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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섹슈얼-52화 (5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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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근을 나갔다가 돌아온 레이는 슬쩍 몸을 맥시 쪽으로 기울이며 말을 걸었다.

“요즘 사장님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아요?”

“…….”

해맑은 레이의 목소리에 맥시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넌 자리를 비워서 몰랐겠지만, 아까 사장님 기분은 완전 저세상을 넘고 있었단다. 맥시는 일하는 척 서류를 보다 눈동자만 살짝 돌려 사장실을 훔쳐봤다. 사장이 입가에 미소마저 지은 채 일을 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아름다운 여자가 기분 좋게 웃기까지 하니 빛이 날 정도였다. 분명 좋은 일인데, 갑자기 저러니 기분이 찜찜했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지? 분명 회의 때만 해도 눈도 못 마주칠 정도였는데, 삼십 분의 휴식을 끝내고 다시 모이니 그렇게 화사할 수가 없었다.

맥시는 무표정한 얼굴로 서류를 보는 밀리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대체 밀리안은 무슨 마법을 부린 걸까? 함께 돌아온 밀리안의 표정은 전과 다름이 없어서 더 의아했다. 물론 길어지리라 생각했던 회의는 그 뒤로 순풍을 탄 배처럼 순탄하게 순항했고, 모두가 만족한 결과를 내고 끝났다. 가련하리만치 덜덜 떨던 기획실장 제이크 밀런도 마찬가지였다.

사장님과 관련된 사항이니 함부로 묻기도 어렵다. 맥시는 아쉬운 마음을 접어두고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도 블라인드는 좀 내려줬으면 좋겠는데.”

“눈요기는 좋잖아요. 오늘따라 완전 번쩍번쩍! 아, 맞다. 요즘 사장님 스캔들도 없어서 SNS에서 난리에요. 남자를 만나지도 않고 회사와 집만 오간다고. 드디어 정신 차렸냐고 다들,”

“레이 입조심.”

“핫. 아차차. 죄송해요.”

맥시의 경고에 레이가 화들짝 놀라 손으로 입을 막았다. 쯧쯧. 저러다 사장에게 걸리면 아주 작살이 날 텐데 그걸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계속 이랬다. 얘가 여기서 일 년은 버틸 수 있을까? 맥시는 레이의 앞날이 심히 걱정됐다.

“레이, 넌 정말 애가 긍정적이야.”

“지금 욕한 거죠?”

“에휴.”

“맥시이이.”

“이제 일이나 해.”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기도 전에 벨이 울렸다. 사장실에서의 호출. 맥시와 레이는 자신들의 대화가 들렸나 바짝 긴장하다가 전화를 받은 밀리안이 사장실 쪽으로 가는 모습을 보고 한숨을 돌렸다.

그가 문을 열기 무섭게 사장실의 블라인드가 까맣게 내려갔다. 어떻게 보면 평소와 다름없는 나날이었다.

* * *

입술이 부었다. 붓다 못해 이제는 아릿할 정도였다. 밀리안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싫은 행동을 할 때마다, 네가 키스해. 그럼 멈춰줄게.’

분명 화를 내리라고 생각했는데, 여자는 그의 생각과 전혀 다른 표정으로 상상도 하지 못했던 말을 했다.

‘날 길들이고 싶지 않아? 날 네 마음대로 길들여서 휘둘러 봐. 기꺼이 휘둘려 줄 테니까.’

길들인다고? 내가, 그 클레이 디어를? 말도 안 된다.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하지만 그가 입을 맞출 때마다 여자가 짓던 표정이 떠올랐다.

“…….”

밀리안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만지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황급히 손을 떼고 고개를 저었다. 일시적인 행동일 것이다. 그게 얼마나 갈까. 밀리안은 오 년이 넘게 클레이 디어의 곁에 있으면서 그녀가 매우 충동적인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자신을 강제로 옆에 둔 것도 그런 여자의 충동적인 성격이 만들어 낸 결과물 중 하나였다.

