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1)
휴고는 텅 빈 침대를 보고 멈칫했다. 그녀가 어디 있을지 알 것 같아서 그는 난감한 듯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1층의 식당에는 역시 불이 밝혀있었다. 널찍한 식탁에 그녀는 홀로 앉아 스테이크를 썰고 있었다. 제롬이 곁에서 식사 시중을 들다가 주인을 발견하고 고개를 숙였다. 루시아는 식당으로 들어서는 그와 잠시 눈이 마주쳤으나 샐쭉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시간에 먹어서 소화되겠느냐고, 휴고는 진심으로 그녀를 걱정해서 염려하는 말을 건네려고 했다. 그러나 눈이 마주친 집사가 맹렬하게 고개를 젓는 모습을 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 요즘은 하는 말마다 자꾸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었다.
며칠 전이었다. 늦은 시간에 케이크 몇 조각을 앉은자리에서 다 먹어치우는 그녀의 먹성이 놀라워서 휴고는 한마디 했다. 다른 뜻은 없었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었다.
‘밤에 너무 많이 먹는 것 같아.’
‘체하면 어쩌려고’라는 뒷말이 나올 예정이었지만 그녀는 즉시 포크를 요란하게 내려놓고 벌떡 일어나 자리를 떴다. 그리고 완전히 토라져서 말을 붙여도 대꾸도 않고 밤새 만지지도 못하게 했다. 며칠이 지나도록 쌩한 기운이 가시지 않아서 그는 계속 전전긍긍했다.
‘주인님, 제발.’
제롬은 주인이 말실수할까 봐 조마조마했다.
비록 제롬은 미혼이지만 조카들이 태어나는 과정을 지켜봤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날 즈음에는 파비안이 항상 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오밤중에 쫓겨나 제롬에게 와서 징징거렸다.
‘살이 찐 것 같다고 말한 것뿐이라고. 찐 걸 쪘다고 하는데 왜 내게 접시를 던지느냐고.’
‘너무 많이 먹는 것 같기에 난 체할까 봐 걱정해서 말한 거란 말이야.’
들어보면 파비안이 과한 말을 하지는 않았다. 제수씨는 무던한 사람이라서 말실수 정도로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덕분에 제롬은 깨달음을 얻었다. 아이를 가진 여자는 몹시 예민해지며 특히 임신부에게 체형이나 음식으로 뭐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소중한 지혜를 터득했다.
“내 것도 있나?”
휴고가 식탁에 앉으며 묻자 제롬은 신속히 대답했다.
“금방 가져오겠습니다.”
루시아는 자리를 잡고 앉은 그를 흘끔 보면서 스테이크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정말 맛있었다. 그녀는 입안에서 녹을 것처럼 맛좋은 고기 맛을 음미했다.
원래 그녀는 육식을 매우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아이를 가지면서 입맛이 변했다. 그녀 자신도 요즘 식욕이 부쩍 늘어서 시도 때도 없이 많이 먹는다는 자각은 있었다.
‘아기가 먹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
주치의도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먹는 것이 아이의 발달에 좋다고 했다. 아이 핑계를 대면서도 먹고 나서 뒤돌면 배고픈 자신이 식욕이라는 본능에만 사로잡힌 것 같아서 괜히 속상했다. 그런 와중에 남편의 한마디는 굉장히 서운했다.
그가 타박하려는 의도로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래도 삐죽한 심사가 가라앉지 않았다. 괜한 심술을 부리고 있는데도 그는 짜증 한 번 내지 않았다. 도리어 큰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눈치를 살폈다.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묵묵히 스테이크를 썰고 있는 그를 보고 있자니 혼자 꽁해있던 마음이 풀렸다.
“오늘 낮에 궁에 다녀왔어요.”
주치의가 안정기에 접어든 후에는 적당히 움직여야 출산이 수월하다고 조언했다. 그래서 루시아는 나들이 삼아서 가벼운 외출을 했다. 특히 요즘은 캐서린이 입국해서 궁에 머물고 있는 터라 자주 입궁했다.
“공주님이 정말 많이 자라셨어요. 아기는 정말 순식간에 크는 것 같아요.”
