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장 Ever after (6)
캐서린은 왕비궁에 들렀다.
“왕비 마마께서는 어찌하고 계시느냐?”
“누워 계십니다. 도통 식사도 못 하십니다.”
시녀가 흐린 표정으로 대답했다. 캐서린은 작은 한숨을 쉬고 왕비의 침실로 들어갔다.
베스는 동생이 끔찍한 죽임을 당한 일로 큰 충격을 받아서 며칠 자리보전 중이었다. 혹시 복중 태아가 잘못될까 봐 궁의들이 부지런히 드나들고 있었다.
“기운을 차리셔야지요. 홑몸이 아니십니다.”
캐서린이 베스의 손을 잡아 위로했다.
베스는 생기 없는 표정으로 힘없이 웃었다.
“동생을 많이 위해주지 못했어요. 볼 때마다 마땅치 않은 말만 했지요.”
베스는 이렇게 갑자기 동생이 곁을 떠날 줄은 몰랐다. 마음에 미진한 구석이 있는 동생이었으나 그래도 하나뿐인 동복형제였다. 볼 때마다 잔소리한 것은 잘되라는 마음이었다. 동생이 죽고 나니까 잘한다는 한마디라도 해줄 것을, 후회만 들었다.
아버지는 아들보다 가문이 중한 분이고 남편은 처남의 죽음에 크게 마음 쓰지 않는 눈치였다. 동생의 죽음에 진심으로 아파하는 사람이 없어서 베스는 그게 더 마음이 아팠다.
“크로틴 경은 나도 잘 아는 사람입니다. 덕분에 폐하께서 여러 번 구명을 받으셨다는 것도 압니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요. 왜 내 동생을 그리했을까요.”
“진상은 밝혀지게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든 결론이 날 거예요. 왕비 마마께서 이렇게 기운을 놓으시니 폐하께서도 걱정이 많으십니다.”
캐서린은 베스를 위로하며 사건이 일어난 밤의 일을 떠올렸다. 캐서린이 왕이 급히 찾으신다는 전언을 받아 서둘러 내궁으로 들어갔다. 왕을 만나러 가다가 마침 회의에 들어가려는 퀘이즈와 복도에서 마주쳤다.
‘네가 파티 중에 여기까지 어쩐 일이냐.’
캐서린은 왕의 말을 듣자마자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분주하신 듯 보입니다, 폐하. 급한 일은 아니니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감히 왕명을 사칭한 자를 색출해서 가만두지 않겠다고 씩씩거리며 다시 파티장으로 돌아오고 나서 바로 사건이 터졌다.
캐서린은 내궁을 다녀오느라 파티장을 비웠던 시간 동안 공작부인과 함께 있었노라 진술했다. 그래서 공작부인은 파티 내내 혼자 있었던 빈 시간이 없게 되었다.
‘팔콘. 그 독사 같은 년이 언제고 일을 저지를 줄 알았지. 감히 내 휴게실을 그 꼴로 만들어?’
캐서린은 사건의 진상을 알지 못했다. 극비로 다루어지는 일이고 오라버니는 자세한 말을 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캐서린에게는 짐작 가는 구석이 있었다.
팔콘 백작부인이 공작부인에게 뭔가 나쁜 짓을 하려다가 일이 틀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그 어리석은 년이 타란 공작에게 미련을 품은 거지. 주제도 모르고.’
한때 혼자 타란 공작을 좋아했었던 여자의 감으로 느꼈다. 비록 죽었으나 그년의 수작이 아예 무위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적극적으로 공작부인을 아예 제삼자로 빼냈다. 그래서 아니타가 왕명을 사칭해서 캐서린을 내궁에 보낸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퀘이즈가 그걸 알았다면 사건 조사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휴게실을 사용하는 사람은 캐서린 공주와 타란 공작부인뿐이었다. 캐서린을 멀리 보냈다면 노릴 사람은 타란 공작부인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그런데 그럴 가능성을 차단하자 사건이 오리무중에 빠진 것이다.
* * *
왕과의 협상은 쉬웠다.
퀘이즈는 장인과 기질이 다른 처남을 평소 마땅치 않게 생각하고 있었고 로이에게 개인적인 호감이 있었다. 1년 넘도록 호위로 거느린 경험에 비추어 로이가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는 망종이 아니라고 믿었다.
휴고가 만성적인 재정 적자에 도움을 주겠다고 하자 퀘이즈는 흔쾌히 덥석 물었다.
“근데 크로틴 경이 그러겠다고 하던가? 그대들은 정말…….”
귀족에게 명예는 목숨보다 중했다. 기사도 마찬가지였다. 명예를 버려서 목숨을 구한다는 발상은 아예 하지 못했다. 퀘이즈는 그러겠다고 대답한 로이나 그런 방안을 제시한 휴고나 둘 다 이해할 수 없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로이. 명예를 위해서 목숨은 초개처럼 버릴 수 있다는 퀘이즈. 그들은 양극단에 서있었다. 서로 이해하는 일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조건이 있네. 짐 혼자 그러자고 해서 될 일이 아니야. 장인도 동의하면 짐도 받아들이지. 장인 설득은 공이 해야 할 것이고.”
