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시아-41화 (42/77)

41장 수도 사교계 (4)

눈 밑이 꺼먼 파비안이 음울한 얼굴로 공작저로 들어왔다. 마치 유령처럼 슥 나타나서 제롬은 움찔했다. 파비안은 오랜만에 보는 형제에게 인사 없이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전하께서는.”

“안… 계신다.”

“오늘은 오후에 입궁하신다고 들었는데.”

“입궁하시지는 않았어. 마님께서 오늘 티파티 가시는데 모셔다 드리러 가셨지. 기다리면 오실 거야.”

“뭐? 티파티?”

파비안이 눈을 번뜩였다. 눈에 형형한 빛이 돌았다.

“부하는 이렇게 뺑뺑이 돌리고 당신께서는 부인을 모시고 티파티라고? 나도 자는 마누라 등짝 보는 거 지겹다고! 토끼 같은 내 새끼들 얼굴도 제대로 보고 싶다고!”

원래 하던 업무는 전혀 줄지 않았으나 소문을 취합하는 일과 데이빗인지 데이브인지 얼굴만 빤질거리는 놈의 조사까지 하느라 허구한 날 밤샘이었다.

제롬과 파비안은 하는 일이 서로 다르고 숙식 장소가 달라서 서로의 생활을 잘 몰랐다. 그래서 제롬은 파비안의 장기간 야근을 알지 못했다.

“일이 많은가 보구나. 수당은 더 받잖아.”

제롬이 아는 한, 파비안이 그런 걸 못 찾아먹을 녀석이 아니었다.

파비안은 더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문제였다. 그의 근무시간에 비례해 소득은 급증했고, 아내는 그걸 더 좋아했다. 아이들의 교육비를 들먹이며 늘어난 소득에 콧노래를 불렀다.

“대체 언제부터 소문에 그리 신경 쓰셨다고 이리 달달 볶으시느냐고!”

“왜. 요즘 안 좋은 소문이 나돌아?”

제롬 표정이 심각해졌다. 마님의 소문이 도는 건가.

“전하의 소문은 항상 안 좋았어! 요즘 두 분 사이에 무슨 문제 있어? 소문 때문에 분란이 있었냐고.”

“그런 거 없는데.”

제롬은 우선 마님의 소문은 아니라는 사실에 안심했다. 그리고 주인 부부를 떠올렸다. 두 분은 아주 사이가 좋았다. 로암에서 머물 때보다 더 좋은 것 같았다. 아예 저녁 시간 이후에는 누구도 2층 침실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주인님께서 결혼하시기 전에 여기서 지낼 때를 떠올리면 천지개벽이지.’

냉기가 감돌았던 저택이 단지 마님 한 분이 더 계시는 것만으로 진짜 사람 사는 집같이 변했다. 고용인들은 결혼한 지 1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이렇게 애정 넘치는 부부는 처음 봤다고 숙덕거렸다. 제롬은 그 소리를 듣고 자신이 칭찬받은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그럼 대체 왜 그러시는 거야. 난 요즘 전하에 대한 존경심을 잃고 있다고.”

형제 앞이니까 과한 농담을 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제롬은 타란 공작 부부의 자발적 노예이자 신도였다. 형제고 뭐고 없었다.

“네 충성심을 의심해 보시라고 충언을 올려야겠군.”

“…피도 눈물도 없는 자식. 근데 티파티. 귀부인만 참석하는 파티 아니었어?”

“모셔다 드리러 가셨다니까.”

“귀부인을 티파티 장소까지 에스코트하는 건 언제부터 생긴 관습이냐?”

그런 관습은 없다. 제롬은 대답 대신 헛기침을 했다. 차마 말할 수 없었던 일을 파비안이 지적하자 괜히 겸연쩍었다. 파비안은 한탄했다.

“허허. 전하께서 완전히 변하셨어.”

마님의 지인이라는 여류 작가 약혼자의 뒤를 캐라는 명을 받았을 때부터 조짐이 있었다. 요즘 일거리가 늘어난 것도 전부 마님과 관련한 일이 분명했다.

공작은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공작이 처리하는 대부분의 일을 대충은 알고 있기 때문에 공작의 이기적인 면모를 자주 느꼈다.

