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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내내 기분이 좋아 보였던 사장, 클레이 디어의 기분이 급격하게 하락해 온 회사가 긴장감에 휩싸였다.
첫 희생양은 기획팀의 팀장인 제이크 밀런이었다. 클레이 디어는 기획서를 휙휙 넘기며 제이크 밀런이 가져온 기획서의 맹점을 짚어나갔다. 서리가 일정도로 차가운 목소리였다.
“의도는 좋은데, 시장은 어떻게 형성할 생각이지?”
“그건.”
“변화하는 시대를 선도한다는 건 좋지. 그런데 이게 과연 시장에서 먹힐까? 마케팅은 어떤 식으로 할 예정인지에 대해서는 기획서에 안 나와 있어.”
“…….”
“왜 말이 없어? 확신도 하지 못할 기획을 가져왔다는 건 아니겠지, 설마?”
온 임원들이 모인 회의장은 침묵만 감돌았다. 상단에 서서 새로운 프로젝트에 대해 브리핑하고 있던 제이크 밀런은 사납게 몰아치는 클레이 디어의 공격에 눈만 깜박거리다 벽 쪽에 서 있는 밀리안을 애처롭게 바라봤다.
‘기분이 좋으시다며?’
‘…….’
밀리안은 제이크 밀런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도 클레이 디어가 갑자기 왜 이렇게 사납게 구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제이크 밀런이 신규 프로젝트에 대한 브리핑을 들을 때만 하더라도 밀리안은 저런 기획서를 만들고서 왜 그렇게 불안해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듣기에는 굉장히 획기적이었고, 마케팅만 잘한다면 시장에 잘 먹힐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클레이 디어는 제이크 밀런의 기획서에 숨은 맹점을 날카롭게 짚어냈다. 평소라면 제이크의 성격을 아니 적당히 시간을 주며 대답을 기다렸을 텐데, 지금은 거의 몰아치는 수준이었다.
밀리안은 간절히 도움을 요청하는 제이크의 시선을 더는 외면하지 못하고 자신의 앞에 앉은 클레이 디어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장님, 잠깐 휴식 시간을 갖는 게 어떻겠습니까?”
“……뭐?”
“벌써 두 시간 째 회의가 길어지고 있어서 다들 지친 것 같습니다.”
“…….”
회의의 텐션을 조율하는 것도 밀리안의 업무 중 하나였다.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감이 간혹 좋을 때도 있지만, 지금은 역효과만 낳고 있었다.
서슬이 퍼렇던 녹색 눈동자가 밀리안에게 닿고 슬쩍 누그러졌다. 그 아름다운 긴 눈매를 살짝 찌푸리고는 클레이 디어가 다시 정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30분간 휴식.”
그 말을 하고 클레이 디어가 가장 먼저 회의실을 나섰다. 회의실에 남은 사람들이 긴장된 몸을 풀기 위해 스트레칭을 하기도 하고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고맙다는 눈인사를 하는 제이크에게 살짝 고개를 숙인 밀리안은 클레이 디어의 뒤를 따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실 유리문을 열고 나오자 클레이 디어가 맞은 편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순간 밀리안이 몸을 움찔 떨고 한 발 뒤로 물러서자 여자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죄지었어?”
“아니요, 조금 놀라서……. 왜 여기 계십니까?”
“널 기다리고 있었지. 당연한 것 좀 묻지 마.”
여자가 짜증이 난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왜 이러지? 갑자기 급변한 사장의 심리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밀리안? 왜 안 나가고 거기 서 있어?”
“―!”
“뭐야, 왜 그렇게 놀, ……사장님.”
제이크 밀런은 밀리안의 어깨를 그 거대한 팔로 걸치려다 싸늘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클레이 디어를 발견하고 어색하게 팔을 아래로 내렸다.
“그렇게 여유롭게 굴 시간이 없을 텐데?”
“하, 하하…….”
“삼십 분간 시간을 줬으니 회의가 재개되면 내 질문의 답부터 제대로 해야 할 거야.”
클레이 디어는 평소에 이렇게까지 감정적인 말을 하는 상사가 아니었다. 오늘따라 정말 이상했다. 바짝 굳어버린 제이크를 안타깝게 바라본 밀리안은 우선 그녀를 이곳에서 옮기는 게 모두에게 좋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사장님, 자리를 옮기시죠.”
