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장 만나는 사람들 (7)
“하지만 그랬다가는…….”
“소문 따위는 상관없어. 당신은 어쩌고 싶지?”
“티파티는 괜찮아요. 가볍게 이야기만 나누다 오니까 부담도 없고. 무도회는 너무 사람도 많고…….”
“대신 무도회보다 티파티에서 시비가 벌어지는 일이 많지.”
“누가 저와 시시비비를 가리겠어요.”
“혹시 누가 당신 기분을 상하게 하면 말해. 담아두지 말고.”
“…무슨 일 있으면 쪼르르 당신에게 와서 이르라고요?”
“혼내줄게.”
루시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휴고는 그녀의 입술과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추었다. 간지럽다며 까르르 웃으며 고개를 흔드는 그녀의 거부에 개의치 않고 자잘한 키스를 퍼부었다.
“그럼 내일 앙뜨는 되돌려 보내야겠네요.”
‘앙뜨. 그 문제를 해결해야지.’
휴고는 마음을 굳혔다. 내일 의상실로 사람을 보내서 내일뿐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올 필요 없다고 말을 전해야겠다. 그는 오늘 파티 내내 사내놈들이 그녀를 곁눈질할까 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정말 피곤하고 불쾌했다.
“내일은 붉은 드레스라고 했어요. 당신이 선물한 레드 다이아몬드 목걸이에 어울리는 정열적인 드레스라고 했지요. 그건 조금 궁금하네요.”
정열적인 드레스. 휴고는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보지 않아도 그 드레스가 자신의 혈압을 급격히 상승시킬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내일 안 가겠다며.”
그녀의 마음이 바뀔까 봐 휴고는 재확인했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그녀의 위로 올라갔다.
루시아는 말을 잊고 아연하게 그를 보았다. 설마……. 또? 의심하기 무섭게 그의 손이 복부를 미끄러져 내려갔다. 다리 사이 안쪽을 문지르며 안으로 손가락을 넣어 더듬었다.
“안이 아직 부드러워.”
루시아는 확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넣을게.”
“에?”
그의 두 손이 허벅지를 잡아 벌리고 그대로 몸을 묻었다. 압도적인 질량감이 하체에서 치닫고 올라왔다.
“으…….”
뻑뻑했다. 아릿한 통증을 느꼈다.
“아파?”
“조금…요.”
그런데 그는 허리를 빼고 다시 밀고 들어왔다. 은밀한 내부 살이 마찰하는 느낌이 생생해서 눈물이 찔끔 났다. 손으로 그의 디딘 팔을 찰싹 소리가 나도록 때렸다.
“아파요!”
“참아.”
루시아는 기가 막혀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더없이 부드럽다가도 때로는 잔혹하게 굴었다. 약이 오른 그녀를 보면서 휴고는 낮게 웃었다. 그녀에게서 다양한 감정을 끌어내는 일은 언제나 즐거웠다.
물러났다가 단번에 쳐올리자 그녀는 미간을 찡그리며 신음했다. 확실히 좀 아픈 모양이었다. 그도 조금은 따가웠다.
그녀의 안은 너무 좁았다. 그만큼 했으면 좀 풀어져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무리 짙은 애무로 녹진하게 풀어놓고 애액을 흐르게 하여도 늘 손가락을 조일 정도로 좁았다. 그게 미치게 자극적이었다.
몇 번 진퇴를 반복하자 매끄러운 액체가 그의 분신을 감쌌다. 그녀도 더는 아프지 않은지 미간에서 주름이 사라졌다. 진입해 들어갈 때마다 흐느낌처럼 신음을 흘렸다. 상큼한 그녀의 체취가 후각을 마비시킨다.
북부로 돌아가고 싶다고 휴고는 생각했다.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두 사람만의 성에서 시간을 흐름을 잊고 살고 싶다.
그녀가 외가 친척을 찾은 일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외가와 교류가 많아지고 자신보다 그들을 더 의지하게 되면 어쩌지. 외조부를 만날 일로 마음이 싱숭생숭한 그녀에게 드러낼 수 없는 불안이었다.
“…비안.”
