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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입을 찢어 버려야 웃음이 멈출까?”
“아니, 미안. 크흐흑. 으흐흐으으. 내가 크흠! 웃으면 안 되지. 아, 미치겠네. 으하하하!”
클레이의 주치의 대니얼 크래포드는 억지로 웃음을 참고 표정을 관리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불가능했다. 도리어 중간에 막았기 때문인지 웃음을 걷잡을 수 없이 크게 터져버렸다.
클레이는 목젖이 보일 정도로 입을 크게 벌리고 웃고 있는 대니얼을 차갑게 바라봤다. 한참을 정신 놓고 웃다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대니얼의 웃음도 멎었다.
“그게 그렇게 웃긴 말이었나?”
그렇게 미친개처럼 웃을 정도로? 클레이가 이를 갈았다. 대니얼은 머쓱한 얼굴로 헛기침을 하며 눈을 피했다.
“아니, 그렇잖아. 네 인생에 거절을 당하는 상황이라는 게 있었냐고. 대체 그 비서 누구야? 소개 좀 해 주면 안 돼? 친해지고 싶어.”
“그냥 건방진 베타야.”
그냥이 아닌 것 같은데. 대니얼은 슬쩍 눈동자만 옮겨 클레이의 외모를 바라봤다. 저런 얼굴로 태어나 알파로 발현하기까지 한 클레이 디어를 향해 그 누구도 제 의견을 마음대로 피력한 적이 없었다.
모두가 그녀의 달콤한 얼굴과 말에 휘둘렸다. 오메가는 말할 것도 없었고, 베타라고 다르지 않았다. 페로몬의 영향을 받지 않더라도 눈이 없는 건 아니니까.
귀족으로 태어나 태생도 좋고 돈도 많고 능력도 잘난 데다가, 심지어 얼굴과 몸매도 사기급으로 잘났는데 그녀의 인생에 좌절이라는 단어가 있을 턱이 없었다. 실제로 그런 삶을 살았고.
그런데 가장 가까이에 있을 수 있는 자리에 올려준다는데도 거절했다고 한다. 그동안 클레이의 비서들이 그토록 잦은 퇴사를 했던 이유는 클레이의 변덕과 제멋대로 구는 탓에 업무가 과중한 탓도 있지만, 그녀에게 반해서 고백하고 차였던 전적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기혼자로만 뽑아놔도 마찬가지여서 매번 수행비서가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있는 모습을 보고 대니얼 자신이 더 질렸다.
“절대로 놓치면 안 될 사람이네.”
“……그래.”
짜증 나는 인간이라도 그녀에게 딱 맞는 소중한 인재였다. 오 년이나 제 곁에서 버틴 비서는 밀리안 디모시가 최초였다. 다소 건방진 면은 상사인 그녀가 참고 견뎌줘야 할 정도로 희귀한 존재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처음으로 오래 손발을 맞춰와서 그런지 길게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그녀에게 맞췄다. 이렇게 편하게 일을 할 수 있다는 걸 처음 경험했으니 말 다 한 셈이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너무 솔직해.”
“넌 좀 당해봐야 해.”
“뭐?”
“인생을 너무 편하게 살았어. 너처럼 사는 인간은 알파 중에서 별로 없다고.”
대니얼이 질투심이 가득 밴 말을 하자 클레이가 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고 코웃음 쳤다.
“그 뱃살이나 좀 빼던가. 배 접히는 거 안 불편해?”
“내 인격을 모독하지 마!”
“이러니 여자들에게 차이지. 네가 아무리 능력 있는 의사여도 여자는 잘생긴 남자를 좋아해. 관리 좀 해.”
클레이가 아무리 타고난 외모가 좋더라도 그녀는 자신을 꾸미는 데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최적의 체지방과 근육량을 유지하기 위해 헬스와 요가, 필라테스, 수영, 테니스, 암벽타기도 수준급으로 했다. 열다섯 살 때부터 시작한 격투기는 정기적으로 계약한 스파링 파트너가 있을 정도였다.
알파로 태어난 탓에 원래 가지고 있던 체력도 좋았고, 운동 신경 자체가 남달라 프로로 전향했어도 잘 먹고 살았을 것이다.
“너하고 비교하지 마.”
“네가 나랑 비교할 급이 될까?”
같은 알파여도 클레이와 대니얼은 너무 달랐다. 외향적인 클레이와 달리 대니얼은 움직이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일반인보다 월등히 타고난 알파의 육체도 버텨내지 못하고 무너졌을 정도로.
