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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급 세단은 매우 부드럽게 움직였지만, 그렇다고 흔들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밀리안은 다리를 바짝 모은 채로 간간이 전해지는 차의 진동을 버텨야 했다. 그러다 높은 턱이 있었는지 차가 덜컹, 흔들렸다.
평소라면 크게 느껴지지도 않았을 진동인데 한껏 예민해진 상태의 밀리안에게는 순간 숨이 턱 막힐 정도로 타격이 컸다.
“흐읏!”
“……뭐가 불편해?”
“읏, 사장님이!”
“내가 뭘?”
클레이 디어가 의뭉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그때 차가 다시 흔들렸다. 아. 자칫 입을 열었다가는 이상한 소리가 다시 나올 것 같아서 밀리안은 이를 악물었다.
“어디 아파? 얼굴이 붉어.”
“마, 만지지 마세요!”
“흐응.”
밀리안은 차 문 쪽으로 몸을 바짝 기댔다. 여자는 그의 머리를 만지려던 손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그를 보며 짙게 웃었다. 밀리안은 순간 악마처럼 웃는 여자를 향해 몸을 내밀고 싶었다.
아래가 발기한 채로 견뎠던 시간이 너무 길었다. 당장 분출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섰는데 변태 같은 속옷이 성기를 계속 조여서 사정을 할 수 없는 괴로운 상태였다.
안 돼.
밀리안은 차가운 창문에 볼을 기댔다. 그는 자신이 잘 참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계속 깨물어서 살갗이 거칠어진 입술에서는 계속 달뜬 숨이 헐떡이며 토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여자가 즐겁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뱀처럼 매끄러운 손이 바짝 굳은 허벅지를 매만졌다. 밀리안의 몸이 파득 튀었다.
“아흑!”
“도와달라고 말해 봐.”
어서. 아름다운 여자는 선악과를 권하며 이브를 유혹하던 에덴의 악마처럼 속살거렸다. 죄악의 길은 달콤하다고. 어서 빨리 굴복하라고 계속 그를 흔들었다.
밀리안은 열감에 젖은 눈으로 자신을 향해 몸을 숙인 여자를 바라봤다. 새빨간 립스틱을 칠한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새하얀 이빨 사이로 음탕한 혀가 꿈틀거리는 게 아찔한 시야에서도 마치 눈에 각인이라도 된 것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저 입 안에 달콤한 쾌락이 숨겨져 있었다. 밀리안은 자신의 성기를 빨고 제가 뿜어낸 짙은 액체를 삼켰던 장면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리고 부드럽게 그를 안았던 꿈속 여자의 품도.
밀리안의 머릿속에서 꿈에 나타났던 여자와 자신의 옆에서 그를 흔들고 있는 클레이 디어가 뒤엉켰다. 이렇게 선 듯 그를 만진 사람이 그 둘뿐이라서. 그를 만지는 손길이 미묘하게 달랐지만, 또 어딘가 비슷했다. 그래서 일지도 모른다. 도망쳐야 하는데도 도망칠 생각조차 못 하는 이유가.
여전히 망설이는 그를 재촉하는 것처럼 여자의 손이 허벅지 위쪽으로 점점 올라왔다.
여자의 페로몬이 밀폐된 차 안을 뭉근하게 휘감고 있었다. 새벽에 먹은 약이 효과가 떨어지고 있었다. 하루 종일 자극당해 달아오른 육체에서 오메가의 본능이 깨어나고 있다.
거의 입술이 닿을 듯이 가까이 다가온 여자를 멍하게 보던 밀리안은 벼락에 맞은 것처럼 몸을 흠칫 떨고 그녀를 밀쳐냈다.
거리가 벌어졌는데도 그의 몸은 여전히 벌벌 떨고 있었다. 여자는 뒤로 밀쳐졌음에도 전혀 타격을 받지 않은 것처럼 웃었다. 단지 완벽하게 궁지에 몰리고도 육욕에 굴복하지 않는 그가 의외라는 듯 눈을 살짝 크게 떴을 뿐이었다.
그때, 차가 부드럽게 정차했다. 밀리안은 도망치듯 차에서 나왔다가 거대한 저택을 보고 멈칫 굳었다.
차가 멈춘 곳은 애초에 통보된 호텔 로비가 아니었다. 계열사 임원들과의 미팅 겸 식사라고 알고 있었는데 차는 예약한 호텔을 한참을 더 지나쳐 디어 가의 저택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밀리안은 천천히 뒤를 돌았다. 클레이 디어는 이미 나와 대기하고 있던 집사, 벤틀로의 에스코트를 받아 우아하게 차에서 내린 상태였다.
