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장 사랑합니다 (6)
휴고는 흠칫했다. 희열에 젖어 아득해지는 정신이 확 깨어났다. 눈가와 볼 전부가 눈물로 축축하게 젖은 그녀의 미소가 환상 같아서 휴고는 손을 뻗어 볼을 감싸 쥐었다. 손에 생생하게 잡히는 감촉은 신기루가 아니었다.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당신은 정말 마녀야.”
이 상황에서 장미꽃이라니. 휴고는 진심으로 세상의 모든 장미꽃을 뿌리 뽑아 쌓아두고 불 싸지르고 싶었다. 평생 그녀를 당해낼 수 없을 것 같다. 불길하면서도 행복한 예감이었다.
휴고는 그녀를 품으로 당기면서 젖은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혀끝에 닿는 눈물의 짠맛이 달게 느껴졌다. 고개를 틀어 붉은 입술에 키스했다. 입안 깊은 곳의 여린 살을 훑으며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속눈썹을 바라보았다. 부드럽고 달콤하면서 평소와 다른 풋풋한 느낌의 키스가 끝나고 그는 입술을 뗐다.
휴고는 시선을 마주치는 그녀의 맑은 호박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모습이 그녀의 눈동자 가득히 담겼다.
“나는.”
목이 따가워서 휴고는 말을 멈추고 큼큼 소리 내어 목을 가다듬었다. 이게 목이 멘다는 거구나. 휴고는 새로운 감정 상태를 감각으로 배웠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이 새하R다.
‘사랑한다고……? 날……?’
그녀가 거짓말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믿기지가 않았다. 거대한 어떤 힘이 작당해서 그를 조롱하는 것 같았다. 그의 침묵이 길어졌다.
루시아는 재촉하지 않으려 했으나 마음 밑바닥에 약간의 불안감은 남아있었다. 그로부터 확언을 듣고 싶었다.
“사랑해요.”
그는 어딘가 아픈 것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사랑해요, 휴.”
휴고는 신음처럼 한숨을 내뱉었다.
“좀 쉬었다 해줘. 숨을 못 쉬겠어.”
루시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제게는 말해 주지 않으실 거예요?”
“…너무 짧아.”
사랑해. 한마디로 표현하기에는 흘러넘쳐서 스스로 주체하지 못하는 마음이었다. 그 짧은 단어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녀는 그의 기쁨이자 고통이었다. 그녀를 품에 안고 있을 때의 안도감에서 비롯되는 기쁨, 별개의 두 사람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한 근원적인 고통. 그녀의 미소는 그의 행복이고 그녀의 눈물은 그의 아픔이었다. 인간이 지닌 언어의 한계를 이렇게 실감한 적이 없었다.
그래도 그 단어뿐이었다.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뭔가를 작은 상자 안에 억지로 욱여넣는 것 같아도 그 말밖에 없었다.
휴고는 그녀를 품으로 꽉 끌어안았다. 아주 단단히 두 팔로 그녀의 등을 감싸 서로 심장이 맞닿아서 상대방의 심장 소리를 온몸으로 느끼도록 밀착했다. 품 안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감동적이었다.
오래전부터 그녀는 그의 아내였고 그의 여자였지만, 휴고는 비로소 그녀의 모두를 가졌고 그녀에게 온전한 자신을 모두 내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은 내 심장이야. 사랑해.”
귓가에 들려오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루시아는 다시 눈물이 솟았다.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자신의 심장 소리인지 그의 심장 소리인지 알 수 없는 박동을 온몸으로 느꼈다. 벅찬 감동으로 가슴 안쪽이 저릿했다.
인간의 몸이 왜 자극에 노출되는 시간과 빈도에 비례해서 반응이 무뎌지는지 알았다. 지금의 행복과 감격을 동일한 정도로 계속 느낀다면 심장이 멈추어버릴 것이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서로 안고 한참 앉아있었다. 둘 다 한계까지 치달은 감정을 갈무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루시아는 놀만이 썼던 로맨스 소설의 내용을 떠올렸다. 주인공은 사랑을 확인하면서부터 고난의 길에 내던져졌다. 어떤 역경도 주인공은 항상 훌륭히 이겨냈다.
소설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현실은 비교할 수 없이 가혹하니까. 그래서 루시아는 자신의 앞에 놓인 현실의 달콤함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오늘 당신하고 우리의 계약에 관해서 이야기하려고 했어.”
