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장 Happily ever after (1)
왕이 사전에 기별도 없이 왕비궁을 찾았다. 베스는 초대한 귀부인과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다. 귀부인은 갑작스러운 방해자를 탓하지 못하고 도중에 일어나야 했다.
베스는 뜬금없는 왕의 난입이 의아했다. 그녀가 귀부인들을 만나는 시간이 나름대로 중요한 왕비의 일정이라는 사실을 왕이 모를 리가 없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폐하.”
“짐이 바람맞았소.”
퀘이즈는 골이 잔뜩 난 표정으로 소파에 털썩 앉았다.
“예?”
“세상천지에 짐을 바람맞힐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지. 셀리나가 어제 분명히 오늘 점심을 함께하자고 약조했단 말이오.”
퀘이즈는 천하의 보물 전부와도 맞바꾸지 않을 사랑스러운 딸과의 점심 약속을 아주 기대하고 있었다. 약속 시간에 늦는 것도 어린 숙녀가 준비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구나, 흐뭇하게만 생각했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다. 걱정이 되어서 보낸 시종이 허무한 답을 가지고 돌아왔다. 셀리나는 이미 오전에 출궁해서 없었다.
퀘이즈는 딸의 배신에 크나큰 상처를 입었다. 아바마마, 부르며 폭 안길 때가 엊그제인데 벌써 부모 품보다 흥미로운 관심사가 생겼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제논에는 어린 딸에 대한 못 말리는 사랑을 자랑하는 두 남자가 있었다. 한 남자는 베스의 남편이자 이 나라 군주이며, 또 한 남자는 버금가는 권세를 지닌 타란 공작이었다.
베스는 나라 최고 권력자들이 벌인 터무니없는 사건을 떠올렸다. 인형의 집 사건이라고 불렸다.
퀘이즈가 딸을 위해 귀엽게 침실 내부를 꾸민 인형의 집을 주문 제작했다. 셀리나는 그것을 공작저에 가져가서 친구에게 자랑했다. 에반제린은 몹시 부러워하다가 그날 늦게 귀가하는 아버지를 기다렸다.
휴고는 눈에 졸음이 가득해서 자신을 마중 나온 딸을 보며 감격했다.
‘아버지. 저도 인형의 집이 갖고 싶어요.’
에반제린이 자신의 품에 고개를 비비며 칭얼거리자 휴고는 당장 딸의 눈앞에 인형의 집을 내놓지 못해서 몹시 유감스러웠다. 그리고 다음 날 즉시 제작자를 물색해서 인형의 집 제작에 들어갔다.
내 딸은 세상 최고의 것을 가져야 한다!
침실에 응접실이 딸린 더 규모가 크고 화려한 인형의 집이 에반제린의 것이 되었다. 공작저를 방문한 셀리나는 친구의 더 좋은 인형의 집을 보고 충격받아서 퀘이즈에게 매달렸다.
‘아바마마. 이브는 더 멋진 인형의 집을 갖고 있어요.’
누가 더 근사하고 화려하며 값비싼 인형의 집을 만드는가.
베스와 루시아는 경쟁이 붙은 두 남자가 하는 철없는 짓을 어이없는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장난감의 수준을 넘어서서 예술품이 만들어졌다. 대리석을 깎아 작은 욕조를 만들고, 시계 장인을 불러 인형의 집 안에 거는 초소형 시계를 만들었다. 유명 화가에게 인형의 집 벽에 걸어놓을 그림을 의뢰했으며 장치 공인에게 작은 욕조에 물을 받을 수 있는 설비를 맡겼다.
무려 반년이 걸려서 인형의 집이 완성되자 두 남자는 합의하에 객관적인 전문 심사단을 꾸려서 심사를 맡겼다. 첫 심사에서는 동일한 표를 얻고 두 번째 심사를 위해 날을 잡았다. 지켜만 보던 그들의 아내들이 나섰다. 이겨도 득될 것은 없고 진 사람의 기분만 상하는 다툼이었다.
‘나잇값 못 하는 바깥분 때문에 서로 고생이군요. 공작부인.’
‘그러게 말입니다.’
두 여자는 서로의 처지를 위로하며 인형의 집을 외궁 홀 전시장에 기증하기로 합의해서 싸움을 강제 종결했다. 정작 아버지들끼리 인형의 집으로 싸우는 동안 그들의 두 딸은 이미 흥미를 잃고 다른 놀이에 빠져있었다.
제법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던 기상천외한 경쟁은 승리자가 없이 흐지부지 끝났다. 무려 3층의 대저택 모양으로 만든 거대한 인형의 집 두 채는 외국 사신들이 한 번쯤 구경하고 가는 명물이 되었다.
인형의 집 사건 이후에 ‘역시 딸자식이 귀엽지.’ 하면서 늦둥이 딸을 보는 유행이 번졌다.
“굳은 약속도 금방 잊는 어린 나이지요.”
“또 공작저에 갔다지?”
“셀리나가 갈 곳이라면 공작저밖에 더 있겠습니까.”
“공주가 어려서부터 자꾸 출궁하는 버릇을 들여서는 곤란하오. 왕비는 왜 내버려두는 거요?”
“공작저인데 어떻습니까.”
“그래도 따지고 들면 공녀가 입궁해야지. 어찌 공녀를 만나러 공주가 출궁한단 말이오.”
베스는 피식 웃었다. 남편은 그런 격식을 엄하게 따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괜한 트집을 잡고 있었다.
“아이들입니다. 그런 어른의 자존심을 끌고 들어갈 일이 아니지요.”
“안전 문제도 있고.”
“솔직히 말씀드려서 궁보다는 공작저가 더 안전할 겁니다.”
그 점에는 퀘이즈도 할 말이 없었다. 공작저 주변의 경비는 난공불락의 요새를 방불케 했다.
퀘이즈는 공작저의 삼엄한 경비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작년 여름에 슬쩍 공작에게 내기를 걸었다.
‘공. 공작저 경비를 짐이 뚫어보겠네. 짐의 도전을 받아 보겠는가?’
‘도전은 피하지 않습니다.’
퀘이즈는 부관과도 이중 내기를 했다. 당연히 성공에 걸었고, 부관은 남은 선택지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내기의 방식은 공작저에 투입한 자가 저택 정원의 특정한 표식을 가져올 경우에는 퀘이즈의 승리, 침투가 실패하면 휴고의 승리였다. 결과는 처참했다. 퀘이즈는 완패했다. 정원의 표식은커녕 세 번의 시도에서 두 번은 담을 넘지도 못하고 발각되었다.
