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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2. 멍멍줍줍 (12/14)

외전2. 멍멍줍줍

아이들이 노곤했는지 웬일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부부는 간만에 거실에서 여유로이 영화를 보며 둘만의 조촐한 밤을 보내기로 했다.

“시우, 맥주도 마실래?”

“여보 마시면요….”

술친구 안 해주면 안 먹겠다는 소리이다. 도재는 피식 웃으며 시원한 맥주 두 캔을 꺼내 들었다. 육아 스트레스를 날려버릴 액션 영화와 맥주를 준비해놓고 보니, 팝콘이 없었다. 그냥 무(無)맛 팝콘은 있는데 시우는 편의점에 파는 콘소메맛 팝콘을 좋아했다.

무맛으로 주면 팝콘 알을 세어가며 아주 정갈한 모양으로 코딱지만큼 먹지만 콘소메맛으로 주면 앉은 자리에서 두 봉지를 클리어했다. 한 봉지 다 먹고 도르르 눈동자를 굴리면 도재가 한 봉지를 더 까서 내미는 식이었다.

“어? 우리 애기 좋아하는 까까가 없네.”

“안 먹어도 괜찮아요… 그냥 있는 거 먹을게요.”

“하나도 안 괜찮아 보이는데. 다 어디 갔어. 애들이 먹었어?”

도재는 짭조름도 하고 달짝지근도 한 시즈닝이 잔뜩 묻은 그 팝콘을 입에도 대지 않지만, 시우를 위해 종종 사다 쟁여 두었다. 떨어질 때쯤 꼭 다시 사다 놓는데 도재가 새로 채워 주기도 전에 죄 털려버린 건 낮에 다녀간 도우와 재우의 유치원 친구들 때문이었다.

하긴 도우와 재우는 범인일 리가 없다. 시우가 먹으라고 나눠줘도 시우아빠가 좋아하는 까까엔 절대 욕심내지 않았다. 낮에 도우와 재우의 친구들이 집에 놀러 왔었는데 그 중 한 아이가 찬장에 고이 모셔 두었던 팝콘을 발견하곤 외쳤다.

“저거 먹고 싶어요!”

그러자 다른 애들도 뭔데? 뭔데? 합세해 전부 상납하게 되었다는 스토리다.

“야! 그거 우리 아빠 거야. 먹지 마.”

“맞아! 안 돼! 그거 아빠가 슈아빠 사준 거야.”

“에이 얘들아, 친구들한테 왜 그래. 괜찮아. 친구들 줘도 돼.”

사실 과자는 얼마든지 양보해도 상관없었다. 다만 친구들이 온다고 정성 가득, 영양 가득 간식을 한 상 차려 놨는데 애들은 무슨 신세계라도 접한 듯 팝콘만 냠냠 집어먹었다. 몸에 안 좋은 것만 잔뜩 먹였다고 욕하는 거 아니겠지?

도재는 팝콘 뺏겨 놓고 역으로 미안해하고 있는 순둥이를 위해 말없이 외투를 챙겨 입었다.

“편의점 다녀올게.”

저도 데려가라며 허겁지겁 따라오는 시우에 미소 지은 도재가 쓰읍, 혀를 차며 제 똥강아지를 제지했다.

“옷 두꺼운 거 입고 나와. 목도리도 하고. 안 그럼 안 데려가.”

도우, 재우에게 하는 소리가 아닌 시우에게 하는 소리가 맞았다. 쌍둥이들에게도 말 안 들으면 두고 갈 거라는 협박이 통하지 않게 된지 오래인데 시우에겐 통했다. 시우는 얌전히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아직 첫눈은 오지 않았지만 초겨울의 추운 날씨였다. 단단히 무장을 하고 나온 시우가 뿌듯한 표정으로 도재의 팔짱을 꼈다.

“헤헤, 이제 됐죠?”

“어. 시우 착해. 뽀뽀.”

쪽- 하고 출발 신호를 알린 둘이 오순도순 발 맞춰 걸을 때였다. 대문을 나서 얼마 가지 않아 웬 강아지 한 마리를 맞닥뜨렸다.

