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시아-60화 (61/77)

60장 끝, 그리고 시작 (1)

왕의 탄신 연회 날, 왕비가 모처럼 만에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동생의 죽음 이후 산모의 안정을 핑계 삼아 오랫동안 두문불출했던 왕비를 두고 사람들 사이에는 혹시 충격에 아이를 잃고 상심해 누워있는 것은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소문이 무색하게 왕비는 산달이 다가온 부른 배를 안고 평온한 표정으로 나타났다. 귀부인들은 앞다투어 베스에게 다가가 인사를 올렸다.

루시아도 베스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 역시 몇 개월 만의 만남이었다.

루시아는 내심 왕비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로이가 죽은 척 위장하고 빠져나간 사실을 왕비는 모를 것이라고 남편은 말했다. 차라리 모르는 편이 더 낫긴 하겠지만,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왕비는 난데없이 형제를 잃어 괴로웠을 것이다.

아이까지 가진 상태에서 겪었을 왕비의 상심한 마음을 위로할 수 없어서 더 미안했다.

“강녕하셨습니까, 왕비 마마.”

“공작부인도 잘 지냈나요. 오랜만이군요.”

왕비가 날카롭게 대하지 않을까 우려한 것과 달리 베스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미안한 기색을 조심스럽게 드러내는 공작부인을 보며 베스는 미소를 지었다.

‘이 사람이 무슨 잘못이 있겠나.’

동생을 잃고 베스는 한동안 공작부인을 원망했다. 공작부인이 어떤 잘못이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저 관련된 사람 모두가 원망스럽던 시간이었다.

실의에 빠져 누워있는 베스를 찾아온 부친은 10년은 확 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들을 잃은 고통에 아버지도 힘드시구나, 했던 짐작과 달리 부친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내놓았다.

‘그만 잊으십시오. 왕비 마마. 그 녀석은… 저지른 짓이 있어 그렇게 된 겁니다.’

‘무슨……. 아버지.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세한 내용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단지 녀석이 죄 없이 죽지는 않았다는 것만 알아두세요. 귀한 분을 옥체에 품고 계십니다. 너무 상심하지 말고 마음 추스르세요.’

‘아버지.’

부친은 긴 한숨 끝에 말했다.

‘못난 아비가 아비 노릇을 잘하지 못했나 봅니다.’

돌아서는 아버지의 축 늘어진 어깨에서 베스는 세월을 보았다. 항상 든든했던 아버지가 아니었다. 아버지가 남기신 말을 곰씹으며 베스는 죽은 동생이 조금씩 원망스러웠다.

‘너는 어찌 죽어서까지 남은 사람 가슴에 못을 박는 것이냐.’

베스는 아이를 생각해서 조금씩 동생의 죽음을 털어 버리려고 애썼다. 평소 그다지 살가운 관계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캐서린이 매일 찾아와 주어서 많은 위로를 받았다.

태교에만 힘쓰며 외부 활동을 자제하다가 첫 태동을 느꼈을 때. 베스는 마음 어딘가 있던 찌꺼기 같은 부정적인 잔여물을 모두 털어버렸다. 태어날 아이에게 예쁘고 좋은 생각만 전해주고 싶은 엄마의 마음이었다.

“내가 꽤 살이 붙었지요? 아이를 품고 있으면 이렇게 몸이 변하더군요.”

“오히려 더 편안해 보이십니다.”

“그래요. 요즘은 마음이 편해요. 아이도 안에서 잘 놀고.”

“예정일이 언제이옵니까?”

“한 달 정도 남았네요. 그러고 보니 공작부인도 이제 소식이 올 때가 되었군요. 혼인한 지 2년쯤 되었지요?”

“…네.”

루시아는 흐릿하게 웃으면서 베스의 부른 배에 시선을 주었다.

‘몸 안에서 다른 생명이 자라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꿈속에서 겪지 못했고 현실에서도 아마 겪지 못할 기분이 궁금했다. 아이가 자라면 안에서 움직이며 발길질을 한다고 들었다. 그건 또 어떤 느낌일까.

출산의 고통은 죽을 만큼 힘들다고 들었다. 아이를 낳다가 잘못되는 여자들도 적지 않았다. 여자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그래도 좋아. 어떤 고통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아.’

루시아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왕과 귀족 몇과 함께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남편을 돌아보았다. 그는 단 한 번도 아이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그는 아직도 자식을 원하지 않을까?’

완연히 날씨가 풀리고 본격적인 봄이 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살랑거리는 봄바람이 루시아의 마음속에 스며들어 흔들고 있었다.

아이가 갖고 싶었다. 그의 아이를 소중히 품다가 낳아서 엄마가 되고 싶었다. 그에게 말하지 않고 불임을 치료하는 약을 먹을까? 몇 번을 생각했다. 두 사람은 아직 젊고 남은 시간이 많다는 것도 안다. 그래도 루시아는 하루하루 날이 지나는 것이 아까웠다.

“폐하께서 궁에 남아있는 공주님들의 혼사를 추진하신다지요.”

“저도 들었어요. 도대체 아직 궁에 남아계신 공주님이 몇 분이시랍니까?”

아이 생각에 빠져있던 루시아의 관심이 확 쏠리는 화제를 귀부인들이 떠들었다.