공작은 가문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았다. ‘가문의 돈과 힘이 늘어나면 내게 이익’이라고 생각했다. 둘은 비슷한 것 같아도 미묘하게 달랐다. 가문에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하면 공작은 절대 자신을 희생하지 않고 미련 없이 버릴 분이었다.

이기주의 결정체 같은 분이 다른 사람을 중심으로 삶이 변화하고 있었다.

파비안은 주인의 변화가 그저 조심스러웠다. 계기가 하필 여자이기 때문이다. 여자라는 변수는 너무 불확실했다. 여자에게 푹 빠진 사내의 결말이 좋은 경우를 별로 못 봤다. 권력이나 재력 등 가진 것이 많을 경우는 더더욱.

파비안은 제 고민을 제롬과 나눌 수 없었다. 말해 봤자 펄쩍 뛸 것이 뻔했다. 파비안은 짐짓 가벼운 어투로 투덜거렸다.

“이러다 아주 마님 뒤만 졸졸 쫓아다니시겠구먼.”

제롬은 ‘정말 그럴 가능성이 있겠는데.’라고 생각했지만, 곧 주인에 대한 불경을 깨닫고 얼른 털어버렸다. 그리고 충성스러운 집사의 입장에서 파비안의 경솔한 발언을 나무랐다.

* * *

공작 부부를 태운 마차는 조르단 백작저에 도착했다. 곧바로 열어주는 철문을 지나 마차는 저택 바로 앞에 멈추었다. 파티 시간에 맞추어 참석자의 마차들이 계속 들어오는 중이었고, 이미 도착한 마차도 여러 대였다.

마차에서 내리던 귀부인들은 타란 공작가 마차의 등장에 모두 발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집중했다. 그들의 눈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마차 문이 열리고 나오는 사람은 기대했던 공작부인이 아니었다. 장신의 남자가 먼저 내렸다. 마차 안을 향해 손을 내미는 흑발의 남자를 보며 여자들이 수군거렸다.

“타란 공작이잖아요.”

“정말이군요. 타란 공작이 여기를 왜.”

마차 안에서 하얀 레이스 장갑을 낀 손이 나와 타란 공작의 손 위에 얹히고,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레이스로 수를 놓은 숄을 어깨에 걸친, 상아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마차에서 내려왔다. 손을 잡은 남자와 확연히 드러나는 체격 차이가 여인의 가녀린 체구를 돋보이게 했다.

여인이 곱게 웃으며 공작을 향해 뭐라고 하자, 믿을 수 없게도 타란 공작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잡고 있는 여인의 손을 들어 손등에 입을 맞추는 태도에는 애정이 담뿍 담겨있었다.

타란 공작은 여인과 또 뭐라 이야기를 나누고 여인의 볼에 인사의 키스를 했다. 그러더니 다시 또 이야기를 나누었다. 헤어짐이 아쉬워 떨어지기 싫어하는 연인의 모습이었다. 오히려 여자보다도 남자 쪽에서 미련이 뚝뚝 떨어졌다.

겨우 타란 공작이 마차 안으로 들어가고 하인이 문을 닫았다. 여인이 돌아서서 저택 안으로 들어섰지만 마차는 여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있다가 출발해서 백작저를 빠져나갔다.

귀부인들은 쪼르르 줄 서서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광경을 입을 벌리고 보고 있었다.

루시아는 귀부인들이 멍하게 서있는 모습을 흘끔 보며 신경 쓰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만약 그들이 루시아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면 응대했겠지만, 굳은 것처럼 서있는 모습은 누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제 눈이 잘못되었나요? 설마… 공작부인을 여기까지 배웅한 건가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타란 공작이? 뒷말을 생략했지만, 다 알아들었다.

“…저도 그렇게 보입니다만.”

누군가의 물음에 누군가가 대답했다. 티파티 장소까지 남편이 에스코트하는 경우는 처음 봤다. 안 된다는 법은 없었지만, 누구도 하지 않는 짓이었다. 더구나 그 짓을 타란 공작이 했다. 여기저기서 의미를 알 수 없는 짧은 탄식이 흘렀다.

