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시아-69화 (70/77)

외전 1장 데미안 (3)

결심이 확고한 퀘이즈의 눈을 보며 휴고는 한숨을 쉬었다.

‘성가시군.’

감투를 써봤자 골치 썩을 일만 늘어나고 좋은 건 하나도 없었다. 잦은 늦은 귀가가 제일 마음에 들지 않았다. 늦게 들어가면 하루가 다르게 예쁘게 크는 딸의 자는 얼굴밖에 보지 못하고, 아내와 같이 밥도 못 먹고, 산책도 못 하고, 밤놀이에도 애로 사항이 많았다.

하지만 왕과 친하게 지내면 확실히 편했다. 데미안이 자리를 잡으려면 왕의 도움이 필요했다.

“무보수는 취미 없습니다.”

“…공.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 줄 아는가? 그 자리를 주겠다고 하면 짐의 발등에 입을 맞출 자들이 줄을 서있어.”

“그럼 줄 선 자에게 주시지요.”

퀘이즈는 끄응, 신음했다.

“뭘 원하나? 공에게 짐이 줄 것이 뭐가 있는지 궁금하군.”

“작위가 필요합니다.”

“작위? 뭐에 쓰려는가?”

“이번 신년 파티에 아들을 사교계에 소개하려고 합니다.”

“허어. 아들이 그렇게 나이가 들었나? 몇 살인데?”

“곧 열세 살이 됩니다.”

“근데 무슨 작위를 벌써. 그런 예는 없어.”

부친상을 당한 어린 후계가 작위를 받기도 하지만, 그건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럼 새로운 선례가 되겠군요.”

“…….”

“제 아들이 후계 자리를 굳건히 하는 데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알겠네. 알겠어. 절차를 진행하지.”

“신년 파티에서 가능합니까?”

“작위가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지는 것인 줄 아는가? 제반 처리 절차가 많아.”

“그럼 수여식만 신년 파티에서 하고 절차는 따로 진행해 주셔도 됩니다. 그리고 주시는 김에 작위 하나 더 주시지요.”

“공의 아들에게 작위를 둘을 주라고? 둘을 가져 뭐 하려고?”

휴고가 왕에게 데미안의 작위 수여를 청할 것이라고 하자 루시아는 우려했다.

‘데미안이 이제 막 친구를 사귀었는데 데미안이 훌쩍 위로 올라가면 친구 사이가 부담스러워질까 봐 걱정이 드네요.’

휴고는 아내의 우려를 데미안의 친구 녀석에게도 작위를 주는 방식으로 해결할 셈이었다.

“필리프 후작의 차남에게 주었으면 합니다.”

“난데없이 필리프 후작은 왜?”

“후작의 차남이 아들 친구입니다.”

“…공의 아들 친구니까. 다시 말해서 뒷배로 힘을 써보겠다는 건가?”

“어차피 후작가 차남 정도면 언제고 작위를 받을 텐데요.”

“이보게, 공.”

퀘이즈는 미간을 꾹 눌렀다. 작위라는 것이 애한테 사탕 쥐여주듯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작위 수여는 왕의 고유 권한이었다. 명예를 좋아하는 귀족들을 입맛대로 구슬릴 수 있는 왕의 무기였다.

특권은 남발하면 가치가 떨어진다. 총 작위의 수는 한계치가 있었다. 대가 끊기는 등 기타 사정으로 작위를 반납하거나 부친의 자리를 물려받은 후계가 갖고 있던 작위를 반납하면 빈자리가 하나 생기는 식이었다. 그래서 매년 왕이 수여할 수 있는 작위 개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우리 속물적인 얘기 좀 해보자고. 작위는 가진 만큼 따라오는 의무도 만만치 않아. 세금은 어쩔 건가? 공의 아들은 그렇다 쳐도 필리프 후작의 어린 차남이 세금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나?”

스물 전후로 작위를 받는 이들은 대부분 가문의 후계였다. 차남 이하는 대개 결혼 후 받거나 부친에게서 땅을 받을 수 있는 대영주의 자제가 아니면 아예 받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작위에 따라붙는 세금이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세금이 면제되는 작위를 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세금 부족분은 다른 명분으로 채워 드리겠습니다.”

퀘이즈는 휴고를 물끄러미 보다가 푹 한숨을 쉬었다.

“공은 참 매사가 간단해서 좋겠어.”

“작위 수의 한계 문제 때문이라면 빈자리 두 개 만들어 오겠습니다.”

“…무슨 수로?”

“알아서 하겠습니다.”