퀘이즈는 내기에 진 대가로 작위 하나를 달라는 공작의 요구를 들어줘야 했고, 부관이 선정한 단어를 또 하나 쓸 수 없게 되었다. 부관과의 내기는 연전연패를 달성 중이었다.
부관은 퀘이즈가 왕이 된 후로는 점잖아졌다는 평이 늘자 내심 뿌듯해하고 있었다.
확실히 공작저는 안전했고, 셀리나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더 트집 잡을 것이 없어서 퀘이즈는 뚱하게 입을 다물었다.
“요즘은 에단도 함께 공작저로 나들이 중입니다.”
“에단?”
뜻밖의 셋째 아들 소식이었다.
“에단이 공작저를 간단 말이오? 왜?”
“필리프 후작의 삼남이 공작저를 자주 드나든다고 합니다. 에단과 비슷한 나이라고 하더군요. 또래 친구를 사귀는 일이 무척 흥겨운 모양입니다.”
“으음, 벌써 아이들이 부모보다 친구를 찾을 나이가 된 것인가.”
품 안의 자식이라지만, 퀘이즈는 아직 셀리나를 품에서 놓을 자신이 없었다. 베스는 힘 빠진 얼굴로 중얼거리는 남편에게 더 충격적인 말을 슬쩍 건넸다.
“셀리나가 공작저를 자꾸 가는 것은 공녀와 노는 재미에 빠져서만은 아닙니다.”
“무슨 소리요?”
“셀리나가 말입니다.”
베스는 말을 하다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
“타란 경에게 푹 빠졌답니다.”
잠시 왕비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퀘이즈의 눈이 점점 커지고 충격받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타란 경? 타란 공의 아들 타란 백작 말이오?”
왕비가 고개를 끄덕이자 퀘이즈는 탁자를 내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그게 무슨! 타란 백작이 지금 몇 살인지 아시오?”
“셀리나가 열일곱 살이면 타란 경이 스물일곱 살입니다. 어울릴 수 없는 나이 차이는 아니지요.”
“…….”
퀘이즈는 다시 주저앉았다. 여덟 살과 열여덟 살의 차이는 엄청난 격차처럼 느껴지지만, 9년을 덧붙이자 상식적으로 수용 가능한 차이로 변했다.
“…아무리 그래도 여덟 살이 뭘 안다고.”
“폐하 말씀대로 셀리나가 뭘 알겠습니까. 예쁜 인형을 보면 빠지는 것처럼 그런 호기심과 동경이겠지요. 하지만 폐하. 여자아이는 금방 자란답니다. 5년만 지나도 동경은 연정으로 바뀔 겁니다.”
아직 품 안에서 놓지도 못하는데. 퀘이즈는 딸을 시집보낼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평생 끼고 살 수는 없다. 알지만, 딸의 결혼이라는 현실이 그리 멀지 않다고 생각하자 퀘이즈는 몸의 기운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왕비는 타란 경이 아주 마음에 드나 보오.”
“들다마다요. 타란 공이 후계로 확실히 결정하신 것 같고. 성품이며 외모며 능력이며, 나무랄 데가 있어야지요. 폐하께서도 타란 경을 종종 칭찬하시지 않았습니까?”
“그야…….”
최연소 백작이라는 이름은 아버지 뒷배로 받았으니까 그렇다 쳐도, 학술원의 최연소 시타는 배경만으로 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타란 공은 참 복도 많다니까.’
대개 아비가 뛰어나면 자식이 부친의 능력에 미치지 못하는 예가 많았다. 그런데 타란 공의 아들은 아버지의 능력은 이어받고 성격적인 결함은 닮지 않아서 더 완벽했다.
‘태자보다 겨우 한 살이 많을 뿐인데.’
타란 백작과 비교하면 태자는 한참 어리고 철이 없었다.
“셀리나를 공작부인 자리에 앉히고 싶은 거요?”
“그런 마음이 없다고는 못 합니다. 타란 공이 공작부인에게 변치 않는 애정을 보이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기울었습니다. 그걸 보고 자란 타란 경도 아내를 그리 사랑해 주지 않을까요? 딸이 남편에게 사랑받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어미 마음입니다.”
“…….”
“타란 공에게 사돈 맺자고 하신 말씀은 그저 농이셨습니까?”
“공작부인이 회임했을 때 사내아이를 낳으면 셀리나와 맺어주고 싶은 마음이 솔직히 있었소.”
“여자아이를 낳으면 아들과 맺어주려는 생각은 왜 하지 않으셨는데요?”
“왕비. 타란 공의 딸을 데려오려면 대체 얼마나 많은 지참금을 주어야 할지 상상이나 할 수 있소? 짐은 감당 못 하오.”
아들 문제에는 현실적으로 변하는 남편에게 베스는 눈을 흘겼다.
“슬쩍 공작부인에게 지나가듯 말해 보았는데 물러서더군요. 타란 공이 사촌 사이 결합을 내키지 않아 한다고 말입니다.”
“사촌?”
퀘이즈는 그 단어의 의미를 한참 생각했다. 따지고 들면 공작부인이 이복누이니까 자식들은 사촌 관계였다. 그런데 퀘이즈는 한 번도 그런 범주에 넣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퀘이즈가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왕족들은 동복형제가 아니면 자손끼리 친척이라는 개념이 희박했다.
제논에는 육촌 이내 혈족의 혼인을 금하는 법이 있었다. 그러나 왕족에게는 거의 사문화된 법이었다. 왕은 정치적 이유든 여색을 탐해서든 열 이상의 후궁을 두고 그보다 많은 자식을 두었다. 퀘이즈가 후궁을 몇 두지 않고 자식도 낳지 않은 것은 드문 예에 속했다.
정치적인 이유로 후궁으로 들이는 여자들은 명문가의 여식들이었다. 이들을 모두 친척으로 묶어버리면 자손들이 장차 자라나서 결혼 상대를 구할 수가 없다. 특히 죽은 선왕은 정도가 과해서 어지간한 귀족가문끼리 친척이었다.
수준에 맞는 정략혼 상대는 한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왕족 자손의 사촌 간 통혼은 공공연히 이루어졌다.
더구나 타란 백작은 공작부인의 친자도 아니었다. 물론 혼적에 입적하면 법에 따라서 친자나 다름없이 모자 관계를 인정한다지만, 핏줄 섞인 사촌 간 통혼도 하는 마당에 법으로만 인정하는 사촌 결혼이 껄끄럽다니. 이건 거절을 돌려 말하는 뜻이라고 퀘이즈는 생각했다.
“폐하께서도 아예 생각이 없으셨던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셀리나와 타란 경의 약혼을 고려해 보시지요.”
퀘이즈는 생각에 잠겼다.