귀부인 중 하나가 냉큼 걸음을 빨리해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다른 누군가도 그 뒤를 따랐고, 이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소문 이상으로 충격적인 타란 공작부인의 등장이었다.

귀부인들이 우르르 안으로 들어가고, 여인들 틈에서 뒤쪽에 서있던 여자가 마지막으로 남았다. 마차가 떠난 방향을 바라보는 소피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눈으로 본 광경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루시아는 가장 먼저 주최자, 조르단 백작부인과 인사를 나누었다.

“초대 감사합니다, 백작부인.”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작부인을 뵈어 정말 영광입니다. 소문이 무색하도록 아름다운 분이시군요.”

조르단 백작부인이 지극히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공작부인에게서 어딘지 모르게 범접하기 어려운 기운이 느껴졌다. 막연히 생각했던 스무 살이 안 된 어린 아가씨가 아니었다.

루시아는 미소로 응대했다. 오늘 역시 아침 일찍부터 앙뜨가 수고해 주었다. 앙뜨가 말하는 오늘의 포인트는 ‘우아’와 ‘위엄’이었다. 공작부인으로서 사교 활동을 하는 첫 자리이며 가장 높은 신분이니만큼 말 많은 여자들을 눌러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표정이 중요합니다. ‘너희는 다 내 앞에 무릎을 꿇어라!’ 이런 표정을 지어주시는 겁니다.”

앙뜨의 요구에 따라 표정 연습을 하면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의상과 화장의 색깔은 상아색과 금색이었다. 앙뜨가 말한 대로 거울 속의 루시아는 고고하고 도도해 보였다. 화려하지만 무거운 금색의 이미지는 무게 있는 기품을 더해주었다.

티파티 장소는 저택을 들어가서 뒤편으로 나가면 이어지는 뜰이었다. 야외에 기둥을 세우고 널찍하게 차양을 쳐서 햇빛을 막아 자리를 마련했다. 잘 가꾼 정원이 한눈에 들어오는 상당히 넓은 곳이었다.

사람 수가 많아 한 자리에 모두 모일 수 없는 오늘 같은 경우는 테이블을 나눠 앉았다. 대개 5~6인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을 여럿 두고, 주최자는 일정 시간마다 테이블을 옮겨 다니며 참석자들과 대화했다.

조르단 백작부인은 독특하게도 10인이 앉을 수 있는 대형 테이블을 하나 가운데에 배치하고, 나머지 5인용 테이블을 주변에 둘렀다. 그리고 공작부인의 자리는 10인용 테이블에 마련했다. 공작부인과 조르단 백작부인 자리를 제외한 여덟 개 자리의 주인은 다 나름대로 오늘 이 자리에 앉기 위해 물밑 교섭을 했다.

하녀들이 분주하게 테이블 사이를 오갔다. 테이블에 함께 앉은 여자들끼리 간단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수십 명이 모인 파티장은 곧 말소리로 소란스러워졌다.

“소피아 앨빈입니다. 앨빈 백작이 바깥분 되십니다.”

루시아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소피아가 그의 옛 여자라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었다. 소피아를 발견했을 때 조금 놀랐어도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루시아는 다른 이유로 놀랐다.

‘앨빈? 앨빈 백작과 결혼했어?’

꿈속에서 소피아는 후작부인이었다. 그리고 앨빈 백작가는 루시아가 하녀로 일했던 귀족가다. 그곳에서 일할 때 시중을 든 주인마님은 소피아가 아니었다.

‘달라…졌어.’

미래가 바뀌었다.

‘그래. 어쩌면 당연해. 내 미래를 바꿨어. 지금 그는 미혼이어야 해. 그런데 내가 그와 결혼했지. 난 원래 지금 별궁에 있어야 했고.’

그와 결혼한 이상, 루시아의 미래는 예측불가의 방향으로 들어섰다. 그의 미래 또한 마찬가지다. 조금이라도 두 사람과 관련 있는 사람의 미래까지 영향을 주는 일은 충분히 가능했다.

예상 못 한 곳에서 이제는 앨빈 백작부인이 된 소피아와 마주쳤으나 루시아의 마음에 동요는 없었다. 남편이 결혼 전에 정리한 옛 여자였다. 더구나 그렇게 냉정히 잘라내는 광경을 목격하지 않았던가. 마음 끓일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 상황은 자연스럽지 않았다.

