금 늦었을 뿐인데 이미 그녀는 자고 있었다.

수도로 오기 전에 그녀가 단단히 탈이 난 일 때문에 그는 아내의 건강에 민감한 상태였다. 곤히 자는 그녀를 도무지 깨울 수 없어서 얌전히 안고만 잤다.

오늘은 어제 못한 것까지 뜨거운 밤을 보낼 작정이었다. 내일 그녀가 온종일 쉬면 다음 날 디자이너가 방문했을 때 무리가 없을 거라고 계산을 마쳤다.

“아니, 모레로 하지.”

“모레……. 말씀입니까?"

앙뜨는 유명한 디자이너였다. 그녀에게 옷을 맞추고 싶은 사람이 줄을 섰다. 특히 다가올 대관식 때문에 요즘은 밤낮없이 바빴다. 한 달은 일정이 빽빽하게 꽉 차있었다. 바쁘지 않은 평소에도 최소 일주일 여유를 두고 약속을 잡았다. 갑자기 당장 이틀 뒤 일정을 빼라는 요구 매우 곤란했다.

앙뜨의 고민은 짧았다. 일단 눈앞의 고객이 너무 엄청났다. 공작부인이 앙뜨의 드레스를 입어서 얻을 수 있는 홍보 효과와 당장 무리한 일정 변경으로 발생할 손해를 비교해 주판을 튕겨보았다.

결혼하자마자 영지로 내려가서 누구도 제대로 본 적이 없다는 공작부인은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귀부인들이 의상실에서 옷을 맞출 때마다 공작부인을 화제로 귀에 못이 박이도록 떠들었다. 공작부인의 첫 사교계 등장은 굉장한 관심일 것이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앙뜨는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소문의 공작부인을 볼 수 있다는 기대도 한몫했다.

“내 아내는 검소한 편이오. 그래서 드레스를 몇 벌 사는 것을 낭비라고 생각하지.”

“어머나."

“그리고 나는 내 아내가 공작가 안주인으로서 뭐든 최고를 가질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이를 말씀입니까.”

“돈에 구애받지 말고 필요한 것을 전부 마련하도록 하시오. 내 아내를 어떻게든 구슬려 그걸 해내느냐는 그대의 능력이오. 그 능력을 봐서 차후에도 그대와 거래를 계속할지 결정하겠소.”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하고 가만히 듣고 있던 앙뜨의 눈동자에 번뜩이는 빛이 돌기 시작했다. 간혹 아내나 딸이 훅 정신이 나가서 지르는 것을 막으려고 출동한 누군가의 남편, 혹은 아버지는 봤어도 돈을 쓰게 하라고 요구하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세상에. 타란 공작이 이런 로맨티시스트였다니!’

앙뜨는 황홀한 눈으로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건 흡사 자신의 비밀 금고 속 금괴를 볼 때와 다름없는 눈빛이었다.

“돈에 구애받지 말라는… 말씀이십니까?”

“터무니없이 덮어씌우는 건 사양하지.”

“호호호. 저희는 그런 상식 없는 의상실이 아니랍니다.”

앙뜨는 재빠르게 메모지에 숫자를 적어 넣었다. 그녀는 로맨스를 사랑하는 동시에 현실주의자였다. 사랑은 밥을 먹여주지 않는다. 오직 황금을 기반으로 한 사랑만이 영원할 뿐!

‘돈에 구애받지 말고’라는 애매한 경계를 더 확실히 하기 위해서 앙뜨는 영리하게 머리를 굴렸다. 자신이 생각한 최대한도의 1/2 정도의 금액을 적어 공작 앞에 내밀었다. 그녀는 고객의 혹시 모를 자존심까지 챙길 줄 아는 덕을 갖추고 있었다.

“어떠신지요?”

과연 이 정도를 감당하실 수 있겠는지요, 앙뜨는 물었다. 드레스는 상당히 고가의 사치품이었다. 최신 제품일수록, 유일하고 독특한 디자인일수록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호기롭게 연인에게 큰소리치며 의상실에 들어왔다가 가격에 혼이 빠져서 체면 구기는 인사들을 적지 않게 보았다.

앙뜨의 도전장을 받은 휴고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가소롭다는 듯 픽 웃으며 펜을 들어 그 액수 뒤에 0하나를 더 그려 넣어 단번에 앙뜨를 KO패 시켰다.

다시 메모지를 되돌려받은 앙뜨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헉, 숨이 막히는 것 같아서 가슴을 움켜잡았다. 유레카! 머리 위에서 팡파르가 울려 퍼졌다. 인생 최고의 대박을 물었다고 행운의 요정이 탬버린을 흔들었다.

“모… 모레 틀림없이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능력을 보도록 하지.”

“맡겨 주십시오.”

“아, 그리고 괜찮은 보석상을 한 군데 소개해 줬으면 하는데.”

로암에 있는 가문 소유의 상당히 많은 장신구들을 수도로 나르기에는 너무 번거로웠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소유한 장신구들이 별로 없다는 점이 그는 계속 신경 쓰였다.

