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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섹슈얼-12화 (1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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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틀로는 날이 밝고도 한참 뒤에 귀가한 주인을 맞이했다. 내내 주인이 돌아오길 기다린 그의 얼굴에는 어쩔 수 없는 피로가 맺혀 있었다.

“늦으셨군요.”

“응, 미안. 기다렸어?”

“오래 기다리진 않았습니다.”

나이든 신사의 눈에 약한 비난이 스치는 것을 본 클레이가 씩 웃었다.

“깜박 잠들어서 연락한다는 걸 잊었어.”

“호텔에서 주무셨단 말입니까?”

“그래.”

벤틀로가 놀란 얼굴로 계단을 올라가는 클레이의 뒤를 따랐다.

“호텔에선 잠이 잘 오지 않는다고 그러시지 않았습니까?”

“……나도 놀랐어. 그런데 너무 잘 자서 개운해.”

“이번 파트너분이 편하셨습니까?”

“아니, 그건 아니니까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

클레이는 이대로 두면 그대로 결혼식까지 혼자 진행해버릴 것처럼 흥분한 벤틀로를 진정시켰다. 편하긴 편했지. 너무 편하다 못해 지루한 나머지 남자의 봉사를 받는 중에 다른 생각을 하다 잠들었을 정도니까.

오히려 잠을 잘 수 있게 도와준 사람은 그 자리에 없었던 밀리안 디모시였다. 지금 기분이라면 이대로 청혼을 해도 괜찮겠다 싶을 정도로 밀리안의 덕을 톡톡히 봤다.

그녀는 침실에 들어서자마자 옷을 모두 벗고 욕실로 향했다. 궁금한 게 천지였지만, 말을 붙일 기회조차 주지 않아 벤틀로는 한숨을 쉬고 바닥에 처박힌 옷가지를 주워 팔에 차곡차곡 개었다.

워낙 체온이 타인보다 높은 탓에 기본적으로 차가운 물은 선호했지만, 오늘은 뜨거운 물이 더 몸에 맞았다. 클레이는 작은 수영장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큰 욕조에 누웠다. 본의 아니게 중간에 잠들어 섹스를 하진 않았지만, 그게 별로 아쉽지 않을 정도로 피로가 풀린 상태였다.

얼마 만에 이렇게 깊은 잠을 잔 건지.

날짜를 세어 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개운하게 잤던 때가 떠올랐다. 밀리안 디모시가 제 무릎을 베고 누운 날이었다. 옅은 숨소리가 마치 자장가라도 되는 양 잔잔했고, 그의 체온이 서늘한 편이라 딱 알맞게 시원했다.

딱 옆에 끼워놓고 자면 좋을 정도로.

“…….”

클레이는 욕조 테두리에 얹은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자꾸 헛생각이 드는 걸 보니 아직 피로가 덜 풀린 것 같다.

* * *

약의 개수가 부족하다. 분명 복용할 때마다 체크 했기 때문에 남은 개수는 사십육 개가 남아야 하는데, 사십오 개뿐이었다. 밀리안은 깨끗한 선반 위에 알약을 모두 털어놓고 몇 번이고 숫자를 세어봤지만, 여전히 한 알이 부족한 상태로 멈췄다.

‘그때, 뚜껑이 열려 있었지.’

중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약통을 떨어트렸을 때 아주 조금 뚜껑이 열려 있었다. 약이 빠지지 않을 정도였기도 했고, 그때는 바닥을 뒤질 수도 없던 때였다. 아마도 그때가 아니라면, 클레이 디어가 주웠을 때…….

밀리안은 자괴감이 짙게 섞인 신음을 흘렸다. 중국에서 있었던 일은 모두 머리에서 빼내 버리고 싶었다. 누구라도 수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예민하게 굴었다.

설혹 바닥에 흘리거나 누가 주웠다고 한들 확인할 수도 없다. 누가 고작 진통제 한 알 떨어트렸다고 그걸 일일이 물어보고 다닌단 말인가. 그렇지 않아도 조심해야 할 때인데 약통을 한 번도 아닌, 두 번이나 흘린 일은 스스로도 용납할 수가 없었다.

‘미쳤어, 밀리안 디모시. 제발 정신 좀 차려. 넋을 빼고 다녀도 정도가 있지. 어떻게 다른 것도 아니고 약을……!’

