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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섹슈얼-23화 (23/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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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준비를 마치고 거울을 바라봤다. 메마른 얼굴을 한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울에 비친 마른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버석한 웃음이 흘렀다. 밀리안은 이미 목 끝까지 바짝 당겨 맨 넥타이를 더 조였다.

열흘이나 회사에 나가지 않았지만,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집안을 부유하는 클레이 디어의 냄새가 그를 괴롭혔기 때문이었다. 완벽하게 자신만의 공간이었던 곳이 가장 위험한 존재에게 침범당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있지도 않았는데 알파는 밀리안의 안식처를 철저하게 붕괴시켰다.

밀리안은 새삼 낯설게 느껴지는 집을 천천히 돌아봤다.

이미 집 계약을 파기하고 내놓았다. 집주인은 밀리안의 갑작스러운 전화에 놀란 듯했지만, 워낙 깔끔하게 사용하고 오랜 시간 월세를 단 한 번도 밀린 적 없던 좋은 세입자였던 터라 조금 아쉬워하는 기색만 내비쳤을 뿐 별다른 말이 없이 파기에 동의했다.

잘한 결정일까. 확신할 수가 없었지만, 다른 방법 또한 없었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을 하려고 해도 클레이 디어가 이미 자신이 오메가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는 것으로 귀결됐다. 그리고 이제는 떠나야 할 때라는 사실도.

그동안 필사적으로 쌓아온 것이 허무할 정도로 쉽게 무너졌다. 끔찍한 기분에 삼 일간은 넋을 놓고 살았다. 하지만 이미 상황은 벌어졌고, 시간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이곳을 떠나야 한다. 멀리. 자신을 아는 사람이 전혀 없는 곳으로.

아무것도 준비해 놓은 것이 없었던 터라 결국 다시 아버지에게 손을 벌렸다. 비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마치 이미 이런 일을 예견했던 것처럼 다른 나라로 떠나라고 말을 했던 것은 아버지였기에. 도와달라는 밀리안의 말에 한참이나 침묵하던 아버지는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잘 결정했다.’

‘…….’

‘떠나면 다신 돌아오지 마라. 이게 내 조건이다.’

‘네.’

돌아올 생각이 없는 것은 자신이 더했다. 시간의 차도 두지 않고 바로 대답하자 아버지가 다시 침묵했다. 밀리안은 마른 눈으로 허공을 바라봤다. 상처받지 않는다. 받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왜 하필 오메가를 낳아서는.’

‘…….’

이 말에는 버틸 수 없었다. 밀리안은 이를 악물었다. 나도 사람이에요, 아버지. 베타인 당신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결국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알파에게 짓눌려 욕망에 허덕이던 짐승이 된 자신을 경험했기 때문에. 칼날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비난을 온전히 부정하지 못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한참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던 것 같다. 다른 사람에게는 한없이 다정하고 인자한 아버지. 기사를 통해 오메가의 인권을 위해 단체를 만들었다는 소식도 봤는데 왜 정작 자신의 아들에게는 이렇게 냉혹할까.

전화를 끊자마자 날아온 메시지를 보며 헛웃음이 나왔다. 이민 심사가 완료된 나라의 이름과 비행기 티켓까지. 이미 모든 것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그가 가겠다고 말을 하기도 전에.

‘그만 생각해.’

밀리안은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한 달. 한 달 안에 모든 걸 정리해야 한다. 가장 큰 문제는 회사였다. 최대한 깔끔하게 끝내고 싶다. 그래야 새로운 곳에서도 제대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한 달이라는 시간은 분명 짧았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정리를 할 시간이 되긴 할 거다.

창문을 바라보니 동이 트고 있었다. 다섯 시. 나가야 할 때가 됐다. 밀리안은 약을 하나 꺼내 입 안으로 밀어 넣고 집을 나섰다.

밀리안은 자신이 한 달이라는 유예기간을 둔 이유가 누군가가 붙잡아주길 바라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도망갈 생각이라면 가장 마주쳐선 안 될 클레이 디어가 있는 회사로 돌아가선 안 된다는 것도. 어쩌면 꿈에서처럼 누군가가 자신을 다정하게 끌어 안아주길 기대하고 있다는 것 역시도.

