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장 사랑합니다 (1)
외조부를 보낸 오후에 앙뜨가 방문했다. 항상 조수와 일꾼들을 주렁주렁 달고 오던 앙뜨는 단출한 홀몸이었다. 드레스를 가봉하려는 목적이 아니니까 혼자가 당연했으나 오늘따라 공작저의 위용에 주눅이 든 표정이었다. 무장 해제당한 병사처럼 약해 보였다.
‘조수와 일꾼들을 부리며 잔뜩 이고 다니는 소품들이 앙뜨의 무기인가.’
자신감과 활기가 넘치던 앙뜨의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루시아는 표정 관리를 했다. 기본이 장사꾼이었다. 기를 세워줘서 파고들 틈을 줄 필요는 없었다.
“자네가 어쩐 일인가.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뵈어 송구합니다, 공작부인. 무례를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일정에 방해되었는지요.”
“마침 별다른 일은 없네. 이후에는 이러지 말게.”
“예, 공작부인.”
응접실에서 두 사람이 마주앉았다. 느긋하게 차를 마시는 루시아와 달리 앙뜨는 계속 공작부인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며칠 전 앙뜨는 청천벽력 같은 통지를 받았다. 타란 공작이 사람을 보내서 앞으로 드레스 제작을 맡기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미 제작한 드레스 비용은 약속대로 모두 지급하겠다고 했으나 그런 푼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눈앞의 일확천금이 안개처럼 사라졌다.
며칠 잠을 못 이루는 불면증에 괴로워하다가 공작저를 방문했다. 사전에 사람을 보내 약속을 잡는 일이 순서에 맞지만, 그랬다가 거절당하면 아예 방문할 수 있는 명분이 사라진다. 그래서 무작정 찾아왔다. 공작부인이라면 한 번쯤은 만나줄 거라고 생각했고 그 생각은 다행히 주효했다.
“무슨 일인가.”
“가면무도회를 위한 드레스를 가져올 필요 없다고 하셔서 혹여 편찮으신 것은 아닌지 염려했습니다.”
“보다시피 건강하네. 피곤해서 일정을 취소했지. 그것이 용건인가?”
앙뜨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공작부인은 여느 귀부인들과 다른 점이 많았다. 쓸데없는 수다를 늘어놓으며 쉽게 말을 섞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이에 비해서 이상할 정도로 노련했다. 닳고 닳았다는 느낌보다는 관록이 느껴지는 여유로움이었다. 앙뜨는 말을 돌리기보다 정공법을 택했다.
“공작부인. 솔직히 말씀드려서 이유를 알고 싶어 찾아뵈었습니다. 제가 무슨 큰 실수라도 하였는지요.”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모르겠군.”
“제가 공작부인께 잘못한 점이 있다면 부디 말씀해 주십시오.”
“그런 것 없네.”
“그러면 왜 제가 공작부인의 드레스를 제작하는 일을 이후부터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셨는지요. 드레스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습니까?”
루시아는 모르는 소리였다. 그러나 짐작은 갔다. 남편이 앙뜨의 드레스를 못마땅해하더니 아예 앞으로의 계약 거부 통지를 보낸 모양이었다.
루시아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갈수록 유치해지는 이 남자를 대체 어찌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대관절 어느 귀족가에서 남편이 아내의 드레스 디자이너 바꾸는 문제에 관여한단 말인가.
아내가 소비한 비용을 문제 삼을 수는 있다. 그러나 누가 만든 드레스를 입을지 결정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여자의 선택이었다.
루시아는 앙뜨의 드레스가 마음에 들었다. 앙뜨는 루시아의 체형과 매력을 잘 살리는 디자인을 그릴 줄 알았다. 다른 누구를 고용해도 앙뜨보다 나을 것 같지 않다. 그러나 보수적인 남편의 심기는 살펴줄 필요가 있었다.
“나는 자네 드레스가 마음에 들어. 하지만…….”
공작부인이 말을 늘이자 앙뜨는 긴장된 숨을 삼켰다.
“바깥분이 마땅치 않아 하시는 드레스를 입기는 곤란해서 말이네.”
“공작 전하께서 제가 만든 드레스를 마음에 들지 않아 하신다는 말씀입니까? 그리 말씀을 하셨습니까?”
