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장 Ever after (1)
보리스 엘리엇은 타란 공작가 소속 기사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열여덟 살로, 단장 칼리스 엘리엇의 아들이었다. 오늘 그는 엄청난 임무를 받고 수도로 올라왔다.
수도는 처음이었다. 정신을 바짝 차리려 했지만, 자꾸 흐물흐물 풀어져서 입을 벌리고 주변을 돌아보고 있었다.
“보리스.”
보리스는 자신을 마중하러 나온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 활짝 웃었다.
“혼자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 많았다.”
“아닙니다. 이 정도쯤은 당연히 할 수 있어야지요.”
‘내가 혼자 여기까지 왔어요! 나 잘했죠!’라고 보리스는 표정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딘은 웃음을 삼켰다. 처음 봤을 때 열 살의 어린 소년이었다. 어느새 이만큼 자랐나 싶어 신기했다.
공작저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보리스는 계속 들떠있었다. 그러면서 품 안에 든 전언을 누가 훔쳐 가기라도 할까 봐 수시로 가슴을 만지작거렸다. 누가 봐도 귀중한 것을 지닌 자의 태도였다. 수도 거리를 걷다가는 틀림없이 소매치기의 표적이 될 것이다.
딘은 보리스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전언 내용을 대충 짐작했다. 야만족 토벌에 관한 소식일 터였다. 연례행사가 돌아오는 시기였다.
“북부에 별일은 없고?”
“로암은 별일 없는데 야만족 국경 근처는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국경으로 떠나신 지 꽤 되었어요.”
“그래? 단장님께서 따로 이르신 말씀은?”
“특별한 말씀은 없으셨고, 출병이 있으면 참전할 수 있겠느냐고 하셨어요. 전 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제게 전언을 주군께 가져다 드리라고 하셨어요.”
딘이 흠칫했다.
‘단장은 대체 무슨 생각이지? 이 녀석을 북부 토벌에? 벌써?’
단장은 엄한 아버지였다. 그래도 너무 일렀다. 어차피 보리스는 단장 뒤를 이어 정예 기사단에 합류할 것이다. 몇 년 뒤라 해도 늦지 않았다. 벌써 끔찍한 전쟁터에서 구를 필요가 없다고 딘은 생각했다.
타란 공작가에는 대대로 ‘정예’라고 불리는 기사단이 있었다. 공식적인 지위는 아니었고 대우는 다른 기사들과 똑같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오직 정예 기사단만 공작을 따라 1년에 한 번 토벌대를 꾸려 북부 야만족을 징계하여 다스렸다.
정예 기사단의 역사는 아득히 오래되었다. 대대로 타란 가문의 공작은 야만족을 직접 토벌할 때 동반하는 기사들을 직접 선별했고, 휴고는 딱 열 명만 정예로 선발했다.
딘은 처음 정예로 선발되었을 때의 가슴 벅차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는 대대로 기사도 아니었고 평민 출신임에도 로이와 함께 정예로 뽑혔다.
정예가 된다는 건 명예로운 일이었다. 공작가 다른 기사들도 모두 부러워했다. 딱히 지위나 재물의 이득이 없어도 공작의 신임을 받는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정예가 된 기사들은 점점 실력이 올랐다. 토벌을 떠나며 오가는 동안에 공작이 직접 검술을 봐주었다.
‘…이 녀석이 감당할 수 있을까?’
겉보기와 달리 녀석의 속은 꽤 튼실할 것이다. 단장이 제 아들을 오죽이나 잘 가르쳤겠느냐마는. 어릴 때부터 봤던 녀석이라 그런지 아무래도 걱정이 되었다.
정예 기사에게는 불문율이 있었다. 토벌하면서 있었던 그 어떤 일도 죽을 때까지 침묵으로 가져가야 한다. 겉으로 보이는 정예 기사단의 영예로움이 빛이라면 감추어진 부분은 어둠이었다.
야만족을 토벌할 때 공작은 굉장히 잔인했다. 영지전이나 국가 간 전쟁에서는 단번에 목을 쳐버리고 말지만, 정예 기사들만 동반할 때의 공작은 그렇게 깔끔하게 처리하지 않았다.