어렴풋이 그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다. 얼굴 여기저기에 무언가가 자꾸 닿았다 떨어졌다. 간지럽기도 하고 잠결에 성가시기도 해서 인상을 쓰면서 손을 내저었다. 그 손마저 잡혀서 손등이며 손가락 끝이며 자꾸 닿는 느낌이 입술 같았다.
루시아는 무거운 눈꺼풀을 위로 올렸다. 눈을 몇 번 깜빡이며 잠기운을 몰아냈다.
“…휴?”
루시아는 좀 더 선명해진 시야로 그를 확인했다. 침실은 이미 환했고, 그는 옷을 모두 차려입은 채였다. 그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정오가 지났어. 그만 일어나야지.”
“…당신 때문이잖아요.”
루시아는 오늘 새벽에 잠들었다. 그가 어찌나 끈질기게 놓아주지 않는지 언제 까무룩 잠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상쾌한 표정을 한 그를 노려보다가 눈을 감았다.
“조금만 더 잘래요.”
“지금 일어나야 외조부님을 뵙지. 두 시간쯤 후에 모셔 올 거야.”
잠기운이 단번에 사라졌다. 루시아는 눈을 크게 뜨고 자기도 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켰다.
“누가 오신다고요? 제 외조부님이요?”
“만나 뵙고 싶다며. 마음이 바뀌었나?”
“아… 아니요. 그런 건 아니지만. 외조부님과 어떻게 연락을 하신 거예요?”
“어제 하녀에게 머물고 계신 곳을 알아두라고 했어.”
만나건 만나지 않건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우선 상대방의 연락 방법은 알아두는 것이 기본이었다.
당연한 일을 루시아는 전혀 생각조차 못 했다. 그가 외조부님과 연락할 방법을 알아본다고 했을 때는 막연하게 그의 능력이라면 수소문해서 찾을 수 있겠지 생각했다. 이렇게 간단한 방법이 있는 것을.
“…하지만 아직 마음의 준비가…….”
“그런 건 필요 없어. 시간 끌어봤자 감상에만 빠지겠지. 왜 외조부를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지?”
“어머니의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궁금했어요. 어머니 소식도 알려야 할 것 같고.”
“그럼 그 마음으로 만나 뵈어. 잡생각 만들어서 속 끓이지 말고.”
루시아는 그가 놀라웠다. 그는 전혀 생각지 못한 지점에서 날카로웠다.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상념이 많아지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가 그런 걸 안다는 것이 신기했다.
결혼할 때 그의 빠른 추진력에 감탄한 적이 있었다. 그는 결정을 내리면 망설임 없이 밀고 나가는 성격이었다. 절대 긴 생각으로 시간을 낭비할 것 같지 않은 남자였다.
‘이 남자가 고민이라는 걸 할까? 자신의 결정에 후회는 해봤을까?’
루시아는 모르지만 휴고는 요즘 하루하루가 번민이었다. 원인 제공자는 전혀 알아주지 않는 고민과 후회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 * *
주인의 명을 받고 제롬이 직접 노신사를 모셔왔다. 외부적으로 타란 공작가에서 백작을 저택으로 모신 일이 드러나지 않도록 은밀히 조치했다.
휴고는 제롬에게 신중을 기하라고 명했다. 아직 아내가 외조부를 만나고 나서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만들지 결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작가의 외척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당장 달려들 굶주린 이리 떼들은 잔뜩 있었다.
휴고는 아내의 외가라고 별다른 특별한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아내의 외조부라니까 존중은 하겠지만, 어디까지나 그녀가 원하는 선까지였다.
응접실에서 루시아는 외조부를 기다렸다. 초조하게 서있는 그녀의 곁에서 휴고가 한쪽 팔로 어깨를 감싸 안아주었다. 고용인들에게도 노신사의 방문이 특별해 보이지 않도록 루시아는 마중 나가지 않고 응접실에서 기다렸다.
닫혀있던 응접실 문이 열리며 제롬이 반백의 노인을 모시고 안으로 들어왔다.
