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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하게 소환된 대니얼 크래포드는 신중한 얼굴로 환자를 팔에 주사를 놓고 링거 바늘을 찔러 넣었다.
샤워하고 나온 클레이는 머리카락에서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것에도 아랑곳없이 이제는 좀 상태가 나아 보이는 밀리안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 모습에 대니얼의 작은 눈이 뾰족해졌다.
“너 설마 환자를 건드린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그런데 왜 네가 샤워를 하고 나와?”
“뭐 좀 묻어서.”
그게 밀리안의 정액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는데, 대니얼은 대충 눈치를 챈 것처럼 눈빛이 더 날카로워졌다. 가십을 그렇게 좋아하면서 그래도 의사라고 환자는 끔찍하게 챙겼다.
그런 주제에 자신에게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미친 짓을 했지만.
그래도 대니얼이 밀리안을 챙기는 것이 자신에게도 나쁘지 않았던 터라 클레이는 대니얼의 사나운 눈빛을 대충 흘리며 밀리안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열이 심하게 올라서 온몸에 발진이 오른 것처럼 붉었는데 지금은 많이 가라앉았다. 클레이는 물기가 남은 손으로 밀리안의 마른 뺨을 쓸었다. 해본 거라고는 고작 입술 몇 번 맞추고 성기를 한번 빨았을 뿐 그렇게 고생시킨 건 아닌 것 같았는데,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고 아픈 걸 보면 꼭 제가 이렇게 만든 것 같다.
“환자한테 물기 흘리지 말고 뒤로 좀 가. 아니면 머리 좀 말리던가.”
“아.”
클레이는 순순히 대니얼의 말을 따라 뒤로 물러섰다. 그 모습에 대니얼의 눈이 가늘어졌다.
“누구야?”
“내 비서.”
“네가 왜 비서 집에 있는데?”
“그야 내가 좋은 사장이니까.”
소중한 직원이 아프다는데 문병 한번 오는 게 뭐 어때서. 클레이가 뻔뻔한 얼굴로 가당치도 않은 말을 해서 대니얼의 표정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뭐라고 한소리를 하려던 그때 부엌에 있던 벤틀로가 안으로 들어왔다. 벤틀로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대니얼의 기세가 단번에 누그러졌다. 클레이에게 임상 시험도 제대로 마치지 않은 약을 먹였던 죄로 벤틀로에게 여러모로 고초를 당했던 터라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게 대니얼이 클레이의 연락 한 번에 꼼짝도 못 하고 이런 곳까지 달려온 이유이기도 했다.
“선생님, 이제 돌아가셔야 하지 않습니까?”
“벤틀로. 이제 쓸모없다고 바로 치우는 거예요?”
“바쁘시니까요.”
분명 인자한 얼굴로 웃고 있는데 차가운 냉기가 느껴져 대니얼은 입은 꾹 닫았다. 벤틀로는 베타임에도 이상하게 그의 심기를 거스르기 어려웠다. 어린 시절부터 쌓아온 관계가 그의 수다스러운 입을 조신하게 만들었다.
지난번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묘한 데자뷔에 찝찝한 감정도 잠시, 검진 가방을 정리해서 손에 들려주고 자연스럽게 현관으로 안내하는 벤틀로의 에스코트에 휩쓸려 정신을 차려보니 맨션 밖에서 닫힌 현관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달칵.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대니얼은 너무 기가 막히고 황당해 굳게 잠긴 문의 손잡이를 덜컹덜컹 흔들었다.
“벤……!”
“거, 조용히 좀 하십시오! 아까부터 왜 이렇게 시끄럽게 굽니까?!”
옆집에서 마르고 신경질적인 얼굴의 남자가 문을 벌컥 열고 소리를 질렀다. 누구와는 다르게 예의와 개념이 있는 대니얼은 황망한 얼굴로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죄, 죄송합니다. 그런데…….”
“그런데고 자시고 조용히 하라고!”
대니얼은 아까 밀리안의 현관을 발로 차고 소리를 질렀던 클레이가 들었어야 할 불만에 찬 소리를 모두 듣고 나서야 혼이 빠진 얼굴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맨션을 빠져나갔다.
클레이는 언제 봐도 감탄이 나오는 벤틀로의 능숙한 솜씨에 가볍게 박수를 쳤다. 하지만 그녀 역시 벤틀로의 엄한 눈에 얌전히 손을 내렸다. 벤틀로에게 약한 것은 대니얼뿐만이 아니었다.
“환자를 힘들게 하면 안 됩니다.”
“딱히 한 거 없는데…….”
베타는 다 그런가. 아무리 몸이 아프다고 해도 고작 사정 한번 하고 좀 만졌다고 이렇게까지 앓을 필요는 없지 않나. 클레어는 조금 심란한 얼굴로 밀리안을 바라봤다. 본격적인 섹스를 하면 심장마비로 죽는 거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였다.
벤틀로는 욕실에서 깨끗한 수건을 가지고 나와 클레어의 머리를 감싸 말렸다. 남의 집임에도 제가 관리하는 집처럼 자연스러웠다. 클레이의 전화를 받고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집 구조부터 빠르게 파악했던 터라 가능한 행동이었다.