“직접 말씀하지는 않았으나 자네 드레스가 좀… 단정하지 못하다고 여기시는 것 같더군.”
“…….”
이게 무슨 개가 풀 뜯어먹는 소리인가. 단정하면 드레스가 아니다. 그걸 원하면 목까지 단추를 채워 올린 사제복을 입어야지. 지금껏 셀 수 없이 많은 귀부인을 대상으로 드레스를 만들었지만, 그런 말을 하며 불만을 표하는 사람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앙뜨는 열심히 고민했다. 그리고 그간 제작했던 공작부인의 드레스들을 쭉 떠올렸다. 처음에 여름용 드레스를 계약하고, 대관식 드레스를 재계약했다. 초기 제작한 드레스까지는 불만이 없었다는 뜻이다. 뭐가 다른가.
‘처음에 만든 여름용 드레스는 가벼운 외출용으로 만들어서 무난했고. 대관식 드레스는 아무래도 과감했지. 무도회에서 입을 것이니까.’
그건가. 앙뜨는 알아차렸다. 그리고 어이가 없었다. 그 정도로 노출이 싫으면 병이었다. 다른 드레스를 보라. 가슴이 반은 드러난다. 그런 드레스에 비하면 공작부인을 위해 제작한 드레스들은 아주 얌전했다.
‘정말 소문대로 감금해 놓고 사는 거 아니야?’
앙뜨는 의심을 품으면서 가련한 눈빛으로 두 손을 마주 잡았다.
“공작 전하께서 얼마나 공작부인을 은애하시는지 어리석은 제가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이후에 더욱 노력하여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제작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공작부인. 솔직히 말씀드려서 어딜 가도 저만 한 디자이너를 찾기 어려우실 거여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말했지만 자네 드레스에 만족하고 있어.”
앙뜨의 눈이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그러니 나하고 계약을 하세.”
“예! 공작부인.”
“확실히 다시 말하겠네. 계약은 나하고 하는 거네.”
“…예? 그야…….”
“전에 공작 전하와 무슨 계약을 했는지 묻지 않겠네. 이후에는 그런 계약은 없을 거네. 알아들었는가?”
미소를 짓고 있는 공작부인의 표정에 바늘 꽂을 틈도 없었다. 앙뜨는 통한의 울음을 속으로 터뜨렸다. 대박이 물 건너갔다!
“알아본즉, 보통 분기별로 드레스 두세 벌, 무도회용 드레스는 필요할 때 한두 벌 제작하는 것이 적정하다고 하더군. 나는 기존에 만든 것이 몇 벌 없으니 가을용, 겨울용 드레스로 각각 다섯 벌씩 의뢰하겠네.”
여름 의상으로만 열아홉 벌을 팔았던 과거에 비하면 곤두박질치는 수치였다. 그러나 앙뜨는 이마저도 감지덕지했다. 다섯 벌이라도 어딘가. 타란 공작부인의 전속 디자이너라는 이름은 더 많은 부가가치를 안겨줄 것이다.
앙뜨의 눈앞에서 흐르던 황금 강물은 안갯속으로 사라졌으나 바닥에 널린 사금은 주울 수 있었다. 앙뜨는 냉큼 제안을 받아들였다.
루시아는 응접실에서 손수건에 수를 놓으며 저녁 식사 시간까지의 빈 시간을 활용 중이었다. 그녀의 자수 솜씨는 꽤 발전했다. 그전에는 손수건 끝부분에 데미안의 이름을 수놓았을 때, 멀리서 보면 그럴듯해도 가까이서 보면 정교함이 떨어졌었다. 그런데 이제는 자세히 들여다봐도 어긋난 부분이 거의 없었다.
‘이번에는 손수건을 보내면서 책도 몇 권 넣어야겠어. 아이가 읽기에 좋은 책이 나왔던데.’
북부에서 데미안을 처음 봤던 날로부터 거의 1년이었다.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니까 1년 사이에 얼마나 많이 자랐을지 궁금했다. 데미안을 언제쯤 수도로 불러올 수 있을까. 무정한 아이 아버지는 루시아가 묻지 않으면 먼저 데미안 이야기를 꺼내는 적이 없었다.