조르단 백작부인이 보낸 참석자 명단에는 소피아의 이름은커녕 앨빈 백작부인도 올라 있지 않았다. 참석자 명단은 원래 수시로 바뀐다. 그러니 그걸 따질 수는 없다고 쳐도 조르단 백작부인 정도의 사교계 인사가 소피아와 타란 공작의 과거에 대한 소문을 모르지 않을 터. 같은 테이블에 자리를 마련한 건 의도적이었다.

여자들에게 자리 배치는 민감한 문제였다. 보기 싫은 여자가 있으면 아예 파티 불참도 한다. 앙숙끼리 같은 테이블에 앉으면 대형 참사였다. 그래서 수도 사교계처럼 인간 군상이 복잡한 세계에서 파티는 아무나 열지 못했다. 사람들 간 관계를 모두 파악하고 있어야 했다.

루시아는 소피아가 자신을 소개할 때 조르단 백작부인에게 눈을 돌렸다. 눈이 마주친 백작부인이 움찔하며 시선을 돌렸다. 루시아는 살짝 찬웃음을 머금었다.

어떤 상황으로 유도해서 대처 반응을 보고 그 사람을 파악하는 일은 전형적인 사교계 방식이었다. 루시아가 사교계 관행을 몰랐거나 소피아에 대해 몰랐다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이건 사교 무대에 처음 등장한 공작부인에 대한 신고식이었다.

루시아가 대놓고 불쾌감을 표현하거나, 과민한 반응을 보이거나, 아예 소문에 무지해서 소피아와 정담을 나누면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귀부인들에게 훌륭한 구경거리를 제공하게 된다. 나중에 오늘의 상황을 알고 뒤늦게 불쾌해도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 그건 규칙이었다.

루시아는 메튼 백작부인으로서 사교계에 처음 나갔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당시 루시아는 짓궂은 질문을 연달아 받으며 대답을 못 하는 창피를 당했다.

‘차라리 질문을 받는 신고식이 더 귀엽겠군.’

자리 배치는 본인이 시험을 당했는지도 모를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뒤에서 웃는데 본인만 모른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는 아예 사건 자체가 희미해져서 영원히 본인만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

처음 사교계에 나서는 초심자는 자리 배치 같은 미묘한 문제를 알기 어려웠다. 아마 조르단 백작부인은 루시아가 알아차리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루시아가 의미심장한 시선을 보냈으니 속으로 진땀을 흘리고 있을 게다.

루시아는 메튼 백작부인일 때 이런 일을 잘 몰랐다. 직접 파티를 연 경험이 없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하녀로 일하던 중에 여러 번 파티를 개최하면서 자리 배치에 골치 아파하는 마님을 보면서 안 사실이었다.

루시아는 조르단 백작부인에 대한 세간의 평을 믿어서 오늘 이 자리를 택했다. 소규모 티파티였으나 갑자기 규모를 키우게 되었다며 양해를 구하는 편지를 받았을 때도 괜찮다고 답장을 주었다. 루시아는 나름대로 조르단 백작부인에게 호의를 보였다. 그러나 백작부인은 루시아가 내민 손을 내쳤다.

‘타란 공작과 앨빈 백작을 저울질해서 앨빈 백작을 택한 건가.’

조르단 백작부인은 소란을 싫어한다고 들었다. 일부러 이 자리를 유도하기보다는 앨빈 백작부인의 요청을 받아들인 것일 게다. 문제가 생겨도 책임은 앨빈 백작부인에게 떠넘기면 된다. 참석자의 요청을 받아들였을 뿐이니까. 소문은 몰랐다고 잡아떼면 되고. 모면할 길은 많았다.

타란 공작은 정치권력과 밀접하지만 아직 완전히 권력의 궤도에 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앨빈 백작은 누구나 인정하는 경제 거물이었다. 돈은 권력보다 안정적이다.

본인의 선택 문제였다. 유감은 없었다. 그러나 장차 조르단 백작부인과 친구가 될 일은 없을 것이다.

