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시아-64화 (65/77)

64장 끝, 그리고 시작 (5)

“당신에게는 이미 후계가 있어요. 당신의 적자가 아닌 데미안이 가문을 이어받는 일을 필립 경이 못마땅해 했나요? 그것도 앞뒤가 맞지 않아요. 전 아들을 낳을 수 없잖아요. 필립 경이 그걸 모를 리가 없고요.”

그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루시아는 자신이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평소에 루시아가 무엇을 묻든 솔직하게 모두 대답해 주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무리 기다려도 그의 다문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를 곤란하게 하는 질문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말해 주지 못할 일이라면 캐물을 생각도 없었다.

태동을 듣기 전이었다면 루시아는 물러섰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기가 보낸 신호를 느낀 감격이 아직 가라앉지 않았다. 그녀의 몸에서 자라는 생명을 향한 경이로움과 가슴 뭉클한 모성애가 루시아의 마음속에서 자라나기 시작했다.

아기와 관련한 문제를 모르고 넘어갈 수 없었다. 그가 감추고 싶은 비밀의 핵심에 맞닿은 문제임을 느끼면서도 루시아는 고집을 부릴 수밖에 없었다.

“휴, 당신은 제게 약속했어요. 제가 매달리면 당신의 비밀을 제게 말해 줄 수 있을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겠다고.”

똑바로 시선을 마주치는 그녀의 흔들림 없는 호박색 눈동자에는 고집이 엿보였다. 휴고는 근심스럽게 신음을 흘렸다.

“당신이 다시 생각해도 도저히 말할 수 없다면 당신의 생각에 따를게요. 저는 다만, 당신이 말할 수 없는 이유가 비밀 누설의 염려 때문인지 알고 싶어요.”

“…들어서 좋은 이야기가 아니야. 당신에게도. 아이에게도.”

“저는 괜찮아요. 우리 아기도 괜찮을 거예요. 당신 아이가 약할 리가 없다고 자신하셨잖아요.”

휴고는 한숨 섞인 짤막한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을 내가 어떻게 당하겠어.”

휴고는 그녀에게 그가 알고 있는 모든 비밀을 모두 털어놓았다. 가문의 비밀, 근친혼에 관한 진실, 그리고 필립의 거짓말까지 전부.

단, 그의 진정한 신분이 버려진 ‘히우’였다는 사실만 제외하고. 여전히 그 사실은 그가 도저히 건드릴 수 없는 자신의 역린이었다.

“필립 경은 헛된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군요.”

루시아는 간단하게 소감을 말했다. 그의 염려와 다르게 그녀는 놀라운 이야기를 차분하게 받아들였다.

“휴. 데미안은 제 아들이에요. 태어날 아이의 오라버니가 되겠지요. 저는 두 아이를 의좋은 오누이로 기를 거예요. 타란 가문의 비밀을 두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아요.”

“나도 그래.”

“여전히 이 일이 당신의 근심인가요? 그래서 제게 말하지 못하셨어요?”

“…내가 당신에게 말하지 못한 이유는. …너무 혐오스럽기 때문이야.”

다시 침묵하는 그를 보며 루시아는 탄식했다.

“…제가 당신을 다른 시선으로 볼까 봐……?”

“…….”

그는 대답처럼 말이 없었다. 이 겁 많은 흑사자를 대체 어쩌면 좋을까. 루시아는 그가 안타까우면서 사랑스러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서 두 팔로 그의 목을 꽉 끌어안고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사랑을 눈으로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루시아는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마음을 열어 보여주고 싶었다. 어떤 끔찍한 비밀이 감추어져 있다고 해도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그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휴, 저도 사실은 당신께 말하지 못한 비밀이 있어요. 제 이야기도 들어 보실래요?”

루시아는 평생 마음에만 묻어두려고 했던 비밀의 문을 열었다. 열두 살에 눈을 뜬 아침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렇게 끔찍한 결혼 생활이 겨우 끝이 났죠.”

루시아는 이야기를 잠시 멈추고 흘끔 그의 표정을 살폈다.

“왜 멈춰. 계속해.”

“…당신 표정이 너무 무섭다고요.”

그의 표정이 아주 살기등등했다. 붉은 눈동자가 어찌나 선명한지, 루시아는 처음으로 그가 조금 무서웠다.

“혹시… 너무 터무니없는 소리를 해서 기분 나쁘세요?”

“그게 아니라!”

휴고는 씩씩거리며 거칠게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메튼 백작. 그놈을 그렇게 쉽게 죽이는 게 아니었다. 분했다. 어찌나 분한지 부득부득 이가 갈렸다. 그녀가 그런 쓰레기의 아내로 살며 온갖 마음고생을 한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까 속이 뒤틀렸다.

더불어 뻔뻔한 왕의 낯짝을 떠올리자 왈칵 짜증이 났다. 원흉은 왕이다. 퀘이즈가 누이를 팔아먹은 거다.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이 순해 빠진 여자였다.

