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맨틱 섹슈얼-42화 (42/144)

-42-

회사에서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비록 화장실을 가는 것부터 시작해 걷는 것까지 조심해야 했지만, 그래도 클레이 디어의 냄새가 짙게 배어있는 저택에 남아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밀리안은 클레이를 따라 회의를 들어갔다. 계열사의 사장들이 모두 모인 자리였다.

그동안의 공백으로 이 회의에 대한 준비가 채 되지 않았던 밀리안은 회의가 시작되기 직전까지 맥시와 줄리아가 넘겨준 자료를 머릿속에 넣었다. 다행히 그 자료가 이전에 밀리안이 먼저 초안을 잡아 놓았던 것이고, 최신 자료를 제외하고는 이미 숙지하고 있었던 사항이라 이해가 빨랐다.

그는 능숙하게 회의의 흐름을 주도했다. 성과에 관련된 회의였기에 이 회의의 결과에 따라 투자금이 줄어들 수도 있고, 늘어날 수도 있다. 그런 만큼 참석자들의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서서 간혹 언성이 높아질 때가 있었다.

정작 클레이 디어는 그들의 행동을 말없이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밀리안은 마이크의 성량을 조금 높여 불타오를 뻔한 분위기를 진정시킨 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의자에 몸을 깊게 묻은 클레이가 살짝 눈을 접어 웃었다. 그리고 한쪽으로 꼬고 있던 다리를 천천히 내려 다른 쪽으로 바꿔 꼬았다. 짧고 타이트한 가죽 치마가 벌어져 안이 보였다. 밀리안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떠졌다.

-지지지직-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로 마이크를 쳐서 생긴 소음입니다.”

밀리안이 당황한 얼굴로 황급히 사과하자 귀를 막거나, 인상을 찌푸리며 불만을 토로하던 사람들이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다. 항상 표정의 변화가 없던 밀리안이 실수를 한 것도, 그 실수에 얼굴을 붉히며 허둥지둥 대는 것도 신기했던 탓이었다.

의도치 않게 분위기를 환기한 것은 다행이지만, 밀리안은 다시 이런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더 신경을 쓰며 회의를 이어갔다. 그녀를 바라보지 않기 위해 한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면서. 붉어졌던 얼굴은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지만, 동그란 귓불은 아직 열기가 가시지 않아 옅은 분홍색을 띠었다.

클레이는 그런 밀리안을 느긋하게 감상했다. 아침에 그에게 섹시하다고 했던 말은 진심이었다. 제 아래에서 울 때도 야하고 좋았지만, 저렇게 말끔한 정장을 입고 일을 하는 모습도 섹시했다. 단정한 옷 아래 어떤 속옷을 입고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일까. 하지만 그게 아니었더라도 그녀의 감상은 변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 같아선 아예 자신의 저택에 들여앉히고 싶은데, 너무 궁지에 몰아도 안 된다는 벤틀로의 조언에 따라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로 복귀한 밀리안은 사무실 내에서 되도록 자리에 앉아 있었고, 피치 못해 이동해야 하면 몸을 바짝 긴장한 채 걸었다. 어떻게든 돌아가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여 클레이는 블라인드도 내리지 않은 채 밀리안의 모습을 즐겁게 감상했다. 고집을 부리는 모습마저 귀엽게 느껴져 큰일이라고 혀를 내차면서.

복사해놓은 그의 핸드폰으로 친모의 메시지가 왔다는 걸 알고 있는데 밀리안은 생각보다 멀쩡했다. 분명 상처를 받아 힘들어할 거라고, 조금 복잡한 마음으로 그에게 모르는 척 메시지를 보냈다. 괜찮다고 답장이 왔지만, 밀리안은 항상 괜찮다고 하는 남자여서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괜찮다던 말이 정말 진심이었는지, 밀리안의 안색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는 밀리안의 얼굴에서 빛이 난다고 느꼈다. 단정하게 허리를 세우고, 아무렇지 않게 걷고, 사람들 앞에 서서 흐름을 주도하고 있지만 클레이는 저 남자가 얼마나 음탕한 속옷을 입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나 야하게 우는지도. 모두 그녀만 알고 있는 밀리안의 비밀이었다.