아내의 목소리가 사근사근하자 휴고는 긴장을 풀었다. 겨우 화가 풀린 모양이다. 전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요즘 그녀는 기분이 상하면 꽤 오래갔다. 임신부의 예민함은 출산 후 나아질 것이라는 주치의가 해준 말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이 짓을 두 번은 못 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정말 다행이었다. 임신부의 변화를 곁에서 지켜보는 일은 경이로우면서 괴로웠다.
아이가 크며 아내의 배가 불러오는 변화도 처음에만 신기했지 이제는 무서웠다. 그는 한계를 모르고 커지는 그녀의 배를 볼 때마다 저러다 터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렸다.
아내의 늘어난 식욕도 그의 걱정거리였다. 그렇게 먹는 것치고는 아내의 체형은 크게 변화가 없었다. 배 속의 아기가 얼마나 먹어치우는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의 배 속에서 자라는 미지의 생명체가 낯설기만 했다. 요즘은 태동이 요란해져서 배가 꿈틀거리며 마구 움직이는 모습이 눈에 확연히 보였다.
막연하게 상상했던 것과 달리 인간의 성장 과정은 동물에 가까웠다. 주치의는 정상적인 반응이고 당연한 성장 과정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지만 휴고는 ‘내 아이라서 유별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앞으로 2~3개월. 아직도 남은 날이 까마득해서 그는 마음이 무거웠다.
“오늘 왕비 마마께서 아이가 태어나면 사돈을 맺자고 하시더라고요.”
휴고는 미간을 팍 일그러뜨렸다. 왕도 같은 말을 했다. 딸이건 아들이건 태어나면 사돈 맺지 않을 텐가. 농담인 듯 진담인 듯 말했고, 휴고는 완전한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부부가 쌍으로 헛소리한다고 생각하며 단호히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왜요?”
“폐하의 장자가 열 살이야. 막 태어나는 아기와 나이 차가 너무 많아.”
“어머? 폐하께 아드님이 한 분이 아니잖아요. 왜 첫째 왕자님만 생각해요?”
“그럼 더 말이 안 돼. 내 딸과 결혼하려면 다음 왕 정도는 되어야 격이 맞지.”
루시아는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흘렸다.
“나이 때문에 안 되고, 신분 때문에 안 되고. 우리 딸은 노처녀로 늙어 죽겠네요.”
“그래서 말인데. 데릴사위를 들일까?”
“데미안이 있는데 왜 데릴사위를 들여요?”
“데미안과 무슨 상관이야.”
“정말 몰라서 하는 말씀이세요?”
데릴사위는 아들이 없으면 양자를 들여서 가문을 잇는 관습을 지닌 제논에서, 양자로 들일 친척이 없을 경우 선택하는 마지막 수단이었다. 즉, 가문을 이을 아들이 있으면서 데릴사위를 들이는 경우는 없었다.
“내 딸과 결혼하는 것만도 감지덕지해야지.”
남편을 향해 루시아는 눈을 흘겼다.
“태어나지도 않은 애 미래를 벌써 세우려고 하지 마요.”
루시아가 포크를 내려놓자 휴고도 얼른 내려놓았다.
금방 일어나겠지, 그의 바람과 다르게 루시아는 제롬에게 후식을 내오라고 했다. 휴고는 엉덩이를 들썩이며 일어나려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그리고 곧 제롬이 가져온 청포도를 맛나게 먹는 아내를 보며 경이로움을 느꼈다.
‘저 음식이 어떻게 다 들어가는 걸까.’
“그렇게 특정 음식만 많이 먹어도 괜찮은 건가?”
루시아는 청포도 철이 되자 아예 입에 달고 살았다. 청포도가 갓 출하되자마자 공작저로 배달된 후 며칠은 거의 끼니 대신 청포도만 먹었다. 그나마 요즘은 간식으로만 먹는데도 하루 몇 송이씩 먹어치웠다.
“주치의는 괜찮다고 했어요. 먹고 싶은 걸 먹는 게 가장 좋대요.”
루시아는 커다란 포도 한 송이를 다 먹어치우고 일어났다.