휴고는 옆에서 뭐라 떠드는 소리를 대충 흘려들으면서 눈으로 아내를 찾았다. 남자끼리 여자끼리 모여 대화하는 관습 비슷한 행태가 휴고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계속 아내를 옆에 끼고 있고 싶은데 남들은 아무도 그러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내는 튀는 것을 싫어했다.

그는 가끔 그녀를 살폈다. 그건 습관과도 같았다. 오래 눈에서 보이지 않으면 괜히 불안했다. 그녀가 귀부인들과 이야기하다가 어딘가 잠깐 시선을 돌리는 것을 보았다.

처음에는 신경 쓰지 않았는데 그러는 모습을 몇 번 발견하자 대체 무얼 보는가 싶어서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 아내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왕비가 있었다.

‘아직도 몇 개월 전 일을 마음에 두고 있나?’

데이빗이 죽은 사건을 그녀가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는지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좀 더 살펴보니까 그녀가 보는 곳은 왕비가 아니라 좀 더 아래, 눈에 띄게 부른 왕비의 배였다.

갑자기 쿵 소리가 그의 귀에 들려오는 것 같았다.

목욕을 마치고 아내 침실로 향하면서 휴고는 파티 내내 마음이 쓰였던 일을 계속 생각했다.

‘아이가 갖고 싶은가…….’

그녀가 원하는 것은 모두 천하를 뒤져서라도 가져다줄 수 있지만, 단 하나만은 줄 수 없었다. 아이. 그녀는 그의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그의 씨를 아무리 뿌려도 그녀의 태 안에서 절대 싹을 틔우지 못했다.

저주받은 그의 핏줄은 저주받은 방법을 취하지 않고서는 절대 자라날 수 없었다.

한때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마음껏 계집질을 해도 갑자기 기억에도 없는 여자가 부른 배 안고 찾아오는 일은 없을 테니까. 고작 몇 번 몸을 섞은 여자가 끔찍한 핏줄의 흔적을 낳아 키운다고 생각하면 아주 기분 더럽고 끔찍했다.

아마 특정 조건을 충족해야 하는 제약이 없었으면 그는 제 자식을 가졌다는 여자가 나타날 때마다 모조리 다 죽였을 것이다.

형제가 죽고 공작이 되어 가문 비밀의 방에 들어갔다 나왔을 때 그는 제 몸에 흐르는 피에 대한 증오가 극에 달했다. 동맥을 끊어서 모조리 피를 다 쏟아내 버리고 싶다고 하루에도 수십 번을 생각했다.

휴고는 침실 문 앞에서 우뚝 멈추어 섰다.

‘지금은?’

그는 기이한 위화감을 느꼈다. 두 손을 내려다보다가 주먹을 쥐었다.

살아있다는 느낌. 숨을 쉰다는 감각. 평소에는 의식하지 않으려고 하다가 가끔 세상에 존재하는 자신이 징글징글해서 견딜 수 없을 때가 있었다. 그러면 말이 달리다 지쳐 속도를 내지 못할 때까지 말을 타고 달리거나 며칠을 밤새워 미친 듯이 일에 매달렸다.

“변하셨군요.”

불쾌한 늙은이의 표정과 말이 떠오르자 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변했나?’

의식하지 않아서 자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뭔가 달라지기는 했다. 휴고는 시선을 들어 익숙한 아내의 응접실을 휙 둘러보았다.

따뜻했다. 정말 내부가 후끈해서가 아니라 느낌이었다. 휴고는 아내의 침실로 들어가기 위해 이 응접실을 지날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아내의 부드러운 몸을 품에 안고 촉촉한 입술에 키스할 생각을 하면서 들뜨고 가슴이 울렁거렸다.

직접적인 체온으로 느끼는 뜨겁고 차가움만 구별하던 그가 사물에 느낌을 부여하는 유치한 짓을 하고 있었다.

휴고는 다시 제 손을 보았다. 살아있다는 기분이 예전처럼 끔찍하지 않았다. 살아 있으니까 그녀를 만지고 느낄 수 있어서 오히려 다행이었다. 항상 고독했던 그의 인생에 이제는 그녀가 함께 있었다.

그는 언제부턴가 미래를 생각했고, 그가 생각하는 미래에는 언제나 그녀가 있었다.

그는 언제일지 모를 몇 년 뒤에 그녀가 아이를 안고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몽실몽실한 기분이 둥실 위로 떠오르다가 곧 무겁게 푹 가라앉았다.

‘나는 줄 수 없어.’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말해 줘야 할까. 그녀에게 자신의 더러운 출생을, 영원히 봉인하고 싶은 가문의 비밀을 털어놓아야 하는 걸까.

그것만큼은 싫었다. 악취가 들끓는 것 같았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절대 드러내고 싶지 않은 어둠이었다. 그녀가 모든 진실을 듣고 나서 자신을 조금이라도 다르게 볼까 봐 겁났다.

그녀가 아이를 갖고 싶다고 하면 어떡하나. 그는 평소와 다르게 우울한 기분으로 문을 열었다.

휴고가 들어가는 것과 거의 동시에 루시아도 목욕을 마치고 침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루시아는 젖은 머리를 감싼 수건을 쥐고 저만치 서있는 그를 경계했다.

“머리 말릴 거예요. 오지 마요.”

가끔 젖은 머리로 자면 다음 날 아침 부스스한 머리를 정돈하느라 고역이었다. 물을 뿌려 애써 손질해 주는 하녀들 보기도 민망했다. 외출해야 하면 도무지 수습할 수 없어서 아침부터 다시 머리를 감을 때도 있었다.

