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장 데미안 (2)
등 뒤에서부터 척추를 타고 쭉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이 느낌이 무엇의 전조인지 잘 알기에 루시아는 흐느낄 것 같은 신음을 애써 참았다. 누가 금방이라도 집무실의 문을 두드릴지 모른다는 우려가 더 흥분에 몰아넣었다. 이윽고 그녀의 안에서 무언가 폭발했을 때, 그가 신음을 흘리면서 그녀 안에 뜨거운 정액을 쏟아냈다. 루시아는 끊임없이 제멋대로 마구 움직이는 질의 움직임을 느끼며 머리끝을 쭈뼛 세우는 쾌감에 제대로 신음도 내뱉지 못하고 입만 벌렸다.
“흑… 흐윽…….”
루시아는 그에게 매달려서 흐느꼈다. 온몸이 마구 떨렸다. 휴고는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만큼 민감한 여자는 보지 못했다. 그가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온몸이 자지러졌다. 몇 번이고 오르가슴을 느끼는 음란한 몸이었다.
그녀는 처음 느끼는 오르가슴보다 두 번째 혹은 세 번째에서 가장 절정에 치달았다. 온몸이 떨리고 가슴은 부풀어 유두가 빳빳이 서고 특히 그의 중심을 물고 있는 내부 경련이 장난이 아니었다.
쫀득하고 뜨거운 내벽에 오돌오돌 돌기가 사방으로 일어나서 그의 것을 잡아서 비틀었다. 그러면 거의 당해내지 못하고 굴복하듯 파정하고 말았다. 그리고 나서도 심장이 뛰듯이 박동하는 내부 경련은 상당히 길게 이어졌다.
정말 가만히 넣고만 있어도 신음이 나왔다. 시간이 지나자 그녀 내부의 박동이 점차 느려졌다. 아주 느릿하게 쿵 소리를 내듯 꽉 죄었다가 풀 때마다 그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생겼다.
그녀의 목덜미를 따라 자잘한 키스를 이었다. 목을 타고 올라오는 입맞춤이 턱밑을 이어 입술 옆을 누르고 입술에 닿았다. 가볍게 입술 위에만 몇 번이고 살짝 쪽쪽 입을 맞추다가 입술을 삼키고 혀를 밀어 넣는 격한 키스를 밀어붙였다.
허리를 빼고 그녀를 들어 책상에 엎드리게 했다. 차가운 나무 책상이 볼에 닿자 루시아는 온몸이 흥분한 와중에도 부끄러움을 느꼈다.
두꺼운 기둥이 허벅지 안쪽 살을 스치면서 비처 깊숙이 진입했다. 느릿하게 계속 들어오던 그의 허벅지가 그녀의 엉덩이에 밀착하고서야 그는 멈췄다. 그가 거칠게 호흡을 흘렸다.
한껏 예민한 안쪽이 침입자를 꽉 눌렀다. 눈앞이 아찔해서 휴고는 이를 사려 물었다. 움직이지를 못하겠다. 아이를 낳고 그녀의 몸은 갈수록 더 농익었다. 그는 숨을 몰아쉬면서 허리를 뒤로 뺐다가 강하게 진입했다.
“으응!”
그의 움직임이 조금씩 속도가 붙었다. 살이 부딪치며 철썩이는 젖은 소리가 났다. 루시아는 책상에서 밀려나지 않으려 손바닥으로 책상을 눌러 마찰력을 만들었지만, 그녀의 몸은 물론이고 책상까지 덜컹거리며 흔들렸다. 단단한 살덩이가 강한 무게를 실어 안을 꽉 채울 때마다 루시아는 비명 같은 신음을 질렀다.
“아! 아앗!”
안쪽 깊은 곳은 건드리자 눈앞이 번쩍했다. 질 안쪽이 확 움츠러들자 그가 신음했다. 그녀의 골반을 붙들고 있는 그의 손에 좀 더 힘이 들어왔다. 그는 몇 번을 더 짓쳐 들어오다가 뿌리 끝까지 다 밀어 넣은 상태로 정을 쏟았다. 거친 호흡을 쏟으며 그녀의 귓불을 입술로 물고 혀로 핥았다. 잔 경련을 일으키는 내부의 떨림만큼 그녀의 온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당신 집무실에… 다신 안 올 거예요.”
숨을 헐떡이며 하는 그녀의 말에 휴고는 쿡쿡 웃었다.
* * *
새해 첫날까지 한 달 남짓 남기고 1년의 마지막 학기가 끝난다. 그리고 약 두 달의 방학 기간 후 다음 해 첫 학기의 시작이었다.
