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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섹슈얼-2화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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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검은색 블라인드가 쳐졌던 사장실의 유리 벽이 오늘따라 유독 투명했다. 보지 않으려고 해도 저절로 시선이 가는 것은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러운 본능이었다.

레이의 시선 끝에 있는 여자는 마디에 있는 주름마저 섬세한 손가락으로 목까지 여몄던 셔츠의 단추를 두어 개 풀어 내렸다. 하얀 가루가 묻어날 정도로 부드러운 가슴이 설핏 드러났다. 그 모습이 퇴폐적으로 보이기도 했고, 고결해 보이기도 했다.

클레이 디어는 항상 우아한 모습을 했지만, 그 속은 짐승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걸 인지하고 있더라도 저런 얼굴을 보면 까맣게 잊어버리게 된다.

레이는 자신이 지금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넋을 놓고 여자를 바라봤다. 손에 들고 있던 펜은 이미 책상 위를 구르다 바닥으로 툭 떨어진 것도 모른 채.

약간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의자 깊숙이 몸을 묻은 클레이 디어는 뭔가 해소되지 않은 것처럼 불만족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아름다워 몰래 그녀를 바라보는 비서들은 저건 사기라고 투덜거렸다.

클레이 디어를 향한 가십은 조금, ……아니 많이 더러운 편이었다. 그녀를 섹스 중독자로 묘사하며, 하룻밤에 그녀를 상대하는 오메가는 항상 세 명 이상이라고 죽죽 써 내렸다.

각종 도구와 변태적인 성행위에 대한 묘사는 노골적이고 구체적이었다. 사람들은 그런 그녀의 문란함을 비난하면서도 설마 실제로 그렇게까지 하겠냐며, 가십은 항상 과장된 면이 많다고 회의적이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가십 기사는 항상 열광적으로 소비됐다.

클레이 디어가 머무는 호텔을 관리하는 비서, 레이는 그 가십이 정말 사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축소됐으면 축소됐지, 결코 과장 되지 않았다는 것도.

그는 빌어먹을 정도로 난잡한 사장의 잠자리를 관리한다는 것이 처음 이 회사에 입사할 당시만 해도 꽤 흥미진진했지만, 지금은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레이의 사장인 클레이 디어에게 미쳐있던 한 오메가가 거짓 인터뷰를 했던 영향이 컸다. 그 오메가는 클레이 디어가 여러 명을 한 번에 상대한 적이 없다, 그것은 모두 거짓이다,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는데 자신을 언론에서 지키기 위해 한 연막이라고 인터뷰했지만, 그것을 믿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리고 그 감동적인 행동에 가장 시큰둥했던 사람은 당사자인 클레이 디어였다. 그녀는 그 인터뷰를 본 즉시 그를 자신의 섹스파트너에서 잘라냈다. 그다음은 지옥이었다.

자신이 클레이 디어에게 제외된 것을 부정하던 남자는 회사까지 찾아와 난동을 부렸고, 언론을 향해 분을 토했다.

그걸 수습하는 과정에서 소송도 있었고, 저주와 비난, 자해까지 가관도 아니었다. 그게 그가 입사한 지 고작 한 달이 되었을 때 벌어진 일이었다. 상사의 사생활이 난잡한 것은 고용인의 괴로움을 동반했다. 물론 그만큼 연봉이 다른 회사에 비교해 엄청나긴 했지만,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였다.

레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모니터를 보고 있는 밀리안 디모시를 힐끔거렸다.

클레이 디어의 뒤치다꺼리를 가장 많이 전담하는 비서는 밀리안이었다. 육 개월밖에 안 된 자신보다 더 엄청난 일을 경험했을 텐데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회사에 다니는 걸까.

강렬한 레이의 시선에 밀리안 디모시의 고개가 그를 향해 돌아갔다.

“밀리안. 나 궁금한 게 있는데요.”

“돈 때문에 다닙니다.”

“……어떻게 알았어요?!”

“항상 듣는 질문이라서요.”

“…….”

더 이상의 대화는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칼같이 잘라내는 대답이었다. 레이는 입술을 삐죽거리다 자신의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 그들의 시야에 그림자가 짙게 지었다.

“돈 때문이라고?”

“…….”

“돈만 주면 섹스도 해?”