“당신은 정말 왜 그래? 왜 이렇게 사람이 독하지를 못해?”

“…네?”

“그런 꼴을 겪고도 고작. 그놈이 공주와 결혼하지 못하게 손을 써달라고?”

이런 사정을 알았다면 그놈에게 세상에서 겪을 수 있는 고통을 모두 주고 가장 비참하게 죽여버렸을 텐데! 이미 놈이 죽었다는 사실이 분통이 터졌다.

“…휴. 진지하게 들어줘서 고마운데요. 이건 현실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기억에 있으면 경험한 것과 다를 게 뭐야. 당신에게는 단순한 꿈이 아니잖아. 인생을 산 경험이잖아.”

“…네. 그렇기는 하지만…….”

“내가 알았으면 그놈을!”

“이미 죽은 사람이잖아요. 죽은 사람을 뭘 어떻게 해요.”

메튼 백작이 사고로 죽었다고 알고 있는 그녀에게 사실은 내가 손써서 처리했다고 말할 수 없는 그의 속은 더 답답했다.

“당신이 그렇게 흥분하면 여기서 그만할래요.”

휴고는 크게 몇 번 호흡해서 진정했다. 더 들어야 했다. 그녀의 이야기가 비현실적이기는 하지만 허무맹랑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묘하게 앞뒤가 맞아떨어졌다. 그녀의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여유라든가, 어려서부터 궁에 갇혀 살았던 공주답지 않은 야무진 대처능력이라든가. 가끔 느꼈으나 그냥 묻어두었던 그녀에 관한 의문점이 모두 풀렸다.

그리고 휴고는 가문 비밀의 방을 통해서 마도구에 관한 정보를 비교적 많이 알고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펜던트는 아마 마도구일 것이고, 마도구라면 충분히 그런 기이한 능력을 지닐 수 있다.

현재 널리 알려진 대부분 마도구가 장난감에 불과한 것은 현 시대의 인간들이 그 이상의 기능을 가진 마도구를 알아볼 능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듣기만 할 테니까 계속해.”

루시아는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그를 보면서 웃음을 삼켰다. 무슨 헛소리냐고 하지 않고 진지하게 들어주는 그가 고마웠다. 오히려 진지함을 넘어서서 너무 몰입하는 것 같아서 염려스러웠다.

루시아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공방을 운영하다가 기사와 교제를 시작하는 부분에서는 그의 표정이 상당히 안 좋아졌다.

사기를 당해서 돈을 모두 잃는 부분을 말하다가 루시아는 그의 안색을 슬쩍 살폈는데 뜻밖에 괜찮아 보였다. 그녀는 그가 자신의 이야기가 현실이 아님을 이해한다고 안심했다.

그러나 휴고의 속내는 달랐다.

‘분풀이해 줄 놈이 남아있었군.’

죽은 메튼 백작의 몫까지 자근자근 밟아줄 놈이 있었다. 그녀를 잘 구슬려서 누군지 알아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제법 긴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루시아는 크게 숨을 쉬면서 잠시 눈을 감았다.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머릿속에만 있던 것들을 처음으로 입 밖으로 꺼내면서 루시아는 또 다른 삶을 정리하고 되돌아볼 수 있었다.

그녀는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그를 향해 멋쩍게 웃었다.

“이 여자 미쳤나, 이런 생각 하시는 건 아니죠?”

휴고는 설명할 수 없는 먹먹한 기분 때문에 말없이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녀의 고단했던 삶을 위로하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위로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꿈속에 살았던 자신과 다르게 그는 그녀에게 구원을 받았다.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 또 다른 자신은 평생 버석거리는 가슴을 안고 살아갔을 것이다.

“휴, 전 이리저리 치이는 삶을 살았어요. 궁에서 곱게 자란 공주님이 아니에요. 제가 달라 보여요?”

“그럴 리가 없잖아.”

“저도 그래요. 당신이 어떤 비밀을 가졌더라도. 당신은 당신이에요.”

그녀를 안은 채 그는 낮게 웃었다. 대체 무엇이 두려웠던 것일까. 그토록 오랜 세월 자신을 얽매고 있던 짙은 어둠을 그녀가 가벼운 손짓으로 흩어버렸다.

그의 품에 안겨있는 가녀린 여인은 놀라울 정도로 단단한 속내를 지녔다. 여인의 강인함이 때로는 사내보다 강하다는 뭇사람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는 뭔지 알 것 같았다.

“문제는 데미안이네요.”

“데미안?”

“그 아이가 자라서 사랑하는 여자가 생기면 평범하게는 아이를 낳지 못할 테니까요. 하지만 방법을 제가 알고 있으니까 어떻게든 되겠지요. 휴, 제가 꿈에서 떠돌이 의사를 만난 덕분에 병을 고쳤다고 했잖아요. 그 의사가 사실은 필립 경이었어요.”

“…뭐?”

루시아는 꿈에서 봤던 필립의 인상착의를 설명했다.