“사장님, 여긴…….”
“아아, 장소가 바뀌었다는 걸 이야기 하지 않았군.”
클레이 디어가 짐짓 실수했다는 듯 가볍게 손을 마주쳤다. 경쾌한 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밀리안은 이것이 여자의 의도적인 행동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모를 수가 없었다. 여자의 눈이 짓궂게 휘어 있어서. 육식 짐승처럼 자신을 발라먹을 듯이 보고 있어서, 모르는 게 이상한 거였다.
뭐라고 항의하려고 했는데 타이밍 나쁘게 벤틀로가 말을 걸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밀리안 님.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미스터 벤틀로. 저는…….”
“준비된 식사가 식습니다. 그럼 맛이 떨어질 테고, 최선을 다해 준비한 요리사 미셸이 슬퍼하겠군요.”
“…….”
벤틀로가 태연하게 약을 파는 모습을 클레이 디어는 즐겁게 방관하고 있었다. 밀리안처럼 강박적인 성격은 남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지난 오 년간의 경험으로 간파했다. 해서, 자신이 나서는 것보다 나이가 지긋한 벤틀로가 밀리안을 안으로 들어가게끔 꼬드기는 게 더 쉽고 간편한 일이었다. 게다가 저 몸으로 오래 서 있는 것도 무리일 테고.
클레이의 예상대로 밀리안은 벤틀로에게 휘말려 떠밀리듯 안으로 들어갔다. 당황한 그의 시선이 그녀에게 잠시 닿았다가 무서운 것이라도 봤다는 듯이 황급히 떨어졌다.
‘자극하지 말라니까.’
자꾸 저러니까 장난치고 싶지. 클레이는 혀를 차며 느긋한 걸음으로 그들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과연 그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끝의 끝까지 견디다 못해 스스로 다리를 벌릴 밀리안의 모습이 기대되어 가슴이 부풀었다.
불편한 걸음으로 쫓기듯 안으로 들어가는 밀리안의 뒷모습을 눈으로 핥으며 클레이가 꽃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 * *
클레이의 예상보다 밀리안은 참 잘 버텼다. 쾌락에 약한 몸을 하고서 지금까지 버틴 게 용할 정도였는데도 밀리안은 무너질 듯, 무너지지 않았다.
이러다 밀리안이 무너지기 전에 자신이 먼저 짐승이 되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메인 요리가 나오기 전, 벤틀로는 차갑게 식힌 와인을 들고 왔다. 능숙하게 병을 따 클레이의 잔에 먼저 따르고, 그 뒤에 밀리안의 잔에 따랐다.
“향이 특별한 와인입니다. 한번 시음해 보십시오.”
“저는, 일하는 중이라, 술은,”
“와인 한 잔 정도는 술이라고 할 수 없지요. 메인 요리와 무척 잘 어울리는 것으로 애써 골라 왔는데, 안 드시면 섭섭합니다.”
“…….”
벤틀로는 클레이의 의도를 완벽하게 파악한 것처럼 밀리안에게 와인을 권했다. 역시 자신을 어렸을 때부터 키워낸 사람다웠다. 그녀는 웃음을 꾹 참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셔도 돼. 오늘은 이걸로 스케줄이 끝이니까.”
“그게 무슨.”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는 의심이 가득한 눈빛. 어딘가 초조하고 괴로운 얼굴이 제법 맛있게 익었다. 클레이는 와인을 한 모금 입에 담으며 표정을 숨겼다.
“다 먹으면 집에 보내줄 테니까 너무 그러지 마.”
“……정말, 입니까?”
“응. 약속해.”
클레이는 의심이 가득 담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웃었다. 약속은 무슨.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밀리안은 오늘 이곳에서 나갈 수 없다. 허무하게 보낼 생각이었으면 애초에 자신의 집 안으로 들이지도 않았다.
약속.
그것은 정말 믿을 수 있는 것인가. 지금까지 클레이 디어가 자신에게 한 짓만 생각해봐도 그것은 결코 신뢰감을 줄 수 없었다. 그가 불신 어린 눈으로 보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여자는 짧게 웃으며 우아하게 손을 흔들었다.
그때, 은색의 무언가가 식탁 위에 있는 조명의 빛을 받아 반짝였다. 뭐지. 빛에 의해 형태가 뭉개진 작은 물체는 어딘가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왠지 모르게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뭐지. 저게 뭐지? 부릅뜬 눈으로 형체를 파악하려는데 클레이 디어가 그 은색 물체에 짧게 입맞춤했다. 손가락의 그림자에 빛이 가려지자 밀리안은 저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열쇠.