기대하면 안 된다. 또한, 오늘처럼 속마음을 뱉어내는 일도 일어나선 안 된다. 밀리안은 자신이 했던 행동을 자책하고 반성했다. 다음에도 이렇게 쉽게 넘어가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었다. 한번 마음을 놓으면 계속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게 되는 지름길이었다.

똑똑-

“안에서 뭘 하길래 이렇게 오래 있어?”

“―!”

언제 문을 열고 지켜봤던 걸까. 클레이 디어는 검은색 가운을 느슨하게 걸친 채 문에 기대어 그를 보고 있었다.

“안 자?”

여자가 천천히 그에게 다가와 허리에 손을 감았다. 거울을 통해 여자의 나른하게 풀어진 눈과 마주쳤다. 자연스럽게 고개가 돌아갔고, 여자와 입술이 닿았다. 허리를 감고 있던 매끄러운 손이 그의 허리와 허벅지를 쓸었다.

짧은 키스가 끝나자 여자가 낮게 웃었다.

“이번에는 뭐를 원하는데?”

“……네?”

“키스했잖아. 원하는 게 있는 거 아니었어?”

“―!”

머리가 하얗게 비었다. 그제야 자신이 먼저 입을 맞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뭘 말해야 하지? 아니, 그보다 정말 자신이 그런 짓을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가 멍하게 입만 벌리고 있자 클레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그냥 키스한 거야?”

정말? 여자는 기분 좋은 듯 온 얼굴에 미소를 담고 그의 얼굴 여기저기에 입술을 비비며 속삭였다. 밀리안은 그런 여자에게서 벗어나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고, 그렇지 않다고 필사적으로 말했다.

“그래? 그럼 바라는 게 뭐지?”

부드럽게 선을 그렸던 여자의 입술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히려 조금 전보다 더 짙게. 밀리안은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머리를 굴렸다.

“그, 허락을 받고 들어오세요. 아니, 되도록 제가 안에 있을 때는 밖에서 기다려주십시오.”

“흐응. 왜? 뭐 부끄러운 거라도 하고 있었어?”

“아니요!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뭐, 좋아. 당신도 사생활이 필요할 테니까.”

여자는 그의 관자놀이에 입술을 꾹 누르고 환하게 웃었다. 다행히 임기응변이 통했지만, 밀리안은 자신이 한 행동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바로 전에 조심하겠다고 그렇게 다짐해 놓고 대체 무슨 짓을…….

클레이의 손에 이끌려 침대에 누운 뒤에도 쉽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자신의 등 뒤에 붙은 뜨거운 체온과 그의 허리를 옭아맨 매끄러운 손의 감각에 어느새 익숙해졌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여자가 무서웠다. 차라리 오메가를 멋대로 휘두르는 게빈 스튜어트가 더 나을 것 같았다. 밀리안은 여자가 잠결에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입술을 깨물었다.

* * *

클레이는 눈을 꾹 감고 덜덜 떨며 제게 입을 맞추는 남자의 얼굴을 보며 웃음을 삼켰다.

‘아, 진짜 귀엽게 구네.’

밀리안이 밤새 뒤척이는 것을 그녀가 모를 리가 없었다. 자는 척하며 그의 이름을 불렀더니, 남자가 움찔움찔 몸을 떨었다. 클레이는 그런 밀리안의 반응에 웃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했다. 마주 보며 자는 게 아니어서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가슴을 덮을 손에 남자의 심장 박동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녀가 내민 목줄을 쥐고 어떻게 사용할까 고민을 하는 것일까? 하지만 남자는 그걸 제대로 활용할 정도로 약지 못했다. 그래, 고작 속옷 하나 입지 않겠다고 제게 덜덜 떨며 입 맞추는 고지식한 남자를 보라지. 제 손에 들린 게 뭔지도 모르고.

