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장 (1/14)

1장.

우성 오메가의 품귀 현상이 대두되고 있는 요즘이다.

예전엔 알파와 오메가 사이에선 무조건 알파 혹은 오메가가 나온다는 사상이 지배적이었다. 가끔 알파와 오메가 사이에서 베타가 태어나는 경우가 있었지만 이는 그저 돌연변이 정도로 생각되었지 흔한 사례는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알파와 오메가 사이에 베타가 태어나는 확률이 점점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 현상에 대해 의학적으로 정확한 원인규명이 되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내로라하는 명망 있는 가문들은 우성 알파로 그 명맥을 이었기에 이 사안에 대한 연구비를 전폭적으로 지지해주었다. 형질학자들이 연구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긴 하나 크게 성과가 없어 인류학자들은 이 추세라면 50년 안에 인류는 베타만 남을 것이라 예측하고 있었다.

이 현상이 발생하기 전부터 인구조사에서 가장 적은 비중을 차지하던 오메가였다. 그마저도 새로 태어나는 비율이 나날이 줄어드니 갈수록 희소성이 높아졌다.

하지만 오메가가 귀해졌다고 오메가에 대한 대우까지 귀해지는 건 아니었다. 물리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신체능력과 힘의 차이뿐만 아니라 히트 사이클이라는 제약은 오메가를 알파 앞에 스스로 다리 벌리게 했기 때문에, 오메가는 여전히 알파의 소유물 정도로 인식되었다.

피라미드 사회의 꼭대기를 알파가 죄다 차지하고 있으니 알파가 씌워 놓은 프레임은 21세기 오메가도 조선시대에 살게 만들었다. 아직까지도 오메가 인생이 피는 가장 좋은 방법은 좋은 알파에게 시집을 잘 가는 것이었다.

열성이든 우성이든 재수 없는 알파들은 어차피 대체로 개차반들이니 이왕이면 더 많은 부와 권력을 가진 우성 알파 집안으로 가는 게 오메가 삶의 성공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라고 볼 수 있었다.

같은 오메가 중에서도 우성 오메가이면 성공적인 인생을 살 확률이 높았다. 저 혼자 사랑에 미쳐 열성 알파와 사고라도 치지 않는 이상 거의 90퍼센트가 우성 알파와 결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성 알파보다 더 적은 개체수로 인해 대부분의 우성 오메가들은 부유한 사모님의 삶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러니 우성 오메가라는 형질은 종종 어떤 이들로 하여금 집착의 대상이 되었다.

바로 시우네 집이 그랬다.

***

집안이 대차게 망하기 전까지 시우의 집안은 대대로 이어온 자식 장사로 꽤나 잘 사는 편에 속했었다.

열성과 우성 중 더 귀한 우성 오메가, 여자와 남자 중 그 수가 더 적은 남자 오메가, 합쳐서 ‘남자 우성 오메가’는 희소가치가 가장 높은 인류였고 사람들은 가치가 높을수록 그 값을 더 쳐주었다.

시우의 집안은 천운이 들었는지 남자 우성 오메가를 대대로 배출해 사돈 장사로 부를 얻었다.

시우의 형, 시원 역시 우성 오메가로 태어났다. 문제는 우성 오메가 치고 박색이라는 것이었다. 우성 오메가는 대체로 한눈에 보아도 아름다웠다. 귀엽게 생긴 아름다움이냐, 청순하게 생긴 아름다움이냐, 섹시하게 생긴 아름다움이냐 그 개성은 다 달랐지만, 공통적으로 그들의 형질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바로 알아챌 만큼 고급스러운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시원은 하나하나 이목구비를 떼어 놓고 보면 예쁜데 뭉쳐 놓고 보면 조화가 어딘가 이상한 어색하고 애매한 잘생김을 타고 났다. 베타 사이에 떨어뜨려 놓으면 평균 이상의 외모였지만 오메가들 사이에서는 썩 찬양할 만한 외모가 아니었기에 시원의 부모님들은 도박하는 심정으로 둘째 시우를 가졌다.

시우는 아기 때부터 오밀조밀 어찌나 예쁘게 생겼는지 시우의 엄마 화영이 시우를 안고 백화점에 마실이라도 나가면 다들 기저귀 모델 시켜야 하는 것 아니냐며 화영을 띄워주었다.

엄청 큰 눈을 가진 것도, 엄청 높은 코를 가진 것도 아닌데 콩알만 한 얼굴에 모난 구석 하나 없는 깔끔한 이목구비, 사춘기 때도 여드름 하나 나지 않은 매끄러운 피부 결까지. 우성 오메가들 사이에서도 손에 꼽히는 사랑스러운 외모를 가진 시우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우는 사랑이라곤 일절 받지 못하고 자란 집안의 구박데기였다.

시우가 베타였기 때문이다.

아마 뱃속에 있을 때 태아의 형질을 알 수 있었다면 화영은 가차 없이 시우를 낳지 않았을 거다. 굳이 낳을 필요도 없는데 낳은 자식, 그게 시우였다. 그래서 시우는 가족의 한 구성원으로 끼지 못하고 늘 객식구처럼 눈칫밥을 먹고 자랐다.

두 돌이 지나고 나면 유아 형질 검사를 통해 형질을 알 수 있다. 갓난아기 주제에 눈에 띄게 예쁜 시우를 보며 시우의 부모님들은 우성 오메가임을 확신했다. 하지만 시우는 베타였고, 이를 믿을 수 없던 부모님들은 어린애 팔뚝에 몇 번이나 주사를 꽂아가며 피를 뽑아 재검사를 했다. 결과는 같았다.

기억도 나지 않는 두 돌까지 극진한 사랑을 받던 시우는 그 이후로 줄곧 찬밥 신세였다. 우성 오메가 시원을 이미 낳았으니 대대로 남자 우성 오메가를 배출하는 집안의 대가 끊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뭔가 꼬여버린 조화를 가진 두 아들들을 보며 화영은 육감적으로 집안의 망조를 느꼈다. 그래서 더 시우를 구박한 것도 있다. 실패작은 볼 때마다 마음이 울컥하니 말이다.

쥐 죽은 듯 죄인처럼 지내야 했던 시우였지만 적어도 가난하진 않았었는데, 시우가 고등학교를 들어가고부터 가세마저 기울기 시작했다.

능력이 아닌 인맥으로만 비벼오던 아버지 태중의 사업이 시대의 흐름을 타지 못해 망했고 시우는 꽤나 좋은 대학에 합격하고도 대학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런 집안 사정보다 슬펐던 건 입학은 꿈도 꾸지 말라는 부모의 냉담이었다.

그때 시우는 입학 유예를 신청했다. 학교 측에서 1년간은 입학을 유예해 줄 수 있다고 알려왔기 때문이다. 꾸지 말아야 할 꿈을 꿔버린 시우는 피 터지게 아르바이트를 했다. 시우가 스스로 등록금을 번다고 해도 대학을 보낼 마음이 추호도 없는 부모였는데 저한테 관심과 지원이 없으니 알아서 하면 되겠지 생각한 시우였다.

시우에겐 관심이 없지만 돈엔 관심이 많은 가족들이거늘, 여태까지는 미성년자라 스스로 돈을 벌지 않았으니 그 사실까지는 알 수 없었다. 순진한 스무 살이었다.

그렇게 1년 동안 밤낮없이 일해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때워 가며 모은 돈, 시우의 대학 등록금은 화영에게 빼앗겨 맞선에 나가는 시원의 명품 수트를 사는데 쓰였다.

차라리 가족의 생계비로 쓰였다면 그렇게까지 슬프진 않았을 거다. 그런데 고작 정장 한 벌. 우성 오메가 시원이 결혼을 잘하는 것만이 집안의 희망이라고 믿는 화영에게 그 정장은 투자였지만, 그건 제 작은 아들의 스무 살 한 해였다.

형 시원이 명품 수트를 입고 맞선을 보러 가던 날이었다. 후드 티 하나를 소매가 다 헤질 때까지 입는 시우는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나가 손님이 잘 오지 않는 새벽에 홀로 카운터를 지키며 펑펑 울었다.

수도꼭지라도 튼 것처럼 눈물이 주룩주룩 흐르는 와중에 손님이 들어왔다. 시우는 손님의 등장에 황급히 눈가를 수습했다.

“뭐야, 오메가 아니네.”

도재는 혼잣말로 낮게 읊조렸다.

새벽공기를 마시고 싶어 잠시 나온 산책, 유리창 너머로 질질 짜고 있는 알바생이 보였다. 더럽게 청승맞고, 더럽게 처연했는데 더럽게 꼴리는 얼굴이었다.

‘사내새끼가 저런 얼굴이면 오메가가 아닐 리 없는데.’ 도재가 창 너머로 시우를 보며 생각했다. 그런데 보통 오메가는 이렇게 밤늦은 시간에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으니 의아했다. 주변에 말리거나 신고해 줄 사람도 없는 이 새벽에 러트가 온 알파라도 들이닥치면 강간은 순식간이었다.

깡다구 좋은 오메가라 생각하며 도재는 평생 들어가 볼 일 없던 편의점으로 홀린 듯 들어갔다. 예상과는 달리 아무런 페로몬도 느껴지지 않았다. 쟤가 어떻게 베타지?

대충 탄산수 한 병을 집어 든 도재가 카운터로 갔다.

“왜 울어?”

초면에 다짜고짜 반말인 도재였지만 시우는 큰 키와 떡 벌어진 어깨에 위압감을 느껴 이를 지적하지 않기로 했다. 척 보기에도 알파의 체격이었다. 알파들 틈바구니에 던져 놓아도 가장 튈 것 같은 손님, 도재를 슬쩍 확인하고 시우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알파인 것도 갑, 손님인 것도 갑, 갑질을 당하기 전에 알아서 기어야 했다. 시우는 주눅 든 목소리로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그냥 빨리 계산이나 해주고 보내고 싶었다.

“그니까 그 아무것도 아닌 게 뭐냐고.”

집요한 남자였다. 대충 핑계 댈 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너무 울어 뇌가 퉁퉁 불었나 보다. 거짓말이 떠오르지 않아 시우는 그냥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근데 나 왜 울지?’ 잠시 멍하니 생각했다.

집이 망해서도, 가난해서도, 대학 등록금을 낼 수 없어서도 아니었다. 시우는 사랑받지 못해 울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굳이 입 밖으로 내뱉어 다시 한 번 상기하고 싶진 않았다.

“대학 등록금이 너무 비싸서요.”

“얼마 필요한데.”

“5백만 원이요.”

“베타는 영 맛이 없는데 넌 얼굴이 맛있네. 미자는 뗐지? 뒷구멍 따여 본 적 없으면 그거 나한테 팔아.”

명백한 성희롱인데 너무 당당하게 하니 어이가 없어 화도 안 나는 시우였다. 시우는 도재가 생각 있으면 연락하라며 던져주는 명함을 받아 들고 넋이 빠진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도재는 시우의 당황스러운 기색 같은 걸 배려해줄 위인이 아니라 계속해서 저 할 말만 했다.

“하룻밤이면 내일 당장이라도 5백이 생기는데 남는 장사야 꼬맹아. 네가 어려서 세상 물정을 아직 모르나 본데, 원래 씹 뜨는 거 한 번에 오십도 안 줘. 베타를 누가 5백 주고 따먹어. 이쁜이가 특별히 이쁘니까 선심 쓰는 거다? 연락해.”

할 말을 마친 도재는 계산된 탄산수를 카운터에 놓고 편의점을 나섰다. 폭언이나 마찬가지인 소리를 듣고 얼이 빠진 주제에 프로페셔널한 편돌이 시우는 ‘손님 물건 놓고 가시는데요!’ 하며 도재를 붙잡았다.

너나 먹으라는 뜻으로 대충 손을 훠이훠이 저은 도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레몬맛 탄산수, 내가 좋아하는 거네.’