저게 어디에 사용되는지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밀리안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의자가 거친 소리를 내며 뒤로 밀쳐졌지만, 그의 신경은 오로지 여자의 손가락에 매달린 작은 열쇠에 가 있었다.
“이거, 필요하잖아. 안 그래?”
“비열…….”
하하. 클레이 디어가 큰 소리로 웃었다. 관능적인 웃음소리를 타고 알파의 페로몬이 퍼지고 있었다. 언제 약을 먹었지. 오후에 먹었던가. 정신을 흐트러트리는 페로몬에 취해 사고가 제대로 정립이 되지 않는다. 언제 먹었지…….
다리가 꺾일 뻔한 순간, 여자의 웃음소리도, 알파의 페로몬도 멈췄다.
“우리는 지금 대화가 필요한 상황이라는 걸 너도 알 거야. 나는 네게 제안을 하나 할 거고, 너는 그걸 받아들일지 말지 선택을 하면 돼. 아, 내 제안을 네가 거절한다면 다음부턴 널 건드리지 않을 거야.”
“그걸 제가 믿을…….”
“이 열쇠는 물론, 네가 숨기고 싶어 하는 비밀도 끝까지 함구해 주는 조건도 포함해서. 어때? 이만하면 받아 들일만 한 제안이 아닌가?”
“……!”
밀리안은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받아들일 만한 제안이었고, 또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제안이기도 했다. 이건 제안을 빙자한 협박이었으니까.
그때, 조용히 서서 두 사람을 지켜보던 벤틀로가 밀리안이 밀어낸 의자를 바르게 정돈하고 앉기 편한 각도로 맞췄다. 어서 앉으라고 종용하듯이. 밀리안은 깊게 숨을 들이켠 후 천천히 내쉬었다. 자신의 편이 없는 곳이다. 출구는 오로지 클레이 디어가 그의 앞에 들이민 제안뿐이었다. 그에게 한없이 불리한 제안이었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밀리안은 의자에 앉았다.
* * *
빨리 대화를 끝내고 나가고 싶었다. 어차피 자신은 그녀의 제안을 거절할 거니까.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어서, 밀리안은 다소 초조하게 입을 열었다.
“제안이라는 건.”
“그건 식사를 모두 마친 후에 이야기해. 쉬라고 휴가를 줬더니 대체 뭘 먹고 지낸 거야? 너무 말랐잖아.”
“…….”
그와는 달리 여자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뭘 먹었냐니. 지난 열흘간 자신은 한가롭게 식사를 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잠이 들면 저 여자가 나타나 그를 휘저어서.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쾌락을 그의 몸 위로 난자하듯 퍼부어댔다. 밀리안은 여자의 집요한 시선을 피해 눈을 아래로 내렸다.
클레이 디어는 그가 대답을 피하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동안 내 생각, 했어?”
“제가 왜.”
“나는 계속했거든. 밀리안 당신이 내게 키스를 하던 것도, 내게 안겨 느끼던 것도, 전부.”
“…!”
“아주 달콤했어.”
나직한 한숨과 함께 달콤하게 젖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밀리안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여자의 말과 함께 그때 느꼈던 쾌감이 떠올라 한껏 예민해져 있던 몸이 더 달아올랐기 때문이었다.
야릇한 분위기를 내는 일방적인 대화의 맥을 끊은 것은 그들의 곁에 서 있던 벤틀로였다. 그는 작게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밀리안 님, 외투는 저에게 주시지요.”
“아, 아뇨, 괜찮습니다. 이대로 식사하겠습니다.”
“불편하실 텐데.”
“밀리안. 그거, 벗고 싶은 거 아니었어?”
“……!”
클레이 디어가 말하는 ‘그거’는 결코 외투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하반신을 묶고 있는 그것. 은밀한 시선은 식탁 아래로 숨은 하반신으로 향해 있어서 모를 수가 없었다.
그로서는 도저히 풀어내지 못하는 것을 풀려면 클레이 디어의 말을 들어야 했다. 그게 아무리 싫다 하더라도.
밀리안은 잠시 망설이다 앉은 자세 그대로 외투를 벗어 벤틀로에게 건넸다. 그는 우아한 자세로 외투를 받아들고 밖으로 나갔다. 아래를 가려주는 유일한 마지노선이 사라진 기분이었다. 외투만 벗었을 뿐, 모든 옷을 갖춰 입고 있는데도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