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시아-63화 (64/77)

63장 끝, 그리고 시작 (4)

오늘도 귀가한 휴고를 맞이하러 나온 사람들 틈에 루시아는 없었다. 제롬은 주인에게 어제와 똑같은 대답을 했다.

“주무십니다.”

“저녁은?”

“아직 들지 않으셨습니다. 낮부터 주무시는 터라…….”

아내의 잠이 지나치게 많아져서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휴고는 얼마 전 주치의에게 괜찮은 거냐고 물었다.

‘잠이 많아지고 피로를 쉽게 느끼는 것은 임신 초기의 대표적인 증상입니다. 마님이 많이 주무시기는 하지만, 걱정할 일은 아닙니다. 마님 정도면 대단히 무난하게 임신 초기를 겪고 계십니다.’

대단히 무난하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정상이라는 주치의 대답에 안심하면서도 섭섭했다. 치료로 잠을 줄일 수 없다는 뜻이니까.

아내와 제대로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눈 적이 언제인지 까마득했다. 낮에 집에 있으면 그래도 깨어있는 모습을 볼 수 있을 텐데 아침에 나가서 저녁에 들어오는 휴고의 바쁜 일정은 느슨할 여지가 없었다.

며칠 전에 휴고를 더욱 우울하게 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나마 매일 밤 아내를 품에 안고 자는 것으로 겨우 아쉬움을 달래고 있었는데 그녀가 그런 접촉을 귀찮아하기 시작했다.

엊그제는 잠옷 안으로 손을 넣어서 (그의 기준으로) 조금 만졌다고 질색하면서 아예 곁에도 오지 못하게 했다.

휴고는 황당함과 억울함을 어디서 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시 주치의에게 물었다. 요즘 주치의는 공작의 상담사 역할을 하고 있었다.

‘임신 초기에는 남편의 신체적인 접촉을 극도로 꺼리는 반응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임신 중기에 들어서면 나아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조언이었다. 휴고는 주치의가 돌팔이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죄 없는 주치의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다.

휴고는 아내의 침실로 들어갔다. 어둑한 침실의 침대 위에 누워있는 형체를 향해 다가가서 조심히 침대에 걸터앉았다.

바라보기만 하는 중에 등을 보이고 누워있던 루시아가 몸을 뒤척여 그를 향해 몸을 돌려 누웠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다가 자기도 모르게 멈칫하고 자괴감에 빠졌다. 왜 내 여자를 마음껏 만지지도 못하는 건가.

이런 불합리한 상황을 대체 누구를 탓해야 하는지. 휴고의 시선이 조금 아래로 내려가서 이불로 덮인 그녀의 배를 향했다.

그녀의 자궁에서 자라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지의 생명체는 그를 인생 최대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그래도 아기 탓을 하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는 아이를 갖는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히 생각했다. 그냥 아이가 생기면 자라다가 낳으면 끝나는 것인 줄 알았다.

이런 과정을 네 번이나 겪은 왕이 존경스러웠다.

휴고는 용기를 내서 손을 뻗었다. 보들보들한 뺨을 만지다가 그녀의 이마를 쓸어서 머리카락을 넘겼다. 루시아가 잠투정처럼 웅얼거리는 소리를 흘리자 그는 잠시 긴장했다. 그리고 루시아가 눈을 깜박거리는 모습을 보며 숨을 죽였다.

“휴……?”

그녀의 반응이 온순했다. 휴고는 내심 안도의 숨을 쉬었다. 아내의 심리 상태가 살얼음판 같아서 전쟁터보다 더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을 보며 항상 웃기만 했던 불과 몇 개월 전의 아내가 몹시 그리웠다.

루시아는 그를 향해 웃으면서 두 팔을 뻗었다. 휴고는 이게 웬일이냐 싶어서 냉큼 화답해서 안았다. 부드럽고 따끈한 그녀를 안고 코를 스치는 향기를 맡으며 그는 행복은 정말 사소한 것에서 비롯된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꿈에서 어머니를 뵈었어요. 젊고 아름답고 행복해 보이셨어요.”

“부디 매일 당신 꿈에 찾아오시기를 바라야겠군. 젊고 아름답고 행복한 모습으로.”

루시아가 농담을 들은 양 웃었으나 휴고는 진심이었다.

“저녁은 먹고 자야지. 지금 준비하라고 할까?”

“별로 입맛이 없어요.”

“점심도 대충 먹었다며. 먹고 싶은 것 없어? 뭐든 생각나는 것 있으면 말해 봐.”

‘당신 배 속의 아기가 당신 몸의 영양을 다 빨아먹고 있다는데.’라고 휴고는 주치의가 해준 말에 과격한 표현을 첨가해서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음……. 있기는 해요. 그거면 입맛이 날 것 같아요.”

휴고는 긴장했다. 이번에는 제발 구할 수 있는 음식을 말하기를 바랐다.

지난번 청포도는 결국 구하지 못했다. 며칠 시무룩해 있는 그녀를 보면서 그는 안절부절못하고 자신의 무능력을 실감해야 했다.

“어릴 때 살던 마을에 야시장이 열렸거든요. 피터 아저씨가 구운 꼬치구이가 정말 맛있었어요.”

뜬금없는 요구였으나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아서 휴고는 안심했다. 야시장. 피터. 꼬치구이. 핵심 단어를 기억해 두었다.

“알았어.”

“와아. 그럼 저녁은 그걸로 하면 되겠네요.”

“…지금?”

“지금이 아니면요?”