그의 낮은 목소리가 몸에 울렸다. 루시아는 몸을 조금 느슨하게 빼서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이미 당신은 내게 입적 동의서를 줬고, 데미안을 입적했지. 계약 조건은 이미 충족되었고 파기라는 말이 무의미하다는 건 알아. 그래서 당신 생각을 들어보고 싶었어.”
“계약은 이미 의미가 없는 걸요.”
루시아는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계약 조건이 아니었어도 전 기꺼이 데미안을 아들로 받아들였을 거예요. 사랑스럽고 사랑받아 마땅한 아이니까요. 그리고 당신은 이미 제게 성실한 남편이 되겠다고 약속했어요. 아, 마지막 조건은 하나 남았군요. 제가 당신께 사랑한다고 하면 당신은 장미꽃을 주기로 하셨죠.”
그가 미간을 찌푸리는 것을 보며 루시아는 웃었다.
“하지만 제게 장미꽃을 주지 않으실 거잖아요.”
“…당신 계속 그 얘기로 날 괴롭힐 거지?”
“안 그럴게요.”
루시아는 쿡쿡 웃었다. 그의 얼굴에 못마땅함이 가득한데 뭐라 할 수 없어서 답답하고 억울한, 그런 내심이 드러났다.
“언제부터 저 사랑했어요?”
그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모르겠어.”
루시아는 조금씩 지난날의 특정 사건을 짚어가면서 ‘이때요?’라고 물었고, 휴고는 ‘그보다 앞인가……?’라고 대답했다.
“그럼 데미안이 왔을 때?”
“아마 그쯤?”
“그렇게 오래요?”
“당신이 둔해서 이러다 숨넘어가는 줄 알았어.”
데미안이 왔을 무렵이면 거의 1년 전이었다. 루시아는 새삼스럽게 그를 보았다. 그럼 그가 1년 가까이 혼자 끙끙대고 있었다는 건가. 안타깝기도 하고 웃음이 나기도 했다. 루시아는 보기와 다르게 소심한 남자를 향해 새침하게 말했다.
“당신도 만만치 않아요. 전 당신보다 오래됐거든요.”
잠시 후 그가 ‘뭐?!’라고 소리치고 두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붙들었다.
“이 여자 진짜 잔인하네. 그러면서 날 절대 사랑할 일 없다고 선언했단 말이야?”
루시아는 기억을 더듬다가 ‘아…….’ 하고 중얼거렸다.
“당신이 그 일을 마음에 두고 있는 줄 몰랐어요.”
휴고는 허탈한 한숨을 쉬었다. 그간 했던 마음고생이 다 부질없는 짓이었단 말인가.
“내가 얼마나…….”
그는 괜히 울컥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루시아는 그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리며 위로했다. 불퉁한 그의 표정을 보고 있으니 웃음이 나왔다.
‘우리는 서로 너무 겁이 많았군요.’
루시아는 두 사람이 먼 길을 돌아와야 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름도 안 알려주고.”
“이름이라니요?”
“당신 아명 말이야.”
“아명?”
“…루시아.”
루시아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이름을 듣는 순간 짜릿했다.
그녀는 어머니가 지어준 이름인 루시아를 아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루시아’는 그냥 그녀의 이름이었다.
루시아가 말없이 바라보자 휴고는 구시렁대기 시작했다. 데미안 녀석이 알고, 심지어 집사까지 아는데 왜 나는 몰라야 하느냐고.
“휴.”
루시아는 웃으면서 그를 향해 손을 뻗어서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쌌다.
“제게 루시아라는 이름은 특별했어요. 어머니가 지어주신 이름이니까요.”
‘루시아’는 그녀의 정체성이었다. 그녀가 꿈속에서 어떤 일을 겪어도 무너지지 않도록 버티게 해주는 기둥이었다.
“비비안 공주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 같았죠. 당신에게 숨기려 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아내는 비비안이니까. 비비안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당신은 처음부터 그 이름을 불편해했어.”
“네, 그랬어요. 비비안은 진짜 제 모습인 루시아를 감추는 껍데기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요, 휴. 이름은 불러주는 사람이 있을 때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당신이 절 비비안이라고 부를 때마다 가짜 비비안이 진짜가 되기 시작했어요. 저는 당신의 비비안이에요. 오직 당신만. 저를 비비안으로 부를 수 있으니까요.”