완전 새끼는 아닌데 아직 덜 큰 것 같은 어린 강아지는 사람이 보이자 꼬리를 세차게 흔들며 쫓아왔다. 경계심이 하나도 없고 털이 보송보송 깨끗이 관리되어 있었다. 누군가 키우는 개인 것이 확실했다.

시우는 저를 졸졸 따라오는 강아지를 네 집 알아서 찾아가라 외면할 수 없었기에 제 목도리를 벗어 둘둘 싸매주고 안아 들었다.

이 추운 날, 도대체 몇 시부터 가출을 한 건지 작게 떨리고 있는 여린 생명이 시우의 품에 안겨왔다.

“여보, 얘 주인 찾아줘야 될 것 같은데요….”

“어. 안 그래도 너 닮아서 두고 가진 못하겠더라.”

혹시나 주인이 목 놓아 울며 아이를 찾고 있진 않을까 온 동네를 돌았지만 허탕이었다. 일단 집에 데려가기로 결정한 부부는 팝콘을 사러 간 편의점에서 강아지 사료와 간식을 급한 대로 털어왔다. 물론 팝콘도 안 산 건 아니었다.

올 때는 팔짱을 꼭 끼고 왔는데 갈 때는 두 사람 다 양손이 무거웠다.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시우는 벌써부터 무슨 이산가족이라도 상봉한 듯 강아지를 너무 애틋하게 바라보았다. 도재가 제 옆에 선 강아지 두 마리를 보고 피식 웃음 지었다. 그 중 큰 강아지, 시우에게 말했다.

“시우, 너무 정 주지 마. 주인 나타나면 보내줘야 돼. 우리 애기 울면 남편 마음 아파.”

시우는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보호해주다 언제든 쿨하게 돌려보내줄 거라 다짐했다.

시우가 따듯하고 드넓은 거실에 품에 안고 있던 강아지를 내려주었다. 그런데 어째 도재가 더 쿨하지 못할 것도 같았다. 물도 주고 밥도 주니 꼬리를 프로펠러처럼 흔드는 게 어디서 많이 보던 광경이랄까, 시우 닮은 애가 나왔음 싶던 자신의 바람이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건가 했다.

하는 짓만 닮은 게 아니라 생긴 것도 약간 닮았다.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올망졸망한 생김새를 가진 흰색과 검정색 털이 섞여있는 보더콜리였다. 어쨌든 정이 들면 헤어질 때 너무 힘들 것 같아 도재와 시우는 이름도 안 지어주고 그냥 멍멍아, 멍멍아 불렀다.

다음날 아침, 도우와 재우가 일어나 거실로 내려왔다. 자고 일어나니 시우아빠를 닮은 강아지 한 마리가 갑자기 생겨 있었다. 아이들은 퍽 놀라더니 아침 식사도 거부하고 유치원 등원 전까지 내내 강아지에만 관심을 주었다.

아이들은 시우아빠가 강아지 밥을 챙기고 쓰다듬어 주는 게 조금 질투도 나면서 또 자기들도 쓰다듬어 보고는 싶은 그런 이상한 감정에 휘말렸다. 꼭 동생이 생긴 것처럼 말이다.

“슈아빠, 왜 쟤만 챙겨?”

“그럼 도우가 챙길래?”

“……그럴까?”

“아빠 재우는?”

“도우는 밥 주고, 재우는 물 줘 그럼.”

“그래.”

전단지를 붙이고, 인터넷에 올려보아도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찾을 수 있는 수단이란 수단은 전부 이용해 보았지만 모두 꽝이었다.

버려진 걸까? 시우는 멍멍이가 너무 예뻐 그대로 키우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저 아이의 가족이 나타나 버린 게 아니었다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상봉한 뒤 데려갔으면 싶기도 했다. 도재의 말대로 닮아서 그런 건지, 감정이입이 과하게 되었다.

‘가족인데 왜 버리지… 에이 설마 버렸겠어?’

혹시나 아픈 덴 없는지 검사를 위해 병원에 데려갔는데 보더콜리는 똑똑하고 영특해서 천재견이라는 수식어에 사람들이 환상에 젖어 입양해 갔다가 그 에너지를 감당 못해 유기되는 경우가 많다는 소리를 들었다. 듣기만 해도 속이 상했다.