“그러겠습니다. 저도 조건이 있습니다. 이번 일의 진상은 모르고 넘어가 주십시오.”
죽은 사람은 말이 없고 아는 입이 적을수록 비밀은 지켜지는 법. 이번 사건에서 아내를 완전히 떨어뜨리기 위해서 들이는 노력이 휴고는 전혀 수고스럽지 않았다. 그녀를 온실 속 화초처럼 보호하고 싶었다. 작은 생채기조차 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내는 거동 하나하나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공작가 안주인이었다. 사교계의 유명 인사라면 이름만큼 뒤따르는 소문이 끝이 없었다. 치명적인 추문이 아닌 한 감수해야 할 일이지만, 휴고는 조금이라도 불미스러운 일로 아내가 뭇입에 오르내릴 빌미를 아예 차단할 생각이었다.
“음? 짐은 그럼 크로틴 경이 왜 그랬는지 몰라야 한다는 건가?”
궁금해서 잠이 안 온다는 퀘이즈의 투덜거림을 휴고는 들어 넘겼다.
“라미스 공과 이야기 나누고 결과는 말씀드리겠습니다.”
휴고는 그날 저녁 바로 라미스 공작과 만났다. 두 사람은 시내의 귀족 전용 클럽의 밀실에서 마주 앉았다. 짤막한 인사를 나누고 휴고는 즉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가지고 온 세 권의 문서를 라미스 공작에게 건넸다.
“맨 앞 권은 현재 수감 중인 내 기사의 진술에 따라 사건 당일을 구성한 내용입니다. 왜 아드님이 그렇게 되었는지 이유를 알 수 있을 겁니다.”
휴고는 라미스 공작과는 돈으로 협상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아들의 목숨을 돈으로 바꿔칠 사람이 아니었다.
라미스 공작이 문서를 읽으면서 안색이 탁하게 흐려지는 변화를 지켜보았다.
라미스 공작은 데이빗의 죽음과 관련해 뭔가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공작부인과 연결해서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죽은 아들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대체 아들이 공주의 휴게실에서 뭘 하려고 했는지, 마도구는 왜 백작부인에게 주었는지 알 길이 없어서 자다가 벌떡벌떡 일어나 가슴을 치고는 했다.
문서에는 로이의 진술 내용을 기초로 해서 그동안 데이빗과 아니타가 꾸준히 만난 행적과 주점에 심어둔 사람에게서 얻은 정보, 데이빗이 공작부인에게 수작을 부린 전적 등 뒷받침할 여러 정황 증거를 함께 제시하고 있었다.
‘어리석은 놈. 어쩌자고…….’
슬프게도 라미스 공작은 내 아들이 그럴 리 없다고 변호할 수 없었다. 거짓 증거를 만들어 아들을 모략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아들이라면 충분히 저지를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걸 깨닫자 라미스 공작은 아들을 잘못 키웠다는 깊은 자괴감에 빠졌다. 지금껏 살아온 세월이 부질없이 느껴졌다.
그러나 라미스 공작은 노련한 정치인이었다. 절대 속내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이 내용을 날조라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아들의 실수를 인정하지요. 그렇다고 공작가 후계가 그런 비참한 죽음을 맞이해 뭇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휴고의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갔다.
‘실수? 그대 아들이 그렇게 비명횡사한 것을 오히려 조상의 덕이라고 생각해야 할 거요. 그놈이 살아 있었으면 사지를 끊어 돼지 먹이로 던져버렸을 테니까.’
현실적인 이유로 놈을 죽이지 못해서 시간이 흘러 만약 놈이 공작 위를 물려받았다면 휴고는 라미스 가문의 파멸을 위해 가진 힘을 모두 쏟았을 것이다. 지금 놈의 죽음은 오히려 라미스 가문의 미래를 하늘에서 굽어살펴준 덕택이라고 봐야 옳았다.
“다음 문서를 읽어 보십시오. 그것도 실수라고 하실 수 있을지 궁금하군요.”
꾸준히 감시한 청년회에 관한 정보였다. 청년회의 자금을 데이빗이 담당하고 있었다는 증거와 청년회를 이끄는 수뇌들이 얼마나 위험인물인지 조사한 내용이었다.
물론 아직 청년회는 작은 조직에 불과했고, 수뇌부들도 이제 겨우 음지에서 벗어나려고 꿈틀거리는 정도였다.
그들을 엄청난 위험 분자들로 둔갑시키고 그럴듯하게 꾸민 수많은 증거는 타란 공작가 정보부의 작품이었다.
문서의 내용 진위를 따지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할 것이다. 당장 문서를 살피는 사람의 눈에는 전부 진짜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위험 단체를 타란 가문에서 수상하게 생각해서 포착해 조사하다가 점점 커다란 뿌리가 드러나고 더 파고들어 보니까 자금을 대고 있는 핵심 인물이 데이빗이었다는 내용이었다.