고깃덩이를 앞에 둔 배고픈 짐승처럼 앙뜨의 눈이 번쩍거리며 간드러지게 웃었다.

“공작부인의 고아하신 격에 살~짝은 부족하지만 다른 곳과 비교하면 절대 뒤지지 않는 보석상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전하.”

앙뜨를 비롯한 직원 모두가 건물 밖까지 나가서 허리를 깊이 숙이며 타란 공작을 배웅했다. 마차가 더는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우아하게 허리를 펴는 앙뜨의 눈은 뜨겁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당장 일정 조정에 들어간다! 무슨 일이 있어도 모레 하루는 싹 비워! 지금까지 제작한 모든 드레스며 구두며 모자며 디자인 북까지 빠짐없이 준비하고!”

앙뜨의 지시에 따라 조수들은 정신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마 오늘부터 내일까지 밤새 앙뜨의 의상실은 불이 꺼지지 않을 것이다.

마차는 앙뜨가 추천한 보석상에 도착했다. 앙뜨가 친족과 공동으로 운영하는 보석상이었다. 앙뜨는 마부 옆에 길을 안내할 사람 하나를 붙이는 세심함을 가장한 철저함을 잊지 않았다.

이미 한발 앞서 소식을 받고 세피아 보석상은 구경하던 몇 명의 손님을 내쫓고 가게 문을 내려 오직 한 사람의 고객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 마차가 도착했을 때에는 미리 사람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최고의 예를 다해 공작을 맞이했다.

휴고는 진열된 목걸이나 팔찌 등의 보석류들을 이것저것 가리키며 보이도록 했다. 세피아 보석상의 물건들은 수도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고급품이었지만, 보석들을 보는 휴고의 눈빛은 그리 마땅치 않았다. 급하게 사려니까 질이 낮은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정말 사려는 것인지 구경만 하려는 것인지, 내오는 물건을 그저 흘끔 보기만 하고 다시 다른 물건을 가리켰다. 그러나 누구도 불편한 기색 하나 보이지 않았다.

앙뜨가 미리 말해 놓지 않았다 해도 이 정도의 거물급 손님이 방문해서 소소한 수입을 올린 적이 없다는 건 업계의 상식이었다.

여러 직원이 달라붙어 신속하게 움직이며 어느새 테이블 위에는 선보인 보석들이 잔뜩 쌓였다.

“이걸로 하지.”

“정확히 어떤 것 말씀이신지…….”

총지배인이 손을 비비며 허리를 굽실거렸다. 공작에게 선보인 물건들이 전부 고가품이라서 한두 개만 팔아도 대박이었다.

“전부.”

“다… 다… 다 말씀입니까?”

“파는 물건이 아닌가?”

“아닙니다! 아니, 그러니까 맞습니다! 즉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총지배인의 표정이 환희로 떨렸다. 오늘 판매로 인해 자신에게 떨어질 커미션을 생각하면 폭소가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얼마나 걸리지?”

“조… 조금은 기다리셔야……. 금방 해 드리겠습니다.”

휴고는 테이블에서 맑은 황색의 물방울 모양 사파이어 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 색과 닮았다.

“이거는 지금 주고, 나머지는 배달해 주게.”

“급하지 않으시면 내일 날이 밝으면 배달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고가품들이라 안전을 기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하게.”

보석상 하나를 거의 털다시피 해서 휴고는 귀가했다.

귀가한 주인의 옷시중을 들며 제롬은 오늘 발생한 작은 사건을 고했다.

“그래서. 녀석이 어디 갔는지 모른다는 거군.”

“예, 전하. 송구합니다.”

늘어지게 한잠을 자고 일어난 로이는 슬슬 휴고가 돌아올 즈음이 되자 겁이 났는지 슬그머니 줄행랑을 쳤다. 녀석이 맘먹고 도망질 다니면 찾을 수 없고, 어디 있는지 알아도 휴고가 직접 가지 않는 이상 끌고 올 능력 있는 사람도 없었다.

“나중에 오거든 내가 꼼짝 말고 있으라 했다고만 전해. 억지로 잡아두려 하지는 말고.”

“예, 전하.”

목욕을 마치고 휴고는 아내의 침실로 들어갔다. 화장대 거울 앞에 앉아있는 그녀의 뒤로 다가가 뒷목에 입을 맞추고 들고 온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목에 차가운 것이 닿자 흠칫한 루시아는 거울로 정체를 확인하고 놀라 눈이 커졌다. 물방울 모양 보석이 영롱하게 반짝거렸다.

“마음에 안 들어?”

“아, 아니에요. 예뻐요. 잠시 오늘이 무슨 날인가 고민했어요.”

“특별한 날만 선물을 받는 건 아니지.”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엄청난 가격의 보석이라든가, 그런 건 아니죠?”

올해 봄, 생일에 받은 선물을 생각하면 아직도 체한 것처럼 속이 눌리는 것 같았다. 그는 처음 선물했던 화이트 다이아몬드에 이어 올봄에는 레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선물했다.