“현실에서는 직접 만나지 못했지만, 제가 만난 의사가 필립 경이 맞지요?”

“…맞는 것 같군.”

“제가 생각을 해봤거든요. 아무래도 삼엽쑥이 타란 가문의 혈통을 잇는 열쇠인 것 같아요.”

“…당신 말이… 맞아.”

휴고는 멍하게 중얼거렸다. 그녀가 꿈속에서 받은 처방전은 필립의 가문이 자손대대로 물려주는 비전이 틀림없었다. 그 비전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그것을 손에 넣어야 했다.

‘도대체 어디에 숨겨 놓았을까.’

오랜 세월 이어온 기록물은 꽤 양이 많을 것이다.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상당한 공간이 필요하리라.

휴고는 옛 기억을 되살렸다. 죽은 선대 공작이 시키는 대로 인형 노릇을 하던 시절에 휴고는 한 달에 한 번 형제를 만나서 무사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창이 없는 마차를 타고 꼬박 하루를 달리다가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도착하면 형제를 태운 마차가 도착해 있었다. 어디서 지내고 있느냐는 물음에 형제는 대답했다.

‘나도 모르겠어. 굉장히 작은 마을인데 감시자가 있어서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어. 너를 만나러 오려고 마차를 타기 전에는 항상 잠드는 약을 먹거든. 중간에 깨워서 밥을 먹이는 횟수를 따지면 며칠은 달리는 것 같아.’

형제가 말하는 작은 마을은 굉장히 외진 곳이고 일종의 안가 비슷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필립 가문의 은신처도 그곳이며 기록물도 그곳에 보관하고 있을 것이다.

공작 위에 올랐을 때 꽤 시간을 들여서 은신처를 찾으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마차를 달려서 며칠이 걸리는 범위는 수색하기에는 너무 넓었다.

‘늙은이가 비밀 장소에 가서 치료약을 지어 온다면서 일주일 만에 가져다주었다고 했지.’

안나의 진술은 중요한 단서였다. 필립은 치료약을 지으러 은신처에 다녀온 것이 틀림없었다.

조심성 많은 필립이 마차를 타고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뒤를 밟히지 않는지 조심하면서 걸어갔을 테고 일주일 중에 약을 만드는 시간을 제외하면 노인 걸음으로 편도 사흘. 그 정도면 작은 마을을 찾기 위해서 샅샅이 수색하기에 그렇게 넓은 범위가 아니었다. 마차로 며칠을 달리는 척 시간과 거리를 속여서 착각을 일으킨 것이다.

‘폐쇄적인 마을이겠지.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가 숨겨져 있을 거야.’

당장 구체적인 수색 방향을 지시하는 명령서를 북부로 발송해야겠다. 그러나 수색의 범위를 좁혔다지만, 언제 찾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 갑자기 번뜩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갑자기 막막하던 앞이 확 트였다.

휴고는 벌떡 일어난 자신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는 아내가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얼굴을 잡고 입술이며 눈이며 가리지 않고 마구 키스를 퍼부었다.

“당신. 그 치료법을 기억하고 있다고 했지? 내게 알려줘.”

“네, 그럴게요.”

루시아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고마워. 이젠 됐어.”

휴고는 멍한 그녀를 뒤로하고 빠르게 침실을 나가버렸다.

루시아는 그가 남긴 말이나 엉뚱한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가 어쩐지 몹시 신이 난 것 같아서 피식 웃고 말았다. 루시아는 침대에 누워서 아랫배에 두 손을 올렸다. 아까 느꼈던 아기의 태동을 다시 느껴보고 싶었다.

“아가야. 움직여봐. 엄마야.”

루시아는 조급해하지 않고 계속 말을 걸었다. 한참 만에 마치 대답을 하는 것처럼 안에서 퐁 하고 물방울 터지는 진동이 느껴졌다. 루시아는 행복한 웃음을 터뜨렸다.

* * *

며칠 후 휴고는 안가를 찾았다. 필립을 가둔 지하의 밀실로 들어갔다. 휴고가 방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기사들이 필립을 이전처럼 의자에 묶어두었다.

휴고는 필립을 노려보면서 천천히 마주 놓인 의자에 앉았다. 허기를 면할 정도로만 식사를 배급받고 햇빛을 오래 받지 못한 필립은 한 달 사이에 확 나이가 들어 보였다. 초췌한 노인을 바라보는 휴고의 눈빛에는 오직 살기만 가득했다.

“오래 뵙지 못한 것을 보니 북부에 다녀오신 모양입니다.”

휴고의 눈썹이 꿈틀했다.

“아무것도 찾지 못하셨겠지요.”

말없이 노려보기만 하는 공작의 반응으로 필립은 자신이 승기를 잡았다고 확신했다.

필립은 곧 태어나실 귀한 아가씨에게 조금이라도 해가 미칠 짓은 절대 할 생각이 없지만, 공작은 필립을 믿지 못할 것이다. 믿지 못하는 만큼 공작은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공작부인의 안전을 거래하자는 제안을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원하는 게 뭐야.”