“제롬. 포도 한 송이만 2층으로 올려줘요.”
“예, 마님.”
그만 먹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말하려던 휴고는 눈을 마주친 제롬이 단호한 태도로 고개를 젓자 입을 다물었다.
집사의 충고를 따르기로 했다. 괜히 무슨 말을 했다가 겨우 풀어진 아내의 심기를 또 건드리고 싶지 않으니까. 그리고 식당을 나서는 아내의 뒤를 얼른 뒤쫓아 나갔다.
주인 부부가 식당을 나가자 제롬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왠지 한고비를 넘긴 기분이 들었다. 뒷정리하다가 픽, 웃음이 나왔다. 쫄래쫄래 마님의 뒤를 따라가던 주인의 모습은 맹수가 아니라 순한 대형견에 가까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두 분은 태어날 아기님이 아가씨라고 확신하시는 이유가 있는 걸까. 그러기를 바라시는 걸까.’
주인 부부의 대화를 들을 때마다 제롬은 항상 의문이었다.
* * *
부른 배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 옆으로 누운 자세로 휴고는 등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고 뒷목에 입술을 붙였다. 그의 허벅지 안쪽에 그녀의 부드러운 엉덩이가 바짝 붙었다.
뒤에서부터 넣은 상태로 그는 천천히 허리를 움직여 얕은 삽입을 반복했다. 임신 후 풍만해진 그녀의 가슴을 쥐고 조심스럽게 주물렀다. 강하게 잡으면 아프다고 싫어했다.
격하게 해서도 깊이 넣어서도 안 된다. 할 수 있는 체위도 두어 개뿐이었다.
겨우 일주일에 두 번. 일주일에 한 번이라고 말하는 주치의에게 성질을 내니까 주치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조심히 하시면 두 번까지는 괜찮습니다만…….’ 하고 한발 뒤로 물러나서 그나마 얻어낸 결과였다.
‘후우……. 미치겠군.’
천상의 진미를 맛만 보는 중이었다. 맛만 보려니 애가 타서 죽겠고, 그게 힘들어서 아예 맛도 보지 않으면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 그는 하면서도 욕구 불만으로 터질 것 같았다.
뿌리 끝까지 다 넣어 꽉 죄는 속살을 느끼고 싶었다. 그녀의 몸을 이리저리 굴리며 온갖 체위를 다 해보고 싶었다. 자지러지는 그녀의 비명도 듣고 싶고 붉은 눈시울로 흐느껴 울게 하고 싶었다.
“흣…….”
끊어질 듯 흘리는 그녀의 신음을 들으며 그는 치솟는 흥분을 누르고 또 눌렀다. 배가 불러오며 그녀는 피곤하다면서 관계를 갖는 일을 내키지 않아했지만, 오히려 그녀의 안쪽은 더 예민해져서 그를 안달복달하게 했다.
조금 깊게 넣자 촉촉한 융기가 파르르 경련하면서 길을 좁혔다. 뜨거운 질벽이 성기의 끝 부분을 꽉 물고 죄어드는 쾌감에 그는 이를 악물었다.
“아! 휴, 너무…….”
“미안. 힘이 들어갔어.”
그가 잠시 혼미한 정신으로 강하게 넣자마자 바로 힘들어하는 반응이 왔다. 아내는 손대면 금이 가는 얇은 유리 같았다.
“휴, 그만. 배가 당겨요.”
아직 맛도 제대로 못 봤다. 그러나 배가 아프다는 말은 항거 불능이었다. 아이가 걱정되어서가 아니라 아이를 품은 그녀가 혹시 잘못될까 봐 휴고는 그녀의 한 마디 한 마디에 무척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는 덕지덕지 들러붙는 미련을 떼어내고 조심스럽게 허리를 뺐다. 해소하지 못한 욕구가 끓어올라서 휴고는 한숨을 삼켰다.
세 번에 한 번은 이런 식으로 도중에 중단이었다. 그의 인내심은 시험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인내심이 강한지 몰랐던 대견한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는 중이었다.
“괜찮아?”
“이제 괜찮아요.”