루시아는 원래 일정에 없었던 파티에 참석해서 굳이 같은 테이블의 자리를 요청한 소피아의 의도가 궁금했다.

‘옛 연인과 결혼한 여자가 누군지 궁금했나?’

그렇다 해도, 이건 현명하지 못했다. 루시아가 이번 일로 크게 앙심을 품으면 앨빈 백작가에 이롭지 않았다. 여자들 사교계 일은 여자들 문제라지만, 현실이 반드시 원칙대로만 돌아가지 않았다. 공사를 혼동하는 일은 가장 흔하게 벌어지는 오류였다.

“앨빈 백작부인은 여전히 곱군요. 백작부인의 미모를 찬탄하는 소문은 익히 들었답니다. 다른 소문도 들었지만, 그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아시겠지요.”

루시아는 외모를 칭찬하는 흔한 말을 섞어 ‘나는 이미 소문을 알고 있으나 개의치 않는다.’는 속뜻을 전했다. 이 자리의 귀부인들치고 돌려 말하는 뜻을 못 알아듣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 순간적으로 묘한 표정을 지었다가 여기저기서 가벼운 웃음이 터졌다.

“과찬이십니다.”

대답하는 소피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야생의 세계와 다름없이 살벌한 사교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대세를 파악하는 눈치가 필수. 귀부인들의 마음은 급속도로 공작부인에게 기울었다.

처음 사교 활동을 시작하는 공작부인은 세상 물정을 모르는 공주님도, 공작부인이라는 허울만 좋은 속 빈 강정도 아니었다. 큰 목소리를 내지 않고, 표정의 변화 없이 남편의 옛 여자를 가뿐히 웃어넘겼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열아홉 살 아가씨의 여유가 아니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대부분 여자의 마음속에는 공통적인 호기심이 있었다.

‘과연 얼마나 미녀인지 보자.’

그러나 이제 그 부분을 신경 쓰는 여자는 거의 없었다. 공작부인이 소문만큼의 미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못나다고 할 수 없었다. 어설프게 미인이면 ‘풋, 역시 소문이란.’ 하고 넘어가겠는데 공작부인의 미모는 사람마다 의견이 갈렸다. 누구는 고개를 갸우뚱하지만, 누구는 과연 소문대로라고 생각했다. 어느 쪽 입장이건 호감에 가까웠다.

요즘 미인의 조건인 화려한 얼굴과 글래머 몸매를 모든 여자가 가질 수는 없었다. 평범한 여자들은 미녀를 부러워하면서도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공작부인의 외모와 분위기는 ‘나도 저런 식으로 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게 했고, 현재 유행과 다른 스타일의 드레스는 우아해 보였다.

루시아와 같은 테이블에 앉은 여자들은 다 사교계에서 한 가닥을 하는 인물들이었다. 제법 영향력은 있으나 압도적이지 않고 고만고만한 인사들. 얼마나 줄을 잘 타느냐는 그들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그들은 아주 능숙하고 자연스럽게 공작부인의 추종자로 변모했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귀부인들은 부지런히 떠들며 공작부인에게 이야깃거리를 제공하고 계속 공작부인을 화제의 중심으로 삼았다. 루시아는 그들의 대화를 듣다가 질문에 적당히 답해 주면 되었다. 그 정도만으로도 테이블의 중심은 루시아였다. 여왕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 루시아는 분위기에 너무 취하지 않도록 한 걸음 떨어져서 자신의 위치를 즐겼다.

사교계의 분위기에 잘못 휩쓸리면 스스로 망신을 자초할 수 있다. 루시아는 그런 식으로 체면을 구기는 경우를 여러 번 보았다. 바깥에서 보면 명백한데 좁은 안쪽에 있으면 보이지 않는다. 루시아의 사교계 명성이 높으면 몇 번의 실수도 주변 사람이 알아서 덮어주지만, 아직은 이제 막 발을 들인 상태였다. 피곤할 정도로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편이 좋았다.

“제가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데. 공작 전하께서 공작부인을 위해 보석상에 진열된 보석을 모두 구매하셨다고 하더군요.”

“아, 저도 들었어요. 세피아 보석상이었죠.”