“마님과 아가씨가 무탈하시도록 약을 지어 드리겠습니다.”

“네놈에게 안사람 머리카락도 보일 생각 없어.”

“그러십시오. 제가 지어드리는 약만 드셔도 됩니다.”

필립은 불신 가득한 공작의 눈을 보며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는 격언을 잊지 않았다.

공작의 거칠고 사나운 성정이 언제든지 터질 수 있었다. 사방이 꽉 막힌 막다른 길로 몰면 필립에게 휘둘리는 상황에서 느끼는 모멸감을 견디지 못하고 앞뒤 가리지 않고 필립을 죽일 가능성이 있었다.

공작을 적당히 몰아세워서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조건을 세워야 한다.

“마님께도, 아가씨 곁에도 접근하지 않겠습니다. 데미안 도련님과 남매로 키우려고 하시는 뜻에 따르겠습니다.”

“네놈이 따를지 말지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제 주제도 파악하지 못하다니 망령이 들어도 단단히 들었군.”

공작은 독설을 내뱉었으나 목소리가 한결 누그러졌다. 필립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는 공작을 상대로 거래를 시작했다.

“데미안 도련님의 신붓감이 꼭 마님께서 낳을 아가씨일 필요는 없지요.”

“딴 여자에게서 애를 낳으라는 말인가?”

필립은 긍정처럼 침묵했다.

‘기발하게 머리는 잘 돌아가는 늙은이야.’

늙은이가 상계에 진출했으면 거상으로 이름을 날렸을 것 같다고 휴고는 생각했다.

임신한 아내와 곧 태어날 아기, 두 목숨의 안위를 빌미로 어떤 엄청난 요구를 할지 잔뜩 긴장한 상대방의 허를 찔러서 그 정도면 별것 아닌 대가라고 마음의 짐을 덜어주는, 훌륭한 거래 방식이었다.

그러나 필립은 거래 상대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가장 기초적인 실수를 했다. 임신한 아내와 곧 태어날 아이를 위한 명목으로 다른 여자와 동침하는 일은 휴고가 수용 가능한 제안이 아니었다.

휴고는 성실한 남편이 되겠다는 약속을 절대 깨뜨릴 생각이 없고, 무엇보다도 그는 여전히 자신의 핏줄을 혐오했다. 곧 태어날 아이는 아내가 낳을 아이라서 특별할 뿐이었다.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가 그의 핏줄을 낳는다는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났다. 종족 번식을 위해 낯선 여자를 안아야 하는 상황을 떠올리니까 가장 큰 문제점은 물리적인 불가능이었다.

‘도저히 설 것 같지가 않은데.’

휴고는 팔짱을 끼고 시선을 내려서 하복부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신체 기능상의 문제로 요구에 응할 수 없다고 하면 필립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심각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잡생각이었다. 무엇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했다.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었다.

휴고는 필립을 잡아왔을 때부터 로암에 있는 필립의 거처와 북부 국경의 필립 거주지를 모두 뒤지고 필립의 은신처를 찾기 위한 수색을 지시해서 계속 찾고 있었다.

필립의 거처에서는 역시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고 필립의 은신처를 찾는 노력은 사막에서 바늘 찾는 일처럼 막연했다.

그러나 며칠 전 휴고는 범위를 좁히는 단서를 얻어서 구체적인 지시를 전달했다. 지금쯤은 명령을 하달받았을 것이다.

명색이 은신처이니만큼 쉽게 발견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몇 개월 안으로 찾을 수도 있고 더 시간이 걸릴 수도 있었다.

필립의 은신처를 찾을 때까지 막연히 기다릴 수 없었다. 오랜 시간 필립을 찾아가지 않으면 또 무슨 계략을 짜는 머리를 굴릴지 모른다. 휴고는 지금이 놈의 허를 찌를 적기라고 판단했다.

이제 휴고는 일방적으로 불리한 처지가 아니었다. 필립의 처방전이라는 유일하지만 강력한 정보를 손에 넣었다.

정보를 쥐자 휴고는 좀 더 멀리서 상황을 바라볼 여유를 찾았다. 필립의 고의적인 말 흘리기에 걸려든 자신의 가장 큰 실수를 깨달았다.

아이를 낳으면 아내가 위험하다는 필립의 말은 빈틈이 있었다.

만약 정말로 아이가 제 어미를 죽이고 태어나면 아이마저도 죽일 휴고의 성정을 필립이 모를 리 없었다. 수가 실패하면 타란 혈족의 귀한 아가씨가 죽는다.

타란 혈통에 미친 늙은이가 도박할 것 같지 않았다.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는 늙은이니까.’

휴고는 승부수를 띄워보기로 했다. 필립은 공작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은 것을 보면서 공작이 냉정하게 거래를 할 마음이 들었다고 판단했다.

“네놈 제안을 이해할 수 없어.”