보송보송하게 말릴 필요까지도 없었다. 적당히 마른 후 머리카락을 단정히 가라앉히는 유액을 발라주면 충분했다. 그런데 그는 그 시간조차도 기다려주지 않았다.

휴고는 털을 세우는 작은 동물처럼 경계하는 그녀를 가만히 보다가 한 걸음 내디뎠다.

슬금슬금 화장대로 가던 그녀가 움찔 놀라며 ‘오지 말라고요.’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 걸음 물러서면서 오지 마, 오지 마, 표정으로 말하는 그녀를 보며 휴고는 삐딱하게 웃었다.

‘재밌는데.’

가라앉았던 기분이 위로 떠올랐다. 흥분도 되고.

루시아는 그가 팔짱을 끼고 자신을 바라보다가 씨익 웃으며 성큼 다가오자 오싹한 두려움을 느꼈다. 갑자기 쫓기는 가녀린 사냥감이 된 심정으로 그대로 몸을 돌려 도망갔다.

침대를 타 넘어서 건너편으로 도망가려던 루시아는 침대에 아슬아슬 닿기 직전 강한 힘에 잡혀 끌려갔다. 짧은 순간에 맹수에게 뒷덜미를 물린 공포를 느꼈다.

“꺄악!”

팔이 허리를 단단히 감아서 붙들고 그의 가슴이 등에 밀착했다. 그의 입술이 귓불을 깨물며 쿡쿡 웃었다.

“비명은 왜 질러? 당신 이런 거 좋아해?”

“아니에요!”

휴고는 빨갛게 물든 그녀의 목덜미에 키스하면서 목욕 가운 안으로 파고든 손으로 가슴을 쥐었다. 다른 한 손이 다리 사이로 들어가 젖어들기 시작하는 꽃샘을 문질렀다. 흠칫 떠는 몸을 더 꽉 안으면서 그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부인. 오늘 좀 야만스럽게 놀아볼까?”

“휴!”

그에게 달랑 잡혀 들려서 루시아의 몸은 침대로 던져졌다. 루시아가 몸을 일으키기 전에 곧바로 그가 그녀의 몸을 타고 올랐다. 그의 두 팔 아래 가두어져서 루시아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얼굴이 불이 난 것처럼 화끈거렸다.

휴고는 목욕 가운의 앞섶을 잡아 옆으로 젖히고 드러나는 젖가슴을 눈에 담았다. 불그스름하게 물이 든 나신은 수밀도처럼 탐스러웠다.

“당신 온몸이 빨개. 뭐 때문에 흥분한 거야?”

“…자꾸 놀릴 거예요?”

울 것처럼 눈시울이 붉은 그녀를 보며 휴고는 허리가 뻐근했다. 당장 넣고 싶은 욕구가 반, 그녀의 다디단 몸을 맛보고 싶은 욕구가 반. 이번에는 후자가 이겼다.

휴고는 그녀의 오므리고 붙인 무릎 사이에 다리를 비집고 넣어 벌렸다. 당혹해 흔들리는 호박색 눈동자는 또 다른 자극이었다. 두 손으로 허벅지를 잡아 벌리고 촉촉하게 젖은 다리 사이 안쪽으로 고개를 묻었다. 입을 맞추고 갈라진 틈으로 혀를 넣었다.

“아!”

은밀한 곳에 닿는 섬세한 자극이 짜릿했다. 축축한 혀가 핥아 올리고 입술은 키스하는 것처럼 비비며 살갗을 살짝 물면서 빨아들였다.

“아읏!”

루시아는 신음을 지르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몸을 뒤틀어도 허리 아래가 그에게 잡혀서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몸에서 흐르는 물을 할짝거리는 젖은 소리가 수치스러웠다.

손가락만큼 단단하지는 않으나 그보다 질척이는 살덩이가 끝을 세워서 질 안쪽으로 얕게 들어왔다가 빠져나가고, 조금 더 깊게 들어왔다.

그녀의 몸이 파드득 크게 떨렸다. 강한 흡입력으로 빨아들이는 순간에 루시아는 교성을 지르며 허리를 들썩였다.

휴고는 경련해서 떨리는 입구를 혀로 길게 핥으면서 고개를 들었다. 절정으로 늘어져있는 그녀의 흐릿한 눈빛이 색정적이었다.

휴고는 새빨갛게 물들어 고개를 돌려 손등으로 입술을 막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쥐어 시선을 맞추려 했지만, 그녀가 자꾸 눈을 굴렸다.

“비비안. 왜 자꾸 눈을 피해.”

“…창피해요.”

“뭐가.”

휴고가 몇 번을 묻자 루시아는 작은 소리로 마지못해 말했다.

“…야해서…….”

그녀 말의 의미를 가만히 생각한 휴고는 씨익 웃었다.

“입으로 해주면 기분 좋아서 창피해?”

그녀가 빨간 얼굴로 원망스럽게 보는 표정이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그는 그녀의 턱을 잡고 엄지손가락으로 살짝 벌어진 입술을 스치며 문질렀다.

루시아는 입안으로 들어와 안쪽을 누르는 손가락을 혀로 감쌌다. 할짝거리며 핥을 때마다 붉은 혀가 살짝살짝 드러났다.