여름에는 방학이 시작하는 하루 이틀 내에 대부분 학생이 집으로 돌아가서 교정이 매우 한산했다. 그러나 겨울 방학은 졸업식 때문에 방학 시작 후 일주일이 지나도록 여전히 북적거렸다. 특히 졸업식 당일인 오늘은 교정 빽빽하게 마차가 계속 들어왔다.
휴고가 익시움을 방문한 날이 하필 졸업식 날이었다. 수많은 마차 틈에 섞여서 흑사자 문양이 선명한 두 대의 마차가 익시움으로 들어섰다. 다른 마차들과 달리 졸업식이 한창인 대강당이 아니라 행관으로 향했다.
행관 앞은 비교적 한산했다. 그러나 누구를 기다리는 것처럼 몇 명의 사람들이 나와 서성이고 있었다. 익시움의 총장 왈도는 초조한 표정으로 손을 비비다가 마차가 들어오자 냉큼 몇 개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두 대의 마차가 멈추어서고 뒤의 마차에서 수행원들이 내려 앞의 마차 곁에 대기하는 모습을 보며 긴장된 침을 삼켰다.
마차 문이 열리고 흑발의 남자가 내렸다. 어둠처럼 짙은 머리카락의 사내는 기사 못지않은 장신의 키와 체구를 가져 확 눈에 띄었다. 짙고 또렷한 눈썹 아래 눈동자는 피처럼 붉고, 곧게 뻗은 콧대를 중심으로 대칭을 이루는 이목구비는 흠 잡을 곳이 없이 반듯한 보기 드문 미남이었다.
그러나 그를 보는 사람은 외모보다 분위기에 압도당했다. 서늘한 눈빛 속에 광폭한 기운이 느껴지고 표정 없는 얼굴에서는 차가움이 뚝뚝 떨어졌다. 감히 다가가서 말을 걸면 베일 것 같은 예기가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왈도가 허리를 굽실거리며 손님과 수행원들을 모시고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누가 오는지도 모르고 함께 서있었던 행관 직원들이 수군거렸다.
“총장님 코가 바닥에 닿겠어. 대체 누구지?”
학술원의 학생들은 각국의 왕족 또는 귀족이거나 최소한 엄청난 거부의 자식이었다. 온갖 높으신 분들을 상대하는 익시움의 총장은 콧대가 높았다.
“제논의 타란 공작이 틀림없네.”
“타란 공작? 그 타란 공작 말인가?”
“그럼 제논의 타란 공작이 둘인가?”
“소문으로만 듣던 유명인을 직접 보니 신기하군. 저렇게 젊은 줄은 몰랐는데. 과연 기세가 무시무시하구먼.”
왈도가 절절매는 이유는 단지 일국의 공작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타란 공작은 학술원의 총장 자리를 갈아치울 수 있는 이사진에 큰 영향력이 있으며 매년 상당한 장학금을 내는 후원자였다.
익시움은 기본적으로 거금의 등록금을 받아서 각국의 왕족이나 귀족을 학생으로 받았으나 신분을 불문하고 학업 능력이 뛰어난 장학생을 유치해서 미래의 교수를 배출하는 과정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뛰어난 교수진은 학술원의 수준을 높였다. 그래서 얼마나 장학금을 잘 유치하는가도 총장의 능력을 측정하는 척도였다.
“미리 기별을 주셨으면 더 정성을 다해 불편함 없도록 모셨을 텐데 말입니다. 졸업식이라 분위기가 어수선하고 준비가 미흡해서 송구합니다.”
왈도는 오늘 아침에 느닷없이 거물 손님의 방문 통보를 받았다. 졸업식 당일이라 무척 바쁘고 만날 사람도 많고 일정이 빽빽했으나 졸업식 연설을 비롯한 모든 일정을 미루고 손님맞이에 집중했다.
누군가는 왈도를 비굴하다고 말할지 모른다. 사실 그런 면이 어느 정도 있었다. 왈도는 적당한 자신의 능력 이상으로 뛰어난 처세 덕분에 익시움 총장 자리를 근 10년 가까이 지키고 있었다.
내온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미세하게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내려놓는 휴고의 모습을 왈도는 민감하게 파악했다. 비서가 차를 엉망으로 탄다는 건 알고 있었다. 청탁을 받은 친척이라 그냥 데리고 있었지만 오늘부로 해고다.
“어떤 용무이신지 말씀해 주시면 신속하게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각하.”
“익시움에 재학 중인 내 아들을 만나러 왔소.”
왈도의 등에 식은땀이 쭉 흘렀다.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절대 없다. 들었다면 잊었을 리가 없었다. 왈도는 관심을 두어야 할 왕족이나 고위귀족 학생들을 특별 리스트에 기록해 관리했다. 타란 공작의 아들이 있었다면 리스트의 가장 윗줄에 올라갔을 것이다.
“이런 걸 받았소.”
