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시아-50화 (51/77)

50장 사랑합니다 (2)

공작은 가능하면 큰아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다. 적장자가 가문을 이어 받는 것이 순리에 맞았다. 선례가 되고 분란의 여지가 가장 적었다. 그래서 큰아들에게서 자꾸 미덥지 못한 모습을 발견해도 어지간하면 넘어갔다.

“네가 만든 모임이 얼마나 큰 분란의 씨앗이 될 수 있는지 정녕 모르겠느냐. 신국이라니. 어떻게 그런 무도한 이름을 붙여.”

데이빗은 입술을 짓이기듯 물었다.

‘그거 때문이었군.’

데이빗도 그 이름이 껄끄럽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청년회 부회장으로 있는 해리 경이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세상의 모든 단어는 해석하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정반대의 뜻을 가질 수 있습니다. 신국. 새 왕께서 즉위하시어 새로운 치세를 열어가는 뜻에 부합하는 이름이 아닙니까. 폐하께서 승하하신 선왕과 그리 좋은 관계가 아니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선왕의 그림자를 덮는 완전히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를 원하실 겁니다.’

설명을 들어보니까 매우 그럴듯했다.

“…내부적으로만 쓰는 명칭입니다. 외부로는 청년회라고만 칭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조사하면 다 알 일을. 회칙을 만들고 회칙에서는 신국청년회로 칭하고 있지 않았느냐.”

‘말씀의 뜻은 절 조사했다는 거군요.’

데이빗은 충격과 동시에 배신감을 느꼈다. 아버지가 자신의 뒤를 캤다니.

“죄송합니다, 아버지. 단지 폐하께서 새 치세를 열어가시는 데 보탬이 되고자 하는 뜻이었습니다.”

“속뜻이 아무리 좋아도 빌미를 만들지 않는 편이 낫다. 사방이 낭떠러지라서 매사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하는 곳이 정치판이라고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더냐.”

“예, 아버지. 말씀 깊이 새기겠습니다.”

“폐하에 대한 반 세력이 항상 틈을 노리고 있다. 폐하께서 널 오해하실 수도 있어.”

데이빗은 부친이 안 해도 될 걱정을 한다고 생각했다. 왕이 왜 오해를 한단 말인가. 라미스 공작가 같은 충성스러운 가문을 믿지 않으면 곁에 누가 있어서 왕을 보좌하겠는가. 아버지는 왕의 장인이며, 누님은 왕비였다. 조카는 장차 왕위에 오를 것이다. 라미스 공작가는 완벽히 왕의 편이었다.

“예, 아버지. 더 행동을 조심하겠습니다. 모임은 제가 책임지고 해체하겠습니다.”

“그래. 네가 말을 잘 알아들으니 안심이다. 당분간 영지로 내려가 있어라.”

“예? 아버지!”

“자중하는 모습을 보여야지. 내가 알았으니 누군가 또 아는 사람이 있을 터. 오래 안 걸린다. 1~2년 마음 수양한다고 생각하고 지내라.”

데이빗의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버지를 거역할 수 없었다. 아직 아버지와 비교해서 그는 철저한 약자였다.

“…언제 가라는 말씀입니까.”

“이달 안으로 떠날 차비를 해라.”

“예.”

고개를 꾸벅 숙이고 나가는 데이빗은 뒤에서 아버지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두 녀석을 반씩 섞으면 좋으련만. 로빈은 순하기만 하니…….”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를 앙다물어 턱이 팽팽하게 조여들었다. 눈에서 불똥이 튀고 속에서 울컥 울화가 치밀었다. 도저히 표정을 갈무리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데이빗은 부친이 혹시라도 불러 세울까 봐 서둘러 집무실을 나왔다.

‘로빈…….’

복도를 걸어가며 데이빗은 이를 빠득 갈았다.

‘제가 모르는 줄 아시겠지요, 아버지.’

공작가의 적통인 것처럼 가증스럽게 둘째 아들 자리를 지키고 있는 아우가 사실은 밖에서 들여온 자식이라는 비밀을 데이빗은 알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는 유난히 데이빗만 싸고돌았다. 그저 장남에 대한 과도한 애정인 줄 알았다. 어머니는 누님에게도 그리 애정을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조금 동생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기도 했다. 어릴 때 뭘 몰라 잠시 가졌던 마음이었다.

데이빗의 열다섯 살 생일에 저택에서 성대한 사교계 데뷔 파티를 열었다. 그날 밤 평소 그런 적 없는 어머니가 잔뜩 취해서 데이빗의 침실을 찾아왔다. 어머니는 울면서 진실을 털어놓았다.

