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시아-46화 (47/77)

46장 만나는 사람들 (4)

루시아는 작은 집 한 채를 살 수 있을 만큼 돈을 모으고 하녀 일을 그만두었다. 그만둔다고 하녀장에게 말을 했는데 나중에 캐서린이 일개 고용인인 루시아를 불러 다시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루시아가 그만두겠다는 의사를 확고히 하자 두 번 권하지는 않았지만, 저택을 나가는 전날 밤에는 불러 술을 한잔 하자고 했다. 루시아는 그때 정말 많이 놀랐다.

마님과 소파에 마주 앉아 마님이 직접 따라주는 와인잔을 받았다. 루시아가 오기 전에 이미 몇 잔 마신 캐서린은 조금 취기가 올라있었다. 그만두고 뭘 할 것이냐, 가족은 없느냐, 결혼은 안 하느냐 주절주절 이것저것 묻다가 말했다.

‘파티를 가면 늘 보는 아이가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꼬박꼬박 파티에 나오는 아이가 자꾸 눈에 띄더구나.’

두서없이 시작하는 캐서린의 말을 루시아는 말없이 들었다.

‘그 아이와는 말 한마디 나눠본 적 없었어. 그런데 그 아이를 볼 때마다 기분이 이상했지. 흥겨운 파티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무거운 무표정을 한 그 아이가 거슬렸어. 난 내가 그 아이를 싫어하는 줄 알았다.’

와인잔을 기울이는 캐서린의 넋두리가 길어졌다.

‘어느 날부터 그 아이가 안 보이더구나. 알아보니까 내 자매였어. 폐하께서 정적들을 정리할 때 휘말렸다더군. 행방불명으로 생사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을 때. 뭐랄까.’

캐서린은 말을 멈추고 한숨처럼 웃음을 흘렸다. 무심하게 캐서린의 말을 듣고 있던 루시아의 눈동자가 점점 흔들렸다.

‘모르겠구나. 내 마음이 뭔지 나도 모르겠어. 말 한마디 걸어볼 걸.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보다 많이 어리지도 않을 텐데 내 기억 속에는 옛날 앳되던 모습에서 변하지 않아서인지 아이라고 부르게 되는구나. 살아있으면 그 아이도 나이가 많이 들었겠지. 행방불명되고 얼마 후 죽은 채 발견되었다 들었다.’

루시아는 캐서린을 말을 듣고 나서야 왜 자신을 추적하는 수색꾼이 없었는지 깨달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지만, 백작부인 비비안은 죽은 것으로 처리되었다.

‘넌 말이지. 그 아이를 많이 닮았단다. 그래서 네가 자꾸 눈에 밟혔어.’

취해서 눈이 감기는 캐서린은 울 것처럼 흔들리는 루시아의 눈을 보지 못했다.

‘그 애는 참 예쁜 붉은 갈색 머리카락을 가졌었는데……. 네 검은 머리를 볼 때마다 자꾸 생각이…….’

캐서린은 말을 잇지 못하고 소파에 기대어 잠들었다. 루시아는 다른 하녀를 불러 함께 마님을 침대에 눕혀드렸다. 술자리로 어지럽힌 뒷정리까지 말끔히 끝내고 내일이면 떠날 마지막 날, 제 침실로 돌아와 누운 시간은 거의 새벽이었다.

루시아는 날이 샐 때까지 울었다. 그렇게 많이 운 건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처음이었다.

경력도, 추천장도 없던 자신이 앨빈 백작가의 하녀로 채용될 수 있었던 이유를 알았다. 아마 캐서린의 간섭이 있었을 것이다.

항상 루시아는 자신이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버려진 존재라고 생각했다. 누군가 자신을 기억하고 가슴 아파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 큰 위로였다.

“혼자 왔나요? 부군께서는?”

“폐하께서 부르시어 저 먼저 왔습니다. 나중에 온다고 하셨어요.”

“바쁜 분이시죠.”

“네.”