살짝 눈을 위로 뜨고 보자 그의 얼굴에 이미 웃음은 없었다. 허기 가득한 짐승이 먹이를 앞에 둔 것 같은 욕망이 그의 눈 가득하게 묻어났다.

그가 손을 떼고 상체를 일으켰다. 자꾸 오므리려는 그녀의 두 다리를 벌리고 자리를 잡았다. 두 손으로 그녀의 종아리를 쥐고 아래로 잡아당기자 그녀의 몸이 그의 힘에 쭉 따라 내려왔다.

이후에 벌어질 일을 예상하며 루시아가 눈을 질끈 감는 순간 뜨거운 기둥이 순식간에 안으로 치고 들어왔다.

“아!”

아릿함이 아주 짧은 순간에 사라지고 등줄기를 스쳐 지나가는 절정감. 그가 안에 들어온 것만으로 루시아는 찌릿한 쾌감에 몸을 떨었다. 그가 그녀의 골반을 잡아 하체가 서로 완전히 맞닿도록 밀착했다.

그녀의 허벅지가 그의 허벅지 위에 올라가면서 자연스럽게 엉덩이가 공중에 뜨고 그의 분신이 뿌리 끝까지 들어와 안을 채웠다. 숨이 막히는 압박감에 루시아가 헉헉 숨을 몰아쉬는데 그도 거친 호흡으로 잠시 가만히 있었다.

“당신 속살이… 안에서 잡아당겨.”

붉은 얼굴이 더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그녀를 보면서 휴고는 살짝 허리를 움직였다.

“흣…….”

“하아……. 죽겠네, 진짜.”

그의 성기에 달라붙은 쫀득한 속살이 움직이는 대로 딸려 움직이면서 꽉 죄어들었다.

휴고는 거의 매일 아내를 안지만, 항상 예측할 수 없게 움직이며 무한한 쾌락을 안겨주는 그녀의 안쪽이 신비롭다 못해 경이로웠다.

안으면 안을수록 중독이 되어서 그는 요즘도 열심히 지키려고 노력하는 닷새에 하루에 해당하는 밤에는 불끈거리는 욕망과 싸우며 꼬박 밤을 지새워야 했다.

사랑하는 여자와 사랑을 나눈다는 만족감은 육체적 쾌감 이상의 정신적 쾌감을 주었다. 두 쾌감이 만나 이루는 충만감으로 느끼는 극한의 오르가슴은 도무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 한 번 맛보면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환상적인 경험이며 저열한 충동적 쾌락이 아닌 정신적인 교감을 나누는 포만감이었다.

그는 그녀의 엉덩이를 잡고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이 흘리는 물이 만든 매끄러운 길을 따라 그는 깊이 탐색했다가 빠져나가기를 반복했다.

도돌도돌한 안쪽의 주름이 돌기가 되어서 그의 남근을 스치고 지나가며 자극했다. 그녀의 벌어진 붉은 입술에서 교성이 흘러나왔다. 뻐근하고 짜릿한 자극이 그의 척추를 타고 올라갔다.

현재 그의 몸에서 가장 예민한 신경이 모두 집중되어 있을 성기가 느끼는 뜨겁고 미끄럽고 눌리고 잡아 비틀리는 감각이 가져다주는 쾌감은 파정 순간의 쾌락 못지않았다. 그는 가능한 한 천천히 움직이면서 지금의 감각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서두르지 않고 자신을 탐하는 그의 움직임에 따라 천천히 흔들리는 시야로 루시아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취한 것처럼 탁하게 흐려져서 살짝 미간에 주름이 잡힌 표정을 보고 있으니 루시아의 몸이 더 후끈하게 뜨거워졌다.

문득 캐서린에게 배운 지식을 써먹어 볼까 생각이 들었다.

‘뭐라고 했더라. 들어올 때 힘을 풀고 나갈 때 힘을 주라고…….’

배운 지식에 따라 착실하게 몸으로 실현하자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그가 미간을 좁히며 엉덩이를 움켜잡은 손에 강하게 힘을 주었다.

그의 표정을 살피면서 힘을 풀었다 주었다 몇 번 반복하자 그가 신음을 삼키며 으르렁거렸다.

“하지 마.”

루시아는 숨을 할딱이면서 시치미를 뗐다.

“뭘요……?”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그의 반응이 생각과 달라서 루시아는 당황했다.

“…남자가 좋아한다고 그랬는데.”

그가 움직임을 멈추고 인상을 썼다.

“누가?”

“…….”

“뻔하군. 티파티에서 여자들이 모여서 그런 소리나 하고.”

혀를 차는 그를 보면서 루시아는 죄 없는 귀부인들에게 아주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당신은 별로예요? 이러는 거?”

하복부에 다시 힘을 꽉 주었다.

그가 큭, 숨을 삼키며 그녀를 바라보는 붉은 눈이 확 타올랐다.

“감당도 못할 거면서 자극하지 마.”

휴고는 그녀의 엉덩이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두 발목을 잡아 어깨로 올리면서 강하게 치고 들어갔다. 단단한 끝이 깊은 안쪽을 찌르는 자극에 루시아는 눈이 시큰했다.

“흑!”

“조금만 강하게 해도 울면서. 내가 얼마나 참는지 알기나 해?”

그가 속도를 내어 힘차게 박음질을 시작했다. 묵직하게 무게를 실은 살덩이가 안을 채우며 치닫고 올라왔다.