이제 그만 생각하자고, 어차피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고 수없이 되새겼지만 불시에 들이닥치는 자괴감은 마음대로 떨칠 수가 없었다. 만약 비행기 내에서 떨어트린 거라면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고 쓰레기통 안으로 들어갔으리라. 아니, 그 전에 자신이 약을 먹고 체크 하는 것을 깜박했을 수도 있다.

‘그래. 지금 너무 예민하게 생각하는 거야.’

이럴수록 실수는 더 커지고 괜한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침착해, 밀리안. 평소와 같이 행동해. 지금까지 잘 해왔으니 앞으로도 그럴 거다.

크게 들썩이던 가슴이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밀리안은 펼쳐놓은 알약을 다시 통에 주워 담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비가 온 뒤로 더욱 서늘해진 공기가 축축하게 집 안으로 몰아쳤다.

그는 청소기를 돌리고 집안 곳곳에 있는 먼지마저 다 닦아냈다. 허름한 건물이어서 아무리 청소를 한다 한들 새것처럼 빛이 날 리도 없는데, 밀리안은 강박적으로 집을 샅샅이 들어 엎었다. 이미 깨끗한 냉장고를 정리하고 새로운 밀폐 용기로 바꿔 설거짓감을 늘렸다. 욕실과 빨래 설거지까지 모두 마친 뒤에는 멍하게 거실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이제 아무것도 할 것이 없었다.

‘식사 좀 해.’

누군가가 그의 머리에 속삭였다. 밀리안은 홀린 것처럼 지갑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가 음식을 먹는 이유는 위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페로몬을 억제하는 약은 매우 독해 제때 식사를 하지 않으면 위가 깎여나갔다. 몇 번 바닥을 구르고 속을 게워낸 이후 식사는 꼬박꼬박했다. 다만 입이 짧았던 터라 먹는 양이 현저하게 적을 뿐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다시 집 안이었고, 식탁 위에는 무슨 생각으로 산 건지 모를 음식들이 쌓여 있었다. 일관성도 없어 마트에서 눈에 보이는 대로 카트에 집어넣은 것 같은 모양새였다. 밀리안은 봉투 가장 위에 있는 샌드위치를 꺼내 입에 물었다.

“맛없어.”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먹는 음식은 끔찍할 만큼 맛이 없었다. 그대로 버리려다 다시 한입 깨물었다. 누군가가 자꾸 그에게 밥 좀 먹으라고, 너무 말랐다고 혀를 찼다.

밀리안은 한입, 그리고 또 한입. 씹고 또 씹어가며 목구멍 아래로 음식물을 집어넣었다. 먹다 보니 나쁘지만은 않았다. 샌드위치 하나를 해치우고 식탁 앞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아 다른 음식도 뒤졌다. 이상하게 허기가 졌다.

* * *

클레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에게 인사하는 밀리안을 가만히 바라봤다. 화요일까지 쉬라고 했던 것 같은데. 순간 오늘이 수요일인가 헷갈렸다. 하지만 분명 주말을 보내고 나왔으니 오늘은 월요일이 맞다.

“쉬라고 했더니 왜 나왔어?”

“푹 쉬었습니다.”

“앞으로 또 바쁠 텐데? 쉴 수 있을 때 쉬는 게 좋지 않겠어?”

“괜찮습니다.”

“하.”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여자의 시선에 밀리안은 살짝 시선을 내렸다. 집에 혼자 있으면 쓸데없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 자신이 오메가라는 사실을 아는 게 두려우면서도 사람들 틈에 끼어 있어야 숨을 쉴 수가 있다. 밀리안은 자신이 모순투성이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에 있더라도 괴롭다면 차라리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 있고 싶다. 그곳이 언제 지옥에 떨어질지 모르는 절벽 끝이라도.

“좋은 사장 노릇 할 기회를 안 주는군.”

“쉬어본 게 너무 오랜만이라 오히려 적응되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회사가 더 편합니다.”

“나는 법에 명시된 이상의 연차를 제공했고, 그걸 사용하지 않은 것은 당신이야.”

누가 들으면 그동안 쉬지도 못하게 부려먹은 줄 알겠다며 클레이가 이를 갈았다. 지난번처럼 ‘노코멘트 하겠습니다.’라는 재수 없는 말을 할 줄 알았는데 밀리안은 부정하지 않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왜 이렇게 순순하지? 클레이는 미심쩍은 눈으로 남자의 얼굴을 보다 이전과 달라진 점을 발견했다.

“안색이 좋아졌어.”

“―!”