공작이 내민 봉투를 받아 열어보고 공문을 확인한 왈도의 손이 덜덜 떨렸다. 정학 7일? 어떤 미친놈이!
“개인적으로 알아보니까 절차에 문제가 있더군.”
감히 내 아들에게 정학 7일을 때리다니. 총장 노릇을 더 하기 싫은 모양이구나. 왈도의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즉시 조사해서 바로잡겠습니다.”
왈도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쩌자고 이런 대형 사고가 발생했는지 한시라도 빨리 파악하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했다.
“아들이 기숙 과정 중이오. 집에 데려가려고 하는데 미리 외출 허가를 받지 않았소. 더구나 아직 근신 기간 중이라…….”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바로 자제분을 데려가셔도 됩니다. 지금 모셔올까요?”
휴고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했다.
“내가 아들을 만나서 데려가겠소.”
“근신 중이라면 기숙사로 가시면 될 겁니다. 제가 직접 모시고…….”
“그럴 필요까지는 없소.”
왈도는 타란 공작을 배웅하며 덧붙여서 강조했다.
“자제분의 일은 아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확실히 조사해서 잘못을 바로잡겠습니다.”
떠나가는 마차를 보면서 왈도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총장 자리가 위태로운 대형 사건이었다. 미루어진 오늘 일정 따위는 알 바 아니었다. 정학 7일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고 왜 타란 공작의 자제가 익시움에 재학 중인 사실을 자신이 몰랐는지,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은 직원들을 한바탕 굴릴 생각이었다.
책장을 넘기던 데미안은 괴상한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소파에서 늘어지게 자던 크리스가 몸을 뒤척이다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내는 소리였다. 소파로 다시 기어올라 가는 꼴을 보면서 데미안은 피식 웃었다.
크리스는 방학하고도 계속 학술원에 머물렀다. 그리고 식사 때마다 밥을 먹으러 가자고 데미안의 기숙사 방문을 두드렸다. 사흘째 되는 날에는 너는 왜 집에 안 가느냐고 묻자 크리스가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내가 끼어들어서 커진 일을 네가 다 덤터기를 쓴 것 같아서. 네가 그 녀석들 상대하지 않는 건 알고 있었거든. 나 때문에 녀석들과 시비가 커지고 정학 처분도 받은 거잖아.’
‘네 탓이 아니야.’
‘난 찜찜하게 이대로는 집에 못 가. 나도 같이 근신받을래. 음……. 혹시 내가 귀찮아? 오지 말라고 하면 안 오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정말 귀찮다고 할까 봐 걱정하는 기색이 확연한 크리스의 면전에 대고 오지 말라고 할 수 없었다.
‘…좋을 대로 해.’
크리스는 다음 날부터 아침에 찾아와서 밤늦은 시간까지 마치 자기 방인 것처럼 데미안의 기숙사 방에서 뒹굴었다. 별로 하는 일도 없었다. 책을 읽는 데미안을 방해하지 않았고, 여우를 데리고 놀다가 책을 들추거나 그것도 지루하면 낮잠을 잤다. 낯을 가리는 아샤가 크리스와 금방 친해진 점도 신기했다. 데미안은 크리스처럼 넉살 좋게 접근하는 녀석이 처음이라서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싫지는 않았다.
“데미안.”
“왜.”
“저녁 먹으려면 아직 멀었나?”
“점심 먹은 지 얼마 안 됐어.”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시간 정말 안 가는구나. 네 이름 본명이야?”
학술원 정책에 따라서 교사가 학생을 부르거나 학생끼리 서로 부를 때 신분 불문하고 존칭을 생략하며 이름을 불렀다. 귀한 이름을 아무나 불러대는 것이 모욕적이라고 생각하는 대부분 학생은 학술원에서만 사용하는 가명을 등록했다.
“본명 맞아.”
“나도 본명이야. 방학 동안 계속 학술원에 있을 거야?”
“집에 다녀와야지.”
“아……. 집에 가는구나.”
우리 집에 초대하면 올래? 말하려고 했던 크리스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잠시 이어진 대화가 끊기고 다시 소파에 엎드려 늘어져있던 크리스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데미안도 책을 놓고 시선을 문으로 고정했다. 다시 누군가 문을 두드리자 크리스가 벌떡 일어났다.
“내가 나가볼게.”
크리스는 쪼르르 달려가서 문을 열었다.
휴고는 문을 연 채 굳어있는 크리스를 흘끔 보고 안으로 들어갔다. 데미안이 놀라 벌떡 일어났다.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
휘둥그레진 눈으로 타란 공작과 작은 타란 공작을 번갈아 보고 있던 크리스는 데미안의 입에서 흘러나온 호칭을 듣고 입을 쩍 벌렸다.