“아! 아응!”

그의 흥분이 느껴졌다. 그가 가차 없이 밀고 들어와서 안을 쑤시고 찌르고 긁어 내렸다. 루시아는 예민한 안쪽을 쉴 새 없이 자극당하자 몸서리를 쳤다.

깊은 안쪽이 닿으면서 미약한 통증을 느꼈다가 안이 거칠게 마찰당하는 쾌감에 전율했다. 내벽을 할퀴면서 빠져나간 그가 곧바로 진입해 안을 꿰뚫었다.

철썩이는 살 부딪치는 소리를 들으며 그녀의 눈에 열기가 모이고 방울지는 눈물이 툭 떨어졌다.

“아! 휴! 으흣…….”

강렬한 절정에 다다라 루시아는 비명을 질렀다. 시야가 환해졌다가 어두워지기를 반복하며 끝없이 떨어지는 낙하감과 동시에 온몸이 떨리는 아득한 쾌감이었다.

그를 품은 안쪽이 쩌릿하게 죄어들면서 진동하듯 경련을 시작했다. 그가 몇 번을 더 밀고 들어오다가 그녀의 자궁 안쪽에 정액을 쏟아냈다.

루시아는 그가 꽉 끌어안는 압박감과 귓가에 들리는 그의 신음 소리를 들으면서 발끝부터 정수리까지 소름이 돋았다. 두 팔과 다리를 이용해 그를 휘감아 안았다.

두 사람의 가쁜 호흡 소리만 뒤섞이는 길고도 짧은 절정의 시간이 지나갔다. 흐느낌처럼 숨을 헐떡이면서 루시아는 캐서린에게 배운 지식은 그냥 묻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 파티장에서 귀부인들과 나눈 대화 때문에 루시아는 몇 개월 잊고 지냈던 꿈속 기억을 다시 되짚었다. 루시아가 또 다른 미래라고 이름 붙인 꿈속 기억은 이미 현실에서 많은 부분이 바뀌었다.

루시아는 뒤섞인 어린 시절의 기억을 정리하기 위해서 어려서 자랐던 마을에 사람을 보내서 몇 가지 사실을 알아냈다.

어릴 때 함께 뛰어놀았던 롯사는 아가씨가 되어 동네 청년과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꿈속에서 타고 놀았던 마을 어귀의 나무가 그루터기만 남은 상태였다.

십수 년 전, 루시아가 다섯 살 되던 무렵에 벼락을 맞아 새카맣게 타서 흉하게 되어 베어 버렸다는 것이다. 없는 나무를 올라타고 놀 수 없어서 어릴 때 사고가 없었다.

루시아는 나무에 벼락이 내리친 순간부터 미래가 갈라졌다고 생각했다.

달라진 미래가 있으나 여전히 똑같이 흘러가는 미래도 있었다. 왕이 공주들의 혼사를 추진하는 일이 그러했다. 루시아는 사교계 소문에 정통한 귀부인에게 슬쩍 메튼 백작부인의 소식을 물었다.

‘몇 개월 전, 그러니까 올해 초에 이혼했다지요. 친정 가문이 있는 서부로 내려간다고 들었습니다.’

루시아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루시아가 메튼 백작과 결혼한 이유는 특별히 서로 조건이 맞아서가 아니라 루시아가 궁에 남은 공주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루시아가 없으니 이제 루시아보다 어리지만, 가장 나이가 많은 공주가 메튼 백작과 결혼할 것이다. 자신의 끔찍한 미래를 다른 사람에게 떠넘긴 격이었다.

허리를 감고 있던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몸을 살짝 옆으로 돌리면서 루시아와 잠시 눈을 마주치고 눈가에 키스했다.

“왜 안 자.”

휴고는 그녀가 잠들지 못하고 간간이 작은 한숨을 내쉬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아이 문제를 고민하는 건가 싶어서 그 역시 잠들지 못하고 전전긍긍했다. 그녀와 아이 문제를 이야기하기는 해야 하는데 어느 선까지 말할 수 있을지 고민이 깊어졌다.

“당신은요?”

“옆에서 계속 한숨을 쉬잖아.”

“제가 그랬어요? 이제 조용히 할게요. 주무세요.”

“무슨 일이야. 걱정거리가 있어?”

혹시 아이 문제냐고. 입에서 말이 맴돌았다.

“…폐하께서 선왕의 공주들을 출가시킬 계획이라던데, 혹시 아세요?”

잔뜩 긴장했던 휴고는 그녀가 엉뚱한 말을 꺼내자 맥이 빠졌다.

“음, 들었어.”

할 말을 고르는 것처럼 주저하는 그녀를 휴고는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오늘 메튼 백작부인이 이혼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메튼?”

“잘 모르실 거예요. 그리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가문은 아니에요.”

“친하게 지냈나?”

“…그냥 조금 알고 지냈어요.”

루시아는 이런저런 사교계 소문을 그에게 미주알고주알 떠드는 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휴고는 굳이 그녀가 누군가의 사적인 소식을 꺼낸 것을 봐서 그 백작부인과 꽤 친하게 지냈나 보다 생각했다.