‘데이빗, 내 아들. 이 어미는 그 애를 볼 때마다 속이 찢기는 것 같았단다.’

로빈은 아버지가 사랑한 다른 여자에게서 본 자식이었다. 사생아임을 드러내고 입적해 키우는 다른 집과 달리 로빈을 진짜 공작부인의 아들인 것처럼 키우도록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요구했다고 들었다.

‘너보다 두 살 어리다고 되어있으나 사실 너보다 몇 개월 늦게 태어났어. 내가 널 품고 있을 때 그 계집도 아이를 품고 있었던 거야. 그걸 알았을 때 이 어미의 처참한 심정을 알겠니?’

로빈의 친모는 아이를 낳고 죽었고 라미스 공작은 로빈을 데리고 왔다. 그리고 아내에게 아들로 키워달라고 요구했다. 로빈은 일곱 살 때까지 외가에서 자랐다. 몸이 약해서 그랬다는데 진실은 따로 있었다.

공작부인은 그 후 한 달에 두세 번은 술을 마시고 데이빗을 찾아와 신세 한탄을 늘어놓았다. 데이빗은 어머니의 가슴에 그렇게 많은 한이 있었는지 몰랐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 어머니가 가여웠다. 다른 여자가 낳은 아들을 제 아들인 것처럼 키우며 속이 문드러졌을 어머니가 마음 아팠다.

아버지가 미웠고, 배다른 동생인지도 모르고 로빈을 스스럼없이 대하는 누님이 원망스러웠다. 로빈에게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언제나 그러셨지. 아버지의 날 보는 눈과 그놈 보는 눈과 달랐어.’

아버지는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질책만 하면서 로빈을 바라보면서는 흐뭇하게 웃었다. 데이빗의 가슴속에서 분노는 점점 자라고 있었다.

어머니는 왕비가 된 누님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데이빗은 그것도 가슴 아팠다. 비록 어머니와 누님의 사이가 데면데면했으나, 그래도 어머니는 누님이 태자비가 된 것을 은근히 자랑스러워했다.

데이빗은 언젠가 부친이 돌아가시고 공작위 자리에 오르는 날.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로빈, 반드시 네 녀석 목을 내 어머니 영전에 바쳐 어머니 한을 풀어드리고 말겠다.’

데이빗은 청년회 해체를 논의할 겸, 술로 심란한 마음을 달랠 겸 부회장 해리 경과 함께 주점으로 갔다. 고객의 비밀 보존을 위한 개별 방으로 꾸며진 고급 주점이었다.

“이대로 해체는 무척 안타깝습니다. 이제 겨우 자리 잡아가고 있는데 말입니다, 라미스 경.”

“어쩔 수 없소. 아버지께서 저리 난리이시니. 나는 수도를 떠나야 하고.”

“그러면 제게 일임해 주시면 겉으로는 라미스 경과 무관하게 모임을 이어 가겠습니다. 라미스 경이 수도를 잠시 떠나계신 동안에 더욱 기반을 공고히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미래를 위해 숨겨둔 힘을 만들어 두셔야지요.”

데이빗은 귀가 솔깃했다. 해리 경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겨우 만든 모임을 이대로 버리기는 아까웠다.

“그럼 해리 경에게 맡기겠소. 지원은 해줄 테니 부디 내 힘이 되어주시오. 해리 경 같은 인재를 곁에 두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오.”

“과찬의 말씀입니다. 저는 장차 라미스 경을 모시고 중대한 일을 하시는 데 보탬이 되고 싶습니다.”

데이빗은 기분 좋게 웃으며 해리의 어깨를 두드렸다.

해리는 황송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속으로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어디 가도 이런 물주를 찾을 수 없었다. 공작가 후계라는 큰 이름에 숨어서 세력을 키우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은 없었다.

데이빗은 멍청하지는 않으나 기본적으로 누가 제 위에 있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똑똑한 자가 머리를 숙이면 아주 좋아했다. 그 점을 파고들어 기분만 잘 맞춰주면 다루기 쉬웠다.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아무래도 아버지가 괜히 내 뒷조사했을 것 같지 않소. 분명히 누군가의 음해가 있었을 거요.”

“타당한 말씀입니다. 짐작 가는 곳이라도 있는지요?”

“아무리 생각해도 타란 공작밖에 없소. 그자가 그전부터 날 은근히 경계하고 있었지.”

