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시아-42화 (43/77)

42장 수도 사교계 (5)

“공, 부관하고 내기 하나를 했는데 말이지.”

또 시작이군. 휴고는 생각했다. 퀘이즈는 가끔가다가 실없는 짓을 했다.

“공이 손수건을 지니고 있나 없나 내기했지.”

휴고는 무시에 가까운 태도로 말없이 듣기만 했으나 퀘이즈는 꿋꿋했다.

“기사들은 손수건을 잘 안 가지고 다니잖나. 근데 공은 애매하단 말이지. 나는 공이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는 쪽에 걸었고, 부관은 가지고 있다는 쪽에 걸었어.”

“뭘 걸고 하는 내기입니까?”

“내가 지면 잘 쓰는 단어 하나 안 쓰기로 했지.”

퀘이즈는 입이 걸었다. 측근들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부관은 기회만 되면 매달렸다. 이젠 왕위에 오르시어 이 나라 주인이 되시는데 체면을 손상하는 말투는 고치셔야 하지 않겠느냐. 여태 부관이 뭐라거나 말거나 무시하면 그만이고 지금껏 그래왔지만, 징징대는 빈도수가 늘어나자 은근히 성가셨다. 그러다가 퀘이즈에게 좋은 생각이 났다.

“그럼 나하고 내기를 하지. 단어 하나씩 걸고.”

규칙 1. 내기 종목은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한다. 퀘이즈와 부관은 번갈아 내기 종목을 제안할 수 있다.

규칙 2. 부관이 이기면 내기에 건 부적절한 표현은 퀘이즈가 이후 사용할 수 없다.

규칙 3. 규칙 2를 어기고 사용한 경우 내기 1회를 진 것으로 간주한다.

규칙 4. 퀘이즈가 이기면 사용할 수 없는 표현을 하나 되찾는다.

굉장히 쓸데없고 구체적인 규칙까지 만들어 내기 장난을 시작했다. 끝없는 도돌이표였지만 부관은 이거라도 어디냐 싶어 받아들였다.

지금껏 한 번 내기를 했고, 퀘이즈가 패했다. 그 대가로 퀘이즈의 언어 생활에서 ‘씨발’이라는 단어가 묶였다. 타란 공작의 손수건은 두 번째 내기였다. 이번 내기에는 퀘이즈가 승하하신 선왕을 가리켜 ‘죽은 노인네’라는 부르는 표현을 걸었다. 퀘이즈가 이번에 지면 아주 엄숙하게 죽은 노인네를 향해 ‘선왕께서’라고 칭해야 한다.

“그러니까 공. 말해 보게. 손수건 안 가지고 다니지?”

일생일대의 문제를 앞두고 있는 것처럼 초롱초롱한 눈빛을 하는 퀘이즈와, 간절함이 가득한 표정의 부관을 스윽 번갈아 보았다. 이런 긴장감 없는 분위기가 정말 괜찮은 건가. 휴고는 의혹이 들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퀘이즈와 손을 잡은 일이 잘한 짓인가 고민했다.

“가지고 다닙니다.”

퀘이즈는 충격에 빠졌고, 부관은 소리 없이 환호했다. 한마디 말로 두 사람을 천국과 지옥에 빠뜨린 휴고는 무심한 표정이었다.

“그럴 리가! 공이 그런 걸 지니고 다닐 리 없어!”

만약 이 내기가 좀 더 옛날에 있었다면 내기의 승리자는 퀘이즈가 되었을 것이다. 휴고는 원래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굳이 필요할 일 있으면 누군가 시켜 닦을 것을 가져오게 하면 되었다. 그러나 휴고는 손수건을 가지고 다닌 지 좀 되었다.

“그런 거짓말은 안 합니다.”

“이럴 수가.”

퀘이즈가 한탄하며 애통해했다. 이번 내기를 이겨 잃어버린 ‘씨발’을 되찾으려는 노림수는 무위로 돌아가고 오히려 이제 앞으로 망할 노인네를 선왕이라 부르게 생겼다.

“그럼 보여주게, 지금.”

휴고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으나 한숨을 작게 한 번 쉬고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새하얀 손수건을 보고 눈이 커진 퀘이즈가 손수건을 집어 들었다. 거친 감촉은 면이고 모서리에는 꽃으로 수가 놓여있었다. 귀족 남자들은 대개 짙은 색의 실크 손수건을 가지고 다녔다.

“…공. 취향이 상당히 독특하군?”

면 손수건은 아이들이나 쓰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휴고는 당당했다.

“손수건은 더러움을 닦기 위한 것. 본연의 기능에 면 손수건만큼 충실한 건 없습니다.”