되묻는 루시아를 잠시 보다가 휴고는 한숨을 삼켰다. 즉시 제롬을 불러서 지시했다. 제롬은 직접 하인 몇을 데리고 마님이 어릴 적 살았다는 마을을 찾아갔다.

몇 시간 지나서 공수해 온 꼬치구이를 받아 들고 그가 직접 2층으로 가지고 올라갔다.

루시아는 응접실에서 배내옷을 만들다가 남편이 가져오는 접시를 보며 기뻐해서 그를 흐뭇하게 했다. 그러나 겨우 몇 입 먹고 내려놓으면서 배가 부르다고 했다.

“청포도는 언제 열릴까요?”

그놈의 청포도. 휴고는 아예 농장 하나를 사버릴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 * *

딘이 돌아왔다. 휴고가 필립을 잡아오라고 명령한 지 한 달이 조금 지났다. 휴고가 일러준 마을에 갔더니 필립은 이미 떠난 지 좀 되어서 주변을 수색하느라 시간이 걸렸고,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서 찾아 데려올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안가에 데려다 두었습니다.”

“수고했다.”

수도 외곽의 낡은 저택을 타란 가문 정보부의 안가로 이용 중이었다. 오래되어 음침한 분위기를 풍기는 저택은 상당한 넓이의 뜰이 에워싸고 있어서 밖에서는 담 안쪽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주변에는 바깥 외출을 하지 않는 괴팍한 노인이 주인이더라는 소문만 돌았다.

안가의 출입구는 저택과 조금 떨어진 곳의 비밀통로를 이용하기 때문에 외부적으로는 저택을 관리하는 고용인 몇 명만 드나들었다.

휴고는 밤늦은 시간에 남들 눈에 띄지 않도록 안가로 향했다.

겉보기에 낡은 저택 안쪽은 보강공사로 방음처리를 했다. 특히 지하로 내려가면 지하에서 어떤 소음이 나도 밖으로 퍼져나갈 일이 없었다.

방 앞을 지키고 선 기사들이 휴고가 나타나자 고개를 숙였다. 묵직한 돌문이 다 열리고 나서도 휴고는 잠시 서있었다.

“따라 들어오지 마.”

그는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멈칫했다. 딘을 돌아보며 손을 내밀었다.

“검.”

딘이 즉시 허리에 찬 검을 풀어 휴고에게 건넸다. 검을 쥐고 안으로 들어가자 금방 문이 닫혔다.

사방이 돌 벽으로 막힌 그리 넓지 않은 방이었다. 방음이 철저해서 돌문을 닫으면 밖에서는 안에서 내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방 한가운데 의자 두 개가 있었다. 의자 하나에는 필립이 앉은 채 손이 뒤로 의자에 묶였다. 철재로 만든 의자는 아예 바닥에 고정되어 있었다. 철저하게 안정장치가 마련되어 있기에 휴고가 혼자 들어가겠다는 명을 기사들이 순순히 따랐다.

휴고는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필립을 노려보았다.

천천히 고개를 드는 필립의 안색이 초췌했다. 다친 곳은 없었지만 밤낮없이 제대로 쉬지 못하고 마차에 실려 와서 체력적인 한계에 부딪혔다. 체력에 제법 자신이 있었으나 역시 나이는 속일 수 없었다.

필립은 차가운 붉은 눈을 보며 흐릿하게 웃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집어치워.”

휴고의 냉랭한 반응에도 필립은 개의치 않았다. 이유 모르고 갑자기 끌려와 온몸이 꽁꽁 묶인 상태인데도 필립의 표정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이런 늙은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목이 잘리는 순간조차도 이 늙은이는 담담할 것이다. 오늘따라 그게 몹시 거슬렸다.

“네놈이 왜 여기 와있는지 알겠지.”

“말씀을 해주셔야 알지요.”

휴고는 당장 늙은이의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은 치솟는 살기를 눌렀다.

“네놈이 날 불렀잖아. 그것도 의미 없이 지껄였다 할 참인가?”

“아닙니다. 다만 도련님께서 절 찾으실 이유가 여럿 있어서 말입니다. 마님의 치료가 필요하십니까? 아니면, 마님께서 회임하셨습니까?”

휴고의 미간이 꿈틀하는 것을 보면서 필립이 눈을 크게 떴다.

“…회임하셨군요.”

역시 하늘은 필립을 버리지 않았다. 공작부인의 두통약에 약을 섞어 넣으면서도 필립은 성공을 확신하지 않았다.

변수가 많았다. 마님이 그 두통약을 꾸준히 복용하리라고 장담할 수 없고, 약효가 떨어져서 삼엽쑥 중화의 치료가 더딜 뿐만 아니라 임신 가능성도 극히 낮았다. 그런데 2년 만에 임신에 성공했다.

“감축드립니다.”

필립의 축하는 전혀 달갑지 않았다. 휴고는 검을 쥔 손에 힘을 꾹 주고 당장 검집 채 사정없이 내리치고 싶은 욕구를 참았다.

“역시 네놈 짓이었군. 피? 날 능멸했을 때는 목숨 부지할 미련은 버렸겠지.”

“왜 제가 거짓말을 했다고 단정하십니까? 마님께서 다른 사내의 아이를 가졌을지도…….”

목 아래 서늘하게 닿는 예기를 느끼며 필립은 입을 다물었다. 순식간이었다. 휴고는 일어나서 뽑아 든 검을 쥐고 정확히 필립의 목울대를 겨누고 있었다. 살갗을 찌르고 있는 검 끝은 필립이 한마디라도 말하면 안으로 파고들 것 같았다.