타란 공작이 미쳤다고 공작가 후계에 불과한 애송이를 상대로 날을 세울까. 해리는 데이빗의 근거 없는 자만심을 비웃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열심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해리의 위로와 칭송을 들으며 데이빗의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슬슬 자리를 파하고 일어날 때쯤 직원이 데이빗에게 메모를 전달했다.

‘주점 주인이 왜 날 보자는 거지?’

데이빗은 해리를 보내고 잠시 기다렸다. 방이 열리고 들어오는 사람을 보며 데이빗의 눈이 커졌다. 뜻밖에 매혹적인 젊은 미인이었다. 말려 올라간 입꼬리로 여자는 데이빗을 향해 사르르 웃었다.

“고명하신 분을 이리 뵈어 영광입니다. 아니타라고 합니다.”

* * *

루시아는 하녀가 깨우는 소리에 부스스 일어났다. 아직 어둑어둑했다. 어제 하녀에게 남편이 나가기 전에 깨워달라고 일러놓았다. 루시아는 기지개를 켜며 힘겹게 잠을 몰아내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매일 이런 꼭두새벽에 일어나는 그가 참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고 잠에서 깨려고 차가운 물을 한 잔 마셨다.

“그이는 침실에 계시니?”

“집무실에 들어 계십니다. 한 시간쯤 후 출타하실 예정이라서 마차를 준비 중입니다.”

루시아는 제롬에게서 집무실로 들이려는 차 쟁반을 넘겨받았다.

“집사 일을 빼앗아 미안해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마님.”

문을 두드릴 필요 없이 그냥 들어가면 된다는 제롬 말에 따라서 루시아는 조용히 집무실로 들어갔다. 서늘한 공기, 그리고 코끝을 스치는 옅은 고가구 냄새. 문에서 대각선 방향으로 널찍한 책상이 있고 책상에 앉아 일에 골몰한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루시아는 그를 조금 더 자세히 볼 수 있는 거리에서 멈추어 섰다.

조용한 집무실에서 들리는 소음이라고는 종이를 넘기는 작은 소리뿐이었다. 널찍한 책상 위에는 한 틈의 공간도 용납하지 않는 것처럼 빼곡하게 이것저것 널려있었다. 마구잡이로 어지럽지 않게 서류와 책 등이 나름대로 질서를 갖추어 즐비했다. 여유 공간이라고는 그가 앉은 앞자리에서 일을 처리하기 위한 너비 정도로 얼마 되지 않았다.

루시아는 그가 일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이렇게 차를 가지고 집무실에 들어온 것도 처음이었다. 북부에서 지낼 때는 그의 집무실에 남들이 봐서는 곤란할 기밀 서류들이 잔뜩 있을 테니까 그런 걸 보기 위해서 드나든다는 의심을 주고 싶지 않았고, 혹시 그를 방해할까 봐 염려해서 집무실 근처는 가지 않았다.

집중해서 일하는 그의 모습은 정말 근사했다. 루시아는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그녀의 얼굴이 홍조를 띠었다.

집중해서 하는 일을 방해하기가 무척 미안했다. 가만히 서서 그를 보기만 해도 좋았다. 멀찍이 싱그러운 새소리가 들리는 고요한 아침의 평화로움이 좋아서. 루시아는 우두커니 서서 그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휴고는 어떤 일에 집중하더라도 사람이 다가오는 기척에는 항상 민감했다. 어릴 때의 처절한 삶, 그리고 전쟁터에서의 생활이 그에게 주변을 항상 경계하라고 가르쳤다.

언제나처럼 제롬이려니 생각하고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들어온 기척이 있으나 다가오는 기색이 없었다. 의아해서 고개를 들었다가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시선이 마주친 그녀가 멋쩍은 듯 배시시 웃었다.

“…비비안?”

그녀를 볼 수 있다고 기대하기 어려운 시간과 장소였다.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오는 그녀는 분명히 현실이었다. 휴고는 펜을 쥔 자세 그대로 차 쟁반을 책상에 내려놓는 그녀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제가 방해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어요.”

루시아는 찻주전자를 들어 차를 따랐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찻잔을 그의 손이 닿을 위치에 내려놓았다.

“아니야.”

휴고는 재빠르게 대답했다.

“잠시 드릴 말씀이 있어요.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오래 걸려도 괜찮은데. 휴고는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머릿속에서 조금 전까지 골치 아프게 구상하던 복잡한 일들이 훅 불어온 바람에 날아간 것처럼 사라졌다. 다시 생각의 고리를 만들려면 다소 성가시겠으나 상관없었다.