밸도 없는 시우는 도재가 버리고 간 탄산수를 보면 저 따위 생각을 했다. 삶이 고달픈 애정 결핍 환자에게는 그게 어떤 경로였든 제가 좋아하는 것을 받았다는 것 자체가 작은 설렘이었다. 그리고 시우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인지할 때마다 우울해졌다.

시우는 제 얼굴이 싫었다. 사랑받지 못한 아이의 얼굴에서 보이는 그늘이 너무도 깊게 드리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한도재 대표라고 쓰여 있는 명함을 빤히 쳐다보다가 하룻밤 화대로 제 등록금을 주겠다는 사람이 궁금해 핸드폰을 들어 그의 회사를 검색해보았다. 회사에 대한 정보보다도 한도재라는 사람에 대한 기사가 더 많이 나왔다.

도재는 세계 각지의 노른자 땅이란 땅은 모두 상속받은 부동산 재벌이었다. 도재의 가문은 서울의 강남, 도쿄의 긴자, 뉴욕의 맨해튼, 런던의 첼시 등 속칭 부자 동네라고 일컫는 곳의 부동산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세계 어디를 가든 한 가(家)의 빌딩이 없는 곳이 없었으니 그 위세는 실로 대단했다.

대대로 우성 중에서도 극우성인 씨가 끊이지 않고 이어온 가문이었으며 그 부가 쌓이고 쌓여 이제는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돈이 벌리는 집안이었다. 그래서 도재의 부모님은 젊은 나이에 아들에게 웬만한 재산을 전부 넘겨준 뒤 섬을 하나 사들여 자기들만의 왕국을 지어 살고 있었다. 열성 오메가나 베타를 데려와서 결혼하겠다 하는 아침드라마 같은 짓만 하지 않는다면 딱히 간섭하지 않을 부모였다. 극우성 알파 도재의 하늘을 찌르는 오만함이 그런 얼토당토않은 일은 걱정할 필요도 없게 만들어 주었지만 말이다.

굳이 일을 할 필요는 없었지만, 더럽게 잘 굴러가는 머리를 가진 도재는 부동산 투자회사를 하나 설립해 놓고 심심풀이로 운영 중이었다.

시우는 포털 사이트에 한가득 나오는 도재에 대한 정보가 신기했다. 인물 소개에 ‘기업인’ 정도로 한 줄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방금 그 싸가지 더러운 어른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재벌이라니, ‘와, 나 셀럽 만났네.’ 하고 철부지 같은 생각을 했다.

***

도재는 집에 들어와 침상에 누워 시우를 생각했다. 연락이 올까, 안 올까. 시우의 반응이 좀 신기했다. 우성 알파의 페로몬을 느끼고 본능적으로 설설 기게 되는 오메가도 아니면서, 처음 보는 사람한테 창부 취급을 당해도 당황하기만 할 뿐 기분 나쁘다는 티도 내지 않았다. 그 와중에 물건을 놓고 간다며 챙겨주질 않나. 시우는 무시당하는 게 익숙해 보였다.

대학 등록금이 없어 울었다는 어린애를 딱하게 여기는 마음 같은 게 들 리 없는 도재는 시우의 말을 들었을 때 돈 없고 예쁜 애 만큼 데리고 놀기 좋은 애가 없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놀려 먹고 싶어 5백도 비싸게 쳐주는 거라는 말로 시우를 짓밟았지만, 사실 5천이 필요하다면 5천도 주었을 것이다. 도재는 꼬맹이에게서 전화가 오지 않으면 몸값을 좀 올려줘 봐야겠다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

시원은 시우의 돈으로 산 수트를 입고 나간 맞선에서 퇴짜를 맞았다. 그 혼처는 화영이 양보할 수 있는 마지노선에 있는 집안이었다. 10대 기업 안에 들지 않으면 안 된다 콧대 높던 시절도 있었지만 많이 양보해 내실 있는 중견기업의 차남과 알음알음 인맥을 통해 어렵사리 마련한 자리였다.

‘남자 우성 오메가를 보내준다는데 두 팔 벌려 환영이겠지.’

화영과 시원은 벽지에 곰팡이가 슨 좁고 낡은 빌라의 월세도 제대로 못 내는 신세임에도 아직 주제 파악이 덜 된 상태였다. 시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잘 보이겠다며 청담동 샵에 들러 헤어스타일링을 받고 약속 장소에 먼저 나가 기다렸다. 그런 시원을 보자마자 맞선남이 던진 말은 ‘우성 오메가라더니 열성만도 못하네.’ 였다.

시원의 형질이라면 당연하게 따라오는 특출난 미모도 없지, 집안은 가난에 빌빌 거리며 살지, 그냥 애 낳을 때 우성 낳을 확률이 조금 높다는 것 하나 말고는 내세울 것이 하나 없는 게 현실이었다. 그의 눈에 시원은 시원의 아버지 태중이 사업을 말아먹으며 진 빚을 갚아주면서까지 데려올 가치가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화영과 태중, 그리고 시원까지 이 꽉 막힌 집구석은 시우 빼고 그 누구도 이러한 집안의 현실을 인정하지 못했다.

사실 조금만 더 눈을 낮추면 갈 수 있는 혼처는 많았다. 판, 검사나 의사 등 수입이 좋은 전문직과의 선 자리는 많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다만 열성 알파도 하는 단순 판, 검사나 의사에게 귀하디 귀한 남자 우성 오메가를 보낸다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

아르바이트를 마친 시우가 고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갔을 때는 이른 아침이었다. 맞선에서 까이고 자존심이 상한 시원이 온갖 성질을 부리며 벗어 던져 놓은 정장이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구겨진 천 쪼가리를 본 시우의 마음에서 무언가 울컥 치고 올라왔다.

그냥 이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라면 모르겠지만 시우는 자꾸 도재 생각이 났다. 그는 이 모든 걸 없던 일로 만들어 줄 능력이 있었고, 시우 같은 어린양이 알아서는 안 되는 유혹적인 사람이었다.

시우는 외투도 벗지 못한 채로 우두커니 서서 생각했다.

눈 한 번만 딱 감았다 뜨면 손에는 5백이 들려 있을 거고, 이건 내가 1년 동안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았던 그 5백이다 생각해 버리면 그만 아닐까. 그럼 이번엔 바보처럼 빼앗기지 않고 학교로 내달려 등록 먼저 해 버려야지.

유혹에 빠지기 쉬운 어린양은 주머니 속 도재의 명함을 꽉 움켜쥐었다. 시우에겐 잘못된 것임을 알려 줄 어른이 없었다. 화영과 태중은 시우가 밖에 나가 뒷구멍을 팔던 신장을 팔던 개의치 않을 테니 말이다.

잠에서 깬 시원이 집에 들어온 시우를 보고는 잘 걸렸다 하고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시발 너 같은 베타가 집안에 태어나서 망조가 들었다, 재수 옴 붙은 새끼랑 한 집에 사니 나까지 재수가 없다. 알파 앞에서만 조신해지는 시원은 성질머리마저 예쁘지 못해 늘 이런 식으로 동생에게 스트레스를 풀곤 했다.

익숙한 일이었지만 시우는 그대로 뒤를 돌아 집을 뛰쳐나왔다. 순간 도재를 향한 간절함이 너무 커져 버렸기 때문이다.

시우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도재의 번호를 눌렀다. 전화를 받은 도재는 벌벌 떠는 목소리가 우스워 피식 웃었다. 그러고선 ‘30분 내로 H호텔.’ 한마디를 했다. 전화를 걸어 ‘안녕하세요.’ 인사도 겨우 한 시우에게 도재는 장소를 고지해주고는 바로 끊었다.

얼마 후 화려한 샹들리에가 달린 호텔 로비에, 겨울치고는 추운 차림을 한 시우가 쭈뼛쭈뼛 서있었다. 낡은 외투는 방한의 기능이 없어 보였다. 시우를 발견한 도재는 꼴도 보기 싫은 초라한 옷차림에 시우를 빠르게 룸으로 이끌었다. 벗겨 놓으면 볼 만할 것 같아 빨리 벗겨 버리고 싶었다.

“너 몇 살이야?”

“올해 스물하나요….”

“아다 맞아? 거짓말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박아 보면 알아.”

“네…, 처음 맞아요.”

“근데 너 생각보다 되게 걸렌가 보네? 아침부터 섹스하겠다고 불러내고.”

시우는 그렇지 않다 한마디 항변도 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푹 숙였다. 비 맞은 강아지 마냥 주눅 들어있는 꼴이 도재의 가학심을 부추겼다. 그래서 그는 딱 봐도 아무것도 몰라 보이는 순진한 애새끼를 닳고 닳은 창부 취급 하며 모욕했다.

시우는 마음이 난도질을 당해도 화내지 않았다. 이미 오랜 세월 동안 혈육들에 의해 찢어져 있던 속이라 완전한 타인이 주는 상처 정도는 시우에게 별 타격을 주지 못했다.

폭언을 들으면서도 화를 내거나 울지 않고 뻣뻣하게 서있기만 하는 시우, 그런 그의 몸이 잘게 떨리는 것에 도재는 발정했다. 의연한 척 하는 아이는 유약했다. 그리고 그 유약함은 도재의 성욕을 끌어올렸다.

“씻어.”

“네.”

섹스 자체가 처음이긴 했지만 그 행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시우의 집구석은 결혼하고 섹스해서 애 낳는 거, 그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집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이론적으로는 들은 바가 많았다. 물론 시우에게 하는 말은 아니었지만, 아무리 시우를 식구로 끼워주지 않는다고 해도 한 집에서 보고 듣는 게 있으니 시우는 베타이지만 뒤로 하는 섹스가 익숙했다. 그놈의 남자 우성 오메가 타령이 끊이지 않는 집이었으니 말이다.

시우는 샤워를 하며 대충 각오 비슷한 것을 다졌다. 별거 아닐 거야. 스스로를 다독이며 긴장한 마음으로 욕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베타가 뒤로 애널 섹스를 한다는 건 아주 큰 별 거라는 걸 깨달았다. 특히나 좆이 크다고 소문이 자자한 우성알파와의 애널 섹스는 말이다.

옷을 벗겨 놓은 시우는 까다로운 도재의 안목을 이백 프로 만족시키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 미모를 제 멋대로 주무를 생각에 아래로 피가 몰린 도재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섹스라는 행위를 밀어붙였다.

그간 수많았던 하룻밤 유희 상대에게 그랬듯 제 마음대로 굴었다. 그 마음대로라는 것에 결코 젠틀맨이 되고픈 마음 같은 건 없었다. 시우가 오메가였다면 도재가 풀어내는 페로몬에 발정해 뒤라도 젖어 들 텐데, 베타인 시우에게 천연 윤활제 따위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제 첫 경험 상대가 친절히 오래도록 뒤를 풀어주는 상대도 아니었다.

시우는 피가 나도록 제 입술을 깨물었다. 또 다른 고통을 만들어 아래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조금이나마 잊어 보기 위함이었다. 이를 본 도재가 시우의 턱을 눌러 입을 벌리게 한 뒤 제 혀를 밀어 넣었다.

시우는 이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도재가 해주는 키스가 좋았다. 사랑이라고는 없는 자신의 첫 경험에 아주 조금이나마 애정이 느껴지는 행위가 키스인 것 같아서였다.

찢어 죽여도 안 들어갈 것 같던 구멍에 기어코 박아 넣은 도재가 허리를 슬슬 움직이며 말했다.

“시발, 막대기 같고 존나 맛없다 애기야.”

눈물범벅이 된 시우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도재는 무자비한 허리 짓을 자행했다. 시우의 맛있는 얼굴 때문일까, 도재는 맛없다는 사람치곤 시우가 까무러쳐 기절하듯 잠들어 버릴 때까지 시우를 놓아주지 않았다.