백작은 입구에 한참 서서 굳은 것처럼 루시아를 바라보고 서있었다. 그리고 흔들리는 발걸음으로 천천히 루시아를 향해 걸어왔다.
루시아는 노인의 얼굴에서 꿈에서 봤던 외삼촌의 얼굴을 봤다. 그리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얼굴도 보았다. 조손은 몇 걸음 사이를 두고 말없이 서로 바라보았다.
“앉으십시오. 당신도 앉아.”
휴고가 나서서 경직된 분위기를 풀었다. 백작이 소파에 앉고 나서 루시아도 소파에 앉았다.
“자리를 피해주는 편이 좋은가?”
루시아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비비안입니다. …할아버님.”
백작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몹시 애달픈 표정으로 루시아를 보며 소리 없이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가 한참 만에 겨우 한마디했다.
“아만다는……?”
백작은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빠르게 응접실을 살폈다. 아만다가 보이지 않자 불안감에 가슴이 내려앉았다. 아무리 처음 보는 손녀가 딸을 닮아 사랑스러워도 절절한 애정이 자식에 비할 수 있을까.
불안했다. 그러나 불가피한 사정으로 이 자리에 나오지 못한 것이리라고. 꼭 만날 수 있을 거라고. 기대를 버릴 수 없었다.
루시아의 가슴에 울컥 뜨거운 뭔가가 치솟았다. 이분은 딸을 그리워하는 아버지였다.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마지막 순간 얼마나 아버지가 보고 싶었을까. 어머니를 생각하니까 가슴이 저렸다.
“…돌아가셨어요.”
루시아는 노인의 눈에서 수많은 감정이 뒤섞이는 것을 보았다. 놀람, 경악, 불신, 분노, 슬픔, 절망.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는 많은 고통스러운 감정을 보며 루시아도 상처 입은 노인의 고통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눈물이 고인 노인의 눈에 자식을 잃은 부모의 비통함이 드러났다. 백작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고개를 숙이고 꺽꺽 울기 시작했다. 루시아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안아주는 그의 가슴에 기대 얼굴을 묻었다.
처음 만난 조손이 나눌 이야기는 그리 많지 않았다.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던 조손은 ‘아만다’라는 공통 화제를 통해 비교적 편하게 대화를 트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기억하던 딸의 모습, 딸이 기억하는 어머니의 모습.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으며 간간이 웃기도 했다.
“펜던트, 찾고 계시지요?”
루시아는 외조부가 펜던트에 관해 물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참 대화가 이어져도 아무 말씀이 없어서 먼저 말을 꺼냈다.
“…그걸 네가 가지고 있니?”
백작은 조금 놀란 기색이었으나 루시아의 예상보다 덤덤한 반응이었다. 어머니가 가출할 때 들고 나온 문제의 펜던트. 루시아가 꿈속에서 외삼촌을 만날 수 있었던 계기였다.
‘그 펜던트는 바덴 백작가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란다. 누이가 가출할 때 들고 나갔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어. 제 딴에는 미안했는지 펜던트를 빼가면서 금고에 짤막한 편지를 넣어 두었더구나.’
‘뭐라고 쓰여 있었나요?’
외삼촌은 조금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근사한 신랑감을 데려오겠다고 했다.’
어머니도 철이 없던 시절이 있었구나. 루시아는 자신이 모르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 신기했다. 그래서 외삼촌과 몇 번 더 만남을 이어가다가 이윽고 집에까지 초대하게 되었다.
“제가 지금 가지고 있지는 않아요.”
루시아는 어릴 적에 나무에서 떨어져 크게 다친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딸의 치료비 마련을 위해 펜던트를 전당포에 맡겼다. 빌린 돈이 제법 커서 어머니는 약속한 기일에 펜던트를 찾으러 가지 못했다. 루시아가 나중에 상황을 끼워 맞춰 짐작한 정황이 그랬다.
어머니와 장을 다녀오는 길에 루시아는 전당포 유리창 너머 진열된 펜던트를 발견했다.
‘이거 엄마 거잖아요.’
‘응, 맞아. 잠시 맡겨놓은 거야.’
‘왜요?’