알아서 한다는 말이 무서웠다. 멀쩡히 잘 사는 목숨 둘을 거두고 빈자리 만드는 일쯤은 타란 공작이라면 하고도 남았다. 퀘이즈는 누군지 모를 가련한 두 목숨을 살려주는 왕의 너그러움을 베풀기로 했다.

“짐이 알아서 조치하겠네.”

생각해 보면 손해는 없었다. 필리프 후작은 왕당파 귀족이며 정계의 귀족치고는 고지식한 사람이라서 퀘이즈가 제법 신뢰하는 측근이었다. 후작의 아들에게 세금을 면한 작위를 선물로 주는 동시에 공작의 부탁을 들어주는 셈이니까 양쪽 모두에게 생색낼 수 있었다. 세금 부족분은 타란 공작이 따로 채워준다고 했다. 연휴 동안 일거리는 생겼지만, 감수할 수 있었다.

* * *

까만 연미복을 차려입은 두 남자가 1층 라운지에 나란히 서있는 모습은 매일 보는 고용인들조차 지나치지 못하고 시선을 던지게 했다. 하녀들의 시선은 특히 더 오래 머물렀다. 하녀 몇이 꺾어지는 복도 모서리에 숨어서 부자를 훔쳐보았다.

흑발의 붉은 눈을 지닌 외형적 특징은 찍어낸 듯 닮았으나 한쪽이 더 키와 체격이 크고 어른 남자의 성숙한 분위기가 흘렀다. 작고 어린 쪽은 따로 떼어놓고 보면 나무랄 데 없이 장성한 청년인데 나란히 함께 있으니 어린 소년의 모습이 드러났다.

“우리 마님은 복도 많으시지.”

“그러게 말이야. 도련님을 처음 뵌 날은 이게 무슨 난리인가 했는데 말이야.”

갑작스러운 타란 공작의 장성한 아들 등장에 마님을 안쓰럽게 보던 시선은 잠시였다. 아내와 어머니에게 껌뻑 죽는 두 남자를 보면서 하녀들은 배 아파 낳고 기르는 수고 없이 근사한 효자 아들을 얻은 마님을 부러워했다.

“흠, 흠.”

복도 너머로 고개만 힘껏 빼고 훔쳐보던 하녀들은 헛기침 소리를 내는 집사를 발견하고 기겁했다. 집사가 인상을 찌푸리자 움찔한 하녀들이 종종걸음으로 흩어졌다. 제롬은 하녀들을 보며 쯧, 짧게 혀를 차고 찻쟁반을 든 채 대화 없이 썰렁하게 서있는 부자에게 다가갔다.

2층 계단 위에 서서 루시아는 차를 마시고 있는 남편과 아들을 보며 두 볼이 발그레 물들었다. 바로 곁을 따라온 앙뜨 역시 루시아와 같은 방향을 보면서 양손을 맞잡고 감격을 표현했다. 자신이 만든 연미복을 입고 더욱 완벽해진 신의 피조물을 바라보는 기쁨이었다.

‘아아, 내 걸작품들. 완벽해. 환상적이야.’

신사의 연미복은 까만색과 흰색 두 가지 색의 조화만으로 이루어져서 얼핏 보면 비슷해 보여도 명색이 귀족의 파티 의상이었다. 디자이너들은 두 가지 색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섬세한 디자인에 심혈을 기울였다. 화려한 귀부인의 드레스 이상으로 신사의 연미복은 심오한 분야였다.

루시아는 이번 신년 파티의 모든 의상을 앙뜨에게 의뢰했다. 앙뜨는 타란가의 공자를 처음 보는 날 심장을 움켜잡고 휘청거리는 과장된 모습으로 감동을 표현했다. 새로운 소재를 발견했다며 감격해서 데미안을 위한 연미복을 여러 벌 만들어서 가져왔다.

앙뜨는 모두 디자인이 다르다고 주장하지만, 데미안이 보기에는 똑같은 옷을 수없이 입고 벗는 수고를 해야 했다.

휴고가 입은 연미복은 날카롭게 딱 떨어지는 느낌으로 고급스러우면서 전형적인 디자인이었다. 앙뜨는 타란 공작의 서늘한 인상을 누르기보다 드러내는 편이 매력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쓸데없는 장식이 없는 가장 기본적인 디자인을 택하고 붉은 루비를 박은 부토니에(남성용 브로치)로 포인트를 넣었다.

데미안의 연미복은 소매와 옷깃을 검푸른 색 원단을 덧대고 기본 소재의 검은 원단은 빛을 받으면 푸르스름한 빛이 났다. 정직한 검은 원단만 사용하는 지금까지의 관행과 다른 파격적인 디자인이었다. 나이 지긋한 사람이 입기에는 점잖지 못한 감이 있으나 데미안의 싱그러운 젊은 분위기가 어우러져서 격식에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화려했다.