사지를 자르고, 머리통을 밟아 뇌수를 터트리고,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고, 맨손으로 심장을 잡아 뜯는다. 그러면서도 그 붉은 눈은 지독히 차갑게 가라앉아 있어서 차라리 피에 미쳐서 광분하는 것이 덜 무섭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예 기사들이 강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 피바다를 헤집고 다니다 보면 누구나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어지간하면 놀라지 않는 강심장을 지니게 되었다.
언젠가 토벌하고 오는 길에 노숙하며 로이가 공작에게 물은 적 있었다. 오직 로이만이 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주군, 대체 검 놔두고 왜 그리 손으로 찢어 죽이는 거요? 그런 게 취미요?’
다들 얼어붙었다. 저 미친놈. 할 말 못 할 말 못 가리고. 속으로 욕을 퍼부으며 공작 눈치를 살폈다. 공작은 뜻밖에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잠시 간격을 두고 짧게 대답했다.
‘죽이는 게 실감이 나서. 안 그러면 아무 느낌이 안 나니까 내가 괴물 같거든.’
눈치 없는 로이도 더는 묻지 않았다. 딘은 그 말을 하는 주군의 무표정한 얼굴이 굉장히 고통스러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이상하게 그토록 잔인한 공작의 살인 행위에 눈살을 찌푸리지 않았다. 그냥 승냥이가 양을 사냥하는 순간을 보는 것처럼, 그런 자연의 약육강식의 질서를 구경하듯 무감정하게 보게 되었다.
“엘리엇 경의 아들이라. 오느라 수고 많았다.”
보리스는 책상에 앉아있는 흑발의 남자를 보며 저절로 떨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아닙니다!”
제대로 된 인사말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뻣뻣하게 굳은 채 서있다가 툭, 옆에서 딘이 등을 치자 화들짝 놀라서 허둥지둥 전언을 꺼내 공작에게 올렸다.
칼리스가 보낸 전언은 북부의 소식 일부와 국경지대의 소식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특히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부분은 야만족의 동향이었다.
타란의 영지이며 제논의 최북부 지역 대부분과 국경을 맞대는 야만족은 부족민이었다. 그들은 수시로 국경 아래로 내려와 약탈했다.
소규모 부족이 수백이 넘어서 전쟁을 할 대상이 구체적이지 않았고, 도적질한 무리를 직접 잡아봤자 다른 부족들은 우리 일 아니라고 모르쇠였다.
기마 민족이라 공격하고 빠지는 속도가 순식간이었다. 어차피 목적이 식량 약탈에만 있기 때문에 조금 불리하다 싶으면 금방 내뺐다. 명예나 기사도 따위는 없었다.
“마지막 토벌이 언제였지?”
“1년 2개월 전입니다.”
“버러지들을 청소할 때가 되긴 했군.”
무심한 중얼거림에 진득한 피 냄새가 묻어 나왔다.
야만족이 지나치게 세를 형성하는 것을 막고 약탈을 방지하기 위해 공작가에서는 정기적으로 기사단을 파견하고 공작이 직접 선두에 서서 그들을 이끌었다. 나라에서는 타란 공작가가 야만족을 상대해서 나라를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진실도 아니었다.
공작가에서는 야만족을 구석까지 몰아넣지 않았다. 독하게 마음먹고 전쟁을 일으켜 향후 수십 년은 준동하지 못하도록 싹 쓸어버릴 여력이 있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야만족은 타란 공작가의 필요악이었다.
야만족이 있어야 타란 가문도 존재 의의가 있었다. 야만족이 골치 아픈 존재로 남아있는 한, 타란 가문을 누구도 섣부르게 건드릴 수 없었다. 가문 비밀의 방에 남아있는 선조의 유훈에도 야만족을 어찌 다루어야 하는지 나와있었다.
첫째, 그들이 구심점을 가져 나라를 세우지 못하게 할 것. 둘째, 그들의 세력을 너무 약하게 만들지 말 것.
이것은 지금껏 흔들린 적 없는 원칙이었다.