* * *

“밀리안!”

레이는 출근하기 무섭게 자리에 앉아 이른 업무를 보고 있는 밀리안에게로 달려갔다. 누가 보면 오랫동안 헤어져 있던 가족을 상봉한 듯 애절했다. 그 부담스러운 얼굴에 밀리안이 의자를 뒤쪽으로 끌어 거리를 벌렸다.

“거기서 멈추세요.”

“밀리…….”

“지각입니다. 빨리 자리에 앉으세요.”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처럼 딱딱한 말에 레이는 상처를 입기는커녕 오히려 감격 어린 표정을 지었다.

“아, 정말 밀리안 맞네요. 이 꼬장꼬장함! 열흘 만에 들으니까 더 짜릿해요.”

“…….”

“몸은 좀 괜찮아요? 사장님이 문병을 가셨다는데, 어떠셨어요? 세상에. 사장님의 문병이라니, 밀리안은 정말…….”

문병. 클레이 디어가 자신의 집에 다녀갔던 그 날을 떠올리자 밀리안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레이는 뭔지는 모르지만, 자신이 말실수했다는 사실은 정확히 인지하고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일, 안 하십니까?”

“해야죠! 그러려고 출근했는데요. 하하.”

레이는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맞은 편에서 한심하게 보고 있는 맥시와 줄리아를 보며 자기가 뭘 잘못했냐고 입을 벙긋거리며 물었다.

너 같으면 사장님이 문병 오는 게 좋겠니? 아무리 회사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고 나이가 어려 철이 없다 하더라도 상황파악을 못해도 너무 못했다. 두 사람은 레이에게 뭐라고 충고를 할 필요성도 못 느끼고 동시에 고개를 숙이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줄리아, 괜찮다면 제가 없던 동안의 업무 브리핑을 받을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잠시만요. 메일로 문서를 먼저 보낼게요.”

줄리아는 기다렸다는 듯 작성해 놓은 문서를 발송했다. 그리고 밀리안의 자리로 와 중요한 건을 중심으로 보고를 했다. 아직 적응을 다 하지 못한 레이 때문에 일이 간간이 꼬이긴 했으나 큰 문제는 없던 것 같았다. 밀리안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별일 없었네요. 제가 없어도 괜찮겠어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밀리안이 없는 동안 우리가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네?”

“사장님이 이상해요.”

상체를 숙여 앉아 있는 밀리안의 몸에 밀착한 줄리아가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무서울 정도로 상냥한 얼굴을 하다가 갑자기 기분이 가라앉아서 밀리안이 없던 동안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몰라서 완전히 가시방석이었단 말이에요.”

“……그랬습니까?”

“밀리안도 알다시피, 우리는 아직 사장님이 어려워서 말도…….”

누군가가 보고 있다는 것을 느낀 줄리아의 입이 딱 다물렸다. 주춤주춤 문 쪽으로 이동하는 줄리아의 시선을 따라 밀리안의 고개도 돌아갔다.

검은색 정장과 새하얀 셔츠를 목 끝까지 잠근 옷차림에 금발을 자연스럽게 내린 클레이 디어의 표정이 날카로웠다. 그녀의 녹색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아 딱 달라붙어 있는 밀리안과 줄리아를 훑었다.

“그게, 밀리안이 없는 동안의 업무 브리핑을 잠시…….”

“아, 브리핑.”

브리핑을 그렇게 딱 달라붙어서? 클레이의 목소리에서 찬 기운이 뚝뚝 떨어졌다. 줄리아는 밀리안과 완전히 밀착하다시피 붙어 있던 몸을 황급히 떼어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클레이의 눈이 줄리아에게서 떨어져 밀리안에게로 향했다. 말랐다. 이전에도 너무 말랐다고 생각했는데 회사에 나오지 않는 동안 뭘 했는지 뼈의 윤곽이 보일 정도였다. 미묘하게 내려간 눈동자. 절대 마주치지 않는 시선에 속이 뒤틀렸다.

“안으로 따라와.”