“지금 공작부인께서 하고 계신 목걸이도 세피아 보석상 것이지요?”

루시아는 살짝 고개만 끄덕이며 웃었다. 여자들은 그걸 ‘공작이 보석상을 쓸었다.’라는 긍정의 대답으로 해석했다. 루시아의 목에 걸린 목걸이는 말이 필요 없는 증거였다. 소문에 반신반의했던 여자들은 ‘정말이었구나.’ 하고 숙덕거렸다.

“아까 공작 전하께서 공작부인을 에스코트하시어 여기까지 오셨더라고요.”

“저도 봤어요.”

“세상에. 정말요?”

아까 그 광경을 봤던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여자는 놀라움을 표하며 진귀한 장면을 보지 못한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요? 귀부인들의 호기심 가득한 시선이 몰리자 루시아는 난처했다.

이렇게 관심이 집중될 줄은 몰랐다. 그가 바래다준다고 했을 때 ‘뭘 그렇게까지?’라고 생각했으나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데려다준다고 하고, 제롬도 아무 말 없기에 자신이 미처 알지 못한 새로운 유행이라도 생긴 줄 알았다. 수도의 유행은 금방 나타났다가 금방 사라지는 일이 흔하니까.

귀부인들이 놀라는 지점은 남자가 에스코트했다는 사실보다 그 남자가 타란 공작이라는 점이었다.

“내가 처음 티파티에 간다 하니 걱정이 많으시더군요. 평소 세심한 부분에 신경을 많이 쓰십니다.”

루시아의 평범한 답변에 귀부인들이 호들갑스러운 반응으로 호응했다.

“다정하기도 하시지.”

“로맨틱하군요.”

여기저기에서 중구난방으로 떠들었다. 아까의 광경을 직접 본 여자들은 단순한 에스코트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들도 왕비 베스처럼 ‘세기의 미녀’라는 대목이 중요한 게 아니라 ‘홀딱 반한 공작’이 소문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테이블에서 소피아는 홀로 고립되어 있었다. 입을 다물고 앉아있는 소피아에게 눈길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소피아는 공작부인의 눈에 들려고 한마디라도 더 하려는 여자들을 둘러보았다. 얼마 전까지 소피아에게 알랑대던 여자들이었다. 백작부인, 백작부인 하며 그렇게 떠받들더니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었다. 사교계 세태를 잘 알면서도 입맛이 썼다.

소피아를 괴롭히는 건 귀부인들의 배신이 아니었다. 아까 봤던 광경이 수십 번이 넘도록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타란 공작이 따뜻하고 애정 가득한 눈으로 공작부인을 바라보며 손을 잡고 볼에 키스하는 스킨십은 자연스러웠다.

지독한 패배감과 비참함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나를… 그런 눈으로 봐주신 적 없어.’

타란 공작은 필요한 일이 아니면 파티에 잘 참석하지 않았다. 그의 파트너로서 파티 참석은 고작 두어 번뿐이었다. 그를 만나는 장소는 항상 침실이었고 아침에 눈을 뜨면 그는 없었다. 선물을 조르면 금방 손에 들어오긴 했으나 심부름꾼을 통해서였다. 단 한 번도 그가 직접 준 적이 없었다.

그의 표정은 언제나 차가웠고, 드물게 입으로만 웃었다. 시리도록 서늘한 붉은 눈동자가 그래도 자신을 봐주는 것이 좋았다. 소피아는 냉정하고 무뚝뚝한 그의 모습도 그저 다 좋았다.

그런 뜨거운 눈으로 여자를 볼 수 있는 남자였다. 여자를 향해 그런 따뜻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남자였다. 공작부인은 소문만큼의 미인은 아니었으나 사랑받는 여자의 자신감이 가득했다. 당당한 공작부인과 비교하면 자신이 대단히 초라했다. 가슴이 쥐어뜯기는 것처럼 아팠다.

공작이 에스코트한 일을 화제 삼아 여자들이 호들갑스럽게 떠들자 소피아의 배 속 깊은 곳에서 뭔가 불쑥 올라왔다. 공작부인의 여유로운 표정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싶은 심술이 솟았다.

“알려진 사실보다는 다정한 분이시지요. 얼마 전에 만나 뵈었지만 여전하셨습니다.”