클레이 디어였다. 그녀는 은밀한 무언가를 연상하는 얼굴로 밀리안에게 말을 걸었다. 황홀한 섹스를 보장하는 것 같은 악마 같은 얼굴에 그 전까지 속으로 사장을 비난하던 레이의 얼굴이 잔뜩 붉어졌다. 그에 비해 밀리안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사장님.”

“응?”

“한 시간 뒤에 게빈 스튜어트 님과의 미팅이 있습니다.”

“아하.”

“점심 이후에는……, 사장님?”

“그래서, 애인은 있어?”

클레이는 손가락 끝으로 밀리안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노골적인 섹스 어필이지만, 정작 그 대상인 밀리안의 얼굴은 미동조차 없었다. 클레이 디어는 흥이 식은 얼굴로 손을 떼어냈다.

“조금은 반응해 주는 게 어때?”

“사장님 재밌게 해드리려고 회사에 다니는 게 아닙니다.”

밀리안 디모시는 잠시 들어 올렸던 고개를 내리고 다시 일에 집중했다. 타닥타닥 키보드가 눌리는 타격음만 고요한 비서실에 울렸다. 클레이는 잠시 그 무심한 정수리를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원래 저런 인간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굳이 건드린 것은 그녀의 심기가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근래 이상하게 속이 답답했다. 그동안 섹스로 스트레스를 풀었지만, 요즘은 적당히 배출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누굴 상대해도 머릿속이 상쾌해질 만한 쾌감을 얻지 못했고, 별로 즐겁지도 않다. 섹스가 시큰둥해진 것은 처음이었다.

욕구가 쌓이기만 하고 해소가 안 되니 짜증이 늘어갔다. 회사에서 이런 식으로 티를 낸 적이 없었는데, 제어되지 않는다.

그때 코끝을 스치는 달콤한 냄새에 그녀의 눈매가 설핏 찌푸려졌다.

또. 언 듯 스치다 사라지던 오메가의 달콤한 체향. 그 냄새가 다시 났다. 은밀하고 부드러우면서 옅었다. 사람의 신경을 갉작거리며 풍겼다가 사라지고 다시 그녀를 붙잡아왔다.

사장실로 들어가려던 그녀의 발걸음이 멈췄다. 클레이 디어는 천천히 몸을 돌려 책상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 비서들을 바라봤다. 그새 달콤했던 냄새는 사라졌다.

‘그래, 그럴 리가 없지.’

잘못 맡은 것이다. 근래 컨디션이 안 좋아 착각한 것이겠지. 오메가가 이곳에 있을 리가 없다. 여기에는 알파인 그녀와 베타뿐이니까. 섹스를 너무 오래 안 해서 감각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만족스럽던 만족스럽지 못하던 쌓인 건 풀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면 이 빌어먹을 정도로 단 내가 맡아지지 않을 것이다.

“호텔 예약해.”

그녀의 명령에 비서진들은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렇지. 어쩐지 요즘 잠잠하더라.

“알겠습니다. 파트너분은.”

“그건 내가 알아서 연락할 테니 신경 쓰지 말고.”

“네.”

“아, 오늘 일정은 모두 취소.”

“…!”

소리 없는 경악성이 사무실 안을 가득 메웠다.

* * *

사장의 사적인 일정을 위해 호텔을 예약한 것은 레이가 맡았지만, 그 뒷수습을 해야 하는 밀리안 디모시의 몫이었다.

그는 오늘 캔슬된 일정 때문에 수없이 전화를 걸어 사과하고 다른 날짜로 조율했다. 대부분은 클레이 디어의 이런 면을 수없이 겪어 포기하고 넘어가 주었다.

대체로 알파들이 조금 즉흥적인 면이 있어서 그들 역시 불시에 같은 행동을 하곤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순조롭게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게빈 스튜어트.

밀리안은 마지막 상대에게 잡혀 한 시간째 통화 중이었다. 처음에는 불같이 화를 냈던 상대는 이제 달콤한 먹이를 내밀며 그를 유혹했다.

[디모시, 우리 회사로 이직하는 게 어때?]

“죄송합니다.”

[또 그렇게 자른다니까? 그러지 말고 진지하게 생각해 봐. 제멋대로인 클레이의 비위를 어떻게 맞추고 살아. 그러다 몸에 병난다니까. 잘해줄게. 연봉도 더 올려주고. 응?]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렇게 칼같이 구니까 더 잡고 싶은 거 알아?]