“오늘 당신 생일이에요.”

“…생일……?”

뜬금없는 소리를 듣는다는 그의 표정으로 루시아는 역시 그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짐작을 확신으로 굳혔다.

“집사는 당신이 생일을 챙기지 않는다고 했어요. 어쩌면 당신은 기억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생일. 휴고는 살면서 그것에 의미를 둔 적이 없었다. 어릴 때는 제 생일이 언제인지 몰랐고 로암에 와서는 형제의 생일을 알면서 쌍둥이니까 생일도 같겠다고 판단해서 비로소 태어난 날을 알았다.

쌍둥이 형제 대신 소공자 노릇을 하며 생일상을 받았으나 그건 소공자 휴고의 생일이었다. 진짜 제 생일을 축하한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공작위에 오른 후에는 챙기지 않았다. 누군가 상기시키려 해도 거부했다. 생일로부터 얼마 전이 형제의 기일이었다. 생일보다도 그날이 더 신경 쓰였다. 그래서 생일 같은 건 언제부턴가 아예 잊어버렸다.

“저는 당신 생일을 축하하고 싶어요.”

루시아는 북부에서 결혼 후 처음 맞은 그의 생일을 그냥 지나친 일이 항상 걸렸다. 그가 생일을 챙기지 않는 이유가 그의 비극적인 가족사와 관련되었다고 생각해서 마음이 안 좋았다.

사람이면 누구나 살면서 크든 작든 상처를 입는다. 그는 강한 사람이지만, 강해도 다칠 수 있고, 다치면 아프다.

루시아는 꿈속에서 매우 아팠고, 아픈 것보다 더 힘든 일은 ‘그래, 너 아팠구나.’라고 말하며 위로해 주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루시아는 자신이 그에게 그런 위로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건 제 선물이에요.”

루시아는 차 쟁반에 얹어두었던 작은 상자를 책상에 올려 그를 향해서 밀었다.

휴고는 선물 상자와 그녀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의 몸을 타고 흐르는 피는 저주였다. 그의 생일은 저주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탄생이 축하를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니. 굉장히 낯선 기분이었다.

“안 돼요! 지금 보지 마세요.”

선물로 손을 뻗던 휴고는 그녀의 외침에 멈칫했다.

“나중에요. 저 보는 데서 말고요. 변변치 않은 선물이라… 창피해요.”

제롬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루시아는 면 손수건에 그의 이름자를 넣어 수를 놓았다. 그의 생일 선물을 목적으로 시작한 수놓기가 아니었다. 한 장은 정 없어 보여서 한 장 더 만들고, 둘보다는 셋이 나을 것 같아서 석 장의 손수건을 완성하고 보니까 그의 생일이 다가와 있었다.

“선물에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래도 나중에 보세요.”

생일 선물이라고 하기에는 볼품이 없었다. 루시아는 그가 실망할까 봐 두 볼이 화끈거렸다. 생일 선물이라고 하지 말고 차라리 나중에 의미 없이 그냥 주는 편이 더 낫지 않았을까.

우물쭈물하는 그녀를 보며 휴고는 피식 웃었다.

“알았어. 당신 없을 때 볼게.”

“당신 생일 선물로 뭘 해야 할지 떠오르는 것이 없었어요. 당신 돈으로 당신 선물을 하는 거니까.”

휴고는 그녀의 생각이 재미있어서 웃었다. 가문 안주인에게는 매년 상당한 예산이 책정되고, 그 돈은 엄연히 안주인의 사재였다. 그런데 여전히 그녀는 그 돈을 공금으로만 생각했다.

사실 공금이라는 말은 맞는 표현이었다. 연말까지 남은 예산은 반환함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반환하는 귀부인은 없었다.

안주인이 결혼 생활 중 구매한 보석의 소유권은 안주인에게 있었다. 이혼할 때 보석은 위자료에 포함하지 않고 모두 가져갈 수 있었다. 연말이 되면 보석상이 북적이는 이유는 그래서였다.

그녀는 지난 연말 상당 금액을 반환해서 그를 충격에 빠뜨렸다. 당시에는 이 여자가 내 돈이 싫어서 거부하나 속을 끓였지만, 이제는 그녀가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걸 안다.

“휴,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도록 해준 당신의 생일은 축복받아 마땅해요. 당신께 생일이 의미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휴고는 일어나서 한걸음에 그녀에게 다가가 끌어안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받은 생애 최고의 선물이었다.

“고마워.”