퀘이즈는 ‘내게 손수건의 기능을 가르쳐주는 건가.’라고 휴고가 말한 의도를 고민했다. 면 손수건의 오묘한 의미를 해석하던 퀘이즈는 새로운 눈으로 면 손수건을 살폈다.

공작이 워낙 당당하니까 볼수록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손끝에 느껴지는 감촉도 괜찮고, 하얀색도 깨끗해 보이고, 모서리 꽃도 나름대로 매력 있고. 수놓은 꽃은 정교하지 않아서 정감이 갔다. 아무래도 전문가 솜씨는 아니고 공작부인의 자수 같았다. 아직 얼굴도 못 본 누이동생이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가지고 싶어졌다.

“으음, 공 말을 들으니 그런 것 같군. 그럼 이건 나 주게.”

“…예?”

주머니에 쏙 넣어버리는 왕에게서 다시 빼앗을 수 없었다. 고작해야 손수건 아닌가. 물론 휴고에게는 고작 손수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쓰기 위해서 지니고 다니는 물건이 아니라 일종의 부적이었다.

어느 날, 그녀가 하얀 면을 끊어 와서 손수건을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 시간을 내어 틈틈이 모서리에 수를 놓았다. 그렇게 한 보따리 만들면 몇 개월에 한 번씩 데미안에게 보냈다.

모서리에 꽃을 수놓은 하얀 면 손수건. 누가 봐도 아이의 물건이었다. 그런데 갖고 싶었다. 난데없이 꽃 자수를 놓은 면 손수건을 갖고 다니겠다고 말하기가 계면쩍어서 몇 장 슬쩍했다.

차라리 당당히 달라고 할 걸. 한순간 충동으로 그러고 나니까 더더욱 말할 수 없었다. 그 몇 장의 손수건은 휴고의 집무실 서랍 깊은 곳에 보관 중이었다.

이후 그녀는 꽃은 아무래도 남자아이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면서 데미안의 이름으로 자수를 바꿨다. 아무리 그녀의 수제품이 좋아도 그 녀석의 이름이 박힌 손수건을 들고 다니고 싶지 않았다.

꽃 자수의 손수건은 지금은 얻을 수 없는 초기 한정품이었다. 몇 장 안 되는데 빼앗기고 말았다. 삽시간에 그의 마음이 어두워졌다. 왕의 뻔뻔한 면상이 오늘따라 무척 보기 싫었다.

* * *

루시아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깊은 피로감을 느꼈다. 집에 들어서자 긴장이 순식간에 다 풀렸다. 아무리 꿈에서 경험했어도 첫 활동 무대였다. 사람들의 집중된 시선 속에서 표정을 유지하는 일은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더구나 소피아가 신경을 건드려서 그런지 힘든 노동이라도 한 것처럼 몸이 노곤했다. 루시아는 저녁을 이른 시간에 먹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휴고의 귀가는 저녁 식사 시간을 넘겼으나 그리 늦은 시간은 아니었다. 마중하는 그녀가 보이지 않자 눈으로 찾았다. 묻지 않아도 알아서 대답하는 제롬이 답을 주었다.

“일찍 잠자리에 드셨습니다. 오늘 바깥 일정이 피곤하셨던 것 같습니다.”

휴고가 미간을 찌푸리자 제롬은 이어 말했다.

“편찮다는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의사는 필요 없다 하셨고, 티파티는 즐거우셨다고 하셨습니다.”

휴고는 곧바로 그녀의 침실로 올라갔다. 어두운 침실로 들어가서 침대에 걸터앉아 새근새근 자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참을 보다가 손을 뻗어서 베개 위에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휴? 다녀오셨어요?”

눈을 깜빡이며 루시아가 눈을 떴다. 덜 깬 잠기운에 목소리가 몽롱하게 잠겼다.

“깨울 생각 아니었는데. 더 자.”

낮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루시아는 웃으면서 기지개를 켜듯 두 팔을 위로 올리면서 그를 향해 뻗었다.

휴고는 미소 지으며 몸을 숙였다. 가느다란 팔이 그의 목을 감아 오자 손으로 그녀의 등을 받쳤다. 얇은 잠옷 아래 따끈한 체온을 담은 피부가 느껴졌다. 그는 한쪽 팔을 그녀 허리 아래에 넣어 들어 올리며 품으로 안았다. 향긋한 그녀의 체향이 코를 간질였다. 심장이 사악 죄어들어서 휴고는 눈을 감았다.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아니요. 그냥 조금 피곤했어요. 오랜만에 사람들 많은 곳에 나가려니 긴장했나 봐요.”

“티파티는 어땠어?”

“티파티였지요.”

휴고는 그녀를 품에서 떼어 눈을 마주했다.

“그것뿐?”