“의사 부르지 않아도 되겠어?”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귓가에 들리는 그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루시아는 유별나게 과도한 그의 걱정이 솔직히 좋았다. 불면 날아갈 듯 쥐면 꺼질 듯, 그는 모든 관심을 그녀에게 쏟았다.
그녀는 자신이 마치 세상을 오연하게 내려다보는 여왕이라도 된 것 같았다.
“휴, 태어날 아기가 당신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닮았을까요?”
“그건 아닐걸. 검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은 남자만 타고나거든.”
루시아는 아쉬움에 탄식했다.
“당신의 검은 머리나 눈동자 색이나 둘 중 하나는 닮았으면 했는데.”
“난 당신을 닮은 쪽이 더 좋아.”
휴고는 태어날 아이가 딸이라는 점과 지긋지긋한 타란 혈통의 외모적 특징을 타고나지 않을 점, 모두에 만족하고 있었다.
“아이가 태어나면요. 데미안이 다녀갔으면 좋겠어요. 학기가 끝나려면 겨울이어야겠지요. 동생과 인사를 나누게 해주고 싶어요.”
“학술원에 미리 외출 허가받으라고 말해 놓을게.”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걱정이에요. 데미안이 워낙 어른스러워서 어린 누이동생이 성가실 텐데.”
동생이 태어난다는 소식을 데미안에게 전하는 일은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루시아는 고민하다가 안정기에 접어들었을 때 편지의 말미에 몇 줄로 적어 넣었다. 동생의 탄생이 데미안에게 어떤 상처도 되지 않기를 바랐다.
얼마 후 데미안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학술원의 생활을 보고하는 장문의 편지를 답장으로 보냈다. 그리고 마무리를 하며 짤막한 한 줄로 소감을 전했다.
좋은 소식을 들어서 저도 기쁩니다.
편지 내용에는 태어날 동생에 관한 어떤 언급도 없었다.
편지만으로는 데미안의 속마음이 읽히지 않아서 루시아는 계속 데미안이 신경 쓰였다. 아무리 의젓해도 데미안은 아직 아이였다. 태어날 동생과 어머니가 다르다는 사실에 거리감을 느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데미안과 태어날 아기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둘이 만나서 정을 쌓을 기회를 자주 마련해야겠다고 생각 중이었다.
“괜찮겠어?”
“뭐가요?”
“난 당신이… 데미안을 불편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타란 가문의 관습에 따르면 곧 태어날 아기는 데미안의 신부였다.
휴고는 가문의 비밀을 털어놓으면서 그녀가 모든 진실을 알고 난 후에 전과 다른 변화가 있어도, 특히 데미안을 대하는 태도나 마음이 변해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절 믿지 못하셨군요.”
루시아는 살짝 충격을 받았다. 그가 이렇게 생각하는데 데미안은 오죽할까. 멀리 있는 아들의 불안한 마음이 보이는 듯해서 마음이 안 좋았다.
“데미안은 제 아들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데미안이 저를 어머니라고 부른 순간부터 저는 데미안의 어머니가 되었어요. 그런 착한 아들을 얻어서 제가 얼마나 기쁜지 아세요? 어리지만 어찌나 듬직한지. 어서 빨리 데미안을 제 아들이라고 데리고 다니면서 자랑하고 싶다고요.”
“당신은 녀석에게 정말 후하다니까.”
“그 아이도 단점은 있어요.”
“뭔데?”
휴고는 솔깃해서 물었다.
“성격이 너무 무뚝뚝해요. 그건 타고난 성격이라 어쩔 수 없다 쳐도. 커서 바람둥이가 될지 모른다는 거, 이게 가장 걱정이에요.”
그녀가 ‘당신을 닮아서.’라는 말을 붙이지 않았으나 휴고는 찔끔했다. 그리고 뒤에서부터 안고 있는 그녀를 더 끌어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 날 닮아서 결혼하면 다른 여자는 보이지도 않을 테니까.”
루시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갈수록 능갈치는 말솜씨가 늘었다.
그녀의 기분이 좋아 보이자 휴고의 손이 슬금슬금 그녀의 허벅지 안쪽을 더듬었다.