캐서린은 생글생글 웃으며 사근사근 대답하는 루시아를 낯선 눈으로 보았다. 얘가 왜 이러지. 캐서린은 당황했다.

캐서린은 겉으로는 고개를 숙이면서 내심 불편해하는 반응에 익숙했다. 부드러운 말투와 돌려 말하는 화법이 귀부인의 교양이라면 캐서린은 그런 의미에서 교양이 없었다.

귀부인들은 직설적인 캐서린 말에 상처받았다. 그러나 캐서린에게 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고치지 않아도 곤란할 만큼의 문제는 겪을 일이 없었다.

그래서 남들이 불편해하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앞에서는 고개 숙이며 살살 웃는 건 다 똑같았다.

‘성격이 참 순하네. 나와 오라버니랑은 딴판인걸.’

캐서린은 공주였다는 타란 공작부인이 많이 궁금했다. 일부러 피한 건 아니지만, 마주칠 기회가 없었다. 두 사람은 행동반경이 달랐다. 캐서린은 티파티 따위는 절대 가지 않았다.

‘파티의 꽃은 무도회지.’

환한 낮에 차를 마시며 정숙한 척 앉아 수다만 떠는 티파티는 캐서린의 취미에 맞지 않았다.

공작부인과 어제 마주칠 줄 알고 단단히 각오를 다졌는데 공작 부부는 축하연 자리만 참석하고 돌아갔다는 말을 들었다. 오늘은 분명히 만나게 되리라 생각했다.

‘단단히 기세를 눌러놓겠어.’

비장한 기분으로 왔다. 그러나 타오르던 전투력은 루시아를 보자마자 피시식 꺼지고 말았다. 싸울 상대가 아니었기에 전의를 상실했다.

“나와 얘기 더 해요. 조용한 곳으로 갈까요?”

“네? 네.”

앞서 걷다가 고개를 슬쩍 돌리니 뒤에서 얌전히 총총거리며 따라오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돌린 캐서린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올라왔다.

두 사람은 조금 멀리까지 걸었다.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는 복도에 이르렀다.

‘구두가 좀 꽉 끼는 거 같아.’

루시아는 살짝 인상을 썼다. 몇 걸음 걷는 정도로는 몰랐는데 조금 많이 걷자 한쪽 발이 불편했다.

“여긴 나 혼자 쓰는 휴게실이에요.”

캐서린 공주만 누리는 특권이었다. 공동으로 쓰는 휴게실보다 작은 규모로 안락하게 꾸며져 있었다. 한가운데에 다리까지 모두 얹어 푹 기대앉을 수 있는 대형 소파가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드레스 형태가 망가질까 봐 편하게 앉지 못하고 조그만 소파에 살짝 걸터앉았다.

“술 좀 해요?”

“많이는 못합니다.”

“그럼 술이 섞이지 않은 샴페인으로 하죠.”

캐서린은 따라 들어온 시녀에게 지시했다. 시녀가 잠시 후 샴페인과 유리잔을 가져왔다. 캐서린이 손짓으로 시녀를 내보내고 둘만 남았다.

“결혼하고 계속 영지에서 지냈다죠. 북부에 볼 만한 게 많던가요?”

“수도에 비할 수는 없겠지요. 평온하고 지내기 좋은 곳이었습니다.”

“북부 사교계는 어때요? 무도회는 자주 열리나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대체 왜요?”

“좋아하지 않는 편입니다. 제가 성격이 그리 활동적이지 못한 편이어서요.”

캐서린은 조금 실망했다. 무도회에서 종종 보았으면 싶었건만. 귀부인들의 사교계 활동 취향은 극명하게 갈리는 경우가 있었다. 캐서린처럼 무도회만 즐기는 사람이 있고, 티파티처럼 소소하고 조용한 모임만 참석하는 사람이 있었다. 사교계 영향력은 아무래도 무도회 쪽이 컸다.

“그럼 이런 파티도 편하지 않겠네요.”

“아예 나오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요.”