휴고가 2층 계단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루시아를 발견하고 찻잔을 집사에게 건넨 후 금방 위로 올라갔다. 아내의 손을 잡아 계단을 내려왔다.

데미안은 잠시 멍하게 루시아를 보고 있었다. 루시아가 파티 드레스를 입고 치장한 모습을 처음 보았다. 미세한 비즈를 촘촘하게 박은 은빛 드레스는 햇빛에 반사되는 나비 날개처럼 빛났다. 백옥 같은 어깨에 붉은 기운이 감도는 갈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렸다. 휴고의 손을 잡은 루시아가 계단을 다 내려오고 나서야 데미안은 정신을 차리고 정중하게 루시아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아름다우십니다, 어머니.”

“고마워. 너도 근사하구나. 오늘 주인공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어.”

“오늘 주인공은 어머니이신 것 같습니다. 다들 어머니로부터 눈을 못 뗄 겁니다.”

루시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평소에는 무뚝뚝하고 말수 적은 데미안은 가끔 놀랄 만큼 여자 마음을 흔드는 소리를 곧잘 했다. 역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루시아는 부자를 번갈아 보면서 생각했다. 데미안의 시선이 2층에서 떨어지지 않는 모습을 보며 루시아는 아들을 안심시켰다.

“이브는 자고 있으니까 괜찮아. 내일 아침에나 일어나겠지. 연회장에서는 그 시간을 즐기렴. 이브 걱정하지 말고.”

“예, 어머니.”

루시아는 두 남자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 올랐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오기를 막연히 상상한 적이 있었다. 그게 언제였더라. 루시아는 마치 꿈을 꾸는 듯 기분이 들떴다.

“긴장되지는 않니?”

“괜찮습니다.”

루시아는 데미안의 긴장을 풀어주려고 말을 걸었다. 자꾸 로암에서 있었던 파티 깨기가 떠올랐다. 좋은 날 괜히 불길한 생각을 하는 자신을 나무랐다. 공작 부부가 동반하는 자리에서 소개하는 공작가의 후계를 욕보이려는 무도한 자가 있을 리가 없는데도 루시아는 혹시 데미안이 상처받을 일이 생길까 봐 근심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근심을 읽은 휴고가 인상을 찌푸렸다.

“당신이 더 긴장하고 있잖아. 저 녀석은 어린애 아니니까 사서 걱정하지 마.”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어머니. 저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말투는 달라도 두 남자가 모두 루시아를 오히려 걱정했다. 루시아는 그들을 보며 생긋 웃었다. 아들이 데뷔하는 흥겨운 신년 파티를 마음껏 즐기자고 마음을 편히 먹었다.

외궁의 홀 앞에 도착한 마차가 멈추고 밖에서 문이 열렸다. 데미안은 먼저 밖으로 나가서 뒤따라 나온 아버지가 어머니가 에스코트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슬쩍 시선을 돌리자 여기저기에 이미 세워놓은 마차와 막 들어오는 마차가 즐비했다. 파티장에서 새어 나오는 눈이 부시도록 환한 빛을 바라보는 데미안의 가슴이 조금씩 뛰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혀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정말 아무렇지 않아서가 아니라 실감을 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들어가자.”

“예, 어머니.”

부모님과 나란히 파티장으로 들어서면서 데미안은 숨을 훅 들이마셨다. 이렇게 화려한 의상을 갖추어 입은 기백이 넘는 사람들이 몰려있는 광경을 처음 보았다. 그들의 시선이 동시에 자신을 비롯한 부모님께 몰리는 순간에는 짜릿했다. 사람의 시선에는 이미 익숙하다고 생각했으나 북부에서, 그리고 학술원에서 느꼈던 시선과는 뭔가가 달랐다.

묘했다. 악의도 호의도 아니었다. 분명 데미안의 존재가 놀라울 텐데도 노골적으로 그런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도 없었다. 제 감정을 노련하게 갈무리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몰려있는 공간이 사교계로구나, 데미안은 어렴풋이 깨달았다.

휴고가 시종을 불러서 물었다.

“폐하께서는?”

“아직 입장하시 않으셨습니다.”

휴고는 아내에게 제안했다.

“간단하게 식사 먼저 할까?”

“그게 좋겠어요. 나중에는 그럴 시간이 없을 테니까요.”

루시아는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자 반갑게 아는 척했다.

“어머나, 크리스.”

익히 얼굴을 아는, 그러나 절대 반갑지 않은 두 녀석을 질질 끌며 다가오는 크리스를 보면서 데미안의 눈썹이 스윽 올라갔다.