“이어서 할까?”
“잘래요.”
무정한 아내는 단호히 거절하고 잠시 후 곤하게 잠들었다. 휴고는 항상 혼자 몸이 달아서 어쩔 줄 모르는 현실이 우울했다.
‘아가야. 대체 너를 언제나 볼 수 있는 거냐.’
그가 딸을 기다리는 마음은 부성애라기보다는 노골적이고 개인적인 사심에 가까웠다.
* * *
여름이 끝나고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공작부인이 산달에 이르자 공작저는 본격적인 출산 준비에 들어갔다.
궁에서 실력 좋은 의사와 왕실의 출산을 수십 년 담당한 노련한 산파와 조수들을 보내주었다. 갑자기 저택에 거주하는 자들이 늘어나자 넓은 공작저가 북적이는 느낌이 났다.
모두의 관심은 공작부인에게 집중되어서 언제 올지 모르는 진통을 기다리며 대기 상태였다.
루시아는 요즘 어디서든 혼자 있지 못했다. 온종일 누군가의 시선을 받는 생활이 거북하지만 아기를 생각하며 견뎠다.
“아…….”
루시아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배를 잡고 미간을 찡그렸다. 며칠 전부터 배가 딴딴하게 굳으면서 아랫배가 살살 아픈 증상이 이어졌다. 그런데 오늘 아침부터는 허리까지 찌르르 울리는 통증이 빈번했다. 아까도 아프더니 또 시작이었다.
“통증이 있으십니까?”
산파는 창가에 나란히 세워둔 모래시계를 살폈다. 간격이 아직 길지만 규칙적이었다.
“진통을 시작하시는 것 같군요. 마님을 침실로 모시세요.”
갑자기 모두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 시중을 들던 제롬의 안색이 하얗게 탈색했다. 마님이 하녀의 부축을 받아서 응접실을 나가는 모습을 우두커니 보고 있다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가장 먼저 할 일을 떠올렸다. 주인께 소식을 전하기 위해 움직였다.
공작저 안으로 마차가 달려 들어왔다. 밖에서 하인이 문을 열기 전에 직접 문을 열고 휴고가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제롬이 소식을 전하러 궁으로 사람을 보냈으나 당시에 중요한 국정 회의 중이었다. 회의가 끝나고 나서 소식을 받았을 때는 이미 두 시간은 지난 후였다.
2층으로 뛰어 올라가 침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자마자 휴고는 멈칫했다. 침실은 조용했고, 침대에 앉아있는 그녀가 휴고를 보고 생긋 웃었다.
아수라장을 각오하며 달려온 휴고는 얼떨떨해서 침대로 다가갔다.
“낳은 거야?”
루시아가 풋, 웃음을 터뜨렸고, 침대 주변에 서있던 시중인들도 고개를 돌려 웃었다. 루시아는 손짓으로 사람들을 모두 내보냈다.
“아직 시작이래요. 신기하게도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다가 갑자기 배가 무척 아파요. 그러다가 금방 또 괜찮아져요.”
“시작이면……. 얼마나 걸리는데?”
“산파 말이 초산이면 오래 걸린다고 하네요. 아마 내일은 되어야 태어날 거래요.”
그녀는 느긋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이런 식이라면 막연히 걱정한 출산이 별일은 아니겠구나, 휴고가 생각하자마자 루시아는 고통스럽게 배를 잡고 몸을 숙였다.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말도 못하고 헉헉거리는 아내를 보며 휴고의 표정에서도 핏기가 사라졌다. 혼란에 빠져서 우왕좌왕하다가 바깥을 향해 소리쳤다.
“밖에 누구 없나!”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산파가 곧바로 침대로 다가가 루시아의 등을 쓸어주면서 이렇게 저렇게 호흡을 하라고 조언했다. 산파가 시키는 대로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면서 점점 루시아의 표정이 편해졌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에 그녀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루시아가 진정이 되자 사람들이 다시 물러갔다. 조금 전의 소란이 거짓인 것처럼 침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휴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자신의 무력함을 실감했다.