‘귀한 물건이라서. 잃어버릴까 봐.’
그 후 가끔 어머니의 발길이 전당포 앞에서 멈추는 것을 보았다. 우두커니 서서 가격이 매겨진 펜던트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표정은 슬퍼 보였다.
루시아는 어린 마음에 펜던트에 대해서 더 물으면 어머니가 속상해하실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중에 커서 돈을 벌면 저걸 어머니께 선물해 드려야지, 결심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펜던트를 잊고 살다가, 메튼 백작의 심부름으로 경매장에 갈 일이 있었다. 남다른 취미를 가진 귀족들을 위한 골동품 경매가 있는 날이었다.
메튼 백작은 거기에 나올 독특한 디자인의 보석함을 낙찰받으라고 했다. 누군가에게 비비기 위해 선물할 물건이었던 것 같다.
왜 다 낡은 물건을 경쟁까지 하며 사는 걸까. 이해할 수 없었다. 경매에 참가할 보석함은 뒤에 나올 예정이라서 꽤 긴 경매를 지루하게 지켜보았다.
그러던 와중에 경매 물건으로 펜던트가 올라왔을 때 루시아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머니의 물건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루시아는 경매장에 온 진짜 목적을 잊었다. 반드시 어머니의 물건을 되찾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적극적으로 경매에 참석해서 펜던트를 결국 손에 쥐었다. 독특한 디자인의 펜던트인지라 탐내는 사람이 몇 있어서 루시아는 상당한 고가를 불러서 겨우 낙찰받았다.
루시아는 펜던트를 손에 쥐고 감격에 떨었다. 메튼 백작이 보석함을 사라고 내준 돈을 대부분 썼으나 후환의 두려움을 잊을 정도였다.
오랫동안 잊었던 어머니와의 추억이 되살아났다. 모든 시름을 다 잊을 만큼 루시아는 무척 오랜만에 기쁨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레이디, 그 물건을 내게 되팔아 주시지 않겠습니까.’
중년 남자가 다가와서 다짜고짜 물건을 되팔라고 요구했다. 그것이 외삼촌과의 첫 만남이었다.
‘그 펜던트는 우리 집안의 가보입니다.’
‘유감이군요. 다시 되팔 생각이 없습니다.’
중년 남자는 끈질겼다. 루시아는 중년 남자와 실랑이를 하다가 펜던트가 어쩌다가 경매장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두고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같은 여자를 각각 누이동생과 어머니로 두었음을 알았다.
기가 막힌 우연으로 마주친 처음 만나는 숙질이었다.
외삼촌은 누이동생의 부고를 듣고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살짝 코끝이 붉어졌으나 외조부처럼 통한의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아버지와 오라비의 차이일 것이다.
‘그 펜던트는 전설을 품고 있는 귀물이지.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가문이 위기에 처했을 때 가문을 살리고 명맥을 이어가게 해줄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중요한 가보라는데 제가 갖겠다고 고집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살아 계셨어도 집에 돌려주기를 바라시겠지. 그래서 외삼촌께 드렸다.
“어머니가 급히 돈이 필요해서 팔아야 했어요. 독특한 모양의 펜던트였으니까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비록 지금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미래 언제 어디서 경매에 나올지 알고 있었다. 원래 기다릴 생각이었지만, 꿈에서 봤던 미래가 달라지고 있으니 경매에 펜던트가 나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골동품 시장을 수소문해서 찾아볼까 고민하고 있었다. 지금 루시아에게는 사람을 풀어서 물건을 찾아볼 힘이 있으니까.
꿈속에서 외삼촌은 펜던트를 되돌려 받고 매우 기뻐했다. 가문을 짊어진 부담감에 짓눌려 미신 같은 가문의 전설에라도 기대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외조부의 반응은 달랐다.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구나. 네 어미가 유용하게 썼다면 그걸로 그 물건은 충분히 소용을 다 한 것이지.”
“가문의 가보라고 들었어요. 귀한 물건이 아닌가요?”
“아만다가 그런 소리를 하였니?”
어머니에게 직접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루시아는 ‘네.’라고 답했다.
