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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오자마자 한번 게워냈더니 속이 좀 나아졌다. 욕실에서 나온 밀리안은 식탁 위에 올려진 에릭의 선물을 보고 훅 숨을 들이켰다. 언제 이걸 가져왔지? 분명 자신이 직접 들고 온 것인데, 꼭 버리고 온 물건이 다시 제 집에 있는 것처럼 소름이 끼쳤다. 당장이라도 갖다 버리고 싶었다.
그러다 오메가에게 좋은 약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오메가에게 좋은 약. 에릭은 베타도 먹을 수 있는 약이라고 했지만, 그는 자신이 오메가라는 사실을 안 상태로 준 게 분명했다. 아까는 정체를 들킨 것 같은 불안감에 제대로 인사도 못 했던 것 같다. 어느 정도 체념을 하니 그제야 에릭이 나름대로 신경을 써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얄팍한 희망이 싹텄다. 어쩌면 에릭 드와이스가 그가 오메가란 사실을 함구해 줄지도 모른다는. 그게 아니라면 이런 선물을 할 리가 없다. 흐릿했던 시야가 확 트이는 기분이었다.
그는 천천히 걸어 식탁 위에 있는 에릭의 선물을 꺼냈다.
“…….”
동그란 원형의 그릇 안에는 짙은 갈색의 액체가 꽉 차 있었다. 밀리안은 티스푼으로 조심스럽게 떠냈다. 점도가 매우 높고, 냄새도 어딘가 이상했다. 정말 먹어도 되는 건가? 하지만 에릭이 이상한 것을 그에게 줬을 리가 없다. 클레이 디어도 이것의 정체를 아는 것 같았고, 에릭의 아내도 이것을 먹는다고 확인까지 해줬다.
그래도 선뜻 용기가 나지 않는다. 밀리안은 계속 주저하다 눈을 질끈 감고 작은 스푼 위로 동그랗게 올라온 것을 입에 물었다.
“윽.”
에릭이 준 정체불명의 약은 매우 썼다. 쓴 것도 그렇지만, 맛도 이상했다. 밀리안은 혀 위에 그것을 올려둔 채로 정수기에서 물을 따라 황급히 마셨다. 미지근한 물에 녹은 약이 입 안을 마비시키는 것 같았다. 억지로 목구멍 아래로 삼키고 다시 물을 마셨다.
물을 세 컵이나 마셨는데 입 안에는 여전히 이상한 향이 남아 있었다. 도무지 참을 수 없어 양치까지 하고 나니 그나마 좀 냄새가 가시는 것 같았다. 밀리안은 단 한 스푼만 떠먹었을 뿐인 약을 가만히 바라봤다.
플라시보 효과인지 정말 약이 빨리 작용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몸에 열이 도는 기분이었다. 항상 체온이 타인보다 낮았기에 모처럼 차오른 열이 신기했다. 좋은 약이라는 게 사실이었구나.
밀리안은 거실에 미등 하나만 켜둔 채 침실로 들어갔다. 피곤하다. 분명 쉬는 동안 체력이 돌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에릭과의 짧은 대화만으로 한순간에 사라졌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빨리 잠들고 싶었다. 바란다면, 영원히 깨지 않는 깊은 잠을.
깊게 숨을 들이켠 밀리안의 흉부가 위로 솟았다가 천천히 내려왔다. 이윽고 새까만 어둠이 선물처럼 찾아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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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해. 아니, 뜨거운 건가? 하지만 나쁘지 않을 정도의 온도였다. 밀리안은 모처럼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기분 좋아?’
‘응.’
누군가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따뜻해. 이런 기분을 언제 느껴봤는지 까마득했다. 밀리안의 웃음에 그에게 질문했던 여자도 낮게 웃었다. 여자의 품은 부드러웠다. 한 치의 틈도 없이 겹쳐진 몸을 통해 여자의 뜨거운 체온이, 부드러운 살갗의 감촉이 만족스럽다. 밀리안은 여자의 허리를 감은 손을 더 강하게 조였다.
‘그렇게 좋아? 아래가 섰어, 당신.’
‘으응…….’
여자의 다리가 그의 가랑이 사이로 파고들었다. 언제 발기했는지 모를 성기가 부드러운 살에 뭉개졌다. 그가 몸을 떨자 여자는 더 깊숙이 다리를 밀어 넣었다가 빼냈다. 처음 느껴보는 쾌감에 허리가 흔들렸다.
‘아.’
‘야할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실제로 보니 정말…….’
이게 꿈이라는 게 아쉬울 정도야. 여자가 한숨을 쉬며 밀리안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몇 번의 깃털 같은 짧은 입맞춤이 계속됐다. 살짝 떨어진 부드러운 감촉에 밀리안이 아쉬운 신음을 흘리자 여자는 목을 울리며 다시 입을 맞췄다. 이번에는 입술만 닿은 것이 아니었다.