“한 번만 더 개소리해 봐.”

필립은 휴고를 올려다보며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가운 표정, 살기가 감도는 눈빛, 가라앉은 목소리.

필립은 휴고가 극도로 화가 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어지간한 일에 긴장하지 않는 필립이 등 뒤가 스산했다. 검이 거두어지자 숨을 들이켰다.

“가문의 비전입니다. 거짓으로 말씀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제 와서 물어도 네놈이 말하지 않을 테고.”

“말씀드려 봤자 그건 믿으실 수 있겠습니까?”

“비전 따위 알 바 아냐. 어차피 늙은이 죽으면 함께 묻힐 것들.”

“과거에 제가 한 거짓말이 노여워서 성가시게 절 잡아오라 하실 분은 아니지요.”

“잡소리는 닥쳐. 네놈이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알아야겠어.”

휴고는 아내를 보호하는 주변에 빈틈이 있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다.

“두통약입니다.”

필립은 순순히 자백했다. 어차피 잡아뗄 생각은 없었다.

“두통약.”

휴고는 강조해서 뇌까리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돌아가는 대로 어떻게 된 일인지 철저히 알아 봐야겠다. 필립을 잡아온 첫 번째 목적은 달성했다.

“왜 날 보자고 한 것인지 말해.”

필립은 물끄러미 휴고를 바라보았다.

“제가 무슨 말을 할지 왜 그리 궁금하셨습니까?”

“헛 수작 부리지 마. 네놈은 살아서 이 방을 나가지 못할 거야.”

“죽이십시오. 살 만큼 산 늙은이가 목숨에 무슨 미련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절 죽이지 못하실 겁니다. 제게서 알고 싶은 일이 있으실 테니까요.”

흔들리는 붉은 눈동자를 보며 필립은 탄식했다.

‘이럴 수가.’

극히 희박한 확률이라고 생각했다. 로암에서 공작이 공작부인에게 유난한 반응을 보일 때부터 한 가닥 의심을 품었으나 그럴 리 없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여자에게 마음을 품고 약점을 만드는 일은 타란 가문과 북부의 주인이라는 높은 지위에 오른 사내가 해서는 안 될 짓이었다.

필립은 세상일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진리를 오랜 세월을 겪은 지혜로 깨달았다.

인간의 계획은 거대한 세상의 질서에 비하면 부질없었다. 계획보다는 당장 눈에 보이는 기회에 모든 노력을 다해 매달리는 것이 최고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필립은 공작부인의 임신에 매달렸다. 당시에는 그것이 유일한 기회였다. 거창한 뒷일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우선 아이가 있어야 뒷일을 도모할 수 있었다.

공작부인이 아이를 가지면 공작은 높은 확률로 불륜을 의심할 것이다.

공작은 사람을 믿지 않았다. 특수한 방법이 아니고서는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알고 있는 공작이 공작부인이 제 아이를 가졌다고 믿을 리가 없었다.

공작 부부의 사이는 멀어질 것이고 정절을 의심받은 공작부인은 태어난 아이마저 방치할 것이다.

기회를 노릴 수 있다. 막연한 필립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아주 희박한 가능성.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확률로 공작이 정말 공작부인에게 마음을 온전히 주고 신뢰할 경우를 대비해서 필립은 공작에게 한마디 뜻 모를 말을 남겼다.

필립이 북부 국경에서 의료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도 언제고 야만족 토벌 문제로 공작이 근방에 오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나타난 공작가 기사들에게 잡혀서 마차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 오면서도 필립은 설마 했다.

필립은 공작이 가문을 향한 덧없는 분노를 풀고 진정으로 북부의 주인 자리를 받아들이기를 언제나 소원했다. 그러나 여자에게 빠져서 마음이 약해지는 일만큼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럴 수는 없어.’

타란 혈족의 번영을 위해서 필립의 가문이, 그리고 필립 자신이 어떤 희생을 치렀는데! 공작은 수많은 사람의 피와 눈물을 배신하고 있었다.

“무엇이 알고 싶으신지 이 늙은이의 짐작을 말씀드리지요.”

필립의 머릿속에 착착 계획이 그려졌다. 지금 막 생각한 계획이 아니었다. 필립은 언제나 수많은 상황을 가정해서 다양한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그때그때 상황이 닥칠 때마다 큰 줄거리가 잡힌 계획에 살을 붙였다.

“타란 가문 비밀의 방 어디에도. 가문의 혈통을 이어줄 아들을 낳은 신부의 모친에 관한 기록은 없을 겁니다. 이복누이의 존재만 신경 쓰셨지, 이복누이를 낳은 여자들이 어찌 되었는지는 평소에 관심이 없으셨을 테지요.”

필립은 붉은 눈동자가 타오를 것처럼 선명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마른 입술을 축였다. 그리고 평소와 다름없이 적당한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가씨를 출산하시고 마님께서 무탈하신지. 그것이 알고 싶어서 절 부르신 것 아닙니까?”

휴고는 느물거리는 늙은이의 목을 당장 이 자리에서 쳐버리고 싶었다.

‘간교한 늙은이 같으니라고.’

집착으로 똘똘 뭉쳐서 목적을 위해서는 어떤 거짓말도 서슴지 않을 자였다. 휴고는 어쭙잖은 자비를 베풀어 필립을 살려둔 것을 깊이 후회하며 이를 갈았다. 다른 놈들 청소를 할 때 늙은이 역시 치워 버렸어야 했다.