평소와는 너무 다른 클레이의 모습에 그는 이곳에 자주 들락거리게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기에 한 행동이기도 했다.
“이분이 주인님을 고뇌에 빠트린 분입니까?”
“……티나?”
“주인님이 고작 부하직원이 아프다고 문병을 갈 분은 아니니까요.”
게다가 그렇게 긴박한 목소리로 자신을 부를 정도면 말 다 한 거라며 그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클레이가 어깨를 으쓱 들었다 내렸다.
“그냥 좀 신경이 쓰이는 정도야.”
“그러시군요.”
“정말이라니까.”
“네, 그럼요. 믿습니다.”
“…….”
전문가 못지않은 능숙한 솜씨로 긴 머리를 모두 말린 벤틀로가 클레어의 변명 같은 말에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믿는 목소리가 아닌데.
하지만 더 말해봤자 더 궁색해지기만 할 것 같아 그냥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그나저나 금방 낫지 않으실 것 같은데 저택으로 모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집 구조를 파악했다고 하더라도 간병은 신경 써야 할 것이 많고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벤틀로는 본가 저택으로 가자고 제안했다. 게다가 집이 심각하게 허름했다. 오래된 집 특유의 갈라진 벽 틈을 타고 외풍이 계속 들어왔기에 환자에게 안 좋은 환경이었다.
“흐음.”
단 한 번도 파트너를 자신의 집으로 들여 본 적이 없던 클레이는 고민조차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좋은 생각이었다.
* * *
하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클레이가 밀리안을 안아 올리기 위해 그의 등 쪽에 손을 댄 순간 그가 눈을 떴기 때문이었다.
씨발. 하필 지금 눈을 떠. 조금만 더 늦게 깨어나도 되잖아.
클레이는 이 빌어먹을 타이밍에 혀를 찼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깼네? 몸은 좀 괜찮아?”
“떨어지십시오.”
“냉정하긴.”
그게 당신 매력이긴 해. 클레이는 잔뜩 경계하는 눈으로 저를 보는 밀리안에게서 순순히 떨어졌다.
그 모습에 수액 팩을 손에 들고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던 벤틀로는 조용히 원위치로 옮겨 걸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들 곁으로 다가갔다.
갑자기 등장한 낯선 사람에 밀리안은 놀란 얼굴을 했다가 이전에 몇 번 보았던 클레이의 집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밀리안의 경계가 조금 누그러지자 벤틀로가 인자한 얼굴로 웃었다.
“안녕하세요. 저희 구면이지요?”
“네. 미스터 벤틀로.”
“기억해 주시는군요.”
기억을 못 하는 게 이상하지. 그가 입사한 이후 클레이 디어와 가장 크고 더럽게 스캔들이 났던 케이 드렉스를 처리한 사람이었으니까. 저 인자한 얼굴로 사람을 바닥까지 끌어내리는 모습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잘못했다고 울고 빌던 남자는 결국 업계에서 매장됐다.
“케이 드렉스의 일이 워낙 인상적이어서요.”
“이런, 그분이 워낙 끈질기셔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오해는 하지 말아주십시오.”
“그렇, 군요. 그런데 제집에는 무슨 일로 오셨는지…….”
밀리안은 상체를 일으키다 팔에 연결된 링거 줄을 발견했다. 팔을 들어 올리니 제 손목에 바늘이 꼽혀있었다. 대체 이게 왜. 경직된 눈으로 저를 보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봤다. 클레이가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
“열이 너무 올라서 주치의를 불렀어.”
“……주치의, 말입니까?”
밀리안의 얼굴이 순간 경직됐다.
“꽤 유능한 의사니까 걱정하지 마. 지금은 괜찮지? 열이 좀 내렸던…… 밀리안?”
“죄송하지만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뭐?”
밀리안이 창백한 얼굴로 제 손목에 연결된 바늘을 뽑아버렸다. 난폭한 손길에 상처가 났는지 피가 줄줄 새어 나왔다.
예상치도 못한 밀리안의 행동에 놀란 클레이가 그에게 다가가려다 벤틀로의 만류에 멈춰섰다. 벤틀로가 밀리안이 보지 못하도록 살짝 몸을 돌리고 검지를 입술에 댔다. 지금은 조용히 나가야 할 때라는 신호에 클레이는 냉정함을 되찾고 고개를 끄덕였다.
밀리안은 여전히 하얗게 질려 있었다. 꼭 목이 졸린 것처럼. 클레이는 밀리안이 주치의를 불렀다는 말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을 마음에 담았다. 왜? 의사를 만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하지만 지금은 물어볼 때가 아니다. 클레이는 그에게서 조금 더 떨어졌다. 대놓고 안도하는 표정을 보니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지만, 겉으로는 담담한 표정을 가장했다.
“몸이 다 나을 때까지 회사는 신경 쓰지 말고 푹 쉬도록 해.”
“…….”