“하긴. 그럴 수는 없겠죠. 공작부인인데.”

톡톡 쏘아붙이는 캐서린의 말투는 쌀쌀맞게 들렸다. 혹시 내게 화가 났나, 눈치를 살피게 하는 어조였다. 말을 곱게 하지 않아도 떠받드는 공주님이었다. 고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캐서린은 말투가 직설적이지만, 자존심 강하고 승부욕이 있을 뿐 성품이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루시아는 캐서린의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도도함이 부러우면서 가끔은 귀여웠다.

“드레스는 어디 제품이에요?”

“디자이너 앙뜨가 제작했습니다.”

“앙뜨? 흐음. 만들던 거 하고 좀 다른데……. 난 앙뜨는 안 입어요. 내 취향에 안 맞아서.”

“지금 입으신 드레스가 잘 어울리세요.”

루시아는 애매하게 웃었다. 입고 있는 드레스를 흉잡아서가 아니라 캐서린은 그냥 싫어서 싫다고 말하는 것뿐이었다. 악의는 없으나 생각나는 대로 하고 싶은 말을 한다. 올케인 왕비 베스가 아주 질색하는 캐서린의 말버릇이었다.

“그 목걸이는 멋지군요. 취향이 훌륭해요. 직접 골랐나요?”

“아닙니다. 선물받았어요.”

“선물한 사람은 공작이시겠지요?”

“네.”

목걸이를 유심히 바라보는 캐서린의 눈에 부러움이 있었다. 보석을 사고 싶어서 오라버니에게 졸라대지만, 최소한의 양심은 있었다. 공작부인이 착용한 목걸이 같은 엄청난 물건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루시아는 캐서린이 얼마나 보석을, 특히 다이아몬드를 좋아하는지 알고 있었다.

“마음에 드시면 언제든 빌려 드릴게요.”

“…빌려 준다고요? 그 목걸이를? 선물받은 거라면서요.”

“선물받은 물건이라고 빌려드리지 못할 이유는 없지요.”

캐서린은 기분이 이상했다. 어머니가 세상을 뜨고 자신에게 무조건적 호의를 보여주는 사람은 오라버니뿐이었다. 올케는 나쁜 사람은 아니었으나 성격적으로 잘 맞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처음 본 배다른 여동생이 이해할 수 없는 호감을 표했다. 다른 사람 같으면 뭐가 아쉬워 이러나 하겠으나 타란 공작부인은 공주 캐서린에게 아쉬울 것이 없었다. 그 반대면 모를까.

얘가 마음에 들어. 친해지고 싶어. 캐서린이 다른 사람에게 이런 마음을 품은 건 처음이었다.

“…됐어요. 그 정도로 염치없지는 않네요.”

루시아를 가만히 바라보던 캐서린이 들고 있던 칵테일 잔을 비웠다.

“사실, 내가 타란 공작 전하를 많이 좋아했어요.”

루시아는 웃었다. 알고 있었다. 캐서린이 타란 공작을 향해 품은 마음은 마치 막 소녀에서 여자가 된 순진한 아가씨가 품을 듯한 소소하고 귀여운 첫사랑이었다.

꿈속에서 캐서린이 타란 공작부인과 그렇게 앙숙인 데에는 그런 미묘한 감정이 한몫했다.

“이런 말, 무례하다는 거 알지만.”

“괜찮습니다. 기분 상하지 않았어요.”

캐서린은 루시아는 잠시 보다가 피식 웃었다.

“신기한 사람이군요. 공작부인 같은 사람 처음 봤어요. 뭐랄까. 마음을 편하게 해주네요. 공작께서 부인의 그런 점에 반해서 영지로 납치한 걸까요?”

잊고 싶었던 소문을 듣자 루시아는 난처한 표정으로 빈 잔만 만지작거렸다.

“다들 타란 공작을 궁금해해요. 궁금해도 물어볼 사람이 없잖아요. 타란 가문에서는 사교계에 나오는 사람이 없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공작부인이 있죠. 앞으로 꽤 많이 성가실 거예요.”