***

샤워를 마치고 나온 도재는 잠든 시우의 옆에 천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을 놓아두었다. 페로몬도 없는데 시우에게서 나는 보드라운 체향이 퍽 마음에 들었다. 잠든 얼굴도 참 맛있게 생겼다는 평을 내리며 도재가 호텔 방을 나섰다.

한 번 먹었으니 미련 없이 돌아서야 하는 게 맞는데 왜인지 모르게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창부 옆에 누워 잠을 청하는 한도재 기준 미친 짓은 하지 않았다. 예뻐서 정 생각난다 싶으면 한 번 더 따먹지 뭐, 도재는 그 정도로 제 마음을 갈무리 지었다.

시우가 눈을 떴다. 분명 아침이었는데 일어나 보니 창밖이 어두웠다. 낯선 호텔 방에서 홀로 눈을 뜨는 건 꽤나 쓸쓸한 일이었다. 핸드폰을 들어보았다. 밤샘 알바를 끝낸 아들이 아침에 집에서 그렇게 뛰쳐나왔는데 연락 한 통 와 있지 않았다. 어째 섹스로 욱신거리는 몸보다도 마음이 더 아팠다.

시우는 이내 제 옆에 놓인 천만 원짜리 수표를 발견했다. 시우에게는 상상도 하기 힘든 액수였기에 처음엔 백만 원만 주고 간 줄 알았다. 베타라 맛이 없어서 백만 원만 준 건가…? 그런 생각을 하다 숫자가 아닌 글자를 보고 깨달았다. ‘일천만 원’

‘에이 설마.’

잠에서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헛것을 보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아무리 다시 봐도 여전히 천만 원이었다. 손에 들고 있기도 무서운 액수였다.

시우는 도재에게 조심스레 전화를 걸었다.

“왜.”

“저…, 5백만 원만 주세요.”

“귀찮아. 그냥 가져.”

“…….”

“왜? 불만이야? 불만이면 거스름돈 가지고 지금 집 앞으로 와.”

도재는 스스로 한 말에 코웃음 쳤다. 5백만 원이 없어서 몸을 판 애한테 당장 5백만 원을 거슬러 달라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린지. 도재는 ‘불만 없어요. 그냥 가질게요.’ 라는 답이 들려오기를 기다렸다. 그게 당연하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은행이 닫았을 시간이라서요. 내일 거슬러 드릴게요.”

그저 놀려먹기 위해 던진 말에 진짜 거스름돈을 들고 올 기세인 시우가 웃겨 도재는 혼자 풉, 웃음을 터뜨렸다. 어디까지 하는지 골 때리는 꼬맹이의 재롱이 보고 싶어 어디 그럼 그래보라며 제 집주소와 약속시간을 문자로 남겼다. 먹고 튀어도 되는 돈을 진짜 가지고 올까? 시우는 도재에게 자꾸만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였다.

***

제 손에 천만 원이 있다는 생각에 뜬눈으로 밤을 새운 시우였다. 심지어 5백은 제 것이라도 나머지 5백은 아니었다. 이 종이 한 장을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도재에게 주기로 한 5백은 어쩌나 상상하니 심장이 쿵쾅거렸다.

바지 주머니에 깊숙이 수표를 접어 넣은 시우는 아무렇지 않은 척 집에 들어갔다. 폭력 같았던 섹스에 온몸이 두드려 맞은 듯 아팠는데도 편히 눕지 못하고 제 낡은 청바지를 갈아입지도 않은 채 다음날 아침이 밝기만을 기다렸다.

지난번엔 대학을 등록해 다니겠다는 것 정도는 부모님께 미리 상의하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그리하여 시우는 제가 1년간 5백만 원을 모았다는 사실을 화영에게 털어놓았고 그 바람에 그대로 돈을 빼앗겨 버렸다.

손 벌리지 않고 제 힘으로 학교를 다니겠다는 시우의 대견한 말에 화영은 웃기지도 않은 소리라고 했다. 집안 꼴이 이 모양인데 팔자 좋게 대학생이 되고 싶냐며 모진 말을 뱉었다.

너무 아픈 교훈을 얻은 시우는 자신이 얻은 천만 원에 대하여 가족들에게 일언반구 말 한마디 꺼내지 않았다. 시우에게 천만 원이 있다는 건 가족 중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다행히 시우는 다음날까지 무사히 천만 원을 지켜낼 수 있었다.

그리고는 아침부터 무작정 학교로 향했다. 계좌이체 같은 걸 하는 것도 무서워 눈앞에서 무사히 등록되었음을 확인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등록금 납부 안 하셔서 입학 취소되셨는데요.”

“네? 오늘이 마감일 아닌가요?”

“어제였습니다.”

시우는 손을 덜덜 떨며 날짜를 확인해보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제발 아니기를 바랐지만 애석하게도 직원의 말이 맞았다.

밤 열두 시부터 새벽 내내 아르바이트를 하니 날짜가 넘어가는 경계가 허물어져 아주 제대로 착각했던 것이다. 실제로는 14일이어도 계속 깨어있던 시우에겐 13일 밤, 13일 새벽이었다.

언제부터 날짜 개념이 꼬여서 오늘에까지 다다랐는지 모르겠지만 그건 중요치 않았다. 그냥 무슨 짓을 해도 대학 갈 팔자는 아니라는 화영의 말이 맞았다는 것이 중요했다. 시우는 비틀비틀 간신히 학교를 빠져나와 길바닥에 무너져 내렸다.

근래에 들어 하도 울어서 이젠 나올 눈물도 더 없을 것 같았는데 시우는 길에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다. 울만큼 울고 당연하게 혼자 털고 일어났다. 일으켜 주는 이, 손 내밀어 주는 이 따위는 원래부터 허락되지 않았기에 시우는 익숙하게 자신을 추슬렀다.

시우는 지하철역에 들어가 대충 찬물로 세수를 한 뒤 도재의 집 앞으로 갔다. 약속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 아직 한참이나 남은 약속 시간이었지만 마땅히 할 게 없었다. 카페라도 가기엔 돈이 아까웠다.

조금 일찍 도착했지만 시간을 당길 수 없겠냐는 연락 한 번을 해볼 생각도 들지 않았다. 바쁘실 테니 어차피 안 바꿔줄 것 같았다. 추운 겨울날 별로 따뜻하지도 않은 옷을 입은 시우가 대궐 같은 집의 대문 앞에 쪼그려 앉아 그저 멍하니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렸다.

배 집사가 대문 앞에 쪼그려 앉아 있는 낯선 이를 발견하고는 도재에게 알렸다. ‘대충 알아서 쫓아내지 뭘 그런 걸 일일이 말해.’ 심드렁하게 대꾸하던 도재가 혹시나 하고 떠오른 생각에 배 집사에게 잠깐 기다리라 일렀다.

거실의 TV로 집안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CCTV 화면을 볼 수 있었다. 설마 했던 꼬맹이가 맞았다. 도재는 시우의 미련함에 혀를 찼다.

“내가 나갈 거니까 신경 꺼요.”

도재는 홈웨어 차림 그대로 외투만 챙겨 입고 집 밖으로 나섰다. 뜻 모를 미소가 얼굴에 걸렸다. 비열해 보이기도 했고 흐뭇해 보이기도 했다.

생각지도 못한 도재의 등장에 시우가 깜짝 놀라 일어섰다. 안 그래도 너무 추웠는데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넌 어제 몸 팔고 천만 원이나 번 애가. 코트나 패딩을 좀 사 입는 게 어때?”

“저기…이거 돌려 드릴게요.”

시우는 혹시나 잃어버릴까 깊숙이 넣어두었던 구겨진 수표를 꺼내 건넸다. 수표를 내미는 시우의 작은 손이 차갑게 굳어 있었다. 체온이 높은 우성 알파의 따듯하고 큰 손이 내밀어진 작은 손을 감쌌다.

더럽게 작고, 더럽게 차가운 손을 느끼며 도재는 생각했다.

‘미련한 것.’

시우는 그 따듯한 손이 뭐라고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괜히 눈동자를 굴리며 입천장을 혀로 간질였다. 꼴사나운 눈물 바람은 피하고 싶었다.

“왜 다 돌려줘.”

“등록금이 필요 없어져서요. 저…이제 몸 판 거 아니에요.”

창부 취급을 당해도 상처받지 않은 척 했지만 대학이라는 목적이 사라진 마당에 진짜 창부가 되고 싶진 않은 시우였다.

“안녕히 계세요.”

공손하게 허리 숙여 인사한 시우가 제 손을 잡아주던 도재에게 수표를 쥐어주고 떠났다. 도재는 멀어져 가는 시우의 뒤통수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화대를 받지 않았으니 시우의 말대로 몸을 판 것은 아니었다. 강간이나 다름없는 첫 경험을 해놓고 억울하지도 않은가? 도재는 자존심 때문에 그러는 것 같지도 않은 시우가 의아하기만 했다.

쟤가 원하는 건 뭘까, 값을 얼마까지 올리면 팔까. 성격은 흥미가 생기고 얼굴은 구미가 당겼다. 베타 주제에 말이다.

***

시우의 일대기가 담겨 있는 서류를 훑어보며 도재는 이 예쁜 장난감을 하루라도 빨리 제 집으로 데려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언제 자살해도 이상하지 않겠다 싶을 만큼 팔자가 심히 좆같았기 때문이다. 좀 더 가지고 놀고 싶은데 죽어 버리면 안 되니까.

시원, 화영, 태중에 대한 정보들도 정리해 온 비서는 왠지 모르게 신나 보이는 도재에게 서류를 건넸다. 허영심과 우매함이 그득그득 엿보이는 그들의 이력을 훑으며 도재는 씨익,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시우의 가족들을 이용하면 시우를 제 집에 들여 앉히는 건 일도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가족들의 사진을 훑었다. 화영과 태중은 지금은 중년임에도 젊었을 적 얼굴이 꽤나 잘났을 거라고 그려지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시우 같은 애를 낳은 사람들이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다음에 보이는 사진은 시우의 형, 시원이었다. 혼처에 목을 매는 우성 오메가를 보며 도재가 중얼거렸다.

‘얜 시발 이 따위로 생겨서 뭣 하러 우성 오메가를 해.’

“나도 이제 나이도 있고 슬슬 결혼해야겠지? 우성 오메가랑.”

옆에서 대기하던 비서에게 도재가 질문을 던졌다. 비서는 하나도 진지하지 않은 질문임을 알 수 있었기에 제 상사의 결혼 상담을 해 주겠다, 나서지는 않았다. 그저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되물으며 업무 지시를 내려달라 기다릴 뿐이었다.

“이 가족이랑 컨택 해서 약속 잡아 놔. 상견례 해야지.”

회사도 취미로 운영하시는 한도재 대표님은 또 다른 취미를 만들 계획에 착수했다.

***

태중과 화영은 도재의 비서로부터 온 연락에 너무 놀라 기절할 뻔했다. 국내에서의 위치는 논할 가치도 없이, 도재는 세계적인 수준의 재벌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자란 한 가(家)의 아들이 한국에 들어와 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감히 상상도 해보지 못한 혼처였다.

우성 오메가인 시원과 혼담을 논의하고 싶으니 만나자는 연락에 화영과 태중은 보이스피싱을 의심할 정도였다. 하긴, 도재의 속이 썩 순수하지는 않으니 보이스피싱이라고 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장인, 장모 대접을 받을 생각일랑 하지도 않는 게 좋을 텐데, 안타깝게도 화영과 태중은 김칫국을 사발로 들이킨 뒤 약속 시간에 맞추어 도재의 집으로 향했다.

혼담이 오가는 가족을 초대하는 것이니 혹시 댁으로 차량을 보내야 하는지 비서가 물었지만 도재는 차갑게 거절했다. ‘불러주는 것만도 감사해야 하는 그 따위 집안 모셔오라고 차까지 보내줘야 하나?’ 싸가지가 하루이틀 없는것이 아닌 상사였기에 비서는 토를 달지 않았다.