문서를 읽는 라미스 공작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신국청년회는 라미스 공작도 알고 있었다. 아들의 손 뗐다는 말을 믿었는데 자신의 눈을 피해 자금을 대고 있었다니.
‘이놈이 우리 집안을 망하게 하려고 작정을 했구나.’
아들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치밀었다. 평생 지키고 일궈온 가문은 라미스 공작에게 자신의 목숨은 물론이고 아들의 목숨보다 중요했다.
공작에게는 첫째도 둘째도 가문이었다. 아들의 죽음에 냉철할 수 있었던 것도 그만큼 아들이 공작의 우선순위에서 많이 밀려있기 때문이었다.
가문을 이을 아들은 더 있었다. 후계가 끊길 문제는 없었다. 라미스 공작의 염려는 아들의 죽음으로 가문의 명예에 손상이 가는 일이었다.
“그 내용이 폐하께 들어가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지 예상할 수 있을 겁니다.”
라미스 공작은 무겁게 눈을 감았다.
왕은 비정한 구석이 있었다. 절대 적으로 간주한 자를 살려두지 않았다. 수많은 제 형제를 죽이며 태자의 자리를 지켰고 결국은 왕위에 올랐으며 왕위를 지키기 위해 피를 보는 일을 주저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왕이 문서 내용을 알면 지금 당장 문제 삼지 않아도 계속 마음에 의심을 품을 것이다. 당장은 라미스 공작가 힘이 필요해서 내버려 두겠지만, 언젠가 외척의 힘이 부담스러워지면 계속 품어온 의심이 불신으로 변해 공작가를 칠 것이다.
라미스 공작은 이젠 또 뭐가 나오나 두려운 마음으로 마지막 문서를 펼쳤다. 그리고 눈살을 찌푸리며 페이지를 넘겼다. 절대 알고 싶지 않았던, 아들의 성적 취향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그동안 타란 공작가 정보부는 데이빗과 관련해서 건질 것이 있는지 집창촌을 계속 탐색했다. 데이빗이 여자를 학대하는 취향이 있다면 점점 과격해질 것이고, 그것이 사고로 이어질 것이라 예상했다. 조사 중에 데이빗이 창기를 교살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마지막 문서는 최후의 보루입니다.”
라미스 공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타란 공작이 가져온 협상 도구 중에서 가장 하찮은 가치를 지닌 정보였다. 이미 죽은 아들을 이런 걸로 뭘 어쩌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창기 몇을 죽인 일 같은 치부는 귀족들이 제 입에 담아 소문으로 말하기 너저분한 화제였다. 귀족들은 소문을 좋아하지만, 자신의 체면을 상하게 하는 소문은 말을 아꼈다.
“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캐서린 공주님의 휴게실. 공께서도 아시다시피 폐하께서는 사건 장소가 공주님의 휴게실이라고 지칭하는 말을 엄히 금하셨습니다.”
왕의 조치는 효과가 있어서 모두 이번 사건을 궁 안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말했다. 사건 발생 장소가 캐서린의 휴게실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자들이 더 많았다. 왕은 제 누이가 이번 사건에 관련될 가능성을 차단했다. 따지고 들면 휴고가 하는 짓과 비슷했다.
“오늘 협상이 결렬될 경우, 나는 그 문서를 폐하께 가져가겠습니다. 그리고 곧 사교계에 라미스 백작의 추악한 성적 취향과 라미스 백작이 캐서린 공주님에게 음심을 품고 있었다는 두 가지 소문이 퍼지게 될 거라고 고할 겁니다. 마침 공주님의 휴게실이라는 최적의 장소이지요. 나는 폐하께 누이와 라미스 공 둘 중 하나를 택하시라 하겠습니다.”
“감히… 폐하를 협박하겠다는 거요?”
“지금 나는 못 할 것이 없다는 각오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문서를 꾸깃 쥔 라미스 공작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라미스 공작은 한참의 침묵 끝에 몹시 피로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쩌자는 겁니까.”
“안사람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희생한 내 기사를 살려야겠습니다.”
“불가!”
라미스 공작이 말 끝나기가 무섭게 응답했다.
“사람 말은 끝까지 들으십시오. 라미스 백작의 명예는 지켜 드리겠습니다.”
‘그대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휴고는 뒷말을 속으로만 덧붙였다. 휴고는 이번 사건을 빠르게 해결해서 어서 사람들 기억에서 잊게 하고 싶었다.
라미스 공작이 죽을 때까지만 로이를 시선 닿지 않는 곳에 치워두고, 사건이 희미해질 즈음 진범은 따로 있었는데 억울하게 처형되었다는 핑계로 조용히 복권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려면 다시 왕과 새 라미스 공작과 재협상을 해야겠지만, 어렵지 않을 것이다.