휴고는 처음 와보는 기숙사 방을 스윽 한눈에 담았다. 방을 채운 소품들이 오래 사용한 태가 나고 실내 장식은 처음 기숙사를 지은 이후에 손대지 않았는지 한참 구식이었다. 넓이만 빼면 눈에 차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데미안의 기숙사 비용으로 매년 거금을 냈다. 엄청난 등록금을 받아 챙기면서 새나가는 곳이 있지 않고서야 이따위가 특실일 수가 없었다.
‘감사에 들어가야겠어.’
데미안의 기숙 과정을 다른 과정으로 변경하는 방법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잘되었다. 과정 변경은 설립 규칙이라서 개정이 까다로웠다. 휴고가 이사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지만, 설립 규칙을 바꿀 의결정족수에는 미치지 못했다.
학술원 과정 중에는 2년짜리 집중 과정이 있었다. 누구나 원하면 입학해서 2년 동안 듣고 싶은 수업을 마음껏 들을 수 있었다. 학술원의 장삿속이 드러나는 부분이었다. 대신 졸업증이나 수료증은 주지 않았다. 집중 과정을 중간에 다른 과정으로 바꾸는 학력 위조를 원천 방지하기 위해서 아예 모든 과정 간 변동할 수 없는 폐쇄 구조를 원칙으로 규정했다.
기숙사 꼴을 보니까 한두 푼 빼먹은 규모가 아니다. 감사에 들어가면 이사진에서 걸려 나올 자가 한둘이 아닐 것이다. 의결정족수를 채울 이사진을 확보할 수 있을 것 같다. 방법을 찾았으니 아내의 부탁은 해결된 것과 다름없었다.
휴고는 가벼운 마음으로 데미안에게 시선을 돌려서 아래위로 쭉 한 번 훑었다. 전에 봤을 때보다 더 큰 것 같았다. 애들은 참 빨리 큰다. 에반제린이나 데미안이나 눈 돌렸다가 다시 보면 어딘가 달랐다.
“남아서 할 일이 있느냐?”
아버지의 시선이 닿자 긴장하고 서있던 데미안이 빠르게 대답했다.
“없습니다.”
“챙길 짐 있으면 챙겨라. 집으로 갈 거니까.”
“하지만 전 지금 근신…….”
“그 일은 됐다.”
“혹시 집에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데미안은 갑자기 아버지가 찾아와서 놀란 가슴이 가라앉자 곧바로 걱정이 들었다. 어머니와 누이동생의 얼굴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일? 없다고는 할 수 없지.”
부자의 대화를 들으면서 크리스는 슬금슬금 가까이 다가가 둘을 계속 번갈아 봤다. 따로 봤을 때는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나란히 놓고 보니까 닮은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똑같았다. 누가 봐도 두 사람은 절대 남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아버지라는 호칭을 직접 듣지 않았더라면 두 사람을 부자지간이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차라리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형제라면 모를까.
‘정말 데미안이 타란 공작 아들이란 말이야? 왜 근데 아무도 몰라?’
타란 공작 같은 유명인사에게 데미안처럼 다 큰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모른다는 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휴고는 몇 걸음 간격까지 바짝 다가와서 무례하게 고개를 들이밀고 노골적으로 살피는 소년을 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자네는 뭔가?”
크리스는 제 잘못을 깨닫고 차렷 자세로 몸이 굳었다. 크리스의 눈앞에 부친의 엄한 눈빛이 스쳐 지나갔다. 크리스의 가벼운 몸가짐을 항상 꾸짖는 부친이 지금 상황을 봤으면 몇 대 꿀밤을 얻어맞는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무례했습니다. 송구합니다. 데미안 군의 학술원 동기 크리스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허리가 꺾어지도록 몸을 숙이는 크리스를 보며 휴고는 턱을 쓸었다.
“낯이 익은데.”
“네? 아……. 올해 신년 파티에서 인사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거의 1년이 다 된 일을 설마 기억하나?’
아버지가 소개해 주는 자리에서 공작 부부에게 딱 한 번 인사했다.
‘헉. 내 이름을 제대로 소개 안 했네.’
크리스가 실수를 깨닫고 인사를 다시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는데 휴고가 먼저 기억을 되살렸다. 휴고의 기억력은 비상했다. 다만, 관심이 없을 뿐이었다.
“필리프 후작의 차남.”
“예? 마… 맞습니다.”
“학술원 동기라고? 여기서 뭐 하는 거지?”
“그건 제가…….”
크리스는 데미안의 정학에 자신이 큰 책임이 있다는 자백을 하려고 했다. 데미안이 선수를 쳤다.
“친구입니다.”
데미안은 며칠 계속 방에서 죽치는 크리스와 자신의 관계가 대체 뭔지 정의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말해 놓고 깨달았다. 녀석은 친구였다. 학술원에서 최초로 사귄 친구. 눈이 마주친 크리스가 히죽 웃었고, 데미안도 픽 웃었다.