타란 공작가와 사돈. 나쁘지 않았다. 그러면 왕실은 나라 최고 세력의 두 공작가와 모두 사돈 관계였다. 공고한 관계를 구축하는 데에는 혈연만큼 확실한 수단은 없었다.
* * *
석 달에 한 번. 왕이 주관하며 국가의 주요 행정기구의 핵심 인사들이 모두 참석하는 연석회의가 열린다. 가장 많은 인원이 참석하는 중요한 국정 회의였다.
이른 오전부터 시작하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 참석자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그리고 회의장으로 들어가다가 누구나 한 번쯤은 조금 떨어진 곳에 서있는 훤칠한 두 명의 청년을 돌아보았다.
스물 남짓한 나이의 어린 청년들이었다. 둘은 각자 들고 있는 서류를 읽으며 간간이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새카만 머리카락의 청년과 은색이 감도는 금발 청년 둘이 나란히 서있는 것만으로도 선명한 색상의 대조가 확 튀었다.
붉은 눈동자가 빠르게 오늘 회의 자료를 훑으며 푸른 눈의 청년에게 말했다.
“며칠 전에 받은 내용과 달라. 왜 오늘 안건이 이렇게 많이 바뀌었지?”
“그렇군. 어제 다시 확인했어야 하는 건데.”
회의장으로 들어가려던 서른 중반의 사내가 청년들을 발견하자 몸을 돌려 그들에게 다가갔다. 데미안과 브루노는 대화를 멈추고 다가오는 사내를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로빈은 근래 사교계 아가씨들을 완전히 뒤흔들고 있는 미청년들을 보며 감탄했다. 둘이 참석하는 파티가 아가씨들로 미어터진다는 말이 과장은 아닌 것 같았다.
“오늘도 참관인가?”
“예, 각하.”
2년 전 라미스 공작이 타계하고 후계였던 라미스 백작이 뒤를 이었다. 새로운 라미스 공작이 된 로빈은 부친과 다른 행보를 보였다. 부친보다 날카로운 정치적 식견은 부족하지만, 온화한 성품으로 무난하게 정계에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다는 평을 받았다.
“왜 들어가지 않고 여기서 이러고 있나?”
“모든 분이 빈자리를 채우면 들어가겠습니다. 참관하면서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듯합니다.”
둘 중 키와 체격이 큰 흑발 청년의 대답을 들으며 로빈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열여덟 살의 어린 청년은 왕에 버금가는 권세를 지닌 타란 공작의 후계이자 최연소 백작이었다는 명예를 지니고 있음에도 지닌 힘을 과시하지 않았다. 로빈은 청년의 진중함이 참 마음에 들었다.
‘타란 공작을 똑 닮아서 아주 딴판이란 말이야.’
세상에 거칠 것 없이 오만한 타란 공작의 강한 기세를 껄끄러워하는 사람들도 예의 바른 차기 공작에게 호의적이었다.
곁에 늘 함께 있는 백금발의 청년도 탐나는 인재였다. 어려서부터 비상한 두뇌를 지녔다고 입소문이 돌더니 나이가 들면서 현명함도 갖추었다고 사람들이 말했다. 타란 공작이 일찌감치 점찍어 왕께 청해서 백작 작위까지 수여했다. 브루노는 백작의 삼남으로 태어나서 현재 메튼 백작인 형과 나란히 백작이었다.
로빈은 타란 공작의 인재를 알아보는 눈과 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과감한 보상에 감탄했다.
“무슨 재미난 이야기를 나누십니까.”
데캉 후작이 슬쩍 끼어들어서 모여있던 세 사람과 인사를 나누었다. 후작은 라미스 공작 못지않은 흐뭇한 시선으로 두 청년을 바라보았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어른에게 예의를 갖추는 젊은이를 보면 아주 기꺼웠다. 차기 공작이 자신을 낮추는데 다른 이들이 나댈 수가 없었다. 젊은이들이 혈기를 누르고 태도를 조심하는 모습이 부쩍 눈에 띄었다. 모두 타란 백작의 솔선수범 덕분이었다.
“메튼 경이 얼마 전에 큰 사건을 일으켰다지.”
브루노가 곤란한 낯빛으로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일주일이나 지난 일인데 마주치는 사람마다 같은 얘기를 꺼냈다.
“큰 사건이라니요?”
“라미스 공께서는 소식이 늦으십니다. 여기 메튼 경이 백작 영애의 머리 위에 칵테일을 쏟았답니다.”
“저런, 큰 실수를 했군요.”
“실수가 아니니까 사교계가 난리가 난 게지요. 일부러 머리에 들이붓고 망신을 주었다지요.”
숙녀에게 예의를 갖추는 신사의 미덕이 자리 잡은 사교계에서 어떤 망나니도 이런 짓을 저지른 적이 없었다. 후작은 아들이 전해주는 사건을 듣고 아들과 마주 앉아서 한참을 웃었다. 배가 아프도록 웃어본 것이 얼마 만이었는지 모른다.
사교 파티에서 많은 사람과 만나다 보면 ‘뭐, 이런 여자가 다 있나.’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여자와 마주치는 일은 피할 수 없었다. 그래도 꾹꾹 참으며 예의를 지켰다. 자라면서 배운 예법이 그랬고, 가문의 이름이 유쾌하지 못한 일로 뭇입에 오르내리게 할 수 없었다.
누구도 하지 못하는 짓을 과감히 저지른 메튼 백작의 행적에 통쾌함을 느낀 남자가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로빈도 잠깐 놀랐다가 웃음을 참느라 입이 실룩거렸다.
“사람들 관심은 금방 수그러든다네, 메튼 경. 그래도 한동안은 자중해야 할 걸세.”
“예. 자중하고 있습니다.”
브루노는 사건 이후에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 나서는 일을 자제하고 있지만, 솔직히 벌이 아니라 상처럼 느껴졌다. 한가로운 저녁 시간을 보낸 며칠이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위로는 필요하지 않을 듯합니다. 이번 사건은 메튼 경에게 실보다 득이 크니까요.”
후작은 브루노가 저지른 사건이 흘러가는 행방이 생각과 달라서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백작 영애를 동정하는 여론이 대부분이었지요.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백작 영애를 향한 곱지 않은 눈초리가 늘고 있다고 합니다.”
“아니 왜요?”
“사교계 아가씨들의 마음을 통째로 훔쳐간 두 신사가 파티에 발길을 딱 끊었으니까요. 원흉인 백작 영애에 대한 아가씨들의 원성이 말도 못 하답니다.”
브루노가 근신하면서 데미안도 함께 외부 일정을 당분간 미루었다. 둘이 사교 파티에서 사라지자 참가자 수가 확 줄어들었다. 그것도 거의 여자들만.