주제넘게 리무진이라도 집 앞에 대기시켜줄 줄 알았던 시원네 식구들은 실망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택시를 잡아탔다.

국내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왕국 앞에 내린 가족들은 일제히 입이 떡 벌어졌다. 성인지 집인지 구분도 안 되는 곳이 눈앞에 펼쳐졌다. 꽤나 잘 산다고 할 수 있던 시절에 왔어도 위압감에 기가 잔뜩 눌렸을 법한 집이었다.

새 구두를 신은 시원과 불편한 하이힐을 신은 화영이 대문부터 집까지 한참인 거리를 힘들게 걸어 들어갔다. 이번에도 시우의 코 묻은 돈이 시원의 새 구두를 사는 데 들어갔지만 시우는 참석하지 않았다. 굳이 집안의 겉절이 같은 존재인 시우까지 데리고 갈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도재와 시우 사이의 일을 모르는 가족들은 시우 때문에 이 집에 발이나 들여 볼 수 있었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

가도 가도 끝이 안 보이는 정원을 지나며 시원은 발이 아프네, 춥네 투덜대기 바빴다. 화영은 옆에서 시원의 행동거지를 조심시켰다. 페로몬은 이 정도로 풀어라, 표정은 어떻게 하고, 몸가짐은 어떻게 하고 마치 세자빈 간택이라도 내보내는 것처럼 잔소리를 해댔다.

기적 같은 도재의 연락이 없었다면 남자 우성 오메가를 밑지고 파는 치욕을 피할 길이 없었기에, 화영은 매우 간절했다. 그리고 화영만큼이나 시원도 간절했기에 시원은 투덜대는 와중에도 유혹적인 페로몬을 둘렀다.

태중은 드넓은 정원을 관리하는 고용인들이 골프장에서 사용하는 카트를 타고 다니며 자신들의 일을 하고 있는 걸 보았다. 제 아내와 같이 주제 파악이 심히 안 되는 꼰대 태중은 그 고용인들을 마치 제가 고용한 아랫사람 대하듯 손짓하며 불렀다. 막무가내 아저씨의 전형을 보여주며 곧 이 집 식구 될 사람들이니 자신들을 태우고 집 앞까지 데려다 달라 명령하듯 말했다.

식구가 될 사람들이었다면 애당초 이렇게 걸어가게 두지도 않았을 텐데. 직원은 어리둥절했지만 어려운 일도 아니니 군말 없이 태워주었다.

샹들리에가 드높이 걸려있는 거실에서 가족들의 모습을 화면으로 확인하던 도재는 태중의 웃기지도 않은 짓거리에 조소를 흘렸다. 대문 앞에 쪼그려 앉아 하염없이 기다리던 시우가 생각났다. 한 가족인데 어찌 태도가 저리도 다른지. 특별히 예쁘고, 특별히 불쌍한 시우를 하루 빨리 제 맘대로 주무르고 싶었다.

“우리 처남 될 이쁜이를 못 보네 오늘.”

시우가 빠져 있는 세 식구를 보며 도재가 혼잣말을 흘렸다. 손님들이 곧 도착할 것 같아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골프 카트의 도움으로 한겨울에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도착하는 모습은 면한 식구들이 집으로 들어서서 배 집사의 안내를 받았다. 테이블 가장 상석에 앉은 도재는 응접실로 들어오는 시우의 가족들을 보면서도 대충 앉으라는 손짓만 할 뿐, 자리에서 일어나 제대로 된 손님맞이를 해주지 않았다.

‘예쁜 애라도 달고 와야 환대를 하지, 쯧.’

시우라는 예쁘고 흥미로운 장난감만 없었어도 상종할 일이 없는 가족들이었기에 처가 될 집이라고 예우를 차리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대놓고 무시하는 게 느껴지는 행동이었다. 그에 식구들은 조금 당황했지만 그들은 강자에게 너무 약한 사람들이었다. 굽신굽신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라는 인사를 하며 도재가 앉으라는 쪽으로 가 조용히 착석했다.

시원은 조신해 보이기 위해 태중과 화영 뒤에 고개를 살짝 숙이고 서있다 가장 끝에 얌전히 자리 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원이 작정하고 두른 페로몬은 도재에게 꽤나 가까이 닿았다.

억제제를 털어먹은 오메가의 아주 미약한 페로몬도 기민하게 느낄 수 있는 극우성 알파 도재는 시원의 페로몬을 느끼며 생각했다. 그래도 우성이라 그런지 천박한 페로몬을 흘리진 않는다고 말이다. 도재는 나쁘지 않은 향기를 풍기는 시원에게 자연스레 눈길이 갔다.

그리고는 ‘시발, 섰던 좆도 식겠네.’라는 감상을 내렸다.

열성 오메가들 사이에 놓고 보아도 떨어지는 외모, 비렁뱅이 같은 집안. 아무리 귀하대도 남자 우성 오메가가 세상에 서시원 하나인 것은 아니다. 시우가 아니었다면 시원은 도재의 첩도 되지 못했을 것이다. 첩이 다 뭐야, 아무거나 먹지 않는 까다로운 식성의 한도재는 서시원 같은 존재를 단순 원나잇 상대로도 먹지 않았을 것이다.

“어쩐 일로 뵙자고 한 건지 알고 계시겠죠.”

도재가 시원에게서 시선을 거두곤 태중과 화영을 보며 물었다. 태중과 화영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마치 황제에게 진상품이라도 내놓는 모습이었다.

“네, 간략히 들었습니다. 저희 시원이를 짝으로 생각해주신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우리 시원이가 아직 어려서 뭘 잘 모를 겁니다. 부족하겠지만 너그럽게 보살펴 주세요.”

올해 대학을 졸업한 스물 넷 시원은 인생을 오직 성공적인 결혼을 위해서만 살아왔다. 대부분 우성들로 이루어진 상류층 가문의 자제들은 빠르면 고등학교, 늦으면 대학 재학 중에 이미 정략결혼의 상대가 있었다. 그리고 약혼한 오메가가 대학을 졸업하면 식을 올렸다.

따라서 시원은 상류층의 중매시장에서는 결코 어린 편이 아니었다. 화영은 이를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우리 시원이가 어려서’ 라는 사족을 붙였다. 진짜 내세울 게 없는데 팔기는 팔아야 하는 영업맨의 모습처럼 보여 도재가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화영은 도재가 시큰둥하자 시원이 얼마 전에 졸업식을 했다며 시원이 미대를 나왔음을 어필했다. 우성 오메가는 학벌을 위해 대학은 나오지만 종착역은 무조건 현모양처인 삶이 다반사였다. 그래서 보통 미술이나 음악, 발레 등을 시킨다. 상류층 우성 알파 가문에서 선호하는 며느리의 전공이기 때문이다. 딱히 재능이 없어도 입시에 돈을 쏟아 부어 보내는 편이었다.

시원도 딱 그 케이스였고 현모양처라는 종착역 말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 삶이었다. 그래서 미대를 나왔지만 졸업장만 간신히 딴 수준이었고 이걸 업으로 삼아 돈을 벌겠다는 뜻으로 그림을 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탁월하게 남다른 예술적 감각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매년 미대 졸업생이 한 둘도 아닌데 그것도 자랑거리라고 잘도 쥐어짜냈다. 사실 그마저도 집안 사정이 기울면서 빚을 내가며 간신히 졸업시켰다.

도재와 결혼을 하면 그 빚은 어차피 도재의 재력을 빌어 정리할 것이다. 고로 시원의 대학 졸업장은 도재가 사준 셈이 된다는 뜻이다. 그런 시원의 미대 졸업장을 도재에게 자랑거리로 내세우다니, 웃기지도 않았다.

도재는 더 이상 화영과 태중이 떠드는 말을 별로 듣고 싶지 않아 제 할 말을 시작했다.

“기분 나쁘게 들리실 수도 있지만 함부로 사람을 들일 수는 없어 제가 미리 조사를 좀 했습니다.”

“그럼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시원 씨 조건은 저희 부모님께 인사시키기엔 턱없이 부족합니다. 뭐 부모님뿐만 아니라 지금으로서는 제 맘에도 전혀 들지 않는 상대이고요.”

도재의 돌직구에 시원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치기 어린 자존심이었다. 도재보다 못한 조건의 남자에게도 차여 놓고 여태껏 그 자존심이 남아있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희귀한 형질만 믿고 너무 오냐오냐 큰 것이 이 근거 없는 자신감의 근간이었다.

도재는 시원의 표정이 굳는 것을 보고는 위협적인 페로몬을 풀었다. 감히 너 따위가 기분 나쁜 티를 내냐는 경고였다. 흡 하고 숨을 참은 시원이 몸을 딱딱하게 굳히며 고개를 숙였다. 다시 복종하는 태도를 보이는 시원을 향해 도재가 페로몬을 갈무리했다.

도재는 마음만 먹으면 손 하나 까딱 하지 않고도 시원의 앞섶이 죄 젖어 들게 할 수 있었다. 거기서 더 나가면 참지 못하고 테이블에 제 성기를 비비는 추태까지도 보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부모님을 모시고 함께 한 이 자리에서 그런 민망한 꼴을 보이고 싶지 않다면 알아서 기어야 했다.

“그래도 뭐 흔치 않은 남자 우성 오메가이니 한 번 지켜보고 싶습니다.”

이는 혼인신고를 올리기 전 시원을 집에 들여 데리고 살며 안사람으로서 역할을 잘 하는지 지켜보고 싶다는 소리였다. 쉽게 말해 결혼 전 3개월의 인턴 기간 비슷한 것을 가지겠다는 뜻이다.

처가가 될 수도 있는 집이 거지같이 살고 있는 꼴은 도재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니 집안의 빚은 바로 정리해주겠다고 했다. 더불어 태중에게는 도재의 회사에 이사직 정도로 한자리 만들어 이사 직위에 걸맞는 임금을 매달 지급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회사로 출퇴근을 하거나 실제로 일할 필요는 없다고 설명했다.

대신 시원과 혼인하지 않기로 결정했을 때 그 특혜는 모두 ‘빼앗긴다’ 가 조건이었다. 이미 갚아준 빚을 다시 지게 하지는 않겠지만 시원의 부모님을 위해 마련해준 집이며 차, 그리고 일하지 않아도 매달 천만 원씩 지급되는 월급이 사라지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조건이기에 식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도재는 시우의 이야기를 꺼내었다.

“댁에 둘째아드님이 있는 걸로 압니다. 대학도 들어가지 않았던데 제 처가 식구 될 사람이 석박사는 못하더라도 고졸인 건 시우 군 흠이 아니라 제 흠이 되니 대학을 보내주겠습니다.”

도재는 시우를 데리고 살며 메인 수행비서의 보조 격으로 간단한 일을 좀 시키겠다고 했다. 학교 공부에 집중해야 하니 심부름 수준 밖에는 안 되는 일일 것이라 말하며 매달 월급 명목으로 처남의 용돈까지 챙겨주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시우에게 돌아갈 좋은 조건들은 별로 관심도 없는 식구들이었지만 그래도 도재의 제안은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몰락해가는 집안에 던져진 황금 동아줄 같은 제안이었다.

3개월 사이에 러트가 오든, 히트가 오든 둘 중 하나는 올 것이고 이 때 맞춰 임신을 시도하면 결혼을 못 하고 쫓겨날 리는 없을 거라 판단했다. 우매한 식구들은 그렇게 계약서에 지장을 찍었다.

***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집에 들어온 시우에게 다짜고짜 짐을 싸라는 화영이었다. 갑자기 이사라도 가는 건지 다들 짐을 정리하느라 바쁜 모습이었다. 시우는 어리둥절했다.