세 치 혀에 놀아나기 전에 영원히 입을 다물도록 지금이라도 죽여버리는 편이 낫다는 것을 안다. 휴고의 냉정한 판단력은 그런 결론을 내렸다.

필립이 휴고의 안위 문제로 장난질을 했으면 코웃음 한 번 치고 망설임 없이 그럴 수 있었다. 그러나 휴고는 그녀의 목숨을 걸고 도박할 수 없었다.

필립의 말대로 휴고는 아이를 낳고 그녀가 괜찮을지 의혹을 품었다. 같은 혈족이 아닌 보통의 여자는 특수한 방법으로 몸을 만들지 않으면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정상적인 임신이 아니었다.

타란의 유별난 혈통은 휴고에게 자기 정체성에 관한 의문을 항상 가져다주었다. 나는 정말 인간인가. 휴고는 언제나 그런 의문을 떨칠 수 없었다. 가뜩이나 약한 아내가 인간 같지 않은 생물의 씨를 품어 키워서 낳으면 정말 괜찮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휴고의 의문에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필립뿐이었다. 그래서 필립을 떠보려 했으나 오히려 필립이 휴고의 속내를 간파했다.

휴고가 필립을 잡아오라고 했을 때부터 이미 속이 읽혔다. 휴고가 아내를 걱정하지 않았다면 필립이 던진 한 마디의 의미를 고민하지 않았을 테고, 필립을 불러 굳이 무슨 뜻이었느냐고 확인하려 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필립은 공작이 자신을 노려보기만 하고 손에 쥔 검을 휘두르지 않는 것을 보면서 공작부인이 공작의 약점이 되었음을 확인했다.

필립은 묘한 상실감을 느꼈다. 완전한 존재가 인간화되는 비극을 목격하는 좌절이었다.

‘도련님은 완벽합니다. 그 완벽함에 어째서 흠집을 내려고 하십니까.’

공작은 고대 귀족의 유일한 혈통인 타란 혈족이 만든 최고의 역작이었다. 쌍둥이로 태어나서 결국 하나가 죽은 것도 지금의 공작을 만들기 위한 과정이었다. 고귀한 희생이었다. 필립은 그렇게 생각했다.

죽은 휴고는 약하고 타란 혈족답지 않게 심약했다. 그런 피를 이어받은 데미안 도련님은 불완전했다.

데미안 도련님이 휴 도련님의 딸과 결합하면 또다시 완벽한 후손이 탄생해서 타란 혈족을 이어갈 것이다.

필립은 그런 미래를 그렸다. 목숨이 질겨서 오래 살면 볼 수도 있을 테고, 보지 못하고 죽어도 상관없었다. 필립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당장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할 뿐이었다.

필립은 완벽함을 내버리고 여자를 택한 공작의 선택에 관여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어떤 말을 해도 공작은 귀를 닫을 것이다.

세상일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아서 좋지 않은 일에는 대부분 좋은 일이 따라오기 마련이었다. 공작의 변화는 좋지 않은 일이지만, 그래서 파고들 틈새를 찾았다.

“마님께서는 무탈하실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네놈이 정말.”

휴고는 이를 악물었다. 이놈을 당장 죽이라고 휴고의 마음속에서 거센 분노가 외쳤다. 검은 쥔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필립의 얕은수에 얼마든지 휘말려도 좋았다. 그래서 그녀가 무사하다면 감수할 수 있었다.

“제가 어떤 말씀을 드려도 과연 믿으실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먼저 신뢰를 드려야겠지요. 마님께서 배가 불러오기 시작할 즈음에 견디기 힘든 복통을 호소하실 겁니다.”

필립이 두통약에 섞은 약은 최종 완결판으로 가는 과정에서 탄생한 불완전한 약이었다. 따라서 부작용이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임부들이 태아가 자라나서 자궁이 확장될 때마다 느끼는 통증을 심한 복통으로 앓았다. 배를 감싸 쥐고 데굴데굴 구르며 엉엉 울음을 터뜨릴 정도로 강한 통증으로 괴로워했더라고 기록은 말했다.

임부나 혹은 태아가 잘못되는 부작용은 아니었다. 그저 임부가 임신 기간 내내 아이가 커질 때마다 극심한 고통을 느낄 뿐. 하지만 필립은 그런 속 내용까지는 밝히지 않았다.

“처방전을 드리겠습니다. 마님께서 복통을 느끼실 때 처방전대로 약을 드시면 복통이 가라앉으실 겁니다.”

필립의 선조는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서 임부들이 겪는 부작용을 해소하는 약을 찾아냈다. 그렇게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서 현재 사용하는 약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 약에 수작 부리지 않았다는 건 어떻게 믿지?”

“믿지 못하면 쓰지 않으시면 됩니다.”

휴고는 헛웃음을 쳤다. 그전까지 휴고가 알고 있던 필립이 아니었다. 거리낄 것 없다는 듯 몸 사리지 않고 휴고에게 맞서고 있었다.

휴고는 속이 뒤집힐 것처럼 거북하면서 대체 이놈이 무엇을 믿고 이러는지 궁금했다. 놈의 술수에 자신이 말려들 것이라고 확신하는 건가. 그 정도로 자신을 만만히 보고 있는 건가.

필립을 내치고 얼굴을 보지 않은 지가 거의 10년이었다. 그사이 휴고는 공작이 되었고 전쟁터를 휩쓸어 전공을 세웠으며 능구렁이 정치인들을 상대했다.