“네…….”

“사실 나도 궁금해요. 어떤 분이에요? 1년 넘게 같이 살았으니까 잘 알겠죠.”

루시아는 새삼 깨달았다. 그와 결혼한 지 1년이 훌쩍 넘었다는 사실을. 그와의 결혼 생활이 이렇게 순탄할 거라고 전혀 생각 못 했다. 그는 어떤 사람인가. 어려운 질문이었다. 여전히 그를 잘 모르겠다.

“어떻게 죽여줄까?”

어젯밤 들었던 무시무시한 한마디가 왜 그렇게 달콤했는지. 딱딱 끊어지는 그의 말투는 변함없는데 그걸 듣는 루시아의 귀가 어딘지 고장 난 것 같았다. 별거 아닌 그의 말 한마디에도 루시아는 가슴이 뛰었다.

“다정한… 분이에요.”

캐서린은 순진한 표정의 공작부인을 조금 놀리고 싶었다.

“다정하기만 해요? 침대에서도?”

“네?”

화들짝 놀라며 얼굴이 붉어지는 루시아를 보면서 캐서린은 웃음을 삼켰다. 이런 반응은 오랜만이라 신선했다. 캐서린은 미혼이지만, 밤을 즐기는 여자였다. 아무하고나 문란하게 놀지는 않아도 꽤나 경험이 있고 어지간한 음담패설에는 눈 하나 깜짝 안 했다.

“티파티에서는 이런 얘기 못 들었죠? 거긴 다 꽉 막힌 부인들만 나오니까.”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꿈속에서 수많은 무도회를 다녔어도 들어보지 못했다. 그런 노골적인 대화를 나눌 만큼 친한 사람이 없었고, 대개 자정이 되기 전에 파티를 나왔다.

늦은 밤부터 새벽까지 이어지는 무도회는 욕망의 해방구였다. 특히 진정한 환락의 파티는 자정부터 시작이었다. 이슥한 시간, 적당히 술에 취하고 분위기에 취한 여자들이 쏟아내는 대화는 수위가 높았다.

앨빈 백작부인이었던 캐서린은 결혼 후 나름대로 얌전히 백작부인 노릇을 했다. 그렇게 질색하던 티파티를 저택에서 열고, 새벽 무도회는 나가지 않았다. 루시아는 꿈속에서 백작부인으로서, 하녀로서 수많은 파티에 다녔어도 새벽 무도회는 경험해 보지 못했다.

“새벽까지 무도회를 즐기지 않으면 들을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또 모르니까요. 혹시 들어도 그냥 웃어넘겨요. 아무렇지 않게. 얼굴 붉히거나 민망해하지 말고.”

“네.”

“부군을 위한 충고예요. 결혼한 귀부인이 수줍어하면 정숙하다고 봐주지 않아요. 제멋대로 뒷말만 하지. 소문이 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거예요.”

“…무슨 소문이요?”

“공작 전하가 밤일 못하는 고자일지 모른다고.”

“네? 아니에요!”

캐서린이 ‘아니면?’ 하고 말을 받으며 웃었다. 루시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바로 어젯밤이 떠오르자 얼굴에 열이 났다.

그는 절대 신사가 아니었다. 특히 침대에서의 그는 부드러우면서 무자비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얼굴이 더 벌겋게 익었다. 고개를 들지 못하는 루시아를 보며 캐서린이 깔깔 웃었다.

“이거 안 되겠네. 내가 몇 가지 좀 가르쳐 줄까요?”

“…무엇을요?”

“들어두면 다 도움이 되는 지식이죠.”

남녀의 은밀한 밤놀이에 대해 캐서린의 지식은 전문가 수준이었다. 아무나 붙들고 이런 이야기를 할 정도로 주책없지는 않았다. 그 정도로 캐서린은 루시아에게 친밀한 호감을 느꼈다.