“그 외에 뭐가 있겠어요. 전 공작부인인 걸요. 다들 제 눈치만 봤어요.”

루시아는 소피아의 일을 굳이 그에게 말할 생각이 없었다. 소피아가 한 짓은 전적으로 소피아의 미련한 집착이 초래한 일이었다. 그의 잘못이 아니다. 그는 이미 결혼 전에 정리했다. 헤어지는 방식이 다정하지는 않았지만, 남녀의 이별에 다정함이 말이 되는가. 여지를 주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처럼 매몰차게 잘라내는 편이 나았다.

소피아에게 경고를 했으니 두고 볼 셈이다. 조용히 지내면 이 정도만 하겠지만, 사교계에서 나대는 모습을 보면 정말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

루시아는 공작부인이었다. 시키면 죽는시늉이라도 할 추종자를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었다. 루시아의 손을 더럽힐 필요도 없이 그들에게 살짝 눈치만 흘리면 소피아에게 개망신을 주고 사교계에서 얼굴도 들지 못하게 만드는 일 정도는 간단했다.

사교계는 용서와 관용을 너그럽다고 추앙하는 세계가 아니었다. 마땅히 제 권리조차 제대로 찾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는 비웃음을 산다. 아무리 지위가 높아도 마음 약한 모습을 보이면 뜯어먹으려 눈을 번뜩이는 자들이 넘쳤다.

패악을 부려 체면을 깎아서도, 뭐든지 좋게 좋게 넘어가서도 안 된다. 루시아는 사교계에서 군림하고 싶지 않았지만, 누구에게도 쉽게 보일 생각은 없었다.

“다행이군. 별일 없었다는 거지?”

“네, 당신은요? 오늘 어떠셨어요?”

그는 빼앗긴 손수건을 떠올리자 잠시 우울해졌다.

“늘 같은 하루였지.”

“근데 당신이 오늘 에스코트한 일로 얼마나 많은 질문을 받았는지 아세요? 전 그러면 안 되는 줄 몰랐다고요.”

휴고의 눈썹이 스윽 올라갔다.

“안 된다고 누가 그래.”

“아무도 안 한대요. 안 되는 거나 마찬가지죠.”

“내가 하면 이제부터 하는 거야.”

루시아는 눈을 흘겼다. 또 나왔다. 아무튼, 그의 억지와 자만은 못 말렸다.

“다음부터는 싫어요. 구경거리가 되고 싶지 않아요.”

“…도대체 당신은 왜 자꾸 남의 눈을 신경 쓰는 거야.”

“당신이 너무 신경 쓰지 않는 거예요.”

그가 말없이 가만히 바라보자 루시아는 눈을 조금 크게 뜨고 그를 보았다. 갑자기 그가 그녀를 확 끌어안으며 입술을 포갰다. 그의 이가 그녀의 여린 입술을 살짝 깨물며 입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부드럽게 안을 훑는 움직임을 느끼며 그녀는 손끝이 찌릿했다.

루시아는 그의 목에 두른 팔을 쭉 펴면서 손가락을 오므려 느슨하게 주먹을 쥐었다. 격하지 않은 달콤한 키스였다. 휴고는 입술을 떼면서 쪽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녀를 다시 바로 눕혀주었다.

“자. 당신 눈에 잠이 가득해. 난 가서 밤새 일이나 해야겠군.”

“일이 많으세요?”

“당신 옆에 누워 불면의 밤을 보내느니 일이나 하려는 거지.”

“…당신. 매일 그 생각밖에 안 하죠?”

“당연하지.”

루시아는 기가 막혀 그를 보다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 *

휴고는 오늘 루시아가 참석한 티파티 참석자 명단을 살폈다. 서류를 가지고 밤늦게 공작저에 온 파비안은 속으로는 투덜대고 있었으나 겉으로는 아주 성실한 표정을 지었다. 파비안은 가끔 공작에게 뻗대는 짓을 해도 기본적으로 공작이 무서운 사람이라는 점은 절대 잊지 않았다.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심기를 건드릴 말이나 행동은 하지 않았다.

휴고는 가벼운 기분으로 참가자 명단을 가져오라고 했었다. 앞으로 그녀의 파티 참가는 자주 있을 거고, 그때마다 일일이 참가자가 누군지 살필 수는 없었다. 오늘은 첫 자리이니까 살펴보는 것이다. 대충 참가자를 눈으로 훑던 휴고의 눈가가 미세하게 경련했다.

‘씨발.’

퀘이즈가 자주 내뱉던 말이 절로 튀어나왔다. 앨빈 백작부인이 아주 당당히 참가자 명단에 있었다. 잘못 봤나 싶어 몇 번을 확인했으나 틀림없었다. 갑자기 등에 쭉 식은땀이 솟았다.