여기까지는 정예 기사들이 아는 내용이었고, 오직 타란 가문의 가주만 아는 비밀이 하나 더 있었다. 야만족은 혈족의 몸에 흐르는 광기를 가라앉히기 위한 제물이었다.
나라를 지키는 전쟁이라는 명분으로 마음껏 살인을 할 수 있었다. 역대 타란 공작가 가주들은 그렇게 피를 갈구하는 본능을 억눌러왔다.
그리고 그 저주스러운 피는 휴고의 몸에도 흐르고 있었다. 구역질나는 출생 비사가 아니더라도 휴고는 자신이 정말 인간이 맞기는 하는지 의심이 들 때가 있었다.
‘1년 2개월이라. 1년 넘도록 사람을 죽이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몸이 근질거리는 갈증은 피를 보지 않으면 해소되지 않았다. 여자를 안으면 어느 정도 가라앉아도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상태는 아주 좋았다. 살인의 욕구가 치솟지 않았다. 오히려 귀찮았다. 기사들만 보내도 될 것 같은데 내가 갈 필요가 있을까.
그런데 칼리스가 보내온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구심점이 생겼군. 부족을 통합하고 있다고…….’
나라가 세워지면 더 큰 적을 맞서는 일은 둘째 문제고, 야만족을 상대하는 일이 국가 대 국가의 일로 넘어간다. 그러면 타란 가문에서 간섭할 여지가 줄어들었다. 타란 가문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이다.
그렇게 되도록 놔둘 수 없었다. 타란 가문의 힘을 지금보다 약한 채로 데미안에게 넘겨줄 수 없었다. 아버지로서 체면이 있지.
휴고는 조장급 이상의 기사들을 집무실로 불러 모았다. 수도에 남아있을 기사와 함께 토벌대에 합류할 기사, 아내의 호위를 담당할 기사를 선별해 임무를 할당했다.
“딘, 네가 계속 수고해 줘야겠다.”
“예, 주군.”
마님 호위로 수도에 남게 된 딘은 두말없이 대답했다.
“주군.”
로이가 삐죽이 손을 들었다.
“난 그냥 수도 남아 있을래요.”
모두 로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저 녀석이 무슨 변덕이야.’라고 말하고 있었다. 야만족 토벌을 나갈 때마다 가장 신나서 앞장서 날뛰던 녀석이었다. 지난해 태자 호위 때문에 혼자 참석하지 못한 일로 얼마나 원통해했는지 아는 사람은 다 알았다.
“너 또…….”
괜히 사람들 들쑤셔서 결투랍시고 애꿎은 사람 상하게 하는 재미를 아직 못 버렸나 싶어서 휴고의 눈이 사나워졌다. 대관식 파티 이후에는 얌전히 지내더니 슬슬 몸이 근질근질한 모양이다.
주군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자 로이는 움찔하며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마님 호위를 제가 하겠다고요. 딘이 못할까 봐 그런 건 아니고. 다들 북부랑 수도랑 왔다 갔다 하는데 딘만 계속 수도에 박혀있으면 야성에 젖는다고요.”
“…타성에 젖는 거겠지.”
휴고가 정정하자 기사들이 큭, 웃음을 터뜨렸다. 로이는 부끄러워하는 기색 없이 오히려 큰소리쳤다.
“사내가 그런 좀스런 데에 딴죽 거는 거 아니오.”
휴고는 이놈을 일단 몇 대 패고 이야기를 계속할까 고민했다.
“그리고 주군 안 계실 때 제가 더 나을 걸요. 실력을 떠나서 딘 녀석은 꽉 막혔잖아요. 마님께 무슨 일이 생겨도 ‘이러시면 안 됩니다.’라고 말부터 하고 볼걸요.”
딘의 표정이 굳고 다른 기사들이 어깨를 떨며 웃음을 삼켰다.
“나로 말할 거 같으면 일단 다 때려잡죠. 이래봬도 지금 폐하를 1년 넘게 지켰습니다. 내가 그분 생명의 은인이라니까요.”
내가 이렇게 대단해요. 의기양양해하는 로이를 바라보며 휴고는 한숨을 쉬었다. 나이는 어디로 먹었는지 철없는 아이처럼 구는 짓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죽을 때까지 저러겠지 싶어서 휴고는 이제 포기했다.