파티의 성공 요인은 참석자 수의 비중이 압도적이었다. 특히 아가씨들이 많이 참석하는 파티는 반드시 비례해서 남자들의 참석도 많았다. 이번 사건으로 파티 주최자들은 데미안과 브루노의 존재 가치를 실감했다.
원래 둘에게 오는 초대장이 많았지만, 이제는 거의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전에는 데미안의 것이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이제는 거의 엇비슷했다. 브루노의 인기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사람들은 이제 메튼 백작이라고 칭하면 원래의 메튼 가문의 주인인 브루노의 형이 아니라 브루노를 연상했다.
브루노의 행동은 비난받을 만했다. 그러나 직접 백작 영애를 찾아가 사과했고, 금방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파티에 나타날 것이라는 사람들 예상과 달리 일주일이 다 되도록 자중하는 모습을 보이자 브루노에 대한 비난 여론은 힘을 잃었다.
타란 공작의 뒤를 이을 것이 확실한 차기 공작 데미안의 친구이자 최측근. 사람들이 보기에 브루노의 앞길은 탄탄했다. 나이는 어려도 어지간한 권력자 못지않은 위치였다.
권력자의 겸손함은 호감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었다. 호의적인 시선이 늘자 비난하던 자들이 말을 조심했다. 미래의 권력자와 친분을 쌓지는 못할망정 적으로 돌리는 빌미를 만들고 싶은 자는 없었다.
‘무슨 이유로 그랬을까?’
로빈은 브루노에게 자세히 묻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사정을 듣자면 백작 영애에 대한 험담이 될 것이고, 숙녀를 험담하는 짓은 공개적으로 술을 들이붓는 짓보다 저열한 무례였다.
‘다른 사람이 그런 짓을 했으면 사교계에서 매장되었을 텐데.’
매장되기는커녕 데캉 후작의 말에 따르면 식지 않는 인기를 자랑했다. 로빈은 그전부터 브루노의 인기를 이해할 수 없었다. 브루노가 숙녀의 머리에 술을 붓는 짓을 했다는 말을 듣고 놀라긴 했어도 충격은 아니었다. 브루노라면 그런 짓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사교계에서 브루노는 원래 숙녀들에게 무례하기로 유명했다. 나이 든 귀부인들에게는 깍듯이 예를 갖추지만, 여자로서 접근하는 아가씨들에게 말을 툭툭 내뱉고 여자가 먼저 용기 있게 춤을 청하는 요청을 면전에서 거절하는 일이 예사였다.
나이 지긋한 귀부인은 예의를 아는 젊은이라고 흡족해하고 어린 아가씨들은 파티 시간 내내 브루노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면서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며 좋아했다.
브루노에게 춤을 청했다가 거절당해도 이제는 굴욕이 아니었다. 대답도 잘 안 해주는 브루노가 그나마 춤을 거절할 때는 길게 사양하는 말을 해서 그걸 들으려는 여자들이 끊임없이 춤을 청했다. 덕분에 브루노는 귀찮아 죽을 지경이었다.
로빈은 도무지 알 수 없어서 사교계에 데뷔한 친척 누이에게 인기의 이유를 물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무례하니까요. 후작 영애든 남작 영애든 메튼 경에게는 똑같아요. 메튼 경이 짜증스럽게 말하는 표정이 얼마나 귀여운지 아세요?’
볼이 발그레 물들어 양손을 맞잡고 꿈꾸는 표정을 짓는 친척 누이를 보면서 로빈은 여자의 심리는 정말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로빈이 브루노의 인기 비결에 골몰하는 동안에 데캉 후작은 데미안을 탐나는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몰리의 짝으로 아주 딱이겠는데.’
데캉 후작은 데미안이 사윗감으로 매우 욕심이 났다. 차기 공작이라는 신분도 신분이지만, 성품이나 능력이나 탐탁하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데미안과 비교하면 다른 놈들은 다 쭉정이였다.
여식인 몰리가 열세 살이었다. 다섯 살 차이면 아주 바람직했다. 그런데 몰리는 아직 사교계에 데뷔하지 않았다. 타란 백작을 사윗감으로 군침 흘리는 작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몇 년 사이에 누가 채갈까 봐 조바심이 나서 몰리의 사교계 데뷔를 좀 이르게 할까 생각 중이었다.
난처해하는 젊은이들을 세워놓고 데캉 후작과 라미스 공작이 즐겁게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회의장으로 속속 입장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흘끔거리는 눈빛에는 어떻게든 끼어들고 싶어 하는 미련이 가득했다.
복도 저편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회의장으로 다가왔다. 중부의 수장, 타란 공작이 중부 소속 관리들을 이끌고 등장하자 회의장 주변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회의장 앞을 지키고 서있는 기사들이 더 허리를 세웠고,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타란 공작은 중추적인 행정기구 중부의 수장을 연임하면서 권력의 실세로 자리 잡았다. 서른 중반에 접어들어 나이와 경험이 더해지면서 갈수록 묵직한 기세를 풍겼다. 그러면서도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느낌이 공존했다.
데캉 후작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타란 공작을 보다가 타란 백작을 보았다. 외모는 비슷하지만, 두 부자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타란 공작은 야생의 맹수 같았다. 배가 적당히 불러서 주변의 사냥감들을 느긋하게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 속에 광폭함이 잠재되어 있었다. 언제 달려들어서 목덜미를 물어뜯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주었다.
그에 비하면 아들 쪽은 사람들 속에서 자라서 그런대로 사람 친화적인 맹수였다. 달려들어 물기 전에 경고 한 번쯤은 해줄 것 같다.
사실, 데미안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절대 접근하기 편한 쪽은 아니었다. 자신이 정한 거리 안으로 사람을 들이지 않고 적당한 예의로 차가운 성품을 포장했다. 그런데 휴고와 비교하면 데미안은 그나마 한 발 걸칠 여지가 보였다.
타란 공작의 권력에 조금이라도 기대고 싶은 자들은 공작보다는 아들인 타란 백작을 공략했다. 아예 무시하는 휴고와 달리 데미안은 예의 바르게 응대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결과의 차이가 없었다.
휴고나 데미안이나 자신의 범위 밖의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다는 점은 똑같았다. 데미안이 말도 섞고 싶지 않은 한심한 작자들에게도 예의를 차리는 것은 그런 노력을 가끔 어머니가 목격하면 몹시 기뻐하며 칭찬해 주기 때문이었다. 데미안은 어머니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도록 항상 노력했다.
휴고는 복도에 서있는 아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회의장으로 들어가 버렸다. 평소에 두 부자의 경직된 거리감이나 딱딱한 말투의 대화를 목격하면 사람들은 역시 타란 공작은 후계자 교육도 허투루 하지 않는다고 감탄하곤 했다.