가슴이 벅차올라서 휴고는 그녀를 더 꼭 안았다. 품 안 가득한 따스한 온기는 그의 마음도 따뜻하게 덥혔다. 은은하게 주변을 떠도는 차향과 뒤섞이는 그녀의 향이 좋아서 휴고는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저는 그만 방해하고 나가볼게요.”

“괜찮아.”

자꾸 들러붙는 그를 간신히 떼어내고 루시아는 집무실을 나갔다.

닫히는 집무실 문을 보며 휴고는 몹시 아쉬웠다. 괜찮다고 하는데도 기어코 그녀는 나가버렸다. 조금 전까지 부드럽게 잡혔던 그녀의 느낌을 떠올리며 손을 바라보았다. 매몰찬 여자 같으니라고. 조금이라도 더 안고 싶고 만지고 싶은 건 항상 자신이었다.

그는 긴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다시 일이 손에 잡히려나 모르겠다. 아내는 아침부터 깜짝 등장해서 그를 완전히 흔들어놓고 사라져 버렸다.

오늘 하루가 진짜 길겠다. 한탄하면서 휴고는 몸을 틀어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가 두고 간 선물을 발견했다.

대체 뭐기에 없을 때 보라고 한 걸까. 그녀가 사라진 상실감이 호기심으로 차올라서 그는 조금 기분이 살아났다.

의자에 앉아서 상자를 묶은 리본을 풀었다. 상자를 연 그는 가만히 내용물을 바라보았다. 곱게 접힌 새하얀 손수건이 들어있었다.

상자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손끝에 까칠한 면의 감촉이 익숙했다. 모서리에 수놓인 이름을 한참을 물끄러미 보았다.

휴고는 몸을 숙여 책상 가장 아래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안에 소중히 보관 중인 손수건을 꺼냈다. 조금 서투른 솜씨로 놓인 꽃 자수 손수건. 그리고 그의 이름이 수놓인 손수건. 두 장을 나란히 두었다.

그는 팔짱을 끼고 책상에 두 장 손수건을 펼쳐둔 채 그것들을 한눈에 담았다.

심장이 간질거리는 것 같으면서도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고. 손대면 소스라칠 것 같은 몽글거리는 뭔가를 만진 느낌이었다.

휴고는 자신의 기분을 정의할 수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숨이 가쁜 것도 아닌데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막연하지만 손에 잡힐 것 같은 그런 기분.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인간이 느끼는 감정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단어의 사전적 정의는 알고 있으나 느껴본 적 없는 감정들. 그는 한참을 골라서 그나마 자신의 현재 기분에 거의 유사한 단어를 찾아냈다.

감동. 이런 기분이 감동인가. 사람들은 평소에 이런 기분을 느끼며 사는 건가. 그는 처음으로 보통의 울고 웃는 감정을 누리는 사람이 부러웠다. 이런 기가 막히게 좋은 걸.

문이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휴고는 손수건을 챙겨서 서랍 안에 넣고 대답했다. 제롬이 들어왔다.

“외출하실 준비가 끝났습니다. 마차 앞에서 파비안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하.”

휴고는 잠시 생각하다가 일어났다.

“들어와서 기다리라고 해.”

제롬은 자신을 지나쳐 집무실을 나서는 주인에게 고개 숙여 대답했다. 차 쟁반을 정리하려고 책상으로 다가갔다. 찻잔 가득한 차는 마신 흔적이 없고 찻주전자 뚜껑을 열어보니까 다 식은 차가 남아있었다.

‘차 마실 여유도 없이 일이 바쁘셨나 보군.’

전혀 없던 일은 아니라서 제롬은 대수롭지 않게 차 쟁반을 챙겼다.

루시아는 침실 소파에 앉아 남아도는 시간을 이용해 데미안에게 보낼 손수건에 수를 놓았다. 아침 햇살이 침실 안으로 길게 들어오는 모습으로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시간에 뭔가 하고 있으니 꽤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것 같았다.

한 장을 완성하고 유심히 살펴보았다. 데미안의 이름은 워낙 많이 수를 놓아서 아주 말끔했다.

‘확실히 난 자수에는 재주가 없어.’

꽤 오래 수를 놓았어도 자수 솜씨는 늘지 않았다. 똑같은 것을 수놓아서 조금 나아질 뿐이지 도안을 바꾸면 다시 엉성한 솜씨로 되돌아갔다. 그에게 선물한 손수건을 떠올리자 낯부끄러웠다. 그의 이름은 낯선 도안이라서 그리 능숙한 완성도를 보이지 못했다.

“물 한 잔 가져다주련.”