두 사람 다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서 오래 자리를 비우고 수다를 떨 수 없었다. 얼마 후 휴게실을 나오는 루시아 표정은 상기되어 있었다. 루시아는 오늘 정말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배웠다.

두 사람이 다시 파티장으로 향하는데 누군가를 발견한 캐서린의 눈이 샐쭉하게 올라갔다. 발걸음을 멈추고 공주님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던 여자가 캐서린이 다가오자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보는군, 백작부인.”

“…예, 공주님께 인사 올립니다.”

“내 옆의 귀인이 누군지 모르는가?”

필요 이상으로 말투에 날이 서있었다. 루시아는 그걸 느끼고 슬쩍 캐서린의 표정을 살폈다.

“…공작부인께 인사 올립니다. 아니타 팔콘입니다.”

루시아는 이 여자와 이런 식으로 인사를 나누게 될 줄 몰랐다. 못내 찜찜함을 감추고 인사를 받았다.

“어쩐 일인가? 침대 덥힐 사내가 필요해서 나왔나?”

루시아는 캐서린의 말이 과하다고 생각했다. 고개를 숙인 아니타의 입술이 바르르 떨리는 것을 보았다.

“내 말이 고까운가?”

“…아닙니다. 공주님. 저는 다만 나라의 주인이 되신 국왕 폐하께 신민의 몸으로 축하드리기 위해…….”

“뻔한 말은 됐네. 가보게.”

꾸벅 고개를 숙인 아니타는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갔다. 루시아는 캐서린이 적대감을 보이는 모습이 낯설었다. 누군가를 이렇게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캐서린은 처음 보았다. 꿈속에서 타란 공작부인과 대립각을 세웠으나 면전에서 모욕하지는 않았다.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을 것 같지만. 저 여자. 팔콘 백작부인이에요. 세 번째 남편인 백작이 죽어서 남편 없는 백작부인이죠. 알고 지내지 마요. 말도 붙일 필요 없어요.”

“이유를 여쭈어도 될까요?”

“품위 없는 여자예요. 어울려서 득될 것 없다고만 알아둬요.”

캐서린은 남녀가 자유롭게 즐기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본인이 유부남과 놀아보지는 않았어도 남이 그러는 걸 손가락질하지 않았다.

그러나 귀부인이 뭔가를 얻어내기 위해 몸을 던지는 짓은 캐서린의 기준으로 용납할 수 없었다. 그건 천박한 창녀나 하는 짓이었다. 팔콘 백작부인은 그런 짓을 하는 여자였다.

캐서린의 열여덟 살 생일이 지난 후, 비로소 오라버니가 밤늦도록 즐기는 파티를 허락했다. 캐서린이 본격적으로 무도회장을 휩쓸고 다니기 전까지 여왕벌 노릇을 하던 여자가 팔콘 백작부인이었다.

캐서린은 그 점도 못마땅했다. 차라리 정면에서 부딪쳤으면 깔아뭉갰을 텐데 백작부인은 어느 날 갑자기 떨어져 나가서 그 후로 사교계에 잘 나타나지 않았다.

캐서린이 아니타에게 이를 가는 가장 큰 이유는 타란 공작과의 스캔들 때문이었다. 천박한 몸을 굴려서 타란 공작을 꾀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사실을 공작부인에게 밝힐 수 없으니까 두리뭉실하게 넘어갔다.

‘설마 타란 공작이 아직도 저 여자를 만나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캐서린은 자기 능력으로 타란 공작을 어찌할 수는 없겠지만, 팔콘 백작부인은 다시는 얼굴도 못 들고 다니게 개망신 주겠다고 마음먹었다.

두 사람이 파티장으로 돌아가자 왕비가 입장해 있었다. 베스는 함께 와서 인사하는 두 시누이를 보며 적잖이 놀랐다.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둘이 만나면 꽤 험악하지 않을까 은근히 걱정했다. 공작부인의 성품은 걱정 없는데 캐서린이 문제였다.