루시아는 그의 어깨에 기대 누운 채 고개를 들었다. 손을 뻗어서 그의 얼굴을 감쌌다. 손바닥 전체로 느껴지는 그의 피부와 체온을 느끼며 루시아는 꿈이 아니라고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아주 가끔. 루시아는 이 모든 것이 꿈일까 봐 겁이 날 때가 있었다. 그의 그늘에서 이렇게 평온하고 행복하게 보내는 나날이 현실 같지 않았다.

“…왜?”

휴고는 제 얼굴을 만지는 그녀의 손을 잡아서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녀의 이마를 쓸어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그의 다정한 손길이 좋았다. 루시아는 그의 커다란 손을 잡고 얼굴을 비볐다. 그녀의 어리광이 어딘지 모르게 애달파서 휴고는 덜컥 불안을 느꼈다.

“왜 그러는 거야.”

“메튼 백작이 선왕의 공주와 결혼하지 못하게 손을 써 주세요.”

루시아는 이대로 모르는 척 넘어갈 수 없었다. 얼굴조차 본 적이 없는 이복자매 중 누군가가 루시아가 꿈속에서 봤던 미래를 고스란히 대신 겪는다면 평생 죄책감을 벗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제가 지금 얼마나 이상한 소리 하는지 알아요. 이름도 모르는 이복자매이지만, 뻔히 보이는 불행을 못 본 척할 수가 없어요. 그런 자와 결혼하도록 둘 수가 없어요. 그자는 부인한테… 손찌검해요. 그보다 더 심한 짓도 해요.”

“비비안.”

휴고는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녀를 보듬어 안았다.

“당신과 결혼하지 않았으면 저는 아마……. 제가 그런 자와 결혼하게 되었을 거예요.”

“왜 그런 생각을 해.”

루시아는 이야기하다 보니까 자기도 모르게 분노가 치밀고 꿈속 기억이 떠오르면서 격한 감정을 가눌 수 없었다. 그가 꼭 안아주며 등을 쓸어내리자 루시아의 끓던 감정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백작부인과 상당히 많은 이야기를 나눴나 보군.”

“…….”

“알았어. 내가 조치할 테니까 당신은 잊어버려.”

“…정말요? 할 수 있는… 거예요?”

휴고는 그녀의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고작 그 정도 일을 가능하냐고 묻는 건가. 작정하면 그는 왕도 갈아치울 수 있었다.

“물론이지. 당신 남편 능력 쓸 만해.”

품에서 그녀가 작게 웃었다. 그제야 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불안이 그에게도 전이되어 긴장하고 있었다.

그는 유쾌하지 않은 사적인 부부 생활을 아내에게 미주알고주알 떠들어 괜한 걱정을 지운 메튼 백작부인이 짜증 나고 남편이라는 놈에게는 더 짜증이 났다.

휴고는 얼마 후 메튼 백작에 대한 상세한 조사 보고서를 손에 쥐었다. 그는 읽을수록 불쾌한 서류를 넘기며 혀를 찼다.

첫 결혼은 5년 만에 이혼, 두 번째 결혼은 여자 쪽 집안에서 손을 써서 결혼 달포 만에 결혼 무효. 그리고 세 번째 결혼은 몇 개월 전에 이혼으로 끝을 맺었다. 그리고 네 번째 결혼하기 위해 왕실에 청혼서를 넣은 것이 한 달 전이었다. 귀족의 이혼이 드문 일은 아니지만, 이놈은 과했다.

공식적인 자식은 아들 셋. 첫 부인에게서 낳은 큰아들과, 첫 부인 혼적에 입적한 혼외자 둘째 아들. 첫 부인은 입적을 조건으로 이혼한 것 같았다.

얼마 전 이혼한 부인이 낳은 셋째 아들이 있고 거두지 않은 혼외자도 몇 더 있었다. 젊어서 난잡했던 것치고 10년 가까이 자식을 낳은 적 없어서 아마 남성 기능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추측한다고 보고서에 쓰여있었다.

쓰레기 같은 놈이지만, 휴고는 꽤 많은 지참금을 제시한 이놈의 청혼서를 퀘이즈가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퀘이즈는 오직 동복누이 캐서린만 제 핏줄로 인정했다. 형제는 가능하면 죽이고 싶은 대상이고, 누이는 왕궁 예산만 축내는 식충이었다. 태자 시절부터 퀘이즈는 선왕이 여기저기 자식을 싸질러놓는 행위를 몹시 경멸했다.

선왕은 왕위를 두고 왕자들이 자기들끼리 죽이는 것을 방관했다. 오히려 자식들의 치열한 권력 다툼이 자신의 영향력을 높인다고 생각했다.

부친의 방탕함을 증오한 퀘이즈는 왕치고는 여자를 절제하는 편이었다. 후궁은 셋뿐이며 그것도 이해관계에 의한 필요 때문이었다. 무슨 수를 썼는지 후궁과의 사이에서는 자식도 없었다.

퀘이즈가 메튼 백작의 청혼서를 받아서 혼사를 추진하면 상대는 올해 열여덟 살이 되는 세실 공주였다.

‘이놈이 왕실에 청혼서를 넣을 것을 아내가 어떻게 알았을까?’

휴고는 잠깐 의아했으나 그리 오래 생각지 않았다. 다른 생각이 덮어버렸기 때문이다. 아내의 말대로, 아내가 아직 궁에 남아 있었으면 이놈과 결혼할 공주는 그녀가 되었을 것이다. 비비안 공주는 이 쓰레기의 아내가 되었을 것이다.