루시아는 ‘비비안’도 그녀 자신이라고 인정했다. 오히려 그의 아내 비비안으로 살 수 있어서 행복했다. ‘루시아’는 잡초이자 야생화였다. ‘비비안’은 아름다운 꽃이었다. 그녀는 ‘비비안’으로서 그의 곁에 있고 싶었다.
“당신만 부를 수 있는 이름이 더 특별하잖아요.”
“…….”
그의 붉은 눈동자가 조금 시큰둥하지만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그런가?’ 하며 혹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루시아는 쿡쿡 웃었다.
“저도 궁금한 것이 있어요. 데미안 손수건은 왜 훔치셨어요?”
“훔치다니. 적절치 못한 단어군.”
그는 당당하게 항의했다. 루시아는 뻔뻔한 그를 흘겨보았다.
“좋아요. 왜 가져가셨어요?”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녀석 것 하나 만들 때 내 것도 만들어.”
맡겨놓은 것을 내놓으라는 태도였다. 루시아는 그의 요구는 일단 무시하고 공격을 가했다.
“또 폐하께 빼앗기시려고요?”
“…….”
휴고는 탄식하면서 ‘인정사정없군.’ 하고 중얼거렸다.
“당신 내게 평소 불만이 많았어. 아니라고 하지 마.”
“으음. 그런지도 모르겠어요. 저도 마음고생 많이 했어요. 당신이 남자답게 용기를 냈으면 하지 않았을 고생이었죠. 청혼도 제가 하고 고백도 제가 하고. 와, 이제 보니까 타란 공작 전하 체면이 말이 아닌데요.”
“…살살해, 이 여자야. 남편을 아주 난도질하는군.”
루시아는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당신이 소심하고 나쁜 남자라도. 사랑해요, 휴.”
“앞의 말은 빼주지?”
휴고는 투덜거리면서 그녀를 안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침실로 들어가서 그녀를 침대에 내려놓고 ‘이야기하는 중이잖아요.’라고 항의하는 그녀의 앙증맞은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막았다.
“이야기가 너무 길었어. 좀 쉬자고.”
헛웃음 치며 기가 막혀 하는 그녀의 반응은 개의치 않았다. 곧바로 침대 위로 밀어 넘어뜨리면서 휴고는 그녀의 위로 올라갔다. 그의 손이 치맛자락을 들치고 허벅지 안쪽을 더듬었다.
“그리고 당신이 말한 옵션. 성능을 시험해 봐야 하잖아?”
“충분히 했어요!”
그녀의 반항은 순식간에 제압당했다.
어스름한 새벽. 휴고는 언제나 마찬가지로 비슷한 시간에 잠에서 깼다. 똑같은 시간에 아침을 맞이하고 시작하는 똑같은 하루.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삶이었다. 가끔은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까 짙은 허무를 느끼기도 했다.
휴고는 옆구리에 닿는 체온과 부드러운 피부를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회색빛 그의 세상에 유일한 총천연색으로 반짝거리는 그의 아내. 그의 사랑. 그녀가 있어서 그의 삶은 의미를 얻었다. 그녀가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었다.
따끈한 그녀를 품에 안지 않고서는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녀가 수도에 올라온 이후부터 그는 자신의 침실을 이용하지 않았다. 주인이 찾지 않는 그의 침실은 한여름에도 썰렁했다.
휴고는 새근새근 자는 그녀의 허리 아래에 팔을 넣어 품으로 당기면서 꽉 안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바로 눕혀주고 이불을 덮었다. 그녀가 뒤척이면서 옆으로 돌아누웠다. 드러나는 동그란 어깨에 입을 맞추고 휴고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주인의 기상 시간이 이르기 때문에 저택은 이른 아침부터 깨어나 움직였다. 언제나 시중을 전담하는 삼 형제의 손발 착착 맞는 시중을 받으며 휴고는 옷을 갈아입었다. 옆에서 제롬은 어젯밤에 보고하지 못한 잡다한 일들을 구두 보고하고 간단하게 결재를 받았다.
“노란 장미 말이야. 왜 노란 장미였지?”
제롬은 주인의 뜬금없는 질문에 성실히 답했다.