클레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밀리안을 길들이는 방법은 조금 수정됐지만, 큰 그림 아래에서는 변한 것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빠른 지름길을 발견했다.

밀리안의 요청대로 클레이는 그를 위해 만들어 놓은 레이스 속옷 대신, 남성용 속옷을 입혀주었다. 이런 것 하나에 눈에 띄게 밝아진 얼굴에 클레이는 그의 넥타이까지 꼼꼼하게 매어주며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똑똑- 벤틀로가 문을 두드렸다.

“식사 준비가 끝났습니다. 내려오시지요.”

“내려가자, 밀리안.”

“네.”

클레이는 밀리안의 허리를 한 손으로 감아 부드럽게 이끌었다. 오늘은 밀리안이 많은 것을 알게 되는 날일 것이다. 상대에게 길들여지고 있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밀리안은 먹어도 줄지 않는 음식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에 온 이후 항상 평소에 혼자 먹던 것보다 많이 먹어야 했지만, 오늘은 유독 양이 많은 느낌이었다. 치즈와 스테이크가 듬뿍 담긴 샐러드와 갓 만든 바삭한 크루아상, 부드러운 크림 수프. 고기와 야채가 큼직하게 잘린 스튜까지. 제 몫의 음식을 어떻게든 먹어치우려고 했지만, 더 먹으면 오히려 일에 방해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가 포크를 내려놓으려고 하자 클레이가 그 모습을 보고 엄격한 표정을 지었다.

“한 조각도 빠짐없이 다 먹어야 해.”

“…….”

“너무 말랐어. 건강해지려면 열심히 먹어야지.”

“하지만 이미 배가 차서,”

“적게 먹는 버릇이 들어서 그래. 조금씩이라도 양을 늘리려고 노력해보도록 해.”

클레이는 아예 그를 향해 음식을 찍은 포크를 들이밀었다. 밀리안은 자신이 먹겠다고 난처한 얼굴로 거절했지만, 여자는 내민 손을 거두지 않았다.

“아―.”

재밌는 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여자의 얼굴이 즐거워 보였다. 밀리안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식당에는 시중을 들고 있는 벤틀로 외에는 없었다. 보는 눈을 핑계 삼아 피할 수도 없었다. 밀리안은 억지로 입을 열어 여자가 내민 음식을 받아먹었다. 민망함에 입술이 떨렸다.

“한입 더.”

여자는 그가 억지로 씹어 목에 넘기기도 전에 다시 포크를 내밀었다.

“사장님. 이제 그만,”

“혼자 두면 영원히 안 먹을 것 같은데?”

“제가, 제가 먹겠습니다.”

“밀리. 내 무릎에 올라와서 먹을래?”

“……네?”

여자는 아예 턱에 손을 괴고 그를 향해 몸을 돌린 채였다. 그녀는 그를 향해 자신의 무릎을 툭툭 치며 한쪽 팔을 벌렸다. 검은색 슈트를 입은 여자의 몸은 그보다 연약해 보였지만, 밀리안을 쉽게 안아 들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세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자의 무릎에 앉아 음식을 받아먹고 싶지 않았다. 이건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수치심을 일으켰다.

“아니요. 싫습니다.”

“네가 싫어하니까 더 하고 싶은데.”

“먹겠습니다. 다 먹을 테니…….”

“아니, 난 진심이야. 이리 와.”

클레이가 눈을 휘며 웃었다. 진심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농담일 때와 진심일 때의 눈빛이 다르니까. 밀리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여자는 한다면 했다. 그가 가지 않는다면 억지로 그를 끌어다 앉힐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때 여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싫은 행동을 하면 키스해. 그럼 멈춰줄 테니까.’

아까도 그가 입을 맞춰 그 이상한 속옷을 입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그럴까. 확신은 없었지만, 이 상황을 피하는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밀리안은 마른침을 삼켰다.

“―!”

그가 입술을 맞대자 여자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아까처럼 부드럽게 휘는 것까지 본 뒤 밀리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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