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다음날 소박한 약혼식에 소박하지 않은 약혼 선물이라며 각종 언론 매체에서는 보도를 뿌려댔다.
돈 많은 셀럽 인생을 살고 계신 도재의 약혼자이니 관심은 당연했다. 나이, 형질, 학교, 전공 등 시우에 대한 정보와 시우가 받은 선물들의 가치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가십거리가 되었다. 뉴욕 햄튼의 별장 한 채, 병아리 색 스포츠카 한 대, 도자기 한 점, 그리고 약혼반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선물이었다.
이제 ‘서시우’를 인터넷 검색창에 치면 학교 학생증을 만들기 위해 냈던 증명사진이 프로필 사진으로 뜨고 가족 사항에 ‘약혼자: 한도재’가 나왔다.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하면 ‘배우자: 한도재’ 로 바뀔 것이다. 아직 애는 애라 그런지 이게 그리 신기해서 시우는 한 번씩 검색창을 열어 서시우를 검색해보았다.
기본적인 것들 말고 사적인 내용을 깊이 파고들려 하는 기사들은 도재가 전부 쳐내었지만 약혼 선물 리스트만큼은 구체적인 디테일을 제대로 공개했다. 배 아파서 그냥 죽어버렸으면 좋겠는 집구석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정작 시우 본인은 제가 받은 건지 실감도 안 나는 선물들에 대해 대중들이 더 잘 알게 되었다. 시우는 여름방학을 보내는 중이던 동기들로부터 개학하면 람보르기니를 끌고 오는 거냐며 무수한 카톡을 받았다. 그리고 면허가 없다며 싱거운 답변을 하여 아이들의 흥분을 잠재웠다.
도재의 바람대로 잡지에 실린 기사를 읽다 절규하는 집구석이 하나 있었다.
기사에는 약혼 선물 중 하나인 도자기의 낙찰가가 30억이라는 팩트와, 얼마 전 130억에 유명 작가의 추상화 한 점을 낙찰 받은 도재네가 이를 시우에게 결혼선물로 주기 위해 사들인 거라는 추측성 소문이 함께 실려 있었다. 이를 읽으며 나라라도 잃은 양 좌절한 건 3억을 받고 시우를 버린 화영이었다.
각종 수식어를 붙여 도재의 약혼자를 찬양하는 내용과 함께 한 때는 제 아들이었던 시우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시우는 사진에서도 반짝반짝 빛이 났다.
[스물한 살에 오메가로 피어난 청년, 우성임을 확인시켜주듯 그가 풍기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분위기는…]
이걸 내가 3억에 바꿨다고…?
하, 하하, 하하하, 아아아아아아악!
화영은 너무 허탈해 웃다가 나중엔 아래층에서 올라올 정도로 소리를 질러댔다.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여자가 따로 없었다.
“오메가에 우성인 줄 알았으면 내 아들 그렇게 안 보냈지!”
화영은 이제와 뻔뻔하게 ‘내 아들’을 운운했다. 마지막까지 따듯한 인사 한 번 건네주지 않았으면서 말이다.
시우를 포기하고 시원의 섹스 동영상을 지우는 데 받은 3억은 서울에 20평이 채 안 되는 전셋집 하나를 구하는데 썼고, 태중은 후배가 제 회사에 마련해준 일자리를 다니다 아랫사람 대하듯 대하는 후배의 태도에 자존심이 상해 얼마 전 그만둔 상태였다.
청담동 사모님을 꿈꾸던 시원은 이 소문 빠른 한국 땅에서 동영상을 지우고 도재 하나 입 다문다고 그 모든 일이 없던 일이 되는 게 아님을 알기에 우성 오메가라는 형질이 먹혀드는 혼처를 찾아 따지는 거 없이 급하게 식을 올렸다.
서울과 멀고 먼 곳을 찾아 부산으로 시집을 갔는데 상대는 돈 꽤나 잘 번다는 열성 알파 치과의사였다. 남편이 돈을 잘 벌어 시원은 모자람 없이 살지만 통상적으로 사위가 처가 식구들까지 다 먹여 살려주는 일은 없기에 화영과 태중은 명절에나 생일 때 사위가 한 번씩 주는 용돈으로 만족해야 했다. 사실 이게 당연한 건데 잠깐 도재가 선사한 거저 쓰는 돈의 맛을 본 그들은 불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시원이 지금 제 부모까지 챙기고 그럴 마당이 아니었다. 나중에라도 시댁에서 과거를 알게 되어 이혼 당하진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살기도 했고, 열성이라도 알파인 시원의 남편은 오메가 주제에 우성이랍시고 저를 잡고 살려 하는 꼴은 못 본다며 보수적이고 고압적인 태도를 고수했다. 모자람 없이 살 뿐이지 재벌 수준도 아니면서 알파 유세를 더럽게 부리는 집으로 시집을 와버린 것이다. 그래서 하루하루가 너무 좆같았다.
‘사랑을 안 줄 거면 돈이라도 물 쓰듯 쓰는 재미를 주던가.’
그러니 시원도 시우의 소식을 듣고 돌기 일보 직전이었다. 제가 돈이라도 있었으면 이렇게 개무시를 당하며 참고 살 것까진 없기 때문이다.
시원은 엄마가 아파 잠시 친정에 다녀와야겠다며 남편에게 양해를 구하고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다. 화영이 정말 홧병으로 뒷목을 잡고 쓰러졌으니 말이다.
***
시우의 소식을 듣고 서울로 부랴부랴 올라온 시원은 썩 환대 받지 못했다. 화영은 시원을 보고도 쌀쌀맞게 반응했다.
“왜 왔어. 이 서방은 어쩌고?”
하필 그 타이밍에 뉴스에서는 도재가 연구비를 대는 형질연구소의 소장이 나와 알파와 오메가 사이에서는 베타가 나오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 중이었다. 시우를 버리기 전에 알았어야 할 고급 정보를 이제야 말해주고 있었다. 뉴스를 보며 화영은 아주 머리끝까지 열이 받은 상태였는데 때마침 시원이 들어오니 예민하게 구는 건 당연지사였다.
‘어휴, 저거 지키겠다고 내가.’
이전에 베타인 제 막내아들을 보며 그랬던 것처럼 화영은 시원의 얼굴을 보는데 울화가 울컥 치밀었다. 소장이 나와 떠들고 있는 TV도 다 부셔버리고 싶었다. 지금 누구 놀려?!
그래도 시우처럼 아기 때부터 일절 정 같은 거 안 주며 키운 것도 아니고, 스무 살 넘어갈 때까지 금지옥엽 키운 정이 있어 화영은 시원을 시우 대하듯 하진 못했다.
“왜 오긴! 아들이 집에도 못 와? 스트레스 받아 죽겠는데 이 서방만 챙겨 엄마는!”
“책잡힐까 봐 그러지! 이 서방이랑 각인도 안 했는데 이렇게 싸돌아다니면 퍽도 예쁘게 보겠다.”
“아 몰라, 다 짜증나. 서시우 걔 뭐야.”
“안 그래도 엄마 지금 머리 싸맨 거 안보여? 어휴, 내 귀한 아들을 꼴랑 3억에….”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라 엄마. 언제부터 걔가 귀한 아들이었어.”
“뭐?! 아우 너 오니까 머리만 더 아퍼. 가서 이 서방이나 챙겨! 살랑살랑 싹싹하게 굴어서 아파트라도 하나 받아내야 될 거 아니야! 너는 어쩜 국산 차 한 대를 못 받니?”
“그거 지금 서시우랑 비교하는 거야? 그 집 들어가서 회초리는 회초리대로 맞고 개고생은 내가 다 했는데! 아오!”
시우였다면 워낙에 구박이 익숙하기에 그저 기가 팍 죽어서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겠지만 시원은 사소한 것 하나하나 화영의 케어와 지대한 관심을 받으며 자라 화영과 성격이 아주 똑같았다.
화영은 한마디를 지지 않는 아들과 티격태격 다툼을 잇다 결국 ‘그래, 우리라도 힘을 합쳐야지.’ 하며 화합의 장을 열었다. 퍽 죽이 잘 맞는 모자였다.
“천륜이 어디 끊어지는 거니, 시우 걔는 마음이 약해서 한 대표처럼 그러지는 못할 거야. 시원이 너 회초리 맞은 값 정도는 받아보자.”
하는 거 없는 백수들은 시간도 남아돌아 시우를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섰다.
그들은 깨가 쏟아지는 약혼 생활을 보내느라 바쁜 시우가 도재의 울타리 밖으로 나오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리기로 했다.
***
“서시우, 남편 회사 가는데 뽀뽀해주고 다시 자.”
도재가 격한 밤일의 여파로 세상모르고 자는 제 약혼자의 볼을 톡톡 건드려보았다. 아, 귀여워.
조깅을 하고 돌아온 도재가 씻으러 들어가기 전에 다시 잘 덮어준 이불은 어느새 또 걷어찬 뒤였다. 도재가 안고 잘 땐 몸이 결박되어 있으니 얌전히 자는데 이렇게 혼자 누워 있으면 이불을 죄 차버리는 시우였다. 몸에 열도 없어 손발이 차면서 저랬다.
도재가 혀를 쯧쯧 차곤 드레스 룸에서 시우의 잠옷을 들고 나왔다. 제가 다시 덮어주고 나가도 차버릴 테니 옷이라도 입혀 주기 위함이었다.
도재가 잠든 시우의 옆에 걸터앉아 한쪽 팔에 파자마 상의를 꿰어주니 시우가 흠냐흠냐 입맛을 다시며 도재의 허벅지에 머리를 문댔다. 입히면서 젖꼭지도 한 번 건드리고 배꼽도 한 번 찌르고 더럽게 치근덕대는데도 괴롭힌다고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는 애라 반대쪽 팔도 무리 없이 끼울 수 있었다.
문제는 하의였다. 하의는 상의보다 입히기 쉬운데 불구하고 입힐 수가 없었다. 아침이라고 귀엽게 서 있는 건강한 시우의 좆이 까꿍 하며 도재를 맞이하는데 어떻게 아랫도리를 입혀 이 예쁜 걸 가리겠나, 이제 도재는 시우가 발기를 잘하는 것도 예뻤다.
도재 눈에 남자의 성기는 좋게 보면 섹시하고 그냥 보면 징그럽다 정도로 해석되어 왔는데 시우는 앞에 달린 것도 다 따먹고 싶게 예뻤다.
“흐아앙….”
시우가 눈도 제대로 못 뜬 채로 신음과 함께 잠에서 깼다. 이미 출근 준비를 마쳤던 도재가 손목에 찬 시계를 다시 푸르고 따먹고 싶다는 생각을 실행에 옮겼기 때문이다.
쭙쭙 빨아먹다 시우가 눈을 뜨니 도재는 박고 있던 머리를 들어 다정한 아침 인사를 해주었다.
“시우 일어났어?”
“하읏! 읏! 안녕히, 읏…! 안녕히, 읏!”
좆을 빨던 입술은 떼어냈지만 빨지 않는 대신 손으로 잡고 흔들어댔다. 시우는 도무지 안녕히 주무셨냐는 인사를 마무리 지을 수 없었다. 허벅지를 파르르 떨며 사정액을 쏘아 보내고 나서야 숨을 쌕쌕 고르며 다 우는 목소리로 ‘안녕히 주무셨어요’ 인사할 수 있었다.
아침부터 이 난리를 치는데도 주인은 안 무는 충성심에 도재가 팅팅 부어 턱선보다 튀어나와 버린 시우의 볼살에 쪽쪽 뽀뽀를 해주었다. 그리고 탁탁 티슈를 뽑아 시우의 앞을 닦아주었다.
“섰길래 해준 거야. 시우 너 좋겠다? 남편이 아침부터 출근도 미루고 이런 서비스가 또 어딨어, 그치? 뽀뽀.”
해달라고 한 적 없는 거 해주고도 뽀뽀를 받아가는 양아치 같은 예비 남편이지만 시우는 군말 없이 쪽 뽀뽀를 해주었다. 시우가 소매를 걷은 셔츠와 손등에 불거져 나온 핏줄, 그리고 그 손으로 제 앞을 수습해주고 있는 도재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뒤로 울컥 무언가 나와 젖어드는 게 느껴졌다. 아무튼 오메가로 살면 예비 남편이 너무 섹시해도 탈이었다.
놀릴 게 빤히 보여 창피한 시우는 눈알을 도로록 굴리며 도재가 이를 모르고 넘어가길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울컥 나온 애액에서 폴폴 피어나는 물망초 향을 도재가 못 맡고 지나칠 리 없었다.
도재는 시우의 바람과 달리 가랑이 사이로 쑥 손을 넣어 구멍 주위를 짚어보았다. 그 손길이 시우를 고개 숙이게 했다. 아침부터 음탕한 저 자신에 대한 낯 뜨거움으로 시우는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었다.
얼굴이 벌게져서는 맘껏 놀리라는 듯 체념한 시우를 보며 도재에게선 푸하하 기분 좋은 웃음이 터졌다. 숙인 머리통에 잘게 입을 맞춰주며 도재가 말했다.
“출근하지 말까?”
“아, 아니에요…! 하세요.”
원체 뭘 조르지 못하는 애라는 걸 알지만 바짓가랑이 붙잡아 볼 생각도 안 하고 절 그냥 보내려는 시우에 도재가 미끈미끈한 그 액체를 손가락에 묻혀 시우의 눈앞에 보여주었다.
“얘는 가지 말라는 거 같은데.”
히익…! 놀릴 걸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남사스럽기는 한 시우가 얼른 그 손가락을 끌어다 제 파자마 상의에 슥슥 닦았다.