“왜 제가 노란 장미를 택해서 보냈느냐는 말씀이십니까?”
휴고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롬은 ‘꽃말 때문이었습니다.’라고 말하며, 세상의 대부분 꽃에는 ‘꽃말’이라고 하는 특정한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꽃말? 별……. 그래서 노란 장미 꽃말이 뭔데?”
“이별입니다.”
제롬이 답하자 휴고의 표정이 상당히 안 좋아졌다.
“그거와 반대되는 뜻의 꽃말을 가진 꽃은?”
“붉은 장미는 정열적인 사랑을 뜻합니다.”
“장미 말고.”
휴고는 색깔 불문하고 장미라면 지긋지긋했다.
“스타티세라는 꽃이 있습니다. 꽃말은 영원한 사랑입니다.”
“그게 좋겠군. 매일 아침 그 꽃 한 다발씩 안사람이 일어나면 가져다줘.”
휴고는 그녀의 머릿속에서 장미꽃을 지워 버리겠다고 결심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하녀는 한 다발의 꽃을 가지고 들어왔다. 요즘 매일 아침마다 반복되는 일이었다. 루시아는 채색한 듯 고운 연보라색의 스타티세를 기쁘게 건네받았다. 꽃다발을 받을 때마다 그가 왜 꽃 선물을 하기 시작했는지 이유를 떠올리며 웃었다.
루시아는 그가 장미를 싫어하는 이유가 자신과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제롬이 슬쩍 귀띔해 준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정작 자신은 노란 장미를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았는데 그가 혼자 속을 끓이다가 제롬에게 장미 금지령까지 내렸을 줄은 몰랐다.
스타티세 꽃다발에 코를 묻고 은은하게 풍기는 향을 맡은 후 다시 하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러면 하녀는 꽃다발을 침실 어딘가에 장식해 둘 것이다. 이미 그녀의 침실은 눈을 돌리면 스타티세로 가득했다. 조만간 침실에 더 둘 곳이 없으면 응접실로 꾸미는 공간을 확장해야 할 것이다.
루시아는 응접실에 앉아 수를 놓으면서 수시로 문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아침부터 계속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문이 열리는 모습을 보자마자 루시아는 벌떡 일어났다. 제롬이 노인을 모시고 안으로 들어왔다.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지으며 루시아는 노인에게 달려갔다.
“어서 오세요, 할아버님.”
“허허. 그래, 그래.”
핏줄의 이끌림은 정말 신기했다. 루시아는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것처럼 외조부가 친근했다. 그리 붙임성 좋은 성격이 아닌 그녀가 외조부를 와락 껴안는 행동에 주저함이 없었다.
“시장하시지요? 바로 점심을 준비하라고 할게요.”
“아니다. 천천히 하자꾸나. 어디, 내 손녀 얼굴 좀 보자. 그간 잘 지냈니?”
“그럼요. 할아버님은요?”
“나야 그만저만하지.”
바덴 백작은 살갑게 구는 손녀가 그저 어여뻐서 허허 웃었다. 루시아는 주름진 투박한 조부의 손을 꼭 잡아 소파로 이끌었다.
금방 제롬이 차를 내왔다. 그리고 두 분이 재회의 기쁨을 나눌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었다.
“이렇게 금방 다시 수도로 올 줄은 몰랐구나.”
‘언제든지 오시고 싶으면 게이트를 이용하시면 됩니다.’라고 손녀사위가 말했지만, 일부러 수도에 올 일이 뭐가 있겠나 싶었다. 공연히 노인이 얼쩡거려서 잘 사는 손녀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손녀가 잘 사는 모습을 봤으니 말년에 복을 받았다고 여기며 살려고 했다.
그런데 손녀가 할아버지를 몹시 그리워한다고, 부디 한 번 와주십사 청하는 심부름꾼이 찾아왔다. 얼마나 기쁘고 설레던지. 돌봐주지 못한 못난 할아버지를 그래도 보고 싶다고 찾아 주는구나. 수도를 다녀온 이후에 여식을 닮은 손녀가 자꾸 눈에 아른거리던 참이었다.
“내가 염치도 없이 부른다고 이렇게 냉큼 왔어.”
“염치라니요. 당연히 제가 찾아뵈어야 하는데 이렇게 오시라고 해서 죄스러울 뿐이에요.”