“이 티파티, 파티 중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주 상세하게 알아 와.”

또 일이 늘어나는구나. 파비안은 속으로 흐어엉, 울부짖었다.

“언제까지 말씀이십니까?”

“가능한 한 빨리.”

휴고의 음성이 음산했다. 이럴 때는 무조건 기어야 한다. 파비안은 믿음직스럽게 답했다.

“예. 모든 인력을 집중해 처리하겠습니다.”

며칠 후 휴고는 보고서를 받았다. 파티 참석자 일부와 시중을 들며 왔다 갔다 한 하녀들을 매수해서 당시의 상황을 가능한 한 상세하게 되살렸다. 그중에는 꽤 쓸데없는 여자들 수다들이 상당해서 양이 꽤 두꺼웠으나 휴고는 인내심을 갖고 읽었다. 다 읽고 난 휴고의 감상은 간단했다.

‘큰일 났다.’

그녀가 잘 대처해 넘어갔지만, 하마터면 첫 사교 무대에서 망신을 당할 뻔했다. 남편의 과거 여자 때문에.

‘왜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그에게 화내며 비난을 퍼부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그녀는 당일은 물론이고 지금까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게 더 무서웠다. 따져 물을 가치조차 없이 마음이 이미 그에게서 돌아섰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왜 이렇게 자꾸 상황이 엿같이 돌아가는지 모르겠다. 그나마 요즘 노력해서 그녀를 조금 말랑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에 스스럼이 없었고 웃음도 많아졌다. 종알종알 즐겁게 떠드는 모습이 예뻐서 요즘 그의 기분은 구름 위를 밟는 것처럼 들떠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다시 얼음마녀로 돌아간다고 생각하자 그의 기분은 곧바로 추락했다. 그는 자괴감에 빠져 끙끙거렸다.

‘궁에서 잠깐 인사밖에 안 했단 말이야.’

휴고는 억울했다. 그는 언제나 강자의 입장에 있었다. 약자의 억울함을 실감한 적이 없다. 용병의 노예였던 어린 시절조차 분함을 감추고 뒤에서 칼을 갈았지 억울해서 속이 답답하다는 감정이 뭔지 몰랐다. 그녀는 그에게 다양한 감정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인사도 하는 게 아니었어. 모르는 척할 걸.’

자책하다가 그녀가 ‘남편의 손수건이 뭔지 안다.’라고 말한 대목에서는 가슴이 뜨끔했다. 데미안의 손수건을 슬쩍한 걸 아내가 이미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한 건가. 멋쩍은 상황이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낯이 두꺼웠다. 아들의 것을 아버지가 조금 가졌다고 문제가 될 건 없다. 그가 자신을 정당화하는 범위는 대단히 광범위했다. 휴고의 고민은 그녀가 자신에게 실망했을까 안 했을까였다.

지난 며칠 뜨거웠던 밤을 생각하면 희망이 떠올랐다. 화가 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특별한 거리감을 느끼지도 못했다. 티파티에서 있었던 일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잊었을지도.

그러나 그녀는 그에게 마음은 꽁꽁 닫으면서 뜨거운 밤은 허락하는 잔인한 여자였다. 그의 우울함은 점점 분노로 변화했다. 이 모든 상황의 원흉이 분명히 존재했다. 그들에 대한 노여움이 점차 거센 불길로 타올랐다.

‘조르단 백작. 앨빈 백작.’

그의 손가락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남자들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런 이성 따윈 지금 휴고의 머릿속에 없었다. 그들을 어찌 응징할지 그는 머리를 굴렸다. 조르단 백작은 당장 건드릴 명분이 없었다. 그러니 제쳐놓기로 했다. 그러나 잊을 일은 없을 것이다. 그의 명단에 대기자로 기록되어 있을 뿐.

휴고는 아예 없는 일을 일부러 만들어내서 응징하는 것은 하지 않았다. 나름대로 그건 졸렬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걸고넘어질 건수가 생기면 그걸 집요하게 물어뜯었다. 남이 보기엔 그거나 이거나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생각하겠지만, 남들 생각 따위 알 바 아니다. 그 자신에게 떳떳하면 그만이었다.

앨빈 백작으로 넘어가자 더 만만치 않았다. 마음먹고 밟으면 못 할 일은 아니지만, 백작이 워낙 여기저기 뿌려둔 돈이 많았다. 섣부르게 건드리면 감싸고 돌 자들이 많았다. 그들까지 다 치우려면 일이 너무 커지고, 퀘이즈가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멀리 치워야겠군.’