기분이 더러웠다. 발생하지 않은 일이지만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하나만으로 그는 차갑게 분노했다.

아내의 부탁을 어떤 식으로 해결할까 휴고는 고민했다. 이미 왕실로 올린 청혼서를 빼돌리는 일은 상당히 번거로웠다. 왕에게 말하자니 왕이 또 기회다 싶어서 뭘 요구할지 알 수 없었다.

휴고는 파비안을 불러 보고서를 주며 지시했다.

“그자가 내 눈에 띄는 일 없게 치워.”

“복잡하게 합니까, 단순하게 합니까?”

“단순하게.”

“예. 한데 일전에 지시하셨던 펜던트 말씀입니다. 송구합니다.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파비안은 그동안 주군이 펜던트를 언급하지 않아서 보고서를 들고 공작저를 찾을 때마다 조마조마했다. 수하들을 닦달해서 뒤지지 않은 곳이 없지만, 단서조차 잡지 못했다.

“음? 아, 그건 됐다.”

휴고는 찾을 필요 없다는 말을 한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열심히 찾느라 고생했을 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은 전혀 없었다. 자세한 사정을 알지 못하는 파비안은 질책 받지 않았다는 사실에만 그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일주일쯤 지나서 메튼 백작은 마차 전복 사고로 사망했다.

휴고는 메튼 백작의 사망 소식을 루시아에게 전했다. 물론 자신이 지시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당신 부탁을 처리하려고 알아보니까 그자가 사고로 죽었다더군.”

그는 마치 이름 모를 떠돌이 개가 죽은 것처럼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루시아는 이해했다. 메튼 백작은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정말 떠돌이 개만도 못한 존재일 것이다.

“…사고요?”

루시아는 믿기지가 않았다. 꿈속에서 얼마나 저주했던가. 벌을 받을 테니까 제발 그놈을 죽여달라고 빌었다. 간절한 저주가 통했는지 그래도 최후는 처참했지만, 마차 사고 같은 허무한 일로 죽을 것 같지 않은 자였다.

넋을 놓고 생각에 잠기는 그녀를 그의 팔이 감싸 안았다.

“그자가 죽은 게 충격인가?”

“…충격? 네, 아마…….”

“왜?”

“그렇게 시시하게는……. 죽여도 안 죽을 것 같은 자라고 생각했어요.”

휴고는 계속 궁에서만 살다가 바로 결혼해서 세상을 잘 모르는 순수한 그녀의 기준에 그자의 행태가 몹시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넘쳐나는 악을 기준으로 삼으면 메튼 백작 정도는 발바닥에 질척거리며 달라붙은 오물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것을 알 필요가 없었다. 메튼 백작 정도가 악의 정점에 서있는 기준이 되는 것으로 충분했다.

“이미 죽은 자야. 그만 생각해. 공주는 물론이고 그 누구와도 이제는 결혼하지 못하겠지.”

“…그렇군요.”

새삼 깨닫고 루시아는 감탄했다.

“그럼 백작가는 앞으로 어떻게…….”

“아들이 있으니 작위를 물려받겠지.”

“이혼한 백작부인한테 어린 아들이 있어요.”

메튼 백작이 죽었으니까 백작 가문이 역모에 휘말려 멸문할 미래가 바뀌고 브루노가 타국으로 망명할 미래 또한 바뀔 것이다.

루시아는 조숙한 소년 브루노가 말은 안 해도 제 어머니를 많이 그리워했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의 품이 필요한 아직 어린 아이였다.

작위를 물려받을 메튼 백작의 장남이 어린 동생을 관심으로 보살필 것 같지 않았다. 꿈속에서 봤을 때 서로 남같이 지내던 형제들이었다.

“백작부인이 원하면 제 아들을 친정으로 데려갈 수 있게 조치할게.”

휴고는 마음속 깊은 곳의 짜증을 누르고 다정하게 말했다. 그녀가 자꾸 딴 곳에 시선을 돌리는 것이 싫었다. 그녀의 모든 관심은 오롯이 그를 향해 있어야만 했다.

백작부인이 아들을 데리고 가기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그녀에게 굳이 말하지 않았다. 백작부인이 재혼을 하려면 아들이 짐이 될 것이다.

만약 백작부인이 아들을 택한다면 아들이 성년이 될 때까지 최소한 앞으로 10년 이상은 재혼할 수 없었다. 귀부인이 자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백작부인이 아들보다 제 안위를 먼저 생각할 가능성이 컸다.

“정말요?”

정말 그런 걸 할 수 있어요? 반짝거리는 눈의 그녀를 보며 휴고는 피식 웃었다. 아내는 그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세상에 그가 할 수 없는 일은 거의 없었다. 사람 목숨을 가져가는 사신의 역할마저 그의 것이었다. 오직 죽은 사람을 살리는 신의 영역만 그에게서 비켜나있을 뿐.

“그러니까 이제 잊어버려. 그쪽은 더는 신경 쓰지 마.”

“그럴게요.”

다 털어버릴 것처럼 생긋 웃는 그녀가 예뻐서 휴고는 그녀의 말랑거리는 볼을 깨물었다. 화들짝 놀란 루시아는 그를 흘겨보다가 두 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고 품에 안겼다.

“정말 많이 감사해요, 휴.”

“고마우면 선물.”

쿡 웃음을 터뜨린 루시아는 고개를 들어 그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사랑해요. 이걸로는 부족해요?”