‘으응.’
안쪽 깊숙이 밀고 들어온 혀가 그의 젖은 점막을 건드렸다. 키스라는 게 이렇게 야릇한 기분을 느끼게 할 줄 몰랐다. 모든 게 처음이어서, 밀리안은 여자가 하는 대로 속절없이 끌려갔다. 처음에는 느긋했던 입맞춤이 점점 거칠어졌다. 몸이 타는 것 같다.
숨이 헐떡헐떡 흘러나왔다. 여자의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어 숨 쉴 타이밍을 자꾸 놓쳤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여자의 어깨를 밀었다. 마지막으로 그의 입천장을 혀로 쓸더니 겨우 떨어졌다. 헉. 허억. 뜨거운 숨을 연달아 토하며 다시 산소를 폐 안으로 빨아들였다.
‘내가 처음이야?’
‘……읏.’
여자의 질문에 밀리안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의 얼굴 양쪽에 팔꿈치를 대고 엎드린 여자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아니, 그럴 줄은 알았지만.’
난 별로 남자의 순결에 관심이 없는 편인데. 여자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무슨 뜻이지? 밀리안은 눈을 깜박였다. 그와 눈이 마주친 여자의 입술 위로 올라갔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미소였지만, 어딘가 선연한 미소였다.
‘좋아. 기분 좋아.’
‘헉!’
여자의 손이 그의 성기를 움켜잡았다. 다리가 확 오그라들었다. 하지만 다리 사이에 이미 여자의 허벅지가 들어와 있어 그의 행동은 여자에게 허리를 치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귀엽게 구네?’
여자가 이를 보이며 웃었다. 그다음부터는 정신이 없었다. 밀리안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정신없이 신음하고 울고 허리를 흔드는 것뿐이었다.
.
.
.
“……!”
땀에 흠뻑 젖은 채로 눈을 뜬 밀리안은 삐걱거리며 고개를 내렸다. 얇은 천의 바지 중심부가 솟아 있었다. 그리고 솟아오른 주변이 모두 축축하게 젖은 상태였다. 속옷을 적시고도 모자라 바지 표면까지 뿌연 액체가 흘러나온 것이 눈에도 보였다. 한번 사정한 양이 아니었다. 그러고도 부족해 성기는 여전히 식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발현한 첫날 이후 몽정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커튼 사이로 빛이 들어오고 있는데 몸은 아직도 열에 들뜬 채였다. 밀리안은 본능적으로 손을 아래로 내리려다 화들짝 놀라 상체를 세웠다.
‘안 돼.’
안 돼. 하면 안 돼. 그런 짓을 하면 안 된다. 밀리안은 서둘러 욕실로 향했다. 찬물을 틀어 달아오른 몸을 식혔다. 평소에는 뼈가 시릴 정도로 차가웠던 물이 미지근하게 느껴졌다. 아무리 레버를 찬물 쪽으로 돌려도 나오는 물의 온도는 여전했다.
옷을 입은 채로 샤워기 아래 서 있었던 터라 얇은 천이 몸에 착 달라붙었다. 밀리안은 자꾸만 아래로 내려가려는 고개를 끌어올렸다. 갑자기 몸이 왜 이러지? 설마 히트 사이클이라도 온 건가? 설마. 아닐 거다. 그가 아버지에게 받은 약은 오메가의 페로몬도, 히트 사이클도 막아주는 약이었기에 밀리안은 소름 끼치는 가정을 치워버렸다.
하지만 꿈은 하루로 끝나지 않고, 계속 그에게 찾아왔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잠들지 않으려고 노력하던 밀리안은 점차 꿈으로 도피를 하기 시작했다. 잠자는 시간은 점차 길어졌고, 무의식적으로 꿈에서 깨지 않으려고 했다.
여자의 품은 너무 따뜻해서 계속 그 품에 있고 싶었다. 그를 만지는 손길이 좋았다. 그를 향한 여자의 목소리는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그를 향해 이렇게 따뜻하게 말을 건네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꿈은 언제나 쾌락을 동반했다. 현실이 아니었기에, 실제의 그가 짐승이 되는 것이 아니었기에 밀리안은 여자가 내어주는 쾌락에 익숙해졌다. 어떨 때는 그가 더 해달라고 하기도 했고, 여자의 앞에서 다리를 벌리는 일이 아무렇지 않게 됐다. 사실은 미치도록 수치스러웠지만, 여자가 기뻐해서 견딜 수 있었다.
밀리안이 솔직해질 때마다 여자는 상을 내리듯 더 다정해졌다. 사실 꿈속의 섹스는 무척 난잡해 항상 도저히 못 견디겠다 싶을 정도로 그를 몰아쳤다. 여자의 입 안으로 성기가 들어갔을 때, 밀리안은 뜨거운 점막을 느끼자마자 사정했다. 예상치 못하게 그의 사정액을 입 안에 가득 담은 여자가 볼을 부풀린 채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빨리 뱉으라고 패닉에 빠진 그를 향해 여자가 입을 맞춰다.