“공작부인. 캐서린 공주님이 본디 좀 말을 편하게 한답니다. 이해하세요.”

베스는 안 봐도 빤히 보이는 캐서린의 실수를 무마하려고 했다. 곧바로 캐서린의 반격이 들어왔다.

“왕비 마마도 이젠 기력이 부족하시군요. 어제 하루 힘들었다고 눈 밑에 주름이 보이네요.”

“호… 호호. 그럼요. 이젠 나이가 있는데요.”

루시아는 애써 웃는 베스의 이마에 혈관이 두드러진 것을 보며 웃음을 참았다.

본격적으로 파티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연주자들이 자리를 잡고 파반느와 미뉴에트, 파스피에 등을 번갈아 연주했다.

춤곡이 바뀔 때마다 남녀가 커플을 지어서 댄스홀 공간으로 비워둔 중앙으로 나와 춤을 추었다. 루시아와 왕비를 중심으로 모여 있는 귀부인들이 하나둘 댄스 신청을 받고 홀로 나갔다. 캐서린도 어떤 젊은 남자의 신청을 받아 나갔다.

“아름다운 숙녀께 청하옵건대 한 곡 함께할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루시아는 자신을 향해 내민 손을 빤히 바라보다가 시선을 올렸다. 처음 보는 남자였다. 나이는 스물 중반 정도. 잿빛 머리카락에 서글서글한 미소, 적당히 호감 가는 준수한 남자였다.

자신이 누군지 구체적인 신분 내역을 밝힐 필요가 없을 정도로 무도회에서 댄스 신청을 주고받아 춤을 추는 일은 간단한 대화를 나누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가만히 보고만 있자 옆에서 귀부인들이 부추겼다.

“나가보세요. 공작부인께서 오늘 같은 날 한 곡 추어 주셔야지요.”

“그럼요. 공작부인의 우아한 댄스는 무도회의 흥취를 돋우어줄 겁니다.”

“미혼 여성들에게 아주 인기 많은 백작가 영랑이랍니다.”

인기가 있건 없건 그건 루시아와 상관없었다. 단지 기왕 참석했는데 너무 소극적으로 파티에 임하는 건 그다지 좋지 않을 것 같다.

루시아는 처음 보는 남자의 손을 잡고 댄스홀로 나갔다. 미뉴에트가 연주되었다. 루시아는 남자의 어깨에 팔을 얹고 천천히 음악에 맞추어 돌기 시작했다.

“부인께서는 오늘 가장 화사하고 청초한 꽃처럼 빛나시는군요.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과찬이시군요.”

남자의 틀에 박힌 찬사가 루시아의 귀에는 크게 감흥이 없었다. 허리를 짚은 남자의 손이 신경 쓰이고 살짝 스치듯 풍기는 향수 냄새가 낯설었다. 자꾸 남편과 비교하게 되었다. 그라면 좀 더 강하게 리드를 했을 것 같았다.

‘괜히 나왔나 봐.’

음악이 한 소절 끝나기 전에 루시아는 후회했다. 너무 지루했다. 더구나 구두에 쓸려 따끔거리는 뒤꿈치가 거슬렸다. 춤을 추면서 움직임이 커지자 단번에 찰과상을 입은 것 같다. 발을 디딜 때마다 욱신욱신해서 루시아의 얼굴에서 조금씩 표정이 사라졌다.

무도회의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왕을 비롯한 거물급 인사들이 등장하자 사람들이 술렁였다. 사람들은 지나가는 왕에게 상체를 숙여 경의를 표했다.

왕은 좌중이 갈라져 만든 길을 걸어 왕비에게 다가갔다. 왕비는 왕에게 예를 표하고, 왕의 중신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휴고는 재빠르게 그녀를 찾았으나 아무리 눈을 돌려도 왕비 근처에 아내가 보이지 않았다.

“안사람은 어디 있습니까?”

옆에서 퀘이즈가 헛웃음을 흘렸다. 자신의 어린 아들놈이 제 어미 찾는 것과 겹쳐 보였다. 베스가 살포시 웃으며 홀 중앙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런, 공. 그대 부인을 빼앗겼군.”