화이트 다이아몬드 목걸이만큼 다이아몬드가 부담스럽게 주렁주렁 달리지 않아서 다음 티파티에 걸고 나갔다.

유난히 보석에 관심이 많은 귀부인이 루시아의 레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알아보며, 그게 보석 경매에서 얼마에 낙찰되었는지를 떠벌렸다.

어마어마한 액수를 듣고 기절하는 줄 알았다. 비쌀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녀의 예상치를 훌쩍 뛰어넘었다.

“그런 걸 원해? 아마 다음 달에 보석 경매가…….”

“아니요!”

그는 정색하는 루시아를 보며 피식 웃고는 몸을 돌려 침대 위로 올라가 두 팔을 베개로 삼아 털썩 누웠다.

“당신 남편 부자야. 부자 남편 둔 여자답게 좀 즐겨봐.”

루시아가 대답 대신 힘없이 웃었다. 그녀는 태생이 가난뱅이였다. 메튼 백작부인으로 살 때도 호사는 누리지 못했다. 꿈속에서 굶어 죽을 걱정까지는 하지 않았으나 생계의 고민은 항상 떠안고 살았다. 청빈을 삶의 가치관으로 삼아서가 아니었다. 여건이 안 되었을 뿐이다.

루시아는 다만, 꿈속에서 봤던 공작부인을 잊을 수 없었다. 값비싼 드레스와 장신구로 치장한 공작부인은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만약 그가 떠나가면 자신 역시 꿈속의 공작부인처럼 변할 것 같았다. 한 번 맛 들인 사치를 벗어나지 못하고 허전함을 그걸로 채우려 할 것이다. 헤어날 수 없는 늪으로 발을 내딛고 싶지 않았다.

“보석이 싫어? 아니면 주는 사람이 나라서 싫은가?”

“그런 말씀이 어디 있어요. 감사하고 있어요. 예쁘고 마음에 들어요.”

“당신 말에 진심이 없다는 건 알겠어.”

딴 여자들처럼 간 쓸개 다 내줄 것처럼 호들갑스럽게 좋아하는 반응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묘하게 부담스러워 하는 모습이 그는 언짢았다.

수도 가면 바람피울 거냐는 그녀의 말은 두고두고 충격이었다. 침대에서는 뭐든 다 줄 것처럼 완전히 몸을 열어 그를 받아들이면서 그녀의 마음은 닫혀있고,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

선물마저도 거부하면 대체 무슨 방법이 있단 말인가.

그녀의 마음을 사기 위한 그의 부단한 노력을 그녀는 알아주지 않았다. 그녀를 보기만 해도 아깝고, 생각만 해도 가슴 안쪽이 저릿한데 그의 얼음마녀는 도통 녹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화나셨어요?”

“안 났어.”

말과 달리 그는 뚱하게 대답했다. 루시아는 그를 물끄러미 보면서 생각했다.

‘예전이라면 저런 퉁명스러운 말에 상처받았겠지.’

아마 말도 못하고 혼자 끙끙거렸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가 툴툴거려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여유가 생겼다. 그에게 당당하게 오늘은 당신 방에 가서 자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루시아는 그를 보며 일어났다. 그리고 입고 있던 목욕 가운을 천천히 벗었다. 스르륵 발밑으로 가운이 미끄러져 떨어졌다. 심드렁하게 누워있던 그가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경직된 붉은 눈이 뚫어지게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그를 향해 눈을 곱게 접어 웃었다. 하얀 나신에 호박색으로 빛나는 목걸이만 한 채, 자신을 보며 요부처럼 웃는 아내를 보며 휴고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었다.

루시아는 굳어있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침대로 걸어갔다. 그녀 자신도 놀란 대담함이었다.

자신을 보는 그의 눈은 항상 뜨거웠다. 소문으로 나도는 말처럼 마치 환상적인 미녀라도 보는 시선이었다. 처음엔 민망하기만 했던 그의 시선에 익숙해지니까 ‘나도 조금은 매력적인가.’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를 유혹하면 반드시 넘어오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침대로 올라간 그녀는 무릎걸음으로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의 시선을 단단히 붙잡는 것처럼 흔들리는 붉은 눈동자를 향해 웃었다. 그녀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요사한 미소였다.

휴고는 그녀가 자신의 몸을 타고 위로 올라오는 모습을 꼼짝하지 못하고 보고만 있었다.

루시아는 그의 허벅지 안쪽으로 바싹 붙어 앉았다. 목욕 가운 아래에서 힘을 받아 일어나는 그의 성기를 엉덩이로 꾹 눌렀다. 그의 목울대가 넘어가면서 흠칫했다.

루시아는 목걸이를 잡아 황색의 사파이어에 입을 맞추며 그를 향해 야릇하게 웃었다.

“목걸이, 어울려요?”

“…아주.”

그의 목소리가 잠겨있었다.