그녀를 꽉 안으면서 그는 그녀 귓가에 속삭였다.

“넘쳐.”

휴고는 이 자그마한 여자가 그에게 주는 행복이 믿기지 않았다. 이대로 정말 괜찮은지 누군가 답을 주었으면 좋겠다. 그에게는 가혹하기만 했던 그의 운명이 갑자기 변덕을 부리는 것만 같아서 그는 불안했다.

* * *

왕비는 여자아이를 낳았다. 휴고는 왕과 함께 있을 때 공주의 탄생 소식을 들었다. 공주가 태어났다는 말을 전해 듣고 퀘이즈는 크게 기뻐했다.

“하하하! 공주라고?”

꾸며낸 기색이 아니라 퀘이즈는 진심으로 즐거워했다. 휴고는 그동안 태어날 아이가 여자아이였으면 바란다고 지나가듯 몇 번 왕이 하는 말을 들었다.

그러려니 하며 넘겼는데 정말 좋아하는 퀘이즈를 보면서 기분이 묘했다. 아들이 이미 셋씩이나 있는데 아이 하나 더 태어난 일이 뭐가 저리 좋은지 잘 모르겠다.

“공, 그대도 소식이 올 때가 되지 않았나?”

“…아직입니다.”

“그리 애지중지하는 공작부인을 닮은 딸 하나 낳지 그러나. 짐은 공주를 보러 가봐야겠네. 공주라. 공주란 말이지.”

왕이 오후의 남은 일정을 모두 취소해서 휴고도 평소보다 일찍 귀갓길에 올랐다. 마차에서 휴고는 내리 한숨을 내쉬었다. 공주가 태어난 소식은 곧 아내의 귀에도 들어갈 것이다.

왕비의 부른 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그녀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당신의 비밀을 누군가 아는 것이 당신께 고통이라면 그러실 필요 없어요.”

돌이켜 생각할수록 그녀는 조건 없이 그를 이해해 주었다. 휴고가 아이를 원하지 않는 정확한 이유를 묻지 않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 비밀은 당신을 고통스럽게 할지도 몰라.”

“만약 그렇다면 당신께 매달려 볼게요.”

아내는 거짓말을 했다. 그의 비밀이 아무리 그녀를 고통스럽게 해도 그녀는 홀로 삼킬지언정 절대 말해 달라고 매달리지는 않을 사람이었다.

‘내가… 털어놔야겠지.’

집에 돌아가니 아내는 외출 중이었다. 오늘 참석한다는 티파티가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내가 들어오면 알려달라고 제롬에게 일러놓고 집무실로 들어갔다. 얼마 후 아내가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그녀를 마중 나갔다.

“당신이 어쩐 일이에요?”

루시아는 예상 못한 선물을 받은 것처럼 기뻤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그의 품에 폭 안겼다.

“티파티는 재미있었어?”

“소소하게 즐거웠어요.”

휴고는 한쪽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함께 2층으로 올라갔다.

“어쩐 일로 오늘 일찍 들어오셨어요?”

루시아는 그가 이끄는 대로 응접실에 들어와 소파에 앉았다.

“당신도 곧 소식을 듣겠지. 공주님이 태어나셨어.”

“어머나, 잘되었네요. 캐서린 공주님이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좋겠다고 몇 번을 말씀하셨거든요.”

그럴 때마다 루시아는 캐서린에게 ‘예쁜 공주님이 태어나실 거예요’라고 답했다. 캐서린은 그저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루시아는 공주님이 태어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폐하도 좋아하시더군.”

휴고가 입을 다물고 잠시 대화가 끊겼다. 루시아는 그가 말을 꺼내기 곤란해하는 기색을 느끼고 불현듯 떠오르는 걱정이 있었다.

“데미안에게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죠?”

“…갑자기 왜 데미안?”

“태어난 아기 얘기를 해서 그런지 데미안 생각이 나서요.”

“그 녀석은 잘 지내. 무슨 일이 생길 일이 없어.”

“잘 있으면 됐어요. 당신은 왜 데미안 얘기만 나오면 퉁퉁거려요?”

“뭐? 퉁퉁?”

“애 아버지가 되어서 아들하고 신경전 하려 들지 마요.”

“신경전 하려는 게 아니라. …후우. 그래. 속 좁아 미안하군.”

루시아는 웃으면서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잡고 그의 입술에 살짝 붙였다 떼는 입맞춤을 했다.

“속 좁아도 괜찮아요. 사랑해요.”

“…속 좁지 않다고 말해 주지는 않는 건가?”

“사실, 가끔은 당신이 속이 좁을 때가…….”

루시아는 그를 향해 묘한 눈빛을 보내다가 뚱한 그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 변한 거 같아.”

“뭐가요?”

날이 갈수록 그녀에게 말려들고 있었다. 휴고는 고개를 갸웃하는 그녀를 물끄러미 보면서 잠시 자신을 돌아보았다.

아무리 봐도 아내는 자신보다 작고 약했다. 그런데 그가 오히려 약자의 입장이 되어서 아내의 기분을 살피고 있었다. 그런데 전혀 기분 나쁘지 않다는 점이 가장 문제였다.

휴고는 고개를 디밀어서 짧은 키스를 했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눈을 곱게 휘며 웃는 그녀가 예뻐서 몇 번 더 쪽쪽 입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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