‘티파티는 잘 관계를 만들면 여론 형성에 유리하니까. 데미안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해야지. 그 아이의 위치는 배척받을 수밖에 없어. 내가 편을 만들어둬야 해.’
사람 만나기가 버겁다고 피할 일이 아니었다. 루시아는 수를 놓으면서 한 아이의 어머니가 지녀야 할 책임감을 다졌다.
“마님.”
제롬이 기척을 내며 들어와서 말을 붙였다.
“주인님께서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오늘 귀가가 예상보다 이를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저녁 식사 시간보다는 조금 늦겠으나 함께 저녁을 들자고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래요?”
어제 그는 오늘 늦을 것 같다고 말했다. 예상치 못하게 일찍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루시아는 기분이 좋아졌다. 얼굴에 화색이 도는 마님을 보며 제롬은 고개를 돌려 웃음을 흘렸다.
고용인을 개의치 않는 주인 부부의 애정 행각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주로 주인님에게 마님이 휘말렸으나 마님도 이전처럼 적극적으로 싫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주인 부부의 충만한 애정은 은근히 고용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오늘도 하녀의 사직서를 받았다. 결혼을 한단다. 벌써 세 명째였다.
“제롬, 요즘도 내게 파티 초대장이 오지요?”
“예, 마님. 갈수록 많아지고 있습니다.”
“무도회나 규모 큰 모임은 빼고. 소규모 티파티 위주로 초대장을 추려줘요.”
‘예, 마님.’ 하고 대답한 제롬은 루시아가 수를 놓는 손수건에 시선을 고정했다. 주인이 항상 상의 안쪽에 넣어 다니는 꽃 자수 손수건이 떠올랐다. 거추장스러운 걸 질색해서 생전 손수건은 지니지 않던 분이었다.
주인의 변화는 정말 놀라웠다. 제롬은 가끔 가물가물한 주인의 옛 모습을 애써 떠올리곤 했다. 주인은 사나운 맹수에서 길들인 짐승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이상하게 보기 좋았다.
과거에 공작이 박한 주인이었다는 건 아니다. 지극히 합리적인 분이라서 괜한 꼬투리 잡는 일은 없었다. 단지 가끔, 제롬의 예민함이 주인이 은연중에 뿜어내는 살기를 잡아내곤 했다.
단 한 번도 무서운 모습을 접한 적이 없음에도 오싹함을 느꼈다. 사냥을 다녀오실 때 가장 심했고, 아주 드물게 평소에 꾹 눌러둔 뭔가가 흘러나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그러나 반년 가까이 주인에게서 그런 것을 느끼지 못했다. 과하게 표현한다면 ‘사람’이라는 거죽을 뒤집어쓰고 있던 주인이 진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마님, 주인님께도 수놓은 손수건을 선물해 드림이 어떠신지요?”
“내가 쓰는 실은 굵어서 실크 손수건에 수놓으면 망가질 거예요.”
“실크가 아니라 면 손수건에…….”
“제롬, 어른 남자가 이걸 어떻게 지니고 다녀요.”
쿡쿡 웃는 마님을 보는 제롬의 표정이 묘했다. 역시 마님은 모르고 계셨다. 시중은 고용인들이 다 맡아 하니까 모르는 것이 당연하지만.
“가지고 다니시지 않아도 마님의 선물에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음……. 부끄러운 솜씨인데……. 그럼 그이 이름자를 넣어서 만들어 봐야겠네요.”
제롬은 싱긋 웃었다. 주인 마음을 읽는 위대한 집사. 집사를 천직으로 타고난 그자의 이름은 제롬이었다.
저녁 식사 시간보다 조금 늦게 휴고가 귀가했고, 따로 보고할 일이 있는 파비안도 따라왔다. 파비안은 오랜만에 제롬 얼굴도 볼 겸, 간만에 형제끼리 밥이나 먹을 생각이었다.
휴고는 들어서자마자 자신을 마중하러 나온 많은 사람 중에서 반가운 유일한 한 사람. 아내의 허리를 팔로 감아 품으로 당기면서 가벼운 키스로 인사를 나누었다.
“다녀왔어.”
“다녀오셨어요.”