“진짜 괜찮아요… 바쁘신데 일 다녀오세요.”
“이 아까운 걸 왜 닦아. 제일 맛있는 건데.”
도재가 시우에 의해 닦여버린 제 손가락을 다시 내려 젖어있는 구멍에 푹 찔러 넣었다. 하윽…!
물이 많은 우성 오메가의 뒤는 찔컥찔컥 야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앙! 앙! 하앙…! 이내 시우의 입에서도 야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도재를 꼴리게 하기엔 더할 나위 없는 환상의 하모니였다.
“이쁜아, 고개 들고 나 봐야지.”
같이 벗고 있는 거면 몰라도 옷을 정갈하게 갖춰 입고 셔츠의 소매만 걷은 차림으로 제 뒤를 쑤셔주는 도재와 휑한 아랫도리를 하고 눈을 마주보는 건 여간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계속하여 찔컥이는 소리가 침실을 울렸고 시우는 간신히 고개를 들어 저를 태울 듯이 바라보고 있는 도재와 마주 보았다. 시우가 눈을 맞추자 도재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물 튀는 소리가 날 정도로 더 많은 애액을 쏟아내게 만들었다.
시우의 고개가 점차 뒤로 꺾여갔다.
“어흣…! 흣! 여보, 여보, 너무, 읏! 너무 많이 나와요…! 그만, 그만….”
“많이 나와서 예쁜데 왜, 우리 시우 많이 좋은가 보네. 시트 다 젖었네.”
“하읏…! 읏! 좋은데, 좋은데, 여보, 옷…! 옷 더러워져요…! 그만…! 그만….”
“옷 더러워지니까 벗으라고? 옷 벗고 이제 다른 거 줘요?”
옷 더러워지니 그만 하라고 하려던 건데 도재는 못 알아들은 건지 못 알아들은 척 하는 건지 딴소리를 했다. 시우가 잠시 생각했다. 괜찮으니 그냥 출근하시라는 의미 없는 인사치레보다 어차피 할 거 빨리 하고 도재를 회사로 인도하는 것이 더 나은 길일 것이다. 시우가 무릎을 접어 다리를 활짝 벌렸다.
그래 그 다른 거 빨리 주고 일하러 가라. 사람이 성실해야지. 건실한 남편이 되게 하기 위한 시우의 내조였다.
“하… 씹.”
달콤한 물로 잔뜩 젖어 있는 애널이 도재의 손가락을 물고 있는 게 벌린 다리 사이로 훤히 보였다. 간신히 욕을 삼킨 도재가 제 손은 바쁘기에 시우에게 제 벨트를 풀게 했다.
“시우 좋아하는 거 시우가 꺼내.”
결국 아침부터 한 판 거하게 뜨고 예비 남편을 출근시킨 시우는 다시 잠에 들었다가 점심때쯤 눈을 떴다. 시우의 온 얼굴에 뽀뽀를 퍼부어주고 출근한 도재의 온기가 얼굴에 남아있는 듯해 볼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기지개를 켠 시우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백화점에 나갈 채비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도재의 생일이 코앞이었다.
***
시우가 서재로 들어가 열심히 모은 제 티끌을 꺼내 들었다.
김 비서를 보조하는 아르바이트를 하여 모은 돈이었다. 약혼을 하고서도 일은 틈틈이 계속 하고 있었다. 김 비서가 시우를 부르는 호칭은 시우 군에서 사모님으로 바뀌었지만 그 사모님은 여전히 열심히 일했다.
시우는 제 쓸모를 인정받고 일한 만큼 노동의 대가를 받을 때 느끼는 보람을 좋아했다. 마음의 병이 있는 사람에게 삶의 원동력이 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감정들은 퍽 중요했기 때문이다.
시우가 일하는 걸 스스로 뿌듯해하기에 도재도 시우의 보람을 빼앗지 않았다. 그저 꼬맹이 하고 싶다는 대로 하게 놔두었다.
도재가 잘한다, 잘한다 엉덩이를 두들겨 주면 시우는 신이 나서 더 열심히 했다. 그렇게 모은 코 묻은 돈이 어느덧 5백 가까이 되었다.
김 비서에게 일당을 받을 때마다 고이 제 책상 서랍에 모셔 두었는데 시우는 도재가 그 서랍을 한 번씩 열어보았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어린애 쌈짓돈 뺏으려고 열어본 건 아니고, 너무 대놓고 넣어두니 뭐에 쓰려고 저러나, 아직도 안 썼나 궁금해서 열어보았다. 도재는 김 비서와 함께 서랍을 열어보고 종종 실없는 대화를 나누곤 했다.
‘몰래 숨겨볼까?’
‘진심으로 우실 것 같습니다.’
‘그래,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애를 울려. 얘 이거 어디다 쓰려고 이래? 설마 학비 내려는 거 아니겠지.’
‘성적이 좋아 장학금 받으실 것 같습니다.’
‘뭐? 그럼 학비 안 들어?’
‘과탑이면 전액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알아볼까요?’
‘됐어. 지금 보니까 애가 외모만 보네. 돈 더럽게 안 든다 정말. 나 안 잘생겼으면 안 만나줬겠어.’
‘…….’
김 비서는 늘 비슷한 패턴이었던 제 상사의 꼴값을 받아 주다가 얼마 전 시우에게 지문 인식 자물쇠를 선물해주었다. 열쇠로 여는 건 그 열쇠를 남들 다 보는데 둘 것 같아 지문 인식이었다.
그렇게 꼭 한 번은 놀려먹고 싶어 손이 근질근질해 보이던 도재가 시우를 울리기 전에, 서랍엔 자물쇠가 달렸다.
시우는 무사히 돈뭉치를 꺼내 들었다. 도재의 생일선물을 살 돈이었다. 나가는 길에 도재에게 전화가 왔다.
-애기 어디가? 나간다며.
도재는 시우가 외출을 하면 따르는 경호원들로부터 외출 보고를 받았다.
“살 거 있어서 백화점에 잠깐 다녀올게요.”
-백화점? 웬일이래? 드디어 자발적으로 돈을 쓰는구나, 네가. 착해.
도재가 진지하게 칭찬했다.
-난 또 우리 애기 저축 왕이 꿈인 줄 알았어. 곧 개학하니까 꼬까옷 많이 사 입어.
“헤헤, 네.”
-웃기는, 너 거기서 파는 우유 아이스크림 좋아하잖아. 아이스크림 사줄 남편 없어서 어떡해? 나 되게 보고 싶겠네.
“아이스크림 안 사주셔도 보고 싶어요… 헤헤.”
‘씨발 퇴근해야겠다.’ 도재가 낮게 혼잣말을 읊조렸다. 출근도 시우가 시켰는데 퇴근도 시우 때문에 해야할 것 같았다.
도재의 혼잣말을 들은 시우는 손사래를 치며 제발 볼 일 다 보고 오시라 도재를 만류했다. 선물을 사고 그 선물을 집 안 어딘가에 숨겨둘 때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오늘은 진짜로 좀 바쁜 일이 있는 도재가 알았다며 간신히 퇴근의 뜻을 꺾었다. 도재는 시우에게 당부의 한마디를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밖에 나가서는 내 생각 하지 마. 우리 애기 내 생각하면 젖잖아.
***
“어어! 엄마, 엄마! 쟤 나온다.”
“얘, 넌 나서지 말고 가만히 있어. 툭 하면 때리고 욕하고 그랬는데 네 얼굴 보면 우리 시우 주머니에서 돈이 나오겠니?”
“엄마는 안 그런 것처럼 말한다.”
“얘! 그래도 난 똥 기저귀를 갈았어! 쟤가 뭐 태어나서부터 알아서 컸어?”
시우가 집을 나오길 간절히 바라고 있던 화영과 시원은 골목 어귀에 숨어 대문 쪽을 지켜보다 시우가 나옴에 호들갑을 떨었다.
이제 와 화영은 우리 시우, 우리 아들이란 간지러운 소리를 잘도 뱉었다. 이전에 한 번이라도 그리 불러주었다면 아마 주인을 배신하지 못하는 시우는 화영의 충견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다른 주인을 섬기고 있는 애였다.
남의 집 강아지를 상대로 주인 노릇이 하고 싶은 화영은 제가 시우에게 잘해주었던 기억을 간신히 쥐어짜내 떠올리고 있었다. 두 돌 때 형질 검사를 마치기 전이라 아주 한참을 거슬러 올라야 했다.
한 집에서 먹고 살게 해준 대가로 행한 정신적 학대는 안중에도 없었다. 화영은 제가 낳아 놓은 아기의 기저귀를 갈아줬다는 당연한 일로 생색을 내보려 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뻔뻔함이었지만 애당초 수치를 아는 사람이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거다.
몇 가지 떠오른 기억을 무기로 화영은 시우의 뒤를 밟았다.
***
뭐가 좋은 건지 잘 몰라 대학 친구들에게 자문을 구하고 인터넷 창에 ‘남자 명품’을 검색해 본 시우는 무얼 살지 다 정해놓고 왔기에 고민도 없이 구두 한 켤레와 지갑 하나, 벨트 하나를 사는데 5백만 원을 쿨하게 탕진하였다.
어차피 도재가 없었다면 벌지도 못했을 돈이고 도재에게는 제 콩팥 한 쪽도 떼어줄 애라 아깝지도 않았다.
제 안목에 자신이 없어 그냥 새로 나온 신상 중 제일 비싼 걸로 샀는데, 그래도 여전히 도재의 수준이 어떻게 되는지 가늠조차 못 하겠어서 도재가 좋아하지 않으면 어쩌나 불안하기도 했다.
그래서 앞치마도 하나 구매했다. 아직 결혼은 안했지만 여차하면 앞치마만 입고 생일상을 차려주려고 말이다. 도재가 좋아만 한다면 해주는 건 문제가 없지만, 생각만 해도 낯부끄럽긴 했다. 앞치마를 사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수상쩍게 얼굴이 벌게진 시우는 직원 보기가 민망해 냉큼 계산을 하고 나왔다.
시원을 도재네 집 앞에 두고 혼자 시우를 쫓아 나선 화영은 시우의 쇼핑 현장을 미행하며 다가갈 타이밍을 보았다. 시우를 양부모에게 넘기고 접근 또는 연락하지 않는다는 계약에 홀라당 사인을 해버려 우연히 마주친 척 해야 했다.
팔자가 아주 제대로 핀 옛 아들의 모습을 지척에서 실제로 보니 다시 한 번 속이 갑갑해 오는 화영이었다. 대번에 시선을 끄는 아름다운 우성 오메가 아들 옆에 팔짱을 끼고 같이 쇼핑을 다닐 사람이 제가 될 수도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아까워서 돌아버릴 만도 했다.
가지고 있던 명품 백을 팔아 생활을 연명하고 있는 지금의 제 모습과 시우가 현금 다발을 꺼내 물건들을 거침없이 사들이는 모습이 화영의 머릿속에서 오버랩 되었다. 화영은 시우에게 빨리 다가가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래도 아주 돌기 직전에 타이밍이 생겼다.
쇼핑을 마친 시우가 지하 식품 매장에서 파는 아이스크림을 사먹기 위해 내려갔다. 은근 큰 손인 것 치고는 참 소박한 입맛의 소유자였다.
평일 낮이라 그런지 식품관이 많이 북적이지 않아 좋았다. 시우는 경호원 형들 두 명에 제 것까지 총 세 개를 주문했다. 계산을 하려는 순간 이를 막아선 손길이 있었다.
시우가 돌아본 그 곳에는 화영이 있었다.
“시우야, 이런 데서 다 만나네? 오랜만에 보니 너무 멋있어졌다, 우리 아들.”
시우의 팔에 으스스한 소름이 돋았다. 제가 헛것을 듣는 줄 알았다. 시우의 표정에서 ‘왜 저래.’라는 말이 들리는 듯 했다.
그래도 엄마인데 자신을 받아줄 거라 예상했던 화영은 기대했던 바와 달리 남 대하는 것만 못한 시우의 태도가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일단 애를 앉혀 놓고 대화를 해야 꾀여내든 어쩌든 할 테니 시우가 주문한 아이스크림을 잽싸게 계산해주며 엄마가 사준다는 말도 안 되는 생색을 냈다.
화영은 테이블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는 시우에게 티슈를 챙겨주었다. 아주 어릴 때도 입가에 뭘 묻히고 먹으면 ‘더럽다’, ‘꼴 보기 싫으니 빨리 닦아라’ 하던 화영이었다. 묻히고 먹는 게 당연한 꼬마 애한테 물티슈 한 장 건네주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었다고. 그걸 스물 넘어 성인이 되고야 해주는 화영에 시우는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생에 한 번이라도 받아 보고 싶었던 엄마의 애정이지만 시우는 똑똑했고, 애정에 집착하는 아이이기에 더욱이 이건 애정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똑같은 아이스크림을 사주어도 도재가 사주는 건 남다른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 시우가 맛있어 하니 사람들로 북적대는 장소를 끔찍이 싫어하면서도 굳이 백화점의 혼잡한 식품 매장으로 함께 내려와 주는 그 마음이 애정이었다. 그러기에 시우가 삼천 원짜리 아이스크림 하나에도 감동하고 꼬리를 흔드는 것이었다.
시우가 무슨 모질이도 아니고 그냥 아이스크림 사준다면 따라가겠나, 그 수준은 이미 일곱 살 때 졸업했다. 하긴, 화영은 시우에게 모르는 사람 쫓아가지 말라는 소리 한 번 해준 적이 없어 모를 수도 있다.