없앨 수 없다면 눈에 안 띄게 치우면 된다. 그동안 앨빈 백작이 차 유통 사업에 손을 댔다가 몇 번 실패했다고 들었다. 그걸 미끼로 삼아 사업상 이유로 얼마간 수도를 뜨게 해야겠다. 사람들은 시야에서 사라지면 관심도 멀어진다. 자연스럽게 소피아를 잊을 것이다.

타란 가문이 비공식적으로 소유한 상단 중에는 전문적으로 차만 유통하는 제법 규모 큰 상단이 있었다. 주 고객은 대부분 타국의 귀족들이라 타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앨빈 백작이 미끼를 물면 상당 기간 수도뿐 아니라 아예 제논을 떠나있을 것이다. 어찌 보면 휴고는 앨빈 백작에게 사업의 기회를 주는 셈이다. 이건 처벌이 아니라 상이었다.

그게 좀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일을 크게 벌이기보다는 이편이 깔끔하겠다. 앨빈 백작의 사업 수완이 탁월하니까 덕분에 상단에 이익이 나면 좋은 일이고. 처리 문제를 생각하며 팽팽 돌아가던 두뇌는 그 후의 일을 생각하자 멈추었다. 그들을 처리한다고 지난 일이 없던 일이 되지는 않았다.

‘물어볼까.’

물어보면 뭐라고 할까. 과거 여자 같은 건 신경도 안 쓴다고 하면 그것도 나름대로 속이 쓰릴 것 같은데. 불쾌해서 당신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다고 하면 그건 더 끔찍하고. 속에 있는 말을 참아본 적 없는 휴고는 근래 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대는 말이 너무 많았다. 쌓이고 쌓여 울화병이 생길 지경이었다.

휴고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꽤 시간이 흘러 티파티가 일어난 날로부터 열흘이 지났다. 그동안 루시아는 몇 번의 티파티를 더 다녀왔다. 이번에는 정말 10인 정도 참석하는 소규모 티파티들이었다.

오늘 그녀는 기분이 좋았다. 데미안의 편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저녁 산책 시간에는 데미안 학술원 생활을 미주알고주알 떠들었다. 어차피 따로 보고를 받아서 다 알고 있었지만, 휴고는 관심 있는 척 들어주며 기분을 맞추었다. 바로 지금과 같은 기회를 잡기 위해서.

“비비안, 소문 하나를 들었는데.”

휴고는 침대에 앉아 화장대에서 거울을 보고 있는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시의 티파티 사건은 사교계에 파다하게 소문으로 나돌았다. 그 후 앨빈 백작부인이 집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더라는 말도 함께 돌면서 소문의 신빙성을 더했다. 휴고는 조사했다고 하지 않고 소문을 들은 것처럼 말을 흘렸다.

“음, 네. 그런 일이 있었어요.”

루시아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휴고의 오랜 고민이 무색했다.

“왜 내게 말하지 않았지?”

“사교계에서 있었던 사소한 일들을 어떻게 다 말씀드려요. 여자들 일인 걸요.”

“…사소한 일인가?”

속이 쓰렸다.

“당신을 믿었기 때문에 사소한 일이었어요.”

푹 꺼졌던 그의 기분이 순식간에 살아났다.

“어차피 당신이 아셨으니 이렇게 된 거 말씀드려야겠네요. 당신이 과거 교제했던 여자들이 누군지 알 수 있을까요?”

그는 이제 진땀이 났다.

“그건… 왜?”

“누군지는 알아야 대처를 하니까요. 트집 잡으려고 드리는 말씀 아니에요. 말 그대로 누군지 알아둘 필요성 때문이지요.”

“…….”

“네?”

“…알았어. 제롬에게 말해 두지.”

휴고는 기분이 복잡했다. 최악은 아니지만 기뻐할 상황도 아니었다. 그녀는 매몰찰 정도로 깔끔해서 감정을 흘리는 법이 없었다. 과거에 휴고는 제발 여자들이 그녀처럼 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제발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아내는 틈 없이 견고했다.

아내의 마음 한 조각을 얻으려고 발버둥 치는 자신이 처량했다. 아무리 기어 올라가도 그녀를 둘러싼 성벽의 높이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휴고는 일어나 루시아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작은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비비안, 난 모르는 일이야. 그 여자를 사적으로 만난 적 없어.”

믿어줘. 그런 일로 상처받지 말아줘. 내게 마음 닫지 말아줘. 수많은 간절함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알아요. 당신을 믿어요.”

믿는다는 짧은 한마디. 그 말이 이처럼 마음 든든할 줄 몰랐다. 안도감으로 초조했던 그의 마음이 순식간에 편안해졌다. 다른 사람에게서 받는 신뢰가 이처럼 가슴 벅찬 일이었던가. 단순한 다른 사람이 아닌, 내 여자에게서 받는 신뢰이기 때문일 것이다.