구석에 앉아있을 하녀에게 말했다.

유리잔이 갑자기 머리 위에서 얼굴 앞으로 내려오자 루시아는 하녀의 무례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소파 뒤에서 팔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기대왔다. 익숙한 느낌과 체취였다.

“휴.”

“아침부터 열심이군.”

루시아는 물 잔을 받으면서 손에 들린 바느질감을 옆의 바구니에 담았다.

‘선물을 봤구나.’

얼굴이 화끈거려서 물을 들이켰다. 저녁에 선물을 주면 바로 얼굴 볼 일이 민망해서 일부러 아침에 가져다주었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모르고 곧장 달려온 그 때문에 무안했다.

“당신은 너무 녀석에게 정성이야.”

“…네?”

“자식이 무슨 소용 있는 줄 알아? 다 제 살길만 찾는다고.”

루시아는 풋,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고생 고생 해서 자식 번듯이 다 키워놓고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는 나이 지긋한 사람처럼 말했다.

“당신 몫까지 제가 하는 거죠. 당신은 너무 관심을 안 보이니까요.”

“사내아이는 끼고 키우는 거 아니야.”

“그렇게 끼고 돌지도 않았어요. 지금 나가시는 거지요?”

루시아는 뒤에서 두르고 있는 그의 팔을 풀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가 느지막이 나가는 경우가 아니면 이런 이른 시간에 그를 배웅한 적이 없었다. 매일은 못 해도 가끔은 해볼까. 루시아가 잠시 생각하는 사이에 어느새 그가 그녀 앞으로 확 다가왔다.

“비비안.”

대답하기 전에 그가 허리를 당기고 뒷목을 누르며 그대로 입술을 붙였다. 그녀의 아랫입술을 쭉 빨아들이고 벌어진 그녀의 입안으로 깊이 침범했다. 맞닿은 혀가 그녀의 혀를 휘감았다. 손끝이 짜릿했다. 루시아가 짧은 신음을 흘리며 그의 가슴에 짚은 손을 떨었다.

잠시 물러난 그의 혀가 목 안을 건드리고 입천장을 훑었다. 갑자기 시작된 그의 진한 키스에 루시아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의 팔 안에 잡혀서 그가 이끄는 대로 뒷걸음질 쳤다. 소파에 걸려서 주저앉는 그녀에게 키스하면서 그도 몸을 숙였다. 반쯤 누운 것처럼 기댄 그녀 위로 그가 타고 올랐다.

루시아는 두 팔로 그의 목을 감았다. 입안 구석구석 애무하는 짙은 입맞춤이었다. 몸의 열기를 끌어올리고 갈망을 불러일으켰다. 인사로 나누는 상큼한 키스가 아니었다. 여자를 갈구하는 사내의 유혹이었다.

일찍 일어나서 노곤했던 몸이 몽롱하게 풀어졌다. 침실 구석구석이 또렷이 보이는 환한 아침, 예상치 못하게 덤벼드는 남자 때문에 루시아는 당황하면서 동시에 달아올랐다.

색정적인 그의 키스에 그녀는 쉽게 무너졌다. 그의 입술이 귓가에 닿고 턱 아래에 붙이고 목을 따라 내려갔다. 그의 손이 옷 위로 가슴을 움켜잡자 그녀의 몸이 흠칫했다.

“휴. 당신, 나가… 나가셔야 하잖아요.”

“일정이 미뤄졌어.”

기다리고 있는 파비안이 들었으면 뒷목을 잡을 소리였다.

“대체 왜 안 내려오시는 거야. 지금 출발하셔도 아슬아슬한데.”

파비안은 제롬의 업무실 안에서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서성거렸다.

“중요한 일정이야?”

“중요하지 않은 일정은 없어!”

‘취소하지 못할 일정도 없지’라고 제롬은 생각했다.

“너 이렇게 내 일 아니다, 하지 말고 올라가봐. 모셔오라고.”

제롬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느긋하게 차를 마셨다. 항상 바쁜 집사가 모처럼 여유로운 시간이었다. 제롬은 오전 시간의 여유를 즐겼다.

“두 분만 침실에 계실 때는 2층에는 누구도 얼씬 안 해.”

“왜?”

그걸 꼭 말로 해야 아냐. 한심하게 자신을 보는 제롬의 시선을 받고 파비안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며 씩씩거렸다.

“야! 아우 진짜. 내가 올라가서 모셔오련다!”

“그럼 난 제수씨에게 연락해야겠네.”

“그건 왜?”