“딘, 네 생각은?”
“로이 의견은 일리가 있습니다. 융통성 부분에서는 로이를 따를 사람이 없으니까요. 주군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휴고는 고민했다. 실력 부분에서 로이가 발군이지만, 언제 어디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불확실성이 가장 큰 문제였다. 로이가 미친개로 불린다는 말을 들었다. 녀석에게 정말 잘 맞는 별명이었다.
‘일을 시키면 틀림없이 완수는 하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였다. 생각해 보면 아내의 곁을 지킨다는 목적 완수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은 상관없었다.
녀석을 아내 곁에 붙여놓으면 무슨 말썽을 부릴까 걱정은 되어도 아내의 안전만큼은 안심이었다. 든든한 파수꾼 노릇을 해줄 것이다.
고민 끝에 휴고는 아내의 호위 임무를 로이에게 맡겼고, 딘은 토벌 기사로 합류하게 되었다.
루시아는 왕비의 다과 초대를 받아서 입궁했다. 왕비궁으로 향하는 복도에서 낯익은 귀부인과 마주쳤다. 여인은 루시아를 발견하고 곧바로 멈추어 서서 고개를 숙였다.
앨빈 백작부인 소피아와의 만남이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루시아는 그냥 지나치려고 했지만, 소피아의 부른 배에 시선이 빼앗겨 절로 걸음이 멈추었다.
“곧 수도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왕비 마마께 인사를 드리러 잠시 입궁했습니다, 공작부인.”
“탓할 생각은 없습니다. 고개를 드세요. 몸을 그렇게 숙이고 있으면 태아에게 좋지 않을 것 같군요.”
소피아가 부른 배를 아래에서 받치듯 손으로 감싸며 고개를 들었다. 소피아의 표정은 평온했다. 루시아가 티파티에서 마주쳤을 때의 소피아와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살이 조금 붙었는지 인상도 뀌었다.
“수도를 떠난다고요?”
“예, 바깥분의 사업 때문에 외국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있는데 그런 여행을 해도 괜찮은가요?”
“의사 말이 조심하면 문제없다고 했습니다. 남편은 수도에 남아 출산하라 하였지만, 그러면 너무 오래 그이와 떨어지게 되어서요.”
“…그래요. 건강하고 어여쁜 아이를 출산하기 바라요.”
지나가려는 루시아를 소피아가 불러 세웠다.
“지난번에 저지른 제 무례를 다시 한 번 사죄드리겠습니다. 제가 참 어리석고 앞뒤 분간을 하지 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사 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진심으로 공작부인께 죄스럽게 생각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백작부인이 진심으로 그리 말해 주니 나도 옹졸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군요. 다음에는 좀 더 편하게 서로 대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루시아는 기쁜 안색으로 인사하는 소피아를 바라보았다. 소피아는 지금껏 봤던 모습 중에 가장 행복해 보였다. 곧 엄마가 된다는 기쁨에 푹 젖어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소피아는 루시아가 꿈에서 봤던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지 않고 건강한 아이를 낳아 행복한 어머니가 되어 별 탈 없이 귀부인으로서 삶을 마감할 것이다. 루시아는 그런 예감이 들었다.
앨빈 백작이 소피아에게 열렬히 구애하여 결혼까지 이른 과정은 로맨틱한 순정으로 여전히 사교계에서 나돌았다. 소피아가 저지른 사건을 앨빈 백작이 나무라지 않고 오히려 싸고돌았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늘 없는 소피아 표정으로 봐서 소문은 아마 사실인 것 같다. 이번 사건이 그들 부부의 애정을 확인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 모양이었다.
‘곁에 있는 사람의 소중함을 깨달았으니 소피아, 그대는 현명한 사람이군요.’
루시아는 속으로 그녀의 순산을 빌어주었다.
‘아기…….’
루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납작한 복부에 손을 댔다가 흠칫 놀라 손을 뗐다. 소피아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한참을 보고 있었다.