고용인들 앞에서 이러는 게 편치 않지만, 아주 싫지도 않은 그런 미묘한 감정으로 루시아의 안색은 발그레했다.
“저녁은?”
“아직이요. 기다리라고 사람 보내셨잖아요.”
“배고프면 먼저 먹지.”
“그렇게 고프지는 않아요.”
휴고는 제롬을 돌아보며 물었다.
“식사 준비는 멀었나?”
“바로 식당으로 가시면 됩니다.”
주인 부부가 식당으로 들어가면서 모여있던 고용인들이 제 할 일을 찾아 흩어졌다. 다들 이제 그러려니 하는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고용인들은 부부라면 당연히 저런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좀 나이가 있는 고용인들은 경험상 냉랭한 주인 부부 사이가 얼마나 집안 분위기를 아슬아슬 불안하게 만드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차라리 아주 좋다고 생각했다.
모두 만족하는 상황에서 그렇지 못한 사람이 하나 있었다.
“뭐 하냐? 너.”
입을 쩍 벌리고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파비안을 보며 제롬이 혀를 찼다.
“…내가 이제는 헛것이 보이나 봐.”
“식사 시중들고 올 동안 기다려. 내 업무실에서 기다리든지, 먼저 저녁을 먹든지 좋을 대로 하고.”
파비안은 식당으로 가려는 제롬을 붙들었다.
“매일 저러셔? 매일 저런 닭살 돋는 짓을 하신단 말이야? 어째 아무도 놀라지도 않아?”
“뭐, 이제는 익숙해서.”
말세가 도래하고 있어. 세상이 망할 징조야. 어두운 기운에 잠겨 중얼거리는 파비안을 한심하게 한 번 보고 제롬은 식당으로 향했다.
저녁을 먹고 산책하다가 루시아는 앙뜨와 새로운 드레스 제작 계약을 체결했다고 말했다. 그는 아무 말이 없었지만, 슬쩍 살핀 표정이 영 마땅치 않아 하는 것 같았다.
“전 앙뜨의 드레스가 마음에 들어요. 앞으로도 계속 앙뜨에게 의뢰할 생각이에요.”
“알아서 해.”
“그러니까 당신이 앙뜨와 따로 계약하면 안 돼요.”
“…무슨 계약?”
루시아는 그가 앙뜨와 뭔가 계약을 했다고 추측만 하고 있었다. 대관식 드레스 비용이 지나치게 저렴해서 이상하다고 생각만 했다. 그런데 앙뜨에게 ‘나와 하는 계약’이라고 말을 덧붙이자 앙뜨가 보인 반응으로 짐작했다. 앙뜨와 남편 사이에 자신이 모르는 계약이 있었다는 사실을. 그래서 슬쩍 남편을 찔렀더니 그도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 짐작이 확신으로 굳었다.
“앙뜨하고 지난 계약에 대해서 많은 얘기를 했어요.”
“…….”
루시아의 두루뭉술한 말은 휴고의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 앙뜨가 계약에 대해 아내에게 모두 토설했구나! 앙뜨가 알았다면 억울해서 가슴을 칠 일이었다.
앙뜨는 그 정도로 상식과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아무리 루시아가 추궁해도 이중계약서와 대관식 드레스의 백지 수표에 대해서는 입을 꾹 다물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이중 계약서는 앞으로 그렇게 하겠다는 말이 나왔을 뿐이고 시행하기도 전에 공작이 계약 해지를 선언했다. 실질적 이득은 백지 수표밖에 없었다.
“당신이 지나치게 돈 문제로 걱정하지 않기를 바랐어.”
휴고는 입 싼 디자이너에게 앙심을 품었다. 무력 못지않게 지략에 능하다는 타란 공작은 어설픈 유도 신문에 홀랑 넘어가 버렸다.
“앞으로 그 문제로 민감하게 굴지 않을게요. 당신도 다른 사람은 알고 저만 모르는 일 만들지 마요. 사실을 알았을 때 훨씬 더 속상할 거예요.”
“알았어. 안 그럴게.”
루시아가 걸음을 멈추자 휴고도 멈추었다. 의문을 갖는 그의 눈을 보며 루시아는 두 팔 벌려 그를 끌어안았다. 자신에게만 온순한 남편이 사랑스럽고 고마웠다. 그의 팔이 등 뒤에서 마주 안아주는 것을 느끼며 루시아는 눈이 시큰했다. 지금이 영원했으면 좋겠다.