“선물이 싫어서가 아니에요. 전 아주 간이 작다고요. 당신이 파산할까 봐 걱정하는 심정을 헤아려 주세요.”

“하늘이 두 쪽 나도 그럴 일 없어.”

루시아는 두 손을 그의 목욕 가운 안에 넣어 탄탄한 가슴을 느릿하게 쓸었다. 그의 흔들리는 눈을 보면서 그녀는 자신이 주도하는 이 상황에서 짜릿한 희열을 느꼈다.

“여자의 사치는 나라 근간을 흔들 수도 있다고 했어요.”

하물며 가문 하나 정도야 어떻겠는가. 그녀가 그런 뜻으로 한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휴고는 생각했다. 당신이 원하면 나라 하나 세워 바칠 수 있는데.

“얼마든지 흔들어봐.”

그 정도 감당 못 할 타란 가문이 아니었다. 휴고는 비록 가문의 음습한 내력에 치를 떨고 있으나 가문의 저력은 인정했다.

그의 오만한 자신감에 루시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겸손은 휴고 타란의 미덕이 아니었다.

그의 입술이 다가오자 루시아는 살짝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가 다시 시도했으나 루시아는 또다시 피했다.

대체 뭐 하자는 거냐고, 부글부글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의 입술에 기습적으로 입을 맞추고 재빨리 떨어졌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씩씩대는 그를 보며 루시아는 까르르 웃었다.

그가 달려들기 직전이었다. 루시아는 두 손으로 그의 뺨을 감싸 어루만지며 다시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휴고는 또 그녀의 공격에 당하고 말았다.

이번에는 지지 않는다는 듯 그는 그녀의 뒷목을 잡아 누르면서 격한 키스로 되돌렸다. 구석구석 깊은 곳을 건드리는 그의 혀의 움직임을 따라가느라 그의 가운 앞섶을 꼭 쥔 그녀의 두 손이 바르르 떨렸다.

그는 혀뿌리가 얼얼할 정도로 강하게 그녀의 혀를 빨아들였다. 사납게 덤벼드는 그의 키스는 길게 이어졌다. 그사이 그의 손이 허리께를 더듬어 올라가며 어깻죽지를 쓸어 올렸다.

한참 만에 그가 입술을 떼었을 때 루시아는 흐릿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입안을 점령했던 그의 혀의 움직임이 잔상처럼 느껴졌다. 도톰하게 부푼 그녀의 붉은 입술을 보며 그는 제 입술을 핥았다.

“이런 건 어디서 배웠지?”

그의 목소리에서 당혹스러움이 묻어나 루시아는 쿡쿡 웃었다.

“당신한테서요.”

“기억에 없어.”

“배운 걸 응용하는 건 바람직한 학생의 자세죠.”

그는 곤란한 듯 묘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내가 왕이 아닌 게 다행이군.”

“네?”

여자 때문에 나라를 말아먹는 막된 왕이 될 것 같으니까. 그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두 손으로 그녀 허리를 감싸 쥐면서 그녀의 뽀얀 가슴을 삼켰다.

“아!”

순식간에 그녀는 주도권을 빼앗겼다. 그의 강렬한 애무에 신음하며 몸을 뒤틀었다. 그는 언제나 뜨겁게 그녀를 원했다.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뒤에서 그가 무작스럽게 퍽퍽 밀고 들어올 때마다 그녀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두 손으로 시트를 꽉 쥐고 간신히 버틴 팔이 자꾸 휘청거렸다.

“아! 아앗!”

그녀의 골반을 움켜잡고 그는 무자비하게 자신의 중심을 밀어 넣었다가 빠져나갔다. 자세 때문에 더 깊이 들어올 때마다 몸 안쪽이 저릿저릿했다. 너무 깊었다. 아픈 것인지 쾌감인 것인지 모르겠다. 비명처럼 교성을 질렀다.

“아! 응!”

그의 허벅지가 엉덩이에 부딪칠 때마다 충격으로 몸이 흔들리고 눈앞이 번쩍거렸다. 그의 추삽질은 도통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견디다 못해 그녀의 팔이 꺾여서 상체가 무너졌다.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무릎도 힘이 빠져서 후들거렸다. 볼에 닿는 시트의 마찰을 느끼며 숨은 턱까지 찼다. 눈에 열이 올라 흐르는 눈물이 시트로 떨어졌다.

“그… 그만. 읏…….”

루시아의 애원에도 그는 오히려 엉덩이를 찰싹 치며 더 깊이 들어왔다. 자극을 받아 그녀의 내부가 더 꽉 그의 것을 조이자 움찔한 그가 다시 강하게 치고 들어왔다.

단단한 살기둥이 깊은 안을 찌르는 감각에 몸이 소스라쳤다. 내벽을 할퀴는 자극이 척추를 타고 올라올 때마다 눈앞이 어두워졌다가 환해지기를 반복했다.

“휴……. 흑……. 힘들… 힘들어요.”

“착하지. 거의 다… 끝났어. 조금만 더.”