휴고는 흥미로운 눈으로 두 소년을 살폈다. 아내는 데미안의 교우 관계에 관심이 많았다.
‘데미안이 보내는 편지에 친구 얘기는 한마디도 없어요. 친구가 없는 걸까요?’
‘그런 건 없어도 돼.’
살아오면서 친구 같은 건 가져본 적도, 갖고 싶은 적도, 필요하다고 생각한 적도 없는 휴고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러자 그녀는 휴고를 새침하게 흘겨보았다.
‘저는요. 데미안이 그 점만은 당신을 닮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휴고는 잘못 없이 타박을 들은 것처럼 억울했다. 이러다 정말 데미안이 친구가 없으면 당신 닮아 그런다는 소리를 들을 것 같았다. 아들 녀석에게 친구 비슷한 똘마니 몇을 붙여줘야 하나 고심 중이었다. 데미안이 친구라고 부르는 녀석이 있다는 사실을 아내가 알면 좋아할 것 같았다.
“크리스라고 했나? 자네도 기숙 과정 중인가?”
“아닙니다. 곧 집으로 갈 겁니다.”
“잘됐군. 자네도 따라오게.”
“…예?”
휴고는 어리둥절한 크리스의 의문은 해결해 주지 않고 데미안에게 재촉했다.
“짐 다 챙겼으면 서둘러라.”
챙길 시간도 주지 않았지만, 데미안은 불만 없이 아샤만 품에 안고 문으로 향하는 휴고의 뒤를 따라가다가 멍하게 서있는 크리스에게 말했다.
“뭐 해. 안 오고.”
“나 말이야?”
두 번 대답도 안 해주고 가는 매정한 친구 녀석 뒤를 크리스는 얼결에 따라갔다. 저 부자의 대화는 어딘지 모르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왜…….’
크리스는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수도를 달리는 마차 안에 앉아있었다. 마차 안에 그 이름도 유명한 타란 공작이 마주 앉아 함께 타고 있고, 옆에는 여우를 무릎에 올린 데미안이 있었다.
‘닷새는 걸려서 올 수도를 덕분에 편하고 빠르게 오긴 했지만…….’
크리스는 왜 자신이 타란 공작 부자와 같은 마차를 타고 어딘지 모를 곳으로 가고 있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냐고, 여기까지 태워주신 것만도 감사하고 아무 데서나 내려주시면 집에 갈 수 있다고 감히 타란 공작에게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크리스는 집에 가면 엄한 아버지 눈을 똑바로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타란 공작에 비하면 아버지는 참 편한 사람이었다.
“아까 말씀하신, 일이 있다는 건. 뭔지 여쭈면 안 되는 겁니까?”
데미안은 계속 아까 휴고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버지가 먼저 말해 주기를 기다렸으나 그런 기색이 없어서 참다못해 물었다.
“정학 통지서를 네 어머니가 받았다.”
“…….”
데미안의 표정이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어머니께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학술원에서 사람 죽이지 말라는 소리는 애먼 놈들한테 맞아주라는 뜻이 아니었어.”
“…죄송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인은 못 한다는 나약한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이냐?”
휴고는 데미안이 제 친부를 닮아서 약해빠진 모습을 보일까 봐 걱정이었다. 타란의 가주가 되면 북부 야만족 정벌은 피할 수 없었다. 수많은 목숨을 앗을 각오를 해야 한다.
“아닙니다. 검을 들 때는 항상 상대의 숨통을 끊을 각오로 임하고 있습니다.”
크리스는 사색이 되어 무릎에 올린 두 손을 꼭 쥐고 벌벌 떨었다. 들어서는 안 될 말을 듣고 있는 건 아닐까. 난 이대로 어디 조용한 곳으로 끌려가 죽는 건 아닐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겁에 질린 크리스를 아랑곳하지 않고 타란가의 부자는 일상처럼 살벌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네 어머니가 널 사교계에 소개하겠다고 하더구나. 두말하지 말고 하라는 대로 하고.”
“예.”
“학술원은 학기가 시작하면 가도록 해. 외출 제한 문제는 처리할 테니까.”
“학기가 시작하기 최소 일주일 전에는 돌아가고 싶습니다.”
휴고는 흐음, 중얼거리며 생각했다.
“네 작위를 폐하께 말씀드릴 참이다. 빠르게 수여 절차가 끝나면 가능하겠지. 일단 상황을 봐야 알겠어.”
“작위라 하시면…….”
“사교계에 데뷔한 타란가 후계가 작위도 없이 다닐 수는 없지.”
사색이 되었던 크리스 표정이 이제는 멍해졌다.
‘작위? 후계?’
크리스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데미안을 보았다.
‘뭐야, 이 녀석. 차기 공작이었어?’