클레이 디어가 계속 이곳에 서 있으면 모두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도 못하고 회의실에 갇혀 있을지도 모른다. 밀리안이 이동하자고 말을 했지만, 여자는 여전히 그의 뒤에 서 있는 제이크 밀런을 보고 있었다.
“사장님, 제발.”
밀리안이 재차 애원하듯 권유하자, 그제야 클레이 디어가 그를 바라봤다. 선명하던 녹색 눈동자에 깊은 그림자가 졌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기분이 나빠 보여 밀리안은 입을 다물었다.
분명 세 시간 전만 하더라도 클레이 디어는 이렇지 않았다. 그에게 일을 몰아줄 때도 즐거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데 대체 왜? 기분 나쁠 만 한 일이 있었던가? 중간중간 자리를 비웠던 적이 많았던 터라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그랬다면 비서실에서 그 낌새를 미리 알지 못했을 리 없다.
대체 왜? 무슨 일이 있었길래……? 밀리안은 여자의 기분이 상할만한 계기를 떠올릴 수가 없어 당혹스러웠다.
클레이는 멍청하게 서 있는 제이크 밀런을 내버려 둔 채로 밀리안을 비어있는 작은 회의실로 끌고 들어갔다.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잠가버리자 밀리안의 얼굴이 움찔 굳었다.
“이걸 확 가둬둘 수도 없고.”
“…….”
“농담이야.”
여자는 언제 표정을 굳혔냐는 듯 달콤하게 웃었지만, 전혀 농담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순간 등골이 바짝 설 정도로 음습한 목소리는 진심이 가득해 그대로 도망치고 싶을 정도였다. 밀리안은 저릿한 손을 쥐었다 풀며 긴장을 덜어내려고 노력했다. 그때 여자가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며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웃어 봐.”
“네?”
“웃어 보라고.”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웃어 보라는 게 그렇게 어려운 주문이던가?”
“……제가 웃는다고 하더라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게 중요해?”
여자의 매끄러운 미간에 선이 깊게 팼다. 밀리안은 그 모습을 보고 말실수를 했다는 걸 인지했지만, 자꾸 자신에게 이상한 걸 시키는 여자의 주문에 반항심이 올라갔다. 이런 식으로 자극하면 안 되는데…….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 밀리안. 순순히 말을 듣고, 여자가 되도록 빨리 질릴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잖아.
밀리안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하라는 대로 했는데 클레이의 얼굴은 더 싸늘해져만 갔다. 억지로 웃는 것도 힘든 일이라 밀리안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대체 제게 뭘 원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클레이가 말을 하다가 돌연 입을 꾹 다물었다. 본인조차도 자신이 왜 이러는지 모르는 듯한 얼굴이어서 밀리안은 이 이상한 상황을 빨리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침착하게, 최대한 그녀의 기분을 맞춰서 엎드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빨리 질려주세요. 어차피 가지고 노는 것이지 않습니까.”
“뭐?”
입밖에 내뱉자마자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가 그 아름다운 눈을 크게 뜬 채 자신을 멍하게 바라보는 모습을 보니 더 그랬다.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 계약이 끝날 때까지 아무 생각도, 클레이 디어의 심기에 거슬리는 짓은 하지 않기로 했잖아, 밀리안.
하지만 한번 터져나간 입은 멈출 줄을 몰랐다.
“공과 사는 구별하자고 하신 것은 사장님이십니다. 업무 중에 이러지 마십시오.”
“하.”
“솔직히…… 왜 이러시는지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자신은 그녀가 하라는 대로 했다. 여자가 아무리 그에게 강압적으로 굴어도, 원하지 않는 쾌감을 강요하며 그를 굴복시켜도 반항하지 않았다. 그래야 했으니까. 그의 약점을 쥐고 흔들어 대서. 그래서 짐승 같은 꼴로 여자의 아래에서 울었다.
클레이 디어는 그런 여자였다. 제게 빠져서 허우적대는 오메가들을 몰아쳐 아예 진창으로 빠져버리게 만드는 잔인한 알파. 슬슬 그런 짓이 질리던 차에 베타라고 생각했던 자신이 오메가라는 사실을 알았으니 가지고 놀 것이 생겼다고 즐거워하는 게 분명했다. 꼼짝도 하지 못할 약점까지 잡았으니 얼마나 손쉬운 먹이일까.