달래는 척하는 그의 목소리는 잔뜩 가라앉아 갈라져 나왔다.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지금 그는 머릿속의 뭔가가 끊어진 상태다. 애원이고 뭐고 먹히지 않았다.

아주 가끔이지만 그는 잔혹하게 그녀를 밀어붙일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온몸이 그의 거대한 송곳니에 물려 삼켜지는 것 같았다.

“죽겠군. 얼마나 꽉 무는지… 숨도 못 쉬겠어.”

“흣. 그런… 말 좀…….”

루시아는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싶었다. 그의 희롱이 수치스러우면서도 그 말에 흥분하는 몸의 변화가 더 부끄러웠다.

그가 강하게 박아 넣을 때마다 그녀의 몸은 쓰러질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단단히 그녀의 엉덩이와 허벅지를 잡고 있는 그의 손이 아니라면 진즉 넘어졌을 것이다.

힘들어 죽겠는 와중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질이 경련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심장이 뛰는 것처럼 그녀의 내부가 박동할 때마다 그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의 근육으로 굴곡진 몸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이 그녀의 등으로 툭 툭 떨어졌다. 후배위 체위만으로 이렇게 여러 번 그녀의 절정을 유도한 건 처음이었다.

그녀가 힘들어하는 체위라서 평소 오래 유지하는 자세가 아니었다. 그의 성기를 받아들이며 흔들리는 그녀의 애원과 눈물이 그의 짐승 같은 소유욕과 정복욕을 자극했다. 내 것. 내 여자. 아무리 가져도 부족했다.

“휴. 제발……. 으흑!”

“그만하고 싶으면… 그만 좀 조여. 당신이 놔주지를 않잖아.”

손 하나가 가슴을 움켜잡아 주무르고 깨무는 뒷목에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녀는 이제 끙끙 신음했다. 허리를 움직일 기운도 없었다. 도통 수그러들 줄 모르는 그의 성난 분신이 기세 좋게 그녀의 몸을 반복해서 꿰뚫었다.

이미 몇 차례 그가 안에 쏟아낸 정액이 그가 추삽질을 할 때마다 흘러내려 허벅지를 적셨다. 그녀의 엉덩이가 그의 허벅지에 부딪칠 때마다 철썩거리며 젖은 소리를 냈다.

밤꽃향이 진동한다. 흔들리는 시야가 어지러워서 그녀는 눈을 감아버렸다.

그의 손이 아프지 않을 정도로 루시아의 머리카락을 휘어잡았다. 다른 한 손이 그녀의 배를 감싸듯이 잡아 위로 올려서 그녀의 엉덩이를 더 높이 올라가게 했다. 시트를 쥔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흐윽!”

강하게 치고 들어오면서 그가 파정했다. 내부로 뜨거운 것이 쏟아지는 느낌에 그녀의 온몸이 후들거리며 떨렸다. 방사의 쾌감을 즐기며 그가 목을 울리며 신음했다.

그녀의 자궁에 뿌린 씨를 싹 틔우고 싶다. 그가 쏟은 요체가 그녀의 몸 안 깊은 곳에서 뿌리를 박으면 그녀는 온전히 그의 것이 될지도 모른다.

‘빌어먹을.’

그것만은 불가능했다.

휴고는 내부의 경련이 완전히 멈추고 꽉 조이던 힘이 다소 느슨해지자 천천히 허리를 빼냈다. 지탱하며 잡고 있던 손을 놓자 그녀는 그대로 스르르 쓰러졌다. 할딱이며 어깨가 아래위로 오르내리고 꼼짝도 하지 못하겠는지 미동도 없었다.

그녀의 허벅지를 타고 미처 삼키지 못한 탁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그걸 내려다보고 있는 휴고의 붉은 눈동자가 마치 타오르는 것처럼 붉어졌다.

목이 탔다. 타는 목을 축이려 소금물을 마신 것처럼 그녀를 품으면 풀어질 것 같은 갈증은 안을수록 더 심해졌다. 그는 그것을 다스리는 일이 무척 힘들었다.

그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그러자 욕망으로 탁해진 눈동자가 한층 맑아졌다. 더는 안 돼. 그는 격동하는 갈망을 내리눌렀다.

땀에 젖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넘겨 동그란 이마가 드러나게 했다. 눈을 감고 있는 그녀는 색색 숨을 몰아쉬었다.

잠이 든 건 아니었는지 젖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며 올라갔다. 그를 바라보는 눈에 원망이 담기더니 눈을 감아버렸다.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휘면서 미안한 마음을 담아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오밀조밀한 그녀의 미간 사이에 살짝 잡혀있던 주름이 서서히 펴졌다.

그는 가운을 걸쳐 입고 시트로 그녀의 몸을 감싸 안아 올렸다. 살짝 눈을 뜬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 반응할 기운도 없는지 몸은 축 늘어진 채였다.

그는 침실에서 이어진 욕실을 향해 걸었다. 적당히 따끈한 목욕물이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루시아는 죽은 듯이 자다가 해가 중천이 되어서 일어났다.