휴고는 좀 더 필립의 계획을 알아보기로 했다.

“무엇이 말씀입니까?”

“애가 그렇게 쉽게 생기나?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애가 들어서지 않으면? 안사람이 무사히 애를 낳으면 네놈을 죽여버릴 건데.”

말끝에 진득하게 묻어나는 살기에도 필립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데미안 도련님의 신부가 되실 아가씨가 태어나실 때까지 마님은 제가 드리는 약을 계속 드셔야 할 겁니다. 그전까지는 효과가 미진한 약을 드릴 테니까요.”

필립은 태어날 아가씨를 위해서 공작부인의 목숨까지 해할 생각은 없으나 공작부인에게 기력을 빼앗는 약과 회복하는 약을 번갈아 쓸 작정이었다.

시름시름 앓아누웠다가 필립이 주는 약을 먹고 원기를 되찾으면 공작은 약을 얻기 위해서 필립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네놈 뜻대로 애가 태어났다 치고. 그 뒤는 어쩌려고? 내가 네놈과 아이를 살려둘 것 같나?”

“그 문제는 안전을 약속해 주시면 됩니다.”

“약속?”

휴고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약속하고 지킬 거라고 믿는 건가?”

그렇게 네놈이 순진하다고? 휴고는 한 편의 희극을 보는 것처럼 우스웠다.

“믿고 싶습니다만. 안타깝게도 믿음이 부족한 세상이지요. 도련님께서는 타란 가문의 대를 잇는 중대한 문제가 저희 가문의 손에 달렸다는 사실을 타란의 주인들이 순순히 납득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역대 타란의 가주들은 비밀의 방에 들어갔다가 나오면 하나같이 어떤 방식으로 혈족을 이어 나가는지 알고 싶어 했다.

필립 가문의 선조들은 굳이 비밀을 꽁꽁 끌어안아서 위험을 자초하지 않았다. 타란의 가주들이 요구하면 궁금해하는 사실 대부분을 공개했다.

타란의 가주들은 호기심을 충족하는 대신 혼자만 알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으며 기록으로도 남기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당연히 구두 약속은 아니었다. 약속을 강제하는 방법이 있었다.

“저희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귀물이 있습니다. 계약자를 구속하는 마도구입니다.”

“재미있군. 그럼 그 마도구는 어찌 가져오려고? 네놈은 여길 한 발자국도 못 나가.”

“안전한 곳에 보관 중입니다만, 사람을 시켜 가져오게 해도 됩니다. 어차피 다른 사람은 사용할 수 없습니다. 전속 마도구라서 계약 당사자 중 일방은 반드시 저희가문 사람이어야 합니다.”

휴고는 특이한 마도구에 대한 흥미를 버렸다. 필립의 가문은 필립 혼자 남았다. 필립이 죽으면 마도구는 쓰레기가 된다는 소리였다.

조사한 바로는 필립은 젊어서 아내와 아들이 죽은 이후에는 새로 가족을 만들지 않았고 부친이 죽은 후 계속 혼자였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집착이 강한 늙은이가 자기 뜻을 이어받을 후손을 두지 않은 점은 이상했다.

‘놈의 속사정은 알 바 아니지.’

반드시 놈을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놈의 가문은 필립의 죽음으로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여자는? 아무 여자나 애를 가질 수 없잖아.”

“준비되어 있습니다.”

“준비되어 있어?”

필립이 딴 여자를 품으라고 말할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정말 필립 입에서 여자가 이미 있다는 말이 나오자 기가 막혔다. 그동안 늙은이가 자신의 눈을 속이고 대체 얼마나 많은 짓을 꾸민 것인가.

“내 허락 없이 독단적으로 그런 짓을 했단 말이지.”

“저희 가문이 대대로 해왔던 임무입니다. 허락을 받아 하던 일이 아닙니다.”

“네놈이 준비한 여자가 애를 못 가지면?”

“대신할 여자가 있습니다.”

“준비한 여자가 한둘이 아니군. 양성소를 차렸어.”

휴고는 실소를 터뜨렸다.

“사람을 종마 취급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휴고는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이런 취급을 받아들인 역대 타란의 가주들이 미친놈들이라고 휴고는 생각했다.

“정리해 볼까. 안사람에게 약을 지어주는 대가로 나는 네놈이 준비한 여자와 동침해서 애를 낳으라는 거군. 애는 네놈이 거둬 키울 거고 난 건드리지 않기로 약속하는 계약을 해야겠지. 그리고 그 이후에는? 데미안이 네 뜻대로 될 것 같나?”

“그렇게 먼 미래는 아직 모릅니다. 저는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입니다.”

“미래를 안 본다…….”

휴고는 중요한 단서를 얻었다. 필립이 자신만만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이를 낳으면 아내가 무사하지 못할 것처럼 말하는 필립의 태도는 진실에 기초한 당당함이 아니라 모닥불에 달려드는 부나방 같은 무모함일 수 있었다.