밀리안은 자신을 향해 뻗어진 하얀 손을 피해 상체를 뒤로 젖혔다.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 벌어진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중간에 손을 멈춘 클레이가 밀리안의 행동에 잠시 눈을 깜박이다 사르르 웃었다. 그대로 꿀통에 빠질 것처럼 달콤한 미소가 불길했다.

“죄, 죄송…….”

“죄송할 거 없어. 어차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니까.”

“무슨.”

밀리안이 대응을 하기도 전에 여자의 손이 그의 양 볼을 감싸 쥐었다. 난폭한 손길에 밀리안의 볼이 안쪽으로 구겨졌다. 그 상태에서 여자가 그의 눈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피부도 맑아지고, 눈 밑에 다크서클도 가라앉았군. 볼살도 올랐어. 식사를 잘 챙겨 먹으라는 말은 제대로 들은 모양이야.”

“아.”

“이렇게 보니 제법 섹…….”

클레이는 말하다 말고 입을 꾹 다물었다. 한참을 그의 얼굴을 훑어보고는 한번 짧게 웃었다. 그리고는 연이어 웃다가 뚝 그쳤다.

“일해.”

그녀는 내팽개치듯 밀리안을 놓아주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바로 블라인드가 내려갔다. 비서실과 사장실 사이에 새까만 벽이 세워졌다.

밀리안은 얼얼한 볼을 손으로 문지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자의 얼굴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는 심장이 뚝 떨어지는 기분이었는데, 그저 장난이었던 모양이었다. 의자에 앉아 관성적으로 모니터를 바라봤다.

‘식사를 잘 챙겨 먹으라는 말은 제대로 들은 모양이야.’

그래. 생각났다. 자신에게 그런 말을 했던 사람은 클레이 디어였다. 허탈함과 함께 미묘하게 기분이 이상했다. 그는 고개를 내저으며 사내홈페이지에 접속해 휴가로 되어 있는 자신의 인사기록을 수정했다. 그러자 인사팀에서 연락이 왔다. 몇 마디 대화를 끝으로 다시 본 업무로 돌아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사위가 조용해졌다는 걸 깨달았다. 밀리안은 키보드 위에서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검은색 슈트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더 고개를 들어 올리니 에릭 드와이스가 자신의 앞에서 그를 보고 있었다.

“밀리안, 잠시 시간이 되나?”

“네.”

“잠깐 나가지.”

에릭이 눈으로 문밖을 가리켰다. 먼저 걸음을 옮겨 나가는 에릭을 따라 밀리안도 의자를 뒤로 밀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밀리안은 앞장서 걸어가고 있는 남자의 등을 바라봤다. 에릭 드와이스는 마치 탐색하는 눈으로 그를 봤다. 꼭 그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듯이. 이게 그저 기우이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에릭 드와이스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멈췄다. 밀리안은 그의 곁에 서서 엘리베이터가 올라오길 기다리다 결국 입을 열었다. 침묵이 더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에릭, 어디까지 가실 겁니까?”

“아, 내가 말을 안 했군. 일 층의 내 사무실로 가지.”

“거기까지 가서 해야 할 이야기인가요?”

“음. 지난번에 내가 말했던 건에 관한 이야기라. 왜, 불편한가?”

“……아닙니다.”

지난번에 했던 이야기. 밀리안은 가라앉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에릭과 따로 나눴던 대화는 클레이 디어가 따로 가져갔다는 비서실 영상에 관한 것뿐이다. 불편하고 피하고 싶은 소재였지만, 피할 수 있는 핑계조차 없었다.

띵-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최상층에서 일 층까지 내려가는 동안 침묵을 지키던 에릭이 말을 걸었다.

“원래 오늘은 쉬는 날이 아니던가?”

“맞습니다. 그런데 딱히 집에서 할 것도 없어서…….”

“쉬는 동안 운동이라도 하지 그랬어?”

에릭의 눈이 그의 몸을 훑었다. 살짝 찌푸린 미간과 못마땅한 시선은 그를 말 안 듣는 어린애처럼 보는 것 같았다. 밀리안은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에릭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어요.”

아마 자신은 죽어도 저런 근육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 그게 자존심 상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인정이 됐다.

“스트레스성 편두통이라면 쉬는 동안은 약을 먹지 않았겠군.”

“……네.”

왜 약에 대해 묻는 걸까. 갑자기 뒤바뀐 화제에 밀리안은 바짝 긴장했다.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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