“…정말이지?”

“그럼요. 제게 약속하셨잖아요.”

“그러니까… 화가 나서 내게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날 믿으니까 신경 쓰지 않았다는 거지?”

“그렇다니까요.”

품안에 들어온 그녀의 온기가 좋아서 휴고는 더 단단히 그녀를 끌어안았다. 가슴이 따뜻해지고, 가끔은 먹먹하고 어쩐지 아리면서 다디단 이 감정은 행복이었다. 그는 몰랐으면 모르되 이미 알아버린 이 달콤함을 도무지 놓을 수 없었다. 형제가 죽은 후 처음으로 쥔 것을 잃을까 봐 두려웠다.

* * *

대관식의 날이 밝았다. 관례상 대관식은 폐쇄된 공간에서 입장객을 엄격히 제한하여 아주 엄숙한 식례에 따라 진행했다. 오전의 대관식이 끝나면 오늘을 포함해 3일간 성대한 파티가 이어졌다. 특히 첫날인 오늘은 정오부터 해 질 무렵까지 가벼운 축하연을 열고, 해 질 무렵부터 새벽까지 열기로 가득한 무도회를 열 것이다. 나머지 이틀은 저녁부터 무도회만 예정하고 있었다.

나라의 새 주인이 여는 최초의 연회라서 규모가 어마어마했고, 참석자들도 엄청났다. 외국에서 온 사절단과 귀족들 수도 만만치 않았다. 작년 열었던 승전 기념 파티와 비교해서 규모는 엇비슷하지만, 오늘 자리에 참가하는 귀족들이 질적으로 더 우수했다. 흥청거리는 승전파티 분위기를 저어해서 불참한 귀족들도 오늘만큼은 빠지지 않고 모두 참석할 것이다.

아침 일찍부터 루시아는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동안 몇 번 티파티를 나갔으나 아무래도 가벼운 자리라서 마음가짐도 가벼웠다. 그러나 오늘은 선왕 승하 이후 최초의 공식 파티이며 루시아의 공식적인 사교계 데뷔 자리였다.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의 전담 디자이너가 된 앙뜨는 어김없이 아침 일찍 조수들을 달고 와서 루시아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치장했다. 오늘을 위해 앙뜨는 심혈을 기울여 신상 드레스를 제작했다. 앙뜨가 추구하는 오늘의 이미지는 우아함과 섹시함이었다.

“완벽하군요, 공작부인. 정말 나날이 아름다워지세요.”

분홍의 펄이 빛나는 비즈를 아주 섬세하게 박은 분홍빛이 감도는 진주색 드레스였다. 어깨가 살짝 드러나도록 넓게 목선을 파서 쇄골이 두드러졌다. 팔 부분은 달라붙도록 좁았다가 소매 부근으로 내려올수록 주름을 넣어 부풀렸다. 드레스 자체가 기본 베이스에 레이스를 덧대어서 두 겹이었다. 다만 팔은 윗부분인 3분의 1가량을 레이스만으로 만들어서 안의 살이 비쳤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얌전한 스타일이었다. 반전은 뒤에 있었다.

드레스 뒤쪽을 등의 반 정도가 드러나도록 과감하게 팠다. 날갯죽지가 드러나고 척추가 지나가는 얕은 골이 두드러졌다. 티 없이 하얀 등의 피부는 야릇한 느낌을 주었다. 뒤 허리 부분을 높여서 치맛자락의 풍성한 주름을 강조했다. 가는 허리가 부각되자 전체적으로 실루엣이 가는 몸매가 대단히 굴곡 있는 몸매처럼 보였다.

앙뜨는 제 손으로 만든 결과물에 만족했다. 아이들이 보는 동화책에 등장하는 마녀처럼 과장하여 손끝을 입에 대고 오호호호 웃음을 터뜨리고 싶었다. 공작부인은 꾸미면 꾸미는 대로 보람이 있었다. 앙뜨의 창작력을 자극하는 완벽한 뮤즈였다.

루시아도 만족했다. 앙뜨의 솜씨는 나날이 진화하고 있었다. 매번 색다른 분위기를 어색함 없이 연출하는 점이 대단했다.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으면서 고혹적인, 그러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순진해 보이는 면이 매력적이었다.

“조금 거닐어 보시겠어요? 불편한 곳이 있는지 확인 부탁드립니다.”

루시아는 제자리를 몇 걸음 걸었다. 상체에 착 달라붙은 부드러운 천의 느낌이 좋았다. 화려한 레이스는 움직일 때마다 나풀나풀 흔들렸다. 레이스에 박은 수많은 작은 다이아몬드가 반짝거리며 빛을 뿌렸다. 어마어마한 재료비가 들어간 고가의 드레스였다. 앙뜨는 대관식 드레스 세 벌을 제작하는 대가로 타란 공작으로부터 백지 수표를 받았다. 예술혼이 폭발했다.