제롬의 업무실 창가 소파에 앉아 턱을 괴고 창을 통해 뜰을 내다보는 파비안의 표정이 퀭했다. 밖은 어두웠으나 저 멀리 끌어안고 있는 한 쌍의 실루엣을 확인하기에는 충분했다. 파비안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대체 산책은 언제까지 하시는 거야. 이러다 날이 새겠어.”
얼른 보고하고 집에 가고 싶었다. 누구는 아내 없고 자식 없나.
“넌 아까부터 뭐가 그리 불만이야.”
제롬은 책상에 앉아 일을 처리하면서 계속 퉁퉁거리는 파비안을 보다 못해 한마디 했다.
“내버려둬. 난 지금 충격에서 벗어나려고 노력 중이니까.”
식사가 끝난 후 두 분이 다정히 손 붙잡고 산책하러 나가는 모습을 보고 파비안의 입은 또 한 번 벌어졌다.
“두 분 금실이 좋으면 마땅히 기뻐할 일이지. 넌 매사 삐딱한 게 문제야.”
“삐딱하니까 저분 밑에서 일하는 거라고! 얼마나 사람을 굴려대는지 네가……! …됐다. 너한테 무슨 말을 하겠냐. 노예 자식. 넌 어디 가서 우리 부모님 아들이라고 하지 마.”
제롬은 투덜거리는 파비안을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창밖을 멍하게 보던 파비안이 갑자기 울컥해서 몸을 홱 돌려 소리쳤다.
“넌 몰라서 그래! 저분이 어떤 분인지 알아? 네가 내가 본 걸 봤으면 이렇게 태연하지 못하다고!”
파비안은 처음으로 자신의 기억 속 주군의 모습을 형제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뭐. 대체 뭐가 문제인데? 넌 네가 아는 주군 모습이 좋아?”
“…그렇다기보다는. 걱정돼서 그러지.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탈이 난다는 말이 괜히 있는 줄 아냐.”
“쓸데없는 걱정 사서 하지 마. 넌 말이나 조심해. 없는 사달도 만드는 입이니까.”
파비안은 냉정하게 잘라내는 형제를 원망스럽게 곁눈질하며 입안으로 구시렁거렸다.
파비안은 그간 밀착 감시를 통해 작성한 표적 ‘데이빗 라미스’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오랜 고생 끝의 결실이었다.
보고서의 도입 부분은 표적에 대한 신상 정보로 나이, 가족 관계, 친구 등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사항들이었다. 휴고는 대충 훑어보며 넘겼다.
“표적의 성격이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었습니다. 호인이라고 평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속이 좁고 교활하다고 평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세간의 평이 극단적이었다. 어울리는 귀족들이 평가한 데이빗은 괜찮은 사람이었으나, 힘없는 귀족이나 고용인 등 신분 낮은 사람들은 데이빗에 대해서 대부분 악평을 남겼다. 속과 겉이 다른 인간을 하도 많이 봐서 휴고는 별로 놀랍지 않았다.
휴고는 보고서 내용에서 데이빗과 관련한 의혹 부분을 읽었다. 데이빗이 수년 전 하녀를 건드려서 하녀가 임신했다고 주장한 내용이었다. 공식적으로 그 하녀는 보상을 받아 챙겨 일을 그만두고 떠났다고 되어있었다. 그러나 비공식적인 진실은 달랐다.
“이 하녀가 죽었을 거라고 주장하는 자가 있다는 말이지?”
“예. 당시 함께 일했던 친하게 지낸 하녀 말로는 떠난다는 말도 없이 갑자기 사라졌다고 합니다. 인사를 남기지 않고 떠날 사람이 아니라면서 사라지기 며칠 전부터 이상하게 불안해 보였고, 자는 척하면서 우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하녀 행적은?”
“오래된 일이라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고향을 찾아가 봤으나 가족들도 소식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증거는 없고 정황뿐이군.”