“늙은이. 네놈이 뭘 원하는지 알겠다. 내가 언제까지 결정해야 하나?”

“마님께서 산달이 다가오시기 전에 최소 한 달 전부터는 약재로 몸을 보하셔야 합니다.”

“안사람 배가 불러올수록 나는 불안해지겠지. 교묘하게 파고들 줄 알아. 그것도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방식인가?”

“…….”

필립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 이죽거리는 공작의 말투가 거슬려서가 아니었다. 필립은 스스로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자신했다. 공작이 공작부인을 버리지 못하면 자신의 제안에 이끌려 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믿음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공작의 태도는 아무리 봐도 불리한 계약을 앞둔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묘한 위화감을 떨칠 수 없었다.

‘뭐가 잘못되었을까.’

공작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선을 넘었는지도 모른다. 공작이 공작부인보다 자신의 자존심이 더 귀해서 공작부인의 안위가 어찌 되건 필립과의 거래를 거절하면 계획은 실패였다.

달이 차서 아가씨는 태어나도 공작부인은 무탈할 것이다. 필립의 거짓말을 공작이 간파하면 반드시 필립은 죽은 목숨이었다.

‘아니야. 아무리 남녀의 애정이 한때의 광풍이고 정염에 불과하다고 해도 바람이 멈추고 불이 꺼지기에는 아직 이르지.’

기세가 눌리면 끝이다. 발을 헛디디면 까마득한 아래로 추락하는 갈림길에 서있는 상황이었다.

“확실히 묻겠다. 네놈이 지어준 약을 먹지 않으면 안사람이 아이를 낳고 죽는 건가?”

“마님이 무탈하시기 위해서는…….”

“예, 아니오로 대답해.”

“…그렇습니다.”

“뭐가 그렇다는 거지?”

“마님께서 오래 살지 못하실 겁니다.”

속을 꿰뚫어볼 것처럼 자신을 응시하는 붉은 눈동자를 보며 필립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공작이 천천히 입 끝을 휘며 웃자 뒤가 섬뜩했다.

“오늘 내가 늙은이를 찾은 건 무슨 개소리를 할지 궁금했기 때문이야. 실망시키지 않는군.”

휴고는 필립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순간이 자신의 승리라고 직감했다. 그리고 그럴 자신이 있었다.

“내가 북부에서 뭘 찾았을 것 같나?”

“…….”

“삼엽쑥이라. 흥미로워. 그런 흔한 잡초가 타란 혈통을 잇는 비밀이었다니.”

필립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머릿속은 맹렬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공작은 허세를 부리고 있었다. 이 정도 수는 예상했다. 말려들 생각이 없었다.

‘안나를 통해 삼엽쑥에 대한 단서를 얻어서 괜히 넘겨짚으시는군.’

필립은 평소처럼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삼엽쑥 복용으로 월경이 없는 마님의 증상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치료를 해드린다고 했지요.”

휴고는 픽 웃고 약초의 이름을 하나씩 불렀다. 루시아가 꿈속에서 필립으로부터 받았던 처방전 내용이었다.

여유를 잃지 않던 필립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기 시작했다. 삼엽쑥의 완벽한 치료법은 역대 타란의 가주들에게 공개한 적 없는, 그야말로 필립의 가문 대대로 후손들에게만 이어오는 비전이었다. 가문의 비밀 노트를 읽지 않고는 알 수 없었다.

“네놈의 은신처를 찾아냈지.”

필립의 표정이 회복 불가능하게 무너졌다. 흑색으로 변한 일그러진 안색이 경련하고 있었다. 휴고는 필립이 제대로 머리를 굴리기 전에 허를 찌르는 마지막 확인을 했다.

“꽤 열심히 기록들을 살펴봤는데 어디에도 아이를 낳고 잘못된다는 말은 없더군.”

휴고는 유심히 필립을 살폈다. 만약 그녀가 아이를 낳고 죽는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필립은 단번에 휴고가 거짓을 말했다고 알아차렸을 것이다. 거무죽죽한 필립의 안색이 변함없는 것을 보며 휴고는 소리 없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거짓말이었다. 아내는 무사하다. 그녀를 잃을지 모른다는 공포를 내려놓자 필립에 대한 강렬한 살의가 치밀었다.

“차라리 죽음이 편한 고통을 겪게 해주겠다.”

절대 놈에게 편안한 죽음을 내리지 않겠다. 휴고는 형형한 눈빛으로 필립을 노려보며 음산하게 말했다.

“데미안을 끝으로 다시는 검은 머리에 붉은 눈을 지닌 사내아이는 태어나지 않을 거다.”

넋을 놓고 있던 필립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휴고는 필립의 눈에 가득한 절망을 즐겁게 감상했다.

“이 저주받은 혈족은 끝이야.”

언제나 적당한 겉웃음과 여유를 보이던 필립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원망과 분노와 절망이 뒤섞인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휴고를 노려보다가 괴상한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했다.