클레이의 눈에 비웃음이 실리자 대니얼의 얼굴이 붉어졌다.
“크흠. 아무튼, 오메가의 냄새가 났다 사라졌다 한다고?”
“그래. 분명 맡았는데 순식간에 사라졌어.”
“그 자리에 오메가가 있던 건 아니고?”
“난 오메가는 비서로 안 뽑아.”
그런 짓은 게빈 스튜어트 같은 쓰레기나 하는 짓이었다. 대놓고 회사에서 섹스파트너를 뽑는 파렴치한 행동이었다. 문란하기로는 클레이 디어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그녀는 최소한의 개념이라도 가지고 있었다.
클레이의 단언에 대니얼은 떨떠름한 얼굴로 동의했다. 그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흐음. 유화제를 바꿔보는 게 좋겠다. 그게 네 체질에 안 맞아서 일수도 있으니까. 호르몬 계에 이상이 생겼을 수도 있어. 그리고 온 김에 검진받고 가. 겸사겸사 좀 자세히 보자. 총 세 시간 정도 예상해둬.”
갑자기 섹스에 흥미가 떨어진 원인일 수도 있다며 대니얼이 조심스럽게 첨언 했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으로 대니얼의 병원으로 방문했던 터라 클레이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자리에서 일어서서 진료실을 나가려던 클레이가 다시 뒤를 돌아봤다.
“오메가가 정말 있었을 확률은 얼마나 될 것 같아?”
“내 생각으로는 네 비서 중 한 명이 오메가가 아닌 이상 희박할 것 같다.”
“……그래?”
“응. 그런데 오메가는 안 뽑는다며? 입사 전에 건강검진 모두 받고 들어오지 않아?”
“그랬지. 아무튼, 알겠어.”
“괜히 중간에 귀찮다고 빠져나갈 핑계 만드는 거 아니지?”
이미 전적이 있던 터라 대니얼이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그래 봤자 살찐 눈두덩이에 파묻혀 별로 위협적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클레이는 우아한 얼굴로 그를 비웃었다.
“너야말로 귀찮다고 운동 좀 빼먹지 마. 그 빌어먹을 살 좀 치우라고.”
“살 얘기 좀 그만해!”
페로몬 계통으로 저명한 의사가 진저리를 치며 히스테릭하게 소리를 질렀다. 문밖에 있던 간호사들과 환자들이 깜짝 놀라 쳐다보고 있는 사이를 클레이가 유유히 걸어 나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림처럼 우아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오랜 시간 보아왔던 집사의 눈을 피할 수가 없었다. 벤틀로는 클레이를 맞으며 조용히 주의시켰다.
“대니얼 님을 너무 괴롭히지 마세요, 클레이 님.”
“왜 여기에 있어? 댄이 그새 고자질했구나?”
“원래 병원은 보호자와 함께 가는 겁니다.”
“그건 어린애들이나 그런 거지.”
난 이제 어린애가 아니야.
그렇게 말하는 클레이를 향해 벤틀로는 인자한 얼굴로 웃었다. 갓 태어났을 때부터 보살펴온 벤틀로의 입장에선 클레이가 몇 살을 먹든 어린애처럼 느껴졌다.
그는 그토록 병원을 싫어하던 클레이가 먼저 가겠다 통보했다는 소리를 주치의 대니얼로부터 전해 듣고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혹시라도 무슨 문제가 있는 건가 걱정이 되어 가만히 앉아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근래 주인님의 행보가 평소와는 너무 달랐던 탓이다. 한 사람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 사람 저 사람 가리지 않고 만나는 것이 항상 걱정이었다. 요즘 세대와 맞지 않다고 타박을 들어도 그는 나이 든 사람이다.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루가 멀다고 파트너를 만나던 주인님이 제때 집으로 왔고, 약을 먹으며 페로몬을 해소했다. 그로선 좋은 일이지만, 너무 갑작스러워 걱정되는 것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병원을 찾았다는 소리를 들었다. 병원으로 달려오는 내내 최악의 상황만 생각이 났고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에 몸이 덜덜 떨렸다.
생각보다 멀쩡해 보이는 클레이를 보며 안도하긴 했지만, 걱정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벤틀로의 얼굴에 수심이 짙어지자 클레이가 가볍게 웃었다.
“대체 뭘 생각하는 거야. 나이 들더니 걱정만 늘었어.”
“늙은이는 원래 걱정이 많은 법입니다. 다음에는 숨길 생각하지 마시고 미리 말씀해 주세요.”
“그냥 때가 돼서 겸사겸사 온 거라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만…….”