왕비궁에는 캐서린도 이미 와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지난번과 반대로 이번에는 캐서린이 소식을 듣고 오늘 자리에 끼어들었다. 세 사람이 앉아 나누는 대화는 편했다. 서로 잘 보일 필요 없고, 비위 맞추려고 눈치 볼 필요가 없었다. 사교계 소식에 밝은 캐서린이 주로 흥미로운 소식을 전해주었다.
“요즘 재미난 연극이 있어요. 보셨어요?”
“연극을 보며 웃는다지요. 체신없이…….”
베스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연극은 장엄한 서사시를 웅장한 무대를 만들어 연출하거나, 비극이 대부분이었다. 교양 있게 앉아서 조용히 감동하며 간혹 귀부인들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었다.
‘희극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였구나.’
루시아가 꿈속에서 사교계에 등장할 무렵에는 이미 희극은 유행처럼 번져있었다. 그리고 루시아는 유행에 동참하지 않았다. 그녀의 삶은 이미 충분히 고단했다. 비극을 보며 울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희극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볼 때만 좋고 실컷 웃고 나면 허무해져서 몇 번 보다가 말았다. 백작 부인 루시아는 공연을 즐길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너도나도 다 체면 차리지 않고 웃는 것이 얼마나 속이 후련한데요. 왕비 마마도 한번 가서 보세요. 전 세 번 봤지요.”
“세 번이나요?”
캐서린은 열렬하게 희극 관람의 감동을 늘어놓았다. 베스의 표정을 보니 이미 반쯤 넘어간 것 같았다. 루시아는 왕비가 나중에 희극의 열렬한 예찬자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왕비 마마. 라미스 백작은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갑자기 영지로 내려갔다고 말들이 많아요.”
베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부친께 저간의 사정은 간단히 전해 들었다.
“아버지께서 오래 영지를 둘러보지 못해 대신 내려 보냈다고 하시더군요. 다른 의도는 없어요.”
동생의 치부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그리 탐탁지 않은 동생이라도 어쨌든 동생이었다.
어릴 때는 어머니도 동생도 미워서 보기 싫었다. 어머니는 데이빗만 오직 제 자식인 것처럼 끌어안고 베스에게는 관심조차 없었다. 항상 어머니의 애정이 목말랐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자식을 낳고 보니까 그저 돌아가신 어머니가 가여울 뿐이었다.
베스는 로빈이 배다른 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로빈도 그녀의 동생이었다. 부모님의 맞지 않는 결혼 생활이 만든 비극일 뿐, 로빈의 잘못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이혼 말이 오가며 사이가 극단적으로 벌어질 때 다른 여자를 마음에 품었다. 그러면서 어머니를 완전히 버리지도 못했다. 그건 분명히 아버지의 잘못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도 노력하지 않았다. 두 분의 결혼 생활이 행복하지 못한 원인은 두 분 모두에게 있었다.
“공작부인, 요즘은 사교 활동이 뜸하다면서요. 한 달 가까이 티파티도 거의 나오지 않았다던데요.”
“네, 요즘 건강이 좋지 않아서요.”
루시아는 얼굴을 붉히지 않으려고 애썼다. 목덜미와 팔 등 드러나는 부분에 그가 잔뜩 흔적을 만들어놔서 얼룩덜룩한 상태로 공식 석상에 나타날 수 없었다. 이러면 밖을 못 나간다고 그에게 빽 소리쳤더니 오히려 더 재미가 들렸다. 더 하면 각방이라고 선언하고 나서야 그는 짓궂은 장난질을 그만두었다.
“저런, 요즘 날이 추워서 그런가요. 왕비 마마도 요즘 궁 안에만 계시더군요.”
베스가 말없이 흐뭇하게 웃었다. 캐서린이 베스의 묘한 미소에 고개를 갸웃하다가 눈이 커졌다.
“조심하실 일이 생기셨군요!”
“며칠 전에 의관의 진단을 받았어요. 낌새가 있어서 그동안 조심하고 있었지요.”
“폐하께서 기뻐하셨겠네요.”
“이번에는 공주를 낳아달라고 하시더군요.”
두 사람 대화를 알아듣지 못했던 루시아는 뒤늦게 깨닫고 베스가 손으로 쓰다듬고 있는 아랫배를 보았다.