아마도, 아무런 계기가 없었더라도 그녀는 분명 언젠가는 밀리안을 잡았을 것이다. 사실 그에게 본격적인 관심이 가지 않을 때조차 저 무뚝뚝한 남자가 제 아래에서 울며 신음하면 어떤 모습일까, 가끔 호기심이 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냥 짧게 스쳐 지나간 호기심일 뿐이었다. 상대가 부족한 것도 아니었고, 제 곁에서 가장 오래 머문 비서를 건드리는 건 손해라고 생각했으니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손 놓고 있던 시간이 손해가 되었지만.

‘예뻐진 건 좋은데, 벌레가 좀 끼는군.’

클레이는 다소 과할 정도로 열정적으로 밀리안에게 어필하고 있는 알파를 주시했다. 예쁜 얼굴이었지만, 자신에게 비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는 밀리안이 생각보다 얼굴을 따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간혹 자신에게 넋 빠진 얼굴로 멍하게 볼 때가 있어서. 오늘 아침에도 마찬가지였다.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제 몸을 보고 흥분해서 발기한 밀리안이 무척 사랑스러웠다.

그런 자신을 두고 밀리안이 저 여자에게 눈을 돌릴 리는 없다고 확신하고 있지만, 그건 그거고 밀리안에게 벌레가 끼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해충은 빨리 없애는 게 좋다. 사업에 개인적인 감정을 끼워 넣는 건 그다지 선호하는 편은 아니지만, 실적이 부실한 계열사라 별로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지 않았다. 클레이는 태블릿에 다소 냉정한 평가를 남겼다.

* * *

회의는 점심을 지나쳐서 끝이 났다. 클레이는 제 곁에서 걷는 밀리안을 가만히 바라봤다. 낮고 진중한 목소리로 회의를 복기하고 있던 밀리안은 그녀의 시선을 느끼고 말을 멈췄다. 그는 티가 날 정도로 그녀를 바라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특히 시선을 아래로 내리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것도 귀엽기 짝이 없었다. 회의 때 잠깐 장난을 친 이후 계속 이 상태였다. 순진하기도 하지. 아침에 그녀의 아래를 하염없이 보길래 살짝 장난한 건데 남자는 숙맥처럼 굴었다. 하긴, 이런 장난을 한번 쳐보겠다고 속옷을 입지 않은 자신도 웃기긴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이런 게 사내연애를 하는 맛이지. 클레이가 작게 웃었다.

“하실, 말씀이라도…….”

“딱히 불편해하지 않는 것 같아서.”

“뭐가……, 말입니까?”

클레이는 마치 말을 걸어주길 기다렸다는 듯 즐거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뜬금없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 되묻던 밀리안은 클레이의 묘한 눈빛을 보고 불길한 기분을 느꼈다.

“속옷, 벌써 익숙해졌어?”

“……성희롱입니다, 사장님.”

“고소하라니까?”

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는 은근히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닿을 듯, 말 듯 애매한 거리가 더 신경이 쓰였다. 게다가 일을 하며 잊고 있었던 속옷의 야릇한 감촉이 그녀가 언급함으로 인해 예민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클레이 디어는 속옷을 입지 않았다. 다리를 바꿔 꼬면서 살짝 보인 짙은 금색의 음모와 그 사이로 드러난 붉은 살점이 아직도 생생했다. 등줄기가 선득하게 곤두섰다. 마른 침을 삼키는데 계속 목이 마른 상태로 있었던 터라, 살짝 통증마저 느껴졌다. 밀리안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꼭 애원이라도 하는 듯한 느낌마저 들 정도로 간절했다.

“다, 다른 사람이 있을 때는 이러지 않으시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

“화났어?”

“아니요. 사장님은…… 원래 이런 분이시니 제가 포기하는 편이 낫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밀리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귓가가 은은하게 붉어진 것까지는 감출 수가 없었다. 당황하면 저렇게 굳어진다. 예전에는 몰랐던 습관을 일주일 사이에 익힌 클레이는 먹음직스럽게 익은 동그란 살점을 핥듯이 바라봤다. 조금 더 건드려볼까 유혹이 살짝 들었지만, 그녀는 친모에게 악의가 담긴 메시지를 받은 그를 너무 괴롭히고 싶지는 않았다. 악어의 눈물 같은 마음이었지만, 나름대로 진심이었다.