“불편한 곳은 없네. 드레스가 매우 편하고 아름답군.”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제 작품의 아름다움을 완벽하게 이끌어내고 계십니다. 정말 잘 어울리세요.”

진심이 담겨있는 앙뜨의 아부에 루시아는 배시시 웃었다. 루시아가 보기에도 오늘의 그녀는 나무랄 데가 없었다.

“마님. 주인님께서 조금 늦어지실 모양입니다.”

하녀가 쪼르르 다가와 말했다.

“음, 그래? 마담. 다과 좀 하겠나? 수고한 사람을 그냥 보내기 마음에 걸렸는데 마침 시간이 남았군. 바쁘지 않다면.”

“기꺼이요. 초대 감사합니다.”

공작부인이 티파티에 나간 이후 앙뜨의 의상실로 주문이 쇄도했다. 앙뜨는 의상실 이름으로 들어오는 의뢰는 받았으나 직접 맡는 의뢰는 모조리 거절했다. 공작부인에게만 집중하기도 시간이 부족했다. 메인 디자이너가 담당할 수 없다고 하는데도 주문은 여전히 넘쳤다. 앙뜨는 돈을 쓸어 담고 있었다. 그전에도 잘 벌었지만 이제는 황금이 녹아 흐르는 강물을 퍼내는 것 같았다.

루시아와 앙뜨가 잠시의 티타임을 즐기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휴고는 막 저택에 들어서고 있었다. 대관식이 끝나는 대로 그녀를 에스코트하러 다시 저택으로 왔다. 그는 조금 언짢았다. 사람들에게 붙잡혀 있느라 데리러 오기로 예정한 시간보다 늦었다. 왕이 된 사람은 따로 있는데 그를 잡고 늘어지는 떨거지들이 왜 그리 많은지.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제롬의 보고를 받고 그는 곧바로 응접실로 들어갔다. 소파에 앉아있다가 일어나는 그녀를 보며 휴고는 그대로 말을 잊었다. 잠시 멈추어서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아주 천천히 그녀를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며 찬찬히 살폈다.

아름답다. 아니 그 한마디로 표현을 못 하겠다. 곱지 않은 시선이 살짝 앙뜨를 스쳤다. 이렇게까지 최선을 다할 필요는 없었다.

‘제길, 딴 놈들에게 보여야 한단 말이지.’

사내놈들이 볼 생각을 하면 아까워 죽겠다. 남편이 동반하는 자리에서 치근덕대는 명줄 아까운지 모르는 놈은 없겠지만, 앞으로 종종 홀로 무도회에 보낼 일이 걱정이었다. 북부에 있을 때가 좋았다. 그때는 적어도 불나방 같은 사내놈들을 걱정할 일은 없었는데.

마음만 같아서는 오늘 파티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덥석 안아 침실로 들어가고 싶었다. 이 여자는 내 것이다. 강렬한 소유욕이 음험하게 넘실거렸다.

자신의 어둠을 내보이면 혹시 그녀가 도망갈까 봐 그는 부드러운 미소로 그것을 감추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하얀 레이스 장갑을 낀 그녀의 손을 잡아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아름답군.”

살짝 상기된 표정의 루시아가 생긋 웃었다.

“당신도 멋져요.”

검은 턱시도를 차려입은 그는 정말로 근사했다. 여자들이 공작새처럼 색색의 드레스를 입는 것에 비해 남자들은 대개 거의 비슷한 검은색 턱시도를 입지만 체형에 따라 살아나는 태는 제각각이었다.

큰 키에 벌어진 어깨, 날렵해 보이는 그의 몸매는 단순한 검은 턱시도를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옷으로 탈바꿈해 놓았다. 저 옷 안쪽에 자리 잡은 그의 단단하고 유려한 근육들을 알고 있는 루시아는 한층 더 그의 옷차림이 야하게 느껴졌다.

앙뜨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공작 부부를 관찰했다. 아내에게서 시선을 뗄 줄 모르는 공작의 눈에는 부드러운 애정이 가득했다. 정략결혼이 난무하는 귀족 세계에서 이처럼 애정이 충만해 보이는 부부다운 부부는 보기 힘들었다.

“마담 앙뜨가 수고가 많았어요.”

타란 공작의 시선이 제게 향하자 앙뜨는 허리를 숙였다.

“수고했네. 아직 더 할 것이 남았나?”

“아닙니다, 전하. 준비는 다 마쳤습니다.”