어째 다들 버리고 가는 게 더 많고, 옷가지나 몇 벌 단출하게 챙겼다. 시원은 도재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니 몸만 가면 되는 상황이었고 화영과 태중에게 제공될 고급 빌라도 이미 최신 가전과 가구가 전부 들어있기에 딱히 챙겨갈 건 없었다. 화영은 이 거지 같은 물건들을 바리바리 싸가지고 가면 부정이나 탄다며 가서 필요하면 새로 사자는 식이었다.

화영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을 못하는 시우에게 대충 설명해주었다. 형이 한도재 대표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불친절한 설명이었다. 시우는 그저 놀랄 뿐 도재의 의중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이 사건의 발단이 자신일 거라고 예상이나 할 수 있었겠나. 그저 형이 우성 오메가이니 결혼하려고 하나보다 생각했다. 도재가 집에 들어 앉혀 가지고 놀고 싶은 건 시우인데, 이 사실은 가족들도 모르고 시우 본인도 몰랐다.

시우는 저와 하룻밤을 보낸 한도재 대표가 제 형과 결혼한다는 것이 전부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했다. 나와 그런 일이 있었는데 마침 혼담이 오고 간 우성 오메가가 내 형이었다 정도로 상황을 정리한 시우였다.

가족들이 저와 도재 사이의 일을 전혀 모르는 눈치라 도재가 따로 언급하지 않았음을 알았다. 시우도 입을 다물고 얼마 있지도 않은 옷가지를 챙기기 시작했다.

‘폐 끼치지 말고, 시키는 일은 뭐든 싹싹하게 하고, 눈에 거슬리지 않게 평소에는 얌전히 찌그러져 있어라.’

화영이 시우에게 각별히 주의를 주었다. 주의를 주지 않아도 어련히 알아서 그렇게 할 시우의 성정을 몰라주는 엄마였다. 그래도 시우는 알겠다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대학을 보내줄 거라는 말만 머리에 맴돌았기 때문에 화영이 어떤 구박을 하든 괜찮았다.

시원과 시우가 도재의 집으로 들어가는 날, 좁은 골목에 위치한 시우네 낡은 빌라 앞에는 고급 세단 두 대가 대기 중이었다. 한 대는 태중 내외에게 제공할 차였고 한 대는 시원과 시우를 태우러 온 차였다.

‘우리도 기사를 좀 붙여주지.’

화영은 아들이 완전히 팔려가는 것도 아니고 살만한 물건인지 감평 당하러 가는 날에 그 따위 생각이나 했다. 비서는 제가 운전하고 온 차의 키를 태중에게 건넸고, 시원과 시우가 타고 갈 차의 앞좌석으로 옮겨 탔다.

기사가 시원과 시우의 짐 가방을 트렁크에 실어준 뒤 뒷좌석의 문을 열어주었다. 시원은 벌써부터 사모님이라도 된 양 시건방지게 서비스를 받았다.

비서는 그런 시원의 모습을 흘긋 보며 생각했다. 진짜 사모님이 되는 건 고사하고 똑똑하게 굴지 못해 3개월도 채 못 채울 것 같다고 말이다.

이어서 비서는 차의 문 쪽으로 딱 달라붙어 온전히 제 한 자리도 차지하지 못하고 앉은 시우를 보며 생각했다. 사모님이 베타가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제 상사가 환멸하는 이 거지 같은 집구석에 굳이 곱게 모셔오라 차를 보낸 이유가 시우였기 때문이다.

***

시우가 대문 앞까지만 와 보았던 집 안으로 들어섰다. 산책로와 찻길이 따로 마련된 드넓은 정원을 보며 든 생각은 ‘여기가 서울이 맞나?’ 였다. 뭐든 빽빽하게 들어찬 서울 바닥에서 이렇게 땅을 넓게 쓰는 건 청와대나 경복궁일 때만 가능한 일인 줄 알았다. 이곳에서 생활하게 될 거라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신혼부부 사이에 낀 불청객 같은 존재일 테니 여기서도 이전과 똑같이 눈칫밥을 먹어야겠지만, 집이 넓어 혼자 웅크리고 숨어 있을 공간이 많아 좋았다. 눈에 거슬리지만 않으면 굳이 찾아가면서까지 구박을 하진 않을 테니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제가 결혼해서 들어가는 집도 아니니 당연히 언제 쫓겨나도 할 말이 없었다. 제가 사는 곳이지만 ‘내 집이다’라는 정이 붙을 것 같진 않았다. 어차피 한 번도 내 집이 주는 안락함 같은 걸 느껴본 적이 없어 익숙했다.

결재할 것이 있어 서재에서 잠시 사무를 보던 도재가 시원과 시우가 도착했음을 듣고 서재를 나왔다.

시원이 먼저 환하게 웃으며 약간은 수줍은 듯 고개를 살짝 숙이고 ‘안녕하세요.’ 인사를 해왔다. 그리고는 뒤에서 쭈뼛거리고 서 있던 시우를 쿡 팔꿈치로 찔렀다. 시우는 시원과 도재의 눈치를 동시에 보며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도재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매형.”

처음 불러보는 호칭이 어색했다. 심지어 아직 진짜 매형도 아니었다. 성화에 못 이겨 억지로 내뱉은 티가 줄줄 흐르는 ‘매형’ 소리에 도재가 피식 웃었다. 귀여운 꼬맹이였다. ‘매형이랑 떡치는 처남이라니 존나 꼴리네.’ 도재는 거실 바닥에 시우를 엎어놓고 당장이라도 범하고 싶었다.

시우는 시원이 집사람 오디션이라도 보듯 평가를 당하러 온 거지 아직 결혼한 게 아니라는 자세한 내막까진 잘 모르고 있었다. 지난번 만남 자리에 함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영은서류상으로 정리를 나중에 할 뿐이지 결혼한 거나 마찬가지라는 뉘앙스로 시우에게 상황을 설명해주었고, 그러니 도재를 매형이라 부르게 시켰다.

한 서방, 여보, 매형 등으로 불러 일단 호칭부터 주입해 넣겠다는 화영의 아이디어에 희생된 시우였다. 태중과 화영은 도재가 다시 만나줄 일이 없으니 한 서방이라 부를 기회가 없었고, 애교 섞인 여보 소리l를 연습한 시원은 막상 도재를 다시 만나자 포스에 기가 죽어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결국 화영의 아이디어를 실천한 사람은 시우 하나가 된 것이다.

“그래. 어서 와, 처남.”

시원의 인사에는 대꾸가 없던 도재가 시우에게 웃으며 답했다. 웃었다기엔 피식, 조소에 가까웠지만 시원은 도재가 미소를 보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시우에게 기분이 나빴다.

늘 저에게 와야 마땅한 시선을 빼앗아 가는 동생놈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시우의 자존감을 밟아 놓았다. 베타 주제에 자기보다 빛이 나니 얼굴에 그늘이라도 좀 만들어 놔야겠다는 심보였다.

시원은 도재가 있으니 재빨리 굳었던 표정을 풀었지만 자기 덕분에 서시우 그 마뜩잖은 것까지 호강을 한다 생각하니 심사가 많이 뒤틀렸다. 이 호강은 다 시우가 만든 것인데 말이다.

도재는 한 명씩 응접실로 들어오라 일렀다. 시원과는 앞으로 꾸려가야 할 살림에 대해서, 시우와는 대학 진학과 앞으로 시킬 일에 대해서 대화를 좀 나누어야 했다. 시원이 먼저 들어가고 시우는 기다리는 동안 배 집사의 안내를 받아 앞으로 사용할 방을 구경하기로 했다.

시우가 사용할 방은 2층의 끝에 있는 방이었다. 방은 물론 널찍하고 쾌적했지만 평범한 학생이 사는 가정집의 방이라기보다는 호텔 방에 가까웠다. 방의 구성요소 중 침대가 80프로를 차지하고 있는 그런 호텔 방. 마치 ‘스탠다드 더블 룸’ 따위의 방 이름이 붙어있을 것 같았다.

방에 딸려있는 욕실마저 호텔 같았다. 어메니티로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는 목욕용품들이 각 맞춰 비치되어 있었고 수건도 손 닦는 수건, 얼굴 닦는 수건, 커다란 배스 타월까지 크기 별로 착착 개어져 있었다. 도재가 사용하는 1층을 제외하고 2층은 전부 손님방으로 준비되어 있던 공간이기 때문에 사실 정말 그냥 호텔이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배 집사는 시우에게 수건이나 휴지 등, 방에 필요한 기본 생활용품들은 매일 아침 하우스키퍼가 방을 청소하며 채워줄 것이니 걱정 말라 설명해 주었다. 또한 집에 상주하는 고용인들이 3층을 사용하고 있으니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부르면 된다고 일렀다.

시우는 객식구 주제에 감히 부를 생각은 없었지만 그저 감사하다고 연신 인사를 했다. 배 집사는 예의 바른 시우를 향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시우가 방을 다 보고 내려오자 벌써 대화가 끝이 났는지 시원이 응접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시원과 도재는 두 번째 보는 사이이지만 나름 결혼을 전제로 3개월 간 동거할 사이였다. 시원은 처음 갖는 둘만의 시간에 여유롭게 티타임을 가지며 오래도록 천천히 대화를 나눌 것이라 예상했었다.

지난번 부모님을 동행한 만남에서 마음껏 쳐다보지도 못한 도재를 비로소 제대로 보게 되었다. 도재는 편한 홈웨어 차림을 하고 있는데도 시원이 살면서 본 사람 중 가장 조각 같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체격은 말할 것도 없고 가볍게 두르고 있는 페로몬의 향기가 진하고 깊었다.

아직 저에게 애정은 없는 예비 남편이지만 평생 결혼 생활 하나만을 위해 길러진 시원은 저에게 허락된 3개월이라는 시간이면 충분히 제 모습을 어필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자신감을 보이며 호기롭게 응접실로 향했다.

하지만 티타임은 무슨. 시원은 물도 한 잔 얻어 마시지 못하고 도재가 대충 일러주는 소리에 네, 네 대답만 하다 10분도 안 되어 나가보라는 말에 나와야 했다. 푸대접에 열은 받지만 아직 시간은 많다 되뇌며 화를 삭였다.

도재는 대충 집안에서 지켜야할 룰과 시원이 해야 할 일 정도를 알려주었다. 제 공간에는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고 했고, 집에서 일하는 모든 고용인들의 직무와 이름을 이번 주 안으로 공부해 알아 두라고 했다. 명색이 안주인인데 그 정도는 외우고 통솔할 수 있어야 한다나 뭐라나.

또한 세계의 명사들이 언제 찾아올지 모르니 영어 공부도 필수라고 했다. 문화적 소양을 기르고 이에 대해 영어로 자유로이 말할 수준까지 끌어 올리라는 게 도재의 명이었다. 어차피 재수 없는 알파들은 집사람인 오메가를 사업 이야기에 끼워주지 않으니 문학, 음악, 미술, 영화 등에 대해서나 자유로이 말할 수 있는 수준이면 된다고 했다.

시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기품 있는 우성 오메가를 연기했지만 속으로는 ‘시발 좆 됐다’라는 생각을 했다. 머리가 썩 좋지 못한 시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든 건 사실 꼭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들은 아니었다. 도재는 하늘 아래 저보다 존귀한 사람을 없다는 주의였다. 도재의 부인은 무식하든 말든 도재의 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일 것이다. 고로 사람들 보는 눈 때문에 굳이 영어공부를 할 필요는 없었다.

도재는 그냥 갈구고 싶었던 거다. 원래부터 누굴 괴롭히는 걸 퍽 좋아하는 사이코 같은 성격이기도 하지만, 시우를 괴롭히는 애를 더 괴롭혀주고 싶은 유치한 심리였다.

서시우는 괴롭혀도 나만 괴롭혀야 한다는 어그러진 소유욕으로 도재는 시원에게 시집살이를 시켰다.

***

시우가 조심스레 응접실 안으로 들어가니 상석에 앉아있던 도재가 제 옆에 앉으라 손짓했다.