대체 언제 질릴까. 아직 남은 날이 너무 많이 남아 있는데, 벌써 지쳤다. 오락가락하는 여자의 심리를 알고 싶지도 않았다.
무슨 생각인지 말없이 그를 바라보던 여자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러지 마.”
“뭘, 말입니까?”
“울 거 같아.”
“제가요?”
감히 누구 앞에서. 마음이 차가워서인지 손마저 시린 것 같다.
* * *
제멋대로 토해내고 나니 기운이 쭉 빠졌다.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어차피 이해해주지 않을 사람에게. 밀리안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위로 쓸어올렸던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시야를 가렸다. 하지만 가려진 시야에서도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여자의 구두가 보였다. 아름답고, 날카로운 힐이 딱 여자와 닮아있었다.
이렇게 제멋대로 굴었으니 그 자존심 강한 여자는 분명 기분이 상했으리라. 깊은 한숨과 함께 밀리안은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그렇게 눈을 감고 여자의 말을 기다리는데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삼십 분간 휴식이었으니, 곧 다시 회의실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게 초조하게 여자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아래로 떨어진 그의 얼굴에 여자의 손이 닿았다. 여자의 체온이 새삼 뜨겁게 느껴졌다. 밀리안은 여자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가 눈을 크게 떴다. 화가 났어야 할 여자의 표정이 묘하게 풀려있었다.
“내가 마음대로 행동하는 게 싫었어?”
“……당연한 거 아닙니까?”
싫다고 하면서도 제대로 느끼고 있길래 말만 싫다고 하는 줄 알았다며 여자가 어이없는 말을 했다. 가슴이 답답하게 가라앉았다. 꼭 얹힌 것처럼 꽉 막혀서 숨쉬기가 힘들 정도였다. 밀리안은 여자를 밀어 이 답답한 공간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반쯤 몸을 빼냈을 때, 여자가 그의 팔을 꽉 잡았다.
“키스해봐.”
“네?”
“키스하라고. 내가 싫은 행동을 할 때마다, 네가 키스해. 그럼 멈춰줄게.”
“무슨…….”
대체 뭐라고 하는 거지? 밀리안은 환하게 웃는 여자의 얼굴을 보고 더 혼란스러워졌다. 하필 이럴 때마저도 자신을 가지고 장난치려고 하는 여자에게 화가 치밀었다.
“장난하지 마십시오.”
“장난? 내가? 내가 지금 헛소리를 하는 것처럼 보여?”
여자가 그를 향해 한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여자의 눈이 강렬했다. 찬연하던 녹색 눈동자가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 밀리안은 순간 숨이 턱 막혀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여자는 그가 뒤로 가는 대로 따라붙었다. 더 이상 뒤로 갈 곳이 없었다. 밀리안은 벽에 등을 댄 채 자신 앞에 바짝 서 있는 여자를 보고 몸을 떨었다.
‘하…….’
고분고분 군다 싶더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클레이는 밀리안이 속내를 완전히 풀어낸 것이 오히려 만족스러웠다. 그녀는 그의 입술을 바라봤다. 영양이 부족한 것으로도 모자라 매번 깨물어대서 까슬한 각질이 올라 있었던 입술은 그녀가 공들여 관리해 부드럽기만 했다. 그 입술을 손으로 천천히 쓸었다.
“날 길들이고 싶지 않아? 날 네 마음대로 길들여서 휘둘러 봐. 기꺼이 휘둘려 줄 테니까.”
그 열쇠는 고작 키스 한 번이면 된다고, 클레이는 눈만 깜빡이고 있는 밀리안을 향해 속삭였다.
밀리안은 이제야 그녀의 말이 진심이라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버럭 성질을 부리더니 이제는 당황한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녀는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서.”
“이, 이러지…….”
“난 진심이야. 정 믿기 힘들면 한번 시험이라도 해보는 게 어때?”
“…….”
“이런 기회는 쉽게 오는 게 아니야, 밀리.”
그녀는 제 목줄을 하나 만들어 밀리안의 손에 쥐여줬다. 오로지 밀리안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클레이는 머뭇거리다 제게 다가오는 밀리안의 얼굴을 보며 눈을 감았다. 제이크 밀런에게 끌려가면서 지었던 밀리안의 붉게 달아올랐던 얼굴도,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미소짓던 밀리안의 얼굴도 이 순간만큼은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았다.
맞닿은 입술에서 짜릿한 쾌감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