휴고는 그녀를 에스코트해서 마차에 올랐다. 공작 부부를 공작가 사람들은 물론이고 앙뜨와 조수들까지 나와서 배웅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공작 부부를 지켜보는 눈빛에 뿌듯함이 담겼다.

그 와중에 앙뜨의 머릿속은 새로운 계산을 하는 중이었다. 여자에게 푹 빠진 남자에게 사라지는 개념이 하나 있다. 바로 금전감각이다. 여자에 대한 애정은 돈에 비례한다고 앙뜨는 굳게 믿었다. 아무래도 타란 공작은 아내를 위해 얼마든지 돈을 뿌릴 준비가 되어있는 것 같다. 그 돈을 제 치마폭에 모두 담고 말겠다고 앙뜨는 결연하게 눈을 빛냈다.

저녁부터 사흘 동안 이어질 무도회는 외궁의 널찍한 홀에서 열리지만, 오늘 낮의 축하연은 내궁에서 개최되었다. 궁에 도착한 마차는 내궁에 들어서자 아주 느리게 달렸다. 내궁에서는 마차가 일정 속도 이상 달리지 못하게 제한했다.

느린 속도 때문에 마차 내부의 흔들림이 거의 없자 휴고는 일어나 몸을 그녀 쪽으로 숙이면서 마차 벽을 짚고 키스하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내내 하고 싶은 걸 참느라 혼났다. 갑자기 덤벼든 진한 입맞춤에 루시아의 얼굴이 금세 붉게 물들었다. 입술이 떨어지자 마주친 그의 눈이 열기로 가득했다. 그의 입술에 묻은 분홍색 자국을 발견하자 루시아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당신 입술에 화장품이 묻었어요.”

휴고는 제 손으로 입술을 문질러 확인했다. 분홍빛 연지가 묻어났다.

“손으로 문지르면 번져요.”

루시아는 손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의 입술을 닦았다.

“저도 번졌죠?”

“내가 닦아주지.”

루시아는 손수건을 내밀었다. 그는 받을 생각을 하지 않고 다시 키스했다. 깊게 혀가 섞이고 이어서 입술만 몇 번이고 빨아들이는 가벼운 입맞춤이 이어졌다. 그는 새빨갛게 물든 그녀의 얼굴을 보며 즐겁게 속삭였다.

“당신 입술은 다 닦였어. 나는 어떻지?”

닦아준다는 의미를 비로소 깨닫고 그의 어깨를 쳤다. 웃는 그를 흘겨보면서 손수건으로 그의 입술에 조금 묻은 흔적을 닦았다.

“기껏 화장했는데……”

“안 해도 돼. 앞으로도 입술에는 하지 마.”

“…왜요?”

“당신이 묻을까 봐 신경 쓰니까.”

“키스하지 않으면 되잖아요!”

“왜 그래야 하는데?”

그가 뚱하게 되묻자 루시아는 말문이 막혔다.

“화장의 꽃은 립스틱이라고요. 마무리 같은 거란 말이에요.”

“안 해도 예뻐.”

그녀의 입술을 볼 때마다 붉고 촉촉한 입술을 삼키고 싶었다. 여린 입술을 빨고 잘근 깨물고 말캉한 혀를 괴롭히고 싶다. 그녀의 타액을 삼키고 붉어진 눈시울로 할딱거리는 그녀를 보고 싶었다. 왜 그걸 참아야 하는데? 그는 절대 그럴 생각이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또다시 다가오는 그의 입술을 루시아가 손바닥으로 막았다.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그를 향해 루시아는 강한 거부 의사를 표했다.

“때와 장소를 좀 가려요, 제발. 우리 지금 중요한 자리에 가는 중이라고요.”

그는 순순히 물러나 마차에 등을 기댔다. 중요한 자리와 키스와의 상관관계는 모르겠지만, 중요한 자리는 맞았다. 왕의 즉위 축하연이어서가 아니라 그녀의 데뷔 무대이니까.

느리게 움직이던 마차가 멈추었다. 밖에서 문이 열렸다. 휴고는 먼저 일어나 밖으로 나가서 안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루시아는 크게 한 번 심호흡하고 일어났다. 마차와 바닥 사이에 제법 높은 턱이 있으나 그 사이를 간이 계단이 받치고 있었다. 그의 손을 붙들고 조심스럽게 계단을 밟아 마차에서 내려왔다.

“긴장돼?”

“조금요.”

휴고는 그녀의 손끝에 입을 맞추었다.

“당신보다 높은 신분은 손에 꼽아. 다른 사람이 당신 앞에서 긴장해야 해.”

“네.”

루시아가 그를 향해 생긋 웃었다. 그도 미소를 짓고 앞으로 시선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루시아도 앞을 보며 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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