늦은 오후부터 시작한 외궁 홀에서 열린 신년 파티는 저녁에 이르자 홀이 꽉 차도록 북적거렸다. 어김없이 올해 신년 파티를 맞이해 사교계에 데뷔하는 귀족가 자제들이 부모와 함께 여기저기 인사를 다녔다.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

고작 1년 전 일이면서 크리스는 파릇파릇한 어린 것들을 보고 감상에 빠졌다. 신년 파티는 왕실에서 주최하는 규모 큰 파티 중 하나라서 처음 사교계에 데뷔하는 소년 소녀들은 화려함에 넋이 나갔다. 태연한 척하려고 해도 상기된 볼에 흥분이 가득해서 긴장한 모습이 드러났다.

‘걷는 모습이 완전히 뻣뻣한데. 난 저 정도는 아니었어.’

딱 봐도 갓 데뷔한 후배들을 보며 크리스는 근거 없는 자화자찬을 했다. 그리고 마침 옆으로 시종이 쟁반 가득 칵테일을 들고 지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주변을 스윽 살피고 얼른 칵테일 한 잔을 집어 들었다. 반투명한 분홍색 음료는 매우 먹음직스러웠다.

“한참 찾았다. 대체 어디에 가있었던 거냐?”

“형님…….”

크리스는 칵테일 잔을 든 채 굳었다. 한소리 들을 각오를 했으나 형 라벤은 칵테일 잔을 보며 살짝 미간을 구겼을 뿐, ‘아버지께서 찾으신다.’라고 말하며 몸을 돌렸다. 크리스는 뒤를 따라가면서 얼른 칵테일을 한입에 모두 털어 넣었다. 그리고 훅 끼치는 독한 술기운과 예상과 다른 괴이한 맛에 오만상을 찌푸렸다.

아버지와 형을 따라다니며 인사 다니는 일은 정말 지루했다. 크리스의 표정에 슬슬 지겨움이 드러났다.

‘형님은 장차 후작가를 물려받을 테니까 이해하지만, 왜 나까지 이걸 해야 하는 거야.’

하라는 대로 고개를 숙이면서도 정신은 딴 곳에 가있었다. 틈틈이 입구를 살피며 데미안이 언제 올지 확인했다.

‘어, 저 녀석들.’

낯익은 녀석들을 발견했다. 잿빛 머리와 갈색 머리. 학술원에서 붙어 다니더니 여기서도 여전히 둘이 함께 있었다. 둘만 있는 것은 아니었고 또래 여럿이 남녀 섞여서 함께 무리지어 있었다. 크리스의 입가에 씨익 짓궂은 웃음이 떠올랐다.

“형님. 난 딴 볼일 있어서 가볼게요. 뒷일은 형님이.”

“크리스!”

냉큼 사람들 틈에 섞여서 사라지는 크리스를 보며 라벤은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 전 왕의 부름을 받아 궁에 다녀오신 아버지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신년 파티에서 네 작위 수여가 있을 것이니 그렇게 알고 있어라.’

‘제 작위는 후년에 신청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네 동생 때문이라고 해야 하는지 덕분이라고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퀘이즈가 크리스에게 작위를 주려고 알아보니까 후작가 후계인 손위 장남이 아직 작위를 받지 않았다. 그래서 필리프 후작을 불러서 이러저러한 사정을 설명하고 순서가 맞지 않으니까 둘 다 받으라고 말했다.

‘타란 공의 혼외 아들에 대해서는 경도 들은 말이 있겠지. 타란 공이 그 아들을 꽤 싸고돌아서 말이네. 곧 사교계 데뷔를 한다는데 선물로 작위를 주고 싶은 모양이더군. 타란 공의 아들이 학술원에서 친구를 하나 사귀었는데 경의 차남이라네. 아들 친구가 꽤 탐탁했는지 작위를 달라고 청했다네. 세금을 면하는 작위이니 그런 문제는 신경 쓸 필요 없네. 어쩔 건가? 장남 제치고 차남만 작위 줘도 괜찮은가?’

후작은 둘 다 받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특별한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 사귀는 데도 흥미가 없어서 매일 어린 동생하고만 노는 크리스의 앞날이 걱정된다고 부친은 크리스를 학술원에 보냈다. 그런데 정말 생각도 못한 인맥을 만들고 작위를 얻어왔다.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크리스는 모든 일을 심각한 고민 없이 스리슬쩍 넘어가면서도 항상 결과가 좋았다.

성격이 완전히 다른 라벤과 크리스는 그리 가까운 형제가 아니었다. 라벤은 동생을 싫어하지는 않지만,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평소에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솔직히 가끔은 흘러가는 대로 사는 동생이 부러웠다.