시우는 화영이 어떤 사람인지 너무 뼛속 깊이 알고 있었다. 돈이 생기고 우성 오메가가 된 아들에게 적선하듯 아이스크림 한 번 사주고 콩고물을 뜯어보려는 건 절대 애정이 아니다.
화영이 이제 와서 이러는 의도가 너무 빤했다. 그래서 화영이 잘해주는 게 되려 시우를 더 씁쓸하게 했다. 시우가 도재의 사랑을 못 받고 우성 오메가가 되지 않았다면 시우는 평생 화영에게 티슈 한 장 건네받지 못했을 거라는 걸 확인시켜주는 듯 했다. 시우는 생에 딱 한 번만이라도 주는 거 없이 받는 엄마의 관심과 사랑을 받아보고 싶었는데 죽어도 안 되는 거였다.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확인시켜줄 것까진 없지 않았을까.
시우는 아이스크림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휴, 이건 기분 좋아지려고 먹는 건데.’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이렇게까지 기분이 더러운 건 처음이었다.
너 애기 때 어쨌다 하며 쉴 틈 없이 추억팔이를 하는데 모두 두 돌 이전의 이야기였다. 시우에겐 기억도 없는 추억을 저 혼자 떠들던 화영은 제가 떠들면 떠들수록 시우의 표정이 굳어감을 느껴 마음이 조급해졌다.
에라 모르겠다, 돌직구로 나가자는 생각에 화영은 시우에게 태중의 실직과 집안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집안 사정이 그렇게 어려우신 분이 백화점은 왜 나오셨는데요?”
“어? 아… 응, 그게.”
“이게 제가 가진 전부예요. 아이스크림 잘 먹었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아무리 순한 강아지여도 화나면 물 수 있다는 걸 보여주며 시우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
화영 앞에 덩그러니 놓여진 것은 도재의 생일 선물을 사고 남은 5만 원짜리 몇 장이었다. 시우가 진짜 제 돈이라 생각하는 건 그것밖에 없었으니 남은 전부를 준 것이긴 했다.
하지만 억대를 바라고 온 화영에게는 지극히 소박한 액수였다. 기가 차 웃음도 안 나올, 딱 그만큼이었다. 땅을 파 본다 한들 나올 돈은 아닌데 말이다.
‘아니 이게 누굴 거지 취급 하네.’
사실 거지처럼 구걸하러 온 거나 다름없으면서 거지 취급에 열이 오른 화영은 멀어져 가는 시우의 뒷모습을 노려보다 시원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실패를 알렸다.
“이거 보통내기 아니야. 이게 지금 낳아준 엄마한테 무슨 싸가지니? 시원이 네가 구슬리던 협박을 하던 어떻게 좀 해봐.”
“걔 지금 집으로 와?”
“몰라, 집으로 가겠지 뭐.”
“아 엄마가 알아서 한다며! 알았어. 일단 기다려봐. 일루 오면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몰라, 나도 이제 이판사판이야. 더 잃을 것도 없어.”
시우가 제 뜻대로 안 되자 화영은 다시 시원에게 희망을 걸어보았다. 허영심만 넘치지 우매하고 아둔한 게 딱 제 판박이인데 믿을 사람이 더럽게도 없었다.
“그래, 우리 시원이만 믿는다? 이 서방 돈 나올 건덕지도 없어 보이는데 이혼하고 우리 세 식구 외국으로 나가자. 딱 우리 새 출발 할 만큼만 받아와. 너 아직 어리구 우성 오메가가 어디 한국에서만 귀하니, 우리 충분히 다시 시작할 수 있어. 부자는 중국 부자가 최고라는데 중국 애들이 또 한국 애들 예쁘고 잘생겼다고 얼마나 좋아해. 우리 아들은 가면 난리 나지.”
“아 중국 애들 내 취향 아닌데. 어어! 잠깐 끊어봐. 서시우 오는 것 같다.”
중국 부자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저들끼리 김칫국을 마시던 모자의 대화는 시우를 태운 차가 집으로 향하는 골목 어귀로 들어서며 중단되었다.
시원은 골목에서 서행 중이던 시우의 차를 가로 막았다. 시우가 창문을 내리자 시원은 평생 한 번 묻지 않던 동생의 안부를 물었다.
“서시우, 잘 지냈냐?”
오늘 일진이 여러모로 사나운 시우였다. 고작해야 백화점과 집이 다인 심플한 동선인데 가는 곳마다 지뢰밭이었으니 말이다.
경호원들이 내려 시원을 제재하니 시원은 그들에게 제가 시우의 친형 되는 사람이라 일렀다. 시우의 가정사가 어떻게 되는지 그 내막을 알지 못하는 경호원들은 시원을 함부로 대해도 되는 걸까 고민하며 시우의 눈치를 살폈다.
화영과 태중이 시우와 부모자식 관계를 포기하면서 시원과 시우는 자연히 형제가 아니게 되었다. 또한 이미 제대로 잡힌 약점이 있는데 굳이 시우 앞에 나타날 멍청한 생각을 할까 싶어 시원에게는 시우에게 접근하거나 연락하지 않겠다는 계약을 따로 받지 않았다.
시우조차도 그런 계약이 있는지 몰랐다. 서류상으로 입양이 되었다고만 알고 있지 화영이 저를 얼마에 팔았는지, 고민 한 줄기 하는 기색 없이 얼마나 빨리 저를 포기했는지 알지 못했다. 돈을 받았겠거니 예상은 했지만 도재는 자세히 알려주지 않았고 시우도 굳이 알고 싶지 않았다. 사서 상처받을 일은 없기 때문이다.
시우가 무슨 반응을 해야 하나 멍해있는 사이 시원이 선수를 쳤다.
“야, 돈 달라고 온 거 아니야. 걱정 마. 나 결혼했어. 남편 돈 잘 벌어. 치과의사야.”
그래도 시원은 화영처럼 ‘내 동생’이나 ‘우리 시우’같은 호칭을 사용하며 가식을 떨지는 않았다. 그러니 돈 달라고 온 게 아니라는 소리가 크게 의심스럽지는 않았다.
“아… 그래? 결혼 축하해. 무슨 일인데.”
“이 집 나갈 때 놓고 간 게 있어.”
“뭔데? 찾아서 갖다 줄게.”
“너는 이 삼복더위에 형을 밖에 세워 두냐? 인간적으로 차는 한잔 내줘라.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여기 보는 눈이 몇 갠데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네 품행이 이러면 퍽도 좋은 소리 나오겠다.”
작게 한숨을 내쉰 시우가 도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원은 바짝 긴장했다. ‘아, 망했구나.’
하지만 시원의 걱정과 달리 이르려고 건 전화는 아니었다. 제멋대로 집에 사람을 들여 차를 내주고 그래 본 적이 없어서 허락을 받기 위함이었다.
-응, 시우야.
“저, 저기… 형이 두고 간 물건이 있다고 집 앞에 와서요… 잠깐 들어가서 차 한 잔 마셔도 될까요?”
-이제 네 집인데 네 마음이지. 우리 애기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심란한 하루를 보내던 시우는 도재의 다정한 음성에 살며시 미소 지을 수 있었다. 도재와 통화를 끊은 시우가 시원에게 손짓했다.
“들어가자, 형.”
제 집 들어가는 거 하나도 허락 받으며 사는 시우의 꼴에 속으로 너도 나랑 별반 다를 바 없구나, 하며 비웃던 시원은 통화 너머로 어렴풋이 들려오는 꿀 떨어지는 음성에 부들부들 치를 떨어야 했다. 시우는 의무로 허락을 받는 게 아닌 자의로 받는 것이었다.
도재는 시우의 수행 경호원들에게 이미 간략히 문자 보고를 받아 이를 알고 있었다. 시우가 듣고 있을 땐 유선 상으로 시우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지 않기 때문에 문자를 이용했다. 우리 똥강아지 목줄 답답하지 말라는 도재의 배려였다.
[백화점에서 어머니를 만나 대화 중이십니다.]
우리 애기 엄마 없는데?
어머니라는 표현이 거슬렸지만 구구절절 설명하기도 힘든 기구한 팔자를 가진 시우였기에 도재는 경호원의 잘못된 단어 선택을 지적하지 않았다.
우연히 만나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대화를 좀 나누다 바로 나왔다기에 시우가 알아서 잘 떨구었구나 생각했다. 그래도 만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퇴근 준비는 마쳤다.
그 짜증나는 얼굴을 봤으니 시우가 우울할 것이다. 달래러 가야 했다.
[집 앞에서 형님을 만나 대화 중이십니다.]
형님은 또 누구래, 가만 생각해보다 금세 누군지 감을 잡은 도재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한 쪽 입꼬리를 올렸다. 동네 백화점에서 화영을 만났는데 집 앞에는 시원이 찾아와 있다. 우연이라기엔 모자가 작당을 하고 함께 움직인 티가 너무 났다. 날짜라도 달리해서 찾아오던가, 심각하게 멍청해서 전투 의지도 들지 않을 정도였다.
시우가 시원과 차를 마셔도 되냐 허락을 받을 때, 도재는 이미 집으로 향하기 시작해 거의 다 와 가는 중이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시원이 제 귀가 소식을 옆에서 함께 들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때려잡는 맛이 나게 모르고 많이 날뛰었으면 좋겠다.
***
험한 꼴을 보이고 쫓겨난 시원이 시우의 형님 되는 자격으로 다시 집에 발을 들이니 집안 고용인들은 시원을 흘긋흘긋 곁눈질했다. 시우와 연이 끊어져 이제 형제도 아니란 것까지는 모르지만 설령 진짜 형이라 한들 무슨 낯으로 이곳엘 다시 올까 싶었다. 베타들에겐 가히 충격적인 발정기 짐승의 섹스를 이 집 앞마당에서 생중계로 보여주었으니 시원은 이 집 사람들에게 거의 포르노 배우 격이었다.
보통 철판이 아닌 시원은 그 눈빛들을 전부 받으면서도 무슨 차를 원하시냐는 메이드의 말에 망고와 바나나를 시원하게 갈아 민트 잎사귀를 띄워 주스를 만들어달라는 주문을 했다. 얼음을 몇 알 넣어야 하는지 까지 정해줄 기세였다.
그걸 들으며 시우는 저 진상과 피가 섞였다는 게 숙연해져 냉수 한 잔을 부탁했다.
“놓고 간 게 뭔데.”
“내 반지. 엄마가 가족 반지로 맞춰줬던 반지 어떤 건지 알지? 2층 방에 떨어뜨리고 나왔는지 도통 찾아도 없네. 내가 찾아봐도 되겠어? 이제 엄연히 네 집인데 내가 함부로 뒤지기가 좀 그렇잖아. 그거 가족 반지라 소중한 건데 부탁 좀 하자.”
그럴싸한 변명이었다. 단순히 돈을 주고 다시 살 수 있는 물건도 아니고 의미 있는 물건이라면 아무리 연 끊고 사는 동생 집이라도 부탁해 볼 수 있는 거였다. 물론 시우는 어떻게 생겼는지만 알고 가져본 적 없는 가족 반지였다. 작게 한숨을 내쉰 시우가 제가 찾아보고 올 테니 주스나 마시고 있으라며 티 룸을 나갔다.
시우가 시원이 썼던 방으로 안내해 줄 배 집사와 함께 2층으로 올라가자 시원은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틈을 타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그래도 잠깐 살았었다고 금방 찾아 들어갈 수 있었다.
도재 몰래 딱 한 번 들어와 본 적이 있는 드레스 룸이었다. 그때 시원이 찍어둔 시계가 하나 있었는데 50억이 넘어간다는 억 소리 나는 시계였다. 사실 도재가 가지고 있는 시계는 아무거나 하나 골라잡아도 모두 억대였다.
결혼하면 예물로 나도 이런 거 하나 받겠지, 헛된 꿈을 꾸었던 시원은 이제는 이판사판이라며 그걸 훔치기로 했다.
‘하나 없어져도 모를 만큼 많더만, 집 안에는 CCTV도 없으니까.’
그때 봐둔 그거 딱 하나만 잽싸게 들고 나오겠다는 생각이었다. 시계는 부피도 작으니 바지 주머니에 대충 찔러 넣고 위에 입은 박시한 셔츠로 가리면 그만이었다.
시원이 썩 도덕적으로 살진 않았지만 그래도 도둑질은 처음이었다. 시원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제가 봐둔 시계를 찾았다. 가뜩이나 초조해 죽겠는데 그 때와 위치가 달라져 있어 생각보다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다.
‘하… 시발 뭐야, 이거 어디 갔어.’
너무 긴장해 바지에 오줌을 지릴 뻔한 시원은 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주머니에 도재의 시계를 챙겨 나올 수 있었다.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다시 티 룸으로 복귀했다.
***
도재는 대문 앞에 차를 세워두고 핸드폰을 들어 아주 재미난 구경을 하고 있었다.
시원의 생각대로 집 안에는 CCTV가 없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침입자만 밖에서 찍으면 되지 생활 공간인 안방이나 화장실 같은 곳에 누가 CCTV를 달겠나.
하지만 드레스 룸은 달랐다. 시계 하나만 50억인데 심지어 그것만 있는 것도 아닌 방이니 당연히 달라야 했다. 고가의 미술품들이 걸려있고 시우가 약혼 선물로 받은 도자기가 진열된 응접실이나, 아파트 한 채 값은 기본인 시계들과 귀금속들이 진열된 드레스 룸에는 CCTV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성능 좋은 카메라는 제가 있다는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시원을 열심히 촬영했다.