퀘이즈가 유쾌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렇군요.”

‘기필코 자른다.’

사람을 쓰면서 단기간 내에 이렇게 여러 번 생각이 바뀐 적이 없었다. 휴고는 아내의 드레스를 보자마자 결심을 굳혔다. 오늘부로 디자이너는 모가지였다. 저런 천 쪼가리를 입히다니. 용납할 수 없었다.

다른 귀부인들과 비교해서 루시아의 노출이 과한 편은 절대 아니었다. 그러나 딴 여자가 홀딱 벗고 춘다고 해도 그에게는 별개의 문제였다.

그의 눈에는 다 드러난 그녀의 가슴팍과 등의 하얀 피부만 보였다. 번쩍이는 목걸이가 목덜미를 거의 덮어서 노출을 최대한 가리고 있었으나 그것도 그의 기준에 충분하지 않았다. 오히려 목걸이 아래에서 언뜻 비치는 피부가 더 야하게 느껴졌다.

아내는 아름다웠다. 숭고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음심도 마구 자극했다. 지극히 이기적인 자신의 주관에 따라 휴고는 판단했다. 저건 절대 안 된다.

아내 허리에 손을 얹고 손을 맞잡아 빙글빙글 돌고 있는 저 놈팡이만 아니었어도 그의 기분이 이렇게까지 최악은 아닐 것이다.

휴고는 홀 가운데에서 춤을 추고 있는 여러 커플 중 한 쌍의 남녀, 정확히는 남자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첫 미뉴에트를 빼앗겼다. 아무도 의미를 두지 않는 일에 그는 의미를 부여하며 분노와 충격에 휩싸였다.

퀘이즈는 눈 돌릴 줄 모르고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휴고를 묘한 표정으로 살폈다. 뚫어지게 제 아내를 보고 있는 공작의 표정은 늘 보던 대로 차가웠다.

퀘이즈는 타란 공작이 감정 부분의 어딘가 결여된 사람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감정 표현에 인색하고 항상 무심하고 차가운 표정이었다.

그런데 근래 공작은 공작부인과 관련하면 가면이 얇아졌다. 겉으로는 냉정한 표정이지만, 안쪽에서 활활 타오르는 뭔가가 보였다.

‘완전 중증이군. 도대체 1년 동안 북부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퀘이즈는 푸른 드레스의 공작부인을 요모조모 뜯어보았다. 아무리 봐도 모르겠다. 못생겼다는 건 아니지만, 남자를 꾀는 매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호리호리한 몸매는 뭘 모르는 막 성에 눈뜨는 어린놈들의 보호본능을 자극할지 몰라도 여자를 어지간히 아는 사내라면 풍만하고 색스러운 여자에게 더 끌리는 법이다. 과거에 타란 공작이 교제한 여자들이 바로 그랬다.

“무슨 생각을 하기에 그리 심각한가?”

“저놈을 죽일까 고민 중입니다.”

근처 분위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다. 어제 광견 크로틴을 다루던 공작의 위엄은 아직 짙은 인상으로 남아있었다. 담담한 말투 속에서 사람들은 죽음의 위협을 느꼈고, 표정이 사색이 되었다.

‘타란 공이 미쳐 가는구나.’

퀘이즈는 긴장했다. 이제 막 시작한 그의 치세가 위기에 봉착했다.

“…공. 진정하지. 짐의 즉위 축하연에서 피를 보겠다는 건가?”

퀘이즈가 정색하자 휴고는 슬쩍 퀘이즈를 돌아보고 다시 댄스홀로 시선을 돌렸다. 망할 미뉴에트가 참 길기도 하다. 춤곡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그의 인내심이 점점 바닥으로 향하고 있었다.

“농담입니다.”

“…그런 농담은 차라리 하지 말게.”

어찌나 살벌한지 소름이 돋았다.