‘몸이 결려.’

남편이 정력가라는 사실이 나쁜 일은 아니지만 때로는 정도를 넘어서 문제였다. 끙끙대며 일어난 루시아를 맞이한 것은 아침에 배달되었다는 보석 상자로 만들어진 작은 산더미였다.

응접실 테이블 위에 쌓인 보석 더미 곁에서 마치 제가 선물을 받은 것처럼 뿌듯한 표정을 짓고 하녀가 어서 구경하고 싶다고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이 남자가 정말.’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선물이라 해도 정도가 있다. 대체 이게 모두 얼마일까. 머리가 띵 했다. 저녁에 그가 들어오면 무슨 과한 소비냐고 한마디 해둘 생각을 하다가 어젯밤 일이 떠올랐다.

‘…언짢아 하겠지.’

분명히 그럴 것이다. 어제 목걸이 하나 시큰둥하게 받았다고 퉁퉁거렸는데 이것들을 반품하라 했다가는 화를 낼지도 모른다. 굳이 주는 선물에 한마디 덧붙여 기분 상하게 할 필요가 뭐가 있을까.

“꽃 한 송이를 줘도 세상에 그보다 더 귀한 선물이 없다는 것처럼 품에 쏙 안기며 고맙다고 하면 열이면 열 다 넘어간다니까요. 좋아하는 척을 자꾸 해야 선물도 자꾸 들어오지.”

북부 노부인들에게 들었던 조언이 떠올랐다.

‘그래. 주는 건데 받자. 둬서 썩는 것도 아니고. 팔면 다시 돈이니까.’

받은 선물의 내용물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어서 하나씩 정성스럽게 포장된 상자를 일일이 풀어 확인하고 한 번씩 몸에 착용해 보는 데만 오후가 다 갔다.

저녁에는 일찍 귀가한 그와 식사를 같이 할 수 있었다. 식사 중에 그가 말했다.

“내일은 디자이너가 방문하기로 했소. 당신 드레스가 필요한 것 같아서.”

“…드레스요?”

“여긴 수도라오. 로암에서처럼 구식 드레스 고쳐 입고 다니면 비웃음을 사겠지. 안주인의 위신은 가문의 위신 문제요.”

그의 말이 일리가 있어서 루시아는 두말하지 못했다. 수도 귀족들은 유행에 민감했다. 특히 신분이 높은 귀부인의 차림은 많은 여자의 입에 오르내렸다. 유행의 선도자가 되지는 못해도 비웃음을 사도록 입고 다녀서는 곤란했다.

현재 그녀가 가진 드레스는 향후 수도에서 사교 활동을 하기에는 아무래도 적절한 수준은 아니었다.

식사 후 그와 뜰을 거닐었다. 로암에 있을 때부터 그가 시간이 나면 종종 그와 저녁 산책을 함께했다. 그녀의 남편은 바쁘고 부지런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그녀가 온전히 가질 수 있는 그의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루시아는 그와 한가롭게 걷는 이 시간이 값비싼 선물을 받는 것보다 기뻤다.

“하나하나가 전부 아름답고 멋진 물건들이었어요. 전부 당신이 직접 고르신 거예요?”

“그랬지.”

그냥 한 번 쓱 보고 담으라고 했지만 직접 보고 고른 건 맞았다.

“마음에 들어?”

“네, 감사해요.”

루시아는 선물을 주는 그의 마음이 어떤 보석보다도 고마웠다.

“여자 장신구를 잘 아시나 봐요. 많이 선물해 봐서 그런가.”

루시아는 말해 놓고 아차 싶었다. 그를 비난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자신의 말이 선을 넘었다고 생각했다. 그가 불쾌해할 것 같아서 말실수를 사과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비비안.”

그는 한숨을 푹 내쉬며 그녀의 손목을 붙들고 걸음을 멈추었다.

“결혼하기 전의 일은 잊어주면 안 될까?”

화를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의 약한 모습이었다. 루시아는 물끄러미 그를 보았다.

“제가 결혼 전의 일을 자꾸 언급했나요? 앞으로 조심할게요.”

“그런 뜻이 아니야. 좀 오래전 일이기는 한데, 당신이 우리 계약을 수정하자면서 했던 말 기억해?”

“애인을 만들어도 저 모르게 해주세요. 만약 당신이 제가 싫어지거나, 싫증이 나거나, 다른 여자가 생겨서 절 떠나고 싶으면. 가장 먼저 제게 말씀해 주세요.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듣지 않게 해주세요.”

“네. 기억해요.”

“당신 모르게 애인 만들 일 없고, 당신이 싫어지거나 싫증나서 떠날 일은 없으니까 당신이 날 믿어줬으면 좋겠어.”

루시아의 심장이 쿵, 크게 뛰었다. 그가 대체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머릿속에서 큰 회오리가 휘몰아쳤다.

실수를 한 사람은 그녀였다. 결혼 전 일을 언급해 굳이 과거의 그의 행동을 비난할 이유도, 자격도 그녀에게는 없었다.