라미스 공작과 데캉 후작도 회의장으로 들어가자 사람이 한결 줄어든 복도에 두 청년만 서있었다.
“나만 보면 다 그 얘기야.”
브루노가 투덜거렸다. 듣던 말을 또 듣고, 또 듣고. 성가셔 죽겠다. 냉소가 담긴 삐딱한 표정을 지었다.
“다시는 그러지 마. 이번은 처음이라 운 좋게 어찌 넘어갔지만, 또 그러면 넌 무뢰한으로 낙인찍힐 거야.”
“알아.”
브루노도 자신이 저지른 짓이 가벼운 실수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참을 수 없었다.
끊임없이 거절하는데도 급증하는 춤 신청을 피해서 휴게실에 있다가 파티장 입구로 들어설 때였다. 무슨 백작 영애라고 이름도 기억 못 하는 여자가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
‘다들 아시겠지만, 혼외자가 가문을 이어받은 예는 거의 없잖아요. 공작부인께서 아들을 낳으시면 어찌 될지 알 수 없는 거죠.’
데미안이 공작부인의 친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처음에 데미안이 데뷔할 무렵에는 굉장한 화제였다.
둘만 모이면 타란 공작 후계에 대해 떠들었다. 아무리 타란 공작이라지만, 혼외자로 가문을 잇겠다는 결정을 거북스러워하는 사람이 많았다. 어지간한 귀족 가문치고 혼외자를 입적하지 않은 가문이 없고, 적자인 후계자보다 뛰어난 능력과 가주의 신임을 받는 혼외자 문제는 드물지 않은 골칫거리였다.
제논에서 혼외자의 입지는 미묘했다. 사생아를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 타국에 비하면 제논은 관대했다. 얼마든지 입적할 수 있고 혼적에만 올라가면 적자로 대우해 주었다.
그러나 또 우습지만, 타국에서는 오히려 사생아가 가문을 이어받는 예가 종종 있었다. 그러나 제논은 그런 문제에는 굉장히 보수적이었다. 자손이 입적한 혼외자뿐이라고 해도 친척을 양자로 들여서 가문을 물려주었다. 데미안의 존재는 뿌리 깊은 제논의 관행에 대한 도전이었다.
데미안에 대한 불편한 시선은 시간이 지나며 누그러졌다. 변함없이 살가운 애정을 쏟는 공작부인의 태도를 보는 귀부인들이 조심하고, 남들이 뭐라거나 말거나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공작의 추진력을 아는 사람들은 말조심했다.
타란 공작을 닮은 매력적인 외모를 가졌으나 타란 공작을 닮지 않은 정중한 예절이 몸에 밴 신사가 귀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할 무렵에 데미안이 학술원의 시타가 되었다.
원래 익시움의 재학생은 대개 집안의 차남 이하였다. 후계는 집에서 전문 가정교사의 가르침을 받고 모임이나 사교 파티를 다니면서 인맥을 쌓았다. 그런데 후계자도 익시움에 입학하기 시작했다.
학술원 출신이 미래에 각 나라 권력의 핵심 인물이 될 것이 확실시되면서 위상이 몇 년 사이에 엄청나게 높아졌다. 사람들은 시타가 된 데미안을 뛰어난 능력을 지닌 인재로 보기 시작했다.
지금 와서는 새삼스럽게 데미안의 출생을 떠드는 자가 없었다. 알면서도 굳이 말을 꺼내지 않는 암묵적 규칙이 되었다. 그런데 건방지게 유쾌하지 못한 이야기를 굳이 끄집어내 화제로 삼는 백작 영애가 브루노는 괘씸했다. 울컥 뭔가가 치밀어서 옆으로 지나가는 시종이 들고 있는 쟁반 위의 칵테일을 그대로 여자 머리에 쏟아 부었다.
브루노는 데미안이 그런 이야기를 들어도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것을 안다. 친구는 출생의 약점에 대한 그늘이 조금도 없는 신기한 녀석이었다. 그래도 들어서 좋은 이야기가 아니라서 브루노는 왜 그랬는지 이유에 대해서 입을 다물었다.
“막말하는 계집애들은 질색이야.”
“너 또.”
데미안이 미간을 찌푸리자 브루노가 건성으로 ‘실수’라고 대답했다.
“네가 아무 이유 없이 그러지는 않았겠지.”
데미안이 아는 브루노는 싹싹한 성격은 아니어도 경우 없이 그럴 녀석은 아니라서 백작 영애가 꽤 무례한 실수를 했다고만 짐작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말씀이 옳아. 넌 더 신중히 생각해야 하는 위치야.”
공작부인 이야기가 나오자 브루노의 신경질적인 푸른 눈동자에 온기가 감돌았다.
“어머니의 말씀은 항상 옳지.”
“그건 그래.”
남들이 들으면 실소가 나올 이야기를 나누며 두 청년은 머리를 맞대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파티에 루시아는 참석하지 않았다. 뒤늦게 사건을 전해 듣고 다음 날 저녁에 데미안과 브루노를 불러 앉혀놓고 말했다.
‘브루노. 네가 이유 없이 그랬다고는 생각지 않아. 하지만 네 행동이 어린 신사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받는다는 소리를 듣고 걱정이구나. 그들의 영웅이 되고 싶니?’
‘그런 치기로 한 짓이 아닙니다.’
‘그래. 나도 네가 그랬을 리가 없다고 믿어. 하지만 네가 한 행동이 일으킨 파장을 생각해 봐. 신사가 숙녀에게 예를 지키는 일은 올바른 예절이자 모두의 약속이란다. 네 행동이 올바르다고 당위성을 부여하면 누군가는 모방하려고 들겠지. 잘못 없는 여인을 모욕하고 오히려 망신을 주어 화제의 중심이 되려는 자가 분명히 나올 거야. 나는 네가 그런 어리석은 자의 본보기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구나.’
‘제가 경솔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번 일을 기회로 너희 둘이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생각하렴. 브루노는 백작 영애를 찾아가서 정중히 사과하고, 너희 둘 다 당분간 파티 출입을 삼가고 근신하여라.’
‘예, 어머니.’
‘예, 어머니.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브루노는 다음 날 백작 영애를 찾아가서 영애는 물론이고 부모들에게도 정중히 사과했다.
데미안의 초대를 받아서 공작저를 처음 방문했던 날의 기억을 브루노는 잊을 수 없었다.
‘브루노. 만나서 반가워. 네 얘기는 많이 들었어.’