그동안의 행적이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든다고 벤틀로가 한숨을 쉬었다.
클레이는 집사의 손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평소에는 그렇게 정정해 보이던 집사가 제 나이처럼 보였다. 원래 약했던 모친이 자신을 낳고 나서 급격히 몸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고, 그녀가 성인이 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어머니를 미친 듯이 사랑했던 아버지는 모친의 마지막을 지키고 바로 자살했다.
불시에 가족을 모두 잃은 클레이를 금이야 옥이야 지키고 돌본 사람은 집사, 벤틀로였다. 그녀에게 단 하나 남은 가족이었다. 소중할 수밖에 없다.
주름진 노인의 손등을 부드럽게 토닥이는 클레이의 선명한 녹색 눈동자가 부드러운 빛을 띠었다.
* * *
원래대로라면 며칠은 걸렸을 결과가 늙은이를 기다리게 하지 말라고 닦달하는 벤틀로로 인해 당일 저녁에 나왔다.
화상통화로 결과를 알려주는 대니얼은 예상치 못한 당직에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그 꼴이 보기 좋아 클레이가 환하게 웃었다.
[정상이야. 너무 건강해서 황당할 정도.]
“역시.”
[전반적으로 페로몬 수치가 좀 낮긴 하지만, 이건 지금 유화제를 복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런거고, 수치도 정상 범위라 걱정할 건 없어.]
“그럼 내가 오메가의 페로몬을 맡았던 건?”
[그곳에 정말 오메가가 있었다거나, 네가 생애 가장 긴 시간 동안 금욕 중이어서 착각했을 가능성도 있지.]
“흐음.”
착각이라. 금욕 중이어서 착각했다기엔 한번이 아니라는 거다. 약을 먹기 전에도 맡았던 냄새였다. 그러고 보니 안 맡아졌다가 갑자기 나기도 했다. 누군가가 오메가를 데려와서 잔향이 남은 거라면 안 나다가 날 리가 없다. 가장 짙었을 때가 그녀가 출근했을 시각일 테니까.
오히려 낮에 맡아지고 밤에는 안 나는 게 더 정상이다. 그런데 항상 그 냄새를 맡았던 시간은 오후 늦은 시간이었다. 그 이야기를 하자 댄이 흥미로운 얼굴을 했다.
[정말 베타만 뽑은 거 맞아?]
“당연하지. 모두 입사 전에 검진부터 받게 했으니 속일 수가 없지.”
클레이는 비서의 건강 상태를 매우 꼼꼼하게 살피는 편이었다. 건강하게 오래 버티는 게 중요했으니까. 물론 사소한 병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완벽하게 건강한 베타는 얼마 없으니까. 진단서를 제출하면 비용은 모두 회사에서 처리했다. 클레이는 그런 쪽으로 돈을 아끼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 이야기를 하자 댄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다시 해보는 게 어때? 내 병원에서 해보자.]
“굳이?”
[그게 가장 정확하잖아.]
“…….”
그럴까. 클레이는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그때 그녀의 머리로 밀리안의 딱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의심이 가시면 CCTV를 검토하시겠습니까?’
‘저희를 신뢰하지 못하시는 것 같아서 드리는 의견입니다.’
건강검진까지 다시 받게 시키면 안 그래도 나쁜 사장으로 보는 밀리안의 평가가 더 나빠질 것 같다. 건강검진을 시킨 게 얼마 되지도 않은 상태였기에 그 똑똑한 남자라면 자신의 의도를 눈치채고도 남을 테니까.
‘왜 내가 그 건방진 부하직원의 눈치를 보고 있지?’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클레이는 대니얼의 제안을 거절했다.
“난 직원을 의심하지 않는 좋은 사장이야.”
[……미쳤네.]
뒤에서 지켜보던 벤틀로는 대니얼이 저명한 정신과 상담 의를 소개해 주겠다고 진지한 얼굴로 헛소리를 하는 걸 듣고 단호하게 종료 버튼을 눌렀다.
갑자기 까맣게 꺼진 화면에 뒤를 돌아보자 벤틀로가 멋진 수염을 뽐내며 서 있었다.
“주치의 선생님은 가끔 과하실 때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그럴 땐 단호하게 대처하는 게 현명한 거라며 인자한 얼굴로 냉정한 말을 한다. 하여간 팔불출이라니까. 클레이는 피식 웃었다.
“차를 내올까요?”
“그럴까? 오랜만에 같이 마시자.”
“금방 가져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클레이와 벤틀로가 다정한 조손처럼 서로를 따뜻하게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