그는 어쩌면 규칙에 얽매이는 성격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결혼이라는 법적 계약이 성립한 이후에는 철저히 지키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루시아가 지켜본 그의 모습과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라면 기존의 규칙을 바꾸는, 제멋대로인 사람이었다.

“…왜요?”

생각의 갈피를 잡을 수 없어서 루시아는 그를 보며 멍하게 중얼거렸다. 아무 말이라도 꺼내 결론을 내고 싶었다.

별 의미 없이 한 말이었다. 그런데 그의 눈동자가 낙담하듯 흔들렸다. 그는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뭔가 말을 할 것처럼 입을 열었다가 닫기를 반복했다.

‘왜……?’

루시아는 손끝이 저려서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이 남자. 상처를 입었다. 크로틴 경이 그토록 자신하던, 하늘 아래 주군 손끝 하나 상하게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뻐기는 대단한 남자가 그녀의 짧은 말 한마디에 아파하고 있었다.

오래전에 루시아는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당신만은 절대 사랑하지 않겠다고 쏘아붙였을 때, 아주 잠깐 그의 고통을 엿봤다.

그때는 깊이 생각할 상황이 아니라 넘어갔다. 시간이 꽤 지난 일이어서 당시의 느낌이 거의 잊어버렸다. 그러나 알싸한 기분은 남아있었다.

‘혹시 내가…….’

루시아는 가슴이 벅차서 심장이 죄는 것처럼 아팠다. 아프지만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통증이었다.

‘내가 당신한테… 의미가 있나요?’

휴고는 겨우 말을 골라서 입을 열었다.

“당신이 날 믿지 못하는 거 알고 있어. 왜 그러는지도 이해해.”

그녀에게 실수한 일이 많았다. 소피아 로렌스와의 만남을 보였을 때부터 최악이었다. 결혼 전에는 서류부터 챙겼고, 사생활에 간섭하지 말라고 했다. 귀찮아서 결혼식을 생략하고, 초야에는 제 욕심만 채우느라 그녀를 배려하지 않았다. 결혼 후에는 또 어떤가. 철저하게 그녀의 몸만 원했던 건 그 자신이었다.

“노력할게. 그러니까 당신이 나 좀 봐줘.”

‘왜? 당신이 왜, 무엇을 위해 노력한다는 거죠?’

루시아는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그를 말없이 보기만 했다. 그녀의 침묵이 길어지자 휴고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틀면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안절부절못하는 그를 보고 있던 루시아의 눈동자에 점점 또렷하게 빛이 돌아왔다.

‘변덕일까?’

루시아는 그가 다른 연인들에게 어떤 식으로 했는지 알지 못했다. 가장 다정했던 한때 그가 어떤 식으로 사랑을 속삭였는지 모른다.

루시아가 봤던 유일한 장면은 식어버린 연인을 무정하게 내치는 모습뿐이었다. 그 광경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 근원적인 공포로 자리 잡았다. 언젠가 소피아 로렌스의 처지가 자신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결혼 전 일은 신경 쓰지 않아요.”

“정말?”

“제가 그럴 자격이 없잖아요.”

“…….”

미치겠네. 그는 입안으로 중얼거렸다. 어떤 성벽이 이보다 더 견고할까. 그녀는 스스로 그어놓은 선에서 저만치 떨어져 아예 근처에 얼씬하지도 않았다.

“당신을 믿고 있어요.”

“…믿는다고……?”

“애인이 생기면 몰래 만나지 않고 말씀을 해줄 거라고 믿어요. 약속은 지키는 분이니까요.”

그녀는 마녀가 틀림없었다. 그를 짧은 순간에 낭떠러지 밑으로 처박았다가 끌어올리기를 반복했다.

휴고는 암담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꼬인 매듭 끈을 풀어야 할지 모르겠다. 꼬인 실을 푸는 것이 아니라 잘라버리는, 지금껏 해왔던 그의 해결 방식은 이 상황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제가 왜 당신을 믿기를 바라세요?”

휴고는 말문이 막혔다. 이유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는 가까스로 이유를 만들었다.

“…믿지도 못하는 사람하고 한집에 살 수는 없잖아.”

그녀가 또 말없이 바라보자 휴고는 뭘 실수했나 싶어 긴장했다.

‘모르겠어.’

알 듯 말 듯. 해답에 근접한 것 같으면서도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가 날?’

아주 살짝 의혹이 들었지만 설마 그럴 리 없었다.

언젠가 그의 사랑을 얻고 싶다고 기대는 하고 있었다. 그건 막연하고 거대하고 언제 달성할지 모르는 커다란 소망이었다. 이렇게 간단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 선택지를 배제하고 그가 대체 왜 이럴까 이유를 찾아보았다.

‘그는 나를 꽤 좋아하기는 해.’

그의 행동들은 남편의 의무만이 아니었다. 그가 자신에게 호감을 느끼고 잘해주려 한다는 것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좋아하니까 신뢰가 필요한 건가.’