“감축하옵니다, 왕비 마마.”
“고마워요. 이미 아이를 셋이나 낳았는데 호들갑 떨고 싶지는 않네요.”
“무슨 말씀이세요. 마땅히 축하드릴 일이죠. 오라버니께서 그렇게 공주를 입에 달고 다니시더니 이제 소원 푸시는 건가요?”
“또 아들일지도 모르지요.”
“아……. 그건 저도 좀. 귀여운 여자아이가 보고 싶은데요.”
“어머나, 남자 조카는 귀엽지 않은가요?”
“사내애들은 너무 드세요. 한 시간만 봐도 진이 다 빠진다고요.”
시녀가 다가와 베스의 곁에서 작은 목소리로 고했다.
“데려오너라.”
베스는 시녀에게 지시하고 다른 두 사람에게 양해를 구했다.
“에단이 낮잠을 자다가 잠투정을 부리는가 보군요. 잠시 즐거운 시간을 방해해야 할 것 같아요.”
에단은 왕의 셋째 아들이며 올해 세 살이었다. 루시아와 캐서린은 기꺼이 상황을 이해했다.
잠시 후 시녀가 금발의 어린 사내아이를 안고 왔다. 아이는 눈을 비비며 심통이 찬 얼굴로 어머니를 보자마자 팔을 뻗어 목을 감으며 품에 안겼다. 베스가 손으로 아이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두드리면서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자식에게 사랑을 쏟는 어머니의 모습은 어떤 매혹적인 미녀의 웃음보다 아름다웠다. 숭고하며 신비로웠다.
루시아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렸다. 어머니가 무서운 꿈을 꾸고 자다 깨어 우는 자신을 안고 진정시켜 주던 기억이 났다.
루시아는 어머니 품에 안겨 금방 잠드는 왕자를 보며 자신의 어린 시절을 투영했다가, 사랑하는 아이를 안고 행복해하는 왕비를 자신과 겹쳐서 그려보고 있었다.
‘아이…….’
불과 한 달 전에 그의 사랑을 얻고 세상을 얻은 것처럼 기뻤는데.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그녀는 이미 자신의 인생에 아이는 없을 거라고 각오했다. 그의 사랑보다 더 일찍 포기한 문제였다. 굳게 각오했는데 그의 사랑을 얻으니 왜 이렇게 쉽게 흔들리는지 모르겠다.
루시아는 내궁 입구까지 태워준 왕실 마차에서 내렸다. 가문의 마차가 공작부인을 저택까지 모시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아까부터 계속 아이 생각에 빠져있었다.
‘아이 이야기는 성급하다는 걸 알아. 이제 겨우 그와 서로 마주 보기 시작했어.’
그의 아이를 낳고 싶다는 마음은 그를 사랑해서라는 핑계를 대도 어차피 그녀의 욕심이었다. 알면서도 왕비 품에 폭 안긴 어린아이의 모습이 계속 눈앞에 아른거렸다.
루시아는 호위 딘이 마중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하인이 내려주는 마차 계단을 올라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갑자기 휙 당기는 힘에 그대로 풀썩 넘어졌다. 짧은 비명을 지르며 넘어져 기댄 품이 익숙했다.
“휴?”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이 부드럽게 휘면서 입술에 키스했다. 허리를 한쪽 팔로 안고 한 손은 그녀의 팔을 붙들어 불안정한 자세를 지탱했다. 그는 과실을 깨무는 것처럼 달콤한 그녀의 입술을 맛보고 말랑하고 따끈한 살덩이를 삼켰다. 그의 혀가 거침없이 작은 입안을 유영했다.
촉촉한 속살을 훑으며 그녀에게서 은은히 풍기는 찻잎의 잔향을 음미했다. 긴 키스를 마치면서도 그는 여전히 아쉬웠다. 숨을 할딱이며 발갛게 상기된 그녀의 입술에 다시 가볍게 키스했다. 그리고 마차 벽을 두드렸다. 신호를 받은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신이 어떻게…….”
“데리러 왔어.”
루시아는 배시시 웃으면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등을 감싸 누르며 마주 안아주는 가벼운 압박이 좋았다.