형제의 목숨을 담보로 잡혀서 죽은 선대 공작에게 뒷덜미 잡힌 채 꼼짝하지 못하던 그때의 자신이 아니었다.

휴고는 분노를 가라앉혔다. 놈에 대한 평가를 몇 단계 높였다. 고작해야 주치의 따위가 아니라 치열한 거래를 나누는 노련한 정치인의 자리에 놓았다. 로이를 살리려고 라미스 공작과 마주 앉았을 때의 기분을 되살렸다.

머리는 차갑게 식히고 겉으로는 적당한 분노를 내보였다. 놈의 말에 완전히 말려드는 태도를 보였다.

“네놈 말대로 복통이 있으면. 이유는 뭐지?”

“짐작하시는 대로입니다.”

“짐작? 내 속을 읽는다고 지껄이는 거냐?”

“항상 괴물이라고 하셨지요. 마님은 배 속에 괴물을 키우고 계신 것 아닙니까?”

휴고는 들고 있던 검집을 휘둘러 필립의 머리를 후려쳤다.

둔탁한 소리와 동시에 필립이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머리에 가해진 강한 충격으로 현기증이 핑 돌아서 필립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눈을 감았다. 이마를 타고 주르륵 흐른 무언가가 무릎으로 떨어졌다.

필립은 똑똑 떨어져 옷에 스며드는 붉은 피를 응시했다.

“네놈의 독사 같은 혓바닥을 언제고 뽑아버리고 싶다고 생각했지.”

살기가 넘실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필립은 욱신거리는 통증으로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들었다. 형형한 붉은 눈동자는 당장 달려들어 찢어 죽일 것처럼 필립을 노려보고 있었다.

필립은 사납고 잔인한 공작의 성품을 알고 있었다. 노여움이 극에 달한 공작 앞에 있는 자신의 목숨이 붙어있다는 사실로 필립은 다시 확인했다. 공작부인은 공작의 절대적인 약점이었다.

휴고는 겉으로는 날뛰는 분노를 억누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분노보다는 필립의 말을 분석하고 있었다. 괴물이라는 말은 휴고가 자신을, 그리고 타란 일족을 칭한 말이며 그 말을 할 때마다 필립은 질색했다. 그런데 필립이 스스로 괴물이란 말을 꺼내 휴고를 자극했다.

‘날 화나게 해서 대화의 주도권을 잡으려 하는군.’

“늙은이. 네놈 말대로 저주받은 타란 혈족은 괴물이야. 내가 태어나지도 않은 가문의 저주를 이은 자식에게 미련이 있을 거 같아?”

아이는 지워버리는 그만이라는 식의 태도를 보이는 공작을 보면서 필립은 예상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시겠지요. 하지만 그러지 않으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정말 마님을 잃고 싶지 않으시다면 말입니다.”

“또 개소리군.”

“타란의 핏줄은 무척 강한 생명력을 갖고 있습니다. 태아일 때부터 스스로 보호하려는 본능이 강력하지요. 약물로 낙태하려 하려다가는 오히려 모체만 위험할 겁니다. 이 말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믿지 않으셔도 어쩔 수 없지만, 마님께서 위험하실지 모를 그런 모험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

못 한다. 모험은 못 해. 발밑이 푹 꺼져 들어가는 막막함이었다.

휴고는 필립과 자신의 관계를 다시 재설정했다. 동등하지 않았다. 현재 휴고는 철저한 약자였다. 휴고는 가진 정보가 전혀 없고, 필립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압도적으로 불리한 위치에서 하는 거래는 형제가 죽은 이후 처음이었다.

‘정보가 필요해.’

필립이 쥐고 있는 필립의 가문이 대대로 전해오는 기록들을 손에 넣어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공작 위에 막 올랐을 때 샅샅이 뒤졌어도 찾지 못했다.

아이는 점점 자라 출산일이 다가올 테고 주어진 시간은 한계가 있었다. 어디서 기록을 찾을 수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휴고는 일어났다. 지금 필립과 더 말을 섞어봤자 가진 패를 다 드러내는 꼴이었다. 돌아서는 그의 눈에 비장함이 감돌고 검을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하얗게 변색했다.

당장 검을 뽑아 목을 날려버리고 싶었다. 만약 필립이 뒤에서 휴고를 불러 세웠다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신호를 받은 밖에서 돌문을 열었다. 휴고는 문밖으로 나와서 들끓는 심사를 가누지 못하고 한참을 굳은 것처럼 서있었다.

기사들이 주군의 심상치 않은 기색에 숨을 죽였다.

“딘.”

“예, 주군.”

“들어가서. 저 늙은이가 말하는 처방전 받아서 가져와. 철저히 감시해. 나 말고 누구도 저놈과 접촉하는 일 없게 해.”

기사들의 대답의 들으면서 휴고는 지상으로 통하는 계단을 올랐다. 발목에 쇳덩어리를 매단 것처럼 한 걸음 한 걸음이 지독히 무거웠다.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막연한 누군가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자신의 운명, 그리고 자신을 내려다보며 조롱하는 하늘에 대한 분노였다.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밤이 이슥한 시간이었다. 휴고는 집무실에서 한참 멍하게 앉아있었다. 생각해야 한다고 스스로 다그쳤으나 도통 두뇌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두통약. 그래……. 두통약부터 어떻게 된 건지 알아보고…….’

그 후는 모르겠다. 머릿속이 새하얀 백지처럼 비었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발끝부터 천천히 그를 잠식하는 까마득한 어둠에 송두리째 잡아먹히는 끔찍한 무력함이었다.