“오늘은……. 아니, 다음에 얘기하는 게 낫겠군.”
새파랗게 질린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누군가에게 약한 감정이 든 것이 처음이다. 자신이 특별하게 대하고 있다는 걸 저 남자는 모르겠지. 그래도 꽤 수확이 있었던 하루였다. 썩 마음에 차진 않더라도 이 정도면 괜찮다. 어차피 시간은 충분히 있으니까.
클레이는 벤틀로와 함께 밀리안의 맨션을 나왔다. 차 문이 닫히기 무섭게 클레이가 옆에 앉은 벤틀로를 바라봤다.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지?”
“조사하겠습니다.”
항상 인자한 얼굴을 하던 벤틀로의 눈이 날카롭게 변해 있었다. 항상 클레이가 최우선인 그에게 수상쩍은 인간이 그녀의 곁에 있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문제기 때문이었다.
하여간 자신이 아직도 부모를 잃고 울기만 하던 어린아이인 줄 안다.
클레이는 나른한 얼굴로 제 품에 있었던 밀리안 디모시를 떠올렸다. 의사. 제게 들키면 안 되는 비밀. 그와 더불어 근래 미묘하게 풍기던 오메가의 달콤한 냄새.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딱딱 맞춰진 퍼즐에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너무 쉽잖아, 밀리안. 숨기려면 더 철저하게 숨겼어야지.
베타라고 알고 있던 남자가 사실은 오메가일지도 모른다. 그 은밀하고 달콤하던 냄새가 사실은 밀리안의 향이라니. 아직 확정을 지을 수는 없지만, 클레이는 거의 확신했다. 그만큼 밀리안의 반응이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맙소사. 자신이 그동안 다른 남자를 안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자극했던 오메가가 밀리안이었다. 현실에서도 꿈에서도 그녀를 옭아매고 있었다. 그렇게 뻣뻣한 주제에 참 앙큼한 남자였다.
“주인님?”
“아니, 하지 마. 그렇게 알고 싶지 않아.”
그 남자가 제 입으로 꼭꼭 숨기던 비밀을 말하게 하고 싶었다. 완전히 자신에게 무너져 매달리는 모습도, 제게 꿰뚫린 채 쾌락에 떠는 모습도 보고 싶다. 단순히 그의 육체가 탐이 난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오늘 한번 살짝 맛봤더니 더 깊고 은밀한 관계가 되고 싶었다.
오 년이나 지나서야 밀리안에 대해 알게 되었다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위험한 생각을 하고 계신 건 아니겠지요?”
꼭 그렇게 웃을 때마다 머리 아픈 일이 생긴다며 벤틀로가 엄한 얼굴을 했다.
“설마.”
조금 난잡한 생각을 하고 있을 뿐이지.
클레이는 자신의 전속 디자이너에게 그에게 입힐 속옷을 주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예쁜 성기에 그런 밋밋하고 칙칙한 속옷은 어울리지 않는다. 아주 작은 레이스 속옷. 색은 하얀색이 좋을 것 같다. 성기가 큰 편이니 속옷 위로 귀두가 살짝 보여도 귀엽겠지.
그러고 보니 구멍을 길들일 기구도 주문해야겠군. 클레이는 밀리안에게 어떤 디자인이 어울릴지 즐거운 상상을 시작했다. 아, 그래. 끝은 진주가 좋을 것 같다. 발긋한 성기 끝에 매달린 동그란 진주는 분명 그와 잘 어울릴 테니까.
하긴. 뭐든 안 어울릴까.
클레이는 그냥 종류별로 주문하기로 했다.
그 고지식한 남자라면 분명 수치스러워할 거다. 눈가가 붉어져서 자신을 원망스럽게 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자 소름이 끼쳤다. 클레이는 다리를 반대 방향으로 바꿔 꼬았다. 벌써부터 아래가 근질거렸다.
밀리안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그가 오메가라면 지금쯤 온몸이 달아 그 예쁜 성기를 흔들고 있을 것이다. 클레이는 손톱 끝으로 입술을 긁었다. 그렇게 냉담하게 내쫓겼는데 이 정도 심술은 부려도 괜찮겠지.
그나저나 돈을 조금 주는 것도 아닌데, 왜 이딴 집에 사는 거지? 클레이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이제는 작게 보이는 밀리안의 맨션을 바라봤다.
당장이라도 자신의 집에 데려다 놓고 싶은 마음이었다. 저런 집에서 살라고 그 돈을 주는 게 아니었는데, 대체 돈이 어디로 새길래…….
클레이가 계속 창밖을 바라보자 벤틀로가 그 틈새를 파고들었다.
“조사, 하는 게 좋겠지요?”
“으음.”
“알아두면 대처하기 편하실 겁니다. 저런 성향의 사람은 웬만해서는 마음을 얻기 힘듭니다.”
“그냥 관심이 있는 정도라니까.”
“거짓말을 하실 거라면 그렇게 웃으시면 안 되죠.”
“…….”
정말 속일 수가 없네. 역시 저를 키운 사람다웠다. 클레이는 결국 알아서 하라고 백기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