휴고는 사형수와 바꿔치는 자신의 계획을 간략하게 말했다. 라미스 공작도 퀘이즈 못지않은 묘한 눈으로 휴고를 보았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라미스 공작은 가문의 명예가 가장 중요했다. 타란 공작가와 맞서 싸울 기운이 없었다. 그는 이미 나이를 너무 많이 먹었다. 부딪치기보다는 타협하고 안주하는 노년이었다.
아들이 무고한 죽음을 맞아 억울한 상황이 아닌 이상 명예만 지켜진다면 아들의 목숨은 눈감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 사건에 안사람이 관련된 일은 폐하도 모르시는 일입니다. 공의 협조를 얻기 위해 유일하게 사실을 밝혔습니다. 나는 절대 이 일이 어떤 이유로든 밖으로 퍼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공께서 무덤까지 가져가셔야 할 겁니다.”
“…좋습니다. 대신 이 청년회에 관한 모든 정보는 파기해 주십시오. 그리고 청년회는 내가 처리하겠습니다.”
“좋습니다.”
협상 타결이었다. 휴고는 라미스 공작에게 건넨 세 권 문서 중에서 아내와 관련된 사건 진상을 담은 한 권만 회수했다.
“대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뭡니까?”
“공이 가문을 지키려는 것처럼 나는 내 아내를 지키려는 겁니다.”
너는 허울 좋은 가문을 지키려 하지만 나는 내 사람을 지킨다고 돌려 말하는 것 같아서 라미스 공작은 물끄러미 휴고를 바라보았다. 차가운 붉은 눈동자의 어디에도 비아냥대는 기색은 없었다.
라미스 공작은 휴고를 볼 때마다 신기했다. 북부라는 넓은 땅의 주인치고 타란 공작은 매우 담백했다. 잔머리를 굴리지 않고 언제나 당당하며 하고 싶은 대로 했다. 사람들은 고까워하지 않고 ‘타란 공작이니까’라는 식으로 받아들였다.
사람 마음에 질시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은 정치인으로서 대단한 재능이었다. 그래서 같은 나이의 아들을 볼 때마다 항상 부족해 보였다.
‘내 덕이 부족한 것이지. 누구를 탓하겠는가.’
아들의 부족함을 나무라기보다 잘한 점을 이끌어 아량 있게 감싸야 했다. 라미스 공작은 아버지로서, 한 가문의 주인으로서 자신의 부족함을 사무치게 느꼈다.
타란 공작과 라미스 공작 간의 은밀한 거래가 이루어지고 왕이 모른 척하자 상황은 물 흐르듯이 진행되었다.
파비안은 전국을 수소문해서 사형수 중에 그럴듯한 대리인을 찾아냈다. 죄를 심문하다가 매를 많이 맞아서 몸 상태가 별로였지만, 그래서 더 그럴듯해 보였다. 공작가 장남을 죽인 기사가 멀쩡한 모습으로 처형대로 가는 모습은 사람들 눈에 이상하게 보일 테니까.
왕은 짧은 교서를 내렸다. 사건 진상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어디에도 없고 그저 기사 크로틴의 죄를 인정하고 처형한다고만 했다. 워낙 높은 분이 관련된 사건이라 사람들은 자세한 내용을 몰라도 자기들끼리 추측성 말만 내놓을 뿐 그러려니 했다.
로이는 지하 감옥에서 나와서 포대 같은 두건을 뒤집어쓰고 포승줄에 묶여 걷다가 중간에 바꿔치기되었다. 처형대로 향하는 자는 로이 흉내를 내는 사형수였다.
로이를 태운 창문조차 없는 마차는 곧바로 게이트를 향해 달렸다. 가능하면 빨리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수도를 떠나야 했다. 이미 손을 써두어서 신분 확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게이트를 탈 수 있었다.
루시아는 계속 초조하게 응접실 안을 서성였다. 대외적으로 로이가 처형되는 시간이었다.
휴고는 입궁해서 라미스 공작과 함께 공식적으로 왕을 만나는 중이었다. 왕의 측근인 두 세력이 서로 앙금이 없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절차였다.
‘무사히 게이트를 탔을까?’
루시아는 로이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지 못하는 점이 안타까웠지만, 대외적으로 처형했다고 알려진 중죄인을 공작저로 들이는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다.
응접실 문이 열리고 제롬이 들어오자 루시아가 서성이던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뒤를 따라 파비안이 들어왔다.
“크로틴 경은요?”
“무사히 떠났습니다.”
루시아는 크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미안해서 어쩌면 좋을까요. 크로틴 경이 나 때문에 기사로서 명예를 잃고 북부로 쫓겨가듯 떠나게 되다니.”
휴고는 로이를 북부 국경으로 보냈다. 원래 로이가 신나게 휘젓고 다니던 지역이었다. 로이는 안 그래도 그동안 몸이 근질근질했다며 다 죽여도 되느냐고 해맑게 물었다.
파비안은 마님의 안타까운 마음에 조금도 동감할 수 없지만, 미운 정도 정이라고 한동안 녀석을 못 보게 된다고 생각하면 시원섭섭했다.