“네, 사장님.”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비서실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무표정한 사장과 어딘가 어두운 얼굴의 밀리안이 사장실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다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클레이는 밀리안이 뒤따라 들어와 문을 닫자 사무실 유리 벽에 블라인드를 내렸다. 불도 아직 켜지 않은 상태에서 모든 유리창에 검은색 블라인드가 내려가자 검은 밤처럼 한순간에 어두워졌다.

클레이가 바짝 굳어버린 밀리안에게로 다가갔다. 바닥을 긁는 힐이 내는 소음만이 정적을 뚫고 있었다. 밀리안의 몸이 조금씩 뒤로 가다 문에 부딪혔다.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었다. 본능적으로 문을 열고 나가야 한다고 판단했지만, 클레이가 한발 빨랐다. 밀리안의 허리로 파고든 매끄러운 손이 문을 잠갔다. 달칵. 단조로운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 * *

일주일은 기다릴 만했다. 하지만 그 이상 시간이 지나도 밀리안이 나타나지 않자 클레이의 신경은 점차 날이 바짝 섰다. 찾아갈까. 기다릴까. 클레이는 단 두 개의 선택지에서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열흘. 그 이상은 절대 기다려주지 않겠다고 마지노선을 그었는데, 밀리안은 현명하게 그 날짜 안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에게도, 그에게도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그건 그거고 기다리게 만든 건 대가를 받아야겠지. 클레이는 제 팔 사이에 갇힌 남자에게 몸을 더 가까이 붙였다.

밀리안은 뭐가 그리 무서운지 바짝 굳어 있었다. 누가 죽이기라도 한 대? 클레이는 문에 딱 달라붙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의 턱을 손가락으로 들어 올렸다. 창백한 얼굴. 빛을 차단해 사무실 안은 어두웠지만, 클레이의 눈에는 그의 입술이 가늘게 떨리는 게 보였다. 평소에는 얄미울 정도로 또박또박 말대꾸하더니 별짓도 안 했는데 다 죽어가는 얼굴을 하는 게 거슬렸다.

“열흘이면 푹 쉬었지?”

“…….”

“회사 생각하지 말고 푹 쉬라고 한 건 나지만, 정말 이렇게 오래 안 나올 줄은 몰랐어.”

“사장님…….”

“응?”

클레이의 오른쪽 다리가 미끄러지듯 밀리안의 다리 사이로 들어갔다. 문에 대고 있던 손을 그의 등으로 옮겨 천천히 쓸었다. 이전에도 느꼈듯 예민한 몸이 그녀가 만지는 대로 파득 떨었다. 진짜 약아빠졌네. 클레이는 속으로 혀를 찼다. 이렇게 반응을 잘해 주니 없던 화도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말해, 밀리안. 나에게 할 말이 있지 않아?”

“사장님 저는…….”

단정한 입술이 가늘게 떨며 붙었다 떨어졌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가지런한 이와 붉은 혀가 보였다. 어두웠지만, 알파인 클레이에게 이 정도의 어둠은 시야를 가리지 않았다. 기다려야 하는데 저 입술이 주었던 달콤함이 떠오르자 몸이 달았다.

질이 나쁜 남자다. 적극적으로 유혹하는 것보다 더 은밀하고 관능적인. 자신조차 모르고 있던 취향을 꿰뚫어 보고 나타난 것처럼 완벽한 오메가. 클레이는 작게 한숨을 쉬고 여전히 망설이고 있는 남자를 끌어당겼다. 더는 기다려 줄 수 없었다.

부드러운 가슴이 그의 상체를 짓눌렀다. 입술이 부딪히고 여자는 반항할 틈도 주지 않은 채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를 집어넣었다.

“읏!”

까슬한 입술 각질이 평소라면 불쾌했을 텐데 이조차도 간지럽게 느껴졌다. 오히려 짜릿한 자극으로 돌아와 클레이는 그 감각을 즐기기 위해 더 깊숙이 입술을 맞댔다. 제 혀를 피해 도망 다니는 남자의 요망한 혀를 잡아채 길게 빨자 맞닿은 남자의 하체가 경련하는 게 느껴졌다.

좋아.

클레이의 목에서 그르릉, 고양잇과 짐승의 소리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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