“아니야. 마땅히 내가 와야지. 네가 함부로 움직일 위치는 아니지 않니.”
백작은 부귀공명을 그리 탐내는 성품은 아니지만, 손녀가 타란 공작가라는 큰 집안의 안주인이라는 사실이 은근히 자랑스러웠다.
“이번에는 저희 집에서 편히 쉬다 가세요. 저번처럼 다른 곳에 가계신다고 고집부리시면 안 돼요.”
“허허, 그래. 알았다.”
루시아는 외조부와 점심을 먹고 함께 산책하면서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후에는 외조부를 모시고 저택 곳곳을 안내하고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다. 신기할 정도로 두 사람 사이에는 이야깃거리가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두 사람이 동시에 몹시 사랑하는 아만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때에 그들의 눈동자가 가장 빛이 났다.
“할아버님께 여쭈어보고 싶은 일이 있어요. 일전에 말씀드린 펜던트요.”
“찾았나 보구나.”
백작은 펜던트를 찾아서 손녀에게 선물하고 싶다던 손녀사위의 말을 떠올렸다. 아내 귀한 줄 아는 손녀사위가 대견하고 부부 금실이 좋아 보여서 흐뭇했다.
“아, 찾지는 못했어요.”
아마 영영 찾지 못할 것이다. 루시아는 궁에 들어온 날 밤에 펜던트가 그녀에게 기묘한 꿈을 선사하고 사라졌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제가 궁금해서요. 가보로 내려온 펜던트에 얽힌 이야기라든가. 할아버님께서 펜던트를 물려받으시면서 따로 전해 들은 말씀은 없었나요?”
“글쎄다. 내가 아버지께 펜던트를 받을 때는 귀한 물건이니 소중히 보관하라는 말씀만 들었지.”
“따로 전해지는 문서 같은 것은 없어요?”
“그런 건 없었다. 아주 옛날에는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워낙 오래되어서……. 그 물건은 우리 가문의 시조께서 남기셨다고 했어. 거창한 전설이 붙지 않았어도 대대로 물려서 소중히 보관했을 거다.”
“시조께서 남기셨다고요? 그럼 굉장히 오래된 물건이군요. 할아버님께서는 펜던트가 엄청난 가치의 보물이라고 생각해 보신 적은 없나요? 이를테면, 마도구… 같은.”
“마도구?”
백작은 허허롭게 웃었다.
“나라고 왜 그 생각을 안 해봤겠니. 아무리 귀한 가보라도 가문이 무너지면 소용없지. 하도 답답해서 그 펜던트를 들고 유명한 마도구 감정사를 찾아간 적이 있었어.”
감정사는 매우 오래된 물건이라는 사실에는 관심을 가졌으나 마도구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마도구의 특정한 파장을 잡아낸다는 감별기가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백작은 혹시나 해서 감정사를 찾아갔다가 실망해서 돌아왔던 오래전의 경험을 손녀에게 이야기했다.
‘마도구가 아니라고? 그러면 내가 겪은 일은 설명할 수가 없는걸.’
“펜던트에 관심이 많구나. 골동품을 좋아하니?”
“꼭… 그래서만은 아니고요. 제게는 어머니와의 추억이 깃든 물건이라서……. 정말 펜던트에 관해 더 알고 계신 것은 없나요?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좋아요. 가문의 시조께서 남기셨고 가문이 위기에 처했을 때 가문을 살린다는 전설까지 붙어있는 물건인데…….”
루시아는 말을 하다가 갑자기 번뜩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가문을… 살린다고?’
그녀의 등을 타고 쭉 소름이 돋았다.
‘살렸잖아. 가문을 살렸어. 내가 꿈을 꿔서…….’
루시아의 꿈속대로면 바덴 백작가의 멸문은 다가올 미래였다. 그러나 루시아는 꿈에서 미래를 봤고, 미래를 바꾸기 위해 움직였으며, 미래는 바뀌었다.
루시아는 메튼 백작과 결혼하지 않을 테니까 외삼촌을 메튼 백작과 연결해 줄 일도, 메튼 백작의 역모죄에 바덴 가문이 엮일 일도 없을 것이다. 최소한 바덴 가문은 루시아가 살아있는 한 명맥이 끊기는 일은 없었다. 루시아가 그렇게 되도록 두고 보지 않을 테니까.
‘우연일까?’