그건 공포였다. 불안하게 뛰는 심장이 점점 거세게 울리면서 숨이 막혔다. 사지가 묶여 배가 갈리고 심장이 뽑히는 죽음이 눈앞에 다가온다고 해도 이 정도로 두렵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를 잃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휴고는 미칠 것 같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휴고는 새벽녘에 집무실을 나왔다. 그녀의 침실로 들어가서 곤히 잠든 아내를 우두커니 서서 내려다보았다. 이불을 젖히고 침대 위로 올라가 품 안으로 가득 그녀를 안았다. 미열이 있는 아내의 몸이 따끈따끈했다.

가슴에 차오르는 행복과 절망. 이 여자를 잃고는 살 수가 없었다. 아마 자신은 심장이 터져서 죽을 거라고 휴고는 생각했다.

“제가 말한 적 없죠? 저랑 결혼해 줘서 고맙다고.”

“…천만에. 당신은 지독한 늪에 빠진 거야.”

남들 다 갖는 아이를 갖는데 온갖 마음고생을 하고, 어렵게 가진 아이는 어미 목숨을 갉아먹는 원흉이 되었다.

남들은 겪지 않을 일을 오직 그녀만 감당해야 하는 이유는 모두 그녀가 그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날 자신을 찾아오지 말았어야 했다. 차라리 서로 모르는 인연으로 살았더라면. 그랬다면 그녀가 이런 위험에 처할 일도 없었겠지.

그러나 그녀를 만나지 못한 그는 평생 잿빛 풍경을 보며 얼어붙은 심장으로 살아갔을 것이다.

‘…놓을 수 없어.’

지금 다시 과거로 돌아가도 그녀를 도저히 놓을 자신이 없었다. 추악한 이기심이었다.

“사랑해.”

휴고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며 시큰거리는 눈을 감았다. 눈에 확 열기가 몰리면서 뜨거운 것이 눈 옆을 타고 흘렀다. 심장이 움켜잡히는 것 같고 목이 죄어드는 것처럼 아팠다.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휴고는 ‘운다.’라는 단어의 의미를 떠올렸다.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여 눈물을 흘리다.’라는 건조한 표현으로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으로 뒤얽힌 감정의 울림이었다.

휴고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밤새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어둠이 물러가고 새벽을 여는 햇살이 점점 침실을 밝히는 시간의 흐름을 응시하며 오랜 생각의 결론을 내렸다.

루시아는 오늘 아침은 조금 이르게 눈을 떴다. 등에 닿는 온기와 뒤에서 몸을 감고 안은 힘을 느끼면서 웃음을 지었다.

들썩들썩 움직여서 그를 마주 보도록 몸을 돌렸다. 시선을 마주치는 붉은 눈을 향해 생긋 웃고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커다란 손이 머리카락 안으로 들어와서 모근을 스치며 빗겨주는 손길이 기분 좋았다.

“비비안. 북부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

루시아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는 무겁게 가라앉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오래 걸리지 않도록 할게. 꼭 다녀와야 해.”

“…네. 급한 일이신 거죠.”

“지금 같은 시기에 곁에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해.”

“괜찮아요. 아직 아이가 나오려면 한참 멀었는걸요. 그전에는 오실 거죠?”

애써 아무렇지 않게 금방 털어내는 아내를 바라보다가 휴고는 그녀를 꽉 안았다. 항상 괜찮다는 말을 입에 달고 예쁘게 웃는 아내는 변한 것이 없었다.

휴고는 요즘 그녀가 부리는 투정과 짜증이 당황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 기뻤다. 그만큼 자신에게 의지한다는 증거 같았다.

휴고는 로암에 있는 가문의 비밀의 방을 다시 한 번 철저하게 뒤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유일한 희망이었다. 아주 작은 단서라도 반드시 찾아내고 말겠다.

그녀를 안은 채 휴고는 결연하게 눈을 빛냈다.

* * *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루시아는 아기를 위해서 항상 몸과 마음이 최상의 상태가 되도록 노력했다. 그리고 때때로 어떻게 임신할 수 있었는지, 의문을 풀기 위해서 다양한 상상력을 발휘했다.

“마님. 마님께서 복용하시는 두통약은 언제부터 드시기 시작했습니까?”

“그건 왜 물어요?”

“알아볼 일이 있어서 그럽니다.”

예감이 이상했다.

“알아볼 일이 뭔데요?”

루시아가 자꾸 캐묻자 제롬은 우물쭈물하다가 답했다.

“주인님께서 조사를 지시하셨습니다.”

‘두통약과… 관련이 있구나.’

루시아는 임신과 두통약이 관련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효과가 매우 좋아서 최근 계속 복용하는 두통약을 언제부터 먹기 시작했는지, 누가 지어줬는지 똑똑히 기억했다.

‘안나가 지어준 약이……?’

두통약에 문제가 있다는 점은 충격이었다. 루시아는 안나라는 의사를 기본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 안나가 의도적으로 두통약에 뭔가를 섞었을 리가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안나를 불러서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안나가 일을 그만둔 후에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루시아는 그동안 두통약을 안나에게 받았으나 하녀를 시켜서 약만 받아왔다.

안나는 오랜만에 만난 공작부인을 보며 몹시 반가워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좋은 용건으로 안나를 부른 것이 아니라서 루시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안나가 지어준 두통약 속에 날 겨냥해서 특수한 약재를 섞었다는 정황을 의심하고 조사 중이에요. 나는 안나가 관련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조금도 숨기는 것 없이 솔직하게 모두 말해 주었으면 해요.”