“이제는 또 잠깐 괜찮을 거예요. 규칙적이거든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생긋 웃는 그녀에게 묻고 싶었다. 자신은 그 잠깐만으로도 혼이 빠지는 기분인데 어떻게 그렇게 웃을 수 있지?
‘이런 과정을 내일까지 해야 한다고?’
이미 그는 아뜩했다.
그런데 상황은 그의 예상치를 넘어서 악화되었다. 진통은 주기는 짧아지고 정도는 심해져서 자정 무렵부터 루시아는 배를 잡고 뒹굴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휴고는 괜찮으냐고 물을 수 없었다. 아무리 봐도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으니까!
휴고는 그녀의 비명을 들으며 산파를 붙들고 늘어졌다.
“저러다 큰일 나겠어. 어떻게 좀 해보게.”
“출산에 들어가는 과정입니다.”
“저러다 죽겠다고!”
“공작 전하께서 여기서 안절부절못하시면 마님께서 집중을 못하십니다.”
산파는 성가시게 구는 공작을 아예 쫓아내 버렸다. 휴고는 마님을 위해서라는 명목에 두말하지 못하고 쫓겨났다.
문이 굳게 닫힌 침실 문을 바라보며, 안에서 들리는 비명을 들으면서 휴고의 얼굴에는 곧 죽을 사람처럼 혈색이 없었다. 그는 훗날 이날을 인생 최악의 지옥 같은 밤이라고 기억했다.
“마님, 아이가 나오는 길이 열리고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배에 너무 힘을 주지 마세요.”
상태를 지켜보며 산파는 계속해서 산모에게 조언했다. 아무래도 초산이라서 진행이 더뎠다. 수없이 아이를 받은 산파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출산은 변수가 많았다. 굉장히 순조롭게 진행되다가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히는 일이 종종 있었다.
조수가 산파 곁으로 다가와서 작은 목소리로 말을 전했다.
“공작 전하께서 경과를 물으십니다.”
산파는 쯧 혀를 찼다. 대체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출산은 이제 시작이었다. 두 시간이나 지났을까. 계속 상태를 묻는 공작의 끈질긴 질문을 아직 멀었다는 말로 대답해 보내는 것도 한두 번이었다.
산파는 왕실에서 귀한 분들의 출산을 담당했다. 태어날 아기가 가장 중요하지만, 부모도 무시할 수 없었다. 아무리 출산에 바쁘고 정신없어도 적당한 처세가 필요했다.
“아무래도 뵙고 와야겠다. 너는 마님을 지켜보다가 혹시라도 이상한 기미가 보이면 즉시 달려오너라.”
능숙한 조수에게 잠시 자리를 맡기고 산파는 침실을 나갔다. 휴고는 산파를 보자마자 다급히 물었다.
“어찌 되었나?”
“아직 멀었습니다. 전하.”
“그러니까 그 먼 것이 언제냐고! 아까부터 같은 말만 하고 있지 않나.”
“전하, 몇 번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마님께서 초산이시라 시간이 걸립니다. 지금 진행 상황으로 봐서 금방 아기가 태어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니 진정하시고. 한숨 주무시고 오시면…….”
“안사람이 안에서 다 죽게 생겼는데 자고 오라고?”
버럭 성을 내는 공작을 보며 산파는 입맛을 다셨다. 멀쩡히 애 잘 낳고 있는 여자를 두고 다 죽어간다는 표현은 적절치 않았다. 난산의 기미가 보이는 것도 아니고, 본격적인 진통을 시작한 지 겨우 두 시간이었다.
“내가 들어가서 안사람이 괜찮은지 확인하면 안 되겠나?”
“산실은 금남 구역입니다.”
“얼굴만 보고 나온다니까.”
산실에 남자가 들어온다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을 하겠다는 타란 공작을 보며, 산파는 정말 이분이 제정신인지 의심했다.
왕실에서 출산할 때는 진통을 시작할 때와 아이가 태어났을 때에 비로소 부군에게 소식을 전했다. 왕의 후궁이 출산하는 경우에는 왕은 아이가 태어나고 며칠 후에나 오는 경우도 빈번했다.