쭈뼛쭈뼛 다가오는 시우의 손을 확 잡아채 당기니 중심을 잃은 시우가 도재의 허벅지 위로 내려앉았다. 너무 놀라 흡, 숨을 멈춘 시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도재를 바라보았다.

시우는 하나도 안 웃긴 이 상황이 뭐가 그리 웃긴지, 도재가 혼자 의중 모를 웃음을 흘렸다. 시우는 저도 따라 웃어야 할지 아님 울어야 할지 혼란스러워 몸을 더욱 굳혔다.

“우리 원나잇 파트너 오랜만에 보니까 더 예뻐졌네?”

“……”

“섹스도 막대기 같이 하더니 하는 짓도 막대기네. 힘 풀어, 안 잡아먹어.”

가까이서 구경하니 더 귀여운 이쁜이가 입이 합죽이가 되어 곧 딸꾹질이라도 할 기세가 되자, 도재는 아쉽지만 그만 장난을 멈추기로 했다. 제 다리 위에 앉아 있는 시우를 가볍게 들어 옆자리 의자에 손수 착석시켜주었다.

‘무슨 사내새끼가 오메가도 아니면서 이렇게 가벼워. 살을 좀 찌워서 따먹으면 맛있으려나.’

도재는 시우의 얼굴을 한참이나 구경하며 음험한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보면 볼수록 자꾸 쳐다보게 되는 얼굴에 도재는 시우가 오메가가 아닌 것이 생각하면 할수록 신기했다. 어떻게 베타 남자애가 이렇게 생겼지.

하나하나 떼어 보면 시원이 시우보다 눈도 더 크고, 코도 더 높았다. 하지만 그 과한 이목구비들의 조합 덕분에 마치 각각 다른 연예인들의 가장 예쁜 부위를 잘라 합성해 놓은 사진처럼 어딘지 모르게 부담스럽고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얼굴과 형질이 매치가 안 되는 두 형제는 도재가 보기에도 참 특이했다. 그 바람에 도재의 뚫어질 듯한 관찰은 내리 이어졌고 시우는 목이 탔다.

어떻게 알았는지 도재는 메이드 아주머니를 불러 시우에게 차를 한 잔 내주라 일렀다.

응접실로 찻잔이 들어가는 것을 본 시원이 아주머니를 불러 세웠다.

“저기요, 이리 줘요. 제가 들고 갈게요.”

메이드 아주머니가 뭐라 할 새도 없이 트레이를 빼앗아 든 시원이 응접실로 들어섰다.

시원은 차고 넘치는 부모의 사랑을 오롯이 저 혼자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시우에게 조금이라도 관심과 시선이 쏠리는 것을 참기 힘들어했다.

시우가 마음만 먹으면 저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을 수도 있다고 본능이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가족들 덕분에 스스로 쭈구리의 삶을 자처하는 애정 결핍 환자가 된 시우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시우의 아름다운 외모에 홀리곤 했으니 시원은 늘 불안했다.

시우가 베타가 아니고 우성 오메가였다면 시원은 찬밥도 아닌 쉰밥 신세였을 것이다. 이를 겉으로 내보이진 않지만 속으론 늘 의식하고 있었다.

그런 서시우가 안에서 무슨 얘기를 하는지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응접실에 도재와 단둘이 들어가 있다. 저한테는 한 잔 내주지도 않던 차를 내주고, 무슨 말을 그렇게 길게 할 건지. 시원은 얌전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친절을 가장해 차 심부름을 자처하는 시원의 본심이었다.

따스한 미소를 입에 걸고 들어간 시원이 시우 앞에 차를 내어 주며 시우의 옆에 은근슬쩍 자리를 잡았다. 동생의 진로와 진학에 관한 이야기인데 함께 듣는 게 이상한 건 아니니 말이다. 도재에게 제 동생 좀 잘 부탁드린다며 인사를 했다. 없던 우애가 언제 그렇게 생겼는지 모를 일이었다.

“시원 씨,”

“네, 도재 씨.”

시원은 제 이름을 부르는 도재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좋아 설레는 마음을 부여잡고 대답했다. 설레라고 부른 게 아닌데 눈치가 부족한 시원이었다.

반면 눈칫밥 세월이 한두 해가 아닌 시우는 도재의 기색을 슬쩍만 보아도 심기가 썩 좋지 않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정작 시원은 아무것도 모르고 해맑게 나대는데 괜히 시우가 대신 쫄았다.

“내 공간에 함부로 들어오면 안 된다고 말한 지 삼십분도 안 지났는데?”

“네? 아 저, 저…그게 아니라…아주머니가 들어가시길래 좀 도우려고….”

“말끝 흐리지 말고 똑바로 말하세요. 그리고 아무 자리에나 엉덩이 붙이고 앉으려고 하는 거 경우 없어 보입니다. 시원 씨 필요한 자리 아니니 나가세요.”

부부는커녕 부하직원 대하는 것보다도 못한 태도였다. 갑질을 제대로 당한 시원은 수치심에 부들부들 떨며 응접실을 나섰다. 서시우가 그 꼴을 다 보았다는 게 분해 때린 사람은 도재인데 화는 시우에게 났다. 나오기만 해보라며 벼르는 시원이었다.

도재가 바짝 긴장해있는 시우를 보며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꼬맹아, 왜 네가 쫄아.”

“네? 아, 아니…아닙니다!”

시우는 당황하여 버벅대다 방금 도재가 말끝 흐리지 말고 똑바로 말하라며 시원을 혼낸 것이 생각나 괜히 더 씩씩하게 아니라고 답했다. 책 안 잡히려고 아등바등 하는 게 빤히 보여 도재는 더 큰 웃음을 터뜨렸다.

“넌 안 그래도 돼. 뭐 군대 왔어? 학교는 어디 갈래?”

동네 중고등학교 가는 것도 아니고, 대학을 어디 가고 싶다고 고르면 가는 건가? 시우는 웬만한 학교들은 등록 기간이 거의 마감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사실 대학을 보내주겠다는 소리가 이번 새 학기부터 당장 갈 수 있다는 소리일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수능을 다시 쳐서 내년에 보내주겠다는 건가? 생각했던 시우였다. 학교는 어디 갈 거냐는 물음에 선뜻 대답을 못하다가 묻는 말에 빨리 대답하지 않으면 도재의 심기를 거스를 것 같아 제가 합격했던 학교를 말했다. K대 영문과. 국내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학교였고 마침 도재의 어머니가 나온 학교이기도 했다.

“우리 처남 발랑 까진 주제에 공부는 잘했더라? 난 또 아침부터 섹스하자고 불러내길래 꼴통인 줄 알았지.”

“죄송해요….”

“뭐가 죄송해? 공부를 잘해서 죄송해 아님 발랑 까져서 죄송해? 둘 다 죄송할 일은 아니야. 난 멍청한 애 싫어하거든. 우리 처남이랑 모닝섹스 하는 것도 언제나 환영이고.”

“네?”

“뭘 그렇게 놀라. 애기야, 그럼 대학을 공짜로 보내줘?”

“아, 아니요….”

장난이지만 진심도 아주 없진 않은 말이었다. 자선사업가도 아니고 시우와 섹스도 안 할 거면 뭐 하러 시우의 가족들까지 호사를 누리게 해주겠나. 이는 분명 적선이 아닌 대가성 계약이었고, 그 계약에 팔려온 건 시원인 듯 보이지만 실은 시우였다.

“그렇지? 우리 처남 대학 가겠다고 5백에 뒷구멍도 팔았었잖아. 4년제면 총 8학기, 등록금 여덟 번 내줄 거니까 못해도 여덟 번은 팔아야겠네. K대 영문과에 등록되어 있어. 이번 3월 개강부터 신입생으로 다니면 돼. 우리 예쁜 걸레, 대학생 된 거 축하해.”

그냥 축하한다고 하면 될 걸 꼭 말을 곱게 못하는 도재였다. 제가 처음 열어 놓은 그 구멍에 남의 좆이 들어가는 건 도재가 시우를 계속 갖고 놀고 싶은 한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럴 거면서 걸레가 웬 말인가. 진짜 이 사람, 저 사람 안 가리고 자고 다니기라도 하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하지만 시우는 그럼에도 별로 억울해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미 도재의 화법을 경험해 본 터라 많이 놀라지도 않았다. 뭘 해주지도 않으면서 구박만 하던 부모와 뭐라도 해주면서 구박하는 도재, 사람 똥이냐 개똥이냐 수준이지만 구태여 길 가다 둘 중 하나를 밟아야 한다면 후자가 나으니 시우에겐 도재가 나았다.

시우는 3월부터 바로 다닐 수 있다는 말에만 집중했다. 먼 길을 돌고 돌아 결국은 이루어낸 대학 입학이었다. 시우는 눈물이 핑 돌았지만 씩씩하게 참아내고 도재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저 진짜 열심히 해서 장학금도 받고, 아르바이트도 해서 최대한 폐 안 끼치도록 할게요.”

도재는 시우가 웃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우는 것도 더럽게 꼴리더만 웃는 건 또 웃는 거대로 꼴렸다. 도재가 건실히 살겠다 제 앞에서 옹골차게 다짐하는 귀여운 꼬맹이를 보며 생각했다.

‘네가 폐를 안 끼치면 내가 널 따먹을 구실이 없는데.’

모든 걸 다 쥐고 태어난 도재는 삶이 쉽게 무료해졌고 종종 권태로움을 느꼈다. 그래서 늘 흥미로운 일을 찾아 헤맸다. 그러다 발견한 악취미가 바로 사람을 괴롭히는 일이었다. 특히 예쁜 애는 괴롭히는 맛이 최고였다. 그런데 눈앞에서 환하게 웃는 시우를 보니 조금은 깨닫는 바가 있었다. ‘괴롭히지 않고도 즐거울 수 있구나.’ 울리고도 싶고 웃기고도 싶은 희한한 애였다.

“대학 가는 게 그렇게 좋아?”

“네. 꿈이었어요.”

“쯧, 아무튼 한국 학생들 문제다 문제. 무슨 꿈이 대학 가는 거야.”

물론 시우의 꿈은 그저 대학만 가는 건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집안 분위기가 안 좋으면 슬쩍 눈치를 보고 집을 빠져나와 동네 도서관에서 내내 책을 읽다 왔다. 화영과 태중이 싸우는데 괜히 눈에 띄면 불똥이 튀기 때문이었다.

책은 시우의 도피 수단 같은 것이었다. 한글로 번역된 영미권 소설들을 읽고 너무 재미있어 나중엔 사전을 찾아가며 떠듬떠듬 원서로도 읽었다. 썩 행복한 일이 없던 시우의 어린 시절 유일한 낙이었다. 그리고 이 즐거움은 그대로 시우의 꿈이 되었다. 영문학과를 나와 소설 번역가가 되는 것, 그게 시우의 진짜 꿈이었다.

하지만 시우는 그저 헤헤 웃음으로써 도재의 말에 동의를 전할 뿐 저에 대한 이야기를 재잘재잘 떠들지 않았다. 당연히 제 이야기를 듣고 싶을 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귀찮게 하면 안 되니까.’ 누군가 제 꿈이 무언지 물어주고, 제 얘기를 들어주는 그런 일은 상상만 해도 너무 낯설고 쑥스러워지는 일이었다. 밟히면서 자란 시우는 어깨를 펴는 법을 몰랐다.

도재는 꿈도 없는데 학벌 욕심은 있는 시우가 한심해 보이긴커녕 헤헤 웃는 그 모습이 귀여웠다. 정 원한다면 박사까지 시켜주고 애가 박사를 졸업할 때까지 아주 재밌게 가지고 놀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 말이다.

“야, 너 내가 잔디 깔아주고 들어가는 거야. 이쁜 짓 좀 해, 이쁜아.”