물론 오늘 아침에도 멍멍이가 텃밭에 심은 제 토마토를 갈아엎었지만 그래도 ‘데려갔으면 책임져야지!’ 생각하며 시우가 입을 불퉁 내밀었다.

“엄마! 도우가 뽀뽀해 줄까?”

“응?? 아… 그래.”

그 뜻으로 내민 입술은 아니었지만 시우가 피식 웃으며 귀여운 도우의 뽀뽀를 받았다. 당연히 재우도 지지 않고 한 번 해주었다. 쌍둥이들 덕분에 속상했던 마음이 조금 풀릴 수 있었다.

멍멍이는 계속해서 누구도 찾아가지 않았고 쑥쑥 자라났다. 어느새 덩치가 이미 처음 왔을 때랑은 다른 개가 되었다.

함께 산 기간이 점점 길어져 가니 어느 순간부터 마음속으로는 이미 한 가족이었다. 그래서 그냥 진짜 한 가족이 되기 위한 절차를 밟기로 했다. 작명 절차이다. 우연치 않은 멍줍으로 시작된 인연이지만 그대로 눌러 살게 된 멍멍이에게 이제는 조심스레 이름을 지어줄 시간인 듯했다.

숙고 끝에 정한 강아지의 이름은 리우였다. ‘리틀 시우’, 리우.

그렇게 리우는 리우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면서 도재와 시우의 공식적인 개딸이 되었다.

***

가족이 된 후, 온 식구는 뼈를 갈아 막내딸 리우를 키웠다.

보더콜리는 원래 양을 몰던 양치기 개라는데 이 집 마당에는 양이 없으니 리우는 도우와 재우를 몰았다. 리우가 뛰면 오빠가 된 도우와 재우가 그 뒤를 따라 뛰어줬는데 둘 중 하나가 멈추거나 따라오지 않으면 리우도 멈췄다. 왕왕! (=왜 안 와?!)

운동장 몇 개는 이어 붙인 사이즈의 정원에서 리우에게 매일 극기 훈련을 받은 아이들은 굉장히 일찍 곯아 떨어졌다. 덕분에 부부는 밤마다 행복했다.

보더콜리는 일을 시켜주는 걸 좋아하고 늘 바쁘게 살아야 한다는 점에서도 시우를 빼다 박았는데 사람은 혼자 알아서 바쁘게 일할 수 있지만 강아지가 바쁘려면 사람이 공도 던져주고, 원반도 던져주고, 수영도 시켜주고, 뭐라도 일을 만들어줘야 했다.

그래서 시우는 저 닮은 개딸을 책임이라도 지듯 열심히 이것저것 던졌다.

‘그래 원 없이 물어 와라.’

도재가 제게 아르바이트를 시켜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시우는 리우를 키우며 문득문득 도재에게 되게 고마웠다.

“여보오….”

“어.”

“오늘 밤에….”

“어 씹.”

말도 끝내기 전에 욕지거리를 뱉은 이유는 더럽게 예쁜 소리를 할 것 같다는 예감 때문이었다. 쑥스러워 내리깐 눈과 볼에 띤 홍조가 야하고 골 때리는 소리를 하기 직전임을 알렸다.

“이따가 밤에, 입으로 해주고 싶어요….”

“하 씹. 지금은? 지금 해줘 애기야.”

“여보 잠깐 회사 나간다 그러지 않았어요?”

“안 가도 되는데? 그럼 지금 안 해주는 대신 밤에 두 번 해줘.”

“네! 헤헤.”

어차피 해달라면 다 해주지만 도재는 이렇게 자진해서 먼저 해주고 싶다며 눈을 초롱초롱 밝히는 서시우에 환장했다. 리우가 오고 이런 뜻밖의 횡재가 종종 찾아오니 도재에게도 리우는 복덩이였다.

도재는 새벽에 조깅을 나갈 때마다 리우를 데리고 나가 산책을 시켰다. 매일 하루도 안 거르고 운동을 가는 한도재도 독한데 새벽 댓바람부터 나가자고 앞발로 안방 문을 긁는 막내딸도 독했다.