“가보는 무슨. 그저 오래된 물건일 뿐이지.”
바덴 가문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릴 때부터 가문 대대로 물려오는 가보에 얽힌 전설을 들으며 자랐다. 남들은 들으면 비웃을 이야기를 진지하게 믿고 낡은 펜던트를 귀물로서 보관했다.
백작도 젊어서는 가보에 얽힌 전설을 믿었다. 그러나 부친이 한 많은 세상을 뜨고, 아내를 잃고, 딸마저 가슴에 묻었다. 전설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가문의 위기? 위기는 이미 수차례 있었고 지금까지도 진행 중이었다.
황혼의 나이에 이르러서야 백작은 하늘의 무심함을 깨우쳤다. 전설을 믿기에는 너무 나이가 들었다.
“그저 다, 무슨 소용인가 싶구나.”
백작은 남의 손에 넘어가는 저택을 건지려고 수도에 왔다. 평생 해본 적 없는 아쉬운 소리를 할 마음마저 먹었다. 그러나 딸의 죽음을 알자 모든 것이 부질없었다. 딸이 죽은 줄 모르고 살아온 지난 수년의 세월이 덧없었다. 대체 뭘 위해 아등바등 살아왔는지 허무했다.
“어여쁘게 자랐구나. 이리 잘 자라주어 고맙다.”
딸이 남긴 한 점 혈육, 유일한 흔적을 보며 백작은 위로를 받았다. 이제라도 딸의 소식을 듣고, 몰랐던 손녀를 알았으니 그것도 복이라고 자신을 다독였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이제 저는 지쳤습니다. 쉬고 싶군요.’
백작은 모든 것을 놓아버렸다. 친구에게 돈을 부탁하려던 마음도 접었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저택은 포기했다.
‘작위를 팔자.’
어둠의 경로를 이용하면 작위를 살 자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법으로 엄격히 금지된 작위 매매지만, 알음알음 물 밑에서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백작위 정도면 좋은 값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돈으로 아들 둘 살길을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평생 짊어져온 짐을 아들들에게까지 넘기고 싶지 않았다.
“그만 가봐야겠다.”
백작이 일어나자 루시아가 놀라 따라 일어났다.
“가시려고요? 저녁이라도 드시고…….”
“아니다. 내가 저녁에 약속이 있구나. 다음에 시간이 나면 또 보자. 소식을 알았으니 언제든 만날 수 있지 않니.”
“…네.”
돌아서서 응접실 문으로 향하는 외조부의 뒷모습을 보며 루시아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차올랐다. 태어나서 처음 뵈었고, 그저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것처럼 낯설지 않았다. 슬픈 것은 아닌데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플까. 휴고는 그녀를 품으로 안으며 귓가에 말했다.
“내가 모셔다 드리고 올게.”
루시아는 눈물 가득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접실을 나가는 그를 보면서 눈물을 닦았다. 그가 곁에 있어줘서 고마웠다. 그저 지금은 모든 것이 감사했다.
휴고는 잠깐 사이에 벌써 저택을 나가 뜰을 걷는 백작의 뒤를 따라잡았다. 노인네 걸음이 참 빠르기도 하다.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오늘 날씨도 좋고, 걸어가도 되겠습니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백작은 큰 키와 듬직한 체격의 헌앙한 사내를 바라보았다. 본디 무가라서 선조의 체격을 물려받은 바덴 백작가 남자들이 작은 편이 아닌데도 백작은 시선을 올려야 했다.
제논의 귀족이라면 타란 공작 가문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특히 전쟁의 분위기를 가까이 느낀 남부에서는 허드렛일을 하는 천것들마저 타란 공작을 화제로 삼아 떠들었다.
‘좋은 사람을 만난 것 같으니 다행이로고.’
즉위 축하연에서, 아까 응접실에서 손녀를 대하는 공작의 태도가 흡족하고 마음이 놓였다. 진심으로 손녀를 위해주는 마음 씀씀이가 보였다. 친지 하나 없이 외로웠을 손녀가 행복해 보여서 다행이었다.