공작가 후계가 하녀를 죽였다는 사실이 밝혀져봤자 처벌하기는커녕 타격을 주기도 어려웠다. 다만, 이런 사건들은 당사자의 성품을 파악하는 데에 아주 중요했다. 데이빗은 생각보다 위험한 짓을 할 수 있는 자였다. 귀족이 고용인을 학대하거나 처벌을 빙자해서 죽이는 일은 드물지 않게 일어났다. 그러나 죄를 뒤집어씌울지언정 어쨌든 죽였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과, 겉과 다른 사실로 위장해 남모르게 죽이는 것은 달랐다.
“하녀 일로 표적의 부친이 노여워했다고 합니다. 그 후 저택 내 하녀를 손대는 일은 없었습니다.”
“제 버릇 개는 못 주지. 그래서 간 곳이 집창촌인가.”
휴고는 보고서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 정도 신분이면 몸 던지는 여자가 많을 텐데.”
“같이 밤을 보낸 창기를 수소문해 알아봤는데, 가학적인 취미를 보였다고 했습니다. 철저하게 굴종하는 자세를 보이는 상대를 제 맘대로 다루는 것을 좋아했다고 했습니다. 귀족 여인을 대상으로 그런 취미를 충족하기는 어렵지 않나 싶습니다.”
휴고는 좀 짜증이 났다. 왜 이런 변태적인 새끼의 침대 생활까지 알아야 하는 건가. 이 한심한 놈을 조사까지 해가며 경계할 필요가 있는지 회의가 들었다.
데이빗의 개인적 신상에 대해서는 그 정도로 넘어가고 휴고는 근래 데이빗이 열정적으로 사람을 모아 만든 모임을 보고 피식 웃었다.
“신국청년회? 미친놈.”
신국(新國)이라는 말을 붙이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모르는 건가. 얼핏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한 역도들이라는 의혹을 주기 충분한 단체명이었다. 어느 정도 수준이나 되어야 말이라도 섞지. 어디 모자란 건 아닌지 지능이 의심되는 녀석이었다.
“겉으로 내세운 목적은 젊은 인재를 모으겠다는 거군. 정말 딴마음 품고 만든 단체던가?”
“딴마음이라기보다는 본래 목적에 충실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냥 젊은 인재가 아니라 자신을 추종하는 애송이들을 모았습니다.”
“한심한 놈들만 모여있겠군.”
쓰레기는 아무리 모아봐야 쓰레기. 이름만 거창하게 내세워 이런 단체 만들어봤자 휴고는 전혀 신경 쓸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회원 중에 눈여겨봐야 할 몇 명이 있었습니다. 회장으로는 표적을 추대해서 세워놓고 단체의 회칙이나 활동 방향을 실질적으로 주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별책으로 작성했습니다.”
휴고는 옆의 별책을 들어 내용을 넘겼다. 데이빗에 대한 내용을 볼 때는 ‘이런 병신.’ 하며 비웃는 표정으로 얼마간 지루함을 표하던 휴고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위험분자들이 여기 숨어있었다.
권력의 가장 큰 두 대립 세력은 왕과 귀족이었다. 왕은 왕권 강화를 외치고, 귀족은 사병 확대와 영지의 자율권 보장을 외친다. 그런데 영지도, 작위도 갖지 못한 귀족들 중에 제3의 세력을 꿈꾸는 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주로 학자 등 지식인들이며, 전문 지식인에 의한 국가 경영을 주장했다. 그들은 제도 도입을 통해서, 왕과 고위 귀족들이 모여 국정을 논의하는 방식을 철폐하고 법을 만들어 법으로 선출한 대신들이 나라를 경영해야 한다고 말했다. 왕이라 해도 법에 따라야 한다며 법치주의를 내세웠다.
아직 그들의 세력은 미미했고 그들의 주장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휴고는 알고 있었다. 이들의 주장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힘을 얻고,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할 것이다. 휴고가 공작위에 오르고 들어간 가문 비밀의 방에서 얻은 지식이었다.