휴고는 오늘 이후 다시는 보지 않을 놈의 발작하는 꼴을 보다가 등을 돌려서 방을 나왔다.

“혹시라도 놈이 자진하지 못하게 감시 철저히 해.”

대답한 기사 하나가 안으로 들어가고 돌문이 닫히자 흘러나오는 소음이 사라졌다. 휴고는 안전에 안전을 기하기 위해서 당분간 필립을 그대로 둘 생각이었다. 수색대가 필립의 은신처를 찾고 아내가 아이를 무사히 낳을 때까지만.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다가온다는 공포, 가문의 비밀이 모두 드러나고 파괴되는 절망, 타란 혈족의 끝을 선언한 휴고의 마지막 말.

‘셋 중에 놈을 가장 괴롭히는 건 과연 뭘까.’

지상으로 오르는 계단을 밟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그를 억누르고 있던 타란 가문의 그림자에서 비로소 벗어나는 기분이었다.

* * *

완성된 분홍색 양말 한 짝을 들고 루시아는 흐뭇하게 웃었다. 손가락 몇 개가 겨우 들어가는 앙증맞은 크기가 사랑스러웠다.

요즘 루시아는 태어날 아기를 위해 이것저것 만드는 재미가 들렸다. 턱받이와 손수건을 여러 장 만들고 오늘은 아침부터 뜨개질로 양말을 뜨기 시작해서 한 짝을 완성했다.

“어머.”

루시아는 안에서 툭 움직이자 놀라 배를 보았다. 귀엽게 퐁 퐁 하던 태동이 언제부턴가 제법 큰 움직임으로 바뀌었다. 루시아는 배에 손을 얹고 조곤조곤 평소처럼 말을 걸었다.

“아가야, 네가 신을 양말을 만드는 중이야. 그런데 엄마 솜씨가 미숙해서 겨우 한 짝 만드는데도 반나절이 걸리는구나.”

“말하면 알아듣나?”

루시아는 언제 왔는지 모르게 곁에 다가온 그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를 오후 시간에 보는 일이 무척 오랜만이었다.

요즘 남편은 무척 바빴다. 아침에 나가서 저녁에 들어오는 평소 일정에 더해서 집에 있을 때에도 밤늦게까지 집무실에 사람이 드나들었다.

함께 있을 때도 정신이 딴 데 팔려있는 모습이었다. 며칠 전에는 마차 가득 서류와 책이 실려 왔는데 며칠 내내 외출도 않고 집무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럼요. 알아듣지요. 바쁜 일은 끝나셨어요?”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홀가분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보름 전에 휴고는 필립의 은신처를 찾았다는 보고를 받았고, 며칠 전 은신처에 있던 방대한 모든 기록물을 받았다. 그리고 며칠에 걸쳐서 기록을 뒤져서 여아를 출산한 여자들의 기록을 찾아냈다.

여자들은 모두 아이를 무사히 출산했다. 그리고 아이가 젖을 뗄 무렵에는 비밀 유지를 위해 처리되었다.

얼마든지 할 만한 짓이라서 놀랍지도 않았다. 그저 휴고는 아내가 아이를 낳아도 무탈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으로 모든 짐을 다 내려놓은 심정이었다.

그는 갑자기 아내가 몹시 보고 싶어서 곧바로 집무실을 나와 2층으로 올라왔다.

휴고는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서 무릎에 놓인 작은 뜨개질 양말을 들고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이렇게 작아?”

“저도 갓 태어난 아기는 보지 못해서 모르지만, 이것도 크대요. 그런데 금방 자란다고 했어요. 아, 지금 움직였어요. 어서요, 어서.”

루시아는 얼른 그의 손을 잡아 배에 올렸다. 기다렸으나 잠잠했다.

“아무래도 날 싫어하나 봐.”

휴고는 아직 태동을 느껴보지 못했다. 안에서 움직인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궁금한데 휴고가 손을 가져다 대면 조금 전까지 막 움직였다는 아이가 조용해졌다.

번번이 실망하는 남편이 안되었고 귀엽기도 해서 루시아는 그를 위로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아버지인데. 아무래도 수줍음을 많이 타나 봐요.”

“경계심이 많은 건 바람직하지. 태어나면 철저히 가르쳐야 해. 당신을 닮아서 겁이 없을까 봐 걱정이야.”

“제가 뭘요.”

“혼자서 날 찾아왔잖아. 그런 짓은 하면 안 돼.”

“그럼 당신과 결혼하지 못했을 텐데요? 또 다른 내가 지금의 나를 꿈으로 보고 있을지도 몰라요. 당신 충고를 따르면 좋겠어요?”

고민하는 그를 보며 루시아는 쿡쿡 웃었다.

안에서 툭, 움직임이 있는 것과 동시에 두 사람 입에서 작은 탄성이 나오며 서로 마주 보았다. 그걸 시작으로 연속해서 몇 번을 더 움직였다. 조금 전 느낀 움직임이 착각이 아니라고 말해 주는 것처럼.