안나는 경악한 표정으로 새파랗게 질렸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두통약 처방전은… 로암에서 공작가 주치의 필립 경으로부터 받았습니다. 하지만 마님, 그럴 분이 아니에요.”

필립. 루시아는 그 이름을 들으며 기분이 이상했다.

‘묘한 인연으로 자꾸 얽히는구나.’

꿈속에서 루시아에게 치료 처방전을 준 고마운 사람이었고 현실에서는 세상을 떠난 남편의 쌍둥이 형제 목숨의 은인이었다.

그러나 남편이 필립을 꺼림칙해하는 기색이라서 루시아도 필립을 마냥 좋은 사람이라고 호감을 느낄 수 없었다.

“안나. 나는 지금 아이를 가졌어요.”

“세상에! 감축 드립니다.”

“고마워요. 안나도 알다시피 나는 불임이었어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치료되었고 원인이 두통약이라고 생각해요.”

안나의 표정이 점점 심각하게 굳었다.

“내가 아이를 가졌다는 결과는 중요하지 않아요. 나도 모르는 약을 계속 먹어왔어요. 서서히 중독되는 독약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내가 왜 이번 일을 심각하게 생각하는지 알겠지요?”

안나는 뭔가 떠오른 것처럼 탄식했다.

“제가… 이용당했군요.”

“짐작 가는 일이 있나요?”

“필립 경이… 마님의 임신에 집착했습니다.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과한 면이 있었어요.”

“그렇군요. 필립 경은 안나를 통해 나를 만나려고 했지요. 굳이 필립 경이 왜 그래야 했는지 의문이에요.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말해 줘요. 필립 경과 만나 나눈 이야기까지도 모두.”

안나는 필립과의 만남부터 기억을 되짚었다. 차근차근 말을 하면서 필립의 의도를 깨달았다.

몹시 충격을 받은 안나는 붉어진 눈시울로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제 잘못입니다. 저는… 너무 어리석군요.”

두통약을 복용한 사람은 공작부인만이 아니었다. 셀 수 없이 많은 환자가 안나의 두통약을 지어갔다. 그동안 환자의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는 약을 팔았다. 돈이 벌리는 데 심취해서 의사로서의 본분을 완전히 망각하고 지낸 자신에게 환멸을 느꼈다.

몇 번이나 사죄하며 안나가 초췌한 안색으로 돌아간 후 루시아는 얻은 정보를 토대로 의문을 해결하기 시작했다.

루시아가 알고 있는 치료약에는 독특한 향이 있었다. 그러나 두통약에서는 그런 향을 맡을 수 없었다. 필립은 가문의 비전으로 치료약을 가진 사람이었다. 얼마든지 약의 배합을 바꿀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약의 독특한 향을 알고 있다는 정보를 안나로부터 듣고 그걸 없애는 치밀함을 보였어.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그리고 내 불임을 치료해 봤자 나만 불임이 낫는다고 아이를 가질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그이는 평범하게 아이를 가질 수 없어. 여자가 특수한 약초로 몸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걸 필립이 모를 리가 없었다.

‘삼엽쑥!’

번뜩 떠오른 생각이었다.

꿈속에서 만났던 필립은 남들이 모르는 삼엽쑥의 특이한 효능을 자세히 알고 가문의 비전이라는 치료법을 갖고 있었다. 흔하지 않은 병에 대해서 필립의 가문은 왜 치료법을 찾아내서 비전으로 남겼을까.

‘나는 어릴 때부터 삼엽쑥을 먹어서 불임이되 불임이 아닌 특이한 몸을 만들었어. 거짓말 같은 우연이지만, 정말 이런 조건이 그이의 아이를 갖기 위한 조건이었다면.’

“필립 경은 치료가 효과를 보려면 마님께서 초야를 치르기 전까지 순결한 몸이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이상하군요. 왜 그때는 그런 말을 믿었는지.”

‘필립은 내가 조건이 맞는지 확인한 거구나.’

루시아의 등 뒤를 타고 소름이 쭉 돋았다. 필립의 치밀함이 몹시 거북했다.

‘그에게 말해 줘야겠어.’

그리고 도저히 답을 찾을 수 없어서 그에게 묻고 싶은 일이 있었다.

북부로 떠난 휴고는 3주 만에 귀환했다. 휴고는 맞이하러 나온 제롬을 데리고 집무실로 들어갔다.

“안사람은 자는 건가?”

“저녁 일찍 침실로 들어가셨습니다. 전하께서 오신 소식은 전하지 않았습니다.”

“잘했다. 내가 줬던 처방전. 어떻게 됐지?”

휴고는 북부로 가기 전에 필립이 준 처방전을 제롬에게 건넸다. 혹시 그녀가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괴로워하고, 주치의가 원인을 찾지 못하는데 고통의 정도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지속할 경우에 처방전의 약을 지어 먹이라고 말했다.

휴고는 부디 필립이 말한 일이 벌어지지 않았기를 바랐다.

“말씀하신 대로 마님께서 심한 복통으로 힘들어하셨습니다. 주신 처방전의 약을 지어 드시고 금방 가라앉으셨습니다.”

휴고의 기대는 무너졌다. 그는 깊이 낙담했다.

“그리고 말씀하신 마님의 두통약 성분을 알아냈습니다. 전 주치의가 어떻게 그 처방전을 얻게 되었는지도 알아내서 보고서를 올려 두었습니다.”