잿빛 머리의 소년, 백작가의 차남 헨리와 갈색 머리의 소년, 후작가의 삼남 스티븐은 다가오는 크리스를 보며 표정을 구겼다. 얼마 전에 치고받고 얼굴 붉힌 사이라서 굳이 인사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스티븐은 크리스에게 유감이 많았다. 건방진 데미안 녀석이 정학 처분을 받은 것은 속 시원하지만, 징계 처분을 내리기 전에 열린 징계회의에서 망신을 당했다.

정작 데미안은 입 다물고 있는데 크리스가 적극적으로 데미안을 변호하면서 과거에 여러 번 스티븐과 헨리가 데미안에게 시비를 걸었던 정황을 낱낱이 진술했다. 스티븐은 데미안이 미주알고주알 크리스에게 자세히 일러바쳤다고 생각했다.

1차 징계를 담당하는 회에는 스티븐의 손위 형이 회원으로 있었다. 형이 손을 써서 스티븐과 헨리는 가벼운 처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스티븐은 형에게 따로 불려가서 매몰찬 비난을 들었다.

‘네게 많은 걸 바라지 않는다. 집안 망신만 시키지 말라고 했는데 그게 그리 어려우냐? 어린애도 아니고 무슨 질 낮은 짓이야? 내가 얼굴이 뜨거워서 혼났다.’

스티븐이 데미안을 괴롭힌 일을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시정잡배처럼 껄렁한 시비를 거는 수단을 쓴 점을 몹시 못마땅해했다. 스티븐은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형이 매번 한심한 녀석 취급하며 가르치려고 구는 꼴에 신물이 나있었다. 형의 도움을 받은 신세라서 대꾸하지 못하고 홧홧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

“…오랜만이오, 필리프 경.”

스티븐은 떫은 낯으로 인사를 받았다. 인사하기는 싫지만, 먼저 인사를 해 오는 상대를 무시하는 짓은 어른스럽지 못한 품위 없는 행위라서 어쩔 수 없이 예의를 차린다는 기색을 드러냈다.

크리스는 속으로 픽 웃었다. 크리스가 또래 귀족 아이들과 좀처럼 어울리지 못하는 이유는 어른 흉내를 내는 가식이 싫어서였다. 사교계에 데뷔하면 짐짓 어른이 된 것처럼 서로에게 경어를 쓰고 절대 이름을 부르지 않으며, 반드시 가문의 이름 뒤에 경이라는 존칭을 붙였다.

기사 혹은 작위를 지닌 귀족만 공식적인 자리에서 경이라는 호칭을 사용할 수 있지만, 귀족은 서로를 칭할 때 가문의 이름에 경을 붙여 부르는 관행이 굳어져 있었다.

그러나 성년도 안 된 어린애들을 경으로 칭하는 것은 과했다. 아무리 사교계에 데뷔했어도 성년을 넘지 않으면 어른들은 아이들을 ‘군’이라고 칭했다. 그러니 아이들끼리도 서로 부를 때 필리프 경이 아니라 필리프 군이 이치에 맞았다.

크리스는 모여있는 좌중을 쭉 살폈다. 얼굴을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아마 모두 백작 이상 가문의 자제들일 것이다. 크리스는 이것도 싫었다. 애들이 벌써 자기들끼리 수준을 맞춰서 놀았다.

크리스는 어린 나이의 특권은 신분 따지지 않고 다양한 사람을 사귈 수 있는 자유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백작이라고 자식이 모두 백작은 아니었다. 후계가 아니면 작위도 못 받을 가능성이 크고, 백작가 영애가 백작부인이 되리라는 법은 없었다.

크리스가 열 살 무렵에 어머니가 동생을 임신하면서 심한 임신우울증을 앓았다. 집안 분위기는 어둡고 바쁜 후작은 어린 아들을 제대로 챙길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크리스를 1년간 외가에 맡겼다.

크리스의 외조부는 백작이지만, 부유한 상단을 거느리는 상인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크리스는 외조부를 따라서 수많은 나라의 국경을 넘나드는 긴 여행을 했다.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세상이 넓다는 사실을 배웠다. 크리스의 가치관을 형성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필리프 경이라 하시면……. 필리프 후작가의 영랑이신가요?”

어린 숙녀들이 크리스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후작가의 아들이면 후계가 아니라도 최소한 백작위는 받을 테니까 미래의 백작부인 자리를 노린다면 크리스를 공략하는 방법은 정도에 속했다. 크리스는 속이 들여다보이는 레이디에게 배운 대로 정중히 인사했다.