“내가 고맙고 미안해하더라는 말, 건강히 잘 지내라는 말 전해 주었나요?”
“예, 전했습니다. 그런데 크로틴 경이 마님께 여쭐 것이 있다고…….”
“뭔데요?”
그 미친놈이. 주어는 속으로만 삼키고 파비안은 말했다.
“마님께서 파티에서 만나는 귀부인들을 모두 기억하느냐고. 그게 궁금하답니다.”
로이는 몹시 진지한 표정으로 그걸 말하면서 꼭 답을 들어서 나중에 북부에 올 일이 있으면 말해 달라고 했다. 파비안은 그놈의 정신세계를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루시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리가 있나요. 아는 척할 뿐이지요.”
“…예, 나중에 전해 주겠습니다.”
파비안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답했고, 루시아는 다시 웃었다.
‘정말 좋은 사람이야. 내가 미안해하지 않도록 마지막까지 날 배려하는구나.’
루시아의 오해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잡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신에게 내가 면목이 없군.”
휴고는 모든 일이 다 마무리되고 아내에게 용서를 구했다. 그녀에게 일어난 끔찍한 일, 생각조차 하기 싫은 더 무서운 일이 벌어질 수 있었던 사건의 원흉은 모두 그와 관련이 있었다.
작당했다고 추측되는 라미스 백작과 팔콘 백작부인. 휴고는 그들이 어쩌다가 의기투합했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둘 다 그에게 유감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를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하니까 아내를 겨냥한 것이다.
특히 팔콘 백작부인이 관련된 일이라는 점에서 그는 정말 그녀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의 옛 여자가 저지른 짓이었다. 말끔하게 정리하지 못한 그의 미진한 뒤처리가 빚어낸 결과였다.
“내게 실망했겠지.”
루시아는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오히려 위로하고 싶었다. 그녀는 이번 사건이 그의 탓으로 벌어진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건 그저, 길을 걷다가 의도치 않게 사람과 부딪쳐 사고가 난, 예기치 않은 연결고리로 엮인 관계였다.
“실망하지 않았어요, 휴. 고작 이런 일로 당신에게 실망하지 않아요.”
“…….”
휴고는 자신의 손등을 위로하듯 덮는 그녀의 손을 잡아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미안해.”
“당신의 잘못이 아니에요.”
“당신은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었어.”
“당신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겪어야 할 일이었다면 감당하겠어요.”
“…당신은 정말.”
휴고는 찬란하게 빛나는 그녀의 맑은 마음이 감격스러워서 정말 이 여자를 데리고 살아도 되는 걸까, 자신의 자격을 의심했다.
“당신이 이번 일로 제게 미안해하기를 바라지 않지만, 부탁드릴 일이 있어요.”
“뭔데?”
휴고는 그녀가 원한다면 천하라도 얻어서 바치고 싶었다.
“죽은 하녀의 남은 가족에게 충분히 보상해 주고 싶어요. 제가 지켜주지 못해서 마음이 아파요.”
“보상해서 당신 마음이 편하다면 그렇게 할게. 하지만 당신이 고용인을 지킬 이유가 없어. 당신을 보호하라고 고용한 자들이야.”
“맞아요. 그들은 절 보호하는 일을 하지요. 동시에 저도 그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크로틴 경이 저를 지켜주었고, 저 대신 당신이 크로틴 경을 지켜 주었잖아요.”
휴고는 하인 등의 고용인들은 편리를 위한 도구라고 생각했다. 그들을 로이와 대등하게 두고 비교하는 그녀의 말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대충 무엇인지는 파악했다.
“그들도 생각이 있고 감정이 있어요. 가족이 죽으면 아프고 슬퍼요. 하녀의 남은 가족은 자신의 딸, 혹은 누이를 죽게 한 자들을 원망할 거예요. 원망해 봤자 그들이 뭘 할 수는 없겠지요. 그래도 나도 모르는 누군가가 나를 미워하고 원망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잖아요.”
하녀의 남은 가족이 아내를 원망의 상대로 삼아 미워하는 상황은 휴고도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보상을 해주면 원망을 안 하나?”
“돈이 어떻게 사람 목숨을 대신하겠어요. 대신 진심 어린 위로와 충분한 보상을 해주면 위로가 되지요. 위로를 받은 사람은 금방 상처를 추스를 수 있어요. 그러니까 휴. 그들에게 진심이 담긴 보상을 해주세요. 그들의 죽은 딸, 혹은 누이가 덧없이 죽은 것이 아니라 중요한 일을 하다가 사고를 당했고, 훌륭한 인재를 잃어 유감스러우며 충분한 보상으로 위로를 전한다고 해주세요. 마음 같아서는 제가 직접 남은 가족을 만나고 싶지만…….”
“그건 안 돼.”
“네, 그러니까요. 저 대신 당신이 마음 써주세요.”
“…알았어.”
궁 안에서 공작가 후계가 살해된 사상 초유의 사건은 기사 크로틴의 처형으로 막을 내렸다. 사람들은 어딘지 미진한 구석이 많다고 수군거렸으나 그뿐이었다.