소피아가 입을 열자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여자들은 차갑게 식은 분위기에서 섣부르게 입을 열지 못하고 몇몇이 자기들끼리 목소리를 낮추어 짜증스럽게 속삭였다.

“왜 저런대요.”

“그러게 말이에요. 조용히 있어도 모자를 판에.”

루시아의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 같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아 자신을 망신 주려 한 의도는 괘씸했으나 넘어가려 했다. 매몰차게 버림받은 여자의 질긴 미련이라고 이해하려 했다. 소피아가 그에게 처참하게 거절당하는 광경은 루시아의 마음속에 내내 동정을 심어놓았다. 하지만 소피아는 정도를 넘고 있었다.

아무리 불륜에 관대한 분위기라도 공개적으로 내세우는 일까지 용인되지는 않았다. 세상 사람이 다 알아도 입을 다물어야 했다. 체면이 목숨만큼 귀중한 귀족에게는 심각한 문제였다. 얼굴을 마주보고 대화를 나누면서 상대의 배우자에 대해 사적인 언급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내가 그분의 일정을 아는데, 공무에 무척 바쁘시어 언제 시간을 내셨는지 모르겠군요.”

루시아는 소피아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에 대한 믿음이 있고, 객관적으로 그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 귀부인들이 ‘거짓말인 것 같은데…….’라는 시선을 자신에게 보내자 소피아는 얼굴을 붉혔다.

“입궁했을 때 뵈었습니다.”

“그럼 그건 ‘만남’이 아닌 ‘인사’로군요. 단어 선택을 신중히 하도록 하세요, 백작부인.”

소피아가 얼굴을 확 붉혔다. 뭐라고 말할 것처럼 입을 벌리다가 결국 꼭 다물고 고개를 숙이는 소피아를 보며 귀부인들이 혀를 찼다. 귀족들은 구차함과 추함을 싫어한다. 소피아의 태도는 귀족으로서 대단히 깔끔하지 못하고 지저분했다.

“아, 그러고 보니 저번에…….”

누군가 입을 열자 다시 분위기는 풀어졌다. 입술을 깨물고 앉아있는 소피아는 외톨이었다. 아까는 새로운 주인공에 집중하느라 미처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면 이제는 귀부인들이 소피아를 바라보는 눈이 곱지 않았다. 남편의 여자 문제로 속을 끓이는 여자들은 꽤 많았다. 아무래도 여자보다 남자의 불륜이 흔했다. 겉으로는 초연한 척해도 속이 상한다. 옛 관계를 들먹이는 소피아의 태도는 눈에 거슬렸다.

“한데 조르단 백작부인. 너무 이곳에서 자리를 지키는군요. 주최자의 본분을 다하셔야지요.”

조르단 백작부인은 티파티를 시작하고 내내 루시아의 테이블에서 떠날 줄 몰랐다. 루시아가 지적하자 얼굴을 붉히면서 주춤 일어났다. 조르단 백작부인은 내내 불안한 표정이었다.

그런 조르단 백작부인을 보는 다른 귀부인의 눈에 고소함이 깃들었다. 겉으로는 사람 좋은 척하면서 은근히 제 이득만 챙기는 조르단 백작부인 때문에 마음 상한 적이 있는 여자들이었다.

슬슬 마무리할 시간에 접어들었다. 적당한 시간 간격을 두고 하녀들이 총 세 번의 차와 세 번의 간식을 내왔다. 마지막 간식이 나오면 티파티가 끝나고 있다는 신호였다. 루시아가 마지막 케이크를 맛본 후 포크를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것이 마치 신호가 된 것처럼 여기저기서 우르르 일어났다.

루시아의 테이블이 아닌 다른 테이블도 이야기를 나누기보다는 가운데 테이블을 관심과 부러움으로 계속 흘끔거리고 있었다.

“다음에는 제 티파티에 꼭 나와주셔요, 공작부인.”

“언제 또 외부 일정을 계획하시나요?”

루시아의 주변으로 여자들이 몰려들었다.

“공작부인.”

끼어든 목소리 하나가 유난히 튀었다. 루시아는 몸을 돌렸다. 소피아였다.