공작부인은 마치 울 것 같은 눈으로 브루노를 보더니 두 팔 가득 소년을 안아주었다. 친어머니에게도 언제 안겼는지 기억이 없는 브루노는 따뜻한 품에서 굳은 것처럼 서있었다. 공작부인의 따뜻한 환대는 충격이자 감격이었다.
브루노는 학술원이 방학을 하면 공작저에서 가족처럼 함께 지냈다. 넓은 공작저는 항상 따뜻한 기운으로 가득했다. 동생도 데려와서 자기 집처럼 편하게 먹고 자는 크리스의 뻔뻔함이 기가 막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까 자신도 그러고 있었다.
공작부인의 애정 어린 보살핌을 느끼면서 데미안과 크리스, 말썽꾸러기 쥬드, 귀엽고 사랑스러운 에반제린과 보내는 시간은 꿈처럼 행복했다.
크리스가 무척 어려워하는 타란 공작조차도 브루노는 닮고 싶은 어른으로서 존경했다. 언젠가부터 브루노는 공작부인을 어머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잠시 옛 기억에 빠진 브루노를 데미안이 일깨웠다.
“폐하께서 납시기 전에 들어가자.”
“아, 그렇지.”
회의 시작 시각이 근접해서 복도에 더는 사람이 없었다. 회의장 문이 닫히기 전에 데미안과 브루노는 안으로 들어갔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한 회의는 오후가 되어 끝났다. 성과 보고와 치열한 공방이 오간 긴 회의를 마친 사람들은 지친 표정으로 회의장을 나섰다.
데미안과 브루노는 회의장 문 근처에서 타란 공작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들의 오늘 일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국정 회의를 참관한 후에는 반드시 타란 공작에게 오늘 회의 내용을 정리해서 보고하고 문답을 주고받는 토론을 했다.
‘…지친다.’
브루노는 오늘처럼 긴 회의 후가 가장 힘들었다. 보고와 토론이 능력에 부쳐서가 아니라 체력이 달렸다. 곁에 서있는 데미안의 살아있는 안색을 보며 감탄했다.
‘괴물들이야. 괴물들.’
공작가 두 부자의 체력은 정말 무시무시했다. 브루노는 단 한 번도 공작 부자가 지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온종일이 아니라 날밤을 새워도 조금 전에 숙면을 취한 것처럼 기운이 넘쳤다.
어깨를 늘어뜨리고 서있던 브루노는 타란 공작이 나오자 허리를 세웠다.
휴고는 데미안과 브루노에게 다가가서 쪽지를 한 장 내밀었다.
“난 폐하께서 긴히 나눌 말씀이 있다고 하시니까 너희는 먼저 집에 가있어라. 보고는 들어가서 듣겠다.”
“예.”
데미안은 중요한 문서처럼 소중히 쪽지를 받아 펴보았다. 내용을 확인한 데미안의 안색이 살짝 굳었다.
“아버지. 이건…….”
데미안이 당황하는 모습이 의아해서 브루노는 고개를 슬쩍 디밀어 쪽지 내용을 확인했다. 브루노의 표정은 데미안보다 더 눈에 띄게 굳었다.
쪽지에는 짤막한 두 개의 구절이 쓰여있었다.
꿈속의 입맞춤
여름 정원의 장미
기밀을 주고받는 새로운 암호인가. 의문이 가득한 두 청년의 시선을 받으면서 휴고는 안색조차 변하지 않았다.
“내가 늦을 것 같으니까 너희가 사서 들어가라. 제과점 이름은 뮐로. 쪽지의 그건 케이크 이름이다. 네 어머니가 먹고 싶다고 하더구나.”
“…예.”
마부에게 뮐로 제과점으로 가자고 행선지를 알려주고 두 청년은 마차에 올랐다. 마차가 출발하고 잠시 후 브루노가 어깨를 흔들며 숨죽여 웃다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브루노의 웃음에 전염되어 데미안도 웃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참 대단하셔. 누가 타란 공작 전하를 제과점으로 심부름 보낼 수 있겠어?”
“어머니만 하실 수 있는 일이지.”
“내가 공작저에서 지내면서 가장 놀란 일이 뭔 줄 알아? 공작가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 공작 전하가 아니라 어머니라는 사실이야.”
데미안은 쿡 웃으면서 브루노 말에 동감했다. 분명히 아버지가 훨씬 키도 크고 힘센 남자인데 작고 약한 어머니가 더 강했다. 어릴 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은 이해했다기보다는 그냥 당연해졌다.
어머니가 목소리를 높이며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데미안이 기억하는 어머니의 얼굴에는 언제나 미소가 있었다.
그러나 가끔 어머니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질 때가 있었다. 그건 정말 무서웠다. 아버지도 그럴 때는 어머니 앞에서 꼼짝을 못 했다.
“인형의 집 사건도. 공작 전하께서 그렇게 공을 들인 인형의 집을 어머니가 하루아침에 치워 버리셨지.”
브루노는 저녁에 귀가한 세 남자를 맞이하는 어머니의 얼굴에 평소처럼 따뜻한 미소가 없다는 사실이 그렇게 무섭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인형의 집은 제가 치웠어요. 오늘 왕비 마마를 뵈러 궁에 다녀왔고요. 당신. 저하고 얘기 좀 해요.’
몸을 돌려 2층으로 올라가는 어머니의 뒤를 따라 올라가는 공작의 뒷모습이 어쩐지 작아 보인다고 생각했다.
‘이 녀석은 부모님의 그런 모습을 계속 보며 자랐겠지.’
브루노는 부모와 함께한 따뜻한 추억이 없었다. 친부는 제 욕심이 우선이었고, 친모는 자기 연민에 사로잡혀서 항상 우울했다. 친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고, 모친에게 버림을 받았을 때는 그저 포기하는 심정이었다.
그래서 브루노의 집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다정한 부부의 모습을 공작가에서 목격할 때마다 기분이 이상했고, 데미안이 부러웠다.
“크리스는 연락 없지?”
크리스는 학술원을 졸업하자마자 봇짐 하나 달랑 들고 여행을 떠났다.
‘세상 땅을 모두 밟아보고 싶어. 오래전부터 꿈이었어.’
크리스는 행선지는 물론이고 언제 돌아오겠다는 말도 남기지 않았다. 필리프 후작이 뒤늦게 소식을 듣고 노여워하며 아들을 잡아오려 했으나 미꾸라지처럼 잘 빠져나갔다.
그 후 소식이 없다가 몇 개월 전에 겨우 한 번 발신지 불명으로 편지를 보냈다. ‘잘 지낸다.’라는 짤막한 안부 편지였다.
“네가 모르면 내가 알 재주 있겠냐.”
덤덤하게 대답하는 데미안을 향해 브루노가 인상을 썼다.