그는 기사고, 가문과 넓은 영토의 주인이었다. 신뢰하지 않는 사람을 곁에 둘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신뢰는 서로 주고받을 때 완전해지는 것. 그렇게 생각하면 완벽한 설명은 못 되지만 그런대로 이해할 수는 있었다.

“당신 말씀은… 남편으로서 성실할 테니까 믿으라는 말씀이시죠?”

그녀가 한 줄로 정리하니까 맞는 것 같은데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딱히 지적할 곳을 찾을 수 없어서 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게요.”

그녀의 대답은 지금껏 애태운 것이 무색하게 산뜻했다. 휴고는 미심쩍게 그녀를 보았다. 또 무슨 말로 뒤통수를 칠지 겁이 났다.

“당신 하는 거 봐서요.”

역시 그녀는 불안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농담이면 재미없어.”

“농담 아니거든요.”

루시아는 사실 정말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지만, 그가 너무 심각하게 받아치자 무안했다. 새침하게 말을 던지고 몸을 돌려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녀를 망연히 보다가 그도 걸음을 뗐다. 뭘 어떻게 해야 믿어준다는 건지 모르겠다. 이러다 애먼 소문 들은 그녀가 팩 돌아서는 건 아닐까.

‘파비안을 불러야겠어.’

오늘도 파비안은 야근 확정이었다.

외전 ― 또 다른 미래 : 필립

날은 금세 어두워졌다. 필립은 하늘을 보며 시간을 가늠하다가 저만치 보이는 산까지 거리를 재보았다. 오늘 저 산을 넘기는 힘들겠다.

어둠 속에서 산을 타는 일은 어지간히 급하지 않으면 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필립은 오랜 경험을 지닌 노련한 여행자이지만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다.

오늘 밤도 노숙이었다. 워낙 이골이 나서 하룻밤을 지새울 잠자리를 만드는 일은 뚝딱이었다. 모닥불을 피워놓고 마른 식량과 물로 저녁을 때웠다.

필립은 오늘 떠나온 마을을 떠올렸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순박한 마을 사람들은 경계하다가 금방 마음을 열었다. 떠날 때 붙드는 손길을 뿌리치는 일은 언제나 아쉬웠다.

아주 드물지만 정착해서 살아볼까, 하는 곳도 있었다. 그러나 얼마 견디지 못하고 다시 방랑길에 올랐다.

목적지도, 언제 끝날지도 알 수 없는 영원한 방랑. 자유가 아니었다. 정처 없이 헤매는 중이었다. 가문의 업보가 쌓여서 자신의 천형이 되었다고, 필립은 생각했다.

“후후……. 나도 참 미련이 질기군.”

아까 마을에서 봤던 환자의 얼굴이 불쑥 떠올랐다. 나이가 든 태가 났으나 말갛고 고운 표정을 지닌 여자였다. 설마 삼엽쑥을 먹은 환자를, 그것도 초경부터 먹어 불임이 된 환자를 이런 곳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잠깐 삼엽쑥을 먹어 월경이 멈춘 경우는 봤어도 아까의 환자 같은 경우는 처음이었다. 일부러 만들지 않았는데 스스로 그리되는 경우도 있었다. 세상은 참 넓고, 예상치 못한 일은 늘 일어났다.

여자에게 치료법을 주었다. 가문의 비전으로 물려받은 노트를 아예 찢어 주었다. 어차피 치료법은 필립의 머릿속에 있었으나 굳이 찢어서 건네야 했던 이유가 있었다. 끈질기게 매달려 있는 작은 미련마저 잘라내고자 하는 의미를 담은 행위였다.

어차피 가족이 없는 필립이 죽으면 이제 영원히 묻힐 비밀들이었다. 그래도 버리지 못하다가 드디어 오늘 버렸다.

“처녀냐고 묻다니. 어리석은 놈아.”

필립은 자신을 비웃었다. 거기서 왜 그런 질문이 튀어나왔을까. 그 여자가 처녀건 아니건 이제는 다 소용이 없는 일인데.

넋을 놓고 모닥불을 바라보는 필립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노안에 가득한 눈물이 주룩 흘렀다. 느닷없이 떠오르면 울컥 치미는 서글픔을 견딜 수 없었다.

장성한 훌륭한 청년이 되었어도 그분은 자신에게는 영원히 어린 도련님이었다. 걸음마를 하는 어린 손을 붙들고 공작을 찾아갔을 때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했다. 다 자란 모습을 멀리서 훔쳐보며 어찌나 흡족했는지.

마지막 희망이었던 그분이 차가운 몸으로 땅에 묻힌 지 수년이 흘렀다. 공작은 그 후 북부는 내팽개치고 전쟁터만 떠돌았다. 모든 것이 끝났다. 마지막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데미안 도련님…….”

오열하는 필립의 어깨가 들썩였다. 시신으로 돌아온 도련님의 몸을 붙들고 하염없이 울던 그 날처럼 필립은 바닥에 몸을 구부리고 울었다.

<5권에서 계속>

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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