백작은 휴고의 권유를 거절하지 않고 함께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공작저를 벗어나 어느 정도 달리다가 멈추어 섰다.
“수도에 어느 정도 머물 생각이십니까? 거처하실 곳을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좋은 친구가 있어서 수도에 있는 동안 머물 곳은 걱정 없습니다.”
“말씀 낮추십시오, 어르신. 손위 어른 되십니다.”
백작은 씁쓸히 웃었다.
“손녀가 저리 다 크도록 얼굴 한 번도 보지 못한 할아비가 무슨 염치로 인제 와서 어른 노릇을 하겠습니까. 그저 건강히 잘 지내고 있다고 가끔 소식을 듣는 것으로 족합니다.”
휴고는 묘한 표정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깔끔한 성정을 지닌 분이었다. 노인의 성품은 인상에 드러났다. 노인의 얼굴에는 세월의 고단함을 드러내듯 깊은 주름이 잡혀있고 피부는 푸석푸석했으나 푸근하고 기분 좋은 기운이 흘렀다. 욕심이 없는 건 집안 내력인가. 휴고는 아내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기반을 수도로 옮길 의사는 없으십니까?”
휴고는 그답지 않은 제안을 했다. 바덴 백작가 뒤를 봐주겠다는 말이었다. 타란 공작가의 적극적인 뒷받침이 있다면 변방의 무너져가는 백작 가문은 수도의 신흥 세력 가문으로 부상해서 빠르게 자리를 잡을 것이다.
“고마운 제안이나 사람은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내 자식들이 감당하기에 과분하군요.”
거절하는 백작은 망설임이 없었다. 백작은 제 아들들을 과대평가하지 않았다. 타고나기를 권세 있는 가문에서 태어났으면 모를까 여태 이름뿐인 귀족으로 살아온 세월이 길었다.
큰아들은 지나치게 고지식하고 둘째 아들은 머리 굴리기를 잘하지만 도량이 좁았다. 둘 다 권력놀음을 하기에는 배포가 부족했다. 자식들이 걱정되어 편히 눈을 못 감을 것이다.
“그러면 다른 도움이 필요한 일은 없으십니까? 부담 없이 말씀하십시오.”
“이 나이 먹도록 변변히 이루어놓은 일은 없어도 부끄럽지는 않게 살았습니다. 이제 만난 손녀에게 손을 벌리는 무도한 사람은 아닙니다.”
“안사람이 모르게 하겠습니다.”
백작은 흐뭇하게 웃었다.
“고맙습니다. 그 아이를 아껴주어서.”
아랫사람을 바라보는 어른의 인자한 시선을 받는 일이 처음이라서 휴고는 당황했다. 지금껏 자기 위에 아무도 없다는 오만함으로 살아왔지만, 뜻밖에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제 아내입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 당연한 일을 나는 하지 못하고 살았지요. 나처럼 소중한 사람을 잃는 과오를 저지르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래오래 그 아이를 아껴주고 사랑해 주세요. 행복하게 해주세요. 이 늙은이가 바라는 건 그것뿐입니다.”
백작은 그녀가 손녀라는 사실을 몰랐을 때부터 이미 사랑에 빠졌다. 딸의 웃음을 그대로 닮아서 밝고 상냥하게 웃는 손녀는 사무치게 사랑스러웠다. 곱게 다 자랄 때까지 자라는 모습을 보지 못해서 서러울 뿐이었다.
“그 아이를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백작의 붉어진 눈시울을 보며 휴고는 심장이 조금 아픈 것 같았다. 정말 이상한 기분이었다.
“약속드리겠습니다. 사랑하고… 행복하게 해 주겠습니다.”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의 아내였다. 그런데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노인을 보며 휴고는 진정으로 그녀와의 관계를 인정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아군을 얻은 것 같은 든든함이었다.
휴고는 끝내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백작에게 수도를 떠나기 전에는 반드시 연락을 줄 것을 약속받았다. 이대로 외조부가 훌쩍 떠나면 아내가 몹시 서운해할 것 같았다.
신세 지고 있다는 친구의 저택 근방까지 백작을 모셔다 드리고 돌아와서 휴고는 아내의 뜻을 물었다.