집에 들어가지 않고 핸드폰에 연동된 CCTV 화면을 보던 도재가 질 나쁜 웃음을 흘렸다. 아무도 없는 주위를 끊임없이 좌우로 살피며 오줌이 마려운지 다리를 오므리고 발을 동동 구르는 시원의 범행 현장은 코미디였다.
***
아무리 찾아봐도 반지는 없어 시우가 다시 티 룸으로 돌아왔고 시원은 그럼 됐다며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시원은 조마조마한 도둑놈 티를 안 내려고 무던히도 노력하며 발걸음 속도를 조절하여 집을 나섰다. 자꾸만 뛰려고 하는 다리를 간신히 붙잡아야 했다.
물건을 훔친 채로 집을 빠져나가야 절도이니 도재는 제 시계를 훔쳐 달아나는 도둑을 잡지 않았다. 그래 나가라, 얼른 훔쳐가렴.
도재는 언뜻 신이 난 듯도 보였다. 제 인생을 좀 더 조져 달라 두 발로 직접 찾아왔는데 아주 성심성의껏 조져 드릴 계획이었다.
***
‘기껏 만들어 달래더니 입도 안 댔네,’
시원이 그대로 남기고 간 주스를 보며 시우가 한숨지었다. 휴, 해 달랬으면 먹기라도 맛있게 먹던가.
시우는 만들어준 아주머니의 성의를 보아 저라도 마실까 하다 시원이 먹다 내팽개친 걸 잔반처리 하듯 처리하는 건 잊어보려 죽어라 애쓰고 있는 과거를 상기시키는 일이나 마찬가지라 관두었다.
도저히 목구멍으로 넘어갈 것 같지 않아 잠시 고민하던 시우는 결국 아주머니가 안 볼 때 얼른 컵을 치우기로 했다. 멀쩡한 음식을 버릴 때 드는 마음이 싫은 시우는 볼을 부풀리며 컵을 정리해 들고 나왔다. 하나도 안 무서운데 아무튼 화는 난 똥강아지였다.
“서시우. 남편 왔다.”
티 룸을 나서자마자 들려오는 목소리에 시우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시우의 화는 허무하리만큼 빠르게 풀렸다.
“다녀오셨어요.”
주인이 오면 저러고 반갑다고 웃어주니 퇴근할 맛이 나는 도재였다. 일을 취미로 하는 도재는 출근이 싫고 퇴근이 좋다는 보통의 생각에 썩 공감하지 못했었는데 요즘은 시우 덕분에 퇴근의 참 의미를 느꼈다. 도재는 50억짜리 시계를 도둑맞은 사람치고 굉장히 평온한 얼굴로 시우에게 다가갔다.
도재의 페로몬도 함께 다가왔다.
킁킁, 시우가 가까워오는 페로몬을 느꼈다. 맡아도, 맡아도 신기했다. 향수 냄새는 후각만 자극한다면 페로몬은 향기가 온몸을 터치하는 기분이었다. 후각과 촉각이 동시에 자극되는 도재의 향은 시우의 아랫배를 찌릿찌릿하게 했다.
시우가 속으로 애국가를 불렀다. 이렇게 대낮부터 그저 걸어오고 있는 도재를 보며 젖으면 도저히 부끄러워 고개를 들고 살 수가 없었다.
시우의 코앞까지 다가온 도재가 두 팔을 벌렸지만 시우는 손에 든 컵 때문에 안기지 못했다.
“남편 돈 벌고 들어왔는데 안 안아줘?”
“아, 잠시만요.”
주방이 아닌 지척에 있던 화장실로 튀어 들어간 시우는 아주머니 몰래 주스를 버리고 깨끗이 헹궈낸 컵을 들고 나와 다시 주방 쪽으로 뛰어갔다.
무슨 의미의 행동인지는 모르겠지만 도재는 시우가 다시 돌아와 안길 때까지 가만 기다려주었다. 머지않아 분주히 돌아온 시우가 도재의 품에 폭삭 안겨왔다. 도재는 그런 시우의 머리통에 쪽쪽 뽀뽀를 내리며 시우의 엉덩이를 팡팡 두드려주었다.
“우리 시우 개학하면 무슨 재미로 사냐.”
혹시나 학교를 안 보내줄까 잔뜩 쫀 게 보이는 범생이가 퍽 간절한 눈빛으로 협상을 걸어왔다.
“개학해도 재밌게 해드릴게요….”
“아니 시우야,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재밌게 해줄 건지 제시를 해야 협상을 받아주지.”
“음… 뭐 해드려요?”
“됐어. 우리 애긴 얼굴만 봐도 재밌으니까 얼굴이나 매일 보여줘. 그럼 엠티 같은 건 가면 안 되겠다. 그치?”
“네! 저 엠티 안 가도 돼요.”
“아이 착해라.”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도재 덕분에 시우는 오늘 하루 제가 누굴 만났었는지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
불청객이 떠난 집은 다시 평화롭기만 했고 시우는 도재의 토닥임을 받으며 낮잠에 빠졌다. 잠든 시우의 이마에 입 맞춰준 도재는 김 비서에게 업무를 지시하기 위해 서재로 나왔다.
차 안에서 CCTV를 보던 도재가 ‘김 비서, 재밌는 거 보여줄까?’하며 진짜 재밌는 광경을 공유해준 지라 김 비서도 대충 돌아가는 상황은 파악하고 있었다.
“걔는 그 장물을 어디 팔 데는 있어서 가져간 거야? 아무데나 중고 명품 파는데 들고 가면 그냥 50억을 주는 줄 아나.”
“글쎄요, 전문 장물아비의 존재를 아는 수준의 지능은 아닌 것 같습니다.”
“너무 멍청해서 이거 원 싸움에 맛이 안 사네. 아니 우리 꼬맹이가 어떻게 그 집에서 나왔지?”
“유전은 한 대 걸러 오기도 하니까요.”
“시우는 할머니가 똑똑했나.”
“네. 그런 것 같습니다.”
김 비서는 상사의 실없는 소리에도 즉각 대답하는 프로페셔널한 비서였다. 요즘 제 상사와의 대화는 이처럼 사모님 칭찬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무슨 일로 시작한 대화였던 간에 마무리는 시우였다. 그래도 시우 이야기만 하면 제 상사의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에 부하 직원으로서 시우는 고마운 존재였다.
김 비서는 오늘도 별 희한한 업무 지시를 받았다. 뭐, 지루하진 않아서 좋았다. 김 비서가 일 처리를 위해 서재를 떠나고 문득 시우의 책상을 돌아본 도재가 열려있는 자물쇠를 발견했다.
다가가 서랍을 열어보았다.
“어? 돈 썼네.”
오늘 백화점에 나가 썼나 보다. 아니 근데 요 꼬맹이가 혼나려고 왜 내 돈은 안 쓰고 자기 돈을 써? 시우가 아주 돈맛이 들려 학교고 나발이고 팽개치고 제 옆에만 딱 붙어 있기를 바라는 도재는 혀를 끌끌 찼다.
아르바이트를 못 하게 하고 스스로 돈을 못 벌게 하면 시우는 삶의 보람을 못 느끼는 시무룩한 강아지가 될 것이고, 계속 시키자니 고작 푼돈을 버는 데도 저 쓸 만큼은 충분히 모아버려 도재의 돈을 축 내지 않았다. 딜레마였다.
시우가 뭘 사려고 그렇게 열심히 돈을 모았나 구경이나 해보기 위해 도재가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드레스 룸은 확장공사를 하여 이제 시우의 것이 꽤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시원이 시계를 단번에 못 찾고 허둥댄 이유도 리모델링을 하며 위치가 좀 바뀌었기 때문이다.
도재가 시원이 가져간 시계가 있던 자리를 슬쩍 쳐다보았다. 모르고 보면 정말 썩 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렇듯 알고 보면 그 부재가 여실히 느껴졌다. 한구석이 뻥 뚫려있는 듯한 시계 진열장을 보며 도재가 피식 조소했다.
시우가 새로 산 걸로 보이는 물건은 찾지 못했다. 뭐가 그렇게 갖고 싶었는지 궁금했는데 말이다.
어차피 이따 깨서 물어보면 술술 불 터이니 도재는 찾기를 포기하고 시우가 잠든 옆으로 가 누웠다. 도재는 모로 누워 자고 있는 시우의 목 뒤로 제 팔을 끼워 넣고 시우를 제 품에 가득 안았다.
자꾸 만지면 단잠에 방해가 될 걸 아는데 안 만지기엔 너무 중독성 있는 살결이었다.
“우리 애기 순둥이라 안 깨지, 그치.”
도재는 반 강요가 담긴 혼잣말을 내뱉으며 시우의 허리를 쓸어 내렸다. 시우는 여느 때와 같이 더 잘 잤으면 잘 잤지 깨지 않았다. 나중에 시우 같은 아기가 나오면 베이비시터들이 참 편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도재는 쓰다듬고 뽀뽀하며 낮잠 자는 시우의 곁을 지켰다. 낮잠을 자는 법이 거의 없는 도재도 눈이 감길 만큼 평화로웠다.
***
다음 날, 늦은 오후가 되자 도재네 대문 앞에는 다시금 불청객들이 찾아왔다.
김 비서에게 슬쩍 보고를 받은 도재가 시우를 잠시 2층으로 피신시키기 위해 불렀다. 내일이 당장 도재의 생일이라 부엌에서 아주머니께 미역국 비법을 전수 받던 시우가 도재의 부름에 쫄래쫄래 거실로 나왔다.
“시우야, 놀이방 가서 놀고 있어. 맘에 안 드는 손님들이 올 건데 우리 애기 보이면 귀찮게 할 거야.”
도서관은 시우만의 공간으로 내어준 거라 도재도 꼭 노크를 하고 들어가는 성역 같은 곳이었다. 그렇다 보니 제가 만들어 줘놓고도 도재가 먼저 도서관에 가서 놀라는 소리를 하는 건 흔치 않았다.
도서관을 좋아하는 시우는 당연히 덥석 물었다.
“네!”
귀찮게 한다니 무슨 기자들이라도 오나 생각했지만, 도재의 말엔 만사 무조건 순응하는 시우는 누가 오는지도 썩 알고 싶지 않아 당연 캐묻지도 않았다.
‘아무튼 시크해, 서시우.’
바로 돌아서서 2층으로 향하는 시우를 도재가 다시 붙잡았다.
“서시우.”
“네?”
“뽀뽀 해주고 가야지.”
5분 뒤면 피바람이 불 거실에서 핑크빛 ‘쪽’ 소리가 울렸다. 지켜보던 김 비서는 티 나지 않게 입꼬리를 올렸다. 참 다이내믹한 직장이었다.
시원과 화영은 뙤약볕을 맞으며 하염없이 정원을 가로 질렀다. 힘들었지만 평생 이렇게 걷는 한이 있어도 좋으니 도재의 집에는 당도하지 않길 바랐다. 하지만 바람과 달리 집은 자꾸만 가까워져 왔다. 두려움에 소름이 돋아 둘은 덥지도 않은 것 같았다.
둘은 도재의 시계를 곱게 상자에 넣어 그대로 반납하러 가는 길이었다.
어제 도재의 시계를 훔친 시원은 화영과 다시 접선하여 상황을 설명했다.
‘엄마 내가 이거 예전에 찍어 두고 검색해봤거든, 이거 50억 넘어간대. 내가 훔쳤다는 증거도 없으니까 팔아서 바로 외국으로 튀자.’
‘어머 얘, 그렇다고 도둑질을 해오면 어떡해!’
‘그럼 다시 갖다 둘까? 어?!’
‘아니… 그러라는 건 아니구… 근데 이게 진짜 50억이래?’
‘아 그렇다니까 중고로 반값만 받고 팔아도 25억이야.’
‘너 걸리지 않게 잘 한 건 맞아?’
‘엄마가 못 봐서 그래. 이거 하나 가져간다고 티도 안 날 만큼 시계가 널렸어. 그리고 CCTV도 없는데 뭐, 내가 가져갔단 증거 있어? 근데 찝찝하긴 하니까 빨리 처리하자. 없어진 거 알쯤에 우리는 이미 튀고 없는 거지!’
이 바보들은 저들이 굉장히 치밀한 줄 알았다. 전당포로 가야하나, 중고 명품을 매입하는 곳으로 가야하나 고민하던 둘은 일단 어디든 가보자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간도 더럽게 작은 둘은 훔친 물건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떨려 빨리 돈으로 바꿔 버리고 싶었다.
인터넷 카페 같은데 글을 올려 보증서와 영수증까지 전부 보관하고 있던 제 명품 백을 팔아본 적은 있어도, 전당포를 와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진짜 제 물건이었음 당당하기라도 했을 텐데 심지어 훔친 물건이라 둘은 괜스레 더 전당포 분위기에 압도당했다.
전당포 주인은 신분증을 요구했다.
“시, 신분증이요…?”
“네. 신원 확인 안 하고 받아주면 불법입니다.”
“아… 아… 잠시만요, 아 지갑을 차에 두고 왔나?”
어색한 연기를 펼치던 시원은 그냥 얼마 정도 받을 수 있는지만 확인해 달라 요청했다.
전당포 주인은 시계를 살펴보더니 시원에게 역으로 물었다.
“이름이 어떻게 돼요?”
“네? 왜, 왜요?”
시원이 누가 봐도 저 도둑놈입니다, 하듯 당황한 티를 내며 예민하게 굴자 옆에 있던 화영이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어 되려 더 싸가지 없게 나갔다.
“아니, 얼만지나 알려줘요. 이름 한도잰데 왜요? 신분증 없어서 어차피 내일 다시 와야 하니까 값이나 알려주세요, 빨리.”