“그렇습니다, 레이디…….”

“윈저예요. 오드리 윈저. 윈저 백작께서 부친이 되십니다.”

“레이디 윈저. 학술원 동기를 이런 자리에서 만나 반가워서 말입니다. 동기들과 긴히 나눌 이야기가 있어서 인사는 나중으로 미루는 무례를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어머. 경도 학술원을 다니시는군요. 안 그래도 학술원 이야기를 듣던 중이었답니다. 신사분들의 깊이 있는 대화를 위해 기꺼이 자리를 비켜 드리지요.”

여왕벌까지는 아니고 한 무리의 조장벌쯤은 될 것 같은 레이디 윈저가 몸을 돌리자 다른 어린 숙녀들도 우르르 따라갔다. 크리스는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남자나 여자나 애나 어른이나.’

왜 저렇게 사람들이 떼로 몰려다니는지 모르겠다. 정말 친한 사이라서 모이는 것이 아니라 마치 관성 같았다. 사람이 많이 모이면 나서는 자가 있고 소외되는 자가 있기 마련이었다. 크리스는 후작가 자제라는 이유만으로도 말 한마디 하지 않아도 소외되는 법이 없었다. 그런 얄팍함이 싫어서 또래 모임에 점점 나가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학술원에서 항상 혼자 다니는 데미안에게 자꾸 관심이 갔는지도 모르겠다.

“무슨 짓인가?”

스티븐은 멋대로 아가씨들을 다 내쫓아버린 크리스의 무례함에 불쾌감을 표했다. 불과 한 달 전에 학술원 교정에서 뒤얽혀 개싸움을 벌인 주제에 점잖은 척하는 스티븐이 가소로워서 크리스는 한쪽 입 끝만 올리며 웃었다.

“학술원 이야기? 바닥을 뒹굴며 주먹질한 얘기는 해줬어? 아주 재미있어 했을 텐데.”

이죽거리는 크리스의 말투는 누가 들어도 시비 거는 모양이었다. 후작가 자제 둘의 기세 싸움에 괜히 말려들고 싶지 않은 이들이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제법 모여있던 무리가 흩어지고 마주 보고 선 크리스와 스티븐, 그리고 스티븐 뒤쪽의 헨리만 남았다.

스티븐의 꽉 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대체 왜 이래?”

스티븐은 후작가 아들인 크리스와 굳이 악연을 맺고 싶지 않았다. 스티븐은 크리스를 몇 안 되는 같은 등급의 동류라고 생각했다. 학술원에서 근본 없는 녀석을 감싸는 짓을 이해할 수 없었다.

“너 되게 비겁하다는 자각은 하고 있냐? 하긴, 알면 그런 짓은 못 하겠지. 먼저 싸움을 걸어놓고 피해자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다니. 벌써 그런 비열한 짓하면 그렇게 흉내 내고 싶은 고상한 말투에 어울리는 좋은 어른 못 된다.”

크리스는 헨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너도 마찬가지야. 우리 앞으로는 품위 있게 놀자. 응?”

헨리가 발끈하고 나섰다.

“누가 피해자라는 거야? 천한 녀석이 주제도 모르고 주먹질을 했어. 데리고 다니는 짐승까지 날뛰게 했지. 너야말로 같잖은 동정심으로 질서를 어지럽히지 마.”

크리스는 하, 하, 하, 짧게 끊어 과장된 웃음을 토했다. 그리고 손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짐짓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정말 쓸데없는 동정심이 많아서 탈이야. 가련한 녀석들을 구제해 보려고 발 벗고 나서는 나의 넓은 이 마음을 너희가 알겠냐?”

미친놈 바라보듯 하는 두 녀석을 향해 크리스는 모사꾼처럼 음침하게 웃었다.

“너희. 누굴 건드렸는 줄 알아?”

그때 갑자기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좌중의 시선이 모이고 후작가 자제들의 다툼을 흥미진진하게 보던 아이들도 호기심을 보이며 몰려나갔다. 크리스는 왜 사람들이 저러는지 알 것 같았다. 두 녀석의 어깨에 팔을 올려 빠져나가지 못하게 목을 감았다.

“왜 이래!”

“이거 놔!”

“어허, 따라와. 좋은 구경 시켜줄 테니까.”

두 소년이 뿌리치지 못할 정도로 크리스 힘이 강한 것은 아니었다. 힘주어 벗어났다가는 몸싸움처럼 비쳐서 주변의 시선을 모을까 봐 두 소년은 크리스의 손에 잡혀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체면을 중시하는 녀석들을 크리스는 손쉽게 끌고 갈 수 있었다. 크리스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밀어내며 둘을 데리고 앞으로 나갔다.