‘이대로도 좋아.’
루시아의 마음속에 충만한 행복이 차올랐다. 조금 전까지의 묘한 허전함이 사라졌다. 지금 누리는 기쁨을 외면한 채 갖지 못한 것을 바라며 애타는 어리석은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지난 한 달. 겉으로 보기에 두 사람 사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기 전에도 그들은 누구나 인정하는 잉꼬부부였다. 새삼스럽게 그들이 서로 사랑을 확인했다고 감격스러워해 봤자 다른 사람 눈에는 조금 더 유난스러울 뿐이었다.
때문에 제롬에게 남모르는 고충이 있었다. 한 달 사이에 또 하녀 하나가 그만뒀다. 역시 결혼한다는 이유였다. 타란 공작가처럼 안정적이고 보수 높게 쳐주는 일자리를 박차고 몇 개월 만에 하녀가 이렇게 줄줄이 그만두는 일은 전무후무했다.
고용인들이 견딜 수 없을 정도의 극악한 환경의 일자리라는 나쁜 소문이 돌 수 있어서 제롬은 그 부분을 신경 쓰느라 골치였다.
“집으로 가지 말고 나들이할까?”
“어디로요?”
“요즘 웃으며 보는 연극이 있다더군.”
“당신이 그런 것에도 관심이 있어요?”
“귀부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다기에.”
누가 지나듯 한 말을 관심 있게 기억해 두었든, 일부러 누구에게 물어보았든 그는 그녀를 위해 새로운 시도를 했다. 루시아는 그것만으로도 기뻐서 그의 볼에 키스하며 기꺼이 데이트 신청을 받아들였다.
귀빈석은 두 사람 외에 다른 관객은 들어올 수 없는 밀폐된 공간이었다. 루시아는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마음껏 웃었다. 휴고는 깔깔대며 웃는 그녀를 구경하는 일이 더 재미있어서 공연보다도 아내의 얼굴을 본 시간이 더 길었다.
공연은 꽤 길었다. 막간을 이용해 루시아는 휴게실에 들렀다. 휴게실에 들어서자마자 여자들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렸다. 모여서 함께 웃던 여자 무리에서 루시아와 안면이 있는 몇이 떨어져 나와 인사를 건넸다.
“공작부인께서는 바깥분과 데이트하러 나오셨다지요.”
“희극을 함께 보러 와주는 남편이라니! 얼마나 근사한가요.”
귀부인들의 부러움 섞인 인사를 받는 와중에도 한편에 모여있는 무리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다들 연극이 즐거우셨나 보군요.”
“아……. 사실 다른 이유 때문이랍니다. 혹시 공작부인께서는 ‘달빛 아래의 사랑’이라는 책을 읽어 보셨나요?”
“글쎄요.”
잘 모르는 루시아를 위해 옆에서 누군가 설명했다. 근래 귀부인들 사이에 유행하는 로맨스 소설이었다. 스스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자부심을 지닌 볼품없는 외모의 귀부인이 자신의 호위기사에게 사랑을 느낀다는 줄거리를 희극적인 상황으로 그려냈다. 그런데 그 소설과 비슷한 일이 현실에서 일어났다.
몇 년 전에 남편을 잃고 혼자가 된 위키슨 백작부인과 호위기사가 주인공이었다. 위키슨 백작부인은 기이한 외모에 나이도 많고, 호위기사는 보기 드물게 잘생긴 젊은 남자였다. 둘이 오늘 공연장에 나타나자 귀부인들은 여기저기 모여서 그들을 화제 삼아 웃고 떠들었다.
“아……. 네.”
루시아는 억지로 웃으며 대꾸했다. 누군가를 비웃음의 대상으로 삼아 즐기는 귀부인들의 작태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루시아는 화장실만 들렀다가 바로 휴게실에서 나왔다.
관람석으로 가는 길에 화제의 위키슨 백작부인과 마주쳤다. 위키슨 백작부인과는 오래전에 인사만 나누었지만, 워낙 외모가 특이해서 잊을 수가 없었다.
가볍게 인사하고 지나치려다가 루시아는 백작부인의 뒤를 따르는 호위기사를 보고 놀라 멈칫했다.