데미안의 신분이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귀한 도련님이 세상 경험 중이었던 모양이라고 크리스는 생각했다. 크리스의 입에 사악한 미소가 걸렸다.
‘너흰 이제 다 죽었다.’
정학 사건을 일으킨 두 녀석은 물론이고 데미안에게 괜히 시비 걸던 놈들 낯빛이 시커멓게 죽을 모습을 떠올리며 크리스는 속으로 킬킬 웃었다.
‘후계라 해도 무슨 작위를 벌써 줘? 그게 가능해?’
작위 수여는 대개 스무 살 전후였다. 필리프 후작가의 후계인 크리스의 형은 열아홉 살인데 아직 작위를 받지 못했다. 크리스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거나 말거나 타란가의 부자는 건조한 대화를 이어나갔다.
“오늘 이후로 네가 내 아들이라는 소문은 학술원에 다 퍼지겠지.”
기숙사를 나와서 마차로 가는 길에 졸업식에 참석한 재학생들이 졸업식을 마치고 줄줄이 기숙사로 들어오다가 그들을 목격했다. 개중에는 제논 출신이 있었는지 경악해서 경기를 일으킬 것 같은 표정을 짓는 이들이 몇 있었다. 그들 입을 통해서 소문은 빠르게 퍼질 것이다.
“계속 감출 생각이었느냐?”
“아닙니다. 조만간 밝히려고 했습니다.”
휴고는 오기 전에 아내가 조심스럽게 건넨 말을 떠올렸다.
‘데미안이 출생 때문에 스스로 숨고 싶어 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에요. 애가 불안해하지 않게 다독여 주세요.’
“데미안. 내 자리를 네게 준다고 했다. 난 약속을 번복하지 않아. 네가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예. 아버지.”
데미안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화끈거리는 귀가 옻이라도 오른 것처럼 근질거렸다. 귀가 붉어진 데미안을 흘끔 보면서 크리스는 처음으로 데미안이 원래 나이의 모습 같다고 생각했다.
‘말투가 딱딱하고 뭔가 대화 내용이 특이하긴 하지만, 울 아버지와 내 관계하고 다를 게 없구나.’
크리스는 안심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냥 안심했다. 크리스가 흐뭇한 기분에 젖은 시간은 잠시뿐이었다.
“타란가의 후계가 맞고 다닌다는 소리가 한 번만 더 내 귀에 들려오면 학술원 졸업이고 뭐고 북부 국경에 처박아 실전 훈련을 시켜주겠다.”
“명심하겠습니다.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겁니다.”
크리스의 표정이 다시 사색이 되었다.
‘역시 이 사람들 대화는 어딘가 이상해. 어억. 저거 우리 집이잖아.’
크리스는 창 너머로 오늘따라 무척 그리운 집이 멀어지는 모습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마차는 공작저로 들어가 멈추었다. 크리스는 마차에서 내려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 경관이 어둠에 잠겨 있었지만, 조마조마했던 마음과 다르게 다행히 어디 무서운 곳으로 끌려온 것 같지는 않았다. 아샤를 하인에게 맡기고 데미안은 두리번거리는 크리스에게 다가가서 어깨를 쳤다.
“뭐 해.”
“어? 어. 너희 집이야……?”
“그럼 어디겠어. 아, 혹시 당장 집으로 가봐야 해?”
참 빨리도 물어본다. 크리스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급한 일은 없어.”
“들어와. 그럼.”
휙 몸을 돌려 가는 데미안의 등을 보다가 크리스는 주춤주춤 따라갔다.
루시아는 에반제린을 품에 안고 남편을 맞이했다. 에반제린이 휴고를 보면서 두 손을 뻗으며 반가워했다.
“파파.”
휴고는 에반제린을 받아 안아서 볼에 입을 맞추고 한쪽 팔로 아내의 허리를 감싸며 가볍게 입술에 키스했다.
“온종일 마차 타느라 고생하셨죠? 저녁도 아직 못 드셨겠네요.”
“당신은?”
“당신 오시면 함께 하려고 기다렸어요.”
“늦으면 기다리지 말라고 했잖아.”
“그렇게 늦지도 않았는걸요. 집무실에 먼저 가 보셔야겠어요. 아까부터 당신 보좌관이 와서 기다리고 있어요. 급한 일인가 봐요.”
휴고는 딸을 다시 아내 품에 넘기고 집무실로 향했다. 남편 뒷모습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서 루시아는 데미안을 향해 환하게 웃었다.
“데미안, 어서 오너라. 피곤하지?”
“평안하셨습니까. 어머니.”
“그새 키가 더 컸네. 우리 아들. 한 번 안아보자.”