왕이 사건 종결을 선언하고 당사자인 타란과 라미스 두 공작가에서 말이 없었다. 사람들은 이제 새로운 사건을 찾아 관심을 돌렸다.
이제 마무리만 남았다. 휴고는 파비안을 불러 남은 처리를 지시했다. 특히 왕에게 대가로 지급할 것들을 대충 정리해서 파비안에게 서류를 넘겼다.
파비안은 그 자리에서 대충 내용을 훑다가 안색이 퍼레지면서 부들부들 떨었다. 목이 막혀서 침을 한 번 넘기고 공작에게 물었다.
“전하, 정말… 이걸 전부……?”
서류에 적힌 부분은 드러난 타란 가문의 재산 중 10%에 달했다. 타란 가문의 재산 90% 이상이 드러나지 않은 상태로 은닉되어 있었다. 그걸 따지면 그렇게 큰 부분은 아닐지 모르지만, 돈 앞에서 작아지는 파비안의 간 덩어리가 감당하기에는 어마어마했다. 그 미친놈 목숨 값이 이렇게 비싸다니! 파비안은 눈앞이 혼미해졌다.
“돈 주고 목숨을 살 수 있다면 싼 거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압니다. 알고말고요. 그래도 지나치게 통이 크십니다. 허어. 왕도 진짜 뻔뻔하기도 하지. 자기가 한 일이 뭐가 있다고 이렇게 빼가냐.’
파비안은 자기 돈도 아니면서 아까워 죽을 것 같았다.
‘마님 지참금으로 광산을 넘길 때부터 알아봤어. 주인이 이렇게 개념 없이 돈을 써대서 균형을 맞추자고 검소한 분이 안주인으로 오신 건가.’
표정 변화 없이 파비안은 속으로 계속 구시렁거렸다.
“죽은 하녀에 대한 보상은 보통 어떤 식으로 마무리하지?”
“가족에게 시신을 넘기고 미지급한 보수가 있으면 정산하며 장례비용 및 얼마간 보상금을 지급합니다.”
“보상금이 얼마나 되는데?”
“관례상 받던 연간 보수의 5년 상당액입니다.”
법제상 귀족이 평민을 죽일 경우 무죄는 아니지만, 거의 돈으로 배상하고 사건 종결이었다. 귀족들이 많이 몰린 수도를 제외하면 평민이 귀족과 마주칠 일은 거의 없었다. 두 신분은 아예 거주하는 곳과 활동 영역이 분리되어 있었다.
다만 평민이 자진해서 귀족 영역에 발을 들인 경우, 즉 왕궁이나 귀족 가문에 소속되어 일할 때에는 재수 없으면 죽는다는 각오를 해야 했다.
그래도 많은 평민은 높은 보수 때문에 일자리를 얻으려고 치열하게 경쟁했다. 귀족 가문에서 10년만 일하면 가족을 모두 부양하고도 번듯한 집 한 채를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 신분제 국가가 그렇듯이 제논 역시 귀족 위주의 법으로 질서를 만들었다. 우연히 길을 지나가던 아무 죄 없는 평민이 귀족에게 죽은 경우가 아니라면, 하인이나 시종 등의 고용인이 높으신 분들 일에 휘말려 죽었을 때 온전한 시신만 제대로 돌려받아도 다행이라고 여겨야 했다.
‘보상금이 얼마 안 되기는 하는군.’
휴고는 아내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여전히 아내의 지나친 동정심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녀가 해달라는데 어려운 일도 아니고 못 해줄 이유는 없었다.
“죽은 하녀의 남은 가족들에게 하녀가 받던 연급 50년분을 보상금으로 주고 장례식에도 사람을 보내서 위로의 말을 전해라. 남은 가족 중에 필요하다면 일자리 마련해 주고.”
“…….”
파비안은 잠시 말을 잊고 주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파비안이 대답이 없자 휴고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고, 파비안은 화들짝 놀라며 재빨리 고개까지 끄덕이며 대답했다.
“하녀 말고 로이에게 죽은 다른 자들은?”
“왕실에서 보상금을 지급할 겁니다.”
궁에서 일하는 자들이 궁에서 당한 사고이므로 왕실에서 보상함이 원칙이었다. 퀘이즈 입장에서는 이번 사건으로 손해가 없었다. 죽은 자들에 대한 보상이라고 해봤자 국고에 보탠 팔콘 백작부인 재산 일부에서 지급하면 되었다.
죽은 팔콘 백작부인은 왕궁에 독극물을 반입해서 왕의 시해를 모의했다는 중죄를 인정하는 판결을 받았다. 죽은 시신을 처형하고 작위를 박탈했으며 가진 재산 전부를 국고 환수 조치했다.
“왕실에서 지급할 보상금도 그리 크지는 않겠군.”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그쪽도 비슷하게 처리해.”