“네 장례식에 쓸 꽃을 준비해 두라고.”

파비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표정으로 성큼성큼 문으로 걸어갔다. 제롬이 혹시 정말 형제의 장례식을 치를까 봐 걱정되어 ‘어디 가?’라고 물었다.

“취소되는 일정들 수습하러 간다!”

파비안은 요란하게 쾅 소리 내고 나가버렸다.

“갈수록 저 녀석, 울뚝밸이 심해지네. 제수씨에게도 저러는 건 아니겠지.”

제롬은 혼잣말을 하면서 느긋하게 남은 차를 마셨다.

휴고의 손이 발목에서부터 치맛자락 안으로 종아리를 타고 허벅지까지 더듬어 올라갔다. 그리고 치마 안에 몇 개 겹쳐 입은 속옷들, 팬티와 슈미즈를 단번에 아래로 끌어내렸다. 무릎 아래로 걸리는 속옷을 그는 아예 벗겨 바닥에 던졌다.

갑자기 하체로 바람이 들어오자 루시아는 다리를 오므렸다. 꽉 붙인 허벅지 안쪽으로 그의 손이 파고들었다.

“흣…….”

루시아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주 가끔, 밤의 연장선으로 아침에 그가 침대에서 추근거리다가 정사로 이어지는 경우는 있었다. 그러나 그가 이런 식으로 덤비는 건 처음이었다. 놀라고 창피하고, 한편으로 그녀도 흥분으로 고조되었다.

그의 입술이 목덜미를 지분대면서 손은 옷 안으로 들어와 맨가슴을 잡아 주물렀다. 또 다른 손이 이슬이 맺히는 여린 살을 문질렀다. 애액으로 미끌거리는 질 입구를 손가락이 찌르고 들어왔다. 깊지는 않게 몇 번을 들어왔다가 나가기를 반복했다. 손가락의 움직임이 젖은 마찰음을 냈다.

“아!”

손가락이 어딘가를 건드리자 루시아는 그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목에 자잘한 입맞춤을 하던 그가 입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루시아는 발갛게 달아오른 눈시울로 그를 보았다. 밝은 빛으로 그의 붉은 눈동자가 한층 선명해 보였다. 눈동자 속에 이글거리는 불꽃은 마치 그녀를 다 삼킬 것 같았다. 질 안쪽을 누르던 그의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휴고는 그녀의 팔을 잡아 품으로 안아 들어서 자신이 소파에 앉은 후 허벅지 위에 그녀를 앉혔다. 그녀의 머리를 어깨에 기대게 한 후 등 뒤의 길게 이어진 단추를 풀었다. 그는 몹시 조급했으나 단추를 푸는 조금 성가신 과정을 즐길 여유도 있었다. 허리까지만 있는 단추를 모두 풀어서 그녀의 상체만 벗겨냈다. 소매가 없는 얇은 속옷은 위로 벗겼다. 또다시 나온 가슴을 가린 속옷을 그대로 잡아 아래로 당겼다. 출렁 흔들리며 드러난 젖가슴을 한입에 삼켰다.

“아…….”

그의 손이 허리를 붙들고 루시아의 가슴을 물었다. 빳빳하게 일어난 유두 끝을 그가 혀로 굴리며 입술 사이에 물고 지그시 힘을 주어 비볐다. 루시아는 두 팔로 그의 머리를 감싸 안고 숨을 헐떡였다.

등 뒤로 오도도 소름이 쭉 돋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저린 것처럼 찌릿찌릿했다. 혀끝이 유두의 정점을 파고들 것처럼 간질이자 루시아는 신음을 흘렸다. 하복부가 아프게 죄어들고 뜨거운 물이 샘을 따라 흘렀다.

그가 몸을 들썩여 바지를 내렸다. 그리고 그녀의 골반을 잡아 가까이 당겼다. 허벅지를 잡아 그녀의 몸을 조금 일으켜 세우고 조금씩 움직였다. 치맛자락에 덮여 보이지 않아서 감각에 의존해야 했다.

루시아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움직이다가 꿈틀거리는 살덩이가 다리 안쪽에 닿자 흠칫 놀라서 몸이 경직되었다. 작은 입구에 맞닿은 뭉툭한 끝을 느끼며 그가 끌어당기는 대로 천천히 앉았다. 뜨거운 살덩이가 좁은 문을 열고 길을 찾아 들어갔다.

“흑…….”

“후우…….”