제가 뱉어낸 것을 그대로 삼킨 밀리안의 입 주변이 온통 하얗고 끈적한 액체로 범벅이 되어 흘러내렸다. 넋을 뺀 그에게 여자는 웃으며 그의 얼굴을 핥았다. 그리고 다시 입을 맞췄다.
여자와 하는 키스는 좋았다. 사랑, 받는 기분이 들어서. 고작 가상의, 꿈속의 여자에게 사랑을 갈구할 정도로 밀리안의 심장은 메말라 있었다. 현실이 혹독해서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물며 언제 그가 겨우겨우 쌓아두었던 세상이 무너지기 직전이었기에 그 불안한 감정을 꿈을 통해 해소했다. 밀리안은 마치 마약에 길든 중독자처럼 여자가 주는 애정을 끝도 없이 빨아먹었다.
깨어나는 시간은 계속 늦어졌고, 어떨 때는 지각하기 직전에 회사에 출근하기도 했다. 다른 직원들은 달라진 밀리안의 행동에 놀랐고, 곧 익숙해졌다. 밀리안도 그들의 반응에 개의치 않았다. 퇴근 시간도 빨라졌고, 쓸데없이 일을 더 떠맡지도 않았다.
집에 돌아가면 에릭이 준 약을 먹었다. 정확히 이게 원인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 약을 먹은 뒤로 여자의 꿈을 꿨기 때문에 약을 먹는 일을 거르지 않았다. 매일 아침 그가 쏟아낸 액체로 젖어버린 시트를 가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오늘도 빨리 퇴근하기 위해 브리프 케이스를 챙기는 밀리안을 향해 맥시가 다가왔다.
“밀리안, 요즘 누구 만나요? 요즘 엄청 일찍 퇴근하는 거 알죠?”
“아, 그게…….”
“의심스러워라. 정말 애인 생긴 게 아니에요?”
“…….”
매번 칼같이 아니라고 정색하던 밀리안이 이번에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남들이 들었다면 그 나이 들어서 몽정을 하고도 모자라 꿈속의 여자를 연인이라고 생각하는 거냐고 비웃을 만한 일이었다. 게다가 연인이라고 부를만한 관계가 맞는지도 모르겠고.
우물거리며 대답을 피하는 밀리안의 행동에 맥시가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손을 입을 가리고 눈을 깜빡이다, 가방을 든 채로 어정쩡하게 서 있는 밀리안을 향해 빨리 나가라고 채근했다.
“어휴 눈치 없이 잡아서 미안해요. 애인하고 좋은 시간 보내요. 밀리안!”
“매, 맥시.”
“자, 자. 나가세요. 여자를 기다리게 하는 건 무례한 행동이에요.”
“아…….”
맥시는 그를 엘리베이터까지 끌고 가 직접 버튼을 눌러주기까지 했다. 얼떨결에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밀리안은 자신을 향해 손을 크게 흔드는 맥시에게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은색의 문이 닫히고 맥시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밀리안은 엘리베이터 벽에 걸린 거울을 봤다.
이런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 맥시가 그렇게 요란을 떨었구나. 그는 가방을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부끄럽다. 하지만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홧홧하게 열이 오른 얼굴을 손으로 쓸며 밀리안은 결국 웃어버렸다. 살아온 중에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 눈을 뜨는 순간이 아쉽고 아쉬워 계속 잠들어 있고 싶을 정도로.
이대로 세상이 무너진다 해도 좋을 것 같다고, 밀리안은 열없이 웃었다.
주차장으로 바로 내려온 밀리안은 검은색 정장을 입은 보안팀 몇 명이 모여 있는 걸 발견했다. 그중에서도 월등히 키가 큰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에릭 드와이스는 팀원들을 향해 뭐라고 몇 마디 내뱉는 듯하더니 이내 그를 향해 걸어왔다.
“오늘도 이르게 퇴근하는군.”
“정시 퇴근입니다.”
“예전에 비하면 이른 거지.”
“그건, ……그렇죠.”
“약은 잘 먹고 있는 건가?”
“네? 아, 네.”
“그럼 혹시……, 아니. 잘 먹는다니 다행이야. 그리고 며칠 전에 사장님과 대화했는데, 비서실의 영상을 가져간 일은 더 이상 신경 쓰지 말라고 하더군. 자네도 이제 잊어버리도록 해.”
“―!”
“내가 오래 붙잡았군. 퇴근하도록 해.”
“…….”
에릭 드와이스는 일부러 말을 건 게 싱겁게 느껴질 정도로 빨리 대화를 끝냈다. 밀리안은 얼떨떨하게 에릭의 등을 바라봤다. 정말 이제 끝이라고?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좋은 꿈이었지만, 현실감이 없어서 더 불안한 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