“아까 핸드폰을 보는 표정이 별로 좋지 않던데,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은 거라면 그렇게 툭 치면 눈물을 흘릴 것 같은 눈을 하지 말아야지.’

항상 처연한 느낌이 든다고 생각은 했지만, 실제로 그의 모친이 그에게 보낸 메시지를 직접 봤을 때의 기분은 생각보다 더 안 좋았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잠깐 그의 마음을 외면하는 것 정도는 괜찮다고 여겼다. 잠깐의 혼란함이 지나면 그 이상으로 예뻐해 주려고 했다.

차라리 보지 않는 게 나았으려나. 그녀는 오늘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을 밀리안에게 약간의 선물을 주기로 했다.

“아침에 대니얼과 통화를 했는데.”

“……?”

“그 ‘약’말이야. 점심때 먹어야 하는 약. 약간의 변경이 생겨서.”

클레이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 말에 밀리안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 누가 듣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지만, 뒤를 따라오는 경호원은 조금 거리를 벌린 채였다.

소변을 통해 노폐물을 배출시키는 약을 항상 클레이가 제어한 것은 아니었다. 혼자 할 수 있으면 더 이상 관여하지 않겠다고 기회를 몇 번 주었지만, 밀리안은 혼자서 삼십 분을 견디지 못했다. 그 뒤로 다시 클레이의 제어하에 약을 먹었다. 약이 정말 효과가 좋다는 건 점점 가벼워지는 몸으로 체감했기 때문에 일부러 이상한 약을 먹인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래도 소변을 배출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싫었다.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이 하락하는 기분이어서 빨리 이 약을 먹는 기간이 끝나기를 바랐다. 그런데 자신의 실수로 기존의 일주일에서 일주일이 더 추가되었는데 다시 변경이 생겼다는 말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무슨 문제라도…….”

“나쁜 건 아니야. 너에게는 오히려 좋은 소식이지. 혈액 검사가 꽤 좋게 나왔나 봐. 약의 복용을 하루에 한 번으로 줄이라고 하던데.”

“그게 정말, 입니까?”

밀리안의 눈이 커졌다. 그래도 완전히 믿을 수가 없는지 의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살짝 기분이 상해 거짓말이라고, 당장 올라가서 약을 먹일 거라고 말을 철회하고 싶을 정도로 밀리안의 눈은 경계심이 가득했다. 딱히 나쁜 짓을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밀리안은 그녀가 항상 나쁜 짓을 한다는 듯이 굴었다. 속이 씁쓸해졌다. 하지만 기왕 주기로 한 선물을 도로 거둘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못 믿겠으면 대니얼에게 전화해서 확인시켜줄까?”

“아니요. 그런 거로 거짓말을 하실 분은 아니니까요.”

거짓말하지 마.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면 아까 그 의심은 뭐냐고 저 무뚝뚝한 얼굴을 탈탈 흔들고 싶었다. 클레이의 눈이 살짝 좁혀졌다.

“그렇게 좋아?”

“……네.”

살짝 죽었던 안색이 다시 살아났다. 정말 좋은지 입술의 끝이 올라가 살짝 경련하고 있었다. 너무 좋아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참는 듯이. 클레이는 자신의 큰 즐거움을 포기한 아쉬움을 밀리안의 얼굴을 보며 달랠 수 있었다. 그래도 속이 조금 쓰리긴 했지만 잘 한 것 같다. 그래, 그렇게 몰아쳤으니 이쯤 되면 사탕을 줄 때가 되긴 했다.

사실 일주일의 기간이 더 늘어난 것도 의사인 대니얼을 이용해 사기를 친 것에 가까웠으니 그렇게 아까워할 이유가 없었음에도 클레이는 마치 손해라도 본 것처럼 아쉬워했다.

“오후 스케줄은?”

“점심에 게빈 스튜어트 님과 식사 약속이 있습니다.”

“지금 이동해야 하나?”

“아니요. 한 시간 정도 여유가 있습니다.”

“……그래?”

시계를 확인하는 밀리안을 보는 클레이의 눈에 묘한 빛이 돌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