루시아는 에반제린을 유모에게 안기고 두 팔을 크게 벌려 데미안을 안았다. 이젠 더는 루시아가 품 안으로 안아줄 수 없을 정도로 키도 체격도 컸다. 말랑말랑한 여자아이인 딸만 안고 다니다가 단단한 뼈대의 사내아이를 안으니까 어쩐지 금방이라도 어른이 될 것 같은 아들의 성장이 느껴져서 감개무량했다.
“오바. 오바.”
유모에게 안겨있던 에반제린이 데미안을 보며 팔을 뻗으면서 흥분했다.
“이브가 오라버니를 봐서 신이 났구나. 인사해 주렴.”
데미안은 유모가 넘겨주는 에반제린을 얼결에 받아 안았다. 에반제린은 짧은 두 팔로 데미안의 목을 꼭 붙들어 찰싹 달라붙었다. 작고 부드러운 어린 누이를 손으로 안정적으로 받치고 안았다. 우유 냄새와 섞인 향긋한 아이 냄새가 났다. 가슴 안이 따뜻해지고 정말 집에 왔다는 실감이 났다. 수개월 만에 다시 보는데 누이가 잊지 않고 반겨주어서 감격했다.
“누구와 함께 왔니?”
“학술원 친구입니다. 제가 초대했습니다.”
“어머나, 친구?”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것 같은 무서운 타란 공작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따스하게 녹는 모습을 신기하게 구경하다가 크리스는 공작부인을 향해 깍듯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인사드립니다. 크리스 필리프입니다.”
“우리 구면이지요. 이렇게 데미안의 친구로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가워요.”
루시아는 반색하면서 살갑게 인사를 받았다. 크리스는 무려 1년 전에 인사를 했을 뿐인데 공작부부 둘 다 자신을 기억한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어쩌면 난 한 번 보면 잊지 못하게 인상이 강한지도 몰라.’
크리스는 자신감을 부가한 착각에 빠졌다.
“둘 다 배고프겠다, 데미안. 친구 데리고 방에 올라가 있겠니? 준비 다 되면 부를게. 이브는 내가 데려갈까?”
“아닙니다. 이브는 제가 볼게요.”
“그래 줄래?”
데미안은 에반제린을 안고 크리스를 방으로 데려갔다. 크리스는 방문이 닫히자마자 참은 숨을 토해내는 것처럼 크게 숨을 쉬었다.
“우와. 떨려 죽는 줄 알았네. 야! 너 사람 이렇게 식겁하게 할래? 사전에 말이라도 해주든가!”
“불가항력이었어. 아버지께서 오실 줄은 나도 몰랐으니까.”
“무서운 네 아버지랑 마차를 같이 타고 몇 시간을 가는 불상사는 다시는 없게 하자. 응? 앞으로 불가항력 따위는 없어. 그런 상황이 발생하면 무조건 네가 막아야 해. 알았어?”
크리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애매한 대답을 하는 데미안을 노려보다가 데미안에게 찰싹 매달려있는 에반제린에게 친근한 표정을 지으며 접근했다. 데미안의 목을 감고 있는 앙증맞은 작은 손을 건드리자 에반제린이 손을 쏙 빼면서 고개를 홱 돌렸다.
“공녀님이 사람 차별하네.”
크리스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나도 집에 있는 녀석이 귀여운 누이동생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동생이 있어?”
“악동 녀석 하나 있어. 너처럼 나도 동생과 나이 차이가 좀 돼. 눈만 떼면 사고를 치는 다섯 살이지.”
데미안의 품에서 에반제린이 잠들었다. 데미안의 목에 팔을 꼭 감은 채 축 늘어져 새근새근 자는 아이를 크리스가 유심히 관찰했다.
“여자아이라서 그런지 참 얌전하네. 내 동생은 잠들기 전에 잠투정이 굉장하거든.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레이디 타란. 날 그다지 반가워하지 않는 것 같아 유감이지만.”
크리스는 잠들어 저항하지 못하는 어린 숙녀의 작은 손을 살짝 잡아서 뿌리침당한 앙금이 남아있음을 표현했다.
데미안이 잠든 에반제린을 아이 방 침대에 눕히려고 방을 나가려다가 마침 들어오는 하녀와 마주쳤다. 하녀는 식사 준비가 다 되었다고 말했다.
데미안은 우선 에반제린부터 방에 데려다 눕혔다. 쫄래쫄래 따라온 크리스가 식당으로 내려가자는 데미안의 팔을 붙들었다.
“근데 내려가면 네 아버지랑 같이 밥 먹어야 하는 거냐?”
“그러겠지. 아버지도 아직 저녁을 드시지 않았으니까.”
“…나 체할지도 몰라.”
“소화제 줄게.”
“야!”
크리스는 저녁을 먹고 결국 데미안에게 소화제를 달라고 했다.