전당포 주인이 저들을 수상히 여겨 신고라도 할까 무서웠던 화영은 일단 진짜 시계 주인의 이름을 말했다.
전당포 주인은 하도 장물을 들고 오는 사람들이 많아 이제는 거의 형사 급의 촉을 가지고 있었지만 화영이 시계에 각인되어 있는 ‘Dojae Han’ 과 동일한 이름을 말하기에 넘어가주는 척 하기로 했다.
언뜻 보면 잘 보이지 않는 자그마한 각인이라 화영과 시원은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지만 화영의 기지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이렇게 흔하지도 않고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을 지닌 물건은 잡지에나 소개되는 것이었다. ‘세상에 이런 물건도 있대요.’ 하고 말이다.
급전이 필요해 1, 2천만 원에 산 롤렉스를 팔러 온 사람들이야 현실감이 넘치지만 경매 전문 업체에나 맡겨야 할 물건을 동네 전당포에 가져왔으니, 전당포 주인은 쯧 혀를 차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타성에 젖은 주인은 귀찮아서 신고를 안 할 뿐이었다.
“우린 이거 값 치를 만큼 현금이 없는데? 뭐 정 급하면 현금 3억에 여기 롤렉스 몇 개랑 바꿔 가시던지.”
“아니 미쳤어요? 50억 넘는 거를!”
“이거 보증서는 가지고 있어요?”
“없어도 진품인 거 딱 알 거 아니야. 모르면 돋보기는 왜 들고 보는데요!”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장물을 들고 온 주제에 전당포 주인에게 잔뜩 짜증은 낸 화영과 시원은 씩씩대며 시계를 뺏어 들고 전당포를 나왔다.
집으로 돌아온 둘은 함께 안 좋은 머리를 싸매고 앉아 이놈의 시계를 어찌 처리하면 좋을까 고민했다. 그렇게 저녁도 거르고 한창 고민을 하는데, 김 비서가 보내온 메시지를 받았다.
메시지에는 다채로운 사진과 영상들이 첨부되어 있었다. 화영이 골목 어귀에서부터 시우를 미행하여 따라나서는 모습과 시원의 절도 현장을 담은 모습이 찍혀있었다. 합의를 원하면 시계와 함께 합의금 얼마를 준비해 내일 몇 시까지 집으로 오라는 내용을 읽다가 화영은 거품을 물었다.
[합의가 불가하다 여겨지면 경찰에 바로 넘기겠습니다. 또한 서시원 씨 배우자 분 번호로 같은 내용 전달할 예정이며 부산 자택으로 연락 갈 것입니다.]
결국 있는 돈, 없는 돈 전부 긁어모아 합의금에 한참 못 미치는 돈이라도 최대한 성의를 보여 들고 온 둘은 해외 도피의 꿈을 하루 만에 저버린 채 지금 도재 앞에 서있었다.
벌벌 떨고 있는 둘을 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린 도재가 입을 뗐다.
“앉아.”
시원은 몇 번 당해보아 바닥에 꿇어앉으라는 소리인 줄 대번에 알아들었다. 하지만 이를 미처 화영에게 알려주기 전, 화영은 이미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려 했다.
아니나 다를까 저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어른에게 도재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도재는 나이만 먹고 어른이 못 된 사람에게까지 어른 대접을 해줄 만큼 아량이 넓지 않았다.
“도둑놈들이 유치장 바닥에 가 앉아도 모자랄 마당에 팔자 좋게 무릎을 아끼네?”
잠깐 어리둥절해 하는 화영을 시원이 얼른 끌어다 함께 무릎을 꿇었다.
가지고 온 걸 꺼내 보라는 도재의 말에 화영이 웬 선물 상자 같은 곳에 곱게 모셔져 있는 시계와 돈 봉투를 내밀었다. 화영과 시원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단 무조건 잘못했다 사죄하기 시작했다.
둘이서 쌍으로 사죄의 이중창을 해대는 통에 도재가 미간을 구겼다.
“시끄러. 좀 닥쳐.”
싹싹 긁어모아 간신히 마련해온 돈이 천만 원이었는데 도재는 슬쩍 봉투 안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
딱 하루 시계를 가지고 있다 고스란히 가지고 온 시원에게 5억의 합의금을 요구한 도재였다. 한도재라는 사람에게 하루 간의 정신적 피해를 주기도 했고 이 도둑놈들 잡겠다고 김 비서라는 고급 인력도 사용되었으니 말이다.
시계가 없어진 날 밤에도 시우와 떡치기 바빴으면서 부른 합의금 액수만큼은 시계 때문에 아주 밤잠을 못 이루고 크게 마음고생이라도 한 액수였다.
사실 이쯤 되면 합의 못 하겠다 배 째고 그냥 형사 처벌을 받는 게 나을 법도 했지만, 시원은 ‘절도’로 빨간 줄을 긋고 남편에게 이혼을 당하면 제 인생엔 정말 답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무조건 도재가 하라는 대로 하여 남편에게 알려지는 일 없이 합의하기를 바랐다.
하필 박물관 문화재 격 되는 물건에 손을 댔으니 시원은 시계를 하루 만에 돌려주고도 합의금을 저렇게 요구하는 게 영 터무니없는 처사는 아니라 생각했다. 이 와중에 좀 덜 비싼 걸로 가져왔어야 했다는 후회를 했다.
시원과 화영은 5억은 당연히 준비하지 못했지만 일단 훔친 시계를 돌려주고 잘못했다 빌어보려고 걸음하였다. 반성의 모습을 보이면 물건만 돌려줘도 선처를 해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렇게 겪어보고도 도재에게 선처 따위를 바라다니 학습 능력이 매우 떨어지는 사람들이었다.
‘설마 우리 사정 뻔히 아는데 진짜 다 받으려는 거겠어? 죽어라 빌고 우리 선에서 합의 보고 넘어가는 게 최고야. 무조건 빌어.’
비는 게 화영과 시원의 계획이었는데 빌어 보려는 둘에게 시끄럽다고 닥치라 하니 둘은 어찌 할 바를 몰랐다.
“나랑 장난해? 4억 9천 어딨는데? 서시원 남편 5억 정도는 땡길 수 있겠던데 남편한테 받을까?”
“아, 아니요…! 제발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아 시끄럽고 4억 9천 가지고 와. 합의 해준다잖아.”
5억 까짓것 있으나 없으나 티도 안 날 재력을 가진 도재가 이렇게 득달같이 받아먹을 줄은 몰랐던 화영은 크게 당황했지만, 일단 전셋집 전세금을 뺄 때까지 시간을 좀 달라 말했다. 시우 팔고 받은 3억을 고스란히 도재에게 상납하고도 빚이 남을 판이었지만 일단 눈앞의 급한 불을 꺼야했다.
“3억? 그럼 1억 9천은.”
도재는 십 원 한 장 안 깎아주고 다 받을 생각이었다. 도재는 그 어떤 변명이나 우는 소리를 일절 받아주지 않았다. ‘닥치고 돈이나 내놓으라고.’ 받을 돈을 정당하게 받는 중이었지만 퍽 사채업자 같았다.
빌러 온 사람들에게 빌지 못하게 하니 시원과 화영은 서로 곁눈질을 하며 눈알만 굴리기 바빴다. 먹고 죽을래도 없는 돈인데 하룻밤 새 갑자기 5억이나 갚아야 하게 생겼다.
화영은 이 집에 있을 시우를 간절히도 마주치고 싶었다. 이쪽보단 그쪽에 빌어보는 게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우는 도재가 올려 보낸 간식을 먹으며 2층에서 평화로이 책을 읽고 있었다. 훈련을 잘 받은 강아지는 아마 도재가 내려오라고 할 때까지 안 내려올 것이다. 고로 화영은 한 때 제 막내아들이었던 시우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보지 못하고 돈 내놓으라는 도재의 독촉을 온몸으로 떠안아야 했다.
“아, 어쩔 거냐고. 빨리 대답 안 해? 대가리가 멍청하면 빠릿빠릿한 맛이라도 있어야지. 김 비서, 서시원 남편한테 전화 걸어서 집구석에 손버릇 더러운 사람 하나 잘못 들였다고 알려줘.”
일 잘하는 김 비서가 도재의 지시를 즉각 실행에 옮기려 하자 시원이 무릎으로 기어가 김 비서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아, 아, 안 돼요…!”
결국 화영이 딱딱한 대리석 바닥에 머리를 한껏 조아리며 일주일 안에 무슨 일이 있어도 나머지 4억 9천을 만들어오겠다 결단을 내렸다.
“그래. 어디 그래봐 그럼.”
다음 주엔 시우가 개학을 하기 때문에 심심하게 될 도재는 그들을 좀 더 오래 가지고 놀기 위해 잠시 말미를 주었다.
지금 당장 신장이라도 떼어갈 것 같던 도재가 화영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보내주기에 또 좋다고 감사하다 연신 고개를 숙이며 둘은 그 지옥 같은 집을 나섰다.
“너 이 서방한테 절도에 절 자도 꺼내지 말어!”
열성 알파 나부랭이랑은 이혼해 버리고 외국에서 새 출발 하자던 때는 언제고, 화영은 ‘절도’ 같은 추잡한 죄명이 붙게 생긴 아들을 데리고 살아주는 돈 잘 버는 사위에 급 애정이 생겼다.
“내가 미쳤어? 그런 소릴 하게.”
“어휴, 내가 너 때문에 미치겠다 이것아. 이게 무슨 꼴이니!”
“참나, 그럼 어제 돌려주고 오라고 말을 하던가! 신나서 팔 생각 해놓고 왜 나만 갖고 그래.”
“내가 뭘 신나! 너 빨리 이 서방 애나 가져. 각인도 하고 그 집에 손주를 안겨줘야 아파트는 고사하고 오피스텔이라도 하나 받을 거 아니야.”
“아 알았어, 알았어. 그나저나 돈 어쩔 건데.”
“어쩌긴 뭘 어째. 전세금 빼고 나머진 대출이라도 받던가 해야지. 네가 이 서방이 준 생활비에서 몰래 조금씩 떼어 가지고 대출이자 갚아, 이 화상아. 너 때문에 엄마 아빠 이 나이에 단칸방 들어가게 생겼잖아!”
“아까부터 왜 나만 가지고 그래! 아 몰라 그럼 같이 감방 가던지. 뭐 나만 그랬어?! 전당포는 나 혼자 갔냐고!”
모자는 하등 의미 없는 싸움을 이어가며 그렇게 도재의 집을 탈출했다. 물론 일주일 후 다시 제 발로 찾아와야 하는 집이지만 그래도 당장은 탈출한 것 자체가 감격이었다.
도재는 김 비서에게 천만 원이 든 봉투를 건네며 시우 이름으로 통장을 만들어 넣어두라 일렀다. 화영과 시원에게서 뜯어낸 의미 있는 돈은 시우가 갖는 것이 맞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코 묻은 돈 5백을 뜯기고 엉엉 울던 시우는 자기도 모르는 새에 한풀이 중이었다.
풍비박산은 일주일 후에 마저 내기로 했으니 도재는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2층으로 향했다.
똑똑.
“시우, 그만 놀고 나와.”
시우는 도서관에 숨겨 놓은 도재의 생일선물을 확인하다 화들짝 놀라 냉큼 다시 숨기곤 빼꼼 문을 열어 얼굴을 내밀었다.
“손님들 가셨어요?”
“응. 안 심심했어?”
“네.”
“하긴 우리 시우 여기서 노는 거 좋아하지. 너 이거 만들어준 사람 누구야.”
“여보요… 감사해요, 헤헤.”
“감사한 거 말고.”
감사한 거 말고 뭐가 있지? 한참을 고민한 시우가 까치발을 들고 뽀뽀를 해보았지만 뽀뽀도 정답이 아니었다.
도재가 ‘나는 서시우 사랑하니까 이거 만들어준 건데.’하며 힌트를 주자 시우는 그제야 볼을 발그레 붉히고 도재에게 사랑한다 말했다.
도재가 저를 사랑한다 해주니 계속 그 사랑이 받고 싶은 시우는 빨리 내일이 왔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도재의 생일엔 더 사랑스러운 짓을 많이 해주고 싶어서였다.
시우는 성격상 계속 사랑해 달라고 생떼를 쓰거나 조르지는 못하지만 대신 예쁜 짓도 성실하게 하고 사랑도 성실하게 갈구했다.
‘내일 선물을 드리면 나를 더 사랑해주겠지.’
생각만 해도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
시우는 도재의 미역국을 끓이겠다며 도재가 아침 일찍 일어나 조깅을 나설 때 함께 일어났다.
“잠을 많이 자야 키가 크는데? 시우 자고 싶은 만큼 자고 일어나서 해.”
“저 키 다 컸어요… 헤헤. 그리고 저 자고 싶은 만큼 잤어요! 괜찮아요.”
눈을 반도 못 떠놓고 씩씩하게 대답한 시우가 운동 잘 다녀오라며 도재의 볼에 쪽 뽀뽀를 해주곤 부지런히 움직였다.
검은 머리 외국인이나 다름없는 도재는 생일이라고 굳이 미역국을 안 챙겨 먹어도 아무 상관이 없었지만 시우의 열정에 찬물을 끼얹을 수 없어 그저 기특하다 칭찬을 해주며 운동에 나섰다. 시우의 분주한 엉덩이가 귀여워 파자마 바지를 내리고 왕 깨물어버리고 싶었지만, 뽀뽀까지 해줬는데 왜 안 나가냐 말하는 듯한 시우의 재촉 어린 눈빛에 피식 한 번 웃고는 등을 돌렸다.