산실 밖에서 남편이 서성거리며 난리 치는 이런 경우는 노련한 산파의 오랜 경력에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유별나기도 하지.’
소문이 무성한 타란 공작을 가까이 대하는 일이 처음이라 나이 지긋한 산파도 궁에서 나와서 공작저로 향할 때는 꽤 긴장했다. 그런데 일상을 접한 타란 공작은 듣던 소문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덩치는 커서 자그마한 마님께 꼼짝을 못했다. 조금이라도 시간이 나면 마님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결혼한 지 햇수로 3년이 넘은 부부 금실이 참 좋기도 하다고 좋게 생각했다. 그런데 체면 돌아보지 않고 애 낳을 때에도 이렇게 유난스럽게 굴 줄은 몰랐다.
“기다리십시오. 자꾸 어찌 되느냐 물으시면 제가 마님께 온전히 집중할 수 없습니다. 마님께서 무사하게 건강히 출산하기를 바라시면 방해하시면 안 됩니다.”
산파는 꼬장꼬장한 성미를 드러내며 단호하게 말했다. 출산 과정을 방해하는 일만큼은 공작이 아니라 왕이라고 해도 용납할 수 없었다.
“무탈한 거겠지?”
산파가 아내의 안위를 거론하자 휴고는 기가 죽었다.
“염려 놓으십시오. 마님께서는 잘하고 계십니다. 여기 계시면 더 초조하십니다. 차라리 다른 곳에서 기다리시는 편이…….”
“여기 있겠다.”
공작의 결연한 대답을 들으며 산파는 헛웃음을 삼켰다. 누가 보면 세상에 애를 낳는 사람은 공작부인 혼자인 줄 알겠다.
산파가 다시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휴고는 침울한 표정을 짓고 서있었다.
주군의 안색을 훔쳐보면서 파비안의 입술이 실룩거렸다. 이런 진귀한 구경이라니. 그래서는 안 되는 걸 아는데, 지금 공작의 심경이 얼마나 심각한지 아는데 파비안은 웃음이 나와서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2층에서 내려오다가 파비안은 막 올라오는 제롬과 마주쳤다. 냅다 제롬의 팔을 붙들고 제롬의 업무실로 들어갔다.
“왜 그래?”
제롬은 심각한 파비안의 표정 때문에 얼결에 업무실로 끌려 들어갔다. 파비안은 문을 닫고 소파에 몸을 던져 웃음을 터뜨렸다. 혹시 웃음소리가 나갈까 봐 크게 웃지는 못하고 숨을 죽여서 낄낄거렸다.
“미치겠다. 전하께서 아주 넋이 나가셨어. 하늘이 무너진다고 해도 저런 표정은 안 지으실걸.”
파비안은 조금 전에 제롬으로부터 소식을 받고 헐레벌떡 달려왔다. 혹시 마님께서 출산하시다가 문제라도 생겼나 싶어서 가슴이 덜컹했다. 숨이 턱이 차도록 달려온 파비안에게 제롬은 말했다.
‘넌 경험이 있으니까. 도움이 될까 해서 불렀어.’
‘내가 애 낳았냐? 도움은 무슨 도움!’
잘 자다가 화들짝 놀라 달려온 파비안은 제롬에게 성질을 냈다. 기왕 왔으니까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꼼짝없이 잡혀서 언제 끝날지 모를 출산으로 덩달아 고생길에 접어들자 제롬이 꼴도 보기 싫었다.
그런데 아까 제롬에게 화냈던 마음이 이제는 고마움으로 바뀌었다. 제롬 덕분으로 즐거운 구경을 할 수 있었다.
제롬은 한심한 형제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컥!’ 하고 비명을 지른 파비안이 뒤통수를 붙잡고 소리 질렀다.
“야!”
제롬은 단호하게 파비안의 뒷덜미를 잡아 일으켰다.
“아직 멀었다고. 지금부터 가서 서있어서 뭐 해.”
“시끄러워. 주인께서 저렇게 속이 타서 계시는데 수하된 몸으로 고통을 분담해야지.”
“너나 해!”