아득히 먼 옛날, 마도 제국이 세상을 지배할 때 보통의 인간들이 보기에 귀족은 괴물처럼 강했으나 귀족끼리는 비슷한 힘을 가진 인간이었다. 그들은 마법적 힘을 사용한다는 점을 제외하면 지금 인간이 만들어가는 세상과 비슷한 단계를 밟아 발전해 나갔다. 귀족끼리도 계급을 나누어 서로 차별했고, 더 가진 자와 덜 가진 자가 있었다. 서로 더 가지려고, 주도권을 잡으려고 싸우는 건 지금 인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실질적 권력은 없으나 지식으로 무장한 제3 세력의 등장은 마도 제국에서도 일어났다. 이들의 주장 중 일부는 귀족을 누르고 싶어 하는 왕의 입맛에 맞았다.
왕이 이들을 기용하기 시작하면 왕을 등에 업고 성장하다가 언젠가는 왕과 결별하고 자신들만의 세력을 만들어갈 것이다. 그때가 되면 누구도 무시할 수 없으리라. 다수의 지지를 받는 새로운 세력의 부상은 상대적으로 왕권은 물론이고 기존 귀족들의 권리도 약화시켰다.
가문 비밀의 방의 지식은 타란 가문 가주들이 세상을 넓게 조망할 힘을 주었다. 대충 세상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은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세상의 흐름은 막을 수 없다. 하지만 인위적으로 늦출 수는 있었다.
‘빠른 발전은 곤란하지.’
타란의 가주들은 절대 가문의 지식을 이용해서 세상의 발전을 꾀하지 않았다. 타란이 북부의 주인으로 남아 있으려면 발전은 곤란했다. 적당히 강한 왕권으로 다스리는 왕국이 이상적이었다.
인간 세상은 혼란할수록 발전한다. 타란 가문이 나라의 문제가 생길 때마다 나서서 처리해 주고 북부가 살기 좋도록 유지하는 건 괜한 짓이 아니었다. 현재에 만족하는 인간들은 변화를 꾀하지 않으니까.
과거의 휴고라면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최소한 휴고 자신이 죽기 전까지 타란은 건재해야 하고, 이어받은 데미안도 무난히 가문의 부와 권력을 누리기를 바랐다.
“이자들에 대해 더 알아봐.”
“예. 그리고 표적에 대해 아셔야 하는 사항이 더 있습니다. 보고서 마지막 장입니다.”
다시 데이빗에 대한 보고서를 들어서 넘겨본 휴고의 표정이 묘해졌다.
“제 아들에게 사람을 붙였어?”
“예. 단순히 뒤를 밟는 정도가 아니라 조사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들이 저희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하게 신중을 기했습니다.”
휴고는 생각에 잠겼다. 라미스 공작의 의중을 추론해 보았다.
‘큰아들을 마땅치 않아 하는군. 후계 구도까지 바꿀 생각인지도 모르지.’
잘하면 가만둬도 알아서 치워줄 것 같다.
“표적에 대한 감시는 계속합니까?”
“모두 철수하지는 말고 눈에 띄는 행적이 보이면 보고해.”
“예, 전하.”
“수고가 많았다. 그리고 이 물건을 수소문해 보도록.”
파비안은 공작이 건네주는 종이를 받았다. 종이에 스케치되어 있는 그림을 요모조모 살펴보고서 펜던트라는 것을 알았다. 흔한 원형 모양 펜던트와 다른 특이한 형태였다.
휴고는 루시아가 모르게 백작을 한 번 만났다. 내세운 만남의 목적은 게이트였다. 언제든지 수도에 오시려면 게이트를 이용할 수 있도록 조치하겠다고 말을 전하면서 펜던트에 관해 물었다.
‘골동품에 관심이 있습니까?’
백작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안사람에게 귀한 물건인 듯해서 찾아볼까 합니다.’
백작은 껄껄 웃고는 형태를 상세하게 설명해 주며 그림까지 그려주었다.
휴고는 물건을 수소문해서 아내에게 깜짝 선물로 줄 생각이었다. 그녀는 어머니를 많이 그리워하고 있으니까 선물을 받으면 무척 좋아할 것이다. 기뻐할 모습을 생각하면 벌써 기분이 좋았다.
“소유주가 있다면 알아오면 됩니까?”
“아니.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내게 가져와. 중간 과정은 보고할 필요 없다.”
파비안은 대답하면서 다시 한 번 펜던트 그림을 보았다. 주군 입에서 수단 방법이라는 말까지 나오는 것을 보면 대단한 귀물인가 보다.