“오늘 만나 뵈어 영광이었습니다. 다음에 다시 뵐 기회가 있었으면 합니다.”

“글쎄요. 우리 피차 서로 보지 않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귀부인들 몇이 킥킥 웃었다. 가방을 쥔 소피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소피아는 가방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루시아에게 내밀었다. 남자들이 흔히 가지고 다니는 실크 손수건이었다.

“지난번에 뵈었을 때 공작 전하께서 우는 저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돌려드릴 기회를 찾고 있었는데 언제 뵐지 알 수 없으니 공작부인께서 감사하다는 말씀과 함께 전해 주셨으면 합니다.”

귀부인들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공작부인과 백작부인을 번갈아 곁눈질했다. 어느새 조용해졌다.

루시아는 손수건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거짓말을 하는구나.’

그는 과거에 잠시 인연 있었던 여자가 운다고 손수건을 건네는 신사가 아니었다. 그런 남자였으면 승전파티의 그날, 죽이겠다는 협박까지 입에 담아 여자를 떨쳐낼 리 없었다.

오기일까. 심술일까. 소피아의 속내를 알 수 없지만, 이 여자는 참 어리석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 여자가 그를 잘 모르고 있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건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루시아는 손수건을 받아서 물끄러미 보다가 소피아와 시선을 맞추면서 손수건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조금 커지는 소피아의 눈을 보며 루시아는 서늘하게 말했다.

“백작부인. 그대는 거짓말로 날 능멸하고 있습니다. 이건 그분 물건이 아니에요.”

소피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아내는 남편이 가지고 다니는 손수건이 무엇인지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어야지요. 다들 그렇지 않습니까?”

귀족의 시중은 고용인이 전담했다. 아내라고 남편의 옷시중을 들거나 손수건을 챙기는 일은 없었다. 당연히 남편이 어떤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귀부인들은 잠시의 당혹감을 감추고 너도나도 대답했다.

“그럼요. 당연하지요.”

“당연히 알아야 하는 일이죠. 어떻게 남편의 손수건이 뭔지도 모르겠어요.”

루시아도 그가 어떤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소피아가 내민 것은 그의 것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백작부인의 행동은 내가 관용을 베풀 수 있는 선을 넘었어요. 오늘 일을 그냥 넘어가진 않겠습니다.”

소피아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그제야 제가 얼마나 엄청난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질투와 시기에 눈이 멀어 제정신이 아니었다. 남편, 그리고 부모님과 형제 등 가족의 얼굴이 떠올랐다.

남편인 앨빈 백작은 쉽게 어찌할 수 없다 해도, 친정인 로렌스 남작가는 힘이 없었다. 공작가가 밟으면 개미처럼 으스러질 것이다. 남편이 소피아만은 보호해 주겠지만, 손해를 감수하며 친정까지 지켜주지 않을 것이다.

“고… 공작부인. 용서하십시오. 제가 어리석어…….”

소피아는 그 자리에 풀쩍 무릎을 굽혀 앉았다. 소피아를 내려다보는 루시아의 눈은 차가웠다.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모습은 루시아에게 전혀 감흥을 주지 못했다. 일은 다 저질러놓고 눈물로 수습하려는 작태가 역겨웠다.

망신을 당하는 일이 문제가 아니었다. 사교계에서 당하는 망신 같은 건 꿈속에서 워낙 겪어 그런 일로 상처받을 단계는 지났다.

소피아는 남편에 대한 자신의 신뢰를 깨뜨리려 했다. 두 사람의 사이를 삿된 감상에 빠진 제삼자가 망가뜨리려 한 것이다. 루시아는 그걸 용서할 수 없었다.

“댁으로 돌아가 자중하세요. 당분간 사교계에서 볼 일이 없었으면 하는군요. 어느 정도가 당분간인지는 스스로 생각하세요. 아주 신중히 생각해야 할 겁니다.”

루시아는 냉랭하게 몸을 돌려 파티 장소를 빠져나갔다. 몇몇은 여전히 바닥에 앉아 울고 있는 소피아를 흘끔 보며 혀를 찼으나 대부분은 서둘러 공작부인의 뒤를 따라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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