‘핸슨……?’
맙소사. 꿈속에서 루시아를 등쳐먹은 사기꾼. 한때나마 사랑이라고 믿었던 남자가 틀림없었다. 루시아는 굳은 표정을 보이지 않으려고 얼른 지나갔다. 그리고 걷다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오늘 연극이 희극이라서 곁을 따르는 하녀가 이상하게 보지는 않을 것이다.
‘불명예스럽게 고용 파기된 기사였다더니. 백작부인과의 스캔들 때문이었나.’
핸슨은 곱상한 외모를 지닌 남자였다. 푸른 눈동자로 사르르 웃으며 달콤한 말을 속삭였다. 꿈속의 루시아는 남자의 다정한 말에 그대로 폭 빠지고 말았다.
핸슨이 백작부인과 정말 마음을 나누었는지, 루시아에게 저지른 짓처럼 백작부인도 능멸했다가 기사의 명예를 잃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알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루시아의 인생에서 핸슨은 스쳐 지나가는 군상에 불과했다. 믿었던 남자에게 배신당한 꿈속의 상처는 이제 흔적도 남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마음에는 어둠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관람석으로 돌아와서 고개를 돌리는 남편을 보자마자 루시아는 감탄했다. 꿈속에서는 핸슨이 대단한 미남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객관적인 눈으로 봐도 눈앞의 남편이 훨씬 더 잘생겼다.
‘이 근사한 남자가 내 남편이야.’
루시아는 몹시 만족스러웠다. 그녀는 그를 끌어안고 키스하며 자신의 감격을 표현했다. 그러나 그건 그녀의 실수였다. 자극받은 그가 긴 키스로 되돌리는 바람에 다시 시작된 연극의 도입부를 놓치고 말았다.
즐겁게 연극 관람을 마치고 루시아는 한껏 들뜬 기분으로 귀가했다. 그러나 잠자리에 들려다가 그가 꺼낸 이야기는 루시아의 행복을 바닥으로 끌어 내렸다.
“…북부에 가셔야 한다고요.”
“당신이 궁에 간 사이에 북부에서 전언을 가지고 기사가 왔어.”
휴고는 오늘 외출 없이 저택 집무실에서 밀린 영지 업무 등을 처리했다. 아침까지만 해도 북부로 떠날 예정은 없었다. 이번 토벌은 기사들만 보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칼리스가 보낸 전언 내용을 보니까 아무래도 그가 직접 가서 상황을 살펴야 할 것 같았다.
“얼마나 걸리세요?”
“확실하지는 않아. 오가는 시간을 제하고도 최소 한 달이겠지. 더 걸릴 수도 있고.”
일 때문에 떠나는 사람 발걸음을 무겁게 해서는 안 된다. 루시아는 그쯤은 알고 있으나 서운한 감정은 어쩔 수 없었다. 꿈결 같은 지난 한 달은 찰나였다. 그러나 그가 없는 한 달은 영원과 같을 것이다.
“그래서 저 달래려고 오늘 연극을 보러 가자고 하신 거예요?”
“꼭 그래서는 아닌데. …조금은 그랬을지도. 잘못한 건가?”
“아니에요. 제 기분 맞추려 하신 거잖아요.”
루시아는 그의 세심함이 오직 자신에게만 향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내 기분 맞춰주려고 연극을 데려가는 타란 공작을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언제 가세요?”
“내일 새벽.”
“그렇게 일찍…….”
“그쪽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 한시라도 빨리 가봐야 할 것 같아.”
“제가 배웅을…….”
“그러지 마. 푹 자. 당신 두고 발이 안 떨어질 거야.”
루시아는 더 고집부리지 않았다. 그가 발이 안 떨어지는 만큼 자신도 그를 보내기 어려울 것이다. 차라리 눈 뜨고 일어나서 그가 없는 것이 나았다. 침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그녀를 휴고가 끌어안았다.
부드러운 그녀의 몸을 한동안 안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심란했다. 마음만 같아서는 북부로 데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을 재촉해 말을 달려야 하는 속도를 그녀가 맞출 수 없었다. 더구나 위험한 국경 지대에 데려갈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