역시 크리스 예상대로 화제의 인물들이 등장했다. 타란 공작 부부와 데미안이었다. 크리스는 데미안이 사교계에 등장하면 파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확신했다. 타란 공작 부부가 누군가를 동반하기만 해도 화제일 텐데 타란 공작을 닮은 소년의 등장은 충격 그 자체일 터였다.

‘이 두 녀석의 충격만큼은 아니겠지만.’

크리스는 양팔을 어깨에 얹고 양쪽의 두 녀석을 번갈아 보았다. 둘 다 넋이 나가서 하얗게 질렸다. 뱀을 마주친 개구리처럼 굳어서 뻣뻣했다. 공포와 경악에 빠진 스티븐과 헨리를 보면서 크리스는 조금 더 녀석들과 놀아보기로 했다. 둘의 목을 잡고 질질 끌다시피 타란 공작 일가에게 다가갔다.

“어머나, 크리스.”

공작부인은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반가워했다. 눈을 마주친 데미안이 눈짓으로 뭐 하냐고 물었다. 크리스는 대답처럼 짓궂게 웃었다. 그리고 다시 공작부인을 보며 예의 바른 표정을 지었다.

“크리스. 며칠 보지 못해서 서운했단다. 내일부터 다시 놀러 올 거지?”

크리스는 강제 초대를 받은 다음 날부터 공작가에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동생 쥬드까지 데리고 아침부터 저녁 식사 전까지 공작가에서 끼니와 간식을 얻어먹고 낮잠도 자고 책도 읽고, 그야말로 제집처럼 놀았다. 저녁까지 먹고 가라는 공작부인의 제안만은 사양했다. 타란 공작과 함께하는 식사는 피하고 싶었다.

새해를 맞이하기 며칠 전부터는 이 기간에 남의 집을 방문하지 않는 예법에 어긋나지 않도록 발길을 끊었다.

루시아는 붙임성 좋은 크리스가 마음에 들었다. 데미안의 딱딱한 성격과 조화를 이루는 좋은 친구가 될 것 같았다. 어려워하지 않고 서글서글하게 공작가를 드나드는 뻔뻔스러움도 좋았다.

“예, 초대해 주시면 기꺼이 찾아뵙겠습니다.”

며칠 공작가에 가지 않았더니 동생 쥬드가 공주님을 보러 언제 또 가느냐고 칭얼거렸다. 쥬드는 타란가의 어린 공녀를 공주님이라고 불렀다. 왜 그렇게 부르냐는 물음에 조그마한 녀석이 몸을 꼬면서 대답했다.

‘…예뻐.’

기가 찼다. 어린 녀석이 보는 눈은 있어서.

“초대는 무슨. 언제든지 환영이란다. 근데 두 신사는 누구?”

크리스가 두 녀석 어깨에 얹은 손에 힘을 주어 눌렀다. 휘청거리지 않으려고 애쓰는 기색을 느끼면서 크리스는 내심 킥킥 웃었다.

“학술원 동기입니다.”

스티븐과 헨리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며 공작 부부에게 인사를 올렸다. 지나치게 굳어있는 표정을 루시아는 긴장해서 그런다고 받아들였다.

“데미안, 친구들이니?”

데미안의 무심한 시선이 둘을 스쳐 지나가자 두 소년의 질린 표정이 거무죽죽하게 어두워졌다. 데미안은 히죽거리는 크리스를 보며 슬쩍 웃었다. 정학 사건으로 계속 이를 갈더니 두 녀석을 골려주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나 보다. 적당히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다.

“친구…….”

데미안은 말끝을 길게 늘여서 창백해지는 두 녀석의 안색을 관찰했다.

“…는 아닙니다. 어머니.”

어머니. 확인 사살이었다. 주제를 모르는 건방진 녀석이 사실은 공작 아들이었다. 크리스가 타란 공작부인과 친밀한 대화를 나누며 허물없이 공작가에 드나들고 있다고 드러낼 때부터 예감이 안 좋았다. 스티븐과 헨리는 정말 딱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데미안은 굳이 과거의 일로 책잡아서 두 녀석을 괴롭힐 생각은 없었다. 앞으로 계속 까불면 밟아 주겠지만 그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고. 그런 내심을 알 리 없는 두 소년에게는 선전포고처럼 들렸다.

“앞으로도 될 것 같지 않습니다.”

데미안의 대답으로 그리 좋은 사이는 아니구나, 대충 눈치챘다. 루시아는 관심을 거뒀다.

“크리스, 부모님은 어디 계시니? 이미 아는 분들이지만, 데미안이 정식으로 인사를 드려야지.”