아내를 지키려던 로이에게 죽은 자들이니까 휴고는 그냥 깔끔하게 전부 다 마무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공작의 집무실을 나오는 파비안의 표정이 묘했다. 파비안은 닫힌 문 앞에 잠시 서있다가 몸을 돌려 안쪽에 앉아있을 공작을 생각하며 문을 바라보았다.
‘사람이 변할 수가 있구나.’
파비안은 사람이 절대 변할 수 없다고 보았다. 사람은 각자 타고난 기질이 있고 그것을 바꿀 수 있는 시간은 어릴 때뿐이며, 바꾼다 해도 근본을 바꿀 수 없고 나이가 들어 형성된 사람의 모습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파비안의 뚜렷한 주관을 흔드는 일이 눈앞에서 일어났다. 주군으로부터 죽은 하녀의 남은 가족을 챙기라는 말을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파비안이 아는 공작은 악인이라기보다는 주변에 관심이 없었다. 마음 내키는 대로 하면 그만이고 최소한의 필요 때문에 곁에 두는 사람 외에는 일이 어찌 돌아가든 다 맡겨두고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다. 철저하게 일 자체만 살피고 사람 문제는 관심 없었다.
파비안은 자신도 공작의 그저 편리한 도구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가끔은 씁쓸하지만, 그래도 능력을 인정받아서 일하는 것만 해도 어디냐고 자신을 위로했다.
그런데 이번 로이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을 보고 솔직히 감동했다. 주인을 위해 목숨을 건 자를 주인이 모든 능력을 동원해서 구해주었다.
귀족들이 매달리는 명예에 코웃음 치는 파비안은 목숨 부지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현실주의자였다. 그래서 로이를 살리는데 이보다 완벽한 방법은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주군을 위해 죽을 지경에 놓여도 주군이 나 몰라라 버리지는 않겠구나, 믿음이 생겼다. 재수 없이 죽어도 남은 가족들을 걱정할 필요 없겠구나, 안도감이 들었다.
‘그래도 그놈 목숨 값이 그 정도는 절대 아니야.’
빠져나갈 생돈이 아깝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 * *
로이가 오랜만에 돌아온 북부 국경 지역은 태어나 자라던 마을 근처였다.
어릴 때 마을을 침략한 야만부족으로부터 부모를 잃고 복수를 다짐했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힘과 덩치로 마을 장사라고 불리면서 커서 큰일할 것이라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그래서 자만했다. 복수하겠다며 야만족에게 덤벼들었다가 붙잡혀 끌려갔다.
어린 녀석이 힘깨나 쓸 것 같으니까 키워서 노예로 부리려고 야만족은 로이를 죽이지 않았다. 독종처럼 구는 로이의 독기를 빼놓는다고 매질하고 묶어두기를 한 달. 이러다 죽겠구나 생각할 즈음에 웬 녀석이 몰래 접근해서 풀어주어서 구명을 받았다.
그 길로 도망친 로이는 자신의 부족함을 실감했다.
혼자 숨어 살면서 짐승들을 사냥했다. 경험으로 생명의 급소와 약점을 익혔다. 가끔 부족에서 떨어져서 멀리까지 나온 야만족 한둘을 죽이며 꾸준히 실력을 쌓았다.
그리고 드디어 부모의 원수를 갚았다. 혼자 몸이라 정면으로 부족 마을을 쳐들어갈 수 없었지만, 소수를 숲으로 유인해 수일에 걸쳐서 다 잡아 죽였다.
원수를 갚고 나니까 시원하면서 앞으로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야인처럼 살며 가끔 덤비는 야만족 잡아 죽이고, 사냥해서 식사 해결하고 그렇게 하루하루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주군을 만났다. 어릴 때 잡힌 자신을 도와준 은인이라는 걸 보자마자 알았다. 같이 갈래? 묻기에 따라갔다. 같이 있다 보면 은혜 갚을 기회가 올 거라고 생각했다.
“쳇. 겨우 갚았나 했더니 또 빚이라니.”
로이는 투덜거리면서 나무 아래 늘어져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공식적으로는 죽은 자가 되어서 그런지 아무도 그를 간섭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로이는 국경 근처를 어슬렁거리다가 점점 멀리 와서 야만족 지역의 숲으로 들어왔다. 며칠째 사람 구경조차 하지 못했다. 오랜만에 혼자 있는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숲의 밤은 빨리 왔다. 잡아둔 토끼를 구워서 저녁을 때우고 로이는 모닥불 곁에서 모포를 덮고 잠자리에 들었다.
밤이 깊어지고 모닥불이 나무를 다 태워 불씨가 작아질 즈음, 발걸음 소리를 죽여 어둠속에 누워있는 로이에게 접근하는 자가 있었다.
괴인은 품에서 비수를 꺼냈다. 살금살금 잠든 로이 곁까지 다가가 그대로 목이 있는 방향에 내리꽂았다. 아니, 내리꽂았다고 생각했으나 괴인의 시야가 갑자기 한 바퀴 돌고 등에 쿵 하는 충격을 받으며 바닥에 누웠다.