도재가 운동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땐 웬일인지 고용인들이 만들어 내는 생활 소음이 일절 들리지 않고 적막하기만 했다. 꼬리를 흔들며 마중 나와야 마땅한 강아지도 안 보였다.
“시우 다시 자나?”
도재가 주변을 둘러보며 안으로 들어가니 부엌 쪽에서 미역국으로 추정되는 것이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있을지 그려지기에 도재는 입가에 미소를 띠우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당연히 예상했던 인물이 있었는데 미처 예상치는 못한 복장이라 도재는 잠시 돌처럼 자리에 굳었다.
제가 벗기고 싶었던 걸 어떻게 알았는지 벗기지 않아도 알아서 벗은 신통방통한 시우가 앞치마만 매고 민 궁둥이 두 짝을 보여주며 미역국의 간을 보고 있었다.
“하… 씨발….”
골 때리는 꼬맹이의 야한 재롱 덕분에 도재는 생일 아침나절부터 거한 꼴림의 표현으로 쌍욕을 짓씹었다.
***
도재가 운동을 나가자 시우는 말 그대로 똥강아지처럼 온 집안을 휘젓고 다녔다.
도재가 들어오기 전까지 미역국이 맛있게 끓여져 있어야 했고, 뭔가를 입었다고 할 수 없는 차림새로 있어야 하니 1층을 비워야 했고, 까치집에 눈곱이 낀 채로는 영 섹시하지 않을 테니 샤워도 마쳐야 했다.
시우는 여기저기 산재하여 자신의 일을 하고 계신 아주머니들을 찾아다니며 제가 할 테니 제발 두 시간만 자리를 비워 달라 간청했다.
도재의 생일파티를 하겠다고 혼자 분주해 숨넘어가는 사모님이 귀여워 고용인들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피해주었다. 일을 더 시키는 것도 아니고 잠깐 일을 하지 말라는 소리를 저리 간곡히 할 것까지 있나 싶어 웃음이 나왔지만 시우가 퍽 진지해 보였기에 응원해줄 뿐이었다.
미역을 불리는 사이 잽싸게 샤워를 마친 시우가 물기를 닦은 몸 위로 앞치마를 걸쳤다. 거울 앞에 서서 뒤를 돌아보려다 이내 말아버렸다. 굳이 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엉덩이가 너무 시원해 대충 제 꼴이 상상이 갔는데 직접 보기까지 하면 도저히 용기를 내지 못할 것 같았다.
혹여 준비한 선물들이 도재의 마음에 안 들 때를 대비해 준비한 앞치마였지만, 아낌없이 퍼주고 싶은 시우는 이런 거 저런 거 따지지 않고 그냥 해주기로 했다. 이게 과연 좋기는 좋은 걸까, 입는 순간까지 의구심이 들긴 했지만 말이다.
용기를 내긴 했는데 에어컨이 풀가동 되고 있는 집 안에서는 엉덩이가 꽤나 시렸다. 추운 게 문제가 아니라 시려운 엉덩이가 제 차림새가 어떻다는 걸 자꾸만 상기시켜주어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문제였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이렇게 시원한데 얼굴이 빨갛겠나, 제가 봐도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는 애 같아 시우는 냉장고에 얼굴을 들이밀어 열을 내렸다.
부끄러움을 떨쳐보려고 미역국에 집중하다 보니 도재가 들어오는 기척도 느끼지 못하던 시우는 뒤에서 밤마다 자주 듣는 익숙한 욕지거리가 들려오기에 고개를 돌렸다.
“하… 씨발….”
미역국보다 더 끓어오르는 눈빛을 매단 도재가 서있었다. 시우는 도재가 풀어내는 페로몬에 몸을 바르르 떨었다.
하읏…! 말랑한 엉덩이에 바짝 힘이 들어가 허벅지부터 엉덩이까지의 근육이 팽팽히 당겨 올려졌다. 그 뒤태가 누드화를 하나 그려놓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워 도재는 더욱 욕정했다.
점점 진해지는 도재의 페로몬에 만지지도 않은 페니스가 발기하는 건 시간 문제였다. 시우는 미역국 냄비 앞에서 하응… 하응… 작게 앓으면서도 다녀오셨냐는 인사를 건넸다.
성큼성큼 다가온 도재가 끓고 있는 냄비에 불을 끄고 시우를 한 팔로 번쩍 들어 홈 바 앞에 툭 내려놓았다.
“어어…! 아직 좀 더 끓여야 할 것 같은데….”
“우리 애기 살갗이 얼마나 맛있는데 데이기라도 하면 남편 마음 아파서 안 돼.”
도재가 엉덩이를 두드려 주며 ‘미역국 이따 마저 끓이세요.’ 하자 시우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착한 강아지는 칭찬 받아 마땅하기에 도재는 ‘착하다.’ 하며 시우의 이마에 쪽 뽀뽀를 해주었다. 옷을 입고 있을 때 치면 툭툭 소리가 나는 엉덩인데 맨살이라 척척 감기는 소리가 났다. 차진 살덩이가 제 손과 닿아 만들어내는 소리에 도재는 칭찬을 하다 말고 욕을 뱉었다.
“씹.”
도재가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식칼이나 다칠 만한 물건들을 있는 대로 싱크대에 처박기 시작했다. 퍽 성급한 손놀림이었다.
시우는 곧이어 벌어질 일이 상상되었다. 침을 꼴깍 삼키며 도재의 모습을 지켜보던 시우가 무심코 고개를 숙였다. 벌떡 서버린 제 것으로 인해 앞치마로 텐트를 친 앞섶을 발견했다. 얼굴이 화르륵 타오른 시우는 소심하게 앞치마를 펄럭이며 그 모습을 가려보려 애썼다.
안전한 섹스 환경을 빨리도 조성해낸 도재가 앞치마를 펄럭이는 시우의 재롱에 씩 웃으며 다가왔다.
“왜, 시우 자지 섰어?”
“…… 네….”
대답하기 창피한 질문이지만 아니라 그러는 건 너무 뻔한 거짓말이라 시우는 순순히 인정했다. 어차피 보면 아는 건데 의미 없는 부정은 하지 않았다. 도재가 가까이 다가오자 페로몬이 시우의 온몸에 파고들었다. 앞으로는 퐁퐁 프리컴이 새고 뒤는 울컥울컥 애액으로 젖어 들었다. 그렇게 도재의 오메가는 목마른 도재를 위해 물망초 향기 머금은 주스를 많이도 흘려주었다.
풀풀 풍기는 제 오메가의 향에 도재는 가뜩이나 살짝 맛이 가 있던 눈빛이 훼까닥 돌아버렸다.
“어디 봐봐.”
불쑥 앞치마 속을 침범한 손이 끝이 젖어있는 귀두를 빙그르르 만졌다. 엄지손가락으로 꾹꾹 눌러줄 때마다 끙끙 앓으면서도 일단 생일 축하한다는 인사를 챙겨 건네는 시우였다.
평소에 못 가지는 게 없으니 생일 선물로 무얼 받든 생일이 썩 특별한 날이 아니었던 도재는 예비 꼬마 신랑이 해주는 깜찍하고 야한 축하 인사에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도재가 웃어주니 시우도 상기된 얼굴로 배시시 따라 웃었다. 천진하게 웃는 게 귀여워 도재가 장난기 어린 목소리를 달았다.
“어이구 우리 애기 좋아요, 자지 만져주니까 좋아? 빨아줄까요?”
“아읏…! 하아… 아니, 아니, 괜찮아요…! 하읏….”
시우는 좋아 자지러지는 와중에도 ‘생일인데 그건 내가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하는 착해 빠진 생각을 했다.
“아니야? 하긴 우리 애긴 자지보다 뒤에 빨아주는 거 더 좋아하지.”
시우가 뭐라 반박할 새도 없이 도재는 시우를 뒤로 돌게 했다. 하긴 시간을 주어도 반박하진 않았을 거다. 실제로 맞는 말이기도 하고 맞지 않더라도 시우는 늘 도재가 그렇다면 그런 애였다.
홈 바를 잡고 엎드린 시우가 매라도 맞을 것 같은 자세에 긴장하여 몸에 바짝 힘을 주자 도재는 주사 놓기 전에 그러하듯 시우의 엉덩이를 두어 대 아프지 않게 때렸다.
“시우 힘 풀어야지, 착하지.”
검지와 중지를 붙인 손가락으로 엉덩이 계곡 사이를 아래에서 위로 쓰윽 훑어보니 뒤는 이미 애액으로 범벅이었다. 손가락에 가득 묻은 시우의 페로몬 덩어리에 타는 듯한 갈증을 느낀 도재는 그대로 몸을 내려 무릎을 꿇고 시우의 치부를 벌려 핥아대기 시작했다. 빨아주면 빨아 줄수록 더 많이 나오는 꿀물로 정신없이 목을 축였다.
도재가 호로록 소리까지 내며 미역국이 아닌 다른 국물을 너무도 맛있게 먹자 시우는 ‘여보, 여보…!’ 울어댔다. 정신없는 와중에 약간 안심을 했다. 제가 끓인 미역국이 맛이 없으면 어쩌나 걱정했기 때문이다. ‘다행이네, 이건 맛있으신가 보다.’
“아…! 안 돼! 여보! 여보! 하앗! 앗! 앗! 읏…!”
절정과 함께 바들바들 떨며 풀어지는 몸을 도재가 냉큼 일어나 잡아 주었다. 앞치마 앞이 동그랗게 젖어 있는 게 퍽 귀엽고, 퍽 꼴리는 모양새였다.
도재의 생일인데 저만 아주 진득한 서비스를 받는 것 같아 별게 다 미안해진 시우가 도재의 귓가에 속삭였다. ‘여보 자지도 얼른 박아주세요.’
예쁜 말을 하는 시우의 입술을 그대로 먹은 도재가 휙 시우를 들어 홈 바 위에 앉혔다. 누가 퍼붓는 건지 모를 키스가 한참 이어졌다.
도재가 마구 얽던 혀를 풀고 촉- 촉- 잔 입맞춤을 찍어 주며 제 혀가 들락거리던 구멍에 손가락을 넣었다.
“손가락부터 먹고 자지 먹자. 다리 접어서 벌려 보세요.”
못 참겠지만 아무리 생일이라도 안 풀고 박을 수는 없으니 도재는 조금이라도 푸는 척 성의를 보이기로 했다. 시우는 모르고 있지만 도재는 나름 꽉 잡혀 사는 중이었다.
앞치마가 덮여 도재의 손가락이 그 예쁜 구멍을 드나드는 게 보이지 않았다. 도재는 천 쪼가리를 휙 걷어 올려 시우의 입에 물렸다. 시우는 방금 몸을 덜덜 떨며 가 놓고 키스 좀 해줬다고 또 금세 앞을 세운 채였다. 바짝 선 시우의 앞을 본 도재가 시우의 머리를 쓸어 올려주며 놀리고 싶어 죽겠다는 미소를 지었다. 야한 농담임을 직감한 시우는 무슨 소리를 듣기도 전부터 민망함에 눈동자를 굴렸다.
“서시우, 네 남편 여기 풀어주느라 바쁜데 이것도 세우면 어떡해.”
도재가 턱짓으로 시우의 페니스를 가리키자 시우는 입에 앞치마를 물고 웅얼웅얼 대답했다. 앞에는 그냥 놔두셔도 된다는 소리였다.
“하긴, 시우 뒤로만 잘 가지.”
도재는 가끔 시우가 자위하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그런 거 절대 안 할 것 같은 애들이 하는 모습이 원래 더 궁금하고 자극적인 법이니 말이다. 베타인 평범한 남자아이로 남중, 남고를 다니며 청소년기를 보낸 시우가 안 해보았을 리 없어 더 궁금했다.
시키면 해줄 것 같긴 한데 왠지 시우라면 ‘넌 그 짓 하는 나를 굳이 보고 싶니’라고 말하는 듯한, 사람 반성하게 만드는 눈빛을 보낼 것 같았다.
‘그래, 애한테 시킬 짓은 아니지’ 생각하며 그간 깔끔하게 포기해왔던 도재는 오늘 생일을 핑계로 날을 잡았다.
“시우, 남편 바쁘니까 앞에는 시우가 만져.”
도재의 한 손은 구멍을 풀어주느라 바빴고 다른 한 손은 시우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느라 바빴다.
그럼 머리를 쓸어 주는 손길을 멈추면 되지 않을까 싶지만 시우는 도재가 제 머리를 만져 주는 걸 유달리 좋아한다. 그래서 시우에게 지금 도재는 굉장히 합당한 일로 두 손이 바쁘다 할 수 있었다.
“우리 시우 앞에 만져줄 때 표정이 얼마나 예쁜데. 보여줘 봐.”
제 머리에 내리는 도재의 손길이 거둬지는 건 싫은 시우가 얼른 제 손을 뻗어 자신의 페니스를 흔들기 시작했다.
도재로부터 성적인 행위 그 일련의 것들에 깊은 가르침을 받은 시우는 부끄러워할 뿐 이제 꽤나 화려한 섹스 스킬을 가지게 되었는데 자위는 가르칠 일이 없어 발전이 없었다. 평소에도 썩 하지 않던 짓인 데다가 도재를 만난 이후로는 더욱 더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늘 일도 없었다.