‘마도구인가? 타국의 국보라면 빼내기 좀 성가시겠군.’
* * *
데이빗은 라미스 공작의 부름을 받아 집무실로 들어갔다. 가벼운 마음이었던 데이빗은 갑자기 안면으로 날아드는 것을 피할 겨를이 없었다.
“대체 뭘 하고 다니는 게야!”
부친의 노성을 들으면서 데이빗은 제 얼굴을 치고 떨어진 서류 뭉치들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크게 아픈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꾸중을 듣는 일이 처음이라 충격이었다.
“누가 너더러 이런 짓 하라 했느냐!”
데이빗은 몸을 숙여서 바닥에 흩어진 서류 한 장을 집었다. 눈에 익은 이름이 쭉 나열된 명단이었다. 데이빗이 만든 신국청년회 회원들 이름이었다. 아버지가 이 모임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건 둘째 치고 왜 이렇게 화를 내시는 걸까. 데이빗은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일그러진 주름이 가득한 부친의 추한 얼굴이 역겨웠다. 꾹 눌러놓았던 반감이 배 속에서 꿈틀거렸다. 데이빗은 서류로 얻어맞은 모멸감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고개를 떨어뜨리고 이를 악물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아버지.”
무조건 빌었다.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알지 못하는 잘못의 용서를 구했다.
“대체 왜 이리 경솔한 게야.”
무조건 비는 작전은 언제나 통했다. 부친의 음성에 담긴 노여움이 한결 누그러졌다. 슬쩍 고개를 들자 부친은 긴 한숨을 내쉬며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었다. 데이빗은 떨어진 서류 몇 장을 더 주웠다. 자신이 만든 청년회에 대한 정보들이었다. 회원 명단은 물론이고 회칙도 있었다.
‘뭐가 문제인 거야?’
데이빗은 아버지가 노여워하는 이유를 알 수 없으나 모른다고 하면 더 큰 야단을 들을 터라 묵묵히 서류를 주워 모았다. 다 주워 정리해서 부친의 책상 위로 올려놓고 뒤로 물러나 고개를 숙였다. 반성하는 아들의 모습이었다.
“마음 맞는 친우들과 모임을 만든 일로 이렇게 아버지 심려를 끼칠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생각이 부족했습니다.”
“마음 맞는 친구? 사람들 끌어모아 머리 노릇 하는 짓이 말이냐?”
‘그게 뭘 어쨌다고.’
아버지가 왜 이 난리인지 모르겠다. 데이빗은 자신이 장차 아버지의 뒤를 이어 라미스 공작가의 주인이 되어 많은 사람을 지배할 위치에 올라설 것을, 왕의 곁에 나란히 서서 국가 중대사를 논하는 핵심 인물이 될 미래를 의심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항상 데이빗에게 자만심을 낮추고 아래에서 위를 보라고 했다. 부친의 노파심을 이해할 수 없었다. 데이빗에게는 아래로 내려다볼 자들이 개미처럼 많았다. 위에 서서 다스리는 연습을 미리 한다고 뭐가 문제인가.
그러나 데이빗은 절대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항상 말씀하신 대로 많은 친구를 사귀려고 노력했습니다.”
“데이빗.”
라미스 공작은 한숨을 쉬었다. 겉으로는 잘못했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반항하는 아들의 의뭉스러운 짓을 어느 정도는 눈치챘다. 그래도 나무라면 고치려는 태도를 보여서 그걸 위안으로 삼았다. 공작은 아들이 세상을 내려다보는 것보다 멀리 보기를 바랐다.
아들의 나이 이제 겨우 스물 중반이었다. 경험도 지식도 부족한 어린 나이였다. 같은 나이에 이미 일가의 주인으로 부족함이 없는 타란 공작 같은 인물은 세기에 날까 말까 하는 난사람이었다. 천재를 일반인과 같은 범주에 두고 경쟁하려 해서는 안 된다. 천재는 천재 자신이 가는 길을 가도록 놔두고 저런 존재도 있구나, 생각하고 넘겨야 한다.
그런데 아들이 자꾸 타란 공작에게 치기 어린 경쟁심을 보이는 것 같아서 공작은 그것도 걱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