펜던트가 직접 가문을 돕지는 않았다. 다만, 루시아에게 미래를 보여줘서 움직이게 했다.
‘…미래를 보여주는 마도구의 힘이 가문을 위기에서 구해주는 힘이라고 하면 그건 억지야.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지만, 나는 내 미래를 바꾸고 싶었을 뿐이었으니까.’
루시아가 그 꿈을 한낱 백일몽으로 치부했거나 포기하고 다가올 미래에 순응했다면 바덴 가문이 멸문하는 미래로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결혼 제안을 그가 거절해서 루시아가 공작부인이 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그밖에도 불확실한 선택지가 아주 많았다.
“가문을 살린다는 전설이라…….”
루시아는 백작이 중얼거리자 생각은 나중으로 미루었다. 지금은 외조부의 말을 듣는 일에 집중했다.
“그걸 네가 아는 것을 보니 아만다가 말해 준 모양이구나.”
루시아는 꿈속에서 만난 외삼촌한테서 들었지만, 그냥 말없이 웃었다.
“그 녀석, 네 어미는 전설을 믿지 않았거든. 그런 전설 따위는 다 거짓이라고 했어. 전설이 사실이면 어머니가 그렇게 세상을 뜨지 않았을 거라고.”
백작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때는 네 어미를 야단쳤지만, 사실은 나도 같은 생각이었단다. 그저 후손들에게 용기를 주려는 선조의 배려였겠지. 어쩌면 그 전설은 우리 가문이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한 가닥 희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펜던트가 가문을 살린다는 전설은 언제부터 생긴 말인가요?”
백작은 손녀가 펜던트에 유난한 관심을 보이는 것이 의아했다. 아마 제 어미와의 추억 때문에 집착하는구나 싶어서 안쓰러웠다.
“언제부터? 처음부터였지. 시조께서 처음에 가보로 물려주실 때 유언으로 남기셨다고 한다.”
“시조께서는 어떤 분이셨어요?”
“우리 바덴 가문의 시조께서는 무인이셨단다. 대단한 기사로 제논의 건국 공신이셨지.”
백작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어려서 할아버지와 아버지께 들은 옛이야기를 손녀에게 들려주었다. 모든 나라에 건국 신화가 있듯이 오랜 역사를 지닌 가문들도 대부분 선조의 공을 과장해서 만든 이야기 하나쯤은 가지고 있기 마련이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살을 붙이다 보면 장엄한 서사극이 만들어졌다.
루시아는 조부의 이야기를 무척 재미있게 들었지만, 긴 이야기 속에 알고 싶은 펜던트에 관한 단서는 없었다.
백작은 공작저에서 나흘을 머물렀다. 루시아는 아쉬운 마음에 며칠 더 지내다 가시라고 외조부를 잡았다.
“오래 소식이 없으면 네 외숙들이 걱정한다. 내가 수도에 온 줄 모르거든. 며칠 친구네 다녀온다고 알고 있지.”
“정말 누구에게도 말씀하지 않으신 거예요?”
“미안하구나. 괜히 수도의 번잡한 정치 싸움에 휘말릴까 봐 걱정이 많아. 서운해도 이해해 다오.”
“서운하지 않아요.”
외조부는 아들 가족과 손녀를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을 택했다. 루시아는 외조부의 깊은 생각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리고… 고맙구나.”
“네?”
“내가 지난번에 수도에 왔을 때는 사실 어려운 문제가 있었어. 물려받은 저택이 남에게 넘어갈 지경이었거든. 집에 돌아가면 작위를 팔아서 빚을 해결하고 더는 아들들에게 짐을 지우지 않으려고 했지. 그런데 돌아가고 나서 문제가 술술 풀리더구나. 매달 많지 않은 돈을 지불하면 저택에서 계속 살 수 있게 되었고, 네 외숙이 시작한 사업이 근래 아주 잘된다는구나. 네가 마음을 써준 게지?”
“…….”
남편에게 외가를 도와달라고 부탁했으나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도왔는지 루시아는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했다.
“…저는 사업은 잘 모르니까요. 아마 그이가 했겠지요. 제가 더 도울 일이 있으면 무엇이든 말씀하세요. 할아버님께 도움이 되어드리고 싶어요.”