게빈 스튜어트의 유혹은 겉보기에는 달콤해 보였지만, 독이나 다름없었다. 솔직히 이직한다고 상황이 나아질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알파들의 성향이 제멋대로인 건 똑같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게빈 스튜어트는 클레이 디어보다 질이 나빴다. 클레이 디어는 비서는 건드리지 않는다. 그 증거로 그녀는 자신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직원은 모두 베타로 뽑았다.

하지만 게빈 스튜어트는 달랐다. 오메가를 차별하지 않는다는 핑계 하에 무작위로 직원을 뽑았고, 서슴없이 건드렸다.

그래서인지 게빈 스튜어트 비서들의 퇴사율은 클레이 디어보다 높았다. 그들의 비서들은 서로의 고통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어 새 소식이 뜨면 바로바로 알려주곤 했다.

며칠 전에 퇴사한 비서는 오메가였고, 게빈 스튜어트의 짧은 연애 상대였다고 한다.

알파의 습성은 원래 이런 건가 싶을 정도로 다 비슷했다. 클레이 디어가 게빈 스튜어트보다 낫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거기였다. 비교조차 무의미했다.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던 밀리안 디모시의 표정은 여전히 무심했다. 전화기 넘어 뱀처럼 매끄러운 목소리가 덫을 내밀었다.

[자기, 설마 전화로 퉁 칠 생각인 건 아니지?]

지금이 대체 몇 번째인데 자길 너무 우습게 보는 거 아니냐며 상대는 성의를 요구했다. 밀리안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조만간 찾아뵙겠습니다.”

[흐응. 자기 맞은 준비를 해야겠네.]

그가 대답도 하기 전에 전화가 끊겼다. 밀리안은 한숨을 삭히며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옆에 있던 레이가 그런 밀리안을 향해 존경의 눈빛을 보냈다.

“밀리안 굉장해요. 어떻게 알파들을 그렇게 잘 다루…….”

“일, 하십시오.”

“……네.”

밀리안이 차가울 정도로 단호하게 레이의 가벼운 입을 막아버렸다. 차단된 대화에 아직 일을 끝내지 못한 레이의 고개가 힘없이 내려갔다. 밀리안 역시 남은 일을 마치려던 찰나, 꽉 닫혀있던 사장실이 열리고 클레이 디어가 나왔다.

곧바로 나갈 줄 알았던 클레이 디어가 문을 열기 직전 할 말이 있다는 듯 그에게 다가왔다.

“디모시, 게빈이 요즘 구애 중이라며?”

“……네?”

“왜 이렇게 놀라? 뭐 찔리는 일이라도 있어?”

밀리안이 답지 않게 목소리를 키우며 놀라자 클레이의 눈이 의심하듯 가늘어졌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말을 거셔서…….”

“흐응.”

클레이 디어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시선으로 그를 주시했다. 답지 않게 놀라던 밀리안이 어느새 차분히 가라앉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짐짓 엄격한 표정으로 경고했다.

“사직서 내도 안 받아줘.”

“네?”

“이직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클레이 디어가 웃었다. 안 그래도 특별한 얼굴이 웃기까지 하자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자신의 매력을 잘 알고 그걸 또 잘 이용하는 클레이에게 전혀 반응하지 않는 건 밀리안 디모시가 유일했다. 그의 얼굴은 무심하다 못해 차가워 보이기까지 했다. 어떤 의미로는 특별한 남자였다.

“네. 알겠습니다.”

“좋아.”

“…….”

클레이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손으로 두드렸다. 밀리안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지만, 그 미묘한 변화를 눈치채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 다들 수고해.”

아름답게 웃는 클레이를 향해 대답하는 사람들은 한 명도 없었다. 다들 넋을 빼고 그녀를 바라보기 바빴다.

그녀가 문을 닫고 사라지고 나서야 다들 정신 차렸는지 길게 한숨을 내쉬는 사람도, 작게 욕설을 내뱉는 사람도 있었다.

가끔 저렇게 웃을 때마다 이곳에서 일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자괴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속에서 밀리안만 침묵을 지켰다. 펜을 잡은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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