제롬에게 질질 끌려가면서 파비안은 항의했으나 제롬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창으로 새어 들어오는 아침 햇살에 눈이 부셔서 파비안은 눈을 껌벅거렸다. 소파에서 쪼그려 쪽잠을 잤더니 온몸이 찌뿌둥해서 있는 힘껏 기지개를 켰다.
“아기님은 태어나셨나.”
새벽녘까지는 그런대로 견뎠다. 졸음을 쫓기 위해서 입안이 텁텁해지도록 차를 마셨으나 눈이 자꾸 감겨서 미칠 것 같았다. 파비안은 제 자식이 태어날 때도 밤을 새우지 않았다. 주군의 아이가 태어나는 상황에 자기 일처럼 심각해질 수 없었다.
그래도 아랫사람의 고충이려니, 생각하고 참으려 했다. 퀭한 눈으로 벽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출산의 고통을 생생히 담은 비명을 들으며 잠을 쫓았다. 그러나 자기도 모르게 선 채 졸았다.
자꾸 고개를 끄덕거리는 파비안을 보다 못해서 제롬은 파비안을 자라고 내려 보냈다. 못 이기는 척 슬그머니 내려와서 제롬의 업무실 소파에서 잠들었다.
몇 시간 잤을 뿐이지만 그래도 머리가 상쾌했다. 파비안은 업무실에서 고개를 내밀고 바깥을 살폈다. 조용하고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돌아보면서 2층으로 올라갔다.
새벽까지 봤던 주군의 모습을 떠올리며 슬쩍 웃었다. 공작이 그렇게 혼이 나가서 초조해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정말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몇 시간 넘도록 계속 같은 자리를 부산스럽게 왔다 갔다 했다.
2층으로 올라섰을 때는 조용했지만, 복도를 따라 걷자 멀리서 비명이 들렸다. 여전히 출산은 현재 진행 중이었다.
파비안은 마치 밤새 내내 자리를 지킨 것처럼 끼어들었다. 자신의 빈자리쯤이야 공작은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것이다.
‘기운도 좋지.’
초조하게 거닐고 있는 공작의 발걸음은 여전히 기세가 좋았다. 며칠 밤을 새워도 끄떡없는 공작의 체력은 이미 많이 겪어서 새삼 놀랍지는 않았다.
‘전하는 그렇다 쳐도. 정말 신기한 건 저놈이야.’
태어날 때는 파비안의 쌍둥이 형제였으나 부모 형제의 허락도 받지 않고 타란 가문의 노예로 다시 태어난 제롬은 마치 제 자식의 탄생을 기다리는 것처럼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흔들림 없이 굳건하게 서있었다.
‘나는 왜 부르냐고, 나는.’
제롬 덕분에 한숨 잤다는 고마움은 깨끗이 잊고 파비안은 괘씸한 형제에게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그런데 갑자기 제롬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파비안도 움찔 놀라서 시선을 돌렸다. 정신없이 서성거리던 공작도 우뚝 멈추어서 침실 문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파비안은 기이한 침묵을 느끼다가 곧 변화를 알아차렸다. 안에서 들려오던 소음이 사라졌다. 모두 숨을 죽이는 짧은 시간이 무척 길었다. 그리고 안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후우…….”
여기저기서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파비안의 입가에도 웃음이 떠올랐다. 내내 투덜거렸으나 걱정하는 마음도 컸다.
언뜻 보면 모두 아이를 쑥쑥 잘 낳는 것 같아도 은근히 아이를 낳다가 잘못되는 여자들이 많았다. 혹시라도 마님께 불행한 일이 생기면 뒷일은 생각도 하기 싫었다. 마님이 계시지 않은 타란 공작가는 상상할 수 없었다.
파비안에게 마님은 일종의 안전장치였다. 최후의 보루였다. 과거에는 공작의 결정은 최종 결론이었다. 죽으라 하시면 죽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젠 마지막 발버둥을 칠 여지가 있었다. 이래도 죽으나 저래도 죽으나 매달려볼 곳이 생겼다. 부디 마님이 아주 오래오래 공작이라는 맹수를 길들여 목줄을 쥐고 있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