“당신은 어쩌고 싶지? 외가에 도움을 주기 바란다면 그렇게 해줄게.”
루시아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외가 친지들이 감당하기엔 공작가 외척의 자리는 너무 커요. 온갖 구설수에 말려들 거예요. 당신이 골치 아플 테지요.”
두 조손이 맞춘 듯이 같은 말을 하는 것이 신기했다. 휴고는 핏줄의 신비함을 느꼈다. 처음 만나는 조손은 대단히 닮았다.
“난 괜찮아.”
“제가 괜찮지 않아요. 당신께 폐가 되고 싶지 않아요.”
“폐라니. 그런 말이 어디 있어.”
그가 인상을 찌푸리는 것을 보며 루시아는 두 팔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품에 안겼다. 고개를 들어 그를 보면서 미소 지었다.
“제 외가라는 건 알려지지 않았으면 해요. 외가는 금전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그 부분만 조금 도와주세요. 해주실 수 있죠?”
“알았어.”
대답하는 그의 표정은 부루퉁했다. 조금 전 말한 ‘폐가 되고 싶지 않다.’라는 말에 여전히 기분이 상해있었다. 루시아는 가끔 그가 퉁퉁거리는 모습이 귀여웠다. 오직 자신에게만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며칠 파티를 나가며 공식적인 자리에서 보는 그의 모습은 루시아에게 어떤 충격을 주었다. 처음에는 그가 화가 난 줄 알았다. 차가운 표정과 서늘한 눈빛을 하는 그가 왜 그럴까 의아해하다가 사람들이 그런 그를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대하는 모습을 보며 깨달았다.
그의 원래 모습이었다. 꿈속에서 봤던, 그리고 청혼해야지 마음먹고 승전 기념 파티에서 봤던 그의 모습이었다.
언제부턴가 잊고 있었다. 자신을 향해 부드럽게 웃고, 따뜻하거나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에게 익숙해 있었다. 루시아는 비로소 자신만 아는 그의 얼굴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제가 말한 적 없죠?”
“뭘.”
“저랑 결혼해 줘서 고맙다고.”
그의 붉은 눈동자가 일렁이는 것을 보며 루시아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농담은 아니었으나 가벼운 기분으로 한 말이었다. 그런데 그의 눈동자에 기쁨이 가득하자 어쩐지 감격스러웠다.
그의 한쪽 팔이 루시아의 등을 누르고 다른 팔이 허벅지 아래를 받치며 안아 들어 시선을 맞추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그럼요.”
“그럼 증명해 봐.”
“어떻게요?”
“당신이 생각하는 내게 폐가 되는 짓을 해봐. 내가 뒷수습할 사고 치는 것도 좋고.”
“…어떻게 그게 증명이 되는 거죠? 그보다 지금 어디 가세요?”
휴고는 루시아를 안고 응접실을 나와서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밟고 있었다. 고용인 몇이 움찔했으나 모르는 척 다 고개를 돌리며 하는 일에 집중했다. 더는 고용인들 앞에서 내숭 떨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오늘 저녁 식사는 조금 늦게 먹자고.”
“이이가 진짜!”
휴고는 얼굴이 뻘겋게 달아오른 그녀의 입술에 쪽 소리가 나도록 짧은 키스를 했다. 붉어진 얼굴이 더 붉어지는 모습은 언제 봐도 신기했다. 그리고 아주 귀여웠다.
오늘 파티 일정 취소로 갑자기 시간이 많아졌다. 모처럼 생긴 휴일이었다. 휴고는 오늘을 알차게 보내고 싶었다. 침대에서.
며칠 후 루시아는 외조부와 점심을 함께했다.
외조부가 사람을 통해 그만 남부로 내려간다는 소식을 담은 짤막한 서신을 보내왔다. 루시아는 떠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식사 대접을 드리고 싶어서 자리를 마련했다.