“사람 풀어서 찾아봐. 공작가 후계 권력을 이럴 때 안 쓰면 언제 써?”
“어디에 가있는 줄 알고.”
“아, 진짜. 이번에도 참석 안 하면 작위 박탈이라고. 그 자식은 심각성을 모르는 거야?”
작위 귀족은 세금 납부 외에 연 2회 지역별로 개최하는 귀족 회의에 참석할 의무가 있었다. 전쟁 등의 특수한 상황 없이는 면제될 수 없는 의무였다. 말로는 회의라지만, 실제는 만찬회에 가까웠다. 서로 안부를 묻고 소소한 문제가 있으면 인맥을 통해 해결하는 자리였다.
귀족 회의에 최소 연 1회 참석하지 않으면 귀족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으므로 작위 박탈 절차에 들어갔다. 크리스가 두 달 후에 있을 귀족 회의까지 참석하지 않으면 영락없이 2회 연속 불참이었다.
“내심 잘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귀족 회의 다녀오는 일이 시험보다도 징글징글하다고 했으니까.”
“왜 그 녀석 일을 내가 더 안절부절못하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브루노는 한숨을 푹 내쉬며 짜증스럽게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본인이 본인 일에 가장 무심해서 그렇겠지.”
“내 말이 그 말이야. 회의 불참으로 작위 박탈이라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눈앞에서 보게 생겼다고. 공작 전하께서 노여워하시지 않을까? 폐하께 직접 청해서 수여한 작위잖아.”
“아버지께서 그런 일을 신경 쓰시지 않을 거야. 박탈된 작위를 나중에 재수여하는 방법을 생각하시겠지. 사람 풀어서 크리스 잡아오는 것보다 그게 더 간단하니까.”
“…그게 더 간단한 거냐?”
브루노는 질려서 입을 다물었다. 데미안이 태연한 이유도 이제 알았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하면서도 가끔 공작 부자의 차원이 다른 사고방식은 따라갈 수가 없었다.
마차가 제과점 뮐로 앞에서 멈추었다. 마차에서 내린 두 청년이 분홍색 간판을 보고 멈칫했다. 아주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하긴, 케이크 이름부터가 범상치 않았다.
“…우리한테 떠넘기신 것 같다는 예감이 마구 드는데.”
데미안 역시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제법 널찍한 뮐로 내부에는 케이크를 주문하거나 테이블에 앉아서 케이크를 맛보는 여자 손님들로 가득했다. 담소를 나누는 여자들의 수다로 가득한 공간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안으로 들어서는 두 명의 미청년에게 모두 시선을 집중했다.
어지간한 사람들의 시선에 익숙한 데미안과 브루노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얼굴이 화끈거려서 이대로 뒤돌아 나가버리고 싶었다.
외부 간판 못지않은 분홍색 내부 장식은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입구 같았다. 벽에 매달린 색색의 꽃, 치렁치렁한 레이스, 내부에 떠도는 달콤한 과자 냄새, 따갑도록 얼굴이 꽂히는 여자들 시선까지 더해져서 현기증이 났다. 두 청년은 잠시 입구에 굳은 것처럼 서있었다.
브루노가 주춤 물러서는 순간을 데미안이 빠르게 포착했다. 뒤돌기 전에 덥석 데미안이 브루노의 팔을 잡았다.
“다음에 여기 또 올 일이 없다고 장담해? 그때는 너 혼자 올 거면 이번에는 내가 아버지가 주신 임무를 수행하지.”
브루노는 도망가기를 포기했다. 여기에 혼자는 절대 못 온다. 혼자 한 번 오는 것보다 차라리 둘이 두 번 오는 것이 나았다.
내부를 한번 슥 살피고 주문받는 곳을 확인하며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데미안이 흠칫했다. 계산대에서 종업원과 이야기를 나누는 여인의 뒷모습을 보며 데미안의 눈빛이 흔들렸다.
잿빛이 감도는 금발.
데미안은 자기도 모르게 성큼 다가가서 뒤돌아선 여자의 팔을 잡아 그대로 돌려세웠다. 여자의 흐린 갈색 눈동자가 당황해서 흔들렸다.
맑은 초록색 눈동자가 아니었다. 가까이서 보니까 머리카락 색깔도 달랐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더 밝은색이었다.
데미안은 즉시 팔을 놓고 무례를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레이디. 사람을 잘못 봤습니다.”
뒤에서 친구의 모습을 물끄러미 보면서 브루노가 혀를 찼다.
“어머나, 타란 경. 뜻밖의 장소에서 다 보는군요.”
인사를 건네는 중년 귀부인의 얼굴을 확인한 데미안은 재빠르게 품성 바른 젊은이의 표정을 지었다.
“평안하셨습니까, 후작부인.”
아들의 듬직한 친구를 바라보는 필리프 후작부인의 눈빛이 흐뭇했다. 슬하에 딸이 있었으면 어떻게든 사윗감으로 점찍을 텐데 그러지 못함이 아쉬웠다. 데미안의 곁으로 다가온 브루노가 건네는 인사도 받으면서 후작부인은 듬직한 두 청년을 보며 안타까웠다. 저들 옆에 자기 아들도 함께 있어야 했다.
‘크리스. 이 철없는 아들놈 때문에 내가 속상해서 원.’
세계 여행이라니. 그딴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러다가 데미안의 측근 자리를 브루노가 완전히 꿰찰까 봐 후작부인은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었다.
후작부인이 현재 사교계에서 가장 화제의 인물들과 다정히 대화를 나누자 후작부인과 함께 온 귀부인들이 슬금슬금 관심을 보이며 다가왔다.
“후작부인. 멋진 신사들과 인연이 있으신가 보군요.”
“어머나, 모르셨어요? 후작부인의 아드님이 타란 경, 메튼 경과 친우랍니다. 아주 절친하지요.”
귀부인들의 부러움 섞인 말을 들으며 필리프 후작부인은 한껏 기분이 고취되었다. 아마 이 자리에 크리스가 있었으면 질색했을 것이라고 두 청년은 친구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후작부인은 아주 전형적인 귀족 마나님이었다. 적당히 허세 있고 물욕 있으며 수다를 좋아하는. 크리스는 자기 모친의 그런 모습을 싫어했다.
‘우리 어머니가 공작부인의 반만 닮으면 얼마나 좋을까.’
크리스가 한탄하며 말하곤 했다.
“신사들께서 이런 곳에 어쩐 일인가요?”
“어머니께 드릴 케이크를 사러 왔습니다.”
“어머나, 역시. 공작부인은 이렇게 듬직한 효자 아들을 두셔서 얼마나 좋으실까.”