도재는 집에 돌아와 헥헥거리는 리우에게 물을 챙겨주고 안방에 들어가 아직 자고 있는 시우의 이마에 촉- 입을 맞췄다. 똑같이 아직 자고 있는 도우와 재우는 패스다. 싫어서 안 해주는 게 아니고 한도재 주니어라 더럽게 예민해서 자는데 뽀뽀하면 깨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이다.

목을 축인 리우에게 밥을 퍼주고 신문을 좀 읽고 있으면 가족들이 하나 둘 깨어나 집 안에 활기를 채운다. 다른 식구들보다 하루를 먼저 시작하는 도재가 거실에서 식구들을 기다렸다. 도재는 제 방에서 놀고 있는 리우에게 간식이나 좀 줄까 하여 리우를 불렀다.

“리우, 리우 이리와, 리우야.”

몇 번을 불렀는데 오라는 리우는 안 오고 안방에서 나온 시우가 왔다. 멀리서 듣고는 저를 부르는 줄 알고 머리에 까치집을 지은 채로 눈을 비비며 다가왔다.

“흐암- 여보. 저 불렀어요?”

도재에게서 푸핫 큰 웃음이 터졌다. 도재가 갑자기 빵 터져서 웃으니 볼 풀에서 무아지경으로 놀던 리우도 뛰어왔다.

“아침부터 귀여워 죽겠네. 시우도 간식 줘?”

“네? 아침 먹어야 되는데 간식이요?”

아직도 정신이 없는지 시우가 맹하게 물었다. 영문은 모르지만 도재가 웃기에 저도 따라 헤에- 바보같이 웃었다. 사랑스러웠다.

“어이구 우리 애기 졸려. 어쨌든 잘 왔어. 시우 앉아.”

리우에게 말하는 투로 ‘앉아’하고 장난을 쳤다. 아침부터 혼자 신난 남편의 장단을 맞춰주기 위해 시우는 리우처럼 맨바닥에 착 아빠다리를 하고 앉았다. 그러자 리우도 시우를 따라 착 엉덩이를 바닥에 붙였다.

“손도 드릴까요 여보?”

“아니. 넌 뽀뽀.”

도재가 고개를 숙여 입술을 내밀자 시우가 입 맞춰 왔다. 아이 착하네. 일어나자마자 강아지 놀이를 시키는 남편임에도 도재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건 언제나 기분 좋은 시우였다.

“리우, 넌 손.”

시우와 똑같이 헤에- 하고 웃고 있던 리우도 왼손, 오른손 바꿔가며 척척 내밀었다. 누구 딸인지 몰라도 총명했다. 간식을 받아 먹은 리우가 기분이 좋은지 옆에 앉은 시우에게 달려들어 배를 뒤집어 까고 몸부림을 쳤다. 난리가 났다.

도재가 시우에게 구조의 손길을 뻗어 소파로 끌어올려주자 리우도 뛰어올라 둘 모두에게 조금 과격한 애정표현을 퍼부었다. 간식도 먹었지, 팔이 빠져라 공을 던져주는 엄마도 깨어났지, 리우는 텐션이 아주 최고조였다.

잠에서 깬 도우와 재우가 시우아빠에게 누가 먼저 안길 건지로 가위바위보를 하며 1층으로 내려왔다. 저들보다 먼저 열렬히 안기고 있는 리우가 있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도우와 재우가 차분히 내려오던 걸음을 빨리해 우다다다 소파로 뛰어들었다.

“와아아아! 슈아빠 내가 구해줄게!”

구해주고 싶어 하는 마음은 너무 고마운데 애들이 큰 소리를 내면 리우는 더 흥분한다. 개 난장판이 되는 건 삽시간이었다.

“리우! 슈아빠 내 꺼야.”

“리우! 뜨거운 물도 위아래가 있어!”

“찬물, 재우야. 찬물!”

리우의 프로펠러 꼬리에 싸대기를 맞고 있는 와중에도 학구열이 높은 시우는 재우의 잘못된 속담 활용을 정정해주었다.

매일 왁자지껄하고, 매일 정신 사납지만, 활기차고 행복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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