완전히 둘의 하체가 맞물렸다. 휴고는 그녀의 몸을 두 팔로 끌어안아 고개를 묻었다. 꽉 조이는 그녀의 안은 매끄럽고 뜨거웠다. 좋아서 죽을 것 같다. 하복부가 통증처럼 욱신거렸다. 심장이 뛰는 것처럼 그녀의 샘 안에 담근 중심이 쿵쿵거리며 울렸다. 그는 이를 사려 물고 더 꽉 그녀를 안았다.

“아……. 하아…….”

루시아는 기진맥진해서 숨만 몰아쉬었다. 온몸이 땀으로 젖어서 미끈거렸다. 하체에서는 그가 쏟아낸 체액이 허벅지와 엉덩이를 타고 흘렀다. 엎드려 누워있는 루시아의 목덜미를 그가 깨물었다. 통증마저 쾌감으로 변해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멱이 물린 초식 동물이 된 것처럼 루시아는 반항하지 못하고 그에게 몸을 내주었다. 그의 손이 엉덩이를 우악스럽게 움켜잡았다. 이미 녹진하게 풀어진 다리 사이 좁은 길을 도무지 기세를 잃지 않는 단단히 곧추선 그가 헤집고 들어왔다.

“흣……. 으응.”

땀에 섞인 그의 체취와 알싸한 밤꽃향이 진동했다. 루시아는 눈앞이 흐려져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가 두 팔로 침대를 디디면서 짧고 빠르게 쳐올렸다. 단단한 끝이 안을 찌를 때마다 루시아는 신음을 흘렸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자극에 숨이 막혔다. 구겨진 시트마저 선명히 보이는 환한 아침. 커튼을 모두 활짝 열어둔 침실 안은 지나치게 밝았다. 그와 아침부터 이러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없는 죄의식을 불러일으켰다. 이렇게 방탕한 생활이라니.

“휴, 지금 몇 시…….”

“글쎄.”

그의 커다란 손이 루시아의 골반을 잡아 들자 몸이 딸려 올려갔다. 시트에 닿은 볼이 스륵 끌리며 마찰했다. 몸을 가득 채우고 있던 그가 허리를 뺐다. 몸 안에 가득하던 그가 천천히 빠져나가는 감각에 소름이 돋았다. 저절로 허리가 떨려온다. 그리고 그는 살이 부딪쳐 철썩 소리가 나도록 잔인하게 몸을 쪼갤 것처럼 들어왔다.

“아!”

“시간은 많아, 비비안. 안달할 필요 없어.”

휴고는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붙이며 탁한 음성으로 말했다. 몰아쉬는 두 사람의 호흡 소리에 맞추어 시트에 몸이 끌리며 버석거렸다. 젖은 살 부딪치는 소리가 몸서리치게 야했다.

“누가……. 흣. 안달한다고…….”

“당신 몸이 안달하는걸. 날 무는 당신 안쪽이 얼마나 야한지 알아?”

좁고 쫀득하게 누르는 속살의 주름이 그의 성기를 끊임없이 자극했다. 아내의 몸은 그를 언제나 미치게 했다. 단순히 육체적 쾌락 그 이상의 충만함을 느꼈다. 그녀를 안으면 쾌락의 절정 이후에 허무함이 없었다. 오랜 굶주림을 겪다가 양껏 배를 채운 것처럼 만족스러웠다.

루시아는 그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버겁도록 힘들어도 몸은 끊임없이 반응했다. 그와의 정사는 루시아에게 항상 기쁨이자 고통이었다, 힘들지만 도무지 거부할 수 없는. 그가 주는 쾌감이 그러했다.

몇 번이고 퍽퍽 들이박히다가 서서히 밀려오던 쾌감의 파도가 거대한 해일이 되어 그녀를 덮쳤다. 눈앞이 아득하게 멀어지고 의식이 깊은 곳으로 떨어졌다. 온몸의 잔털이 다 일어나는 것 같았다.

“아아아앗!!”

온몸을 파드득 떨며 교성을 지르자 뒤에서 그의 신음 소리가 들렸다. 절정을 느끼며 제멋대로 움직이는 내벽 안을 단단한 성기가 몇 번이고 쑤시고 들어왔다. 루시아는 뇌가 곤죽이 되어버리는 것 같은 쾌감에 제대로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 입만 벌리고 바들바들 떨었다.

그가 강하게 치닫더니 목을 울리며 신음했다. 이내 뜨거운 정액이 왈칵 거리며 안에 쏟아져 들어왔다. 수없이 겪었어도 여전히 낯선 감각이었다. 루시아는 흠칫거리며 숨을 할딱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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