크리스가 두 소년을 놔주고 공작 일가에 합류했다. 그들이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스티븐과 헨리는 다리가 후들거려서 주저앉았다. 무릎이 바닥에 닿고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었다. 타란 공작 일가에 사람들의 시선이 쏠려서 두 소년의 볼썽사나운 모습에 대부분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타란 공작 부부와 필리프 후작 부부는 인사를 나누다가 따로 마련된 방으로 들어가서 간단한 식사를 함께했다. 후작 부인은 아들이 타란 공작가와 연을 맺은 사실에 몹시 감격해서 식사 내내 흥분해 있었다. 크리스는 어머니의 과도한 호들갑이 낯부끄러워서 홀로 구시렁거렸다.

식사를 마치고 데미안은 부모님께 다가오는 귀족들에게 끊임없이 인사했다. 그 얼굴이 다 그 얼굴로 보일 즈음에 왕이 입장했다. 데미안은 겨우 한숨 틀 수 있었다. 시종이 파티 객들을 향해 목청을 높였다.

“국왕 폐하 납시오.”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들던 목소리를 낮추고 왕이 들어오는 길을 만들며 비켜섰다. 퀘이즈는 머리에 관을 쓰고 흰 예복 차림에 황금빛 망토를 걸치고 왕의 위엄을 드러냈다. 공식적이고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볼 수 있는 왕의 모습이었다. 사전에 아무것도 들은 바가 없는 좌중이 술렁거렸다.

“영광된 새해 첫날을 맞이하여 제논의 앞날에 무궁한 홍복을 기원하노라.”

왕은 경청하는 귀족들에게 짧은 연설을 했다.

“오늘 자리를 빌려서 나라의 훌륭한 동량들을 그대들에게 선보이는 기회를 기쁘게 생각한다.”

왕의 말이 끝나자 시종이 들고 있던 붉은 융으로 감싼 족자를 쭉 내리 펴면서 낭랑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타란의 아들 데미안. 필리프의 아들 라벤. 필리프의 아들 크리스. 앞으로 나와 폐하께서 하사하는 영광을 받으라.”

데미안의 이름을 부를 때에는 고개를 끄덕이던 크리스는 형의 이름이 불리자 조금 놀랐다가 제 이름까지 불리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앞으로 나가는 데미안과 형을 멍하게 바라보다가 등을 내리치는 손길에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가 인상을 쓰면서 ‘어서 나가지 않고 뭘 하는 것이냐.’ 하고 나무랐다.

“예? 아… 아버지. 도대체…….”

“어서 나가!”

주춤주춤 나가는 크리스의 뒷모습을 보며 후작은 혀를 찼다.

‘저 녀석. 몰랐던 건가?’

후작은 큰아들이 동생에게 말한 줄 알았다. 라벤은 아버지가 동생에게 말해 줬다고 생각했다. 즉, 크리스는 오늘 자신이 작위를 받는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어깨에 붉은 망토를 걸치고 옷깃에는 백작 작위를 상징하는 은색 표장을 매단 상태로 크리스는 넋이 나갔다. 무슨 정신으로 수여식이 끝났는지도 모르겠다.

귀족이라면 누구나 작위나 훈장을 수여받을 때 의식 절차를 필수 교양으로 익혔다. 뿌리박힌 기억 덕분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할 수 있었지만, 크리스는 자신이 뭘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사나운 표정을 짓지 않는 모습을 봐서 실수가 없었다고 짐작할 뿐이었다.

“…진짜 필리프 경이 된 건가…….”

필리프 군이 아니라 경으로 불릴 공식적인 자격을 얻었다.

‘백작이 웬 말이야.’

형과 나란히 백작위를 받았다. 이런 예는 본 적이 없었다.

“크리스.”

데미안은 얼이 나간 친구의 어깨를 두드렸다.

“제대로 듣기는 한 거야? 내일 저녁에 우리 부모님과 너희 부모님이 저녁 식사를 함께하시기로 약속을 잡았어. 장소는 너희 집.”

“…뭐?”

크리스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부모님들끼리 식사하신다고? 부모님들끼리만이겠지?”

아까 잠시의 식사만으로도 불편해서 견딜 수 없었는데 초대라니! 어머니가 내일 새벽부터 집안을 발칵 뒤집으며 대청소할 모습이 눈에 선했다.

“당연히 너와 나도 참석이지.”

“…아. 또 체하겠네.”

“집에 소화제가 없으면 내가 챙겨 갈게.”

크리스는 음울하게 중얼거렸다.

“…정말 눈물 나게 고맙다.”

딴 건 몰라도 친구의 튼튼한 위장 하나만큼은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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