두 번째 만나는 조손은 조금 더 편하게 서로 대했다. 루시아는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할아버지를 알고 지낸 것처럼 편안함을 느꼈다. 핏줄이기 때문일까. 하지만 더 가까운 핏줄인 아버지는 남보다 못했는데. 이제는 미움조차도 남지 않았다. 만약 어머니가 자신을 왕궁이 아니라 외가에 보냈다면 더 행복했을 것 같았다.
“그럼 제게 이미 조카가 있다는 말씀이군요.”
루시아는 많은 친척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두 외삼촌은 결혼해서 큰외삼촌은 딸이 둘, 막내 외삼촌은 아들이 둘이었다. 큰외삼촌의 두 딸은 모두 루시아보다 나이가 많았고 그중 첫째는 이미 아이 엄마였다. 루시아에게는 외숙부 둘과 사촌 형제 넷, 조카 남아가 하나 있었다.
꿈속에서 루시아는 외삼촌에게 얼핏 아들 둘이 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비극적으로 돌아가신 큰외삼촌에 대해서는 묻지 못했고 외삼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제 막 걸음을 떼었지. 돌아가면 그새 많이 컸을 게야. 아이는 순식간에 자라니까.”
외조부는 가끔 편지로 이런저런 집안 소식을 전해 주겠다고 말했다.
“죄송해요, 할아버님. 제가 만나 뵈러 가겠다고 약속을 못 드리겠어요.”
루시아는 남편에게 금전적인 도움만 부탁한 일이 외조부께 죄스러웠다. 더 많은 도움을 드릴 수 있는데 너무 박하게 대한다는 미안함이었다.
“온다고 해도 말릴 거다. 난 네 외숙들에게 네 얘기를 할 생각이 없단다. 네 어미 소식도 그저 나만 알고 있으련다.”
놀라 커진 눈을 하는 손녀를 보며 백작은 인자하게 웃었다.
“네 외숙들에게 헛바람을 넣고 싶지 않구나. 가진 건 부족해도 집안은 화목하지. 그래도 내가 복이 있어서 며느리들 심성이 곱다. 나는 그냥 이대로가 좋다. 서운해도 이해해다오.”
“아니에요, 할아버님. 서운하기는요.”
루시아는 손녀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외조부의 마음을 읽었다. 죄송하고 감사했다. 이런 아버지를 잃고 외삼촌이 얼마나 원통했을까. 꿈속에서 외삼촌의 절박한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언제 출발하세요?”
“오늘 돌아가려고 친구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온 참이란다.”
백작은 친구에게 신세를 지면서 친구의 사정도 그리 좋지 못하다는 걸 알았다. 부친이 돌아가신 후 대부분의 재산과 작위를 물려받은 친구의 형님이 친구를 제대로 살펴주지 않는 것 같았다. 친구에게 어려운 부탁을 하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럼 식사가 끝나는 대로 바로? 왜 그렇게 서두르세요. 조금 더 머물다 가셔도 되잖아요.”
“늙은 아비를 수도로 보내놓고 네 외숙들이 걱정이 많을 게야. 나 같은 늙은이가 지내기에는 수도는 번잡하기도 하고. 가는 길은 걱정하지 마라. 게이트를 타고 갈 거니까. 손녀사위 덕분에 내 평생 호사를 다 누려 보는구나.”
외조부가 과장된 태도로 어깨를 으쓱하자 루시아는 웃었다.
“언제든 오셔요. 이제 오시는 길이 그리 멀지 않으니까요.”
“그러마. 너무 자주 온다고 박대하지나 말렴.”
“박대는요. 그럴 일 없어요.”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부간 의좋게 지내고. 사람이 괜찮더구나. 너를 많이 아껴. 내가 그래서 마음이 놓인다.”
“네, 좋은 사람이에요.”
자식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 부모에게 최고의 효도라고 했다. 루시아는 외조부께 잘살고 있는 현재의 자신을 뵈어드려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람 괜찮다고 남편을 칭찬하시는 말씀이 뿌듯했다.
“한 번 안아봐도 되겠니?”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이었어요.”
두 조손은 서로 안아주며 아쉬운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비록 언제 서로 다시 볼 수 있을지 기약이 없으나 영원한 이별은 아니었다. 그래서 루시아는 외조부를 담담하게 보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