결론적으로 시우는 자위를 더럽게 못했다. 마치 처음 하던 펠라처럼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아니 저걸 저렇게 못하기도 하는구나, 신기할 만큼의 손놀림이었다. 그러고 만진다고 퍽이나 좋겠다. 도재는 속으로만 생각하다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큼큼, 목을 가다듬으며 간신히 웃음을 멈춘 도재가 울상이 된 시우의 사랑스러운 얼굴에 쪽쪽 뽀뽀를 퍼부으며 말했다.
“아니 이쁜아, 남편 자지는 환장하고 만져 대면서 왜 그래. 내 거 만지듯이 만져봐.”
자신의 허접한 자위 때문에 더 꼴리게는 못할망정 분위기를 깨버린 듯해 위축된 시우는 갈수록 더 가관으로 못했다.
그래, 남편 자지만 잘 만지면 됐지 뭐. 하긴 시우는 은근 화끈해서 보통 손보다는 입부터 들이댔다. 손은 거들 뿐이랄까. 핸드잡을 배우지 못한 어린양이 진심으로 시무룩해 하기에 도재는 시우의 입에 물린 앞치마를 빼주고 진한 키스로 시우를 달랬다.
시우는 깨진 분위기를 만회해보고자 도재의 키스를 받으며 페로몬을 짙게 풀어냈다.
“우리 애기 많이 컸네, 이러고 꼬실 줄도 알고.”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어 던져 버린 도재가 단숨에 뿌리까지 제 것을 박아 넣었다.
***
그렇게 열심히 풀어줘도 들어서면 늘 빠듯했다. 맛있게도 물어오는 통에 도재는 미역국 냄새가 나는 부엌에서 먹으라는 건 안 먹고 시우를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사실 둘의 페로몬이 부엌을 가득 메우니 어느덧 다른 향기는 느껴지지도 않았다. 얼핏 냉장고도 보이고 국자도 시선에 걸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에게만큼은 아무도 없는 울창한 숲 속이었다. 촉촉한 물기 머금은 물망초가 도재에게 매달려 앙앙 지칠 줄 모르고 울어댔다.
“어흑…!”
오늘 아주 작정하고 조이는 시우 덕에 도재는 온몸에 전율이 이는 쾌감을 느끼며 절정을 맞았다. 퍽퍽 쳐올리는 가차 없는 허리 짓 중간에 거추장스러운 시우의 앞치마도 다 벗겨 던져 버린 지 오래라, 도재는 제 품에서 사정의 여운을 느끼며 떨고 있는 시우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저로 인해 터질 듯이 뛰고 있는 심장이 퍽 만족스러웠다.
“서시우, 뽀뽀.”
도재의 어깨에 머리를 박고 있던 시우가 고개를 들었다. 쪽- 말랑한 입술이 기분 좋게 닿아왔다. 완벽한 섹스의 마무리이자, 최고의 생일선물이었다.
잠시 안겨있던 시우는 맥박이 정상으로 돌아오자 다시 분주해졌다. 미역국 냄비에 불을 올리고 홈 바 위에 튄 낯 뜨거운 흔적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도재가 그 모습을 가만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우리 애는 참, 뭐가 늘 바빠. 쪼끄만 게 바쁜 거 존나 귀여운데.
“시우 이리와. 좀 더 안고 있어. 너 그렇게 홀딱 벗고 종종거리면 또 하고 싶어.”
“어… 일단 미역국 드시고… 방에 가서 또 하면 안 돼요?”
안 하겠다 소리는 안 하는 게 예뻐서 도재는 냄비 앞에 서있는 시우를 뒤에서 가득 끌어안았다. 도재가 목덜미에 입술을 눌러 비비자 시우가 배시시 웃었다.
더럽게 사랑스러워서 가만 못 두겠는 애였다. 어린 조카와 놀아줌을 빙자한 울리기를 시전 하는 못난 삼촌처럼 도재가 시우의 요리를 방해하기 시작했다. 옆구리를 콕콕 찌르고 배꼽도 간지럽히며 제 생일상 차린다고 바쁜 애를 괴롭혔다. 그럼에도 순둥이가 ‘그래 만져라’ 하듯 가만있기에 도재는 나쁜 손을 좀 더 위로 뻗쳐 젖꼭지를 조물조물 만지기 시작했다.
“하응…! 아, 아, 안 돼…! 으응… 안 돼요…! 또 서요.”
씩씩해서 울지는 않는데 짜증도 못 내고 발만 동동 구르는 시우였다. 계란말이 마느라 집중하고 있는 시우가 불 앞에서 발정이 나면 다칠 수도 있으니 도재는 적절한 타이밍에 그만 멈춰주었다.
“미안 미안, 우리 순둥이 너무 예뻐서 그랬어.”
“헤헤, 괜찮아요.”
예뻐서 그랬다고 하면 애초에 나지도 않았던 화가 또 사르르 녹아버리는 맹탕 시우는 사람인데 꼭 액체 같았다.
‘그래서 물이 많은가? 벌려서 다시 빨아 먹으면 화내려나.’
사랑에 기반한 도재의 장난에는 화내지 않을 시우이지만 도재는 상 차린다고 열심인 시우의 정성을 보아 이만 하고 진짜 밥을 먹기로 했다. 시우도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허기가 질 터였다.
시우는 제 밥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도재가 맛있게 먹는지 아닌지를 살피느라 정신없었다. 한 술, 한 술 도재의 입으로 제가 만든 밥이 넘어갈 때마다 뿌듯함을 느꼈다. 저에겐 한없이 다정한 사람이지만 왠지 맛없는 걸 억지로 먹어줄 위인은 아닌 것 같아 시우는 도재가 먹어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졌다.
“우리 시우 자위 빼고는 못 하는 게 없네. 너무 맛있다.”
맛있다는 말만 하면 될 것을 꼭 안 해도 될 말까지 붙이는 도재이지만 죽이 잘 맞는 도재의 약혼자는 알아서 걸러 듣는 재주가 있었다. 시우는 맛있다는 소리에 그저 좋다고 두근거렸다.
평소 아침은 간단히 서양식으로 먹는 게 습관이라 밥은 차려 놔도 잘 안 넘어가는 도재인데 운동을 거하게 하여 그런지 밥맛도 좋고, 시우의 손맛도 좋아 한 공기를 뚝딱 비웠다. 맛있다는 소리가 빈말이 아님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도재가 다 먹을 동안 그 먹는 모습을 훔쳐보느라 시우는 밥이 그대로 남았다. 쯧, 혀를 찬 도재가 옆에 앉아 있는 시우에게 제 허벅지를 두드리며 말했다.
“우리 애기 갈수록 애기네. 밥도 먹여줘야 먹고. 이리와.”
“아, 아니에요! 혼자 먹을 수 있어요….”
“쓰읍.”
진짜 혼자 못 먹는 줄 알고 오라는 건 아니었기에 도재는 뜻을 굽히지 않고 다시 한 번 제 허벅지를 툭툭 쳤다.
시우는 도재의 생일인데 제가 챙김을 받는 게 미안했다. 저는 국에 말아서 대충 후루룩 먹어도 그만인데. 시우는 이래도 되나 하는 표정으로 쭈뼛쭈뼛 다가가 도재의 허벅지에 살포시 앉았다. 알몸이라 소심하게 들이대는 시우의 궁둥이가 귀여워 피식 웃음을 흘린 도재가 한 팔로 휙 허리를 감아 제 허벅지 사이에 시우를 가둔 뒤 바짝 당겼다.
“우리 애기 밥을 많이 먹어야지 이따 방에 가서 또 떡을 치지.”
도재가 무슨 반찬을 주냐 물어도 아무거나 괜찮다고 쑥스러워 하는 강아지의 뒤통수에 뽀뽀를 내리며 알아서 골고루 집어 먹였다.
‘그래, 너한테 무슨 대답을 바라겠냐. 알아서 잘 해야지 내가.’
식사를 마친 뒤 함께 샤워를 하고 나온 둘의 분위기가 또 다시 달아오르는 건 시간 문제였다. 도재가 침대에 시우를 던지려는데 시우는 무언가 번뜩 떠오른 듯 눈을 크게 뜨더니 2층에서 하자는 깜찍한 제안을 했다. 섹스에 관해 능동적으로 제안을 하고 나서는 건 굉장히 칭찬할 일이기에 도재는 샤워 가운을 입은 시우의 엉덩이를 팡팡 두드려주며 시우를 안아 들고 방을 나섰다.
“시우 어느 책에다 쌀래? 시우는 아끼는 책에 싸는 게 좋아, 아끼지 않는 책에 싸는 게 좋아?”
“…… 네?”
책에다 싸고 싶어서 가자고 한 건 아니지만 일단 도재가 묻는 말엔 답을 해야 하기에 시우는 아끼지 않는 책에 싸는 게 좋다고 했다. 아끼는 물건에 어떻게 그런 망측한 짓을 하겠나.
이에 도재는 퍽도 낭만적인 대꾸를 해주었다.
“나는 서시우가 싸질러 놓은 정액보다 아끼는 책은 없는데.”
저따위 말이 뭐가 그리 감동인지 볼이 발그레 달아오른 시우가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제가 싸질러 놓은 정액을 더러워 하지 않고 아껴줘서 감사했다.
“그래. 시우 많이 감사해하고. 뽀뽀.”
쪽쪽 멈출 줄 모르는 입맞춤을 하며 둘은 시우의 도서관에 도착했다. 도재가 뽀뽀를 키스로 전환하려던 차에 시우가 다급히 도재의 품을 빠져나왔다. 쫄래쫄래 어디론가 가던 시우는 책장과 책장 사이에 숨겨놓았던 도재의 생일선물들을 꺼내왔다.
“이게 뭐야?”
“이거… 진짜 선물이요… 근데 맘에 안 드시면 바꿔 올게요.”
시우가 어디에 제 코 묻은 돈을 몰빵 했는지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구두면 구두, 지갑이면 지갑 하나만 사와도 되는데 쇼핑도 정직하게 제가 가진 돈을 딱 채워 아낌없이 사온 듯 했다. 도재는 다 퍼주는 시우에 심장이 저릿했다.
‘꼬맹이 주제에 되게 멋있네.’
도재는 선물을 주는 사람이면서도 눈에 띄게 전전긍긍하는 시우를 안심시켜주기 위해 네 용돈이나 하지 뭐 이런 걸 다 사왔냐는 인사치레는 하지 않았다. 도재는 고맙다, 예쁜 거 잘 사왔다 하며 시우가 가장 듣고 싶은 말을 망설임 없이 해주었다.
도재가 제 성의를 무시하지 않자 행복한 강아지는 주인을 기쁘게 함에 보람을 느끼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다행이다’ 작게 혼잣말했다.
“우리 시우 안목이 남편 닮아가네.”
“내년 생일엔 더 좋은 걸로 해드릴게요… 헤헤.”
“이보다 완벽할 수는 없는데 뭘 더 해줘. 아, 내년엔 자위를 좀 잘해보려고?”
“…… 네? 그거 음… 그거… 잘했으면 좋겠어요…?”
놀리는 건데 뭐든 열심히 하는 시우가 진짜 연습이라도 할 기세라서 도재는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며 시우를 만류했다.
“남편 있는데 그런 걸 뭐 하러 해. 남편한테 만져주세요 하면 되지. 그치?”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는 시우조차도 선물이 되는 그런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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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했던 생일부터 시우의 개학 전 마지막 주말까지 깨 볶는 시간을 보내던 도재는 시우의 개학과 함께 제 강아지가 저와 놀아주는 시간이 줄어들어 부쩍 예민해졌다. 누구 하나 잘못 걸리기라도 했다간 아주 갈아버릴 기세였다.
도재는 방학의 시작과 함께 발현한 시우와 약혼을 했고, 애가 학교를 안 가니 도재도 웬만하면 자택에서 업무를 처리하며 종일 눈앞에 시우를 두고 살았다. 처음부터 방학이라는 걸 안 겪었으면 몰라도 시우가 개학을 하니 마치 무언가 빼앗긴 기분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시우가 학교 가고 없는 시간에 이유 없이 심기가 불편했다.
시우가 하교만 하면 사라지는 상사의 예민함에 김 비서는 요즘 시우가 사이버 대학을 다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하지만 도재의 어머니가 시우에게 저와 동문이라는 것에 반가움을 표하는 바람에, 계속 어머니께 예쁨이 받고 싶은 시우는 아마 곧 죽어도 졸업을 할 것 같았다.
김 비서가 도재에게 오늘 오후 두 시에 화영과 시원이 올 것이라는 일정을 알렸다.
전셋집을 빼는 것 때문에 며칠 시간을 더 준 도재였다. 물론 공짜는 아니고 하루에 천만 원 씩 늘어나는 걸로 합의를 보았다. 합의라기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만 도재는 분명 전했다. 돈이 없으면 그냥 경찰서로 가라고 말이다.
“벌써 일주일이야? 시우 오늘 학교 몇 시에 끝나지?”
“사모님 오늘 네 시에 끝나십니다.”
“걔네 처리하고 데리러 가면 딱이겠네. 알았어, 일 봐.”
화영과 시원은 도재가 준 일주일 약간 넘는 말미 간에 지금껏 살아 온 인생 중 가장 바쁜 나날들을 보냈다. 태중은 사고를 제대로 치고 돌아온 부인과 아들에 ‘이런 정신 나간 것들이 누굴 망하게 하려고!’ 따위의 말들로 열을 올리며 고함을 지르다 냄비 기질이 있어 그런지 또 금방 체념하였다.
전세 계약 중간에 집을 빼게 되어 임대인에게 사정을 호소하는 전화도 넣어야 했고, 빨리 매물을 빼기 위해 동네 부동산 오만 군데에 전부 집을 내놓고 다녔다.