“무도회의 꽃은 댄스지. 젊은 사람이 고루하게 왜 그러나.”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고루한 모양입니다. 장갑을 한번 던져볼까 싶군요.”

휴고는 그런 우스운 짓으로 결투 신청을 해본 적이 없었다. 되게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짓을 해볼 마음이 들었다.

“…….”

죽이겠다는 말과 다를 게 없었다. 퀘이즈는 몇 번 헛기침으로 썰렁한 주변 분위기를 환기했다. 때마침 미뉴에트가 끝났다.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공작부인을 향해 바로 움직이는 타란 공작을 보며 퀘이즈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계획대로 이루어지는 세상은 참 지루하다. 어느 정도의 변수는 삶의 활력소였다.

분명히 퀘이즈는 어제까지만 해도 공작의 변화가 재미있기만 했다. 그런데 갈수록 이게 아니지 싶었다. 너무 큰 변수였다. 도무지 예측이 안 된다.

‘너무 사적인 감정에 치우치면 좋지 않은데…….’

걱정하면서 좌중을 쭉 한 번 둘러보는 퀘이즈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저놈은 뭐야.’

누이 캐서린이 오라비가 들어왔는데 인사하러 오기는커녕 구석에서 처음 보는 빤질빤질한 놈하고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퀘이즈는 당장 시종을 불렀다.

음악이 끝나고 루시아는 남자와 맞절로 인사했다. 남자가 뭐라고 하는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루시아는 따끔거리는 뒤꿈치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하녀에게 다른 구두를 가져오라고 해야겠어.’

더럽히기 쉬운 장갑, 굽이 망가질 수 있는 구두 등의 소품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기본적으로 비상용을 마차에 비치해 두었다. 아까 발이 조금 아플 때 갈아 신을 걸 그랬다.

루시아는 성큼 눈앞에 다가온 남자를 보며 눈이 커졌다.

“언제 오셨어요?”

댄스 상대였던 백작가 영랑은 자신을 향한 타란 공작의 살벌한 기세에 혼비백산해서 도망쳤다.

루시아의 머릿속에서 이미 조금 전의 댄스 상대는 말끔히 사라졌다. 몇 시간 만에 다시 본 남편이 반가웠다. 남들 눈이 없으면 품에 폭 안기고 싶을 만큼.

“방금. 어디 다쳤나?”

“네?”

“잘 못 걷고 있잖아.”

루시아는 그가 어떻게 알았는지 신기했다.

“구두가 좀. 발에 안 맞는 것 같아요. 갈아 신어야겠어요.”

“걸을 수 있겠어?”

“그럼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에요.”

그가 내민 손을 잡으며 자신 있게 한 걸음 내딛자마자 루시아는 지끈하는 통증에 걸음이 흔들려 그의 부축을 받았다.

아마 혼자였으면 이 정도쯤 아무렇지 않게 걸었을 것이다. 의지할 사람이 옆에 있으니까 마음이 약해졌다. 루시아는 점점 엄살이 느는 것 같아서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그를 보았다.

“조금 따끔해서 그래요. 괜찮아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던 휴고는 그대로 루시아를 안아 들었다. 루시아는 수많은 사람의 시선이 단번에 모이는 것을 느꼈다.

“괘… 괜찮다니까요.”

그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기자 루시아는 도무지 주변을 볼 수 없어서 고개를 그의 가슴 쪽으로 묻었다.

그녀를 안고 왕에게 간 휴고는 ‘안사람이 다쳤습니다.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라고 양해를 구했다.

“…그러시게.”

파티장을 벗어나는 공작 부부를 바라보는 사람들 표정이 제각각이었다. 경악 혹은 부러움. 퀘이즈는 타란 공작의 저런 볼썽사나운 짓이 갈수록 더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예측할 수 없는 변수는 그다지 달갑지 않지만.

‘그래도 요즘은 공작이 좀 사람 같아 보이는군.’

퀘이즈는 픽 웃었다.

<6권에서 계속>

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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