휴고는 책상 가장 위에 놓인 제롬이 올린 보고서를 들어 펼쳤다. 안나에게 접근한 필립의 음흉함을 다시 깨닫고 속으로 한탄했다. 이런 자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자신의 실수가 뼈아팠다.

“하온데 마님께서 두통약에 관한 조사에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관심이라니?”

“마님께서 전 주치의를 불러서 직접 만나셨습니다.”

휴고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전 주치의와 제법 긴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셨는지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휴고는 그녀가 전 주치의와 무슨 말을 했을지 도통 짐작 가는 것이 없었다. 밀린 급한 서류를 몇 개 처리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2층으로 올라갔다.

가문 비밀의 방을 열흘 가까이 전부 뒤집어엎으며 뒤졌으나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가문 기록의 족보에 의하면 대대로 공작과 후계를 낳은 공작부인의 기록만 나와있었다. 공작부인의 친정이나 모친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었다.

혈통을 잇는 부분에서 필립 가문을 수없이 언급했으나 어떤 방법인지에 대해서는 쓰여있지 않았다.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휴고는 멈칫했다. 침실 안은 적당한 밝기로 불이 밝혀있고, 침대 위에 누워있던 루시아가 고개를 들며 기쁘게 소리쳤다.

“휴! 언제 오신 거예요?”

“내가 갈게. 일어나지 마.”

당장 침대에서 뛰어 내려올 것 같은 그녀를 제지하고 휴고는 침대로 재빠르게 다가가 무릎을 디뎌 올라갔다. 자신을 향해 두 팔을 뻗는 그녀를 품으로 꼭 끌어안았다.

“당신이 오셨는데 왜 아무도 내게 알려주지 않은 거예요.”

“당신이 자는 줄 알았겠지.”

“휴, 조금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세요?”

루시아는 휴고의 손을 잡아 자신의 아랫배를 덮게 했다. 휴고는 잠시 흠칫했다. 몇 주 사이에 확연하게 배가 나와있었다.

“안에서 아기가 잘 있다고 신호를 보냈어요. 조금 전에요. 누워있는데 안에서 물방울이 터지는 것처럼 퐁 하는 거예요. 처음에는 몰랐어요. 배가 고플 때 꼬르륵 소리 나는 것처럼 그런 것인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조금 있으니까 또 퐁 퐁 하는 거 있죠. 그런데 갑자기 소름이 돋고 가슴이 막 뛰는 거예요. 그래서 알았어요. 아기가 말을 걸고 있다는 걸요.”

루시아는 숨도 쉬지 않고 마구 말을 쏟아냈다. 그녀의 가슴 벅찬 감동이 확연히 드러나서 휴고도 가슴이 뭉클했다. 휴고는 아직 그녀의 아랫배를 덮고 있는 제 손을 보았다.

“…이 안에 있다고……?”

“네. 잠시 기다려봐요.”

두 사람은 숨죽이고 한참을 있었지만, 루시아의 배 속에서는 어떤 신호도 보이지 않았다.

루시아는 자신이 느낀 감동을 그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아가야. 움직여봐.’라고 몇 번을 속으로 말했지만 잠잠했다.

“조금 전에 분명히 움직였는데.”

실망하는 그녀에게 휴고는 부드럽게 키스했다.

“잘 지냈어?”

“네. 당신은 가신 일이 잘 해결되었어요?”

“대충. 배가 많이 아팠다며?”

“약 먹고 금방 괜찮아졌어요. 아픈 것보다 아기가 잘못될까 봐 그게 더 많이 무서웠어요.”

“…그렇군.”

필립이 아기를 지우려고 하면 모체를 위험하게 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어도 아이를 어찌해볼까 하는 시도는 이미 할 수 없다고 휴고는 생각했다. 아이를 잃고 절망하는 그녀를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필립이 이겼다. 휴고는 그녀가 무사하기만 하다면 얼마든지 필립의 수에 넘어가서 무엇이든 하겠다고, 비밀의 방에서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수도로 올라올 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휴. 당신이 오면 확인하고 싶은 일이 있었어요. 두통약이요.”

“두통약이 왜?”

“아이를 가질 수 있었던 건 두통약 때문이죠?”

“…….”

아내는 신기한 여자였다. 어떨 때는 어수룩하게 순진하다가 어떨 때는 대단히 날카로웠다.

루시아는 안나와 나눈 대화를 빠짐없이 그에게 말했다. 휴고는 루시아가 하는 이야기의 사소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고 모두 새겨들었다.

제롬이 올린 보고서에는 나오지 않는 양질의 정보였다. 필립이 얼마나 교묘하게 필립을 신뢰하는 안나의 마음 빈틈을 파고들어 이용했는지 수법과 과정을 낱낱이 알 수 있었다.

배 속에 수백 마리 구렁이를 담고 있는 필립의 교활함에 휴고는 치를 떨었다.

‘삼엽쑥이라고? 그게 관련이 있는 건가?’

휴고는 뭔가 감이 잡힐 듯 말 듯했다. 이 정보를 이용할 방법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요, 휴. 제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점은 필립 경이 왜 그랬느냐는 거예요.”

루시아가 가진 가장 큰 의문이자 해결할 수 없는 난제였다. 필립이 왜 그렇게까지 루시아가 임신하도록 수를 썼는지 모르겠다. 가신의 충성심으로 보기에는 과도했다. 수법이 올바르지 못할 뿐 아니라 기분 나쁜 집착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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