* * *
1년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달은 가장 정신없이 바쁘지만, 신년을 열흘 남짓 남긴 시점에 이르러서는 모든 일을 매듭짓고 연중 가장 느긋했다. 신년까지 약 열흘간 일을 쉬고 소식이 뜸했던 친지를 만나거나 가족과 시간을 보내며 한 해를 정리했다. 신분과 지위를 가릴 것 없이 대부분 사람이 따르는 관습이었다.
올해 입궁은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휴고는 종무 회의를 마치고 왕과 마주앉아 여유로운 티타임을 즐겼다.
오늘 저녁부터 제법 긴 연휴의 시작이었다. 지난해 겨울에 집에 왔던 데미안은 외출 기간 제한 때문에 신년을 며칠 앞두고 학술원에 돌아갔다. 올해는 데미안이 사교계 데뷔 겸 신년 파티에 참석할 테니까 네 식구가 모두 모여 맞이하는 최초의 연말이었다. 아내가 들떠있어서 그도 덩달아 특별한 연휴를 맞이하는 기분이 들었다.
“후임자는 찾으셨습니까?”
퀘이즈가 설치한 정책 결정 기구 중부의 초대 장은 휴고가 2년만 맡기로 처음에 약속했다. 2년은 이미 넘고 몇 개월이 지났다. 휴고는 쓸데없이 바쁜 자신의 일정을 간소화하고 싶었다. 그래서 몇 개월 전부터 어서 후임자를 찾으라고 왕을 재촉하고 있었다. 퀘이즈가 대답 없이 차만 마시자 휴고의 눈썹이 올라갔다.
“공이 계속 맡지?”
“약속하셨습니다.”
휴고는 인상을 찌푸리며 내키지 않는다는 감정을 드러냈다.
“그대밖에 없어.”
“그 자리에 앉고 싶어 하는 치들이 넘쳐날 텐데요.”
“넘쳐나지. 그래서 안 돼.”
왕이 전격적으로 밀고 있는 중부는 2년 동안 꾸준히 커왔으며 퀘이즈가 왕으로 있는 동안에는 나라 최고의 핵심 기구로 자리 잡을 것이다. 중부의 수장 자리는 권력의 중추였다.
“까놓고 말해서. 짐은 중부를 귀족들 놀이터로 만들 생각이 절대 없어.”
“저도 귀족입니다.”
“공은 제외.”
2년 동안 타란 공작이 중부의 장을 맡아 일을 처리하는 모습을 보면서 퀘이즈는 정말로 공작이 권력 놀음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했다. 무려 2년간 얼마든지 왕에 버금가는 세력을 키울 수 있는 가장 정치적인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여전히 정계의 귀족들과 소원했다.
공작이 일하는 방식도 흡족했다. 말 잘 들을 자들을 뽑아 요직에 앉히는 짓에는 관심이 없었고 단순히 일 잘하면 뽑았다. 정계에 영향력 있는 귀족가의 사람이라도 일하는 능력이 눈에 안 차면 거리낌 없이 잘라버렸다. 덕분에 중부는 지닌 힘을 고려하면 놀라울 정도로 투명한 구조를 이루며 굵직한 성과를 척척 내놓았다.
퀘이즈가 파악한 공작은 무리를 이끄는 늑대가 아니라 고독한 범이었다. 홀로 누구도 대적할 수 없게 강하지만, 다수를 이끄는 타입이 아니었다. 싫어도 웃고 마음엔 칼을 갈아도 겉으로는 손을 잡는 섬세한 두뇌 싸움보다 호쾌하게 목을 날려버리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다.
퀘이즈는 권력 싸움을 귀찮아하는 타란 공작의 기질을 신뢰하고 공작부인의 행보도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남편과 다르지 않게 사교계를 휘어잡는 일에 관심이 없었다. 닮은 사람끼리라서 부부가 된 것인지는 몰라도 두 부부가 이대로 만족하며 살게 두면 타란 가문이 골칫덩이가 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누가 되든 논란이 있는 자리지. 타란 공이면 대놓고 말을 못 하거든.”
타란 공작을 향한 왕의 굳건한 신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왕이 허구한 날 불러서 독대하고 밥 먹고 중요한 회의마다 다 끌고 들어갔다. 왕의 총애는 양날의 검과 같아서 그만큼 시기하는 자들이 늘기 마련이지만, 누구도 공작을 섣부르게 건드리지 못했다.
사람들은 예측할 수 없는 공작을 두려워했다. 공작은 정치인보다 기사라는 이미지가 더 강했다. 그리고 기사는 수틀리면 일부터 저지르는 족속들이다. 막말로 모조리 다 죽여놓고 영지로 휙 도망가 버리면 그걸 어찌해볼 도리가 없이 죽은 자만 개죽음이었다. 그런 꼴이 되고 싶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