도재가 자신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

의미를 눈치챈 시우가 도재의 볼에 쪽 짧은 뽀뽀를 남겼다. 매형에게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부인 따로, 첩 따로, 애인 따로, 원나잇 따로인 우성 알파의 성 편력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고 시원도 어차피 돈 때문에 결혼한 거지 사랑 때문에 한 건 아닐 터였다. 이미 처음부터 모든 게 꼬여있는 이 기형적인 관계에서 자신이 되네 안 되네를 따질 주제는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다.

‘하라면 하는 거지 뭐.’

도재는 저를 놀려먹는 게 좋고 그렇다면 저는 그 놀림을 당해줘야 한다. 더한 짓을 시켜도 해야 되는 사람, 시우에게 도재는 그런 존재였다.

어리지만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건 도재보다도 더 잘 아는 시우이기에 빼거나 튕기는 건 없었다. 하지만 하라니까 하는 게 여간 티 나는 것이 아닌 무미건조하고 의무감 짙은 뽀뽀였다. 시우는 도재를 또 다시 웃게 만들었다.

‘하여간 골 때려.’

시우의 말랑한 입술이 볼에 닿자 도재에게서 기분 좋은 페로몬이 살짝 흘러나왔다. 오메가를 젖게 하고 싶은 의도가 담겨 있던 그 페로몬은 아쉽게도 시우에겐 전해지지 않았다. 베타가 아니었으면 제가 먼저 하겠다 달려들게 만들 수 있었을 텐데 도재가 쩝, 입맛을 다셨다. 오메가가 아니라고 안 따먹을 건 아니었지만 아쉽긴 했다.

도재는 지갑에서 백만 원짜리 수표 세 장을 꺼내 시우에게 건넸다. 처남도 아니지만 어쨌든 처남에게 용돈을 줄 때 어느 정도 주는 건지 감이 없었다. 하긴 뭐, 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주고 싶은 만큼 주면 되는 거였다.

“자, 처남 용돈. 이건 공짜야.”

“히익! 저, 저 괜찮아요. 용돈은 제가 벌어서 쓸게요.”

저번부터 자꾸 들고 있기도 무서운 수표로 시우를 놀라게 하는 도재였다.

“넌 다른 건 토 안 달면서 왜 돈 받는 건 맨날 토를 달아. 현금이 싫어?”

도재가 시우에게 주려고 따로 만들어 둔 신용카드를 건넸다. 더 이상 토 달면 안 될 것 같아 시우는 ‘감사합니다’ 하고 얌전히 카드를 받았다. 앞에서 받는 척만 하고 안 쓰면 그만이니 말이다.

“아르바이트 그만둬. 집에서 내가 시켜줄 테니까.”

“네! 시켜만 주세요. 열심히 할게요.”

‘일은 열심히 하든 말든 상관없으니까 섹스나 좀 열심히 해봐라.’ 하고 타박 하려던 도재는 일을 안 하게 해준다는 것도 아니고 시켜 준다는 거에 반색하는 애가 어이없어 피식 웃었다. 얼씨구, 좋단다 아주.

여기저기서 참석해달라고 보내오는 행사의 초대장을 분류하는 일이나 간단히 서류를 정리하는 등의 잡일이나 한 번씩 시키라고 김 비서에게 말해두었으니 원대로 일은 하게 될 것이다.

시우는 어디에서든 제 쓸모를 보이는 것을 좋아했다. 낳을 필요가 없는데 세상에 나온 아이는 마음 속 깊은 곳에 항상 버려지진 않을까 하는 불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쓸모 있는 건 웬만하면 버리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시우를 부지런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늘 고단한 시우였다, 몸 보다는 마음이 더.

결핍에 갉아 먹히며 산 시우는 씩씩한 척 해도 한 번씩 눈이 공허해졌다. 도재는 이따금씩 보이는 그 눈빛이 더럽게 청승맞아 자꾸 시우가 생각나는 것 같기도 했다. 이상하네, 나 팔자 사나운 애들 별로 안 좋아하는데.

도재가 큰 손을 들어 시우의 머리를 살살 헝클어뜨렸다. 말로는 원 없이 소처럼 일하라고 비꼬았지만 그래도 예뻐해 주는 손길임은 느낄 수 있었다. 걸레라는 둥, 발랑 까졌다는 둥 들을 수 있는 희롱이란 희롱은 다 들으면서도 도재의 따듯한 손길 한 번에 마음이 풀리는 시우였다.

***

시원은 거실에서 한참이나 눈에 불을 켜고 응접실 문이 언제 열리는지 노려보고 있었다. 그 때문에 집 안 고용인들이 모두 눈치를 보고 있던 차에 도재와 시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도재는 선약이 있어 외출해야 했기에 집에 들어온 첫날의 저녁식사는 시원과 시우만 함께 하기로 했다. 도재가 식사를 담당하는 아주머니들께 첫날이니 원하는 걸로 잘 차려주라고 말한 뒤 외출 준비를 위해 드레스 룸으로 자리를 옮겼다.

“식사는 어떻게 준비할까요?”

시원과 시우에게 다가온 아주머니가 물었다. 아주머니는 둘의 이름도 잘 모르고 아직 혼인신고도 하지 않았다고 하니 뭐라고 불러야 할지 애매해 호칭은 생략하였다.

“아줌마, 사모님이라고 부르세요. 난 저녁은 항상 간단히 먹으니까 리코타 치즈랑 로메인, 아보카도, 토마토 넣어서 샐러드 만들어 줘요. 닭가슴살은 샐러드에 같이 넣지 말고 구워서 따로 내는데 닭에서 잡내 안 나게 해요. 아, 샐러드에 트러플 오일 살짝 뿌리는 것도 잊지 말고.”

반말은 아니었지만 누가 들어도 하대하는 듯한 명령조였다. 가지가지 하는 형 덕분에 부끄러움은 동생 시우의 몫이었다. 이 집 안주인이 될 테니 저런다고 누가 쫓아내지는 않겠지만, 척 봐도 연세가 꽤 있으신 어른인데 언제 봤다고 저렇게 종 부리듯 하는지 시우는 세상 당당한 시원을 보며 기함할 뿐이었다.

오늘 아침까지도 곰팡이 핀 집에 살다 온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뻔뻔스러울 수 있을까 동생으로서 창피해 죽을 노릇이었지만 시원에게 찍소리도 못하는 시우는 그냥 속으로만 고개를 저었다.

아주머니가 시원의 태도에 기분이 상한 것은 사실이었다. 도재도 저러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사모님 되실 분이니 어쩌겠나, 아주머니는 아주 잠깐 굳었던 표정을 풀고 시원에게 답했다.

“알겠습니다, 사모님.”

객식구 나부랭이인 시우는 아주머니가 저에게도 친절히 의사를 묻기에 난감했다. 대충 있는 거 달라고 하면 시원이 착한 척 한다고 갈굴 것이고, 시원과 같은 걸 달라고 하기엔 시원이 요구하는 바가 너무 진상이라 민망했다. 결국 시우는 양쪽 눈치에 치여 밥 생각이 없다고 말하곤 제 방이 있는 2층으로 올라왔다.

길었던 하루에 허기진 배를 익숙하게 무시하며 시우는 침대에 몸을 뉘였다. 쾌적한 환경이었지만 쓸쓸한 방이었다. 호텔 방 같은 시우의 방은 말 그대로 잠시 묵고 나가야만 할 것 같았다. 마음껏 내 물건들을 풀어 널려 놓을 수도 없을 것 같은, 내 방이 아닌 내 방. 말 그대로 객식구가 쓰는 손님방. 시우가 멍하니 누워 궁전 같은 집에 생긴 제 방에 대해 생각했다. 외로웠다.

한참 누워있다 보니 밤이 늦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가야할 시간이었다. 그만둘 것이라고 말할 거긴 했지만 오늘 당장 안 나갈 수는 없으니 시우는 집을 나설 준비를 했다.

그 때 시원이 시우의 방에 노크도 없이 들어왔다.

“야 서시우, 너 아까 무슨 얘기했냐?”

“학교 얘기.”

“학교 얘기 뭐.”

“이번 3월부터 다니라고. 매형이 등록해 주셨대.”

“또 뭐 말했어. 너 똑바로 싹 다 말해.”

“그냥 일 시키신다고.”

“일 시킨 거 돈 얼마나 준대?”

“몰라… 근데 걱정 마, 많이 주시면 알아서 거절할게. 폐 안 끼치게 잘 할 거야. 용돈 하라고 카드 주신 거 있는데 이것도 절대 안 쓸게.”

“뭐? 너한테 카드를 줬어? 야 너 그거 내놔. 어차피 안 쓸 거잖아. 내가 도재 씨 다시 돌려줄게. 너는 그걸 받긴 왜 받아?”

시우는 도재에게 다시 돌려줄 거라는 시원의 말에 아까 받았던 카드를 바로 내주었다.

“너 아무튼 도재 씨가 시킬 일 있을 때 말고는 눈에 띄지 마라. 그리고 내가 밑에 다 말해 놨으니까 앞으로 일하는 사람들 밥 먹을 때 같이 먹어. 아님 밖에서 알아서 먹고 들어오던지. 도재 씨랑 나랑 식사하는 자리에 낄 생각하지 말고.”

시원은 마지막으로 이 한마디를 쏘아 붙인 뒤 방을 나갔고, 시원의 생지랄을 온몸으로 받아준 시우 역시 알바를 가기 위해 뒤따라 방을 나섰다. 일을 가기도 전부터 피곤을 느꼈다.

이른 아침이 되어야 집에 들어올 텐데 벨을 누르면 너무 민폐가 될 것 같아 시우는 집을 나서기 전 배 집사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누가 열어주지 않아도 집에 알아서 들어오려면 비밀번호를 알아야하기 때문이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시우에 배 집사가 친절히 답했다.

“대문 앞엔 24시간 경비가 있으니 시우 군 얼굴을 확인하면 열어줄 겁니다. 집으로 들어오는 문은 제가 문자로 비밀번호를 남겨두겠습니다. 근데, 밤이 늦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집이랑 가까워서 괜찮아요! 정말 감사합니다. 다녀오겠습니다!”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하고 뒤도는 시우를 배 집사가 붙잡아 세운 뒤 밤이라 춥다며 대문까지 카트를 태워 데려다 주었다. 안 그래도 갑자기 방에 들이닥친 시원 때문에 뛰어야 할 뻔했는데 시우는 연신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곤 대문을 나섰다.

형이란 사람은 온 첫날부터 도재가 집을 비우자마자 제 집처럼 활개를 치며 다니고, 동생이란 애는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혔을 것 같이 생겨서는 편의점에 알바를 뛰러 나갔다.

배 집사가 보기에도 퍽 희한한 형제였다.

***

시우는 출근하자마자 유통기한 때문에 폐기한다고 따로 빼둔 삼각김밥 하나를 까먹었다. 알바생들이 먹거나 가져가도 되어서 시우는 이걸로 종종 끼니를 때웠다. 저녁을 거르고 와서 하나로는 배가 안 차 하나 더 까먹으려던 찰나였다.

느지막이 술자리를 마치고 집으로 들어가던 도재가 편의점 앞을 지나다 기사에게 황급히 차를 세우라 말했다.

편의점 유리창 너머 익숙해지기 참 어려운 예쁜 베타의 얼굴이 보였다. 카드를 받았는데 도대체 알바는 왜 가는 걸까. 한도재가 살아온 인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 꼬맹이가 다람쥐처럼 뭘 까먹다가 그마저도 손님이 오니 후다닥 내려놓는 게 보였다.

갑자기 차를 세우라던 도재가 편의점 쪽을 뚫어져라 쳐다보기에 기사도 자연히 그쪽으로 시선이 갔다.

“박 기사, 쟤 뭘 먹는 거야?”

“삼각김밥 같습니다, 대표님.”

삼각김밥, 도재는 그게 뭔지 좆도 모르지만 삼각형 모양 김밥이겠거니 하고 추측했다. 시우가 저녁 식사를 이미 마치고 야식 비슷한 개념으로 삼각김밥을 먹고 있는 줄 알았다.