“충분해. 사람을 돕는 방법은 아주 다양하지. 돈이 많은 자가 없는 자의 눈앞에 돈을 던지는 도움은 쉽다. 그러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받는 사람의 자존심을 다치게 하지도 않고 스스로 일어날 수 있도록 돕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지. 우리 손녀가 결혼을 참 잘했구나.”
“할아버님. 그 말씀은 그 사람한테도 해 주셔야지요.”
백작이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손녀사위도 아내를 아주 잘 얻었지. 암.”
조손은 마주 보고 한바탕 웃음을 쏟았다. 그들은 서로를 따뜻한 시선으로 보다가 마지막 포옹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잘 지내렴. 또 오마.”
“네, 언제든 오세요.”
조부를 배웅하고 나서 루시아는 며칠 잊고 있었던 펜던트를 다시 생각했다. 그녀는 처음부터 차분하게 정리했다. 펜던트는 마도구이며 루시아에게 특별한 힘이 작용해서 꿈을 보여준 사실은 틀림없다고 전제했다. 그리고 바덴 가문에 전해지는 전설을 되새겼다.
‘가문을 위기에서 구한다……. 미래를 보는 힘이 어떻게 가문을 위기에서 구하지? 차라리 외삼촌에게 바덴 가문이 멸문되는 미래를 보여주는 편이 더 낫지. 왜 나였을까?’
소파에 기대있던 그녀가 짧게 탄식했다.
‘…봤다면? 내가 미래를 꿈으로 보고 미래를 바꾸는 일 자체를. 그걸 선조께서 펜던트의 힘으로 봤다면?’
신비한 힘을 지닌 마도구라면, 충분히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그런데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은 펜던트의 힘이 하필 루시아에게 작용한 이유였다.
외조부 말씀으로는 펜던트는 마도구 감별기에 반응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특별한 힘으로 봉인되어 있었다고 가정하면 설명할 수 있는 일이다. 마도구는 파헤쳐지지 않은 비밀이 더 많은 신비한 물건이니까.
그럼 그 봉인이 깨진 계기가 대체 뭐였을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루시아는 제 손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어린 소녀는 두 손으로 아주 꽉 펜던트를 쥐고 있었다. 혈통을 확인하기 위해서 시녀들이 억지로 손 하나를 떼어냈을 때만 한 손으로 꼭 쥐고 가슴팍으로 숨겼다. 시녀는 소녀의 손가락을 바늘로 찔러 피를 내었다. 정신이 반쯤 나간 와중에서도 손끝이 따끔한 통증은 느꼈다.
‘피…….’
루시아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바늘로 찔린 상처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아주 힘을 주어 펜던트를 잡고 있었으니까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왔을 것이다. 분명히 펜던트에는 루시아의 피가 묻었다.
‘피가… 봉인을 깨는 열쇠였다면?’
바덴 가문의 사람은 가보를 귀하게 여겨서 누구의 손이 닿지 않는 금고에 보관했다. 사람 손을 탈 일이 없었을 것이다. 아마 바덴 가문이 별 탈 없이 성세를 이루었다면 가보는 더욱 안전히 보관되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몰래 금고에서 빼낼 엄두도 낼 수 없었겠지.’
어려운 수수께끼의 정답을 찾아낸 것처럼 루시아는 희열을 느끼다가 맥이 빠졌다. 답인지 아닌지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외조부는 기대와 다르게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펜던트마저 사라진 지금, 단서조차 얻을 수 없었다.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고민하다가 루시아는 피식 웃었다. 쓸데없는 고민이었다. 마도구이면 어떻고, 또 아니면 어떻겠는가.
‘모든 일이 만약 당신의 안배였다면……. 시조 어르신. 먼 후손의 미래까지 염려하신 보살핌에 감사드립니다.’
루시아는 풀리지 않는 의문을 붙들고 고민하는 일은 그만두기로 했다. 어차피 앞으로 펼쳐질 미래는 지도가 없는 미개척지였다. 그녀가 걸음을 딛는 방향으로 새로운 길이 열릴 것이다. 때마침 하녀가 응접실의 문을 두드리며 들어왔다.
“마님, 주인님께서 들어오셨습니다.”
“그래.”
루시아는 그를 마중하기 위해 일어났다. 외가를 도와준 남편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외조부의 기분 좋은 칭찬도 전해 줘야겠다. 설레는 마음으로 그녀는 서둘러서 응접실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