“아기가 당신에게 인사했어요.”

휴고는 배에 손을 얹고 부른 배를 멍하게 보고 있었다. 정말 안에 생명이 자라나고 있다는 실감이 났다. 점점 불러오는 그녀의 배를 보면서 신기하다고만 생각했다. 실제로 움직임을 느낀 기분은 뭐라 말할 수 없이 이상했다. 가슴 안쪽 어딘가가 짜릿하게 죄어들었다.

아내 문제로 가슴을 졸이면서 아이를 탓하는 마음이 밑바닥에 있었다. 그런 앙금이 사라지고 잘못 없는 아기 탓을 했다는 미안함과 무사히 잘 자라고 있는 아이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고개를 숙여서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발갛게 상기된 그녀를 보며 웃다가 한 손으로 그녀의 뒷목을 받치고 짙은 키스를 이었다.

말랑한 입술을 삼키고 작은 입안 구석구석을 더듬었다. 혀가 맞닿아 뒤얽히며 두 사람은 깊은 체온을 나누는 키스에 빠져들었다. 휴고는 그녀가 숨을 할딱일 때까지 격한 키스를 밀어붙이다가 마무리처럼 가벼운 입맞춤을 계속 이어갔다.

“하자.”

그의 눈에 정염이 가득했다. 루시아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하게 해줘. 석 달 하고 보름을 참았어.”

기겁할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그녀가 살짝 시선만 피했다. 설득과 애원, 모든 수단을 다 쓰려고 각오했던 휴고는 그녀의 반응이 좋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의심스러울 때는 최악을 가정한다는 원칙을 버리고 휴고는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기로 했다.

이건 허락이야. 그녀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냉큼 안아 들었다. 그녀를 침대에 내려놓고 탈의를 시작했다.

“괜찮은 거지?”

누운 그녀의 위에 올라 배를 누르지 않게 조심하면서 팔로 몸을 지탱하고 고개를 숙여 키스했다. 싫은데 거절하지 않는 상황은 달갑지 않았다. 휴고는 그녀와 함께 사랑하고 싶었다. 일방적인 욕망을 풀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루시아는 간절함과 갈망이 섞인 그의 눈을 보면서 얼굴을 붉혔다.

“…정말 하고 싶어요?”

“한계야. 내가 얼마나 불면의 밤을 지냈는지 모르겠지. 옆에서 당신은 아주 잘만 자더라.”

루시아는 살짝 입술을 삐죽였다. 아주 가끔 새벽에 잠에서 깰 때가 있는데 그때 보면 그는 잘만 자고 있었다.

“싫어? 도무지 안 되겠어? 주치의한테 물어봤어. 조심히 하면 해도 된대. 깊이 안 넣으면 된다기에 해도 되는 체위도 몇 가지…….”

루시아는 새빨간 얼굴로 그의 팔을 내리치며 빽 소리쳤다.

“못살아, 정말! 그런 걸 물어봤단 말이에요?”

“의사잖아. 뭐가 어때.”

뻔뻔한 그를 흘겨보다가 루시아는 머뭇거리면서 고백했다.

“…아이가 자라면서 몸이 달라져서……. 당신이 매력을 못 느낄지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또 이상한 꿈꿨어?”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석 달이 지난 건… 옛날이잖아요.”

루시아는 의사가 조심해야 한다고 선언한 석 달이 지나면 그가 바로 달려들 줄 알았다. 그런데 석 달째 되는 날부터 하루이틀, 며칠이 지나도 그가 그런 기색이 없어서 서운하기도 하고 자신감이 사라지기도 했다.

“요즘 당신에게 신경 못 쓴 건 알아. 미안해.”

필립의 은신처를 찾는 일로 수시로 보고받고, 기록을 받아서 뒤지느라 정신이 온통 그곳에 쏠려있었다. 그녀가 안전하다는 확신이 들고 나서야 비로소 그녀가 보고 싶고 안고 싶었다.

“바쁘셨다는 거 알아요. 이해해요. 그냥… 배는 나오고 살도 찌고…….”

우물쭈물하는 그녀를 보다가 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나만 당신한테 애타는 줄 알았더니 당신도 하고 싶었군. 말을 하지 그랬어.”

“…놀리기만 하고.”

휴고는 키득거리면서 붉게 달아오른 사랑스러운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사랑해. 당신이 어떤 모습이어도.”

루시아는 배시시 웃으면서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휴고도 그녀의 등 아래 손을 넣어서 품으로 꼭 안았다.

“난 당신하고 이렇게 안고만 있어도 좋아요.”

휴고는 그녀를 품에서 떼어내고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마음이 바뀌었어?”

루시아는 지나치게 심각한 그가 우스워서 웃음을 꾹 참고 새침하게 말했다.

“굳이 안 해도…….”

“이 여자가 진짜.”

깔깔 웃는 루시아의 턱을 틀어쥐고 그의 입술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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