데미안과 브루노는 친구의 어머니에 대한 예의를 지키며 후작부인의 제법 긴 수다를 묵묵히 받아주었다. 겨우 가까스로 풀려나서 데미안은 케이크를 사기 위해 계산대 앞에 섰다.
“구매하실 케이크 이름을 앞에 있는 주문 종이에 적어 주시겠습니까?”
종업원의 말을 듣고 데미안은 크게 안도했다. 그 낯부끄러운 케이크 이름을 입으로 말할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다. 종업원 말대로 앞에 있는 약간 누런빛을 띠는 종이에 케이크 이름을 적으려다가 손에 쥐고 있던 아버지가 주신 쪽지를 펴보았다. 데미안은 쪽지와 제과점 주문 종이를 번갈아 보며 비교했다. 크기와 종이 재질이 동일했다. 펜을 내려놓고 아버지가 주신 쪽지를 종업원에게 건넸다.
“주문서를 받았습니다. 제품 포장까지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데미안은 아버지가 최소 이곳에 한 번 이상은 온 적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들에게 떠넘긴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라면 어머니를 위한 케이크를 사기 위해서 분홍색의 제과점 내부 장식 따위는 개의치 않을 것 같다.
제과점 내부를 전체적으로 한눈에 담으면서 여기를 아버지 혼자 들어오는 모습을 상상했다.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다. 데미안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아버지가 참 존경스러웠다.
집으로 가는 마차 안에서 브루노는 슬쩍 데미안의 표정을 살폈다. 평소와 다름없으나 브루노의 눈에는 괜히 심란해 보였다.
“찾아보지 그래?”
“아직도 크리스 얘기야?”
“크리스 말고. 테드 말이야. 본명은 테드가 아니겠지만. 이름은 알아?”
“…알아.”
“말했지만, 공작가 후계 권력은 이럴 때 쓰라니까.”
“…….”
“익시움 최연소 시타께서는 참 능력도 좋지. 사내 녀석들만 드글드글한 학술원에서 연애도 다 하고. 말 나와서 말인데, 테드가 여자인 건 언제 알았어?”
“학년 초에.”
“뭐야. 그럼 테드가 입학하고 얼마 안 돼서 알았다는 거잖아. 테드가 널 찾아가서 자신이 여자라고 했을 것 같지는 않고. 어떻게 알았어?”
데미안은 대답 대신 피식 웃었다. 학술원에 여자가 남장하고 입학할 것이라는 생각을 누가 할 수 있을까. 우연한 사건이 아니었으면 데미안도 몰랐을 것이고, 수많은 입학생 중 하나인 그녀에게 관심을 두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내가 그때만 생각하면 진짜. 네가 남자하고 정분 난 줄 알고 얼마나 식겁했다고. 크리스 녀석은 알면서 내게 귀띔도 안 해주고.”
“…….”
“찾아봐. 애끓지 말고.”
여름 방학이 끝나고 학술원에 돌아와서 보니까 테드는 자퇴서를 제출하고 사라진 상태였다.
“…이름밖에 몰라.”
“어느 집안 아가씨인지 몰라? 출신국은?”
“몰라.”
브루노는 헛똑똑이 친구를 보며 혀를 찼다.
“그래도 학술원에 입학할 정도면 어딘가 단서가 있겠지. 뒤지면 안 나올까.”
대답 없는 데미안을 보면서 브루노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테드는 데미안에게 서신을 한 통 남기고 사라졌다. 안에 무슨 내용이 쓰여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학술원이고 뭐고 다 내던지고 찾으러 뛰쳐나갈 것 같던 친구는 딱 하루 동안 기숙사 방에 처박혀 있더니 다음 날부터 아무렇지 않은 듯 일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브루노는 가끔 느낌으로 알았다. 데미안이 테드를 잊은 것이 아니라 지금은 감정을 꾹 누르고 참고 있다는 것을.
* * *
놀만의 편지를 읽는 루시아의 입가에 미소가 가득했다. 루시아는 편지와 함께 배송된 책을 펼치고 첫 장의 문구를 몇 번이고 읽었다.
나의 사랑하는 자매이자 친구 루시아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결혼 후 작가 생활을 하지 않았던 놀만이 오랜만에 다시 펜을 잡고 쓴 소설이었다.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된 놀만은 소소한 행복을 누리며 살고 있었다. 가끔은 남편 흉을 보고, 말썽꾸러기 두 아들에 대한 하소연을 늘어놓기도 하고, 남이 보기에는 별것 아닌 일을 대단한 사건으로 포장한 내용을 담은 놀만의 편지는 소설처럼 굉장히 재미있었다. 루시아가 가장 기다리는 편지 중 하나였다.
오늘은 반가운 편지가 더 있었다. 북부에서 온 케이트의 편지였다. 케이트도 이미 결혼해서 두 아이의 어머니였다.
원래 케이트와는 새해에 안부 편지 정도만 주고받았다. 그런데 3년 전, 마담 미셀의 부고를 받고 루시아가 북부를 다녀온 이후로 두 사람의 편지 서신은 횟수가 늘었다. 케이트는 수일의 마차 여행을 하면서까지 일부러 와준 루시아에게 무척 고마워했다.
개인적인 서신을 다 읽고, 이제는 초대장을 정리했다. 여전히 초대장은 엄청나게 들어왔다. 그런데 옛날과 달라진 점이 있었다. 루시아를 겨냥하는 초대장이 아니라 데미안과 브루노를 초대하고 싶어서 루시아를 공략하는 주최자의 의도가 느껴지는 초대장이 상당히 많았다.
난데없이 루시아에게 안부를 묻는 이름 모를 아가씨들의 편지도 있었다. 루시아의 안부는 전혀 궁금하지 않으면서 데미안 혹은 브루노에게 연정을 품은 아가씨들의 살랑거리는 모습이 빤히 보여서 루시아는 편지를 읽다가 한참을 웃곤 했다.
초대장까지 정리하면 기타 편지가 남았다. 개중에는 디자이너들의 광고 서신이 있었다. 사람들은 앙뜨가 공작부인의 전속 디자이너라고 생각하지만, 루시아는 앙뜨와 전속 계약을 맺지 않았다. 그저 앙뜨의 디자인보다 마음에 드는 것을 찾지 못했을 뿐이었다. 더 나은 디자인을 발견하면 다른 디자이너에게 의뢰할 생각이 얼마든지 있었다. 그래서 디자이너들이 꾸준히 보내는 광고 서신을 관심 있게 봤다.
의상 디자이너뿐만이 아니라 보석상에서도 광고 서신을 보내는데 루시아는 어떤 보석상에서 보낸 서신을 펼치다가 흠칫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