‘빨리 좀 빼주시면 사례는 톡톡히 할게요.’
얼마의 사례를 하든 하루에 천만 원씩 늘어나는 합의금보다는 나았다.
그 와중에 이삿짐도 쌌고 시원이 제 남편과 살림을 차린 부산에 방을 하나 얻었다. 손해는 좀 감수해야 했지만 다행히 요즘 전세가 귀해 집은 빨리 뺄 수 있었다.
화영은 도재에게 공짜 월급을 받던 시절에 사들인 값 좀 나간다 하는 물건들을 급하게 처분했고 나머지는 시원이 대출을 받아 메꿨다. 소득도 없고 재산도 전무한 시원은 남편의 소득을 증빙하고 저와 남편의 관계를 입증하여 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이에 대해 허락은 무슨, 대출의 대 자도 꺼내지 못했지만 앞으로 받는 생활비에서 조금씩 떼어 착실히 갚으면 문제없을 거라 생각했다.
다행히 시원의 남편은 알파 유세는 좀 심해도 가계부를 써서 검사를 받으라는 둥 하는 터무니없는 일은 시키지 않았다. 남의 등골 뽑아 먹고 살 생각만 하는 시원의 가족들과는 달리 번창하는 치과 덕에 몹시 바빠서 가계부나 검사하고 있을 겨를이 없기 때문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태중과 화영은 연고도 없는 부산의 반지하 단칸방으로 이사까지 마치게 되었다. 중간중간 머리털이 다 빠져나올 만큼 스트레스를 받아 악다구니를 쓰고 잡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 던지는 패악을 몇 번 부렸지만 어찌어찌 돈은 만들었다. 이 중 3억은 도재가 줬던 돈, 나머지는 은행 빚이었다.
화영과 시원은 부산에서부터 부랴부랴 올라와 도재의 앞에 준비한 돈을 꺼내 놓았다.
절도 사건은 이로써 깔끔하게 없던 것으로 합의되었다. 호환마마보다 무섭게 느껴지던 도재와의 미팅은 3분도 채 이어지지 않았다.
돈을 확인한 도재가 의외로 싱긋 웃으며 가보라는 한마디를 건넸기 때문이다.
‘있는 것들이 더하다더니 저래서 부자가 됐나, 한 푼을 안 깎아주네.’
막상 돈을 구해오고 나면 노력이 가상해 몇 천이라도 빼주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너무 허무하게 제 손을 떠나버린 5억에 화영과 시원은 피폐해진 얼굴로 도재의 집을 나섰다.
부산까지 또 어느 세월에 갈는지 말없이 한숨만 푹푹 뱉었지만 어쨌든 수갑 찰 일은 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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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도범으로 낙인찍힐 뻔한 제 인생을 극적 합의로 구출해 낸 시원은 갑자기 남편에 대한 애정이 샘솟았다.
청담동이 아니면 좀 어떠하리, 창밖으로 부산 앞바다가 멋들어지게 펼쳐지는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에 살게 해주는 남편인데 악마 같은 도재나 무능력한 태중 보다는 훨씬 좋은 남편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오늘 저녁엔 장어라도 사다 구워 줘야지.’
화영 또한 넋 나간 사람처럼 사라진 5억을 허망해 하다 틈만 나면 이 서방한테 잘하라는 잔소리를 던졌다. 단칸방 월세도, 대출금 상환도 전부 이 서방에게 달려있으니 말이다.
앞뒤 가리는 것 없이 일단 돈부터 구하자는 생각에 정신이 없어 미래가 암담하다는 생각을 할 시간조차 없었던 화영은 앞으로 그 곰팡내 나는 단칸방에서 살아갈 생각을 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저 시원이 깨끗한 신축 오피스텔이라도 하나 받아왔으면 하는 바람 밖에는 없었다.
“시원아, 엄마는 항상 너밖에 없었던 거 알지? 근데 이젠 진짜 너밖에 없다. 이 서방한테 잘해.”
“아, 안 그래도 잘할 거야.”
비슷한 패턴으로 반복되는 대화를 나누며 모자는 부산까지의 머나먼 길을 나섰다.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서씨 집안의 희망이 된 이 서방은 시원과 화영이 기차에 올라 한창 부산을 향해 내려오던 중 김 비서의 연락을 받았다.
그 연락은 진료를 기다리고 있던 많은 환자들을 뒤로하고 서둘러 병원 문을 닫게 만들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멀쩡한 사람 생니를 뽑아버릴 것 같아서 말이다.
전화를 걸어온 김 비서로부터 간략한 설명을 들은 이 서방은 제 처가 식구와 도재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계약서를 확인했다. 시원이 처음 도재의 집에 들어와 살기로 했을 때 쓴 계약서와 후에 3억을 받으며 추가로 작성한 계약서였다.
기차 안에서 껌벅껌벅 졸던 시원의 전화기에 불이 나기 시작했다. 남편과 시어머니가 서로 번갈아 가며 전화질이었다. 이렇게 열렬히 저를 찾을만한 사람들이 아닌데 느낌이 이상했다. 평상시 시어머니가 시원에게 전화를 걸어 하는 말이라곤 손주 압박이 다였다. 전화를 한다고 당장 떡이라도 쳐서 아기를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단순 손주 타령을 하기 위해 안 받는데도 계속 전화를 해대진 않을 것이다. 또한 남편은 일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근무 중에 한 번씩 연락을 남기는 다정함 따위 없는 사람이었다.
저승사자 같은 도재나 김 비서에게서 오는 연락도 아닌데 왜 이렇게 불안했을까, 시원은 순간 너무 오싹하여 일단 전화를 피하고 보았다.
몇 번의 전화가 시도되고 시원이 받지 않자 확인하는 대로 당장 전화 하라는 문자메시지 테러가 시작되었다.
이에 시원은 옆에서 함께 졸고 있던 화영을 깨워 제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엄마, 엄마 좀 일어나봐… 이게 무슨 일이지.”
“그러게 무슨 일이라니… 설마 대출 걸렸나…?”
“몰라… 어떡해….”
“절도는 이제 없던 일이니까 너무 큰 걱정하지 마. 도둑놈만 아니면 되는 거 아니니? 대출 그거 이 서방 덕분에 심사 통과된 거긴 하지만 어차피 네 이름으로 빌린 거잖아. 네 아빠랑 나랑 살 집 구하려고 급하게 받은 거라고 엄마가 해명해 줄게. 우리가 알아서 갚는다고 말만 그렇게 하면 되지 뭐.”
“하… 엄마 나 괜찮겠지?”
“괜찮겠지. 아니 괜찮아야지, 무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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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의 긍정적인 사고를 짓뭉개 버리듯 시원네 식구들은 괜찮지 못했다.
집에 들어가기 무섭다는 시원 때문에 화영도 제 집으로 가지 않고 시원의 집으로 함께 갔다. 그들이 집에 도착했을 땐 시원의 짐은 이미 밖에 내던져져 있었고, 화영은 사기 결혼으로 소송을 걸겠다며 길길이 날뛰는 사부인을 대면해야 했다.
‘사기 결혼…? 대출은 결혼하고 받은 건데 결혼 전에 뭘 속였지…?’
절도죄로 그어질 빨간 줄이 무서워 잠시 잊고 살던 과거였다.
이 서방이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어리둥절해 하는 화영과 시원에게 제가 들은 이야기의 정체를 알렸다. 다른 집과 혼담을 결정짓던 중 동거를 먼저 시작했고 동거인도 아닌 동거인이 거느린 고용인 둘과 히트 사이클을 보내 쫓겨났다는 그 스토리였다. 혼담도 정상적인 혼담이 아닌 돈을 받고 아들을 사고파는 수준이나 마찬가지였으니 화영은 제정신이냐는 사부인의 말에 잠시 멍하니 눈만 끔벅였다.
과거가 다 무슨 소용이겠냐만 그런 진보된 생각 따위는 오메가에게 적용되지 않았다. 특히나 우성의 기품과 우아함 따위를 내세워 비루한 집안에서조차 숟가락 하나 안 들고 시집 온 시원에게는 말이다.
처음부터 말했으면 당연히 결혼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해해 달라 솔직하게 밝혔던 것도 아니고 속일 수만 있으면 계속 속이려 했던 건 맞으니 사기라는 사부인의 고함에 변명의 여지가 없는 건 사실이었다. 히트 사이클 때 벌어진 일이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며 사정해보았지만 바로 이혼 절차를 밟겠다는 단호한 답변만 돌아올 뿐이었다.
그렇게 결국 세 식구는 희망의 끈이었던 이 서방을 놓치고 단칸방에 억 소리 나는 빚을 떠안은 채 남겨지게 되었다.
분노한 태중이 꼴에 저는 알파라고 오메가들이 나서는 것 보다는 위협적으로 보일 거라는 생각에 김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따져 물었다. 시원이 그 집에 살 때 벌어진 일은 없던 일로 하기로 다 계약이 되어 있는데 이렇게 더럽고 치졸하게 나오면 어떡하냐는 같잖은 컴플레인이었다.
김 비서는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그건 시우에게 접근 또는 연락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성립되었던 계약이었고 먼저 어긴 것은 화영이라는 답변이었다. 골목 어귀에서 지켜보고 있다 시우가 외출에 나서자 뒤를 졸졸 따라붙어 미행해 놓고 우연인 척 접근한 것은 절도에 대한 합의와는 별개의 처분이 필요했기에 행한 일이라 설명했다.
“더럽고 치졸하게 나온 쪽은 그 댁 여사님이 먼저입니다. 전 그냥 저희 계약대로 진행했을 뿐입니다.”
김 비서의 지독히 사무적이고 지독히 맞는 말에 태중은 할 말을 잃었다.
이렇게 비로소 풍비박산은 마무리 지어졌다. 학교 간 시우를 기다리던 예민한 도재가 조금이나마 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시간이었다.
***
그날 저녁 도재는 시우에게 통장을 건넸다.
도재가 저를 저축 왕이라고 종종 놀리기 때문에 앞으로 여기다 저축하라는 의미인가 의아해하던 시우가 통장에 쓰여진 제 이름과 들어있는 액수를 확인하곤 기함을 했다. 시우는 말 그대로 못 볼 거라도 본 표정이었다.
미쳤냐고 묻는 듯한 시우의 표정에 도재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 시발 귀여워.’ 혼잣말을 읊조린 도재가 시우의 엉덩이를 두드려주며 말했다.
“어이구, 우리 애기 놀랬어. 근데 그건 내가 주는 돈 아니야. 원래 그냥 시우 거야.”
“네?”
“우리 애기 거라고. 그냥 시우 가지면 되는 돈이야.”
큰돈을 무서워하는 새가슴 시우는 무슨 소리인지는 통 모르겠으나 썩 알고 싶지도 않아 냉큼 다시 도재에게 통장을 내밀었다.
“저… 안 가지면 안 될까요?”
30억 짜리 도자기를 받아도 그게 지폐 다발 30억인 거랑은 다르니 썩 그에 대한 현실감이 들지 않았었는데, 현금 5억이 넘게 들어있는 통장은 천만 원도 무서워하는 어린양이 가지고 있기엔 부담스러움의 극치였다.
‘제 형은 50억 짜리 시계도 훔치는데 우리 애는 준다 해도 참.’
속으로 하고 싶은 말을 누른 도재가 아무리 생각해도 제 혈육들과는 영 딴판인 외계 생명체 시우에 피식 웃음 지었다.
“하긴 서시우 너는 남편만 있으면 되지.”
“헤헤… 네.”
“어유 예뻐라, 뽀뽀.”
시우의 입술이 다가와 마중 나와 있던 도재의 입술과 맞붙었다 ‘쪽’ 귀여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결국 통장은 도재가 가지고 있기로 했고 시우가 추후에 큰돈이 쓰고 싶을 때가 생기면 쓰기로 했다. 지금부터 미리미리 생각해 놓으라는 도재의 말에 시우는 곰곰이 생각하다 나중에 생길 아이 교육비로 쓰자며 지극히 현실적인 소비를 제안했다.
“영어 유치원 보내야 하는데… 국제 학교두….”
이제야 1학년 2학기를 다니는 주제에 졸업하고 결혼만 할래도 한참이 남았는데 학구열 높은 예비 새댁은 임신과 출산 단계를 쿨하게 스킵하고 애 학교 보낼 생각부터 했다.
‘참나 애 학교는 무슨 네 학교도 보내기 싫어 죽겠다, 이 꼬맹아.’
“이제 보니까 남편만 있으면 되는 게 아니라 남편 자지만 있으면 되는 거였네. 애는 어떻게 만드는데.”
도재의 장난스런 추궁에 시우가 그건 진짜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남편의 어느 한 부분이 아닌 남편이 통째로 있어야 한다는 깜찍한 해명을 했다.
“그래? 그럼 한 군데만 가질 수 있다면 어딘데?”
시우의 손을 끌어 제 앞을 만지게 한 도재가 음흉한 눈빛을 보내며 장난을 거두지 않았다.
도재는 시우가 쏘아 올린 때 아닌 아이 발언에 히트도 오지 않았는데 일단 가질 짓 먼저 하자며 시우의 잠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지금은 암만 해도 안 생기는 걸 몰라서 이러고 달려드는 건 아닐 테니, 시우는 예비 남편의 핑계를 모른 척 눈감아주곤 잠자코 도재의 손길과 쏟아져 내리는 입맞춤을 받았다.
내일도 등교하는 시우를 위해 많이 참아준 도재의 사랑이 두 사람의 침대에 내렸다.
-2권에서 계속-
[로튼 애플(Rotten Aplle) 1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