저러고 야식까지 야무지게 챙겨 드시는데 어찌 저리 뼈 밖에 없을까, 하긴 저녁 먹고 돌아서면 또 배고플 때지. 애기네 애기.

삼각김밥 먹는 시우 하나 가지고도 참 오래도록 별 생각을 다하는 도재였다. 그러다 다시 기사에게 물었다.

“저런 데서 파는 거 몸에 안 좋지 않나?”

“아무래도 값이 저렴하니 딱 그만큼이겠죠. 저도 어렸을 적에 저걸로 끼니 자주 때웠습니다.”

“저게 얼만데.”

“글쎄요, 이제 천 원 정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도 먹어본 지 오래돼서… 들어가서 알아보고 올까요?”

“뭐? 천 원? 사람 먹는 밥을 천 원으로 어떻게 만들어.”

“아, 아닌가…? 그럼 이제 한 천오백 원까지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천 원이나 천오백 원이나. 도재는 천오백 원으론 사람 먹는 밥을 만들 수 있냐 되묻고 싶었지만 박 기사가 너무 진지하게 삼각김밥의 가치를 천 원에서 천오백 원까지 양보하기에 그냥 말을 말았다.

천오백 원으로 김밥도 만들 수 있구나. 새삼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도재는 아니 쟤는 먹고 싶으면 아주머니한테 해달라 그러지 왜 저딴 걸 먹고 있나 욱하는 마음이 들었다. 겉으로 크게 표는 안 났지만 드라마틱한 심경의 변화를 겪고 있는 도재였다.

도재의 눈치를 보던 박 기사가 그래도 생각보다 든든하고 먹을 만하다고 말해주어 그런가 보다 했지만, 도재는 무엇에 대한 화인지 그 대상을 알 수 없는 화가 울컥울컥 치밀어 올라 시우에게 가서 화풀이를 좀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있는 손님이 나가면 들어가야겠다 벼르던 도재는 나가면 들어가고, 또 나가면 들어가는 손님 행렬에 짜증이 나 그냥 집으로 가자며 차를 다시 출발시켰다.

한 입 겨우 뜯어먹었을까 한 삼각김밥이 덩그러니 놓여있던 게 자꾸 머릿속에 떠올라 원인 모를 짜증이 더했다. 먹을 거면 편하게라도 먹던가. 가지가지 한다 정말.

집에 돌아온 도재를 배 집사가 맞았다. 시원은 도재가 들어올 때까지 어떻게든 버텨서 인사라도 하려 했지만, 나름 이사 비슷한 것을 한 하루이다 보니 너무 피곤해서 곯아떨어져 버렸다.

“도련님 오셨습니까?”

“서시우 저녁 뭐 먹었어?”

“네? 아, 시우 군은 생각이 없다고 안 먹었습니다.”

“알았어. 이만 올라가 쉬어요.”

“네, 쉬십시오. 도련님.”

배 집사를 올려 보낸 도재는 결국 ‘씨발’을 낮게 읊조리며 다시 집을 나섰다.

‘씨발, 작작 불쌍해라. 세상에 공짜 없다니까 우리 집에선 쌀 한 톨도 안 얻어먹겠다는 거야, 뭐야.’

도재는 선을 긋는 것 같다는 느낌에 괜히 심술이 났다. 눈칫밥이란 게 뭔지 모르는 도재는 눈칫밥을 먹느니 차라리 편하게 삼각김밥을 먹는 게 낫다는 것도 알 수 없었다. 그러니 해석이 저리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간신히 손님들을 보내고 김이 눅눅해진 삼각김밥을 대충 다 먹은 시우가 또 들어오는 손님에 문 쪽을 쳐다보았다. 그 손님은 저녁 약속에 나갔던 복장 그대로 온 정장 차림의 도재였다.

와… 시우의 입이 저도 모르게 헤 벌어졌다. 누구나 동경할 만한 멋진 어른 남자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우는 이제 수트만 보면 좀 울컥하고 치미는 게 있어서 저도 모르게 튀어나올 뻔한 ‘멋있다’ 소리를 간신히 참아냈다. 수트 입은 것 가지고는 멋있다고 안 할 테다.

저 혼자 입을 헤 벌렸다가, 다시 입을 앙 다물었다가 다양한 표정으로 매력을 설파하는 시우의 모습이 쓸데없이 귀여워 도재의 심술력이 올랐다. 따먹을 구실을 안 주려는 시우가 얄밉기도 하고, 쪼끄만 게 쓸데없이 이상한 데서 심지가 굳은 것도 울려 버리고 싶은 포인트였다. 울면 사탕을 쥐어주며 꾀어낼 요량이었다.

“처남 안녕?”

“아, 안녕하세요 매형.”

“우리 처남 아주 쓸데없이 성실해. 어? 그만두라니까 말도 더럽게 안 듣고, 참 착하다. 너 밥 안 먹었다며.”

“네…? 저 밥 먹었는데요….”

아르바이트는 그만두라고 했는데 바로 그만두지 않은 것이 언짢아 도재가 꾸짖으러 온 건 줄 알았다. 긴장한 시우는 말의 끝에 뜬금없이 밥 타령을 하는 도재가 어리둥절했다. 자기한테 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신경 쓴 사람이 별로 없어 봐서 더욱 당황스러웠다. 도재의 기세가 썩 부드러운 기세는 아니었는데 그래도 왠지 모르게 싫지는 않은 기분이었다.

“집에서 안 먹었다며. 우리 집에서 밥 얻어먹으면 다리라도 벌리라 그럴까봐 안 먹는 거야? 너 사람 되게 좀팽이 만드는 재주 있다?”

“아, 아니 아깐 생각이 없어서요… 여기 나와서 밥 먹었어요.”

“뭐 먹었는데?”

“참치마요….”

“뭐? 그건 또 뭐야. 너 삼각김밥인가 뭔가 하는 거 먹던데.”

“네, 참치마요 삼각김밥 먹었어요.”

삼각김밥에 대한 개념도 분명치 않은 도재는 분명 한국어인데 외계어 같은 소리를 하는 꼬맹이의 말을 타고나길 좋게 타고난 머리를 굴려 이해해낼 수 있었다. 삼각김밥에는 여러 가지 맛들이 있고 그 중에 참치와 마요네즈가 들어간 걸 먹었다는 뜻이겠거니 했다. 덕분에 오늘 참 많은 걸 알게 되었다.

“맛있디?”

“그냥 뭐….”

시우에게 삼각김밥은 그냥 한 끼 때우려고 먹는 거지 맛있다, 맛없다 할 맛이 아니었다. 갑자기 삼각김밥의 맛은 왜 묻는 걸까. 출마하고 싶어서 서민 체험이라도 하려는 건가? 대화하는 상대의 눈치 먼저 살피는 버릇이 있는 시우가 도재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고개를 들어 도재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삼각김밥 먹은 것도 잘못이냐’ 라고 묻는 듯한 그 무구한 눈빛에 도재는 결국 피식 웃으며 이 말도 안 되는 지랄을 멈추고 차분히 타이르기로 했다. 누군가를 타일러 본 적이 없는 도재에겐 특별한 결정이었다.

도재가 큰 손을 들어 시우의 부드러운 생머리를 넘겨주며 말했다.

“맛있지 않으면 먹지 마. 음식은 대충 배 채우려고 먹는 거 아니야.”

“아… 네….”

“한 집 사는 식구한테 치사하게 밥값 안 받으니까 먹고 싶은 거 해 달라 그러고.”

“네… 감사합니다.”

“아이 착하네.”

강아지를 쓰다듬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손길임에도 도재의 따듯한 손에 마음이 간질간질해진 시우는 쑥스러워 고개를 푹 숙였다. 붉어진 얼굴을 들키는 게 창피했다. 하는 짓은 퍽 개차반인 남자가 쓸데없이 다정해서 사람을 설레게 했다.

빤히 보이는 부끄러워하는 모습에 도재는 시우의 말랑한 볼을 한 번 꼬집고는 편의점을 나왔다. 평소였으면 그렇게 좋냐, 그럼 박아줄 테니 다리 벌려 봐라, 하며 더러운 농을 던지고 놀려먹었겠지만, 처음으로 그러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굴 괴롭히면서 그러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본 적은 없는데 말이다. 심한 짓을 한대도 돈으로 배상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시우에게 더 이상 상처를 주었다간 나중에 후회할 지도 모른다는 우성 알파의 예민한 촉이 왔다.

사랑 받고 싶어서 몸부림치는데 막상 받는 법도 잘 모르는 저 애를, 생각보다 오래 끼고 살고 싶을 것 같다는 미래가 보여 도재는 현명하게 입을 다물고 집으로 돌아갔다. 더 같이 있다간 제 버릇 개 못 주고 또 못된 소리로 애한테 상처를 줄지 모르니 얌전히 가는 편이 나을 것이다.

***

도재의 명대로 아르바이트를 모두 관둔 시우는 다가오는 개학날에 설레어 잠 못 드는 나날을 보냈다. 소풍이라도 가는 유치원생 같은 그 표정을 도재가 보았다면 당장에 아래가 동했을 만큼 해사하고 예뻤는데, 안타깝게도 도재는 미국에 볼 일이 있어 2주 정도 집을 비우게 되었다.

갈구는 예비 남편이 없으니 시원은 제 세상이었고 시우는 그새 도재에게 미운 정이라도 들었는지 조금 아쉬웠다. 도재가 아니었다면 넘어보지도 못했을 대학 문턱을 넘는 날 꼭 감사인사를 다시 전하고 싶었는데 도재는 개학 전 주부터 개학 후 일주일 간 집에 없을 예정이었다.

도재가 없는 동안 시우는 나름 새 집에서의 생활에 잘 적응해갔다. 시원의 지시대로 밥은 고용인 아주머니들이 드실 때 껴서 같이 먹었다. 시우는 그게 오히려 좋았다. 아주머니들이 진짜 엄마인 화영보다 더 엄마같이 잘 챙겨주었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꽃미남 청년이 예의도 바르고 싹싹하니 안 예뻐하기가 힘들었다.

시우는 제 입으로 절대 뭐를 좋아한다, 뭐가 먹고 싶다 먼저 말하지 않았지만 경력이 한두 해가 아닌 아주머니들은 센스 있게 시우가 밥 먹을 때 잘 먹었던 거나, 좋아하던 반찬을 캐치해서 종종 식탁에 내고 시우의 밥 위에 올려주곤 했다. 상처에 쓸려 얇아질 때로 얇아져 버린 마음을 가진 시우는 밥상머리에서 눈물을 참느라 혼이 났지만 씩씩하게 밥을 먹었다.

아주머니들은 그런 시우를 참 아까워했다. 잘 챙겨준다고 챙겨 주긴 하지만 아무래도 고용인들이 먹는 밥을 먹으니 시원의 식사에 끼니 때 마다 올리는 비싸고 귀한 식재료는 내줄 수가 없었다.

형제라는데 어쩌면 저렇게 야박하게 구냐며 아주머니들 사이에서 시원의 뒷담화가 돌았다. 그렇다고 아주머니들이 도재에게 가서 시시콜콜 부엌살림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뒤에서 무슨 이야기가 도는지도 모르고 시원은 쇼핑에 열을 올리느라 바빴다. 도재가 없을 때가 기회이니 열심히 사 모아야 했기 때문이다.

반면 시우는 예상치 못한 일정으로 갑작스레 떠나게 된 도재가 돌아올 때까지 도재가 시켜주기로 한 아르바이트를 할 수 없었다. 급한 대로 기존에 하던 아르바이트를 그만두며 정산 받은 돈으로 용돈을 대신해야 했다. 대학생은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드는데 말이다.

형은 돈을 쓰느라 바쁘고, 동생은 돈을 아끼느라 바쁜 2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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