칼을 쥔 손목이 강한 힘에 잡히고 또 다른 힘에 목이 잡혀있었다. 그리고 목을 압박하는 힘에 오래 버티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괴인, 쿠야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날이 훤했다. 손이 뒤로 돌린 채 몸이 나무에 꽁꽁 묶여서 움직일 수 없었다. 어젯밤 기억을 더듬으며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얼마 후, 버석 소리가 나면서 덤불 뒤에서 로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등에 새끼 사슴 한 마리를 걸치고 있었다.
로이는 독기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는 나무에 묶인 여자를 흘끔 보고 잡아온 사냥감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무심한 손길로 멱을 따서 피를 빼고 작은 단검 하나를 이용해 가죽을 벗기고 관절 부위로 토막 내서 해체하는 손길이 익숙했다.
그저 짐승의 고기를 얻는 과정인데 쿠야는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장면이라도 보는 것처럼 부들부들 떨면서 원독이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쿠야는 불을 피우고 사슴을 구워 식사를 시작하는 놈을 보며 무식하게도 많이 처먹는다고 생각했다.
꽤 시간이 걸린 식사가 끝난 후 로이는 쿠야에게 툭 내뱉었다.
“너 뭐냐?”
[붉은 악마!]
독살스러운 눈빛으로 소리치는 여자를 가만히 바라보던 로이가 말했다.
[그 말 오랜만에 듣네.]
로이가 익숙한 부족 말을 하자 쿠야는 잠시 움찔하다가 다시 소리쳤다.
[치욕 주지 말고 죽여라!]
[내가 뭘 어쨌다고 이래. 자는 사람을 죽이려고 달려든 건 너거든.]
[너는 내 가족의 원수다!]
이를 바득바득 가는 여자가 살쾡이 같다고 로이는 생각했다.
[나 아무 짓도 안 했는데. 혹시 지금 내가 먹은 사슴이 네 가족이었냐? 미안.]
여자는 부들부들 떨면서 죽여 버리겠다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버둥거리며 소리 지르는 여자를 로이는 구경했다. 체구 작은 여자가 참 기운도 좋았다. 나이는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다. 이제 성년이 막 지났을 정도?
수도에서 우아한 척하는 귀부인들 구경을 실컷 하다가 독기 충만한 여자를 보니까 꽤 재미있었다.
[붉은 악마. 넌 내 아버지와 오라버니는 물론이고 우리 마을 사람들 수십을 죽였다. 8년 전 일을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
마구 소리를 지르다가 기운이 빠졌는지 헉헉대는 여자가 하는 말을 듣고 로이는 기억을 더듬었다. 8년 전에 수십 명을 대량 학살한 일은 한 번밖에 없었다.
[네 부모가 내 부모를 죽였어. 나도 원수 갚은 거야.]
여자는 움찔했다. 그리고 아무 말이 없었다. 한참 고개 숙이고 얌전해진 여자를 보다가 지루해진 로이는 벌렁 누웠다가 낮잠이 들었다.
로이는 소변이 마려워서 낮잠에서 깨어나 주섬주섬 몸을 추슬러 일어났다. 바지를 내리려다가 날카로운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로이가 소변을 누려고 선 장소가 여자 옆으로 두어 걸음 떨어진 곳이었다. 여자는 끔찍하다는 표정으로 욕을 하고 있었다.
로이는 머리를 긁적이고 안 보이는 수풀 안으로 들어갔다. 로이가 일을 해결하고 돌아오자 여자가 말했다.
[너의 정당한 복수를 인정한다.]
[헤에. 너 되게 깔끔하다. 그럼 이제 날 죽이려고 안 할 건가?]
[그거와 그건 별개다. 난 내 가족의 복수를 해야 한다.]
[그러니까 날 꼭 죽여야겠다고?]
[그렇다. 그러니까 나도 죽여라.]
로이는 잠시 생각하다가 단검을 꺼내 여자에게 다가갔다.
쿠야는 눈을 감았다. 그러나 예상했던 고통은 없고 아프게 묶인 손의 줄이 잘려나갔다. 갑자기 자유의 몸이 되어 쿠야는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절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날렵하게 몸을 날려 로이와 거리를 유지했다.
[이런다고 널 죽이지 않을 줄 아느냐.]
[해. 네가 내 복수가 정당하다고 인정했으니까 나도 네가 날 죽이려는 걸 인정한다. 대신 순순히 안 죽어. 자신 있으면 해봐.]
쿠야는 잠시 로이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어릴 때부터 머릿속으로 그리고 또 그려왔던 붉은 악마의 무시무시한 모습과 일치하지 않았다. 하지만 부모 형제의 원수. 쿠야는 마음을 다잡고 몸을 돌려 숲으로 사라졌다.
로이는 픽 웃었다.
“앙칼진 계집이네.”
왜 살려 보냈는지 모르겠다. 후환을 남긴 적이 없는데.
‘냄새가 나쁘지 않았어.’
한동안 심심하지는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